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박경용 이채문 여필순 이현철
경북대학교 SSK다문화와 디아스포라연구단
도서출판 책과세계
재외한인 구술생애사 총서
9
- i -
서 문
경북대학교 SSK ‘다문화와 코리안 디아스포라연구단’ 일행은 구정
을 지낸 2013년 2월 19일부터 25일까지 일주일간 중국 조선족의 
새로운 이주지인 중국 칭다오를 찾아 나섰다. 방문 시기를 구정 연
휴가 끝나는 직후로도 생각해보았지만, 한국보다 연휴를 길게 사용
하는 특성상 고향 간 칭다오 조선족들이 아직까지 귀환하지 않을 수
도 있다는 판단에서 한 주를 더 늦추었다.
연구단 일행은 김해공항에서 비행기로 약 1시간 50분 만에 서해
를 건너 산동반도에 다다랐다. 절기상으로는 아직 겨울이지만 칭다
오의 기온은 현지조사 기간 내내 비교적 포근하여 조사활동을 하기
에 어려움이 없었다.
이번 현지조사의 핵심은 조선족의 중국 내 새로운 이주공간을 찾
아가 이들의 이주와 적응 및 생활문화를 이해하는데 있다. 칭다오는 
중국의 조선족이 제2의 디아스포라를 경험한 대표적인 지역 중의 하
나로서 20만 명이 넘게 이주하여 살고 있다. 중국 조선족은 칭다오 
외에도 동일한 산동성 내의 위해(威海), 연대(烟臺)를 비롯하여 북
경(北京), 상해(上海), 천진(天津), 대련(大連) 등지에도 상당수 이
주해 있다. 그 중에서도 칭다오를 연구지역으로 정한 것은 제한된 
연구기간과 연구비로 인해 모든 곳을 조사하기 어려우므로 대표성을 
지닌 이곳을 우선적으로 살펴봐야 하기 때문이다. 조선족의 중국 내 
재이주 현황을 살펴보면, 북경지역 3-4만 명, 상해지역 2-3만 명, 
연대 및 위해지역 10만 명, 칭다오지역 20만 명 등이다.
첫날 오전 10시쯤 김해공항을 이륙해서 기내식을 먹은 후 눈도 
붙일 시간도 없이 곧바로 칭다오공항에 도착되는 것을 보고 칭다오
- ii -
가 한국과 가깝다는 것을 실감했다. 공항에 도착해서는 연구단 공동
연구원 중의 한 명인 연변대학 여필순 교수와 합류했다. 여교수는 
조선족으로서 중국 내에 거주하고 있지만, 한국에서 출발한 연구진
보다 두 배나 되는 더 먼 거리를 달려와야 했다. 여교수의 안내로 
늦은 점심을 동태탕으로 때운 후 숙소로 가서 여장을 풀었다. 조선
족이 밀집해 거주하는 칭다오시 성양구(城陽區)에 있는 한 아파트 
단지 내 조선족 민박집이었다. 우리 연구진은 이곳을 거점으로 해서 
칭다오의 조선족들을 하나둘씩 차례로 만났다.
조선족 신흥 이주지 칭다오는 인구 700만 명의 부성급 도시로서 
중국 내 7개 계획단독도시 중의 하나에 속한다. 그 중요성으로 인해 
경제부문은 중앙정부의 관할 하에 있으며, 산동성 내에서 동영시 다
음으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칭다오시’라고 칭할 때는 보통 인구 
280여만 명 규모의 시가지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넓은 의미의 칭다
오는 시가지를 포함하는 7개의 구(區)와 시(市)로 구성되어 있다. 
전자는 시남구(市南區), 시북구(市北區), 사방구(四方區), 노산구(嶗
山區), 성양구(城陽區), 황도구(黃島區), 이창구(李創區)  등이다. 
후자는 시가지 주변을 외연하고 있는 즉묵시(卽墨市), 교주시(膠州
市), 교남시(膠南市) 내서시(來西市), 평도시(平度市) 등이다. 이 중 
한국인과 조선족은 한국 기업이 입주해 있는 성양구, 이창구, 황도
구, 교주시 일대에 집거한다.
산동반도 칭다오에 한국 기업이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1989년 한
중 수교 직후부터다. 한국 기업의 칭다오 진출 이전에는 ‘홍콩-상해
-북경’ 항로를 이용하여 광동성의 광주지역으로 섬유나 가방 관련 
업체가 진출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한국-칭다오 간의 직항로가 개
설되면서부터는 지리적으로 보다 가까운 이곳이 한국 기업 진출의 
- iii -
주요지역으로 부상하였다. 칭다오로 한국 기업이 대거 몰려온 이유
는 지리적인 근접성과 저렴한 인건비를 비롯하여 양호한 투자환경, 
외자를 유치하려는 중국 당국의 정책적 지원 등이었다. 당시 한국 
기업으로서는 1987년의 이른바 ‘노동자 대투쟁’ 이후 인건비 급상승
과 노조활동 등으로 기업 환경이 나빠져 보다 나은 조건을 찾아 해
외로 눈을 돌리던 시기였다.
1990년대 초부터 차츰 진출하기 시작한 한국 기업은 1999년 무
렵 칭다오를 비롯한 위해, 연대 등 산동성 일대에 섬유, 의류, 전자, 
기계, 신발, 완구 등의 품목을 중심으로 3,461개에 이르렀다. 이 중 
칭다오에는 그 절반에 해당하는 1,688개의 한국 기업이 23.7억$를 
투자했다. 한국 기업 진출의 절정을 이룬 2006년 무렵에는 칭다오에 
2,940개에 달했으며, 이 중 단독투자 기업만도 2,582개였다. 칭다오
에 진출한 대다수 한국 기업은 원자재를 수입하여 완제품을 생산한 
다음 외국으로 수출하는 이른바 ‘가공무역’ 형태를 유지했다. 이는 
값싼 노동력을 이용한 노동집약적 경영의 이점을 살리는 방식으로서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산동지방은 역사적으로 제나라와 노나라 근거지로 거주자는 대부
분 한족으로 타 소수민족 비율은 아주 낮다. 길림성, 요녕성, 흑룡강
성 등 이른바 ‘동북3성’의 본거지에 밀집해 살던 조선족도 그 이전에
는 이곳에 많지 않았다. 중국 조선족은 ‘동포’라는 민족 동질감에 나
아가 우선 한국말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므로 한국 기업으로서도 최고
의 일꾼들이었다. 한국 경제 성장에 따른 ‘코리안 드림’은 중국 내 
조선족들로 하여금 한국으로의 돈벌이 러시와 궤를 같이 하여 중국 
내 한국 기업을 적극 찾아 나서게 한 동인이 되었다. 따라서 20만 
명에 이르는 칭다오 내 조선족의 거대한 재이주 물결은 이와 같은 
- iv -
한국 기업의 중국 내 진출 현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칭다오로의 한국 기업 진출은 자본과 물류의 이동에 사람의 이동
까지 동반한다. 한국으로부터는 우선 기업 유지와 관리를 위한 인력
이 파견된다. 기업주를 비롯하여 그곳에 상주할 핵심 관리 인력이 
들어간다. 이들은 혼자거나 아니면 가족끼리 함께 간다. 이들은 한국 
기업이 입주한 공단지역 주변에 보금자리를 튼다. 한국 기업에서 노
동자로 일하기 위해 유입되는 중국 조선족도 마찬가지로 출퇴근이 
쉬운 공장 주변지역에 거처를 마련한다. 칭다오 시가지보다는 교주
만 해안을 따라 건설된 성양공단이나 황도, 교주, 이창, 이촌 등의 
공단 주변에 조선족 집거지가 형성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칭다오로 옮겨와서 거주하기 시작한 한국인과 중국 
조선족은 1999년 무렵 각 1만 5천명과 6만 명 정도였다. 이후 한국 
기업의 지속적인 진출로 양쪽 인구도 차츰 함께 불어나 한국인 10
만 명과 조선족 20만 명을 상회한다. 산동반도 관내 칭다오 인근의 
위해, 연대 등의 도시에도 한국인 5만 명과 조선족 10만 명이 거주
한다. 칭다오만 해도 한국 기업을 중심으로 공생하는 한국인과 조선
족이 30만 명이나 된다. 이 정도 인구 규모라면 한국의 경우 웬만한 
중간 규모의 도시 하나를 이루고도 남는다. 연구진이 현지조사를 갔
던 칭다오 성양구(城陽區) 곳곳에는 한국인과 조선족이 밀집하는 
‘한인촌’이나 다름없는 공간들이 형성되어 있다. 이는 2006년의 경
우 칭다오 전체 한국 기업 2,940개 중 절반에 가까운 1,200여 개나 
되는 많은 공장이 성양공단에 입주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번 칭다오 현지조사에서 우리 연구진이 만난 조선족 들은 크게 
학자와 실업가, 자영업자, 서비스 노동자, 문화예술인, 의료인, 종교
인 등으로 나뉜다. 이들은 연령과 직업도 다양하지만 칭다오로 이주
- v -
한 시기나 출신지역도 다양하다. 일부는 1990년대 한국 기업이 칭다
오에 진출하던 초기에 이주했지만, 일부는 아주 최근에 이주했다. 초
기에는 각처 농촌의 시골 출신들이 단순 노동자로 다수 이주했으며, 
일부는 김치나 떡 방앗간 등 전통산업 부문의 자영업에도 종사했다. 
이와 같은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업에 노동자로 취직해서 돈
을 벌고자 하는 열망으로 칭다오로 이주한 점은 공통점에 속한다.
본서는 2013년에 펴낸 『칭다오 조선족 9인의 이야기』를 잇는 2
번째 구술생애사로 모두 7명의 조선족에 대한 삶의 여정을 담고 있
다. 사정상 동시에 간행되지 못했지만, 해를 넘겨서라도 세상에 빛을 
보게 되어 다행으로 생각된다.
구술자 7인은 일제 강점기 조부나 증조부가 동북3성으로 이주한 
이주 2, 3세대로 30대 3명, 40대 3명, 50대 1명씩이다. 이들 대부분
(6명)은 아래 <표>에서처럼, 한국에서 노동(최용식ㆍ조운ㆍ김호원) 
혹은 유학(조미애ㆍ이승철)하거나 한국인 사업가와 합작(홍춘식)하
는 등으로 모국과의 연계 경험을 갖고 있다. 출신지역으로는 4명이 
길림성이고 흑룡강성 2명, 내몽고 1명 등이다.
구술자들의 칭다오 이주 시기는 1999년을 기점으로 해서 대부분
은 2000년대 중반 이후다. 이들의 직업은 전문직 교수 2명 외에는 
모두 자영업들로 식당과 부동산, 미용, 유통 등 서비스업종 위주이
다. 한국 노동 경험자 3명 중 2명(최용식, 조운)은 한국 노동 이후 
고향으로 가지 않고 조선족이 다수 재이주해 있는 연해지역 도시로 
이주했다. 1명(김호원)은 칭다오 근무처에서 연수자로 파견되어 한
국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기업가 홍춘식은 할아버지가 길림성 화룡으로 이주한 2세대 조선
족으로 수학자의 꿈을 안고 길림대학과 장춘지질학원 등에서 연구와 
- vi -
강의를 한 엘리트다. 이후 기업가로 변신하여 북경, 상해, 안휘성 등
지에서 볼링공과 자전거 제조업체를 운영하기도 했다. 도중에는 자
금난으로 부도가 나서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2011년 칭다오로 
이주하여 수산물과 유류, 화장품 등의 유통업을 한국인 사업가와 합
작하는 방식으로 활발히 추진함으로써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다.
부동산 중개업자 최용식은 30여 년 동안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살아왔으며, 1999년 칭다오 이주 후에는 재정착지 조선족교회의 기
반을 구축하는데 일조하였다. 그는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소학교만 졸업하고 관정 설비 및 기계 정비 일을 하다가 1992년 이
른 시기에 한국에서 용접공으로 일하기도 했다. 1994년 대련에서 4, 
성명
출생
년도
출신
역지
직업
칭도이
주시기
한국 
관계
비고
홍춘식
1965
길림
기업가
(유통)
2011
합작
상해, 
안휘성
최용식
1958
흑룡강
자영업
(부동산)
1999
노동
대련
(1994)
조운
1975
흑룡강
자영업
(식당)
2009
노동
북경
조미애
1974
길림
교수
2006
유학
-
이승철
1977
내몽고
교수
2006
유학
-
최위
1968
길림
자영업
(식당)
2013
-
위해
(2002)
김호원
1983
길림
자영업
(미용)
1999
노동
-
<구술자 개요>
- vii -
5년 지내다가 칭다오로 이주한 후에는 목회와 부동산 중개업을 병행
하며 상당한 돈을 벌었다. 그는 이렇게 축적한 자본으로 사업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제조 공장(의류 장식품)을 설립 중이다.
30대 후반의 식당 자영업자 조운은 흑룡강성 상지시에서 고교를 
마친 후 북경을 거쳐 한국으로 가서 돈을 벌었다. 부모님과 누님 내
외를 비롯하여 결혼해서는 아내까지 온 식구들이 한국에서 일을 했
다. 그는 2차례에 걸친 10여 년간의 한국 노동으로 번 돈을 바탕으
로 1999년부터 칭다오에 정착하여 뷔페고기 식당을 운영 중이다.
1939년 할아버지가 길림성 반석으로 이주한 조미애 교수는 어려
서부터 아버지의 영향 아래 남달리 미래에 대한 개척 의지가 강하였
다. 연변대학 농학과를 마친 후에는 한국으로 유학하여 강원대학교
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경희대학교 동서의학대학원에서 포스닥 
연수까지 마쳤다. 2006년에는 청도농업대학 농학과에 교수로 임용
되어 전문직 교수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1977년 내몽고자치주에서 태어난 이승철은 본래 증조부가 연변지
방으로 이주했으나, 아버지 대에 내몽고로 재이주하였다. 고향에서 
고교까지 마친 후에는 연변대학으로 진학하여 지리학을 공부하였다. 
이후 한국에 유학해서는 강원대학교에서 관광학으로 박사학위를 취
득하고 2006년부터 칭도대학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통화농업대학을 졸업한 최위는 지금까지의 삶에서 구술자들 중 유
일하게 한국 혹은 한국인과 상호관계를 형성하지 못했다. 그는 농협 
근무를 비롯하여 고향과 심양 등지에서 농약, 김치 장사와 식당, 냉
면 가공업 등 여러 가지 일을 전전했다. 그러다가 2002년부터는 산
동성 위해시로 이주하여 냉면과 찜 등 이른바 ‘동북요리’ 전문 식당
을 운영해왔다. 2013년에는 칭다오로 진출하여 이곳에도 유사한 메
- viii -
뉴의 식당을 열어놓고 위해시를 오가면서 사업에 몰두하고 있다.
구술자들 중 최연소자인 헤어 디자이너 김호원은 아직 미혼이다. 
그는 그 동안 칭다오의 한국 미용실에서 10여 년간 다져온 미용기
술을 바탕으로 장차 프랜차이즈 미용원 개설의 꿈을 키우고 있다. 
고향 연길에서 고교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칭다오로 이주한 그는 처
음에는 식당 서빙과 주점 웨이터 등의 일을 하다 미용업계에 받을 
디뎠다. 도중에는 한국으로 연수차 파견 근무도 했다. 2011년에는 
조선족 집거구인 성양구에 독립하여 미용실을 개원하여 운영 중이
다.
이상으로 이 책에 등장하는 구술자 7명의 생애를 간략히 정리하
였다. 이로부터 조선족의 재이주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주요 특징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연령이 30~50대로 낮아 
조선족 본거지(동북3성)로부터 이출된 젊은층이 재이주지로 고스란
히 옮겨온 듯하다. 실제로 제1의 디아스포라 집거지에 해당하는 동
북3성의 조선족 마을에서는 현재 젊은이들은 모두 빠져나가고 노인
들만 거주한다.
둘째, 구술자들의 이주 시기는 대부분 2000년 이후로 직업도 자
영업과 전문직 위주이다. 이 무렵은 한국 기업들도 대부분 칭다오에
서 자리를 잡거나 기업 환경 변화로 서서히 이출되는 때이므로 전체
적으로는 더 이상의 노동수요 창출이 필요하지 않다. 따라서 구술자
들의 직업들도 한국 기업 혹은 한국인과는 무관하게 자력으로 영구 
정착하기 위한 성격을 띤다. 이는 초기 이주 조선족들이 한국 기업
들에 취업할 목적으로 대거 몰려온 것과는 대조적이다.
셋째, 중국의 개혁개방정책과 관련하여 조선족의 글로벌한 성격과 
이주의 역동성을 읽을 수 있다. 구술자들은 칭다오에 정착하기 전 
- ix -
모두 한국과 중국내 대도시(북경ㆍ상해ㆍ대련ㆍ위해ㆍ심양) 등 국내
외로 여러 곳을 전전한 경험이 있다. 이는 60여만 명의 조선족이 현
재 세계 80여 개국에 이주함으로써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 중 가장 
글로벌한 양상을 나타내는 현상과도 무관하지 않다. 
넷째, 한국을 비롯한 해외 이주 경험자들이 중국으로 귀환하더라
도 고향(동북3성)으로 가는 대신 위해나 연대, 칭다오, 대련 등 연
해 대도시로 재이주하여 정착한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일부(홍
춘식ㆍ조운ㆍ조미애)는 결혼을 위해 귀향하지만, 이는 새로운 정착
지로의 재이주를 위한 준비과정에 불과하다.
다섯째, 칭다오 재이주지에 정착한 대부분은 삶의 과정에서 한국
으로의 노동이나 유학 아니면 한국 기업인과의 합작 등을 통해 모국
과의 상호 관계를 기반으로 해왔음을 알 수 있다. 기업인 홍춘식은 
중국 유학생 출신을 비롯한 다양한 연고관계를 동원하여 여러 사업
과정에서 줄곧 한국인을 사업 파트너로 활용해왔다. 미용실을 운영 
중인 김호원은 칭다오에 진출한 한국 미용실에 근무하며 한국에도 
연수하는 등 기능을 익힌 후 독립하여 개업했다.
본서는 생애 구술 내용의 밀도나 관련 자료(사진ㆍ문서ㆍ물증) 수
집, 편집 기술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한 면이 많다. 특히 포괄적
인 구술생애사를 지향하면서도 개개인의 생애를 관통하는 삶의 양상
들을 누락 없이 채록, 집성하지 못해 아쉽다. 이는 제한된 시간과 예
산뿐만 아니라 연구방법이나 기술적인 부분 등에서 많은 제약이 있
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후속적인 보완연구가 효율적으로 이루어
지기 어려운 점은 가장 큰 애로사항이다. 하지만 제2의 조선족 디아
스포라 신흥정착지역에 대한 구술생애사가 전무하다시피 한 현실에
서 그 기초를 닦았다는 점에 의의를 두고자 한다. 향후 이 분야 연
- x -
구에 디딤돌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으며, 신흥정착지 조선족의 삶을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2014년 6월
경북대학교 SSK다문화와 디아스포라연구단
- xi -
목  차
서문··································································································5
1장. 조선족 사업가 홍춘식의 시행착오와 재기 노력······················16
  ▮ 할아버지가 길림성 화룡 이주·············································17
  ▮ 어린 시절 성장과정과 학업·················································20
  ▮ 수학 연구자의 꿈을 품고 길림대학 입학···························23
  ▮ 장춘지질대학 교양학부 수학 전문 강사 취업····················26
  ▮ 치과 전공 의사와 연애결혼·················································29
  ▮ 사업가의 꿈을 품고 북경을 거쳐 상해 이주······················30
  ▮ 볼링공 제조업 재개, 안휘성에서의 시행착오, 이혼··········34
  ▮ 칭다오 이주, 한국인과의 비즈니스 네트워크····················38
  ▮ 칭다오 비즈니스 환경과 지방 현지화································45
  ▮ 칭다오의 기업환경, 종족자원의 활용 ·······························50
  ▮ 고향 동북지방과 모국인 한국·············································55
  
2장. 부동산 사업가 최용식의 삶과 조선족 교회 목회활동··············58
  ▮ 아버지가 흑룡강성 이주······················································60
  ▮ 1958년 흑룡강성 목단강시 출생, 어린 시절·····················62
  ▮ 장문철 부주석의 운전사였던 아버지··································64
  ▮ 30세에 기독교 입문·····························································66
  ▮ 소학교 졸업 후 농사와 관정 개발, 기계 정비소 운영······67
  ▮ 1992년 한국 노동경험, 용접공···········································69
  ▮ 산동성 대련을 거쳐 청도 정착, 교회 일과 부동산업········72
  ▮ 칭다오 조선족교회 현황, 종교 정책···································78
  ▮ 소수민족, 종교 활동의 어려움············································82
- xii -
  ▮ 조선족사회에서 교회의 역할···············································85
  ▮ 부동산 사업, 조선족 집거지 이촌(李村)지구····················87
  ▮ 공장 설립 계획, 청도 조선족의 변화·································91
3장. 흑룡강성 출신 조운의 식당 자영업 전략과 자녀교육··············94
  ▮ 할아버지가 흑룡강성 이주, 뛰어난 수렵인 ······················96
  ▮ 가족관계, 7남매 부모 세대와 오누이·································98
  ▮ 고등학교 졸업 후 북경으로·················································99
  ▮ 돈 벌기 위해 한국으로······················································101
  ▮ 먼저 출국한 아버지, 견출작업 기술자·····························103
  ▮ 귀국과 결혼, 다시 북경으로·············································104
  ▮ 한국으로의 두 번째 출국, 여섯 식구의 한국생활···········106
  ▮ 칭다오 이주, 조선족 집거지·············································108
  ▮ 숯불 불고기 뷔페식당, 한풍원 개업·································111
  ▮ 한풍원 식당의 운영 전략, 염가 판매와 숯불구이···········116
  ▮ 자녀 양육의 어려움, 선천성 장애아 맏딸과 둘째딸의 교육문제119
  ▮ 전승 위기에 놓인 조선족언어···········································121
  ▮ 동북3성 고향의 사정, 집과 토지 관리 ···························124
  ▮ 칭다오, 재이주지 정착의 어려움······································126
  ▮ 언어 정체성 유지, 현실적 딜레마····································132
  
4장. 칭다오농업대학교 조미애 교수의 가족사와 한국 유학 경험··138
  ▮ 할아버지가 북한에서 길림 반석으로 이주·······················139
  ▮ 수력발전소 회계사였던 아버지·········································140
  ▮ 아버지의 어린 시절과 학업과정·······································143
  ▮ 아버지는 사천성 수력발전소에서 길림성 전근················145
  ▮ 19년간 별거하면서 농촌 살이 하신 어머니·····················148
  ▮ 가족사진, 아버지 세대의 돈독한 형제애··························150
- xiii -
  ▮ 현모양처, 어머니의 희생정신············································153
  ▮ 어린 시절과 공부과정·······················································158
  ▮ 연변대학 농학 전공, 아버지의 영향·································160
  ▮ 현실 안주를 바라지 않는 진취적 기상····························164
  ▮ 한국과의 인연, 유학과 포스닥 연구·································167
  ▮ 청도농업대학 교수 임용, 방문교수 내한··························171
  ▮ 이방의 칭다오, 실력으로 인정받기···································175
  ▮ 칭다오로 이주해 오는 조선족들 ·····································179
  ▮ 칭다오의 조선족 네트워크················································181
5장. 내몽고 출신의 청도대학교 이승철 교수의 삶과 조선족사회 전망··186
  ▮ 칭다오 도시 구성·······························································187
  ▮ 칭다오의 한국 기업과 조선족···········································189
  ▮ 증조부모가 함경도에서 연변 이주····································192
  ▮ 내몽고에서 고교 졸업 후 연변대학교 지리학 수학·········196
  ▮ 한국 유학 동기와 지리학에서 관광학으로·······················198
  ▮ 강원대학교에서 관광개발론 박사학위 취득·····················201
  ▮ 산동성 청도대학 교수 임용 ·············································204
  ▮ 이방의 소수민족이지만 안정적인 전문직 ·······················208
  ▮ 중국 교수체제의 특성·······················································210
  ▮ 칭다오 조선족 사회의 문제점과 향후 과제·····················214
6장. 동북요리 식당의 자영업자 최위의 삶과 자녀교육·················220
  ▮ 할아버지가 동북 길림성 설안 이주··································221
  ▮ 6.25전쟁, 할아버지 형제간의 상호 총질·························223
  ▮ 농협 서기였던 아버지의 3남 2녀 형제자매들·················224
  ▮ 통화농업전문학교 졸업과 다양한 직업생활 ···················226
  ▮ 2002년 산동성 위해(威海) 진출, 동북요리 식당 운영···229
- xiv -
  ▮ 2013년 청도(靑島) 진출, 동업으로 제2의 시도·············230
  ▮ <쇠가마맛집>의 2가지 메뉴, 찜과 냉면·························233
  ▮ 딸 2명 생산과 교육, 언어 문제········································235
  ▮ 한국 방문의 로망·······························································238
  ▮ 큰딸의 태권도 수련···························································240
  ▮ 청도에서의 식당 운영 전략··············································242
  
7장. 조선족 청년 김호원의 프랜차이즈 헤어샵 개설의 꿈············248
  ▮ 할아버지 때 연변 이주······················································249
  ▮ 연길에서 고교 졸업 직후 청도(靑島) 이주 ···················252
  ▮ 2년간 식당 서빙도 하고, 주점 웨이터도 하고················253
  ▮ 한국인 미용실 7년 근무····················································254
  ▮ 브랜드 <이가자미용실> 재취업·······································258
  ▮ <이가자미용실>의 조직 구성··········································260
  ▮ 정체된 한국 미용기술·······················································262
  ▮ 변화를 선도하기 위한 노력··············································263
  ▮ 청도 이주 직후의 정착과정··············································264
  ▮ 2011년 쟈민헤어샵 독립···················································265
  ▮ 쟈민헤어샵 개업과정·························································268
  ▮ 2006년 부모님 한국 노동 이주········································270
  ▮ 단골관계 유지 전략···························································272
  ▮ 청도에서의 타향살이 애로사항·········································275
  ▮ 청도의 매력과 단점···························································278
  ▮ 청도의 외가 친척·······························································280
찾아보기······················································································283
- xv -
중국 동북3성과 한국, 칭다오(靑島)시
1장. 조선족 사업가 홍춘식의 시행착오와 재기 노력
홍춘식(2013.2)
1장. 조선족 사업가 홍춘식의 시행착오와 재기 노력
 
17
■ 홍춘식 연보
- 1965년 :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 출생
- 1982년 : 연변1중(고교) 입학
- 1985년 : 길림대학 수학과 입학
- 1993년 : 장춘지질학원 수학 강사, 박사과정 수료
- 1995년 : 치과의사 여성과 결혼
- 1998년 : 북경을 거쳐 상해 이주, 볼링공장 운영 및 자전거 
공장 근무
- 2007년 : 안휘성에서 볼링공장 재개
- 2011년 : 칭다오 이주, 유류ㆍ수산물ㆍ화장품 유통회사 
합작 운영
- 2014년 : 현재 칭다오 거주
▮ 할아버지가 길림성 화룡 이주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저희들은 여기 청도지역이 조선족의 
재이주니까 이 지역에서 어떻게 살아오셨는지에 대해 이야기 듣고 
싶어 왔습니다.
저는 원래 상해에 있었어요. 제가 호구가 호적이 상해거든요. 조선족 
접촉 못해보고 여기 온지 한 2년 되요. (멋쩍어 하며) 제가 청도 사
정에 대해 잘 모르는데. 저보다 다른 사람을 취재하면 더 좋을 텐데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8
 
요.
아닙니다. 괜찮아요. 꼭 여기서 오래 살아야만 되는 게 아니고요. 저
희들이 청도에 사시는 조선족 중에서 교수님들이랑 기업하시는 분, 
식당 등 자영업자, 종교인 등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 뵈었습니
다. 사장님께는 사업 경력이 많으신 분이고 또 사업을 하시면서 좌
절도 많이 겪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기를 하시
고 계신데, 그런 과정에서 조선족으로서 겪은 여러 가지 경험들을 
꼭 듣고 싶어서 특별하게 부탁드린 겁니다. 반드시 청도에서의 이야
기가 아니라도 좋습니다. 고향인 동북3성을 떠나서 국내나 해외를 
상대로 사업을 해오신 이야기를 편안한 마음으로 들려주시면 감사하
겠습니다.
네.
본(本)이 어디 홍(洪)씹니까? 
아~ 그거 잘 모르겠는데요. 옛날 우리 때는 들었던 시간이 많이 지
나가지고요. 그 머 다 잊어버렸어요. 홍씨는 일본(一本)이라고 하던
데요. 
윗세대 조상분들은 언제쯤 중국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까?
이 터전으로 오시게 된 것은 할아버지 대인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 
대에 오신 거 같아요. 처음에 연변으로요. 저기 화룡. 고향이 화룡이
지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어떻게 오셨는지, 언제 오셨는지 그런 말씀
은 못 들었어요. 문화대혁명 때 족보 다 태워버리고요. 문화대혁명 
뭐 옛날 서류 다 태워버리고. 그 옛날 이름 어떻게 했다는 거 슬퍼
서 그런지 아무 말도 하지 않더라고요. 
할아버지는 보셨어요?
예. 우리 때는 어릴 때부터 공부하다… 아니면 제가 학교 갔을 때 사
1장. 조선족 사업가 홍춘식의 시행착오와 재기 노력
 
19
망하신 거 같아요. 제가 학교 고중 2학년 땐가 3학년 땐가 그럴 거
예요. 할머니는 제가 7살 때 사망하셨는데 맘이 영 선량한 분이예요.
할아버지는 생전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할아버지 옛날… 제가 커서 느낀 건데 할아버지는 일은 하진 않으시
고 집에 계셨거든요. 근데 듣는 말은 옛날에 그 뭐 저 서당에 선생
으로 있었다고 해요, 그리고 의사질도 좀 하다가. 의사였는데, 침
(鍼)을 잘못 놔가지고. 한국으로 치면 한의사였겠지요. 그래가지고 
불에 태워버리고. 의서 같은 종이들도 다 불태워버리고 그 담부터 
아무 일 하지 않았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때 동네에 한족들도 중국 
사람들도 비문(碑文)을 쓸 때 우리 할아버지가 죄다 써주었다고 해
요. 명필이시고 한학에 아주 능통하신 분이었던가 봐요, 길림일보 있
죠? 중국신문을 마음대로 볼 수도 있었고요. 학자 분이셨죠.
그런 할아버지 영향을 이제 아버지 세대도 받으셨겠는데요?
할아버지 영향보다 다 이··· 그 영향도 가능할 꺼에요. 왜냐하면은 
우리 아버지도 영향을 받으셔서 학교로 나오고. 저 고중학교. 한국말
로 고등학교죠. 그담에 저 그 때 저기 북경 무슨 학굔가? 그걸 한콩
대학교. 항공대학. 비행기 제작하고 상관있나? 항공? 그렇네요. 항공 
맞습니다. 항공대학 시험에 붙었다가 신체 상황으로 떨어졌데요. 허
허허! 아버지가요. 그거는 또 여러 가지 적성검사나 신체검사를 해
야 되나 봐요. 파일럿 관련된 그런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후에는 학
교. 소학교 교장자리에 있다가 퇴직하셨대요. 할아버지 영향을 좀 받
은 거 같애요. 교육자셨죠.
아버지 형제자매는 어떻게 됩니까? 
아~ 보자. 한분. 두분, 세분. 세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맨 위에가 아닙니다. 맨 위에 고모님도 아니고요. 큰아버지가 계셨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0
 
죠. 큰아버지는 조선전쟁 때 그때 나가서 사망하고. 결혼하시기도 전
이지요. 젊었을 17살에 참군(參軍)해가지고요. 17세. 잠시 전쟁에 
참여했다가 그담에 조선을 나가셨는데.
큰아버지 밑에는요?
그 담에 우리 아버지고 밑에 고모 한명. 또 그담에 우리 삼촌이 한
명 있고요. 큰아버지 다음에 아버지네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장남이
다 그죠? 결국은 그렇게 돼서 장남이 됐지요.
아버지는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지금 사망했어요. 살아계시면… (생각을 하면서) 그러이까나··· 1937
년도 태어났을 꺼에요. 37년도. 1937년생. 어머니도 돌아가셨어요. 
병은 없었고요. 이제 나이가 많아서. 몇 년 전에 돌아갔습니다.
사장님 형제자매는 몇분 입니까?
누님 하나 있고 그 담에 남동생 하나 있습니다. 저는 1965년생이요. 
제 밑으로는 딸 하나 있어요. (죽석에서 그려낸 가계도를 보며) 아~ 
이제 이렇게 4대 가계도가 딱 나옵니다. 하하하! 누님하고 남동생은 
지금 어디 사십니까?
남동생은 지금 연변에 있고요. 연길에 있고요. 누님은 지금 한국에 
있습니다. 한국 돈 벌러 갔다가 또 다시 가고 그렇습니다. 누님은 저 
아들이 유학가고 서울 유학가고. 한국으로요. 매형은 그분은 석유회
사에서 퇴직하고 또 지금 무슨 일 한다 하더만요.
▮ 어린 시절 성장과정과 학업
사장님 어린 시절 기억을 좀 이야기해주세요?
1장. 조선족 사업가 홍춘식의 시행착오와 재기 노력
 
21
(부끄러워하며) 어린 시절? 하하하! 다니던 소학교는 화룡시내가 아
니고 농촌에 있었어요. 화룡 어디냐면 용수평. 용수평에 살았어요. 
용수진. (공동연구원으로 면담과정에 참여했던 연변대학교 교수의 
남편 이름을 거론하자) 안창수라고도 불렀던 안창범이도 알아요. 우
리 한반 다녔어요. 아이고! 초중 필업(畢業)한 다음부터 한 번도 만
나지 못했어요. 그 친구 많이 친했어요. 중학교 동창입니다. 그 친구
도 공부 절해서 1, 2등 이렇게 했지요. 엄청 잘했는데, 나는 연변1중
으로 가고 그 친구는 화룡고중으로 갔었습니다. 공부 잘했습니다.
학교 다니실 때 동료들과 지냈던 재미난 이야기들 있으십니까?
우리 때는 공부만 했지. 하하하! 공부만 하고 몰랐어요. 다른 거는. 
그래서 공부 이외는 축구만 하고. 우리 때는 공부가 참 쉬웠거든요. 
숙제만 하고. 지금처럼 밤늦도록 학교에서 공부하고 그러지 않았어
요. 학교에서 돌아와서 숙제만 하고 그럼 다시 놀았습니다. 우리는 
쉽죠. 그때.
그때 주로 어떤 놀이를 했어요?
주로 축구를 많이 했죠. 우리는 저 큰 문대서는(넓은 운동장에서는) 
못 놀고 도로 위 코치에서 몇 명씩 하니까요. 축구공은 우리 때는 
축구공이 좋은 게 없고 고무공이고. 시골이시니까 머 농사일을 돕기
도 하고 그랬지요. 소먹이고 이런 거 꼴 대고 그런 거 다 하죠. 하지
만 저는 그건 집에선 제가 공부를 잘하니까 저희 동생을 시키고. 전 
공부만 시켰습니다.
근데 우리 아버님이 또 교사, 선생님이시니까 농사는 많이 안했죠. 
밭은 좀 부쳤어요. 농사일은 언제 했냐 하면은 학교에서 통일적으로 
그때는 개혁 개방하기 전에. 통일적으로 이게 저 농사를 도와주는 
거예요. 농번기면은 학생들이 막 일주일씩 여~ 가서 모내기도 도와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2
 
주고. 학교에서. 전체 그렇게 했습니다. 저희도 그렇게 했습니다.
아버님이 교장 선생님이시면 직업이 있으므로 농토를 주지 않습니
까?
우리 아버지는 국가에서 월급 받고. 공무원이죠. 교장 선생님이시니
까. 공무원은 농토가 배정이 안 돼요. 농민이 돼야 농토 배정이 되어 
농사를 하죠. 확실히 차이가 나죠. 농토가 개인 소유가 아니니까요. 
우리 아버지도 농민 호구에서 다시 공민 호구로 됐어요. 농민 호구. 
공민호구. 공무원을 ‘공민’이라고 하지요.
고중은 어디서 다녔습니까?
중학교 때까지 화룡에서 다녔고, 고중은 연변1중에서 다녔어요. 공
부를 좀 한 거지요. 하하하! 연변1중은 연변에서 조선족 학교뿐만 
아니라 길림성에서도 최고입니다. 지역 명문이죠. 시험쳐가 들어갑니
다. 중학교 과정에서 상당히 공부를 잘해야 연변1중에 들어갈 수 있
습니다. 그때는 제가 다녔던 중학교에서 혼자 1명만 붙었거든요. 중
학교가 전부 몇 명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때 3학년은 3개 반으로 
돼 있었어요. 근까(그러니까) 3개 반이었는데, 한 학년이 100명은 
넘었을 거예요. 그 중에 저 혼자 1명이 연변1중에 들어갔습니다. 
(좀 겸연쩍어 하며) 지금도 그 말하면 자인(자신) 없어요. 하하하!
연변1중 들어가실 때 시험제도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시험제도는 통일적으로 근까 연변 일대에서 시험을 통일적으로 내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시험쳐가지고 그 다음에 합격선에 들면 그 
담에 들어가는 거예요. 어릴 적부터 공부에 취미가 있어서 좀 열심
히 했는데, 어떻게 해서 무엇을 해야겠다는 포부랄까? 꿈도 가지고 
있었죠.
어떤 꿈입니까?
1장. 조선족 사업가 홍춘식의 시행착오와 재기 노력
 
23
제가 수학을 좀 연구해서 수학가가 되려는 게 꿈이었어요. 구체적이
지는 않았지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요. 내가 수학 연구자가 
돼야 되겠다는. 하지만 진로를 어디 대학으로 진학해서 어떻게 하면 
대학교수가 되고 머 이런 그 과정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요. 그 당시 
연변에 수학경연대회에 참가해서 상위 8등 했어요. 연변에서는 2등 
하고요. 길림성 전체에서 8등 한 거죠.
혹시 김홍아를 아세요? 우리 학교에서 그 친구가 1등 하고 제가 2
등 했습니다. 그 때는 진짜 신문에도 나고 막 그랬지요. 김홍아씨는 
그때 복단대학을 가고. 거기서 1년부터 4년간 계속 장학금 타고 학
생회 수석까지 했어요. 그런 여잔데, 그 담에 후에 미국으로 갔어요. 
미국으로 유학가고. 미국에서 강철회사에서 연구소에 종사하다가 후
에 사망했죠. 아까운 인재였는데. 그 여자 공부 잘했습니다. 전국에 
저는 5등 했습니다. 김 선생이 1등 하고. 수학을. 조선족이 그 때 그
렇게 참 대단했죠.
▮ 수학 연구자의 꿈을 품고 길림대학 입학
수학자의 꿈을 가지고 이후 어떻게 준비해 나갔습니까?
그담에 저 첫 지망이 그때는 북경대학보다 칭화대가 최고였거든요. 
그기로 우리 연변1중에서 4명이 지망했습니다. 제하고 앞에 김홍아
씨 하고 김태훈씨. 김태훈은 사망했습니다. 생각나죠? 암 다 걸려가
지고요. 학교 수학계에 여러 사람들 지원해 가지고 학생들도 지원하
고 그랬습니다. 좌우지간에 다 친했습니다. 그담에 또 한분은 김성
호. 김성호는 아버지 어머니가 다 화학계 교숩니다. 연변대학교. 그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4
 
분 지금 함문에 있습니다. 밀접히 연계하고 있지는 않지만, 광철이 
통해서 알았습니다.
그때 어느 학교 가셨어요?
저는 길림대학 갔습니다. 첫 지망 못 넣었고요. 길림대학. 길림대학
교도 중국에서는 6, 7번째 드는 종합대학입니다.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했습니다. 거기 가서부터 공부를 하지 않았죠. 흐흐흐! 공부에 
좀 흥미가 떨어졌나 봐요. 연애는 안하고 술을 많이 마셨습니다. 하
하하! 스트레스 받았나 봅니다. 그래가지고 친구들하고 계속 술 마
시고 다니고.
조선족들이 말… 학교 가서도 중국말 잘 못했어요. 전혀 뭐 못했다고
요. 윤철이랑도 잘 알죠. 그 친구도 술을 좋아하죠. 윤철이는 연변대
학 수학학부 학부장이죠. 최승훈 하고. 최승훈도 잘 알죠. 최승훈 경
북대학에 갔을 때 내 두 번 한국 간 거예요. 저 그 기억 안나요. 일
로 초정 받고 갔어요. 여기 길림대학에서 4년간 수학을 공부했어요. 
대학생 때는 공부를 안 하셔서 수학 가지고는 두각을 못 나타냈네
요?
근데 처음에는 성적이 높았어요. 공부를 하지 않아도. 기초가 있으니
까. 근데 후에 차츰차츰 떨어졌죠. 그게 쉬운 일 아니더군요. 센친대
수라고 있어요. 선형대수. 대수학이요. 그거도 우리가 했어요. 3문제
를 다요. 3문제가 다 풀면 만점인데 제가 혼자 그거 다 했거든요. 
근데 후에 공부를 하지 않으니까는. 굉장히 우수하게 늘 공부를 하
다가 성적이 과거만큼 안 나온다고 해서 스스로 스트레스 받고 그런 
건 아닙니다. 공부는 그래도 몇 등 안에는 계속 들었습니다.
근데 왜 본인이 안하셨다고 하세요?
결석 때는 축구 많이 하고 머 친구들이랑 술 마시고 그래 했어요. 
1장. 조선족 사업가 홍춘식의 시행착오와 재기 노력
 
25
그리고 공부는 어떻게 말하나? 시험 치기 전에 한 달 전부터 노력했
고. 벼락치기로, 바짝 하는 공부죠. 하하하! 교수님들이 그때는 보통
말 잘 못했어요. 간간이 강의 들어가면 듣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머 별로 공부 안하고 자습하는 거예요. 100분에 90분은 자습일 꺼
예요. 저도 청각이 잘 발달 못했어요. 보통말을 안 하신다는 게 길림
대학 같은 경우에는 중국에서도 앞자리에 있는 대학이니까. 저 남방
에 광저우(광주)에서 오는 교수님 있고. 이 짝에 절강성에서 오거나 
뭐 싼동에 사는 분들도 있고. 그 분들은 계속 자기 지방 얘기를 하
니까요. 우리는 표준말만 배왔잖아요. 동북 사람들은 표준말 하거든
요. 그러니까 못 알아듣죠. 지리학이나 다른 학과 수업에서도 못 알
아들을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다른 애들의 필기장을 노트 
빌려다가 같이 적고 그랬어요.
인터뷰 중인 홍춘식(2013.2. 청도)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6
 
그거는 연변에서 소학교, 초중학교 올라가면서 다 한국말만 했기 때
문에 그렇습니까?       
그런 영향이 많죠. 그렇습니다. 그래서 청각이 발달이 못했다는 얘기
죠. 더군다나 우리 화룡 주위에는 중국 사람들 적거든요. 제3의 지
역이 화룡이잖아요. 조선족이 가장 많이 집결된 시(市)이니까. 대학
교서 이러고 중국 사람들하고 크게 어울리지 않고. 항상 우리끼리 
놀았거든요, 그래서 언어적인 어떤 그런 문제도 있었다고 봐야죠. 확
실히 제게는 심각했어요.
그런 것 때문에 사회에 나오셔서 정말 그런 유사한 압력을 느끼셨겠
네요? 
압력을 느끼기보다 쪼금 싫어하게 되는 경향을… 사회적으로 그게 
좀… 사회적 불만을 크게 가지고 그런 것은 아닌데 어쩐지 좀 그게 
좀 있는 거 같애요. 한족에 대한 거부감 같은 거 그건 크게 없는데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좀 그게 좀 싫었어요. 그렇지만 전 친구들이
랑 잘 친했어요. 놀지 않았지만. 한족 친구들하고. 이들과는 지금도 
연락 많이 하고요. 내가 찾아가면 얘들이 반갑게 맞아도 주고요.
▮ 장춘지질대학 교양학부 수학 전문 강사 취업
대학교 4학년을 졸업하시고 그 다음 살아온 과정을 이야기해주요?
그러고 대학교 졸업하자마자 옆에 장춘지질학원이 있습니다. 지질학
원. 장춘에 있는 지질대학이예요. 그게 지금은 전부 다 기능대학에 
통폐합됐습니다. 지금 그게 거리를 하나 사이에 두고 저 지질학원은 
황궁(皇宮)이였어요. 옛날에 러시아에서 지은 황궁이었어요. 근데 그 
1장. 조선족 사업가 홍춘식의 시행착오와 재기 노력
 
27
뿌인(부의)가? 뿌이 황제가 그곳에 들지 못하고. 그담에 붙잡혀 간 
거예요. 그곳이죠. 역사성이 있는 건물이죠. 유적집니다. 그 집은 확
실히 잘 졌어요. 청나라 말대 황제의 황궁. 뿌이는 청 말 마지막 황
제죠.
지금도 쌩쌩한데 403호실. 그 교실에 여기 교무실에 제가 취직을 했
어요. 학부 졸업하고 바로 장춘지질대학에 취직을 한 거죠. 장춘지질
대학이라면 ‘이사광’이라고. 우리 이사광이라고 미국에서 지질 전공
을 해서 중국에 오셨을 때 장춘지질대학을 처음으로 만든 거에요. 
참 유명한 전문대학이죠. 지질탐사. 지하자원 탐사 그 쪽에는요.
그러면은 그쪽에서 주로 하셨던 일은 어떤 것입니까?
아~ 먼저 개과(開科) 나서 수학을 저가 가르쳤거든요. 교사였어요. 
수학을 가르치고. 그담에 들어가자마자 졸업할 때 영산물 석사하고. 
저 비깐나 뽐 했다는 거. 지원을 했다가 하지는 않았어요. 시험을 안 
봤죠. 그래가 전에 학교로 들어간 거예요. 그냥 취직을 했죠. 왜 시
험은 왜 안 봤냐면요. 그때는 솔직히 좀 구미가 안 댕겼거든요. 그때
부터는. 허허허! 수학에 대한 흥미가 있었고 수학 연구자의 꿈을 가
지고 있었지만, 대학 졸업 무렵에는 좀 흥취가 떨어졌죠. 그래가 취
업을 선택했죠.
장춘지질대학에는 몇 년 계셨어요?
근 6년 있었습니다. 6년. 그때 봉급이 얼마였냐면… 지가 퇴직할 때 
1993년도 5월인데 월급이가 124원이였습니다. 근까 거기서 6년을 
마무리할 때죠. 124원. 처음 들어갈 때는 58원이었고요. 58원에서 
124원으로. 2배 이상 늘었죠. 이게 많지는 않죠. 93년도 그 무렵 우
리 친구들은 회사에서 200~300원 타고 그랬는데. 그담에 한국 회사
에서 다닌 분들은 또 많이 월급 탔거든요. 더 많고. 돈 많이 벌었어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8
 
요.
근데 저도 우리 교무실에 수학을 가르치는 교무실에 한 40명 됐습
니다. 선생님들이. 수학만 가르치는 교양과목 분야에도 연구실이 있
었죠. 교양학부. 공동연구실. 강의 담당 선생님들이 한 40명. 정교수
가 한분이고 부교수가 많고 나머진 우리 젊은 교사들이 한 절반 차
지했어요. 전문 강사들이죠.
장춘지질대학 6년 근무 후에는 어디로 가셨습니까? 
그 다음에 저··· 이름 머이가? 기억 안 나네. 쉬시시 킹실리우스. 그 
담에는 다른 사업을 하려고 나갔지요. 개인 사업을 할려고요. 학생 
가르치는 직업이 마음에 안 들었다기보다는… 그만둔 이유는 그때는 
어떻게 말할까? 뭐 조금 다른 쪽으로 해보려고 하는 이 생각이 막 
나는 거지요. 제 성격에는 크게 하자. 그럼 그쪽으로 도전적으로 돼
가서 박사를 하고 그래야 되니까요. 나는 그거 이미 포기 했거든요. 
대학교 가서부터. 
장춘지질대학교에 가서도 가자마자 제가 재식연구생 했어요. 길림대
학 내에 꺼 아니고요. 동북사대 꺼도 아니고, 우리 거 장춘지질대학 
꺼요. 그분은 중국에 유일한 박사인데. 그 부분의 박사 권위도 있어
요. 그래가꼬 우리 교수 주임이었어요. 그래가 어떤 과목인가 하면 
지하물? 지하수. 그니까나 환경오염을 모형으로 이해하는 분야죠. 무
슨 수학 모형으로요. 수학 모델로요.
재식연구생이라는 거 한국에도 재직연구생이 있잖아요? 교사. 그 예
를 들면, 부산에 있는 고등학교 교사분들이 부산대 대학원에 다니는 
그런 형태죠. 교육대학원인데 파견나가시는 분들 있죠? 근데 인제 
요즘은 체제가 좀 달라졌습니다. 그 교사 계속 하면서 대학원에 들
어가 공부하는 거죠. 일 하면서 매주 월요일에 한 풀로 수업 다 듣
1장. 조선족 사업가 홍춘식의 시행착오와 재기 노력
 
29
고. 그런 방식으로 하죠. 장춘지질대학교 그니까 우리 교무실에 주임 
교수 밑에서 공부하는 거예요. 학과장님이 전공으로 지하수 자원과 
환경오염 문제의 상관관계를 수학모델로 연구하죠. 여기 오염원이 
있어요. 이게 유동에 의해서 전파되는 거죠. 고거 수학적으로 시간하
고 기점 이래가 수학적으로 모형 만든 거예요. 그걸 우리 지도교수
님이요. 지도교수님이가 우리 교무실에 주임이에요. 제 지도교수이거
든요. 그분이가 그 분야에서 성공했죠. 그거 중국에서 권위가 있어
요. 유일한 사람이에요. 이 방면에 박사까지 주시는 분이었죠. 학생
들 박사학위 보장까지 할 수 있는 위치죠.
그 연구팀에서 공헌도 하셨습니까? 
아아~ 저는 그거 하다가 그 다음에 제가 그 다음에 나온 거예요. 학
위는 안 받고. 그 과정은 다 했어요. 딱 논문만 쓰지 않았어요. 수료. 
수료 다 했죠. 흥취가 없으니까. 하하하! 학교에 흥취가 없어요. 그
래서 나왔죠.
▮ 치과 전공 의사와 연애결혼
결혼은 언제 하셨어요?
장춘지질대학 근무할 대 집사람 만나가지고 결혼했거든요. 연애했어
요. 같이 수학 공부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연변의학원에서 실
습을 장춘으로 왔거든요. 그 숙소가 다 우리 맞은편에 있었어요. 하
하하! 그래 동생같이 생각하면서 사귀었죠. 결혼한 거는 29살에 결
혼했어요. 
집사람은 나이가 6살 차이예요. 당시 23세. 꼬셨죠. 당시 여자 의대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30
 
생이 인기였어요. 의대생하고 사범대생하고요. 사범대 여성분들이 인
기 있었어요.
아내는 무슨 일을 합니까?
지금 치과를 하고 있습니다. 상해(上海)에서 지금 치과병원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분들을 대상으로 해서 하고 있습니다. 치과를 하고 있
지만 부자는 아닙니다. 지금 상해에 있어요. 애기하고 같이. 우리 호
구가 다 상해 호구예요.
(연변대학교에 재직 중인 공동연구원이 부연하며) 야~ 대단하시다. 
상해에 호구(戶口)라니. 호구를 강조하시는 거는 아까 여기 계시는 
분들이 청도 호구 다 못 가지셨다 하잖아요. (연변대학교 청도동문
회 회장을 지칭하며) 청도 계시는 김호림 회장님도 마찬가지시고. 
대도시 호구를 가진다고 카는 게 그게 엄청 힘든 일이거든요. 그거 
어려워요. 제도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추천한 논문을 한번만 
살펴보시면 거의 다 나옵니다. 아주 도움이 될 겁니다. 호구제도에 
대한 논문인데, 이강원 교수님 그걸 쓰셨거든요.
결혼도 장춘지질대학 재직 시에 하신 거네요?
제 와이프는 당시 연변에 출근했거든요. 결혼하기 전에. 그 다음에 
먼저 그거 해가지고 연변에서 결혼한 거에요. 제가 이후 곧바로 상
해 간 다음 날 상해 데려왔거든요. 결혼은 길림에서 했잖아요. 장춘
에서 했죠.
▮ 사업가의 꿈을 품고 북경을 거쳐 상해 이주
그 무렵에는 상해에 계셨습니까?
1장. 조선족 사업가 홍춘식의 시행착오와 재기 노력
 
31
예. 먼저 북경에 있다가 상해에 갔습니다.
북경에는 당시 어떤 일로 가셨습니까?   
북경에서는 저가 한국기업에 공장장을 했어요. 초빙 받아서 그때 제
가 공장으로 들어갔거든요. 그때 무슨 공장이냐면, 볼링공 공장으로 
작은 거였어요. 볼링공을 만드는 공장입니다. 자꾸 혼자서 창업을 해
보려고 하니까는… 작은 기업이더라도 가서 일하는 게 마음에 들어 
들어가꼬. 공장장으로 갔죠.
그때 초봉은 얼마나 주셨어요? 
월급은 그때는 많지 않았어요. 그때 2000원? 124원을 받다가 2000
원을 받았으니 비약이죠. 하하하! 그 때는 좀 시간이 지날 때예요. 
제가 북경으로 갈 때가 1997년도예요. 1998년도에 상해 가고요. 1
년 남짓 있었어요. 북경에.
어떤 연고로 북경의 한국기업에 가신 거예요? 
아~ 그때 연변에서 좀 이래저래 한 일이 많았어요. 작은 일이지만 
연변에서 일을 해보니 안 되니까요. 그담에 창업을 좀 해보려고 했
죠. ‘남들 잘 되니까 나도 해보자!’ 그런 생각을 품고 또 북경 갔거
든요. 그래서 북경에 친구 있는 데 있다가 그 담에 정보를 알아가지
고. 북경 볼링공장에는 1년 반 했습니다. 이 회사에서는 꿈을 펼치
기가 힘들었죠. 작은 회사고 또 자금난을 많이 겪고 있는 회사였습
니다. 그것 살릴라고 월급 한 반년도 안타고 계속 일을 해줬거든요. 
나중에야 받긴 다 받았죠. 그 회사하고 상해 회사 하고 합작이 이루
어졌거든요. 그래서 그 담에 나도 그쪽으로 상해로 갔지요.
상해 가셔도 계속 볼링공장에서 일하셨나요?
그때 한국기술을 상해 회사에 팔았거든요. 볼링공 기술을요. 상해 
중로(中路)에 있었던 1인(개인) 회사예요. 중국 할 때 중(中) 자.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32
 
도로 로(路) 자. 지금은 상장회사예요. 주식회사예요. 아주 잘나가
는 회사죠. 지금 요거 쓰면 알겠지만 영구표자전거 이걸 회수해가
지고 그 거기에 의해서 저 주식회사로 넘어온 거예요. 중국에 그 
자전거 시장에서 메이커 첫 번째 가는 ‘영구’라는 게 있어요. 영구
표. 영구표자전거. 그게 많이 알려졌어요. 누구나 다 알죠. 결혼할 
때 가장 좋은 선물로 영구표자전거를 하죠. 자전거 메이커 중에서
는 제일 좋은 거.
그래서 제가 한국 사람에게 인민폐로 200만원에 그 기술을… 그 기
술은 간단해요. 그래 팔았거든요. 팔고 저는 거기서 취직하고. 그런 
다음 2년 있다가 자기 꿈을 이룰 수 있다 하고 나온 거예요. 여기서 
저는 어떤 직함을 가지고 일을 했냐면, 기술 공정사. 공정사. 엔지니
어 맞습니다. 기술자로 직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난 만들어 주는 
거예요. 그쪽에서 남현에서 만드는 거예요. 상해시 남후에취.
그때 우리 총 본(본부)는 어디 있었냐 하면… 지금도 그 있어요. 증
권대사. 그 상해에서 이름··· 있는 건물이고. 그거 13층은 우리 회사
에서 다 샀습니다. 건물 규모가 엄청 크죠. 그거는 상해에서 이름 있
는 회사예요. 왜냐면 저 클린턴 대통령이 중국 상해 방문할 때 그분
이 공산재 업체 인사를 대표해서 클린턴 대통령 접대하고. 그리고 
돌아가신 다음 클린턴 대통령이 머 감사답변 편지도 온 거 복사해서 
걸어놓고 그랬어요.
이런 큰 회사에서 꿈을 펼쳐볼 수도 있었겠는데요?
그런데 저는 자꾸 개인으로 해봐야 되겠다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사업을 해보겠다. 남들도 할 수 있는 일을 어찌 못하겠는가. 그런 심
정으로 했거든요. 실패를 많이 했지. (근무 회사를 가리키며) 지금도 
상해에 공산연에 소속이고. 그 다음에 정치에 참여에도 참여해서 정
1장. 조선족 사업가 홍춘식의 시행착오와 재기 노력
 
33
계도 뒤흔들지요. 그분 투자회사도 하고 있고. 그리고 영화회사도 했
다가. ‘세진’이라고 이름이 있어요. 그 분하고 합작했다가 세진은 새 
시대에 발걸음에 못 맞추는 거예요. 옛날에 그 분이 최고예요. 한국
과도 몇 번 합작하려고 한국에서도 막 그래 사람들이 오고··. 성냥. 
무슨 판소리라던가? 성냥팔이 소녀. 러시아에 영화잖아요? 그거 찍
었어요. 한국에서 그거 투자하라고 그게 우리 사장님한테 그게 왔거
든요. 제가 그거 건의해가지고. 그게 투자하지 않고 후에 그게 한국
에서 드라마로 나왔거든요.
여기서 몇 년이나 일하셨습니까?   
여기서 2년 했습니다. 상해에서 있으면서 그 다음에 우리 사장님이
가 우리 집 호구를 상해로 옮겨주었어요. 그 사장님이 도와주셨어요. 
그 사람도 인터넷 들어가면 다 나와요. 검색할 수 있어요. 상해시 인
사국에 가니까요. 상해 중로에서 왔다고 하니까 보지도 않고 도장 
찍어주고 그래요. 제가 있을 때. (다소 놀라워하는 연구자들을 바라
보며) 우리 그래서 이상하다 했죠. 그때 신상 하고 취급하기가 쉬웠
거든요. 황쥐가 서기질 하고. 둘 다 두 분 다 왔다 갔어요. 그니까 
시펀디 황취하고 그 다음 다 지지했어요. 그만큼 영향력이 있는 곳
이지요.
(연변대학교 공동연구원이 설명을 하며) 국가의 주요 인사… 중국을 
흔드는 5분에 3이가 다 상해거든요. 나머지 2가 머 북경 기타 지역
의 힘이에요.
그런 분한테 있으면서 돈을 좀 더 벌지요?
안 그래도 제가 나오겠다 하니까, “아이! 그래도 좀 더 키워낼라고 
더 써보겠는데 어찌 나가는가?” 이러더라고요. 하하하! 그렇게도 하
고 힘이 남아돌아요. 회사에 더 있어주길 바랬지만, 주위 사람들 자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34
 
꾸 돈을 버니까 나는 자꾸 나이가 먹어가니까 빨리 창업을 하려고 
그런 마음이 앞서죠. 창업에 대한 욕망이지요. 욕망이 드니까 뭐 생
각 없이 달려든 거예요.
연봉이 꽤 높았죠?
앞에 회사에서 2000원 받았었는데. 여기선 3000원 탔어요. 내가 소
개해준 저 한국분은 거기서 한 달에 8000원씩 탔어요. 1년에 10만
원. 연봉이 10만원. 그분 거기서 한 6년 일했어요. 한 달에 10만원. 
아니 한 달에 8만원. 그리고 그 사람도 두루두루 자기 벌이 해가지
고 한 한 달에 10만원 정도 탔어요. 그니까.
한국하고 무역을 하기 때문에 그분이 그렇게 필요한 거예요? 
필요하기보다는… 그이까는 우리 사장님이가 그때는 그분을 인재로 
생각하고. 사장님이 기술을 또 크게 발전시키가지고. 사업을 마이 하
자고 그래서 양천공(2000년), 아니 2006년도까지 그분이 상해 중로
에서 근무했거든요. 근데 참 미안해가지고 2006년 12월 달에 사직
한 거예요. 거기서 돈을 많이 받았거든요. 그 한국분 성함은 김태일
입니다. 그분하고 지금은 연계를 취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분의 밑에
서 일하던 직원은 지금… 제가 그담에 무역회사 하다가 그땐 벌이가 
잘 안됐어요.
▮ 볼링공 제조업 재개, 안휘성에서의 시행착오, 이혼
또 볼링공 붐이 사라졌던 게 다시 살아난 거예요. 중국에서 대성으
로 역으로 수출하고 있는 거예요. 볼링공을. 그래도 내 생각에는 우
리 회사 때문이라고. 근데 우리 회사에서 재력이 풍부하니까요. 미국
1장. 조선족 사업가 홍춘식의 시행착오와 재기 노력
 
35
에 전시회 참가했거든요. 그래서 아~ 미국에서 ‘중국에서도 볼링공
을 생산한다.’ 이런 소문이 쫙~ 퍼진 거예요. 그 다음부터 미국에서 
조금 구입하는 거예요. 중국 게 가격이 싸니까.
그래서 그담 무역회사를 접고 볼링공 공장 머 같이 해보자. 시장이 
머 하도 그땐 많이 컸어요. 상해뿐만 아니라 북경도 있고 그··· 장항
성도 있고 한~ 6곳 정도 있었어요. 다 잘되고 있거든요. 그래서 조
그만 이제 땅 그에서 설계해서 먹어보자 그래서 접어 두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제가 공장 부공장 세웠어요. 부공장을 내 잽으로. 혼자. 
원래 상해에서 했거든요. 그 후에는 안후이에서 하고. 안후이성.
안휘성에서는 이걸 몇 년간 하셨어요?
7년간. 모든 정력을 여기다가 쏟아 부었어요. 근데 거기서 많이 실
패 했지. 그 대신 지금 볼링공장은 머 그래도 보통 그만한 수준에서
는 잘 되고 있어요. 제가 만들어놓은 상태에 나가고 있어요. 근데 난 
자금 때문에 그만 두었어요. 돈 때문에. 자금 때문에 그만 다른 분한
테, 본 지방 사람한테 팔았삐고. 그 지분은. 
자금을 유통시키지 못한 원인은 무엇입니까?
아~ 제일 처음에 갈 때 지금 가도 머 이 조상국에 국장이에요. 개발
국에 그분이 나를 찾아 왔더라고. 공단에. 고아산 아시는지요? 고아
산. 한국말은 고아산인데. 황산 다음에 고아산이예요. 예. 황산. 그 
불교를. 안휘성에 왔어요. 중국에 안휘성. 중국어로 주화산. 삼국시대 
역사에 왕자 ‘김교각’이라는 분이가 살았지요. 김교각. 선구자예요. 
그래서 그 안휘성에서 한국 사람들에 대한 인상이 매우 좋거든요.
아~ 그 친구가 요쪽에다가 투자를 하면은 대출을 해주겠다고 했죠. 
원래 우리 회사와 같이 합작하겠다고 했거든요, 욕심에서 대출해주
겠다 핸 거예요. 상해에 있으니까 남과 합작해서. 했더라면은 그럼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36
 
더 성공했죠. 허허허! 난 볼링공뿐만 아니라 크게 할려고 좀 맘먹었
거든요. 근데 자금 사정으로 7년간 하다가 결국에는 현지 사람한테 
팔아버렸어요. 파라고 그랬어요. 근데 지금 제가 아까 그 김태일이라
는 분이 있잖아요. 그분이 밑에 일한 직원이 있었어요. 최정태라는 
분은 지금도 중국 공장에서 공장장으로 있어요. 지분을 20% 가지고 
있거든요.
사업 실패 후의 어려움은 어떻게 극복해 나가십니까?
솔직히 제가 말하자면 이혼을 했어요. 사업을 접기 전에 이미 안휘
성에서. 하지만 가족하고는 연계하고 있는데, 근데 전화 왔더군요. 
그 전에 돈도 다 써버리고. 사업 실패로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가정
의 불화가 생긴 거죠. 애들한테 많이 미안하죠. 미안해서 전화 못하
는 거예요. 순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지요.
제 와이프가 젤 첨에 개업할 때 제가 앉혀 줬거든요. 치과병원. 어딘
가 하면 ‘탄청 중신’이라고. 상해 포동. 거기는 완전 번화가지요. 중
심가이기도 하고요. 탄청 중신이라고 상해에서 이름 있는 그룹 중 
하나에요. 그 회사 건물 안에서 치과병원을 했거든요. 그 다음에 밑
에서 내려오면서 더 크게 했거든요. 그때 자금은 내가 대 주겠다 하
고요. 그런데  안휘성 쪽에서 대출을 못해주니까 자금난에 걸린 거
에요.
이미 인테리어하고 다 했는데, 그 다음에 기계도 사야 되지. 의사들 
월급줘야 되지 하니까는 답답한 거예요. 근데 한 달 월세가 1만 5천
이에요. 상해는 원래 월세 비싸요. 그래가지고 둘이 쌈한 거에요. 그
래도 나는 방법 없지. 쌈하다 쌈하다 둘이 접은 거에요.
병원까지 차려줬는데 왜 그런 사이가 됐어요?
그때는 4층에 했는데 돈 버니까 더 크게 할려고 2층을 늘린 거예요. 
1장. 조선족 사업가 홍춘식의 시행착오와 재기 노력
 
37
2층에서 4층까지. 5층부터는 오피스텔 있고 개인집도 있고 그래요. 
위치도 좋고 건물도 좋아요. 와이프는 치과를 계속하고 있어요. 아이 
부양도 혼자하고 있고. 지금 사립학교 다니고 있어요. 한편으로는 마
음에 그런 미안함이 남자로서… 다른 이유가 아니라 경제적 이유로 
인해서지요. 지금은 아이하고도 연락하지 않아요. 대학교 붙은 다음
부터 연락하자고 했어요. 대학교 간 다음부터. 지금 애들 공부하는데 
정서상에도 문제가 있고 해서요.
아이가 이혼한 거는 알고 있어요?
딸이에요. 이혼한 거는 알고 있어요. 만약에 어떻게 사업이 다시 자
리를 좀 잡고 경제적인 게 해결이 되면 다시 시작해봐야죠. 딸아이
는 지금 고등학교 다니고 있습니다. 내년도 대학교 들어가야 됩니다. 
지금 엄마하고 같이 상해에 있어요. 상해에서 중국학교 사립학교 다
닙니다. 중국말은 잘하지만, 한국말은 잘 못하죠. (연구진이 안타까
운 듯한 표정을 짓자) 그래서 또 이제 한국말을 배워야 되죠.
지난번의 실패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아야겠다는 각오라도 있으십니
까?
네. 저는 안휘성에 있을 때 친구를 통해서 시장, 공안국장, 공상위 
국장 다 알았어요. 그랬는데도 거기선 성공 못했거든요. 그래서 처음
부터 차근차근 기초부터… 도움 필요하면 여기저기 사람 더 만나면
서···. 그런 분들을 알고 사람을 찾고 알고 지내야 한다는 것은 필요
하다면 접대도 하고 명절에 선물도 돌리면서 관계를 돈독히 다져나
가야 한다는 거죠. 근데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안 되니까 친구들이 도
와주고 있어요. 저번에 청도 이공대학에 원장 하시는 분도 청하였는
데, 그기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왔더군요.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38
 
▮ 칭다오 이주, 한국인과의 비즈니스 네트워크
안휘성의 7년 사업을 접은 후에는 어떻게 시간을 보냈어요?
예. 2010년도에 나왔다가 그 담에 저 뒤에 고향에서 한 반년 있다
가. 반년 있다가 그때 윤철이 하고 최승훈이 하고 걔들 같이 술도 
마시고 그랬거든요. 반년 정도··· 그 다음 다시 상해에 들어갔다가 
그 담에 청도에… 청도에는 한국 친구가 있어요. 한국분이. 그래서 
그분이 불러서 합작해서 `해보자` 그래서 온 거예요.
이곳 청도에는 언제 오신 겁니까? 
2011년도에 왔어요. 2011년도 2월 달에 왔어요.
한국분은 어떻게 아시는 분이십니까?
(연변대학교 공동연구자를 바라보며) 연변대학에 최성훈이 있잖아
요? 연세가 다 최성훈 동창이거든요. 최성훈이 하고 바둑을 같이 두
면서. 유학 왔거든요. 전에. 그래서 그가 연변대학을 유학을 왔어요. 
그래서 바둑 두면서 서로 간에 알고. 지가 상해에 있을 때 제가 좀 
도와주고 그 담부터 얘가 안휘성 공장 시작할 때 왔다 갔다 하고. 
나도 청도에 왔다 갔다 하고 그랬어요. 나를 소개시켜준 것입니다.  
그 한국분 성함은 무엇입니까?
박진우라고요. 박진우 사장하고 합작한 이 회사는 어떤 회사냐면요. 
제가 원래 전에는 이분이랑 기름 했어요. 경유. 경유로 해서 한국
에… 여기 한국에 큰 회사 있잖아요. 저 게다가 머 맨드는가 하면요. 
중동 아라비아 천(布) 맨드는 거. 그 천은 세계적으로 3개 밖에 되
지 않아요. 그중에 한집이거든요. 그니까 경쟁도 필요 없고요. 회사
1장. 조선족 사업가 홍춘식의 시행착오와 재기 노력
 
39
는 시류도 타지도 않고. 꾸준히 1년에 30만 달라씩 계속 영업하고 
있어요. 그 회사에다가 기름을 납품했거든요. 많이 납품했어요. 경유. 
보일라 기름. 보일러 기름 그걸 가공해가지고 납품하는 거지요. 박진
우 이분이 원래 상해 금도컨테이너에 있었어요.
그분하고 같이 이걸 합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여기 온 건 좋은 아이템이 있어가지고 좀 해보자고 했지요. 어떤 아
이템이냐면, 기름하고. 기름을 그 저 그이깐 지금 어딘가 하면 저 승
리유전이라고. 여기서 둥멍에 있어요. 거기 광로에 그분하고 옛날에 
그분한테 납품했던 그 회사, 지금 어마하게 커요. 지금 재산을 10억 
갖고 있어요. 그분이 지금 매일 경유를 130t씩 생산하고 있어요. 지
금. 근데 그 기술이 되지 않아가지고 지금 검은 기름으로 나오는 거
에요. 그래서 그 사장이가 저기 박진우 보고 그거 탈색시켜가지고 
이 일을 맡아 달라. 한국에서 할 수 있는 거 와서 해 달라.
한국기술을 동원해서요?
예. 그렇게 해 달라고 그렇게 해가지고 그거 했는데 이때까지 성사 
못했어요. 그거는 그니까는 지금 저도 하고 있어요. 며칠 후에 또 올 
겁니다. 그분은 전공이 중문이죠. 중문학 유학생. 연변대학에 유학와
가지고 그냥 중국에 눌러앉아가지고 사업을 하며 살죠. 먼저 금도컨
테이너에서 출근할 때 총경리 비서로. 사장 비서로 있을 때죠. 그 말 
들어보면 그땐 돈을 어마어마하게 썼더군요. 한 번에 하면 몇 만원 
밑거름 몇 만원씩 막 먹고, 그때는 돈을 막 쓰라고 하라 했었을 때
고요.
나이는 나하고 동갑이에요. 1965년생. 그래도 한 구십 몇 년돈가 그
때도 월급이 인민폐로 한 5만원 이상 됐어요. 많죠. 그게 부도 난 
한 가지 이유가 되겠지요. 자본관리를 제대로 못했다고도 볼 수 있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40
 
고. 잘 나갈 때죠. 특히 기술에 관한… 그 기름이 관한 거는 지금 진
행 중에 있고. 지금 두 분이 하려고….
구상하고 있는 사업은 뭐에요? 
나는 지금 또 김사장 하나 있어요. 보니깐 김규수라는 그 분이 있어
요. 한국분인데, 옛날에 저 90년대에 중반 이후에 위해(威海)에서 
수산물 한국을 수출할 때 많이 했어요. 부도나가지고 지금 수산물 
가공해가지고 여기서 한국식당에 납품하고 있어요. 이름 있는 식당 
하나 있어요. 자하문이라고.
자하문식당은 누가 운영합니까?
그건 정 사장님이라고. 정 회장님이라고 한국인협회 회장님이에요. 
중국에. 이름이 정 뭐라고 하던데. 중국인, 한국분들 다 알아요. 모
르는 사람 없어요. 자하문식당 사장은 원래 한국인협회 수석질 했어
요. 회장, 회장 했어요. 길림성에서 뭐 맨들었나 하면은 옛날에 그 
안마침대, 마사지침대. 그래가지고 돈 억수로 벌었지, 벌었는데, 중
앙TV 경제프로그램에서 그런 효과 없다. 그게 나왔어요. 방송됐어
요. 그래가지고 탁 그렇게 내려간 거에요.
(연변대학교 공동연구원이 관련내용을 설명하며) 왜냐면 이것을 제
가 뉴스로 들은 적이 있거든요. 왜냐면 나도 그거 살라고 검색을 하
다가. 허허허! 돈 생각하다가 이렇게 막 이게 다 안 되어져가지고. 
그 의자는 하나에 가격이 보통 1만 6천원 정도 하죠? 어쨌건 효과
가 그리 좋지 않다고 이게 막 텔레비에 나와 버리니까. 처음에는 엄
청 잘 됐어요. 허위광고로 선전되어버린 격이지만, 내가 느끼기엔 국
내 경쟁업체에서 중국 정부를 움직여가지고. 뭐 방송사나… 그렇게 
된 거라고 봐야죠.
납품하는 자하문식당은 몇 곳이나 됩니까?
1장. 조선족 사업가 홍춘식의 시행착오와 재기 노력
 
41
그분이 지금 자하문식당을 몇 곳에 냈냐 하면은 하나 청도에 있고. 
북경에는 왕징에 있어요. 왕징. 근데 거기는 하루에 6~7만원씩 판매
고 올리고 있대요. 그담에 심천에 있고, 장춘에 있고. 그담 지안(集
安)에 있어요. 여기 산동성 지안에. 큰 도시에는 다 있어요. 지금 상
해에는 없고. 근데 잘 되고 있어요. 그니깐 우리 가보면 우린 납품하
러 가거든요. 가보면 거기 먹는 분들 다 주위에는 회사에 직원들이 
많거든요. 비싼데도 거기서···.
이렇게 김규수라는 분하고 지금 수산물을 가공하는 일을 제가 돕거
든요. 자하문식당에 국내외 수산물을 직접 다 이렇게 우리가 납품을 
하는 거죠. 북경하고 심천하고. 그 다음에 여기 청도하고. 세 곳에다 
우리가 납품하거든요. 그라고 한국에 삼호식품 아세요? 삼호식품 알
죠. 거기도 우리 다 납품하고 있어요.
우리도 저 식품위생허가증을 못 땄거든요. 근데 저희 제자가 그걸 
맨들어준 거에요. 저희 제자가 장춘지질대 다니던 조선 교포에요. 지
금 위해에 있거든요. 우리 제자가 다 위생허가증 다 만들어주고. 그 
이름으로 지금 하고 있어요. 이제 작년까지 다 밑져가지고 올해부
터… 재작년까지 밑졌어요. 이분도 중국현실 잘 모르고 이렇게 각종 
원인이 있어요.
박진우씨이랑 김규수씨랑 다 같이 관계가 좋은 분들이에요. 김규수
는 이제 수산물을 한국에 수출하다가 또 망해가지고 그 담에 저 수
산물 가공을 자그맣게 하는 거요.
저는 그 수산물 덮고 또 화장품하고 있어요. 한국 화장품. 그니까는 
원래는 다른 거 마이 했어요. 근데 지금 두려워 못하는 거에요. 왜냐
하면 라네즈, 마몽드, 참존, 설화수 이거 다 했어요. 지금은 들어오
는 거예요. 해관(海關, 세관)을 거쳐야만 들어오는 거에요. 아니. 이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42
 
거는 원래 고객에게 달라 해가지고 나는 가만히 들여온 거 사다가 
이래 그저 거의 공 값에 주는 거에요. 그니까는 제가 납품하는 가게
는 많이 있어요. 저기 뒤에도 있고. 시내도 있고. 그니깐 한국 화장
품을 한국에서 가져와가지고 이득을 남기고 화장품 소매점에다가 이
렇게 납품을 하는 거지요.
근데 지금 제가 주로 하려는 게 뭔가 하냐면 저 오릭스라고. 한국의 
엘씨씨(LCC) 있어요. 엘씨시 한국에 엘씨시는 한국서 공장 규모가 
제일 클 거에요. 화장품공장.
한국 화장품 판매점(2013.2. 성양구)
엘씨씨라고 엘씨씨 영문자. 근데 저거는 이름 있는 큰 회사는 아니
거든요. 글까나 오이엠(OEM) 방식으로 누구를 생산해주는가 하면 
갑은하고. 샴푸. 니호야. 독일. 그거 생산해주는 회사인데 그 사람들
1장. 조선족 사업가 홍춘식의 시행착오와 재기 노력
 
43
이 저 오릭스 그 회사에서 못해가지고 지금 주로 어디다 생산, 납품
하는가 하면 스킨하고 로션을 사잖아요. 근데 지금 주로 어디로 납
품하냐 카면 사우나에 납품하거든요.
사우나요? 
네. 사우나 근데 그거는 마진율은 높지 않아요 그게 좀 하기 쉽거든
요. 많이 저가니까요. 근데 해관 통관과정에서 돌려보냈어요. 어째 
그래 됐는가 하면 위생허가증하고 영문 이름이 영~ 다른 거에요. 근
데 이번엔 또 다시 들여오자고 해요. 여기 있는 사우나는 제가 다 
납품하거든요. 아~ 청도 여기 있는 유스타라든가 임페리어도 한국 
사람이 한 거예요. 임페리어 유명하죠. 고(高)사장이 한 거지요. 고
사장 같은 경우엔 우리 동네 다니구요. 수정구는 딱 한 번 했어요. 
수정구는 남용태라고 저 문인협회 그 회원 해요. 원래 근로자협회 
회장이죠. 기업가협회에서도 그분이 먼저 했거든요. 그분한테 연계해
가지고 한 번에 다 납품했거든요. 근데 그거 연계해가지고 한국 분
이던 최 사장님이라고. 아니 조 사장님 연계해가지고 들어갔는데 한
번 딱 쓰고 그 다음부턴 딱 끊어버리더라구요. 어째 끊냐면 그게 보
니까 그 직원들이 또 그 사람들이 그게 있는 거예요.
여기 청양 지역(城陽區)에 목욕탕이나 찜질방 괜찮은 데 있습니까?
예. 지금 그니까는 뉴스타 있고 또 여기 힐링사우나. 여기도 한국사
람 한 거에요. 힐링사우나 그거 하고 그담엔 황토방하고. 황토방. 여
기서는 거리 멀죠. 저 한국 거리에 있어요. 한국 거리도 있습니다.
근데 지금 물건이 제대로 들어오지를 못해가지고 못 판 거에요. 이
제부터는 정식으로 제대로 들어오잖아요. 나는 지금 가만히 들어오
는 거 받아다 파니까 마진율이 매우 떨어져요. 작년 3월 달부터 많
이 줄어들었어요. 위해에서 중국 사람이 했는데 세 컨테이너를… 다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44
 
명품들이에요. 다 억지로 건너 들여왔는데 다 몰수당하고 잡혀 들어
갔어요. 부부가 한족인데, 부인은 잡혀들어가 있고 남자는 나오고. 
안돼요. 물건은 보통 배로 들어오죠. 항공으로 들어오면 너무 비싸가
지고 지금도 가만히 배로 들여오는 데가 있어요. 근데 그건 백 프로 
붙잡혀요. 그건 하지 말아야죠. 예 우리 꺼는 정식 위생 허가 난 거
에요.
청도에서의 몇 가지 사업들이 인적 네트워크에 의해 이뤄지고도 또 
유지되는 것입니까?
네. 그렇다고 봐야죠. 수산물은 감사장님과 하고 있고. 결국 여러 분
야에서 일하는 한국 분들과 맺어온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고 봐야죠. 공동으로 또 많이 하니까. 그건 제1원칙이래요. 사람은 
장사라는 게 사람관계가 제일 중요하다고. 사람이죠. 사람 마음. 항
상 사람을 진심으로 대해야 된다는 거죠.
물품을 납품했는데 돈은 안주고 끊어버린다든가 다른 사람한테 사기
를 당한 적이 있어요?
아~ 그건 없어요. 지금까지는. 우리는 다 외국으로 수출하길래 외국
으로 수출했죠. 외국 수출은 돈 관계는 깨끗하거든요. (연변대학교 
공동연구원이 주변 사례를 들어 부연하며) 왜냐면 특히 수산물 무역
에서 예를 들면 옌변 같은 경우에 송이를 가장 크게 하던 그분이 저
희 동창이거든요. 근데 한국 사장님한테 2년을 내간 물품을 지금 돈
을 못 받고 있어요. 거의 한국에 자금이 잠겼다 해야죠. 아니. 없어
요.
저희 학생이가… 아까 말했잖아요? 삼호식품의 위생허가증을 만들어
준 학생이가 한국에 친구분한테 65만 달러 미국 돈으로 65만 달러 
그거 물품을 창고에다 놨거든요 창고에다 놨는데 부도나면서 일꾼들
1장. 조선족 사업가 홍춘식의 시행착오와 재기 노력
 
45
이 그 물건까지 다 사용한 거에요. 그거 찾으려고 한국까지 몇 십번 
왔다 갔다 했는데 결국 해결 못했어요. 그래서 이 사람 물건이라는 
증명이 없거든요. 그래서 저희 학생이 장춘지질대학 조선 교포에요. 
그걸로 해서 바삐 보내고 있어요. 우리 수산물 지금 위해에서 팔고 
있어요. 이와 관련하여 나는 피해본 게 없어요. 나는 그저 돈(자금) 
때문에 애를 먹었어요. 투자를 7년간 했던 걸 접었으니까요. 안휘성
에서 손해가 제일 커요
▮ 칭다오 비즈니스 환경과 지방 현지화
지금 합작회사를 세우셨기 때문에 청도로 오시지 않았습니까?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사업을 하셨는데 청도 지역의 향후 
사업 환경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사업 환경 좋진 않아요. 왜냐면 청도가 정책상이나 그런 면을 보면 
기업 환경이 좋게 만들어지지 않았어요. 정부쪽으로··· 대외적으로 
청도가 상업도시로 알려져 있고 또 한국기업도 많이 들어와 있는데 
그런 환경들은 많이 의아스럽지요. 그래서 한국 기업들이 힘든 거 
같아요. 원래는 한국 정부에 제출해가지고 한국으로부터 중국정부에 
해결해야 되는 거예요. 근데 그렇게 못하고 있는 거 같아요. 그래서 
한국 기업이 좀 많이 당하는 게 많아요. (연변대학교 공동연구원이 
부연하며) 당한다는 게 왜냐면 한국은 아직도 중국보다 기술적으로 
앞섰고 중국기업은 한국의 그런 게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들어올 때
는 이런 저런 조건을 제시해주다가 일단은 자금이 들어오거나 기술
이 어느 정도 보유됐을 때는 정부에서 발을 빼는 거죠. 중국 정부에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46
 
서···.
그리고 보니까 깡패도 많고. 정부에서 발을 뺀다는 건 보호를 안 해
준다는 거에요. 그리고 상해나 안청(안휘성)에 있을 때도 깡패들이 
거의 없었어요. 근데 여기 깡패 진짜 많더라구요.
인터뷰 중인 홍춘식(2013.2)
지역의 깡패는 어떤 형태입니까?
근데 실제적으로 외국처럼 그런 깡패는 따라 못가죠. 중국정부가 엄
하게 다스리니까요. 청도에서는 엄하게 다스리지 않는 것 같아요. 보
통 한국 기업이 만들어지면 어떤 형태가 나타나는지는 구체적으로 
잘 모르겠는데요. 내 아는 그 깡패는 이름이··· 난 당한 게 아니라 
듣는 말에 한국 사람이 이 사람한테 돈을 꿨데요. 돈 대부업체겠지
요. 고리대부업체. 고리대금업자. 제 시간에 돈을 못 갚으니까 기업
1장. 조선족 사업가 홍춘식의 시행착오와 재기 노력
 
47
을 통째로 뺏긴 거예요. 그건 사람한테 들은 말이지, 난 직접은 못 
봤으니까.
야반도주하는 경우도 있습니까?
그거는 경영하기 힘드니까 야반도주한 거겠죠. 그래서 중국분들이 
한국사람 믿지 말라. 한국사람 도망가니까 돈 빌려주지 말라. 이런 
말들을 하죠. 근데 여기 오니까 난 안청에 있어서 조선족들을 접촉 
못했거든요. 전화기가 없고 하니까는. 여기 와서 조선족들 많이 만나
고 한국 사람도 많이 만나는데 한국 사람들이 지금 못가는 사람들이 
많아요. 불법 체류하는 사람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망하는 원인 
중 하나가 기업 관리를 모르는 거에요. 중국 현실을 모르고. 그게 중
요한 원인이에요.
한국기업들이 들어와서 여기 현실을 잘 모르니까 오히려 조선족들과 
관계를 맺어서 사업을 할려고 하는 그런 분위기가 형성이 되겠네요?
그런데 또 중국에 와서 돈을 헤프게 쓰고. 뭐 중국에 오면 중국식으
로 살아야 되는데 한국식으로 사니까. 돈을 쉽게 쓴다는 거는요. 그
게 노래방 가거나 술을 먹거나… 또 작은 기업이라도 뭐 다 갖추는 
거에요. 우리는 내가 할 수 있는 거는 될 수 있으면 내 혼자 하려고 
해요. 사무직원도 한명 쓸 거 두 명 쓰고 세 명 쓰고. 또 한국식으로 
사니까 또 돈 쓰게 되죠. 내같이 하는 사람들 돈 쓰는 건 이해해줘
요. 미국 사람들 미국식으로 살아야지. 전기나 물이 없으면 미국 사
람들은 못살잖아요. 우리는 없어도 가능하잖아요.
한국에서 중국 교포들의 불법 체류도 있지만, 한국분들이 중국에서 
불법체류 되버리는 것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나요? 
첫째, 돈 다 까먹었어요. 이제 돈 꿀 데도 없어요. 못가요. 출국 못
한 게 아니고. 비행기표가 없어서 못가요. 또 하나는 한국에 들어가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48
 
면 잡힐 수도 있고. 빚쟁이들이 많아가지고 그렇겠죠.
근데 여기 조선족 기업협회분을 만났어요? (기업가인 연변대학 청도
지역 동창회장을 만났다고 하자) ‘김경훈’이라고 아시는지 모르겠는
데요? 그분이 지금 북경 갔는데 그분의 친 매형이 연변대학 교장에
요. 박영호. 연변대에 있다가… 여기서 잘 나갔어요. 그분이 저 기업
협회 회장 하다가….
역으로 여기에 있는 조선족분들이 한국 기업가 분들에게 사기치고 
그런 건 없을까요?
잘 모르는데… 저번에 한국식당에 가서 먹었거든요. 저희 직원 부인
이 거기서 일하거든요. 거기서 먹을 때 거기 사장님이 말하는 거에
요. 그분이 원래 기업했거든요. 기업 그만둘 때 기계들이랑 전부 한
족들에게 주어버렸다고 해요. 조선족분들이 나쁜 짓을 하니까 안줬
다고 그랬어요. 기업이 나가면서 조선족분들한테 안주고 한족사람한
테 다 그냥…. 믿음 좋고 이렇게 했다면 자기가 조선족 준다 이랬거
든요. 여기 오고 나도 놀랬어요. 안테나 있는 아파트 있는 데 전부 
조선족 아니면 한국분들이에요.
(연변대학교 공동연구원이 설명하며) 그렇죠. 말로만 15만 인구라 
해도 어제 한 제자가 하는 말이 대사관에서 통계한 게 40만이랬죠. 
정부 통계가 아니고 대사관에서 한국말 할 줄 아는 사람이 40만 여 
명. 네. 40만 여명. 연길 도시인구가 56만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연
길 도시 하나가 여기 와있다 보면 되죠.
아까 말한 김경훈이 얘기하는 게 이래요. 청도에서 연변대학생들이 
길림대학생들보다 더 잘나간다. 우에 그런가 하면 연변대학생들이 
사회교제가 많이 낫대요. 그게 있어요. ‘칭상’이라는 게 있는데 IQ가 
20% 차지고 이게 80% 정도래요. 하하하! 저도 안휘성에 갔을 때 
1장. 조선족 사업가 홍춘식의 시행착오와 재기 노력
 
49
그 문제에서 실패한 거예요. 딴 지방에 갔으면 딴 지방을 알아야하
는데 나는 내 식대로 한 거예요. 나는 지금 수출하니까 너희와는 상
관없다 이런 식으로 살았거든요.
사회관계 형성을 포함한 지방 본토화, 현지화를 잘 못하셨네요? 
그래서 많은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었어요. 과거 경험과 깨달음이 있
었기 때문에 여기 청도 지방에서는 그걸 거울삼아 잘 하려고 해요. 
하하하! 이제 금방 이쪽으로 시작했거든요. 이제 2년 조금 넘었네요. 
만 2년이네요. 그 전에는 기름만 중시했거든요. 돈 일절 벌지도 못
하고 기름에만 매달렸다가 그 다음에는 화장품도 하고 수산물 쪽으
로도 돌린 거예요. 조금은 괜찮아지려고 하는데, 근데 구정 때문에 
이번에 또 자금 일부 회수 못했거든요.
구술 중인 홍춘식(2013.2)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50
 
그래도 여러 경험들이 있으시니까 여기서는 어떻게 보면 지금 사업
의 2기쯤 한 텀(term)을 마치고 새롭게 시작하는 과정이라고도 봐
야겠지요?
어쩌면 또 영(零)부터 시작한다 생각하고 있죠. 한 회기를 마치고 
새롭게 시작하는 과정이므로 한편으로 부담도 있습니다. 저는 일체 
부담을 없애려고 하거든요. 어떤 뭐 고통이라든가 이걸 없애려 해요. 
뭔가 있다 하면 예전으로 마음을 돌려요. 아~ 이건 안 그래야지. 
아~ 이건 자연현상이다 모든 걸 자연현상으로 돌리는 거예요.
그런 영감을 어디서 받았어요?
그거 안휘성에서 실패하면서 한 반년 집에서 쉬면서 많이 생각했거
든요. 사람은 유쾌하게 웃으며 살아야 한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 칭다오의 기업환경, 종족자원의 활용 
청도라는 지역을 발판으로 꾸준히 여기서 사업을 확장할 계획이십니
까? 아니면 여기서 재기해서 이전에 사업하시던 곳으로 다시 가실 
거예요?
지금 화장품 사업은 여기가 환경이 좋아요. 여기가 정보도 많고. 화
장품은 하자면 여기서 시작하는 것이 유리하고. 그 다음에 어느 정
도 되면 상해 쪽으로 옮기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S&P라고 알아요? 한국의 회사인데요. 그 회사 화장품을 중국에 중
재를 맡자고 박 사장하고 추진하고 있어요. 높은 사람 왔다가고. 모
공축소. 그 다음에 주름제거. 아니 반점이라든가 알레르기 억제기요.
S&P라고 지금 그 회사에서 어디로 팔고 있던가 하면… 홍콩하고 싱
1장. 조선족 사업가 홍춘식의 시행착오와 재기 노력
 
51
가포르 팔고 있던데요. 지금 중국은 가마이 있고… 중국은 지금 계속 
총대리점으로 추진하고 있는데, 총 대리점은 싫다. 그거는 처음부터 
그렇게 중국에서 그렇게… 그래서 나는 우리 실적이 있은 다음에 달
라 했거든요. S&P. 이름은 한국에서 찾을 수 있어요. 이거는 정식 
위생허가 받은 거예요. 정식 위생허가 받지 않은 상품들은 이젠 못 
들여와요.
정식 위생허가는 어디서 내는 겁니까?
중앙위생감독국 거기서. 그거는 중국에 있는 겁니다. 중국에서 허가
를 받아야만… 근데 확실히 힘들어요. 어찌 힘든가 하면 매 품목마다 
허가를 맡아야 되요. 내가 여기서 화장품 회사를 하면 전체적으로 
위생허가만 받으면 어느 제품이던 상관없어요. 근데 수입하자면 매 
품목마다 다 허가를 맡아야 되요. 매 품목마다 받으려면 6개월 걸려
요. 제대로 못하면 1년도 걸리고 빠르면 3개월인데 보통은 6개월 걸
려요. 그래가지고 한국의 많은 화장품회사들이 중국을 못 들어오는 
원인 중 하나에요.
중국에서 한국 화장품을 차단하려는 그런 게 좀 있죠?
경쟁이 엄청 심하니까. 그리고 사실 중국 여성들이 한국 화장품 선
호하거든요. 선호합니다. 저도 여러 군데 화장품가게에 납품을 하고 
있지만, 지금 화장품이 없거든요. 그 사람들도 지금 누구 오는 데 부
탁해가 가져올 거예요. 그래서 많이 못 들여오는 거예요. (연변대학
교 공동연구원이 칭다오 화장품이 연길시에서 구입한 것보다 싸다고 
말하자) 제가 하나 사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싸게 받거든요.
중국어가 여기서는 불편이 이제 없죠?
아~ 제가 대학교에서 교사로 있을 때 언어 때문에 정말 많이 노력
했습니다. 그 이후로는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52
 
여기 청도에서 사업을 하시는데 있어서 가장 도움이 되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근데 그거는 취급하는 품목에 따라 틀리거든요. 그게 어떤 것이냐에 
따라 자꾸 인간관계는 필요하거든요. 혹시 문제 생기거나 하면 공산
국에서 사람 찾아야 되고. 해관에 문제 있으면 해관에서 찾아야 되
고요.
이제 여기는 조선족도 많이 있고 한국인도 많이 있지 않습니까? 물
론 한족이 제일 많겠지만요. 조선족하고 한국인들을 사장님이 사업
하는데 앞으로 어떻게 활용을 한다고 할까요?
지금까지는 김규수 사장님이 도와주셔서 그분도 저한테 한국의 화장
품 회사를 소개해주는 거. 아직 성사되진 않았지만 그 점에서도 좀 
중요하고요. 근데 지금 뭐 인터넷이 발전해가지고 제 손으로 다 찾
고 있습니다. 직접. 조선족이라는 것이 중국사회에서는 소수민족이고 
그렇지만은 조선족이기 때문에 한국말에 능하고 그래서 한국과 한국 
사람을 만나고 한국 기업인을 만나고 한국을 통해서 사업을 하는데 
있어서는 장점일 수 있겠습니다. 한국 때문에 조선족들은 많은 좋은 
조건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이거는 뭐 회피할 수 
없는 그것 때문에 조선족들이 미신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죠. 하하
하! 여기는 조선족도 많고 한국인도 많기 때문에 그런 관계를 잘 활
용하면은 더 유리한 점이 있지 않겠나 이런 생각이 드네요.
그러면 단점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그런데 제가 느낀데는 한국 사람들이 단합성이 좀 약한 거 같애요. 
단합성. 청도 지역에서. 같이 교류하고 서로 돕고 이래야 되는데. 제
가 느낀 건데 그런 거 같애요. 왜 그럴까요? 한국인끼리 조선족끼리 
동종업종 끼리 좀 과도한 경쟁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떻게 보니까 
1장. 조선족 사업가 홍춘식의 시행착오와 재기 노력
 
53
한국 사람들끼리 경쟁이죠. 
화장품업계도 그렇습니까? 
예. 화장품도 가격이 싼 원인이 한국에서 들어오면서 다 싸게 늘어
노니까. 도매로 얘기하자면, 일정한 양이 되어야만 수익이 되는 거예
요. 그렇죠. 근데 경쟁 심하까나 마진율이 자꾸 낮추어지죠. 근데 조
그만한 시장에서 마진율이 낮춰지니까 대부분 사람들은 안 되는 거
예요. 다 경쟁 때문에 그렇죠.
수산물 가공 사업은 어떻습니까?
그것도 좀 경쟁하긴 하는데 너무 심한 건 아니죠. 근데 아직까지는 
시장층이 너무 크진 않아요. 중국 사람도 아직까지는 저 해산물, 바
다고기를 내륙에서 못 먹는 게 많아요. 청도에서도 마이 먹지 않아
요. 청도에서는 삼치나 요런 거 먹지. 예. 싸구려 삼치.
수산물은 어떤 종류를 취급하십니까?
선물세트를 많이 하거든요. 구정 전에 선물세트를 하고. 대중소. 소
(小) 짜는 198원에 팔고. 중(中)짜는 298원에 팔고. 대(大)짜는 
498원에 팔았어요. 근데 소짜는 4종류고 중짜는 10종류고 대짜는 
15종류예요. 대짜는 민어라든가 뭐 가자미라든가 그 담에 저 고등
어, 갈치, 오징어. 그담에 많애요. 열 댓가지 있는데. 그담에 게도 있
고 새우도 있고. 그라고 이렇게 바쁜 원인이가 첫째는 자금이고 둘
째는 시장이고 세 번째는 기술관리.
공장관리예요. 많은 사람들 몰리고 있어요. 망하는 사람 보면서도 그
러나 말거나 판단 서지 못하고 막 그저 투자하고. 시장도 조사하지 
못하고 거저 감각에 투자하는… 그래가지고 인생 망하는 거예요.
과거에 살지 않으셨고 오신지도 얼마 안 되지만, 청도의 기업 환경
은 어떻다고 보십니까?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54
 
예. 잘 모르는데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데 얘기하면 청도는 환경이 
너무 좋은 거 아니에요. 근데 왜 안 좋은 데로 들어오셨냐고요? 허
허허! 박 사장님이 초청하니까 온 거죠. 나는 그분이 돈이 있는 걸
로 믿고 왔지요. 내가 망하니까 나 부르니까나요.
박 사장 이분은 여기 청도에 오래 사셨습니까?
1996년도부터 여기 살았거든요. 박진우 사장이죠. 상해에서 몇 해 
있다가 금도그룹이가 부도나서… 컨테이너 생산을 했어요. 상해에서. 
상해시 공화구가 합작해가지고 컨테이너 생산하다가 그담에 저쪽 중
국 업체에다 팔아버렸어요. 박진우 사장은 여기 사정을 환하게 꿰뚫
고 있는 건 아닙니다. 잘 몰라요. 제가 쫌··· 그걸 모르니까 자꾸 실
패하는 거예요. 그리고 또 시장 조사도 없이… 전번에 내 오기 전에 
반점했다가 안 되고. 또 한때 복장가게를 했다가 안 되고. 근데 옷가
게는 가방이나 그건 하지 말아야 돼요. 기회 많았는데 기회를 최대 
이용하지 못한 거죠.
한국인 하고 사업 연계를 많이 맺어오셨는데, 가장 좋은 점은 무엇
입니까? 또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떤 것입니까?
좋은 점은 그래도 한국이라는 이 한국인 전체 브랜드가 좋은 거예
요. 중국인에게 상품 이미지가 좋은 거예요. 그래서 따로 뭐 상품 광
고를 낼 필요 없어요. 광고를 안 해도 한국 물건이다 하면 뭐 되는 
거예요. 그렇지만 다른 나라 거 중국에 팔자면 광고가 없이는 안 돼
요. 그렇습니다, 큰 광고를 하고 막 해야 돼요. 작은 광고라도 할 수 
있죠. 그게 가장 좋은 점이죠.
1장. 조선족 사업가 홍춘식의 시행착오와 재기 노력
 
55
▮ 고향 동북지방과 모국인 한국
청도는 객지인데, 친척이 살고 있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고향 사람들 향우회는 다 있는 걸로 알고 있거든요. 
향우회. 연변향우회. 연변에 출신들 고향 출신들로 여기에 사시는 분
들의 모임이죠. 그런데 저는 한 번도 참석 못했거든요. 전번에 연변1
중 동창회 모임에 딱 한 번… 이십 몇 년 만에 처음으로 거기 참가
해 봤습니다.
청도에도 고향분들이 더러 와있지요?
예. 있다 하거든요. 향우회도 있지요. ‘화룡향우회’라고 있다고 하더
군요. 근데 거기 아직은 참석 못했어요. (연변대학교 공동연구자를 
가리키며) 여교수님 남편분하고는 초중, 그러니까 중등학교 동기동
창입니다. 한국말로 하면요. 중학교죠. 태어나 자란 곳이 서로 이웃
하는 마을입니다. 그때는 한개 향(鄕)이였어요. 행정 단위가 중국에
선 향 다음에 촌(村)입니다. 같은 촌은 아니고요. 같은 향 출신입니
다. 촌 담에 향이고. 그담에 현이고 그랬거든요. 옛날에. (연변대 공
동연구원의 남편을 지칭하며) 그땐 매우 친했어요. 난 그때 한 살 
어리든가? 우창(五常)에 다녔다가 같이 사귀고. 날 꼬마라고 놀리고 
그랬거든요. 하하하! 그 친구는 키 좀 커요.
(화제를 바꾸며) 코트라(KOTRA) 알죠? 젊은 중소기업을 지원해주
는 기관… 코트라가 그걸 위한 업체죠. 코트라가 이제 무역 한국 무
역을 도우는 한국의 국가 기관이라던데요. 근데 한국에서 금방 들어
와서 기업하는 사람들 있죠? 옛날에 금방 들어와 가지고 아무 것도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56
 
모르는 상황에서 막 하니까 그래서 많이 망한 거예요. 그리고 또 임
시로 그걸 원래 지도해주고 이끌어준 그런 구각기관이 있어야지요.
코트라에서 지금 기업 지원 프로그램이 있긴 하는데 어떤 방식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상세하게 세부적으로 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현지 사정을 
알아 가지고 그걸 바탕으로 관련 정보를 주고 그런 일을 하겠지요. 
(코트라의 명칭을 설명하며) 케이오(KO)가 코리아. 티알(TR)이 트
레이드(Trade). 에이(A)가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 그래서 코트
라죠. 한국무역협회. 이렇게 될 거예요. 저희가 관계하는 에스엔피
(S&P) 회사도 코트라에서 소개 받아서 지금 하고 있어요.
한국에는 자주 다니시죠?
두 번 갔다 왔어요. 2002년도에 한 번 갔다 왔고. 그리고 2006년도
에 한번 갔다 오고. 그때는 어떤 일로 다녀왔냐면요. 2002년도에는 
제가 한국에 제품을 상해 있는 친구한테 그 총대리로 총판을 맡는 
걸로 제가 중간에서 소개해 주었거든요. 그때 같이 가서. 무슨 제품
이냐면 그때 방직벨트였어요. 방직기 벨트. 벨트. 방직기계. 그 옛날
에 그 네덜란드 거 많이 썼거든요. 품질 좋은 거 독일하고 일본 꺼 
쓰고. 근데 한국에서 새로 개발했어요. 처음에는 몇 해는 잘 팔렸을 
거예요. 그걸 이제 제가 소개를 해준 거예요. 내가 같이 하자고 해
서. 날 지분 주겠다고 했는데. 하지 않았었는데요. 내 꿈이 있었으니
까.
2002년도에는 부산에 갔어요. 그담에 수원하고. 그담에 서울하고. 
뭐 두루두루 돌아보았죠. 보름 동안. 그때는 어디 가족끼리 간 거 아
니고 혼자 갔어요.
2006년도에는 어떤 일로 갔었나요?
1장. 조선족 사업가 홍춘식의 시행착오와 재기 노력
 
57
2006년 한국에 가서 놀러갔다 왔어요. 관광으로. 그때 서울하고 그 
다음에 춘천에 강원대학에 같은 교수로 있는 그 분한테 놀러가고. 
강원대학에 박사님 만나러. 강원대 최성현이라고. 연변대학에 지금 
교수로 있을 거예요. 춘천 강원대학. 그때 춘천엔 그저 그 친구한테 
놀러가서 술이나 먹고 왔어요. 하하하! 그날 익산에 갔다 왔어요. 익
산에 가서는… 거기 우리 친척이 있어 가지고. 우리 와이프 친척이 
있어가지고요. 갔다 오고.
2장. 부동산 사업가 최용식의 삶과 조선족 교회 
목회활동
조선족교회 현수막(2013.2)
2장. 부동산 사업가 최용식의 삶과 조선족 교회 목회활동
 
59
■ 최용식 연보
- 1958년 : 중국 흑룡강성 목단강시 삼릉 출생
- 1975년 : 17세에 소학교 졸업
- 1977년 : 농사 겸 관정 개발사업
- 1988년 : 기계 정비업소 운영
- 1992년 : 35세에 한국에서 용접공으로 1년 4개월 노동
- 1994년 : 중국 대련 귀국
- 1999년 : 칭다오 이주, 조선족교회 목회활동과 부동산 사업 
병행
- 2014년 : 조선족 교회인 중앙교회 목회활동 중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여기 들어온 목적이 뭐예요?
저희들은 대학에서 가르치고 연구하는 선생들입니다. 또 연변대학 
교수님도 한분 계시고요. 전 세계에 저희 동포들이 흩어져 살고 있
지 않습니까? 특히 일본하고 중국 조선족, 러시아 고려인 이런 분들
이 초기 이주해 오셔가지고 어떻게 살아오셨는지에 대해 그분들을 
직접 찾아뵙고 말씀을 들어 연구하는 게 목적입니다. 이번에는 길림
성이나 흑룡강성, 요녕성 등 동북3성에서 청도시를 포함한 중국 내
로 이주해 오신 우리 동포들이 어떤 삶을 살아오고 있는가를 저희들
이 좀 살펴보려고 왔습니다.
현지에 살고 있는 주로 신앙적으로 말씀드려요? 아니면 이런 추상적
인 이런 뭐 어디 뭐 우리 민족, 동포들이 사는 중 …  외…  외국에서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60
 
사는 가운데서  또 뭐 애로점이라든가 이런 걸로 주로 들으셨는지? 
아니면 신앙적으로. 뭐 신앙적으로 고찰하기 위해서 들어오셨는지?
다 포함됩니다. 오늘 저희들이 교회에 간 것은 두 가지 목적이 있습
니다. 하나는 이제 조선족 교회니까 조선족 분들이 계시므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는 동북3성에서 이곳으
로 재이주해가 여기 살고 있는 우리 조선족분들에게 교회가 어떤 구
심점 역할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교세를 여기에 뿌리 내리면서 살고 있는가 그런 측면에서 여쭈고 싶
습니다. 그리고 집사님 개인적으로 살아온 삶의 내력, 할아버지 때부
터의 역사에 대해서도 여쭙고 싶습니다.
네.
▮ 아버지가 흑룡강성 이주
그러면 우선 집사님 존함부터 여쭤보고 싶습니다. 
제 이름은 최용식이에요. 경주 최가입니다. (중국어로 써주길 부탁하
자) 저…  중국 글 잘 못 쓰거든요. 용은 물 용(溶) 자라 카던데. 앞
이 삼수 변(氵)에다가 용모 할 때 얼굴 용(容) 자입니다.
생년은 어떻게 되십니까?
저 좀 나이 많아요. 58년생이에요.
할아버지 때 중국으로 오셨습니까? 조상분들이 언제 어떻게 동북으
로 오시게 됐는지에 대해 좀 말씀해 주십시오?
아~ 그건요. 저는 우리 저기 조상의 역사들을 잘 몰라요. 조상의 역
사는 모르고. 조상분들 고향은 이북이고요. 우리 아버지가…  열여섯 
2장. 부동산 사업가 최용식의 삶과 조선족 교회 목회활동
 
61
살 때 중국으로 넘어 올 때는 혁명한다고 넘어 왔어요. 실제로. 열여
섯 살 때. (목을 가다듬으며) 부모들이 결혼, 혼사시켜라 한 걸 막아
버리고 도망을 왔겠죠. 예. 그러고 중국에 와서 옛날에는 소련하고 
아주 이렇게 맺어가지고. 그래서 아마 건너 왔어요. (한숨을 내쉬면
서) 그리고 와가지고 뭐 혁명한다 하니까. 혁명 한다 하니까 아마 
우리 아버지 총각 때라서 좀… 중국 국가에서 아마 지하 공작자로 
많이 일을 하고 그러니까.
아마 철저했나 봐요. 그때 1947년도인가 그땐가? 아마 중앙 부주석
의 차…  우리 아부지가 저기 뭐야? 자동차 잘 몰거든요. 그러니까 
아마 그때 당시에 부주석의 차를 뭐 국민당하고 한창 싸우고 막 이
렇게 할 때고 하니까. 아마 이제 뭐 사상 같은 게 철저해야만이 할 
수 있죠. 그 나라의 주석들이 차를… 이거 뭐 맨통 두드리고 욱실거
리고 하니까.
사상이 투철하지 않으면 그런 지도자들의 차 운전을 당연히 안 맡기
겠죠?
근데 뭐 중국 사람이라도 이래서 안 되고, 당신은 또 이래서 안 되
고… 아마 우리 아버지가 아주 철저하니까 아마 그래 됐겠죠. 아마. 
그래서 중국에서 자동차 일하는데, 부주석의 차를 목단강시. 그때 당
시에 아마 목단강현(縣)이랬나? 아마…. 그쪽에서 그냥 부주석의 차
를 몰면서 우리 엄마를 만나가지고 결혼해가지고.
근데 핏줄로는 조선족이니까. 말이 안 되잖아요. 민족…  중국 대민
족하고 틀리고 하니까 그래 가지고 그때 당시 안 되겠다. 도로 이북
으로 나가야 되겠다. 이래 가지고. 중국이 해방돼가지고 그 다음에는 
나와서 목단강 그 지점에가 옛날에 지하공작 때 있었으면 많이 다녀
봤던 좋은 자리를 봤겠지요. 그러니까 여기서 좀 돈벌어가지고 다시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62
 
조선으로 들어가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들어 못가고 그 자리
에서 머무르고 그냥 평생을 보냈는 거죠.
뭐 저는 딴 게 아니고. 저는 그냥 학교도 못 다녔고. 다니다가 문화
대혁명을 거치다 보니까 다니지 못하고. 소학교 밖에 못 다녔어요. 
중학교 1학년 다니다가 말았는데.
▮ 1958년 흑룡강성 목단강시 출생, 어린 시절
집사님께서 태어나신 곳은 어디십니까?
태어난 건 목단강 쪽이죠. 흑룡강성 목단. 흑룡강성 목단. 그러니까 
‘목단’은 지구라고 치죠. 목단은 지구죠. 그러니까 우리들은 서로 오
가면서 얘기할 때 동네를 “목단 가나?” 하면, 거진 다 알죠. 목단은 
지역이잖아요. 그래서 저는….
어릴 때 그 동네 이름하고 동네 풍경들이 좀 기억이 납니까? 소학교 
다닐 무렵 어릴 때 어떻게 살으셨는지요? 거기도 우리 조선족 집단 
거주지였습니까?
그러니까 조선족하고 중국 사람들 하고 같이 섞여 살죠. 한족들. 한
족들하고 같이 섞여 사는데… 우리야 뭐 어릴 떄 그런 뭐 역사 그런 
건 잘 모르고 일단은 우리 옛날에 ‘삼릉’이라고요. 삼릉(三稜). 그 묘 
있잖아요? 릉(稜)이 세 개. 묘가 세 개. 아마 옛날에 그때 보면 뭐 
조선에서 [묘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왔댔어요. 어렸을 적에 
보면… 삼릉이라고 뭐 왕이 무슨 뭐 이래가지고…  뭐 그런 거는 조
금 기억이 나지. 그러고는 뭐.
소학교 다녔던 기억은 납니까? 한족들 하고 같이 학교를 다니셨는지
2장. 부동산 사업가 최용식의 삶과 조선족 교회 목회활동
 
63
요?
소학교 다닐 때는 매 우리 조선족들이 다녔던 학교 있죠. 맹 조선족 
학교가 있고. 원래는 중학교까지 있었다는데 문화대혁명 그때 그거 
지나면서 본래 소학교가 6학년제 됐는데 이제 5학년으로는 줄였어
요. 그러고 뭐 그때는 문화대혁명 그걸 거치고 이래 되니까 공부 이
런 데는 중시 안하잖아요. 그렇죠. 혁명 한다 하면 여~ 완장이나 끼
고 다니고 하니까 공부가 안되죠. 거기 조선족 학교가 원래는 중학
교까지 있었어요. 그랬던 게 그해 문화대혁명 거치면서 중학교도 무
너져버리고요.
그러고 우리 저~때는 6학년제가 있었는데. 소학교가 6학년제랬는데 
5학년으로 줄이다 노니까 우리는 원래 올라가서 중학교 1학년 가야
되는데 6학년을 없애버리니까 또 그 자리에 한 번 더 앉아버리죠. 
네. 그래가지고 다시 중국학교 가니까는 중국 사람들하고… 한 동네
는 살아도 그 사람들 어렸을 적 가~들 하고 같이 조선 사람들은 따
로 사니까. 예. 따로 요렇게 사니까.
거주지가 이래 구분되네요?
네. 그러니까는 큰 동네는 하나지만 조선 사람들은 여기 무리지어 
살고 이렇게 살고 하니까. 정말 전혀 뭐 학교…  뭐 막 거기 슈퍼 같
은 데 가서 뭐 뭐 사탕이나 사고 뭐 이런 거 사는 거까지는 되지만
은 교류 같은 건 안 되잖아요. 근데 중국 학교로 바로 넘어가 버리
니까는 말이 완전 캄캄하니까는 공부가 안되지요. 그러고 나니까 뭐 
다니다가 말고 뭐 그래…  그냥 뭐 사회 나와서 그때까지는 아직까
지 그 땅 같은 거 나누지 않았으니까. 다 집체 되고 이랬으니까요.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64
 
▮ 장문철 부주석의 운전사였던 아버지
그때 아버지는 어디에 계셨으며, 직업은 뭐였습니까?
우리 아버지야 뭐 농촌에 가서 그냥… 옛날에야 땅을 혼자서 해가지
고 거기서 쌀 팔아가지고요. 조선 나간다는 기 못 나가고. 해방. 중
국이 해방되가지고  못나가고. 나중에 저 뭐이에요? 그거 그때 당시 
무슨 세댄지 다 땅을 거둬들이고. 뭐 공산주의 그거잖아요. 그래 놓
으니까 사회주의 국가래서 다 모다 가지고 하니까. 뭐 아무 것도 없
죠. 동네서 그냥 뭐 살다가 그냥….
아버지께서는 농사를 지은 겁니까?
우리 아버지는요. 그 앞에는 결혼 전에는 이제 그 장문철 부주석 차 
운전하시고. 차 몰았고.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공상이 많아요. 조선 
사람들 치고는 아주 좀 머리가 총명해요. 그런데 우리 그 근처에는 
옛날에 화산이 폭발되어가지고 땅 밑에 다 돌이에요. 돌. 그래 그 위
에 흙이 한 10센치 이렇게 있어. 그 위에다가 벼를 이렇게 하고 했
는데. 못 쓰는 땅이 많거든요. 맨 돌이니까.
그래 우리 아버지가 16만 자를 썼어요. 중국글로. 네. 발해. 발해에 
대해가지고. 그 ‘동영성 씨방’이거든요. ‘경박호’라고 혹시 들어 봤을 
거에요. 아마. 경박호. 그곳이 유람지인데. 그 쪽이 다 세벙인데 아
주 뭐 하여튼 수 천 쌍 돼요. 그냥 뭐 땅이 수지 없이 많아요. 그랬
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때 당시 이걸 계획해가지고 포도원을 만들어
야 되고. 그리고 발해 그 지역이 아주 커요. 옛날에 발해왕 때 그 발
해왕 터 그 지역이거든요. 거기가 살기도 좋은 데고 이러니까 거기 
2장. 부동산 사업가 최용식의 삶과 조선족 교회 목회활동
 
65
있다가 발해대학교를 세워야 된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니까 계획이죠. 
그러니까 뭐 영암지역에 있는 아주 뭐 이런 몇 가지….
세가진가 네가진가 이런 계획을 해가지고. 그때 후에 북경으로 혼자 
갔어요. 자기가 16만자를 써가지고 북경에 가서 그때 주인 네를 만
나겠다고. 천안문 광장에서 열이틀인가 있었어요. 네. 그것도 경비
(돈)가 없어가지고. 옛날에는 다 생산대잖아요. 그러니까 경비도 없
어가지고 저하고 우리 누나가 가마니 알죠? 가마니. 볏짚을 싸는 그 
가마니. 그래가 40섬씩 한가마니 해가지고 몇 백 장 만든 걸 몇 십 
원 해가지고. 경비를 해가지고. 우리 아버지 거기 가서 천안문광장에 
가서 열 며칠 있으면서 저 주인네를 만나겠다고 이래가지고요. 나중
에는 천안문광장에서 열 며칠을 그냥 밖에서 계속 자고 이러니까 잡
혀버린 거예요. 공안에 잡혀버렸죠.
그래가지고 물어보니까, 이렇게 마이 수집해가지고 그냥 올려 보내
고. 그러고 다시 돌아왔어요, 잡혀왔어요. 실제로는. 그 뭐 우리 아
버지는 자기 하자던 꿈을 이루지 못했죠. 그러니까 북한에 도로 들
어간다고 하는 걸 들어 못 갔고. 우리 아버지가 여기서 살면서 그때 
조선대학교 맞을 거예요. 아마 무슨 고려대학굔가 만들려고 했어요. 
우리 아버지가. 북한이 아니죠. 우리가 사는 동네에다. 흑룡강성에서
요. 그 이름이 아마 고려대학교? 우리가 조선 사람이잖아요. 거기 또 
조선 사람이 많잖아요. 그렇죠. 그래가꼬 고려대학교를, 대학교를 해
야 된다고 하고. 그 석광탄을 버린 땅을 해서 다시 개혁해가지고 포
도원을 만들고 논을 만들어서… 이러면 어떻게 잘 산다 이런 계획서
에요. 그러한데 그 꿈이 못 이루어지고. 그래놓으니까 1년, 2년 가다
나니까 그렇게 뭐 끝나고 말았죠. 뭐. 그렇게 해서 꿈은 못 이루셨
죠.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66
 
그러면 할아버지, 할머니 행적은 모르십니까?
그거는 저는… 얼굴도 못 봤죠. 아버지로부터 말씀하신 것도 들은 바
가 없고요. 우리 아버지는 순전히 그저 조선에 있으면서 할아버지가 
아마 노친이 일찍 죽어버렸는지 아니면 이혼해 그런지… 아니면 뭐 
뭐 노친 없이 뭐 이렇게 하다 나니까 우리 아버지도 그쪽에 교육이 
안 되고 이래 놓으니까. 그때 당시에 혁명 한다 이러고 중국으로 들
어왔겠죠. 얼추… 그러고 도망치고 왔겠죠. 아마.
▮ 30세에 기독교 입문
형제자매는 어떻게 됩니까?
아~ 우리 형제는 6남맨데요. 제 위에는 보지도 못했어요. 6남맨데 
서이는 제 울(위)로 다 죽었어요. 어렸을 때. 그런데 제 울로 누나가 
있고. 내 동생이 아래로 있어요. 그러니까 제가 두 번째지요. 밑에 
남동생이 있고, 위로 누나가 있고요. 남동생 밑에는 없죠. 그러니까 
3형제 포함해서 모두 6남맨데 서이 죽고.
기독교에는 언제 어떤 동기로 입문하셨습니까?
그랬다가 저는 저기 신앙에 뿌리박게 된 건… 나도 힘들었구요. 우리 
아버지 40세에 날 낳으니까. 늦게 낳았지요. 그러고 제가 30세에 장
가를 갔으니까.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 칠십이잖아요. 네. 그러니까 
아주 힘이 들고 좀 생활이 곤란했어요. 그래 가지고 힘들고 어렵고 
하니까 어디 의지할 데 없잖아요? 그래가지고 신앙을 가지게 됐어
요. 하나님을 믿게 됐죠. 제가 일찍 서른 살에 믿었어요.
결혼을 하면서 부인이랑 같이 신앙생활을 하셨군요?
2장. 부동산 사업가 최용식의 삶과 조선족 교회 목회활동
 
67
결혼해서 힘들고 해서 믿었어요. 네. 그리고 결혼하는 그 해 우리 아
버지는 그냥 평생 꿈을 이루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죠. 제가 결혼한 
그 해에요. 어디가 많이 아파서라기보다는… 그러니까 칠십이니까 그
때 당시 칠십이면…. 그때는 장수하신 거죠. 그렇죠. 거기다가 풍(중
풍)이 좀 오고 이랬는데. 이래 가지고.
결혼을 하셔가지고 모친은 계속 모셨네요?
네. 그렇죠. 모친은 돌아가신 지가 10년 됐죠.
▮ 소학교 졸업 후 농사와 관정 개발, 기계 정비소 운영
그러면 집사님께서는 소학교를 마친 후에는 어떻게 지냈습니까?
저는 뭐 공부하기 싫으니까 문화대혁명 거치면서 공부가 재미없잖아
요. 계속 뭐 일이나 하고. 어디 가서 방조나 해주고. 뭐 논에 나가 
모도 심어주고. 뭐도 해주고. 공부가 재미없으니까는. 학교에 실제 
다닌 시간은 많아요. 제가 일곱 살에 학교를 다녔거든요. 네. 일찍 
다녔거든요. 일곱 살에 다녔는데 열 입곱 살에 나왔단 말이에요. 그
러니까 일곱 살에서 5학년까지는 아주 잘 다녔어요. 아주 공부도 괜
찮게 했고. 이렇게 했는데 문화대혁명 이후 오자 나는 공부가 안되
니까요. 그 다음 중국학교로 넘어 가버리고. 6학년이던 게 5학년 줄
어들었죠. 그러니까 한 학년 묵은 거나 다름없죠. 그러다가 한족, 한
족 학교로 넘어가버려서…  거기서 또 안 되거든요. 공부가. 그러니
까 그때는 시험도 없어요. 그때 당시 노어를… 한창 노어를 배울 때
거든요. 노어는 일등이에요.
그런데 뭐 수학, 어문 이거는 뭐 뭐 금방 말을 알아 못 들으니까 안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68
 
되잖아요. 노어는 책으로 배우니까. 빨리 배우니까 그거는 일등인데 
딴 게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중국학교에서 옛날에는 시험도 없어
요. 올라가고. 6학년에서 7학년 올라가야 되는데… 그냥 물어요. “너! 
올라 갈 꺼냐? 아니면 그 자리에 앉을 꺼냐?” 그라면 똘랑 피우기 
좋아 하니까, ‘아~ 올라가봐야 뭐 하노?’ 올라가봐야 힘들기나 하고. 
내리 앉으면 어린 아~들하고 같이 놀 수 있고 좋잖아요. 그래서 거
기서 2년…  더 3년이에요. 6학년 앉은 자리에서 3년 했어요. 그러
다가 조금 깨달아 가지고 다시 조선학교 가야 되겠다 이래 가지고 
조선학교 다시 가니까 안 되는 거에요. 지금은. 이미 습관이가 배가
지고. 그래 가니까는 열 입곱 살에 나왔어요.
어디에 나왔어요?
사회를 열일곱 살에 나왔어요. 사회 첫발을 디딘 데가 어디냐면… 이
곳이 농촌이니까 그냥 농촌에서 농사해야죠. 농촌에서 농사해야죠. 
농사하면서… 이제 고향에서요.
그때 농사는 어떤 농사였습니까?
벼농사에요. 그냥 농촌에서 벼하고 또 한전도 좀 하고요. 주로 벼농
사를 지었죠. 조선 사람들이니까. 밀이나 보리 이런 건 없죠. 한전에
는 조금 했으니까. 옥수수 같은 거 이제 뭐…. 감자나 심어 파먹고 
뭐 그런 걸로 하는데 저는 원래 일을 하기 싫어해요. 뭘 좀 기계 만
지기를 좋아하고. 그런 걸 싫어하고 하니까.
벼농사를 지으니까 먹고 살기가 어떻든가요?
저는요. 농사 이런 데는 너무너무 흥취가 없어요. 농사짓기를 아주 
싫어해요 저는. 그냥 저는 좀 우리 아버지가 원래 이런 기계 이쪽으
로 많이 옛날부터 정미하고 차를 몰고, 차를 꾸미고, 만들고 이래…. 
손재주가 있었지요. 그런 쪽으로 많이 하니까 저도 또 아마 아버지
2장. 부동산 사업가 최용식의 삶과 조선족 교회 목회활동
 
69
를 닮으니까 기계 일은 하고 싶고. 그건 밤낮없이 해도 괜찮은데 농
사일이라 하면 딱 하기 싫거든. 그래 가지고 저는… 그냥 사회 나와
서 한 1, 2년 노량짓 치다가 제가 열아홉, 스무 살 그때부터는 그냥 
저기 그 기계 일에만 계속 종사했죠. 뭐 옛날에는 펌프 있죠? 물 뿜
어 올리는. 펌프. 옛날에는 어떻게 했냐 하면 땅 파요. 일곱 메타, 
여덟 메타. 땅 파가지고  물이 나오면은 관 박아가지고 기계로 또 
할 수 있잖아요. 기계로 구멍만 요래 뽕 뚫어 놓고 그거 박아 넣으
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기계도… 또 다른 기계를 보면 또 집에 
와서 돈 없는데 또 폐철을 주서다가 그런 기계를 만들고. 계속 그냥 
그런 쪽으로만 이래 가지고  나중에는 거기 정비소 있죠? 정비소.
자동차 정비소입니까?
아니. 그러니까 농촌에 사니까 자동차도… 여긴 아녀. 중국에는 농촌
에서는 이절 다 해야 되요. 자동차로부터 무슨 농기구까지. 분무기 
뭐 이런 거. 낫까지. 낫 가는 거까지. 하여간 다요. 일단은 정비소라 
하면 모든 게 다 되어야 해요. 농기구 같은 거. 가전제품. 거진 다 
해요. 자동차까지. 정비소를 한 3년 했나? 아~ 3, 4년 했겠어요. 그
래가지고 뭐 장가 가가지고 또 1992년도에 제가 한국 나갔나요?
▮ 1992년 한국 노동경험, 용접공
1992년 한국에 나올 때 나이가 어떻게 됐습니까?
한국 나갈 때 제가 서른… 1992년도니까 서른 몇? 서른 한 다섯 살 
그렇게 됐을 거예요. 아마.
그때 혼자 나오셨습니까? 아니면 가족과 함께?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70
 
아뇨. 혼자 나왔지요. 그런데 그게 이 처갓집에 그 뭐야? 친척들로 
해가지고 그래가지고 한국 나갔다가 1년 반인가 있다가… 1년 4개월
인가 그래 있다가 그냥 와가지고 대련에 와서 아주… 4년 살다가… 
4년 살았나? 4, 5년 살다가 그때 청도로 넘어와 가지고 지금까지 살
고 있죠.
한국에서 오랫동안은 아니었는데 돈 벌기 위해서 가신 겁니까?
그렇죠.
돈은 뭐 좀 벌었습니까? 기간이 짧은데요?
저는 네 뭐 말하자면 한국 사람한테 많이 당했어요. 처음에 갔을 때
는… 제가 좀 재간이 좋거든요. 내가 그때 92년도 갔을 때는 보통 
아줌마들이 월급이 45만원이에요. 45만원, 50만원이라고요. 보통 과
장들이 65만원, 70만원 이렇게 했어요. 월급이. 그러니 저는 가서… 
저는 용접 일 좀 잘하거든요. 기계를 잘 다루죠. 용접, 선반, 밀링 
이런 걸 다하니까 월급 많이 받았어요. 월급 그때 당시에 정하기는… 
저는 그래 좀 제가 기술을 믿고 하니까. 사장이 와가지고 “얼마 받
겠냐? 너는 얼마 원하냐?” 이래가지고. “제가 일 하는 거 보고 주세
요.” 했죠.
그때 우리 교포들이 여섯이 같이 들어갔거든요. 그런데 거기서 실제
로 다 용접공이라 들어가는데, 확실하게 용접하는 거는 지밖에 없고. 
그렇게 들어갔고. 한 달 하고 나니까 60만원 주더라고요. 초봉이죠. 
근데 60만원인데. 일을 많이 했죠. 잔업을 많이 했잖아요. 거기는 뭐 
잔업하면 다블, 아니 한배 반씩 들어가잖아요. 그러고 거기 철야 하
면 마구 두 배에요. 두 배 들어가고 이래 놓으니까. 65만원인데. 60
만원인가 65만원인가 그때 했는데. 60만원이었다. 다른 애들하고 다 
같이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안 되죠. 그렇지요. 기술력이 월등
2장. 부동산 사업가 최용식의 삶과 조선족 교회 목회활동
 
71
한데. 내가 그 사람들하고… 그 사람들 60만원 받으면 내가 적어도… 
제일 적어도 100만원은 받아야 되거든요. 
그래서 그 현장에서 끊고. 저희들 같이 이끌고 델꼬 갔던 차장이라
고… 제 솜씨를 확실하게 알거든요. 그래 저는 좀 성격이 그래요. 내
가 봐가지고도 ‘아이다. 그 잘못됐다’ 이러면 누가 시키던 다시 할 
거면 개선해주어야 되지 안 되면 일 안하거든요. 그래 가지고 영천
에 출장 나갔다가 김 차장 하고 몇 번 싸웠어요. 히터 그 놈 속에 
그… 인쇄를… 열로 해서 이걸 건조시키는 그런 기곈데. 한 2억 얼마 
돼요. 근데 여~ 쪽에서 그 사람 일 빨리 할려고 이짝에서부터 이짝
으로 해서 일해야 되는데 저가 딱 보니까 아이거든. 그래 하면 나중
에 되가 한쪽으로 다 뜯어야 되는데… “임마! 해라면 해야지.” “저는 
안 합니다. 그런 건” 했죠. 안 되는 걸 왜 하냐고 하면서. 그럼 지가 
“아~ 일단 이 사람 애기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일은 안 합니다” 이
랬거든. 일주일 동안 거기 있으면서 나중에 다시 뜯었어요.
그래 놓으니까 내하고 그 김 차장 하고 둘이 두 번인가 세 번인가 
싸워가지고. 그런데 그건 당연히… 말은 지가 다 맞거든. 그런데 그 
사람, 중국사람 보기를 후진국이라 이래 가지고 아주 얕잡아 봤지. 
기술적으로. 아~ 기술력이 있는데도 그러니 인정 안하죠.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를 델꼬 갔으니까. 월급 산정할 때 다 같이 하고. 그래서 
저는 안 되죠. 그래가 첫 달은 있다가 두 번째 달 딱 했는데 돈을 
또 그렇게 주는 거예요. 그래서 나와 버렸죠.
그래 나와 가지고 다른 데서 이렇게 하고. 그의 1년 반 있다가… 나
는 힘든 거 봐 가지고서리 내래 한국 애하고 저하고 동갑인데, 개가 
힘들어 하고 하니까 그냥 가서 술 먹으며 내가 “알았다. 내가 와서 
한국 와가지고 너 같은 친구 하나 만난 걸로 내가 만족하니까. 돈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72
 
벌라고 왔지만은 너 친구 하나면 됐다” 이래가지고. 이거 하나 나와
노니까 나중에 그 회사가 문 닫게 돼버렸어요.
그래서 그냥 다 망하고 이래 가지고 내 다른 데서 벌었던 돈 한 
800만원 거기다 다 거기다 넣고. 올 적에 190만원만 가지고 보니까. 
1년 4개월 하고 번 돈은… 그 당시에 한국 돈 비쌌어요. 한국 돈 1
만원이 중국 돈 110원 정도 그때 했거든요. 만 원 대 백십원. 예. 그
때는 한 천삼백 정도를 다 이렇게 합하면 1년 내내 버는 제가 잔업 
많이 하고 할 적에는 130만원꺼정 벌었으니까. 그랬습니다. 월 130
만원까지 벌었죠. 온통 뭐 철야를 해버리니까. 그래 놓으니까. 근데 
나중에 올 적에 190만원 가지고 나왔지요.
▮ 산동성 대련을 거쳐 청도 정착, 교회 일과 부동산업
그래 왔고. 와가지고 저는 예수를 제가 결혼하면서 예수를 믿었는데, 
아주 착하게 믿었어요. 아주 진실하게 믿었고. 그리고 또 한국에 갈 
때도 제가 실지로 돈 벌어서 집에 와서 교회를 짓는다고 이래가지고 
제가 갔어요. 그런데 그렇게 안 되더라고요.
중국에 와가지고 대련에서 4, 5년 있다가 청도에 이래 건너 와가지
고. 대련에 있을 때까지 망태기로 살았어요. 제 본처하고도 이혼하
고.
한국에서 돈 못 벌었으니까는 그 속이 안내려가죠. 꼭 왜 벌 수 있
는데, 누구보다 더 총명한데 내가 왜 못 버느냐고. 이래가지고 대련 
가서 4, 5년 허송세월 보내다가. 빚만 가득 지고 청도에 넘어와 가
지고 처음에 여기서 공장하려고 왔는데.
2장. 부동산 사업가 최용식의 삶과 조선족 교회 목회활동
 
73
이곳 청도에 온지는 몇 년도 쯤에요?
1999년도 제가 왔댔어요.
그때 청도 오니까 상황이 어떻던가요? 공장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좋
았습니까?
청도 왔을 때 그때는 한~참 한국에서 공장이 많이 들어 올 때죠. 분
위기는 그래 좋은데, 저는 인간관계 이런 걸 잘 못해요. 있는 그대로 
애기하고 다른 사람같이 없는 걸 보태서 좋은 말 이런 거 못 하거든
요. 제가. 그러니까 접촉이 안 되는 거예요. 여기가. 잘 아다리가 잘 
안 맞는 거. 그래서 제가 그때부터… 옛날에는 예수는 믿었지만, 교
회서 일 많이 안했어요.
청도에 와서부터 그 다음에 교회일 하기 시작했거든요. 조선족 교회
가 있어요. 그래 그냥 교회서 제가… 예수 믿은 지가 지금까지 벌써 
27년이거든요. 그러니까 고향에서도 일단 경험이라든가 체험이라든
가 봉사라든가 그게 좀 많잖아요.
근데 중국에는… 그때 당시 청도에 왔을 때만 해도 벌써 교회가고 
이라면 눈이 감겨요. 할머니들이라 찬송을 해도 다 한곡을 불러 제
끼고. 허허허! 막 이래~ 그니까 허 막 불쌍하고 그렇잖아요. 그러니
까 잘 모르고 답답하고 하니까. 그러니깐 계~속 그런 데만 찾아다니
면서 기도도 해주고 뭐 이러니까는. 이전에 대련에서 안 되던 일이 
하나 하나씩 이게 풀려 나가더라고요.
그러니까는 제가 청도 와서 99년도에 와가지고 한 4년 전까지는 다
른 일 하나도 안했어요. 공장 한다고 온 게 교회에만 파묻혀 가지고. 
교회서 중년회 회장하고 새 신자 관리하고. 구역 관리하고 주보 짜
고 이러는 거예요. 그냥 놀 새 없어요. 그냥 교회 일만 계속… 심방 
나가야 되고. 그면 계속 교회일로만 했는데 자꾸 이짝에서 나중에는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74
 
부동산 쪽으로 자꾸 풀려나가고. 뭐 풀려나가. 그니까는 이 일은 돈 
벌라고… 돈을 버는 거 아니고요.
교회 일만 계속하는데 집만 사면 팔려요. 팔리면 몇 만 원씩 계속 
이득이 남고 해가지고. 이에 뿔은 거 가지고 뭐 또 사고…  이제 총 
재산은 아마 인민폐로 한 돈 천만원 안 되겠나 싶어요. 이렇게 이
제….
굉장히 성과를 보았네요?
네. 그럼 뭐. 그렇게 됐죠. 제가 이렇게 하다가 저 사람 저 최 장로
랑 청도에 와서 같이 신앙 했댔어요.
궁금한 거는 1999년도에 청도 오셨을 때 여기 조선족교회가 있었습
니까?
있었죠. 그때 당시에는 목사가 없었어요. 기본상 없구요. 그때 당시
에 장로라 치면 아마 거기 도문에 길림성 연변 쪽에 있지요? 도문에 
김… 저 사람 처삼촌… 처삼촌인데 장로가 맡고요. 기본상으론 없었
어요. 그냥 뭐 안수집사 이런 것도 없고. 목사가 없으니까. 그때 당
시에는요. 중국에 목사가 아주 적었어요. 금방 개방한지 얼마 안됐으
니까. 그러고는 여~쪽에 왔을 때도 조선족교회라 해도 목사가 없어
요.
가정교회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가정교회는 정부에서 허락 안하고. 허락 안하고 그냥 내가 전도해서 
옆에 사람들 같이 해가 … 허락 없이 그냥 하는 거죠. 그냥. 가정에 
사람을 모아가꼬. 뭐 일단 이웃이라든가 그냥 아는 사람들하고요. 열 
명, 스무 명. 근데 ‘상장교회’라 하는 것은 정부에서 허락돼 있는 교
회죠. 뭐 할 수 있는 그 허가가 나온 교회죠. 그러면 초기에는 면허 
나온 교회. 허가가 나왔던 교회가 있었습니다. 근데 청도에 그때 조
2장. 부동산 사업가 최용식의 삶과 조선족 교회 목회활동
 
75
선족들이 많았는데 교회는 있어야 되잖아요. 그래서 심양신학교 2기
에 필업했던 홍태홍 목사… 전도사가 그 사람이가 여기 와가지고 조
선족 교회를, 허가 맡은 교회를 맨 처음에 했어요.
그래 그게 여~서 하다가 그거… 또 교회는 없구. 중국 사람들의 교
회당을 빌려 가지고 그래가지고 거기서 중국 사람들이 1부 예드리면
은 2부로 조선족들이 예배드리고 이렇게 했죠. 그때 당시에는 조선
족이 ‘이촌(李村)’이라고 혹시 알죠? 이촌. 여~서 한 20키로 되잖아
요. 거기 조선족이 제일 많았거든요. 무리지어 있었는데, 예배당으로 
저~짜 ‘난취’라고 그짜 한 10키로 정도 가요. 그니까 버스 두 대를 
또 내야 된다고. 그래 가지고 사람을 싣고 하니까 불편하잖아요. (최
성호 장로를 가리키며) 이래 가지고 우리가 그때 당시 저 사람하고 
나하고 또 조선족 둘이 있어요. 이래가 정부에 찾아가서 “자~ 빨리 
조선 사람들 편하게 신앙해야 될 꺼 아니냐? 이짝에도 빨리 허가 내
라?” 이라고. 많이 찾아갔댔어요. 그래 갔다가 예~ 거기서 허락 받
아가지고 이촌에서 그걸 하게 됐죠. 이촌에서 한 건물 4층에서 그걸 
했는데, 거기서 몇 년 했어요. 거기 4층에서 한 3년? 한 4년 했겠어
요. 아마.
그때 당시 제가 주보를 하니까는 알거든요. 그 난취에서 건너 올적
에는 그때 당시 한 100여명. 120명 조선족 교회. 120명 정도 되는
데, 건너 올적에 보니까 우리가 한 40명 정도 됐어요.
왜 이렇게 신자 수가 줄었습니까?
그 전도사가 하겠다고 하다가서리 안한다 해가지고…. 나가 먼저 저 
짜(쪽) 또 정부에서 보낸 그 사람하고 같이 동업을 못 하겠다 이래 
노니까 그 사람은 그냥 그대로 해놓고 거기 나오자마자 눌러앉아버
리고. 이짜 우리는 그걸 다 해놓고, 장식 다 해버리고 우리는 일단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76
 
나오자 이래가지고 한 40명 나왔다가. 한 3년, 4년 정도 됐어요. 근
데 막 부흥되고 하는데 뭐… 그때 조선 사람들이 신앙이 진실해요. 
사심이 없어요. 신앙이. 금방 개방한지 기간이 얼마 안 기니까. 그러
니까 교회 일이라면 목숨 걸고 하거든. 기냥. 이래 노니까 저도 이전
에 거기서 할 적에랑 보면 차를 몰고 저~ 태안이란 데서 가도 예배 
약 한 시간 설교 때문에 거기서 운전하고 태안에서 와요.
단 한 시간 설교하기 위해서 그렇게 먼 길을 다녔네요?
네. 도로. 뭐 몇 시간이나 와요. 한 6시간 와요. 그 짝에 뭐 도로세 
내고 기름 넣고 와서 설교 한번 하고 또 다시 가요. 이렇게까지 했
을 때 나중에는 제일 많을 때는… 제가 주보를 하면서 제일 많이 나
왔을 때 540명이나 됐어요. 처음에 40명으로 해서 나중에 불어서 
540명까지 왔다가. 교회가 또 교회 안에서 풍파가 좀 있잖아요.
조선족중앙교회 청양지성전 간판(2013.2. 최성호 장로)
2장. 부동산 사업가 최용식의 삶과 조선족 교회 목회활동
 
77
파(派)가 막 일어나고 막 이러면서 그래 교회가 깨지면서 갈라지면
서 이래 해가지고, 많이 쫄아(줄어) 들고 갈라지고 이래가지고… 저
기 시장 옆에다가 한국 평수로 이래가 한 40평정도 되겠어요. 고래 
작은 땅굴말 식으로 해가지고 저 사람하고 나하고 저 짜 다른 양 장
로 하고. 이 장로 하고 너이서 거기로 끌고 나오면서 거기서 몇 년 
했어요. 2년. 2년 넘어 했네. 그 자리에서. 그러면서 너무 진실하게 
하니까 하나님이 저 짝에다가 1천 평. 한국 평수로 한 350평 돼요. 
그걸 거기다가 설립했죠. 처음 시작할 때 인민폐 10만원 가지고 시
작했어요. 그 집세만 해도 12만원인데.
10만원 갖고 시작해서 임대료를 먼저 뭐 다섯 달 친가 준다 이래 
해가지고 5만원 줘버리고. 그러고 5만원 가지고 시작했어요. 이 교
회를요. 그런데 교회 장식 다 하니까 넉 달인가 걸렸는데, 팔십 한 
칠만원 정도 들었어요. 그러니까 뭐 한 120명밖에 안 되는 성도 가
운데서 헌금이 얼마나 잘 나오는지. 제일 많이 나올 때 한 주에 7만
원씩이나 나왔어요. 7만원이 나와. 7만원이면 한국 돈 1천만원 넘잖
아요.
그때 성도 한 120명밖에 안되는데. 그렇게 진실했어요. 그러고 2년 
동안 있다가 큰… 여기서 ‘중앙교회’라고 민족적인 성격의 조선족중
앙교회라고요. 거기서 했다가. 거기서 한 1년 이렇게 하는데 그때 
전도사가 목사가 돼버렸어요. 목사가 돼버리니까. 그 분이 심광래 목
사죠. 목사가 돼버렸어요. 이래 돼버리니까 신분이 바뀌어 버리니까. 
조금은 뭐… 옛날에는 심목사가 전도사였을 때는 주로 우리 네 사람
이서 끌고 왔거든요. 막 전도사님 집 찾아가서 토론하고. 이 교회에
서 또 이런 말을 하고 하니까 마이 되는데. 또 심목사가 자기가 그
때 당시 전도사지만, 그 사람이 마음이 아주 양순해요. 아주 순하고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78
 
말도 없어요. 운영위원회서 자꾸 끌고 나가니까 계속 끌려온 거나 
다름없는데 근데 목사가 돼버리니까 자기도 자기의 꿈이 있고, 자기
의 생각대로 나가야 되잖아. 그러니까 거기서 고집이 나와 버리는 
거죠. 목사가 돼 버리니까.
나는 빨리 심방할 거 심방하고 사이사이 가서 양육할 거 양육하고 
뭐 이래야 되는데… 교회가 처지면 안 된단 말이에요. 힘든 사람 빨
리 나가서 뭐 그렇게 해줘야 되는데도 이게 안 되니까. 제가 참다 
참다가서리 내가 그 교회서 1년째 채 됐어요. 그러고 “아~ 나 이러
면 이 교회에서 못 하겠다”고 나온다고 했죠. 그러니 막 나가지 말
라고 해요. 장로 취임시켜준다고 하면서. “나 장로… 나 명예욕 그런 
걸 떠나가 안한다. 빨리 교회가 돌아가야지. 명예 있어도 안 된다”고 
주장했죠. 그래서 계속 모이지 않고 이래가지고… “알았다. 그라면 
내 나올게” 이래가지고 나왔어요. 하하하!
나와서 있다가 다른 교회 찾아서. 제일 없는 교회로 좀 찾아서 제일 
힘들고 어려운 교회를 가서. 힘들고 어려워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
고 하나님이 찾아 주실 거고, 구원을 받을 수 있으니까. 이래 그 교
회 가가지고 가니까. 열한명 정도 됐어요.
▮ 칭다오 조선족교회 현황, 종교 정책
여기 교회가 많아요. 조선족들 교회가. 한 40개 정도 돼요. 40개 넘
을 걸요. 가정교회까지 해서. 근데 허가 받은 교회는 몇 개 안되죠. 
다 가정교회지요. 허가 없이 하는 걸 보고 가정교회라고 하지요.
허가 받은 교회가 한 다섯 개쯤 됩니까?
2장. 부동산 사업가 최용식의 삶과 조선족 교회 목회활동
 
79
다섯 개 안 될 꺼에요. [청도] 청양에는요. 이촌에는 허가 받은 조선
족 교회 하나, 두 개, 세 개고. 여기에는 하나 둘… 세 개. 이촌에는 
조선족 교회가 허가 받은 교회가 세 개 밖에 안 될 걸요. 세 개.
청양은요?
청양에는 허가 받은 교회가 지금 세 개. 세갠가? 그럴 거예요. 아마. 
작은 교회를 또 키우는데 공헌을 하셨습니까?
저는 그래 가지고 작은 교회 가 가지고요. 처음에 가니까 열한명이 
맨 쪼그만 어린애들 이래도 교회가 7년 했어요. 7년. ‘한뜻교회’라고. 
이름이. ‘한마음 한 가지 뜻’이라는 의미죠. 앞에 거는 중앙교회. 지
금 심목사, 심광민 목사가 거기 가서 하죠. 제가 1년 안했어요. 제가 
거기서 한 10개월 정도 했을 걸요. 한뜻교회 가 가지고. 거기 가서 
이렇게 하는데 아주 잘 됐어요. 그해 성탄절에 88명인가 89명인가 
모였어요. 열한 명 있다가 나중에 이렇게 부흥되고 하니까. 근데 이
렇게 사람이란 게 막 이렇게 뜨고 부흥이 잘되고. 잘 돼가죠. 그러면 
조금 교만해져요. 교만해지고 다른 사람들이 말이 “허~ 왜 목사님은 
왜 여~서 집사님 말만 들어야 하는가? 왜 계속 이렇게 따라… 끌려
가는가?” 막 이렇게 해가 이래 내가 들어갈 때 이랬어요. 내가 지금 
하나님이 봐가지고 당신의 기도를 들어서 나를 지금 여기까지 보내
온 거 같은데….
일하는 과정에서 내하고 같이 일하기가 힘들다면 어느 때고 애기해
라. 내가 여기서 와서 헌금하고 내가 이런 거는 내가 그냥 내가 할 
일이니까. 그걸 부담 갖지 말고 어느 때든가 애기하면 나는 아무 말 
없이 누구도 델꼬 안가고 나는 나간다.
내가 한 열 달 정도 돼서 그때 교회가 한 60명 정도 부흥됐어요. 그
러다가 하루는 희한한 가운데 좀 그런 애기 나오더라고. “내가 여~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80
 
서 집사님 말만 들어야 되고. 어이구! 그건 아니지 않냐?”고. 허허허
허! 그 말을 나는… 목사님이 그런 말을 해요. 그래가지고요. 그런데 
그 옛날에 이거… 중국에서 보통 교회를 하는 목사님들은요. 보통 첨
에 개척하는 목사님들은 혼자 해요. 실지로 자기 자금으로 다 해요. 
그러면 집세도 못 내고 이러면 지가 목사니까 방법이 있습니까? 지
가 돈 빼서…  어디서 빌리든가 이렇게 하니까. 그러니까 경제 유지
가 아주 자유스럽지. 그니까 내가 없으면 빌려야 하고, 교회 필요하
면 내가 싸우고 이러는데 교회가 커지니까 그저 모든 것이 크면 규
칙이 있어야 되잖아요? 재정이라든가 규칙이 있어야….
그런데 저는 원래 한 몇 년까지 채운 다음에 정식적으로 이런 규칙
을 세울라고 했어요. 그런데 목사님이 막 급해서 막 부흥이 막 잘되
고 하니 막 내보고 계속 행정을 맡으래요. 그래 나는 아직까지는 백
년 된 다음에 정식으로 시작하자. 계속 맡으라 이거에요. 그래서 맡
으니까 그 다음에 당연히 법이 나와야 되잖아요. 그래도 한 단체인
데 뭐 규칙 같은 게 나와야 거기에 맞춰가지고 이렇게 나와서… 그
래서 재정이 나오다 나니까. 그라면 옛날에 우리가 한 500명 될 그
때 그 재정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게 500원 이하거든요. 500원 이
상이면 운영위원회랑 누구 하나는 통과해서, 바쁘면 전화 한통이라
도 해가지고 해야 하죠. 이렇게 쓰니까 ‘알았다!’ 이러고서 나중에 
그 장부는 이렇게 넘어가는데. 그 토론을 하다 나니까 “그러면 선은 
얼마 하겠냐?” 그러이 “집사님! 예전에 할 때는 그때는 얼마?” “그때
는 500원이 선이다.” “어우! 그러면 그때 성도는 얼마?” “그때 한 
500명 됐다.” “그러면 우리 교회 뭐 지금 뭐뭐 한 6, 70명밖에 안 
되니까 한 300원 하면 되겠네요?” 그러면 그렇게 하자 이렇게 결정
했는데. 그러니까 목사님 받아 못 들이는 거예요.
2장. 부동산 사업가 최용식의 삶과 조선족 교회 목회활동
 
81
여지껏 그기 습관이 돼가는… 실지는 뭐 없으면 장로한테서 얻어서 
했는데 그 300원 갖고는 난 못 하겠다 그런 거예요. 그기 아니지 않
는가. 지금 그게 아니고 목사님한테 1천원은 예비용으로다가 놔두고, 
300원 이상 되면 집사들 가운데서… 다만 통화라도 해서 오늘 지금 
급해서 무슨 무슨 일로 400원 나갑니다. 전화 한통을… 나는 그걸 
못하겠다. 그 다음부터 공부시키는 기 완전히 다른 거죠. 행정이 어
떻고… 뭐 작년 때는 어떻고 뭐 당해는 어떻고. 아니 지금 해야 될 
거는 안하고 엉뚱한 걸 이렇게 하고… 이러면서 내가 뭐라 하면 “내
가 여~서 집사님 말만 들어야 됩니까?” 이렇게 말하고.
그래서 “아~ 하나님! 헤어질 때가 된 거 같습니다” 그러면서. 그래
서 거기서 나와서 다른 데 있다가 이 교회, 오늘 찾아간 조선족 교
회 있지요? 중앙교회. 그 ‘지성전’이라고 하는 데. 그 사람들이랑 거
기에서 넘어오고. 옛날에 계속 같이 일했으니까. 계속 오라오라 하니
까. “야! 내 나왔으면 다지 뭐 갈 교회가 없어 거기 가겠냐?”고. 그
래서 계속 안 나왔다가 작년 부활절 바로 전에 나왔어요.
그때 그냥 또 우리 집사람도 또 그러지. 그래도 다 옛날에 같이 사
역했던 사람들인데, 그때 그렇게 그게 때 묻은 게 낫지. 이러면서 계
속 오라 그래서 ‘알았다. 그러면… 가자.’ 이래가지고 제가 여기 들어
와서 지금 하고 있는데. 운영위원이나 실지 다름없죠. 뭐 저 사람은 
주로 관리 같은 거 책임지고. 재직 통솔하고, 전도사 있고. 심 목사
는 그냥 주일날에 와서 설교만 하고 가고.
청도 조선족을 위한 그리고 기독교 전도를 위해서도 많은 공헌을 해
오셨는데요. 종교를 갖지 않은 신자들에게는 또 믿음을 갖게 해준 
역할도 많이 하셨고요. 청도지역이 조선족으로서는 이방(異邦)인데, 
이런 곳에서 기독교라는 종교가 우리 조선족에게는 어떤 역할을 하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82
 
고 또 어떤 존재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까?
기독교에서요?
▮ 소수민족, 종교 활동의 어려움
여기 청도뿐만이 아니고 동북3성도 마찬가진데 청도로 본다면 이런 
환경에서 기독교라는 종교가 조선족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지요?
조선족에게 도움을 준 거는 없어요. 도움 주는 거는 없고. 그런데… 
그거는 없구요. 그런데 지금 우리는 정부에서 허가된 교회이고 하니
까 그냥 정부에서 관리는 해요. 관리는 해주니까 정부에서도 ‘양회’
라고… 양회라고 이런 걸 만들어 놔가지고 거기에 전 목사들이 다 
모였어요. 그래가지고 각 교회로 매 주마다 파송되고 하는데 뭐 조
선족에 대해서 뭐 특별히 우대한다든가 중시한다든가 이거는 없고, 
그냥 신앙적으로 애기하면 옛날보다는 마이 좋아졌죠.
옛날에는 어떠냐면 가정교회라 하지 않습니까? 가정교회라면 보통 
대여섯 명, 열 몇 명… 이럴 때는 상관 안 해요. 하든가 말든가. 근
데 무리만 커지면 깨거든요. 정부에서. 무리만 커지면 깨버리지요.
왜 그럴까요?
그니까는 일단은 이 뭐… 맨날 중국이라는 자체가 단체적 자체잖아
요. 실지로 정부가…. 그런 데 이런 신앙 이런 걸로 해가지고 혹시 
정부에 뭐 이런 게 막 흔들린다던가. 무리가 커지면 거기에 꼭 영향
력이 따라가 있잖아요? 거기다…. 이래 노니까 크지 못하게 하는 거
예요. 실제로.
구체적으로는 어떤 제재와 압력을 가하나요?
2장. 부동산 사업가 최용식의 삶과 조선족 교회 목회활동
 
83
네. 그렇죠. 그러니까는 당연하죠. 그래서 허가 받은 거는 정부에서 
허가가 됐잖아요. 넌 해도 된다. 저 짝에는 허가가 없단 말이에요. 
또 우리가 뭘 무슨 뭐 뭐 구멍가게라도 허가가 있어야 되잖아. 아니
면 불법이잖아요. 이게 사실 불법이나 마찬가지지요.
불법으로 교회 목회활동을 할 때에는 어떤 제재가 옵니까?
뭐 거기에는 법적으로 따르는 뭐 이런 조례가 있겠지만은 별로 큰 
문제는 아니고. 뭐 반동도 아니고. 나쁜 일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이제 안 그러면…. 뭐 맨날 좋은 일해주고 뭐 이런 걸 해주
고 그런데 자꾸 어떻게 하지는 못해요. 성경책을 뺏어 가버리고. 공
안국 가서 구류 한 이틀 살고 나오고. 경고하죠. 너 외국 사람들하고 
같이 내통하면 안 된다. 혹시 외국의 정책 이런 게 같이 들어와서 
우리 중국… 우리 중국의 이런 걸 흐려놓으면 안 된다. 이런 게가 돼
있다고. 그러다 보니까 무리만 벌써 크면 옛날에는 한 40명만 되면 
그 다음에는 정부에서 파출소에서 와요. 와 가꼬 문 두드리고 와서 
다 잡아가요 그냥. 어떻게 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무조건 잡아가요. 
불법이니까. 허가가 없으니까.
그래 가가지고 심문하고… “나는 모른다. 그냥 신앙이 좋아서…” 그
러니까, “이 다음부터 그렇게 하지 말라우. 이 다음부터 하면은 감옥
에 넣는다. 며칠 구류한다”고 말하면서 이래 쫒아버리지요. 그리고 
그 김에 전도사라든가 목사는 또 다른 조회를 받죠. 그러니까. 뭐 한
달 있던가. 그런데 보통 그렇게 많이는 아니에요. 한 사 나흘, 이레 
구류하고는 “하지 말라우!” 경고하고 내보내고.
실제 과거에 그런 사례가 있었나요?
네. 그렇죠. 그래 놓으니까. 그러면 교회가 하나 깨져버리잖아요. 그
러면 몇 사람 밖에 안 남죠. 그러니까. 경건한 사람들이나 몇 사람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84
 
남고. 거기서 또 커지죠. 또 커지고 좀 커지면 또 깨지고. 그렇게 계
속 왔어요. 그런데 한 5, 6년. 6, 7년 간에는요. 그런 게 별로에요. 
별로 없어요. 조금 뭐 세상눈에 떴다고 생각할런지 지금에는 좀 그
런 게 별로 없죠. 어느 정도 경고는 있고. 혹간 사람들이 신앙하는 
사람 조금 두려움은 있죠. 저 옛날에 거기 가 있으니까. 여기 또 혹
시 어찌 할까 하는 두려움은 있지만은 지금은 정부에서 옛날 같이 
그렇게 하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신앙에도 조례가 있잖아요. 교인이 
얼마가 돼야 된다. 자체를 자립할 수 있어야 한다. 뭐 전도사가 있어
야 된다. 학교를 필업한 거점을 가진 사람이 있어야 된다는 이런 조
건이 되면 허락해주겠다는 그런 거죠. 이렇게 근데….
조선족 점포 밀집거리(성양구, 2013.2)
2장. 부동산 사업가 최용식의 삶과 조선족 교회 목회활동
 
85
▮ 조선족사회에서 교회의 역할
그러면 청도 지역에 우리 조선족들이 이제 교회를 통해서 서로 친교
도 맺고, 그거를 울타리 해가지고 생활해나가는 그런 교회의 역할들
은 어떤 거라고 보십니까?
근데 실제는 교회를 놓고 말하면, 당연히 성경에 비춰주면 당연히 
지역 사회도 섬겨야 하고, 이 힘든 어려운 이런 거를 찾아가면서 우
리가 도와도 주고. 서로 교인들끼리. 그렇게도 해야 되고 하는데. 근
데 그게 잘 안 돼요.
서로 뭐 일자리를 잃고 있다면 정보를 주고요?
그런 건 하죠. 당연히. 교회 안에서는 ….
어떤 측면에서 교인들끼리 서로 도와주는지 그런 모습들에 대해 좀 
말씀해 주십시오?
그거는 그냥 뭐 교제니까요. 교제니깐 그 누구가 일 없다 이러면 
아~ 그래 내가 함 찾아볼게 하죠. 다들 자기 안면이 있는 데로 연락
해서 있으면 뭐 찾죠. 그거는 당연히 돌봐야 하는데 사회적으로 역
할은 크게 없어요.
사회적으로 조선족들끼리 서로 도우는 그런 부분은 상당히 있네요?
그거는 조~금씩 나타나고 있어요. 근데 맹 교회 안에서는 당연히 서
로 돕고 하죠. 내 교회 안에서는요. 근데 외부하고는 응당 좀 많이 
교류도 가지고. 많이 돌봐주고, 내가 좀 덜 쓰더래도 같이 해줘야 되
는 이런 마음은 알지만은 아직까지 실천이라는 거는 안 돼요. 그러
니까 교회하고… 교회는 또 교제를 가져요.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86
 
이 조선족 교회서… 여기도 예날에 실제로 목사 안수는 목사가 셋이
래야지만 안수 주잖아요? 옛날에 중국에 목사들이 적었단 말이에요. 
없단 말이에요. 근데 지금 근년에 와서는 목사가 많이 뿔어나잖아요. 
그래서 많이 뿔어나지만 지금 정부에서 목사를 할려면 정부에 그거 
허가를 다 받고 정부에 검사를 다 받아야 되잖아요. 그게 쉽지 않단 
말이에요. 그게. 그러니까 어느 사람이 자기 역사에 잘못한 거 없겠
어요? 그러면 실지는 다 뒤집어보면 실지는 힘들거든. 그런데 조선
족들은 그래도 목회자들이 인제 와서는 교회라 하면 거진 목사가 있
잖아요. 목사 많단 말이에요. 많으니까 조선족 교회에… 교회 목회자
들끼리는 그래 하지요. 그래 해서 조직도 만들고 또 거 어데서 어렵
다. 누구가 저 신학 공부했는데 때가 찼다. 이러면 정복을 안 받고 
옛날에는 한국의 목사들이 많이 왔었죠.
한국에서 목사들이 건너와서 뭐 안수 받는다 그랬나? 아니면 계속 
한국에서 후원해주던 그 교회 가 가지고 안수 받는다 이랬는데. 지
금은 여기서도 자립적으로 중국에 목회자들이 산동성이면 산동성 우
리 조선족 목회자들이 하죠. 이래 놓으면 열 몇 명, 스물 몇 명 이러
면 거기서 회의가 있고 뭐 조직이 되겠지요. 이래 가지고 우리가 지
금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된다. 어디서 지금 누가 저 때가 찼는데 
목사 받을 그런 조건이 안 되면 자 그럼 우리가 가서 좀 해주자. 이
래 가가지고 안수 해주고. 지금까지 좀 많이 옛날보다 많이 활발해
져 나가죠.
그러면 한 교회 내부로 보면 신도들끼리 일자리 알선이나 불우 이웃
돕기 등을 포함하여 신도들끼리 봉사활동이라든가 이런 활동들도 하
십니까?
그런 거는 하죠. 맹 교회 안에서야 당연히 뭐 성경에 따라가지고 뭐 
2장. 부동산 사업가 최용식의 삶과 조선족 교회 목회활동
 
87
구제도 하고 뭐 돕기도 하고. 가서 일도 도와주고,  예컨대, 신도들 
집안 대소사 등에요. 그거는 자기 교회 안에서는 충분히 그런 걸 하
도록 또 노력하고. 그리 하죠. 그런데 옛날에는 우리 이촌에서 있었
을 때는 저 남방 쪽에는 어려운 게 많잖아요? 어려운 게 많고 하니
까 그런 데서는 우리가 옛날에는 우리가 입지 못하는 옷 같은 거라
든가 뭐 이런 것도 막 모다가지고서리 막 몇 차씩 해서 보내고. 이
런 활동도 하고 했는데요. 지금은  점점 그런 기회가 적어지죠. 그런 
모습이 조금 적어지는 편이죠. 외래적으로 돕고 이러는….
▮ 부동산 사업, 조선족 집거지 이촌(李村)지구
주로 목회활동에 대해 말씀해주셨는데, 인제 경제적인 생활 측면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부동산 사업과정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어떻게 
해서 재산을 모으셨는지요?
아니 그거는 뭐…. 어떻게 모았다는 것보다 저는 돈 벌라고 번 게 아
니고. 예수를 믿다 나니까… 교회 일 하다 나니까 뭐 집 살 돈이 있
어 가지고 집을 한 채 사놓으이까는 이게 팔리면은 뭐 따블로 새끼 
낳고. 또 모아놓고… 이 일은 안하고 사다 놓고. 허허허! 내가 교회 
일만 계속 열심히 하고 또….
하나님이 도우셨는가 봐요?
네. 그렇죠.
처음 오셔가지고 어디에 집을 샀습니까?
이창구 이촌에서 샀죠.
당시 이촌에 조선족들이 많이 모여 살았습니까?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88
 
맨 처음에 초기에 조선족이 모여 살기 시작한 곳이 이촌이지요. 청
도에는 이촌에 조선족들이 많이 살다가 그 쪽이 점점점 시내하고 좀 
가깝잖아요? 그러니까 모든 게 이 좀 고가로 넘어가죠. 이쪽 청양 
쪽은 쪼금 이런 쪽이잖아요? 변두리 쪽이잖아요. 이러니까 공장들이
라든가 이쪽으로 사람들이 다 이전해 오게 되고 하니까. 지금 이천 
쪽에 사람이 적죠.
칭다오 시가지(2013.2. 이창구와 성양구)
2장. 부동산 사업가 최용식의 삶과 조선족 교회 목회활동
 
89
그러면 초기에는 이촌에 한국인 공장도 밀집해 있었습니까?
이촌 쪽으로 오면서 이짝 북쪽으로 이짝으로 들어오지. 청양 쪽으로 
많이 들어왔죠. 조선족들도 한국 공장에 들어가서 취업 할 목적으로 
거기…. 그렇죠. 그 주변에 모여 있었던 거죠. 당연히 그렇지요.
그러면 이촌에서 언제쯤부터 다시 청양으로 이렇게 이동하게 밀집하
게 되었습니까?
그기가 저는 아마 이쪽으로 옮기기 시작한 거는 아마 한 6년? 5, 6
년 정도 간에 거의 많이 와버렸죠. 여기로요. 제가 99년도 왔을 때
는 이촌이요. 저녁 여덟시면 캄캄했어요. 근데 지금은 뭐 대낮같잖아
요. 지금은 밤 10시까지도요. 완전히 많이 변화되어 버렸죠. 그때 당
시 지금 6, 7년 전만 해도 청양에도 이렇게 번화하지 못했어요. 밤
이면 차가 아주 적었고. 낮에도 차가 쌩쌩 달리고 하는데 지금은요.
성양구 조선족 밀집구역(2013.2)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90
 
그러면 처음에 이촌에다가 아파트를 샀습니까?
처음에 이촌 쪽에다 아파트를 샀고. 그때는 1년이면 다블(double)로 
뛰었어요. 그때는. 그래 돈을 벌었죠. 그래 되는 거면 또 딴 걸 사게 
되고. 그러다가 또 돈이 많아지니까 또 상가도 사게 되고. 상가 하나 
사게 되면 또 두 개 사게 되고 뭐 이렇게 되고 나니까.
그러면 부동산 정보에도 밝아야 되겠는데요?
그건 모르겠어요. 정보도 없어요. 그냥 다니다 나니까는 뭐 집이 팔
렸으면 그 돈 갖고 사야 될 거 아닙니까? 그러이 돈 좀 많아지니까 
좀 가게 같은 거 상가 같은 거 사면 거 몇 년이면 돈 나오잖아요. 
뭐 이래 돼 노니까 이렇게 되는 거죠.
자녀들은 몇이십니까?
뭐 저는 뭐 늦게 장가가고 보니까. 애가 제일 큰애가 이제 스물일곱
이에요. 큰애는 딸이고.  그 다음에 아들이고. 이제 스물 네 살이고. 
또 그 밑에는 후처하고 같이 있는 애가 하나 또 있고. 아들이요. 열
여덟 살. 2남 1녀.
뒤에 재혼을 하셨네요?
그래 재혼 했죠. 그러니깐 지금 한국에 갔다 와가지고 뭐 한국 친구
라 이래가지고 거기다가 돈 한 1천만원 박아버리고. 여~ 와서 정신
없고 이러다 보니까 집도 장만 못하고 뭐 이렇게 됐었고. 와가지고 
뭐 장사하다가 돈 좀 모여서 한국에서 이 사람들하고 뭘 좀 이렇게 
해달라고 한다고 대답해갖고 또 돈 1만 5천원인가 박아버리고. 연락
도 끊어져 버리고.
장사한다고 돈을 빌려 주었습니까?
예. 그러고 2008년도에 한국 지장수(地漿水) 한다고 하는 데… 지장
수 알죠? 중국에 사무실로 들어 와가 3년인가 4년인가 있다 지사를 
2장. 부동산 사업가 최용식의 삶과 조선족 교회 목회활동
 
91
차렸다가 마지막에 다 털털 털고 갈 임박에 내가 차를 그 사람한테 
임대를 주다 보니까 그 사람을 알게 됐어요. 한국인입니다. 그 사람 
알게 돼가지고. 보니까 아주 좀 수완도 괜찮은 거 같고. 그런데 좀 
힘들고 어려우면 여~ 다른 예물 좀 사줘야 되겠는데, 돈 모질라다고 
돈 좀 빌려 달라 해가지고 돈은 없죠. 제가 뭐 집을 그걸 해가지고 
인감 내어 가지고. 그때 인민폐를 많이 잃었죠. 35만원인가? 35만원
인가  하고 내 사무실 상가도 그 사람한테 줬지. 차를 임대했지. 그
러니까 한국 돈 한 1억 정도 돼요. 그때. 한 1억 정도. 허허허!
그래도 한편으로 생각하면 또 하늘이 도와주었네요? (웃으면서) 어
려운 사람 도와주었다고 편안하게 생각하셔야겠는데요?
그런데 그건 아니에요. 제가 그때 당시 교회하고 막 트러블이 있었
잖아요. 막 교회에서 일 안하고 이래 놓으니까 내가 부패해진 거지
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일하다 일 안 해버리면 부패해지고 세상의 
정욕이 들어와 버리고. 막 이런 계열은… 그러니까 나쁜 길로 가버리
는 거죠. 그러니 하나님이 내게 뺏어 가버리는 거죠.
▮ 공장 설립 계획, 청도 조선족의 변화
앞으로의 교회활동을 위한 계획은 어떻습니까?
향후 계획이라. 뭐 계획이 있습니까. 그냥 뭐 교회가 있으면 뭐 힘든 
사람 도와주고. 모르는 사람들 가르쳐 주고. 인도해주고. 뭐 그거죠. 
뭐 제가 오십 일곱인데 이제 살아봤자 얼마 살겠어요. 저는 그냥 지
금 공장 하나 따로 또 하고 있어요. 새로 시작하고 있어요. 제가 원
래 좀 그런 기술 쪽으로 이래 되는데…  그래 가지고 그 공장이 좀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92
 
되고 이러면 저는 돈 벌어 가지고 살아있는 동안 청도에다가 교회나 
하나 크게 지었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공장은 어떤 분야입니까?
핫픽스 알죠? 핫픽스요. 잘 몰라요? 여성들 옷에다 이렇게 비치는 
것 있어요. 여~ 반짝 반짝하는 거 보석 같은 거 있잖아요. 그 제품
을 만들어 가지고. 그것은 그냥 아직도 한 석 달 넉 달. 제가 기계를 
만들어 가지고 생산해야 되니까. 그것도 지금 실험, 시험 단계에 있
어요. 그래가지고 물류가 나오고 하면 좀 팔리지 않을까요.
고향이 흑룡강성이라 하셨는데, 출신 조선족 분들이 여기 많이 사십
니까?
목단강 쪽에요? 거기 출신들이 여기 청도에 많죠. 하여간 조선족들
이 어디 뭐 안 모이는 데 있어야지요. 그런데 이제 청도에서도 많이 
빠졌지요. 옛날에 한국에서 중소기업들이 많이 들어왔을 때는 많이 
들어왔었는데 많이 빠져 나갔잖아요.
그러면 조선족들이 한국 기업들을 따라서 나갑니까?
이거 할 일이 없으면 딴 데 나가야 되잖아요. 여기 청도에 와 있던 
한국 기업들이 좀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잖아요. 이쪽에 인건비가 올
라가 기업환경이 좀 안 좋으니까요.
그러면 한국 기업들이 중국에서 어디로 이동해갑니까?
뭐 그때 당시에는 뭐 베트남 쪽으로 많이 간다고 이렇게 소문이 있
었죠.
조선족들이 여기서 베트남까지는 못 따라 갈 거 아닙니까?
그런데 어떤 애들은 따라 가죠. 베트남에까지요. 어떤 애들은 해당 
회사에서 필요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기술적으로 필요한 애들은 이
렇게 따라가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많지 않죠. 극소수이죠. 그런데 
2장. 부동산 사업가 최용식의 삶과 조선족 교회 목회활동
 
93
이 중국 땅 내에서는 조선족들이 어디로 이주하는지는 잘 모르겠어
요.
3장. 흑룡강성 출신 조운의 식당 자영업 전략과 
자녀교육
숯불 화덕(<한풍원> 식당, 2013.2)
3장. 흑룡강성 출신 조운의 식당 자영업 전략과 자녀교육
 
95
■ 조운 연보
- 1975년 : 중국 흑룡강성 상지시 대흥촌 출생
- 1991년 : 아버지가 10여 년간 한국 노동
- 1994년 : 상지시에서 고교 졸업
- 1997년 : 한국에서 건축 내장 목수로 3년 노동
- 2000년 : 귀국
- 2002년 : 결혼
- 2003년 : 북경 이주 후 옷장사와 관광가이드
- 2004년 : 두 번째 한국 노동 
- 2005년 : 아내 한국 합류
- 2009년 : 중국 칭다오 이주 후 정착
- 2010년 : <한풍원> 식당 개업, 2호점 개설 
- 2014년 : <한풍원> 식당 운영 중
조선족들은 처음엔 동북3성에 많이 살았잖아요? 그런데 지역에 있는 
젊은 세대들은 다 연해지역으로 창업하러 나오고 또 취직하러 나오
고 거의 지금 자꾸 분산되잖아요?
거의 없다고 봐야죠.
이 시점에서 분산되는 과정에 1차 거주지에 있는 분들을 저희들이 
지난해에 좀 찾아뵈었습니다. 노인 세대들, 70대와 80대 우리 아버
지 어머니 할아버지 세대들은 “우리 아들이 지금 청도에 가서 식당
을 합니다.”상해에서 객점업을 합니다.”전부 다 그러거든요. 그러면 
이렇게 젊은 세대들이 연해지역에서 어떤 삶을 살아나가고 있는지? 
그 후세들은 또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이런 것들에 대해 좀 알아보고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96
 
자 찾아왔습니다. 지금까지 조선족으로서 살아온 과정에 대해 말씀 
좀 해주십시오?
글쎄요.
▮ 할아버지가 흑룡강성 이주, 뛰어난 수렵인 
존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조 운요. 조나라 조(趙) 자. 그리고 이를 운(云)입니다.
생년과 나이는 어떻게 되십니까?
나이가 지금 서른 아홉요. 생년월일은 1975년 11월 15일.
태어나신 고장, 고향은 어디십니까?
흑룡강요. 상지에서 태어났습니다. 상지시 대흥촌. 따싱. 따싱촌.
사장님의 살아오신 과정을 말씀하기 전에 윗대 어르신에 대해 이야
기 좀 해주세요?
위에 어르신요? 할아버지 쪽은 저기 한국의 경북 안동이에요. 고향
이. 대구 바로 위에라던데요. 안동 임하요. 거기 지금 임하면이 일부
는 수몰지구 됐습니다. 수몰돼가지고 임하댐이 만들어졌습니다. 저 
가봤어요. 할아버지 고향을 방문했습니다. 저기 친척들도 많아요. 한
국에는 아버지가 먼저 가고. 저도 이제 기회 닿아가지고 갔죠.
아버님은 몇 년도에 나가셨어요?
일찍 나가셨죠. 초청으로 가셨으니까. 1991년도요. 그 때는 친척방
문 초청으로 가셨으니까요. 1991년도에 가가지고 작년에 왔습니다. 
거의 20년 정도 한국에 있었어요. 어머님과 같이 두 분이요. 지금은 
여기 청도에 있어요. 저희랑 같이 있어요. 아이들 봐주고 있습니다.
3장. 흑룡강성 출신 조운의 식당 자영업 전략과 자녀교육
 
97
부모님은 예전에는 고향마을에 사셨습니까?
예. 예전에는요. 예전에는 뭐 상지에 살다가. 농사했지요.
그럼 할아버지께서는 몇 년도에 여기로 오셨는지는 대충 아세요?
어이구! 할아버지는요, 아 그거는…. 잘 모르겠어요. 아버지는 중국 
동북에서 태어났죠. 아버지는 1949년도 생이에요. 연세가 올해 64세
이네요. 어머니도 맹 동갑이에요. 어머니 윗대 고향도 맹 한국인데, 
신청인을 못 찾아가지고요.
어머니 성씨는요?
한(韓)씨요. 어머니 조상분들 고향은 한국이지만, 어머니는 그러니까 
흑룡강이지요. 제 외가댁이 흑룡강이지요.
할아버지는 예전에 동북에서 농사짓고 사셨는지요?
할아버지는 예전에 인자 그때 한국에 먹을 데가… 먹고 살기가 힘들 
때 그때 중국으로 넘어왔는데, 중국에는 그럴 때 먹을 게 많았다고 
하더라구요. 땅이 있으니까. 생계를 찾아서 오셨겠죠. 그래가지고 와
가지고 사냥을 좋아했다고 해요. 할아버지가 사냥을 잘해요. 그래 
요~ 와서 뭐 다른 사람보다 잘 살았다 그러더라구요. 사냥을 해서
요.
산짐승도 잡고 이런 거요?
예. 한국에선 그거 뭐라 캐요? 사냥? 한자로 ‘수렵(狩獵)’이라 카던
데. 천렵. 하이튼 할아버지는 명포수로 이름 났었대요. 포수로.
호랑이도 잡고 뭐 이런 옛날 무용담 있겠는데요?
옛날에 곰도 잡고. 범은 뭐 못 잡았는데. 범은 안 되는데 아마 곰도 
잡고 사슴 같은 거 노루 같은 거 잡고요. 노루 같은 거는 흑룡강 그 
쪽에서 옛날에 많이 잡았다 그러더라구요. 그걸 혼자가 아니고 무슨 
조직을 해가 하는가는 잘 모르겠어요. 그거는 몇 명 나갈 거예요. 아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98
 
무래도 조직이 필요했겠지요. 그래가지고 중국에서는 뭐 잘 살았다 
그러더라구요. 배고프지 않게. 잘 살았다 카는 게 배고프지 않게 사
는 거 아니겠어요? 하하하! 그 정도 뭐 배고프지 않고 살았다는 건 
잘 산 겁니다.
다른 사람보다는 뭐 또 와가지고 농사도… 중국 사람들은 농사지을 
줄 모르잖아요. 상지 그쪽도 벼농사를 해요.
▮ 가족관계, 7남매 부모 세대와 오누이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아버지 형제분들 몇 분이나 낳았습니까?
4남. 고모님도 계시죠. 아버지 형제가 맨 위에 큰아버지고. 아니. 고
모고요, 인자 큰아버지 있고. 둘째 큰아버지 있고. 세 번째 아버지고. 
밑으로 또 고모 있고 삼촌 있고 또 고모 있어요. 하나 둘 셋 넷 다
섯 여섯 일곱 분. 남자가 네 분. 4남 3녀요. (연구자 두 사람도 부모 
세대 형제자매가 각각 1남 5녀, 3남 3녀라고 말하자) 예전엔 다 이
렇게 낳았잖아요. 그 땐 거의 다 그렇죠.
사장님의 형제가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누나 있어요. 집에. 오누이입니다. 부모 세대와는 차이가 나
죠. 그 밑에 애는 차이가 더 나지요. 없어요. 밑으로 내려가면 내려
갈수록 적어지지요. 제 아이들은 두 명이에요. 딸 둘이에요. 하나는 
열둘이고요. 하나는 지금 여섯 살요. 나이 차가 많이 나요.
누님은 어디에 사세요?
누님 여기 지금 청도에 있습니다. 누님도 이런 식당을 해요. 지금 분
점 하고 있습니다. 분점. 이건 본점이고 똑 같은 뷔페식 분점을 하고 
3장. 흑룡강성 출신 조운의 식당 자영업 전략과 자녀교육
 
99
있어요. 제가 이걸 먼저 내고 나서 분점이 맡았어요.
누님은 청도 어디 이 근처에서 합니까?
누나는 지금 한국 국적 갖고 있어요. 한국에 있는 게 아니라 청도에 
있으면서 한국 국적을요. 매형이 한국분이었으니까요. 청도에서 이거
와 같은 식당 해요.
그럼 아버지는 동북에서 어떻게 사셨습니까?
아버지는 뭐…. 예전에는 한국 가기 전에는 농사짓고 뭐 평범하게 살
았죠. 농사를 많이 지은 거는 아니고요. 농사를 짓는데 하여튼 동네
에서도 잘 살았어요. 엄청 부지런해요. 농사지으면서 인자 저기 하우
스를 했다고요. 하우스를 해서 채소랑 해가 팔고 그랬죠. 기술도 좀 
필요했겠죠. 토마토도 하고 오이도 하고. 시금치도 하고. 그 때 뭐 
하여튼 여러 가지 했던 거 같은데. 제가 나이 그땐 좀 어렸어요. 아
버지는 농사 기술이 좋아요.
한국 안동에 계시는 친척분들은 생활이 어떠세요?
그쪽 사람들은 보통 과수를 하고 있는데 괜찮아요. 사는 건. 안동 하
회마을은 안 가본 것 같은데…. 안동 임하에 가 가지고. 그래가지고 
한 번 명절 때마다 한 번씩 가가지고 명절만 쉬고 왔어요.
▮ 고등학교 졸업 후 북경으로
학교는 어디를 다니셨어요?
흑룡강성 상지요. 상지 조선족소학교와 중학교. 당시 흑룡강성에도 
소학교죠. 6년제 다녔어요. 그거 마치고 난 직후에 고향에서 또 중
학교 다니고. 대학은 못나왔어요.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00
 
상지시에 조선족 고등학교도 있어요?
네. 있지요. 그니까 중학교 보고 꿔중(초중). 다 있어요. 꿔중이 3년
제.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청도는 처음이에요?
작년에 연변과 흑룡강성 갈 때는 개인 사정으로 못 갔고요. 저는 처
음입니다. 중국 하도 커가지고 한 바퀴 둘러보기도 힘들겠어요.
한국은 제가 다 다녔어요. 중국에 비하면 작으니까.
부인하고는 한국에서 만나셨겠네요?
아니요. 중국에서. 중국 여기 와가 만났어요.
고등학교 마치면 한국에도 열 아홉 정도 되거든요. 고등학교 마친 
이후는 어떻게 생활했습니까?
이후요? 이후에는 북경에 가 가지고. 고향에서 나와 가지고 북경 가 
가지고 인자 식당 일을 한 몇 달 했어요. 종업원으로요. 가서 취직을 
한 거죠. 북경에는 혼자 갔어요. 1994년돈가? 그땐 어머니 아버지는 
한국에 가 계시고요. 아버지는 이미 91년도에 한국 들어가셨으니까
요.
어린 자식들을 내버려두고 부모님이 한국으로 돈 벌려 나갔는지 이
해가 안 되네요?
아니요. 한국 갔을 때는 그때 당시는 그래도 한국이 돈 벌기 좋았잖
아요. 환율도 좋았고. 당시는 제가 중고등학생 되었죠. 아버지가 한
국에 먼저 가고, 어머니는 후에 갔죠. 그때 누나도 집에 있고 하니까
요.
누나하고는 몇 살 차이세요?
두 살요. 41세입니다. 북경에서 식당 종업원 하면 이때부터 본격 고
향을 떠나서 인제 타향살이의 시작이 된 거죠.
처음에 어떻게 북경으로 가게 되었어요?
3장. 흑룡강성 출신 조운의 식당 자영업 전략과 자녀교육
 
101
북경에도 그 때 아는 형들도 있고 하니까. 고향 형들이요. 형들도 있
고 친구들도 뭐 그 때 간 사람들 많고 하니까. 한국 같으면 서울 가
는 그런 격이지요. 비슷하죠. 그때 열아홉이므로 고등학교 갓 졸업했
는데 도시 경험도 없고 상당히 뭐 적응하는데 어려움도 많았죠.
북경에서 어떻게 생활하셨습니까? 월급 많이 주던가요?
월급은요? 월급은 뭐 먹고 쓸 거 모자라죠. 하하하! 북경은 또 물가
가 비싸 월급이 되레 모자라죠. 북경에서 식당 종업원 그것도 얼마 
안했어요. 그것도 한 석 달 했나? 한 3개월 정도 하다가 다시 집으
로 왔어요. 예. 고향으로 갔어요.
돈 벌려고 갔는데, 왜 고향으로 또 되돌아갔어요?
별로 좋지를 않더라구요. 뭐 거기는 그 때 당시는 잠 잘 자리도 불
편하고 모든 게 다 불편했기 때문에. 돈도 많이 들고. 저기 직장에 
다녀도 보통 보면 혼자 다 해결을 해요. 집도 자기가 잡아야 되고 
그러니까. 남는 게 없죠. 고생스럽고 몸 망가지고. 버는 건 좀 번다 
하는데도 별로 남는 거 없어요. 고향에 가가지고 한 2년 놀았어요. 
집에서 한 2년 놀다가 그리고 나서 한국 갔어요.
▮ 돈 벌기 위해 한국으로
아버님께서 먼저 91년도에 가셨는데, 사장님은 언제 한국에 가셨어
요? 
1997년도요. 한국 간다고 생각은 안했는데 집에 갔다가 뭐 어떻게 
돼가지고 한국 가게 됐어요. 근데 부모는 못나오게 하고. 고생한다고 
그런 것 같아요. 어떻게 갔는지도 잘 몰라요. 맨 처음엔 혼자 갔어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02
 
요. 안 알리고요. 승낙하고 알리고 갔더라면, 부모님 계시므로 더 가
기도 쉽고 일자리 이런 것도 좀 수월하게 구하기도 하는데. 반대를 
하니까 그냥 모르게 갔죠.
그래도 한국으로 들어갔던 과정이 궁금합니다? 당시에 소개소를 택
했다든가 초청을 받아야 되지 않았습니까?
그때 당시에는 초청이 안 돼요. 중간에 사람 통해서 간 거지요. 자금
은 한국 가서 해결을…. 한국 가서 주기로 한 거에요. 하하하! 그 때 
한 5~6만원 정도 드갔어요. 인민폐로. 한국 돈으로는 500만원, 600
만원 돼요. 많을 때는 800만원. 그 때는 100대 1로 환율이 됐으니
까요. 만만찮죠. 그땐 환율이 괜찮았죠. 한국 가면 그때 당시에 한 
달에 한 200만원 정도 벌었어요. 한 달 해가 우리 그 때 시골집 사
고 그랬어요. 한 달 해가지고 집 산다 그 얘기도 있었죠. 시골집은 
그때 1만원, 2만원 했으니까. 1997년도 가 가지고 아이엠에프(IMF) 
터졌어요. 1997년 10월 달에. 10월 달 그 쯤이예요. 그쯤에 아이엠
에프가 터져가지고. 그래도 고생은 안했어요. 별로.
일하는데 지장을 안 받았어요?
지장은 받지요. 지장은 별로 안 받는데 돈이 안 되지요. 월급 못 받
고 그런 건 없었어요.
한국 가서 무슨 일 하셨어요?
가 가지고 맨 처음에는 내장목수 했어요. 아파트. 기술이 좀 있어야 
하는데. 아파트 내장목수 그거 당장 못해도, 기술 배워가지고 내장목
수를 한 3년 정도 했어요. 아파트죠. 내장목수면 내부의 천장도 하
고.
힘들지 않던가요?
힘들죠. 하하하! (연변대학교 공동연구원이 부연하며) 우리 언니하
3장. 흑룡강성 출신 조운의 식당 자영업 전략과 자녀교육
 
103
고 형부도 했는데, 계속 천장만 보고 끙끙 하니까 아파가지고 저녁
이면 막~ 너무 힘들어하대요. 석고판 다 떨어지고. 석고판 붙이고 
창문 틈새에 몰딩도 좀 돌리고. 그걸 한 3년 정도 하다가 그것도 돈
도 안모이고.
아파트 단지 마치고 나면 또 옮겨야 되고 기다려야 되고 이렇죠?
예. 그게 노는 시간이 많아요. 그때 당시엔 젊었지. 돈 벌었는 건 또 
다 써버리고. 돈이 안돼요. 돈이 안 돼가지고 나중에 인자 아버지 하
는 일을 도와줬죠.
▮ 먼저 출국한 아버지, 견출작업 기술자
아버지께선 무슨 일을 하셨어요?
아버지가 견출 일이라고 있어요. 미다시요. 섬유회사 일 아니고요. 
저기 맹 건축업인데, 도배하기 전에 하는 게 있어요. 미장에 속하지
요. 그게. 도배는 내부에 벽지 바르는 거지만, 근데 벽지 바르기 전
에 여기 뭐…. 석고판 아니고요. 여기 세멘으로 이래가지고 메꾸는 
작업이 있어요.
벽돌 사이 메우는 거요?
아니요. 콘크리트 치고 나면 조인트가 생기잖아요? 그걸 인자 그라
인더로 갈고. 거기 대고 하는 일요. 표면을 부드럽게 하는 일. 벽지 
바르기 직전 단계 일입니다. 그걸 ‘견출’이라고 해요. 견출작업. 용어
도 전문용어를 쓰시니까 처음 들어봐요. 견출작업.
벽지를 잘 붙게 하기 위해서 하는 그런 작업 같은데요?
아니요, 그게 왜냐하면 하기 전에 그게 어떻게 되냐면 우둘투둘하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04
 
죠? 그걸 말끔하게 만들어 주는 거죠. 미장일을 해가 세멘을 발랐지
만 이게 우둘투둘하니까요. 그리고 발코니에 보면, 페인트질 하기 전
에 해준다고요. 말끔하게끔. 그러고 나서 페인트칠하고.
한국에서 생활은 어머니, 아버지하고 같이 했겠네요?
네. 그래가지고 번 게 좀 남았죠. 3년간 내장목수 할 때는 아버지랑 
같이 생활 안했죠. 따로 했죠. 못하죠. 따로 다니니까. 일이 틀리니
까. 전국을 다니면서 하니까요. 공사장 따라서 전국을 다녀야지요. 
그리고 아버지하고 하면서 1년에 거의 한 개 서울에서 하다가 또 현
장 일이 부산에 나면 부산으로 가야 돼요. 부산도 가고 대구도 가고 
다 갔어요. 그래서 한국에서 10년 있었어요. 계속 이 일을 하면서요.
식당 사업은 어떻게 하려고 마음먹었어요?
한국 갔다 와가지고 이제 중국에서 자리를 잡아야 되니까요. 한국에
서 있으면 계속 3D 업종에 종사해야죠. 건설업을 계속 해야지. 노가
다만 해야지 딴 거 할 게 있나요.
그래도 한국생활 10년이면 꽤 오래 하신 건데요?
(연변대학교 공동연구원이 대신 설명하며) 떨치기 어려운데. 우리 
형부 언니는 12년 됐는데 못 왔거든요. 아직도. 아우 대단하시다.
한국에 대해 상당히 많은 경험을 하셨겠습니다?
한국이 살기는 좋아요. 살기는 좋은데 나중에 인자 자식이 있으니깐 
자식은 어차피 여기서 키워야 되니까 와야 되지요.
▮ 귀국과 결혼, 다시 북경으로
2007년에 귀국하셨어요?
3장. 흑룡강성 출신 조운의 식당 자영업 전략과 자녀교육
 
105
20002년도 왔다가 2004년도에 다시 한국으로 들어왔어요. 2004년 
들어가기 전에 고 사이에 결혼했어요. 그 때가 결혼할 때가 스물일
곱이요. 아내하고는 고향에서 뭐 연애결혼이죠. 고향 후배입니다. 나
중에 고향에 와가지고 만났죠. 한 몇 년 정도 있었으니까. 2년 정도 
있었는지? 와가지고, 와가지고 만나게 돼가지고. 만나게 돼가지고는 
인자 만나서…. 결혼을 했어요. 2년 고향 있는 사이에.
결혼을 하고 다시 북경에 들어갔어요. 한국으로 곧바로 다시 안 오
고요. 북경 가가지고 창업, 인자 옷 장사했어요. 2004년도에 북경 
드갔어요. 옷 장사 할 때 맨 처음엔 잘 됐죠. 맨 처음엔 잘 됐는
데…. 북경에서 옷 매대를 했어요. 와이프가 매대를 하고 전 가이드
를 했어요. 제 색시는 저기 옷 팔고. 매대라는 건 옷가게.
사장님은 여행사 가이드 한 겁니까?
가이드에요. 주로 한국 손님을 상대로 했죠. 어디 여러 곳을 다니기
보다는 북경에서만요. 북경시내 가이드죠.
북경에서 몇 년 계셨습니까?
북경에서 한 6개월 정도 있었는 것 같은데요. 2004년도에 잠깐만요. 
잠깐 있다가. 왜 그러냐면 그 때 뭐가 왔냐면 사스(SAAS) 병이 왔
어요. 2004년에 사스 병이 와가지고 다 접고 고향으로 다시 갔어요. 
그 병만 안 오면 괜찮은데, 북경에 계속 있었을지 모르지. 사스 병 
걸려가지고 돈 다 썼지요. 거기에. 사스 병 걸려가지고 일단 가져간 
돈은 못 뽑고. 일단 초창기 시작하면 괜찮았는데, 병 오니까 다 접어
버리고 고향으로 갔지요. 고향으로 가가지고 있는 돈은 다 썼고 그
래 다시 한국으로 갔죠.
사스 병 발생해서 중국에 그때 사망자 상당히 있었죠?
말로는 많았다고 하는데 안 밝힌 게 좀 있는 것 같은데 모르겠어요.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06
 
(연변대학교 교수님이 연변지역에서도 사스가 돌아 병원에 입원해 
완치되었었다고 하자) 아니요. 그게 어떻게 되는가 하면 사스 병 걸
린 사람은 오래 못산대요. 치료해도요. 나은 사람도 있지만 사망자도 
상당히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사망자도 많아요. 근데 그런 사람
이 아마 면역력이 없어가지고 딴 병으로 죽는다고 그러더라구요. 고
치긴 고칬는데. 뭐 약을 어떻게 썼는지는 몰라도.
사장님은 어떻게 치료하셨어요?
아~ 저는 안 걸렸어요. 그냥 그것 때문에 접었죠. 근데 돈만 써버린 
거지요. 왜냐면 투자했던 걸 뽑지 못하고 그냥 다 귀향을 했으니까
요. 먼저 투자를 해야 벌잖아요. 그런데 투자금이 회수가 전혀 안됐
단 말이지요. 그리고 여행사 다니면서도 사실 2~3년 정도 해야 손
님이 늘고 그런데 그걸 6개월만 했으니까 뽑을 수가 없지.
가이드는 많이 다니고 또 사람 접촉도 많으므로 감염 확률이 더 높
았겠네요?
그 때 당시도 그 때도 크게 생활이 좋지는 않고 인자 유지만 했지
만, 그때 또 한국 손님들도 많이 안 왔어요. 당연히 사스 때문이죠. 
가이드 하면 예전 가이드들 돈을 많이 벌었는데, 그때 당시는 돈도 
얼마 안됐어요. 조~금 늦었죠. 그러다 나니까 사스 병 와가지고 다
시 고향 드가가지고. 하하하!
▮ 한국으로의 두 번째 출국, 여섯 식구의 한국생활
2005년도에 한국으로 다시 나가셨어요?
2004년도 말쯤에 나갔어요. 그때는 결혼도 이미 했고, 첫 딸도 낳았
3장. 흑룡강성 출신 조운의 식당 자영업 전략과 자녀교육
 
107
지요. 아이가 이제 12살이니까 2003년도에 낳았죠. 중국 있을 때 낳
았죠. 결혼해서 바로 애기 낳았으니까.
그땐 한국에 혼자 가셨어요? 아니면 사모님과 같이 가셨어요?
한국에요? 혼자 갔어요. 아내도 곧 갔왔죠. 한국으로. 갔어요. 2005
년도에 갔나? 애기는 놔두고요. 애기는 그때 장모가 봐줬어요. 장모
한테 놔두고.
이때 한국에 오셔갖고는 어떤 일 했는지 궁금하네요?
그 때 다시 나가가지고 부인하고 같이 와가지고 맹 같은 일 했어요. 
이전에 하던 거 같이 했어요. 어머니도 그 당시에 한국에 계셨어요. 
가족이 다 옮겨왔었죠. 누나도 한국에 있었고. 누나는 먼저 가셨지
요. 1997년도.
누나는 어디서 결혼을 했습니까요?
한국 가서 남편을 만났죠. 연애결혼. 누님은 자녀도 없어요. 애기 아
직 안 낳았는데, 지금 혼자에요. 갈라졌어요. 아이 안 놓고요. 네. 당
시에는 다섯 식구가 같이 살면서 돈을 벌었어요. 아버지, 어머니, 누
나, 나, 와이프. 똑같은 일을 하면서. 누나까지 같이 했어요. 다섯 명
이 한 팀으로. 거기 한국 사람도 같이 끼어 있습니다. 일하는 조직에
요. 아버지가 오야지에요. 아버지는 거기서 큰 현장을 하고 있어가지
고. 밑에 일꾼들이 많아요. 한국 사람도 밑에 데리고 있었어요. 아버
지가 오야지 하므로 몇 몫을 더 벌거든요. 오야지는. 아버지는 저기 
뭐라? 오야지 하니까 거의 10년 정도, 지금까지 거의 20년 오야지 
해요.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에 저도 훨씬 적응이 빠르고…. 그렇죠. 
아버지 있으니까 가가지고 아버지 도와줬지.
궁금한 건 그 무렵에 한국에서 어느 정도 돈을 받았는지 모르겠어
요?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08
 
언제쯤이요? 처음과 두 번째 이주했을 때 비교를 해보면… 초기에는 
하루에… 일당으로 하니까 하루에 한 8만원 정도? 그러고 2004년 
한국으로 재 출국했을 때 그때는 일당이 9만 5천원요. 아버지는 몇 
몫 더 될 것이고.
가족이 함께 있으니까 혼자 가서 돈 모아가 집에 생활비 보내고 나
중에 와가 저축하고 이런 게 아니고 거기서 그냥 생활하는 거죠?
거기서 생활 하는 거죠. 송금은 굳이 할 필요 없는 거고. 나중에 와
가지고 오면 송금이 되고. 송금할 필요 있나요? 고향에 사람이 없으
니까요.
어떻게 돼서 가족 전체가 다 돌아오셨어요? 어떤 계기로? 또 지금은 
흩어졌죠?
아니요. 이제 청도에 와서 다 사니까요. 한국에서는 인자 일을 그만 
하기 싫으니까 청도에 들어온 거죠. 청도에 들어와 가지고 할 거 있
는가 해가지고 왔다가…. 청도에는 제가 먼저 들어왔지요. 몇 년도던
가? 한 3, 4년 됐으니까. 2009년도죠. 제가 35세 때. 식당 창업은 
제가 먼저 하고 분점은 누님이 하시고요.
▮ 칭다오 이주, 조선족 집거지
궁금한 거는 한국에서 고향도 아닌 이방의 청도로 왔는데 청도에는 
어떤 연고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그때 당시에 왜 청도로 왔냐면 청도에다 제가 와가지고 집
을 사놓은 게 있었어요. 한국에 있으면서 한 번씩 청도를 방문해보
면서 재정착지로 이곳을 택한 것은…? 한국에 있으면서 청도에 들어 
3장. 흑룡강성 출신 조운의 식당 자영업 전략과 자녀교육
 
109
와가지고 집을 샀는데 청도가 또 기온이 좋잖아요? 기후가 좋죠. 살
아가는 사는 환경이요. 기후 한경이 한국하고 거의 비슷하다고요. 그
래가 와가 집을 사놓고. 먼저 집을 사놓고 한국 가가 좀 더 벌다가 
이제 어느 정도 돈이 모이니까 인자 요~ 와가지고 뭘 해볼까 해가
지고 들어왔죠.
단지 기후가 좋단 이유 때문에 여기 집을 샀어요?
그것만 아니고요. 여기 친구들도 많아요. 하하하! 그렇죠. 자꾸 얘기
해주고 이러는 분들이 있으니까. 여기 고향 친구들이 엄청 많아요. 
고향사람들 모임도 하고 그러는데, 다 모이면 30명은 넘을 거예요. 
향우회 하고. 제가 흑룡강신문을 자주 받아보는데요 .여기 많아요. 
친구들이 많으니까 이쪽으로 오는 거죠.
(웃으면서) 아파트 사놓고 민박도 하면서 청도에다가 노년을 위해 
투자를 해도 되겠네요?
근데 요즘 민박도 안 될 거예요. 민박도 장사 안돼요. 주변에 조선족 
두 분인가 세 분인가 더 계실 거예요. 민박하시는 분. 민박도 한 때 
호황이었는데 그것도 좀 건너갔죠. 이게 지금 한국 사람이 많이 빠
져서 그래요. 한국 기업이 많이 지금…. 바깥으로 다 나갔지. 다 나
가니까 그게 안 돼요.
조선족들은 한국사람 대상으로 해가 돈을 벌고 이런 거네요? 민박사
업도 그렇고?
여기에 원래는 한국 사람이 먼저 들어와 가지고 여기 지금 기업을 
만들고 해가지고 여기 청도가 생활도 괜찮아졌다고요. 그러다 나니
까 청도도 어느 정도 발전하고. 그런데 점점 가다보니까 인건비 올
라가고 하니까 한국 사람이 못 배기는 거죠. 그래서 빠져나가고 딴 
데로 나가버리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우리 중국 교포들이지. 교포들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10
 
이 남아있지. 원래는 한국 사람들이 있어가지고 와가지고 들어왔는
데 이제는 교포들이 남아있죠. 그렇죠. 그 자리를 조선족 분들이 다 
메우고. 하하하! 그 다음에 조선족분이 나가면 한족이 들어와서 살
고 그래요. 아마 조선족들도 얼마 안지나면 얼마 없을 거예요. 청도
에. 여기서 먹고살기 힘들어요.
조선족은 지금 어디로 가는 추세입니까?
한국기업이 어느 쪽으로 가면 따라가고 그러죠. 베트남 등 해외 멀
리까지는 못 따라가더라도 여기서 또 밀려가 딴 데로 간다고요. 밀
리가지고 밀리가지고 더 아마 밑으로 내려가면 뭐…. 부동산에 이렇
게 구입하면서 시세를 보면…. 여기가 집세가 집이 비싸니까 집을 판
다고요. 팔고 나서 또 좀 싼 데를 간다고요. 싼 데로 가가지고 집을 
사는 거지요.
그럼 여기는 ‘청양지구’라고 합니까?
예. 청양요. 청양구는 조선족 밀집구죠. 이 일대가 지금 집값이 많이 
올라갔죠. 집값이 많이 올라갔지. 원래는 조선족들이 어디 많았냐면 
저기 이창구(李創區) 이촌(李村) 쪽에 많았어요. 이촌. 이창구입니
다. 청량구. 이창구. 그리고 구 시가지입니다. 청량구가 북쪽에 있고 
이창구가 중간에 있고 남쪽에 구 시가지입니다.
여기에 원래 조선족 분들이 많았어요?
원래 거기가 집중돼가 있었던 거예요. 집중돼가 있다가 거기서 이제 
청량으로 일로 많이 온 거지. 청량은 거기 있다가 오는 사람이 많아
진 동네지요. 여기도 상당히 빠지는 단계라고 봐야죠. 조선족들이. 
지금도 여기는 인자 빠지는 단계에요. 청량도요.
그러면 조선족들이 새로 이동해나가는 아파트 단지가 지금 어느 쪽
입니까?
3장. 흑룡강성 출신 조운의 식당 자영업 전략과 자녀교육
 
111
저기 라이시(萊西) 쪽으로 많이 간다더라구요. 라이시구(萊西區)가 
또 있어요. 아니. 라이시스(萊西市)죠. 래서시. 이게 지금 큰 청도 
안에 있는 주변 지역이죠. 그럼 여기가 비싸지니까 팔아가지고 돈을 
좀 남기고 또 좀 덜 비싼 곳으로 가서 새 아파트 또 사고. 살 수 있
죠. 이게 조선족들이 청도시에서의 하나의 이주 패턴이라고 봐야죠. 
그렇죠. 여기서 인자 그쪽으로 가 가지고. 그 쪽으로 가서 나중에 어
느 쪽으로 갈란가 모르지만 또 딴 데로 가겠지요. 아마.
성양구 조선족 상점 밀집구역(2013.2)
▮ 숯불 불고기 뷔페식당, 한풍원 개업
지금 식당하고 있는 이 건물은 사장님 건물이죠?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12
 
아니요. 임대로 해가 해요. 임대비용은 1년에 14만원요. 월 1만원이 
넘죠. 한국 돈으로 월  200만원 가까이 되죠. 근데 인근 헤어샵도 
임대료가 월 1만원씩 나가요. 그것도 안 싸요. 근데 헤어샵 손님도 
별로 없는데 유지가 된다 하더라고요. 그것도 인자 올라가면 안 된
다 그러던데요. 지금 저쪽 큰 길 가로는 21만원까지 올라간대요. 가
게세가요. 21만원까지 올라갈 건데. 지금 새로 계약해오는 사람들은 
21만원이에요. 근데 요 쪽으론 또 장사가 안돼요. 요 쪽으로는 지금 
장사하는 게 다 안돼요. 별로.
저쪽은 아파트 주택 지구가 많아 그렇습니까?
저쪽이 또 먼저 했고요. 저쪽이 먼저 했고 이쪽은 후에 했고. 원래 
다 조선족들이 와가지고 하고 있는데 그 쪽도 장사가 안돼요.
식당 개업은 몇 년도에 하신 겁니까?
2010년도에 했어요. 8월. 8월 달에 했나?  8월에 한 것 같은데…. 
아이다. 6월 달에 했는지 8월 달에 했는지 잘 생각이 안 나네요. 이
거 하기 전에는 가게가 비어 있었어요. 새 거 그냥 임대했어요. 이거 
해가지고 임대료 올려놓은 건 아니고요. 그쪽으로 지금 시세가 그래
가지고. 식당은 1, 2층입니다. 1, 2층 합치면 평수가 250평입니다. 
아니, 한국 평수로는 그렇게 안 되죠. 중국 평수랑 다르지요. 한국 1
평이 3.3 제곱미터 아닙니까? 여기 100평은 한국의 33평 정도라고
요? 33평이니까 한 60, 80평 정도지요. 한국 평수로 80평. 여기는 
그냥 평방미터 씁니다. (손으로 써주며) 예. 이거 쓰거든요. 제곱미
터. 한국 평수로 살적에 33평 정도면 중국의 100평 되지 싶어요. 여
기서 250평이란 것은 나누기 3 해서 한국의 88평정도.
3장. 흑룡강성 출신 조운의 식당 자영업 전략과 자녀교육
 
113
<한풍원>식당(2013.2)
처음 개업하실 때 빚내고 그렇게는 안했습니까? 집 산다고 돈을 많
이 썼을 텐데요?
아니. 그러진 않았어요. 한국에서 벌어놓은 게 있잖아요. 하하하! 부
동산 구입 좀 했죠. 아버지 집 있고 제 집 있고. 우린 다 이창구 이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14
 
촌에다 집을 사놨다고요. 그 때. 그건 지금 세를 주고 우리는 지금 
여기 와가지고 세 살고 있지요. 이창구 안에 이촌이라는 그런 구역
이 또 있습니다. 조선족 밀집구지요.
식당에 종업원은 몇이나 됩니까?
한 열 몇 명 정도 돼요. 조선족은 지금 한 분 계시고. 지금 조선족 
거의 없어요. 다 조선족은 지금 다 빠져가지고. 지금 한국으로 많이 
나가가 없어요. 한국으로 안 빠지면 인자 딴 데 뭐 다른 데를 다녀
가지고 다른 일을 하죠. 식당일을 안 할라고 한다구요.
<한풍원> 식당 숯불 화덕(2013.2)
예전에는 식당에 일하는 조선족이 많았어요?
예전에는 많았죠. 이유라면 조선족들은 딴 데 나가면 돈 많이 벌죠. 
돈을 좀 많이 벌어요. 식당 종업원 보다는요. 식당 종업원은 월급이 
3장. 흑룡강성 출신 조운의 식당 자영업 전략과 자녀교육
 
115
얼마 안 되니까 보통 보면 회사 쪽으로 많이 가요. 회사 가면 식당 
종업원보단 많이 버니까.
한족들 일 시키는 데는 어려움 없습니까?
괜찮아요. 언어가 통하니까. 중국말이 되니까.
처음 개업하실 때 내부 인테리어도 하고 기물 사들이고 상당히 또 
투자가 되죠? 
한 70만원쯤 들었어요. 인민폐로. 한국 돈으로는 그때 당시 1억이 
넘을 걸요. 1억 한 2~3천만원 되겠어요. 이건 부모님이 도와준 게 
아니라, 자력으로 한 겁니다. 제가 번 거니까. 제 와이프하고 같이 
갔으니까 그 정도는 벌지요.
이정도 돈 모을라 하면 한국생활은 그야말로 안 쓰고 벌었겠죠?
아니. 그렇진 않아요. 한 달에 둘이서 한 6~7백만원 정도는 벌어요. 
기술이 있었으니까요. 우리는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에서 온 그런 
외국인 노동자처럼 취급받진 않죠. 그쪽하고는 또 틀려요. 가~들은 
고작 월급이 몇 십만 원이지만요. 우리 보면 일당이 하루에 9만 5천
원이고. 한국하고 똑같죠.
실제로 외국인들은 그렇게 못 받을 건데요?
똑 같아요. 외국인들도 똑같아요. 아니 근데 베트남 그쪽으로는 잘 
모르지요. 그 쪽은 얼마 못 받아요. 그 쪽으론 얼마 안돼요. 교포들
은 똑같아요. 한국 사람하고 똑 같게. 한국 사람보다 더 많이 벌었어
요. 하하하! 제가 또 일 맡아 하기도 하고. 뭐 오야지는 또 아니고
요.
일을 맡아 하신다는 건 무슨 말입니까?
이 일을 얼마에서 하겠다. 얼마씩 맡는 거지요. ‘도급제’라고 할까요? 
돈내기? 때로는 밑에 사람도 두고 제가 하고. 그러면 상당히 돈벌이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16
 
도 낫죠. 조금 남죠. 상당한 경력과 기술이 있어야 돼요. 인맥관계와 
일을 따올 수 있는 능력도 있어야 그거 하는 거 할 수 있죠. 아빠가 
오야지잖아요. 하하하! 돈을 뭐 모으지 않을 수 없는 그런 환경이었
다고나 할까요. 하하하!
▮ 한풍원 식당의 운영 전략, 염가 판매와 숯불구이
식당 개업하실 때 주 메뉴를 두고 다른 것도 구상 안했습니까?
그때는 많이 망설였죠. 그 때 뭐 여러 가지 생각하다가 압축해서 이
거다 해가 그렇게 결정했죠. 그 때 당시에 중국 사람들이 고기를 좋
아하잖아요? 고기를 좋아하는데 아마 여기 고기집이 많았다고요. 많
았는데 비싸요. 엄청 비싸고 못 먹어요. 웬만한 사람들은 못 먹으니
까 그걸 내가 뷔페집을 하면 될 것 같아가지고 인자 해논께 잘돼요. 
가격을 다운시키고 맛을 좋게 하고. 양도 푸짐하게 주고요. 그게 어
느 정도 들어맞은 거죠. 전략적으로 맞죠. 맨 처음에는 ‘이게 될까?’
해가지고 염려도 했지요. 이건 제가 생각해가지고 한 거죠. 주변에 
고기집이 많았는데, 비싸고 뭐 맛도 그렇고. 그렇더란 걸 좀 판단했
던 거죠. 그래가지고 그걸 보완할 수 있는 쪽으로 파고든 거지요. 틈
새전략. 손님들 중에는 젊은층이 가족단위나 친구단위로 많이 오죠. 
술도 팔아요.
주말이면 손님이 더 많겠네요?
주중인데도 저렇게 손님이 많으니까, 주말엔 더 많죠. 그러면 줄을 
서 있다가 들어와요. 많을 땐 자리가 없어요. 지금 어제까지도 잘 됐
어요. 어제까지도 잘 됐는데 오늘은 지금 주춤해요. 약간. 오늘 목요
3장. 흑룡강성 출신 조운의 식당 자영업 전략과 자녀교육
 
117
일이고 내일부터 금요일부터 손님 많아요. 여기도 회사들에선 보통 
주 5일 근무해요. 우린 금요일부터 주말이라 합니다. 금요일 저녁에 
한잔하자 그런 게 많죠. 근데 여기 사람들은 술을 별로 많이 안 마
셔요. 이거 만약에 한국 같으면 술 엄청 많이 팔아요. 특히 고기집 
같으면 소주를 많이 팔죠. 여기는 별로 많이 안 마셔요. 실제 저런 
데서 술을 좀 마시면 술 마신 거기서 이득이 좀 많이 남죠. 아~ 근
데 술을 마시면 또 뭐가 나쁜지 알아요? 시간이 오래 가요. 자리를 
빨리 안 뜬다는 거죠. 한 테이블당 이게 손님 순환이 빨라야 되는데. 
우리가 하루에 많이 팔 때는 하루에 다섯 테이블까지 앉혀요. 테이
블당. 그러니까 빨리 먹고 나가는 게 낫지. 술 마셔가지고 오래 뻐기
는 거보다 나가는 게 훨씬 나아요. 손님이 한 테이블에 하루에 다섯 
번 회전을 하는데도 사람이 다 못 앉아요.
인터넷에도 오르고 그랬어요?
예. 인터넷을 활용 잘해도 도움 되죠. 한국에서는 인터넷에 검색하고 
맛집 보러 가고 그게 유행이잖아요. 여기도 그래요. 여기도 인터넷으
로 검색해가지고 어디 맛있는지 서로서로 찾아가고요. 지네끼리 얘
기해요. 어디 맛있나 하고. 맛있다 그래요. 멀리서도 와요. 원래는 
여기가 뷔페집이 한 집 있었어요. 저기 유칭 쪽에. 거기가 구이집이
라고 있었어요. 근데 모르고 그걸 모르고 난 이걸 시작할라고 했는
데 그 때 집을 잡았어요. 집을 잡고 보니까 하나 있데. 가까이 있데
요. 그래서 가본 거예요. 나는 없는 줄 알고 했더만 있더라고요. 그
래가지고 갔는데 지금 우리 집 옆에도 또 하나 있어요. 그건 나도 
모르는데 우리 할 때 아마 같이 인테리어 시작했어요. 주변에 없다
고 생각하고 했는데. 근데 인테리어 시작했는데 지금 장사가 안 돼
요.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18
 
거긴 주인이 한족분이에요? 조선족 분이에요?
한국 사람이에요. 장사 안돼요. 왜 그러냐면 인자 차이는 가스하고 
숯불하고. 저희는 숯불이고 거기는 가스고. 고객들도 차이를 알죠. 
고기 맛이 틀린데. 고기 맛이 틀리잖아요. 요즘엔 친구들도 많이 해
요. 친구들도 혼자서 와가지고 하는 애도 많아요. 다 저하고 비슷해
요. 나이가.
손님들이 요즘은 차가 다 있으니까 멀리까지 맛집 찾아 가잖아요? 
멀리서도 손님이 와요?
시내에서도 와요. 시내에서도 전화해가지고 오는 사람이 많이 있어
요. 예약손님도 많아요. 저녁 때 되면 내일 저녁이나 모레쯤 되면 예
약 엄청 많이 오죠. 3년 해가지고 청량에 웬만한 사람들은 거의 알
아요. “고기 먹으러 가려면 한풍원에 가자”고 그래요. 아니. 근데 어
떻게 와가지고 우리 가게를 들어왔지요?
우리가 청향각 거기에 소개받아가지고 또 갔거든요. 보니까 한글 간
판이 많아요. 그래서 들어왔어요. 
예. 요쪽으로는 다 한국간판이지요. 가까이만 해도 한글간판이 열다
섯 군데 이상 돼요. 저기 ‘해랑’도 제 친구에요. 고향친구에요. 한 동
네 친구에요. 일식집이죠. 고향에서 같이 컸는데. 제 이름 대면 뭐 
딱 통하죠. 잘 알지요. 저하고는 매일 같이 노는데. 저기 하루에 한 
번씩 가는데. 할 일 없으면 가가지고 얘기하다가 오고.
누님 가게도 잘 돼요?
예. 누님 가게도 괜찮게 돼요. 근데 청양보다는 못해요. (어느 방향
을 가리키며) 누님 가게는 저기 저쪽에 쭉 나가면 지무(卽墨) 쪽에. 
지무도 한 개 시거든요. 거기도 같은 이름으로 합니다. 분점이죠.
사장님 같은 분을 뵙게 뵈니, 우리 민족에 대한 긍지를 이곳 청도에
3장. 흑룡강성 출신 조운의 식당 자영업 전략과 자녀교육
 
119
서도 느낍니다.
(연변대학교 공동연구원이 부연하며) 긍지도 있었지만 그 중간 중간 
젊은, 특히 젊은 분들이 안 좋은 모습을 제가 많이 봤거든요. 제가 
대학생들 가르치니까. 대학에 와가지고 많이 좌절하고. 자기들이 조
선족이라는 그것 자체를 막 그래요. 그래가 한 1년, 2년 대학 적응 
못하거든요. 그런 거 제가 많이 애들하고 상담하고 한국 유학 보내
고 이랬는데 여기 와가지고 본 모습이 그런 거에 대해서 걱정 안 해
도 되겠습니다. 하하하!
▮ 자녀 양육의 어려움, 선천성 장애아 맏딸과 둘째딸
의 교육문제
근데 후대가 걱정이에요. 말을… 왜냐면 우리글에 대한 교육을 못 받
죠. 제가 지금 작은 거는 작년에 한 석 달 조선족유치원 다녔어요. 
다니다가 지금 또 중국유치원 보내고 있거든요.
큰 애는 한족학교 다니겠네요?
큰 애는 지금 아파요. 아무 것도 몰라요. 태어나가지고 그래 됐어요. 
태어나가지고 저게 뭐라?‘선천선 장애’니까. 집에만 있죠. 치료를 못
해요. 한국 쪽에서도 이 병을 치료를 못한대요. 선천성입니다. 그게 
어떻게 되냐면 인자 태어나가지고 얼마 안 있어가지고 3일 만에 열
이 엄청나게 올라왔어요. 고열 때문에 후유증이. 열 너무 올라가가지
고 머리 세포가 죽는 거예요. 말도 하지 못하죠. 엄마 아빠하고 얘기
도 못해요. 걷지도 못하고 그냥 앉아있어요.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20
 
그러면 애기 하나 더 가져요.
그래가지고 둘째를 지금 낳은 거예요. 둘째는 그래가지고 그때 당시에 
낳아가지고 중국이 아마 한국 같았으면 또 모르지요. 그런 병이 안 걸
릴런지. 그래가지고 둘째는 한국에서 아예 낳아버렸죠. 그 쪽은 의료시
설도 좋고. 둘째는 한국에서 낳아가지고 왔어요. 하하하! 그런 아픔도 
있습니다. 큰딸이 열두 살, 작은 거는 여섯 살. 여섯 살 차이죠.
조선족유치원 다니다가 한족유치원으로 간 거는 이유가 있죠?
이유가 있죠. 어차피 중국에서 클라면. 어차피 중국에 따라가야 되니
까. 지금은 조선족학교 다 없어져버렸어요. 그 쪽으로 가면 없다니까
요. 정양조선족학교가 지난해부터 소생을 하고 그러는데 그거에 대
한 믿음이 덜 간다고 얘기를 하시대요. 안돼요. 근데 말로는 조선족
소학교가 여기도 섰어요. 정양조선족소학교. 섰는데 맹 강의도 다~ 
중국 사람들이 하고. 다 중국 사람이 하는데 뭐가 있냐면 단지 조선
족 저기 언어. 그거는 지금 과목이 하나 더 늘어나는 거지. 인자 교
사들도 다 한족들이고. 조선어문이 하나 딱 더 추가한 거지. 그러므
로 큰 차이가 없죠. 한족학교하고 거의 차이가 없죠.
그럼 조선학교라면 조선 특색을 정책적으로 더 강화시킬 수가 없습
니까?
학교 하나를 꾸린다 카는 게 비용이 많이 들잖아요. 근데 여기 [정
양 조선족소학교는] 지금 중국 정부에서 하는 게 아니고 개인적으로 
된 거에요. 지금. 사립입니다. 신문에는 정부 허락을 받고 하는 유일
한 학교라고 하지만, 아직은 허락을 못 받았었어요. 아직은. 그래가
지고 1년에 내는 게 한 2만원 가까이 드간다는 것 같던데?
그럼 한족학교보다 훨씬 비싼 거 아닙니까?
비싸죠. 한족학교는 그게 없다고요. 의무교육이잖아요. 의무교육인데 
3장. 흑룡강성 출신 조운의 식당 자영업 전략과 자녀교육
 
121
저기는 낸다 그러더라구요. 저건 이제 국가에서 별로 안 알아주지요. 
지원을 안 해주는 것 같아요.
▮ 전승 위기에 놓인 조선족언어
한족학교에 보내더라도 가족들하고는 한국말로 소통해서 또 배우고 
이러면 안 됩니까?
그런데 지금 저희 집에 애가 한국말 하면 한국말 하고 중국말 하면 
중국말 하고. 지금 다 하고 있어요.
그럼 조선족학교 보내도 문제가 없는 거 아닙니까?
아니요. 그래도 나중 되면 크면 한국말을 안 해요. 중국말 해요. 지
금부터 인사말 하면 챙피해가지고 못한다 그러던데. 지금부터 그래
요. 그게 문제가 되죠. (연변대학교 공동연구원이 부연하며) 그게 저
희 경험에 의해도 그렇고 우리 애들한테 물어봐도 그렇고 한데. 우
리말이 존댓말 있고 친구사이에 평등하게 하는 말이 있고 또 아랫사
람에 대한 낮춤말… 이렇게 3단계로 얘기를 해야 되잖아요? 특히 초
면에 만나는 분을 존댓말 써야 되는지 그냥 뭐 이런 말 써야 되는지 
이게 애들한테는 고민이거든요. 근데 중국말은 그게 없거든요. 그냥 
한가지에요. “니하오!” 하고 끝내요. 근데 우리는 “안녕하세요!” 아니
면 또 말을 낮춰야 되든지 이런 고민을 애들이 하게 되니까 우리말
을 꺼리죠. 우리말이 어렵다니까. 하하하! 우리말이 그런 말이 있기 
때문에 애들이 꺼려요. 중국말은 하기가 편하다고요. 그냥 교수님 만
나도 “니하오!”하면 되고. 그냥 뭐 그렇죠. 근데 우리말은 “안녕하세
요!” 또 여러 가지 해야 되잖아요. 그런 거에 대한 거부감이 있더라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22
 
구요.
언어 전체적으로 그런 차이가 있습니까?
차이 많죠. 차가 많아요. 중국말은 영어와도 같습니다. “헬로!” 이러
면 되니까. 그거하고 좀 관계가 있어요. 그래서 안할라 그래요. 그리
고 또 요즘엔 어떤 말은 또 한국말 하기가 불편해요. 어떤 말은 또 
뭐 아무 거나 책 같은 거도 자기가 말하기 편하게 쑤 이런다고. 그
러니까 이제 가면 갈수록 말이 안해지죠. 지금까지는 괜찮은데. 우리 
때는…. 지금까지는 괜찮아요.
부모님 말씀 잘 들을 때는 한국말로 얘기를 하고 하는데…?
학교 가고나면 좀 틀릴 거예요. 아마.
사장님도 성장할 때 지금 밑에 아이 세대하고 그런 고민, 어려움, 조
선말 배우고 중국말 배우고 다 하잖아요? 그런 비슷한 어려움을 경
험하셨나요?
아니요. 우리하고는 좀 틀려요. 왜 그러냐면, 우리는 학교를 조선학
교 다녔다고요. 학교를 조선학교 다녔기 때문에 이게 말이 괜찮다고
요. 근데 얘들은 다니는 게 중학교 다니니까 중국학교를 다니면 틀
리지요. 지금 여기 그런 사람들 엄청 많다고요.
그러면 조선학교를 계속 보내면 안 됩니까?
조선학교가 지금 그런 문제점이 있으니까. 미래에 대한 불안 그런 
게 있으니까. 옛날에는 우리가 조선학교까지 다니고 나중 되면 대학 
시험 치면…. 중국말로 나온다고요. 대학교 가면요. 그러니까 첫 단
계부터 중국학교 다녀가지고 아예… 대학시험 보는 데도 중국학교 
보내는 게 낫다고 보는 거죠.
사장님 같은 경우는 조선학교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나서 중국어로 
하는 대학 다닐 때 공부하기 어려운 거 아닙니까? 중국말로 해야 되
3장. 흑룡강성 출신 조운의 식당 자영업 전략과 자녀교육
 
123
니까. 그런 건 없었습니까?
그런 건 있죠. 인자 조선족교 다니다가 나중에 대학 시험 치면 중국
과로 나가야죠. 근데 지금은 그게 그 때 당시에는 다 그래 돼가지고 
당연한 걸로 아는데 인자는 점점 경쟁이 심하고 하니까. 그래서 조
선족학교도 없어지고 그러니까 아예 중국학교가 낫죠. 앞으로 얘들
한테도 낫고. 어차피 중국에서 살라면 그게 낫다고요. 만약 한국 가
서 살게 되면 또 틀리죠. 허허허! 경제생활 하는데 문제가 있겠죠.
(연변대학교 공동연구원이 부연하며) 그러면 애들이 성장하는 과정
에 어렸을 땐 소통을 많이 하는데 애들이 사춘기 되고 사내애나 딸
애나 다 그렇잖아요? 사춘기 되고 부모하고 막 소통 안하잖아요? 그
런 단계 되면 우리말 더 안 할라 카지. 예. 그런 면에서 이거는 아마 
우리 민족이 공통으로 안고 있는 고민이고…. 해결할 방법이 잘 없을 
것 같아요.
(구술자가 동의하며) 이게 이제 앞으로는 인자 우리 후대 가면 아예 
없어질 것 같은데. 아예 없어질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가요? 요새 한국 정부에서는 조선어를 가르치게 하는 교
사들을 양성해가지고 파견하고, 조선족이 살지 않는 그런 나라 대학 
같은 데 한국어학당 이런 걸 개설해가지고 전문 교수를 파견하고 정
부 지원을 하고 그런 정책을 하긴 하는데. 중국 조선족이 있고 중앙
아시아 고려인이 있고 이런 데 같으면 한국 정부에서 학교 설립을 
해서 한국어를 교육시키는 그런 지원책이 상당히 필요하다고 보는데
요?
(연변대학교 공동연구원이 답변하며) 근데 그게 필요하다고 그대로 
안 될 것 같은데요? 중국 정부는 또 그런 게 있습니다. 한국에서 지
원하는 거는 바라지요.‘지원해주세요!’그거는 환영을 합니다. 뭐 지방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24
 
화, 현지화 하는 거 있잖아요. 기업들에서 많이 지원하고 하는 건 오
케이 하는데 그런 대신에 예를 들면 한국 문화, 한국어 이런 걸 표
방을 하면서 ‘우리 이런 것을 투자하겠다’ 하는 그런 건 안돼요. 그
건 못하게 하거든요.
중국 동화정책이 약해진다거나 혹은 이에 반하는 문제다. 이런 인식
이 있나 보네요?
예전에는 학교까지 다 있었던 건데 지금은 망하고 지금 거의 다 망
했어요. 조선족학교가요. 조선족학교가 다 망했다고요. 망하고 나서
는 다 시내로 나오니깐 촌에는 사람이 없으니까. 여기에…. 
▮ 동북3성 고향의 사정, 집과 토지 관리 
(다음은 연변대학교의 공동연구원과 구술자가 나눈 대화 내용이다.)
촌에 지금 옛날에 부모님하고 가꾸던 밭은 모두 임대해줬어요?
임대해줬죠. 고향에 아직도 살고 있던 집도 그대로 있지요.
집은 누가 관리해요?
집은 뭐…. 집은 사람 안사는 것 같은데. 하하하! 근데 고향에 계시
는 노인분들이 살펴보지요. 큰엄마가 있으니까. 근데 큰엄마가 동네
에 있는 게 아니고 시내에 나와 있어요. 우리 오상에 가니까 그렇게 
하시대요. 시골에 집은 다 그냥 놔두고 한족분들한테 임대로 주고 
어르신 분들은 시내에다 집을 사놓고. 시내에 살기가 편하잖아요. 이
런 부분도 있지만, 뭐 애들이 있어가지고 학교 공부시키기 위해서 
또 시내 나간다고요. 가족끼리 다요. 그래 되니까 촌에는 동네 한 
100호 되는데 몇 호밖에 없어요. 동네에 집이 다 비었어요.
3장. 흑룡강성 출신 조운의 식당 자영업 전략과 자녀교육
 
125
밭을 임대하는 분들은 누구입니까?
그런 사람들은 중국 사람들이 많아요. 한족들. 세도 안내고 그냥 집
에서 사는 거지요. 어떤 사람들이냐면 맹 농사짓는 사람들이요. 결국 
한족으로 대체된다고 할까요. 그게 나중 되면 한족 동네 되죠. 지금 
한족 동네 된다는 건 뭐 시간상 문제라요. 나중에 사람이 없으면 중
국 사람들 다 들어오지.
지금 사장님 세대까지는 밭이 있죠? 내 앞에 밭이 있는데 우리 자녀
분들은 밭이 없잖아요?
없어요.
그러니까 중국의 토지는 국가소유잖아요. 지금 30년인데  50년인가
요? (성장지를 지칭하며) 우리 돈화는 30년 임대거든요?
아니요. 아마 이게 아마 뭐….
우리 동안은 30년인데요?
영원히 할 거 아니에요?
땅요?
중국땅 하면 영원히 갈 거 같은데요.
근데 지난해 재임대했는데 30년으로 했습니다.
아니요. 원래 30년 했다가 다시 30년 추가한 거 같은데요. 아마 그
러면 뭐 영원히 가는 것인데요.
그러니까 일단 우리 세대까지는 그래도 그 다음엔 땅이 없어지겠죠?
그렇죠.
왜냐하면 우리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는….
아니요. 그땐 자식들이 아마 자식한테 넘어갈 거에요. 자식한테. 그
거는 영원히 아마 자식한테 넘어갈 것 같은데요. 내 생각에는.
아니요. 왜냐하면 저는 아버지 부분을 내 놓으라 해서 내놨거든요.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26
 
예? 정부에?
우리 아버지 돌아가시고 이번에 다시 할 때 아버지 건 정부에다 내
놨거든요.
아~ 그러니까….
10년 전에 우리 아버지 돌아가셨거든요.
아니요. 이거 저기 뭐라? 땅 요번에 나누기 전에 달라 해가지고 한 
거예요. 아니요. 지금 땅 있죠? 이제는 안 변하면 아마 30년 안 변
하면 괜찮으면 지금….
평생? 우리 소유?
중국은 아직… 중국 또 몰라요.
아니에요. 제가 알고 있는 토지법이 그게 아니에요. 하하하!
중국은 근데 언제라도 변한다고.
국가에서 토지를 개인한테 줄 수가 없어요. 안줘요. 요런 거는 조
금… 토지법은 제가 조금 더 학습을 하면….
우리 살 때까지는 괜찮아요. 하하하!
우리 사장님은 낙관론이다. 하하하! 우리 살 때까지는 괜찮습니다. 
후대 때는 장담 못한다고 봐야죠.
후대 때는 이제 장담 못해요.
왜냐면 후대들 지금 토지가 없으니까. 토지 분배를 못 받았으니까.
아예 없는데 뭐. 토지 있어도 얼마 되지도 않고. 그렇죠.
▮ 칭다오, 재이주지 정착의 어려움
여기 청도가 객지 아닙니까? 또 소수민족으로서의 조선족이고요. 식
3장. 흑룡강성 출신 조운의 식당 자영업 전략과 자녀교육
 
127
당 개업 하시고 이렇게 운영해오시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뭐였어요?
객지지요. 어려운 점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그러면 여기 조선족이 많이 살고, 한국인도 다른 데보다 좀 많이 사
는 곳인데, 그런 부분이 식당업으로서 생계를 꾸려나가는 일에서 도
움 되는 점이 있습니까?
도움 되는 건 글쎄 도움 되는 건 없어요.
그럼 청도에 ‘아주 잘 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유! 그렇지도 않아요. 아직까지도…. 이게 장사한다고 해서 자기 
뭐 평생 먹는다는 게 아니잖아요? 아직까지 이제 또 노력해서 벌어
야지. 딴 걸 해가지고. 이걸 해서 이윤이 생기면, 그걸로 가게를 더 
넓히는 쪽으로 투자하느냐 아니면 부동산 등 다른 곳으로 투자를 하
냐는 아직 뭐… 글쎄요. 다른 데는 지금 같은 식당 하나를 또 해보고 
있는데 지금…. 이거 하는 게 크게 힘들지는 않아요. 괜찮아요. 근데 
이거 가게 맨 처음에 시작하면 손님 많잖아요. 이런 손님 저런 손님 
있으니까 그게 머리 아파요. 그게 머리 아파요 맨 처음 시작할 때. 
중국 사람들 먹는 게 원래 좀 그렇잖아요. 한국 가면 먹을 만큼만 
딱…. 중국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한 상 늘려놓고 먹는 게 이게 습관
이더라구요. 문화지요. (연변대학교 공동연구원이 부연하며) 연길에 
있는 한국 사장님이 연길에다가 한식뷔페 했잖아요. 전형적인 호텔
에서 하는 뷔페식. 회도 있고 다양하게. 거기 다 낭비한 게 더 많죠. 
200g. 그 정도 낭비를 하면‘벌금, 추가요금 낸다.’이렇게 되는 거죠. 
딱 적어놨어요. 입구에다가.
(구술자가 대답하며) 아니. 근데 그것도 잘 안돼요. 저희들도 맨 처
음에는 그러기 위해서 벌금을 매겼어요. 벌금을 했는데 나중 되니까 
인자 자주 다니는 사람은 알아요. 그걸요. 근데 지금 또 어떤 사람들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28
 
은 모르는 손님들 많잖아요. 그런 사람들은 아~ 고기 많이 먹을 것
처럼 막 이러는데 사실상 먹어보면 그거 못 먹거든요. 그 벌금 핼라
니 그렇고. 맨 처음엔 싸움도 하고 다투기도 하고 이랬거든요. 근데 
인자 3년 되니까 괜찮아요. 이제는. 이제는 다~ 알아서 지네가 알아
서 하니깐 뭐. 지네끼리 불판도 바꾸고 하는데요. 하하하!
(연변대학교 공동연구원이 부연하며) 우리 조카 부부가 한국에 가서 
6년 있다가 왔거든요. 와서 아파트 사고 애기 놓고 사는 게 처음에 
와서 계속 불편해 하는 거예요. 먼지 눈에 들어간다는 둥 아까 사장
님 얘기했듯이 바람이 불면 머리 날린다는 둥 하면서 교통규칙도 안 
지키고 하면서 계속 불만을 하는데 사장님은 한족 분들하고 그런 불
편이 없었어요?
맨 처음에 와서는 엄청 불편하지요. 아무 데나 가래도 뱉고 담배꽁
초도 버리고. 우리도 뭐 중국말 하면 잘하는 편이 아니잖아요. 그러
니까 여기 본지인하고 말하면 언어가 안 통한다고. 말투가 틀려요. 
여기 본지 사람하고 얘기해보면 못 알아들어요.
여기 사투리가 있어요?
사투리 있지요. 산둥말 있어요. 저도 못 알아듣습니다. 사투리 있어
서 본지 말 못 알아들어요. 젊은 사람들은 다 표준말 쓰는데 좀 나
이가 좀 한 40대나 50대 되는 사람들은 표준말 잘 안 써요. 본지 말 
쓰고. 말도 못 알아듣고 이래요. 불편한 점이지요.
사장님이 이곳 사람 아닌 게 표시가 나겠네요?
티가 나지요. 여기 사람 아이다 카는 게. 그렇지요. 티가 딱 나지요. 
우리는 딱 얘기하면 언어를 딱 얘기하면 벌써 ‘아~ 저기 동북에서 
왔다’고 딱 얘기를 하는데요.
러면 동북에서 온 게 확인이 되면 불이익이라든가 차별이 있습니
3장. 흑룡강성 출신 조운의 식당 자영업 전략과 자녀교육
 
129
까?
외지에서 오면 좀 지네 본지 사람들이 조금은 무시하지요. 배타적으
로 보고 약간 무시하지요.
그런 경험을 당한 적이 있습니까?
그런 건 또 없어요. 저기 와가지고 먹고 돈 안낼라 하는 사람 있어
요. 옛날에. 그러면 경찰 불러버리면 끝나요. 요령이 있어요. 전화하
면 금방 오니까 지금 어디 가가지고 밥 먹고 돈 안주면 돈 안 주는 
사람이 챙피해요. 그런 사람 있지요. 그것도 그런 경찰서에 가면 도
로 욕먹고. 이거 돈 얼마 된다고 많은 돈도 아니고 1, 2백원 가지고 
그런다고 지네가 도로 욕먹어요.
돈 안낸 사람은 주인이 동북3성 출신이라고 얕봐서 그런 건 아니지 
않습니까?
글쎄. 그거는 뭐 어떻게 얘기할까? 술을 마셔서 술을 마셨는지…?. 
현지인들이 깔보는 게 있죠. 깔보는 게 있는데 우리도 여기 아는 사
람이 있으니까. 아는 사람 있으니까 아는 사람 딱 데려가면 끝나죠.
방금 말씀 해주신 것 중에 어려운 상황일 때 아는 사람 데려온다 했
는데 고향 사람들입니까?
아니요. 본지 사람이지요. 본지 사람은 경찰도 있고 많아요. 옛날에 
뭐 아는 사람 통해가지고…. 여기 와가지고 맨 처음에 아는 사람들 
와가지고 연줄 연줄해가지고 만나가지고. 그런 사람들 데리고 가면 
또…. 아니면 여기 본지에 사람들 갔잖아요. 가면 본지 사람들 도와
준다고요. 아직도 그래요.
손님들과 충돌 생겨가지고 문제 생길 때 이 바닥에 살아온 한족을 
데려와서 해결하기도 합니까?
그렇죠. 한족을 데려갔기 때문에 내가 아는 사람도 한족이다. 한족이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30
 
조선족인 나를 도와줄 것이다 이래 생각해가지고 한족을 데려가죠. 
그거는 어느 정도 관계가 괜찮은 사람이니까. 그런 사람 데리고 가
면 다~ 파출소나 이런 데 다 잘 아는 사람들이니까. 조선족이지만 
이 땅에 오랫동안 살아온 한족도 아는 사람 있다. 친한 사람 있다. 
이런 인식을 주니까 좀 해결이 된다 이 말이지요. 그런 편이 많아요.
그러면서도 민족 간 문제가 생길 때 한족은 한족 편을 든다는 얘기
를 하더라구요?
그쪽에서 파출소나 이런 데 가보면 우리보다는 본지 사람 편을 더 
많이 들어요. 누가 잘못이 있다는 그것도 생각하면서도 편은 본지 
사람을 많이 들어준다고요. 그러니까 우리 교포들이 한국 가도 대접 
못 받고 중국에도 대접 못 받고. 하하하! (연변대학교 공동연구원이 
동조하며) 나도 그런 생각입니다. 저도 학자이면서도 그런 서러움을 
한동안 많이 고민했었어요. 아~ 참 그렇게 모국이라고 찾아갔는데 
공부를 하면서 막 지도교수님한테 “이것도 모르나?”하면 진짜 막…. 
이게 디아스포라의 슬픔입니다. 하하하!
(구술자가 동조하며) 아니. 근데 한국 가서도 정말 아는 사람들은 
말을 못해요. [중국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알기 때문에 말 못하는
데 모르는 사람들은 특히, 중국에 안 와본 사람들 있죠? 중국 사람
들 깔봐요. 와 본 사람들은요, 중국이 지금 중국에 와본 사람들은 절
대 안 그래요. 중국이 지금 어느 정도 지금 얼마나 발전하고 있는데
요.
지금 여기에서 웬만한 한국 사람들도 살기가 조~금 힘들어요. 조금 
힘들어요. 여기 청도는 지금 몰라요. 북경이나 뭐 상해, 광주 쪽은 
살기 더 힘들죠. 북경은 더 힘들죠. 지금 상해도 연해지역에서 소주 
안쪽으로 다 들어가잖아요. 여기 지금 옛날에는 한국 사람들이 돈 
3장. 흑룡강성 출신 조운의 식당 자영업 전략과 자녀교육
 
131
좀 있다고…. 지금은 아예 돈이 없어요. 열 명 중에 뭐 한 명? 열 명
에 한 명도 없을 거예요 아마. 지금 여기에 사는 사람 돈 있는 사람
은 돈 있고 지금 거의 돈 없어요. 고기도 제대로 못 먹고 살아요. 하
하하! 돈이 이게 조선족한테로 다 몰리니까.
부동산을 살 때 돈을 많이 내는 사람이 조선족이에요? 아니면 한족
이에요? 목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한족이 많죠. 조선족은 돈 있는 게 쬐금 있지만 한족한테는 아예 깜
도 안 되지요. (연변대 공동연구원이 동조하며) 우리 연길에, 연변에
서도 그렇거든요. 땅부자는 한족이에요. 다 한족이에요. 조선족이 연
길에서 터전을 본래 가꾸어 살은 본래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중국에
서는…. 조선족은 뛰어다니는 이동을 즐기는 그런‘유목민’속성이… 그
러므로 어떤 고정된 장소에 애착이 없거든요.
우리는 인자 만약에 100원 벌면 50원 60원 쓴다, 한족은 100원 벌
면 쪼금만 쓰고 적금한다고요. 저축해요. 우리는 그게 안 돼요.
왜 그렇습니까? 조선족은 씀씀이가 많아 그렇습니까?
조선족이 먹고 놀기 좋아하고…. 이게 내력이에요. 이게 옛날부터 내
려온 내력인데 지금 한국에서는 한국에서도 많이 겪어봤는데 한국 
사람들은…. 웬만한 사람들은 고기 제대로 못 먹어요. 우리가 한국가
면 오히려 잘 먹어요. 우리가 못 먹는 것 같죠? 우리 가면 엄청 잘 
먹어요. 뭐 다른 사람들 가면 뭐…. 우리는 한국서도 한 상 내놓고 
맹 그렇게 먹어요. 저는 일당 9만 5천원 받고…. 일도 떼 가서도 돈 
많이 벌고요. 우리는 가면 뭐냐면 첫 째는 부담이 적다고요. 한국에
서 생활을 안 할 생각으로 가니까 무슨 부담이 적어요. 내는 것도 
없고. 세금도 안내고 하니까 부담이 적거든요. 근데 한국에서 생활할
라면 부담이 많이 가서 그렇게 못쓰지. 우리가 가면 고기 먹고 싶다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32
 
면 가가지고 맘대로 먹어요. 근데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먹기 힘들
어요.
▮ 언어 정체성 유지, 현실적 딜레마
사장님처럼 젊으시지만 그런 어려운 환경에 굴하지 않고 우리 민족
의 기지와 영리한 두뇌, 끈기 이런 걸 발휘해서 꿋꿋하고 멋지게 살
아가는 모습을 보니 뿌듯합니다. 조선족사회의 미래도 밝게 보이고
요.
아니요. 그래가지고 학교를요, 우리 둘째 아이가 유치원을 8개월 다
닌 것 같아요. 8개월 정도 다녔어요.
조선족 유치원은 어떻게 운영되는 거예요?
맹 저기 조선족이 합니다. 선생님들이랑 다 조선족 분들이. 한 8개
월 다니니까 조선말은 잘해요. 조선말은 하는데 중국말을 못해요. 중
국말 표현이 안돼요. 그래가지고 쟤~가 다닌 지 한 4~5개월 정도 
됐어요. 5개월 되니까 중국말은 또 잘해요. 또 한족유치원 다니니까 
또 중국말 잘하고. 근데 중국말도 잘하고 조선말도 잘해요. 다 잘해
요. 지금. 지금까진 다 잘해요. 근데 앞으로 가면….
(연변대학교 공동연구원이 부연하며) 예. 그렇죠. 그래서 이런 거에 
대해 북경대학의 교수님, 중앙민족대학의 교수님, 그 다음에 연변대
학의 학자분들이 모여 계속 세미나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문
제들을 앞으로 좀 해결해 나가겠는가 하는 걸 고민하죠.
이게 정말 앞으로 정말 문제라요. 제 딸이 지금 만약에 자라고 나면 
제 딸 후대들은 아마 힘들 거예요. 그때 되면 다 조선말 안한다. 다 
3장. 흑룡강성 출신 조운의 식당 자영업 전략과 자녀교육
 
133
중국말 한다고요.
그러면 한 세대 앞선 부모가 한국말을 잊히지 않도록 가정에서 책임
지셔야 되지 않습니까?
근데 지금 그거를 위해서 지금 집에서는 조선말을 하는데…. 집에서
는 조선말을 해요. 중국말 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게 힘들지. 그러면 
향후 자녀가 중국사회서 살아가는데 지장이 될 수 있다는 염려가 됩
니다. 지금 집에 와서 한글도 연습해요. 한글도 지 이름도 다 쓰고 
글자 배워주고. 읽기도 하고 하는데 이게 만약에 중학교 가게 되면 
그거 못 배우죠. 자기 이름은 쓸 줄 알죠.
(연변대학교 공동연구원이 부연하며)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저희 
학과에 후배 선생님이 자녀가 남자애인데 초등학교 5학년이 되니까 
애가 사춘기가 차츰차츰 접어들대요. 그런데 어느 날 계속 한국의 
노래를 듣는 거예요. 애들이니까. 뭐 아이돌. 근데 자기가 한족학교 
다니니까 노래 가사를 못 알아듣는 거예요. 자기가 가사 뜻도 모르
고. 뜻이 참 재밌는 가사잖아요. 자기[가] 뜻을 이해를 못하니까 음
악은 되는데 그 함의를 모르니까 엄마한테 “엄마는 왜 나를 조선학
교 안보내고 한족학교 보냈노?”카면서 엄마한테 불평을 부리더래요. 
엄마한테 가사를 들고 와가지고 “엄마 이게 무슨 뜻이냐?”고 중국말
로 가사 뜻을 풀이해달라고. 애들이 그렇게 하대요. 우리 애들이. 그
런 걸 아마 나중에 집에 자녀분도 안 겪겠나 싶어요.
가정에서 한글을 꾸준히 계속 가르쳐주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겠는데
요?
근데 제 와이프가 3학년까지 조선학교를 다녔어요. 어릴 때요. 그렇
게 다니고 이제 한족중학교 다녔어요. 그래가지고 지금 근데 한글 
글자는 읽어요. 한글을 읽는데 뜻을 잘 몰라요. 하하하! 글은 읽어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34
 
요. 글은 읽는데 뜻을 몰라요. 무슨 뜻인지. 그리고 쌍시옷(ㅆ) 있고 
이러면 제대로 못 읽고. 3학년까지 다녔는데.
그러면 둘째딸은 유치원부터 한족유치원 다니고 그렇게 하니까 사모
님보다 더 문제가 될 수도 있겠는데요?
더 문제죠. 아이도 괴롭겠지요. 조선족 부모를 둔 아이들이 한족 말
과 한국어에 대한 이중의 굴레 속에서 그거 때문에요. 앞으로 득은 
있죠. 득은 있어요. 왜냐하면 한 개 국어를 더 알게 되니까요. 한국
말을 하면 알아들어요. 제 딸까지 클 때까지는 괜찮을 거에요. 제가 
조선말 하면 다 알아듣는다고요. 근데 대답은 중국말로 해요. 지금 
대답은 중국말로 한다니까요. 그리고 지금 제가 말한 거 지가 하기 
힘든 건 중국말로 해요. 지금까지. 말하는 건 다 알아듣는데.
(연변대학교 공동연구원이 예를 들며) 그냥 어렸을 때부터 이런 교
육 환경에서 컸기 때문에…. (연변대학교 청도동문회 회장을 지칭하
며) 예를 들면, 첫날에 만났던 김호림 회장도 중국 학교를 쭉~ 나왔
음에도 불구하고도 지금은 유창하게 한국말을 하시잖아요. 그렇게 
성공적으로 사업을 하시고. 그거하고는 상관이 없을 것 같아요.
그런데 어떨 때 보면 한 개 득이 있죠. 어떨 때 보면요. 왜냐하면 국
어를 하나 더 한다고요. 중학교 다니면서도 인자 일단은 글은 몰라
도 한국어 말귀는 다 알아듣는다고요. 말귀만 알아들어도 괜찮다고
요. 솔직히. 그러면 일반 중국 사람보다는 벌써 한 개 이득인 거고. 
그래 생각해보면 그렇고요. 근데 이제 나중 되면 얘 후대들에 가면 
힘들지요. 후대들 가면 말은 아예 못 알아들을 거예요. 아마.
한국 입장에서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인들이 모국어를 모르면 
우군을 잃는 거잖아요. 모국어에 능통하고, 나의 피는 조선인이다 이
걸 느끼면서 살아야 나중에 우호관계 형성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 
3장. 흑룡강성 출신 조운의 식당 자영업 전략과 자녀교육
 
135
것인데, 그런 측면에선 한국 정부는 상당히 고민을 해야겠네요?
이런 거 많이 호소를 합니다. 우리들이 이쪽에서 연구를 하고 지원
도 하시고 공동으로 이렇게 해야 되지 않겠나 하는 데 대해서요.
방안 중 하나가 조선족학교를 강화시키는 거라고 봅니다만…?
그렇죠. 학교 통폐합을 하지 말아야죠.
조선족학교가 자꾸 없어진다고 하니까 문제네요. 중국 정부에서는 
동화정책에 반하는 그런 학교 운영방침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도 
있는 모양인데 그게 또 딜레마네요?
학교 통폐합은 꼭 우리 민족지역에서만 생기는 게 아니고 미국에서
도 한국에서도 농촌지역에 통폐합은 다 거쳐야 되잖아요. 도시화를 
하면서. 국가에서는 운영의 효율을 따지기 때문에 통폐합을 한다고
요. 조선 민족이기 때문에 이것을 이런 데서 우리가 거슬러서 거부
는 못합니다.
그러면 조선족학교 없앤다는 것은 조선족 학생이 줄어든데 가장 큰 
원인이 있네요?
학생이 없어지는 거죠. 학생이 없어지는 거예요. 없어져가지고 점차 
지금…. 원래 저 저기 학교 다닐 때 상지에 다닐 때는 학생이 한 1
천명이나 됐죠? 지금은 아마 200명이나 될까? 200명도 안될 것 같
은데요. 어쩔 수 없는 추세죠. 학생이 없는데 학교가…. 학생이 없어
져가지고 지금 학교가 안 된다고요.
그렇다면 청도 같은 데는 조선족이 많은데 이런 경우는 조선족학교
가 늘어나야 되는 거 아닙니까?
아니요. 청도는 처음엔 조선 사람이 적었어요. 없었어요. 근데 한국
하고 교류를 하면서 한국 기업이 오면서 조선족이 들어온 거죠. 제2
의 정착지죠. 조선족학교가 없다가 창립해가 생기는 거죠. 만들어야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36
 
죠. 그러니까 지금 저기 청양. 거기 조선족학교라고 세웠는데, 아마 
저기 학비가 좀 많이 들어갈 거예요. 아마. 학비가 지금 2만원 정도 
들어간다고 하니까 아마 부담감이 되죠. 그럼 학교가 없다가 생기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긴 한데요. 근데 단지 딴 거는 다 중국어로 가르
킨다고요. 거기에다 조선어문을 딱 하나 개설했다고요. 근데 아마 조
선어문을 추가했는데 대학 시험 칠 때는 조선어문이 있겠나요? 없을 
거예요. 아마 제 생각에는 안 그래요. 근데 조선어로 시험은 당분간
은 없앨 수가 없어요. 계속 봐야죠. 
4장. 칭다오농업대학교 조미애 교수의 가족사와 
한국 유학 경험
조미애(2013.2)
4장. 칭다오농업대학교 조미애 교수의 가족사와 한국 유학 경험
 
139
■ 조미애 연보
- 1939년 : 할아버지가 황해도에서 길림성 반석 이주
- 1974년 : 연변조선족자치주 반석 거제하 출생
- 1992년 : 연변대학교 농학과 입학
- 1997년 : 한국 유학, 강원대학교 대학원 농학 전공
- 1999년 : 강원대학교 대학원 농학석사 학위 취득
- 2001년 : 결혼
- 2002년 : 강원대학교 대학원 농학박사 학위 취득
- 2002년 : 경희대학교 동서의학대학원 포스닥 연구원 2년간 
수학
- 2006년 : 청도농업대학교 농학원 교수 입용
- 2009년 :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방문교수 1년 연수
- 2014년 : 청도 거주
▮ 할아버지가 북한에서 길림 반석으로 이주
부모님이 현재 연변에 계십니까?
저는 연변에 살지 않구요. 길림 쪽에 있었어요. 길림에 반석에 있었
어요. 원래는 길림시 바로 옆에 구전에 한 10년 넘게 살았어요. 고
향은 길림시 주위에 있었어요.
제일 첨에 중국으로 오신 건 할아버지 때였습니까?
예. 할아버지 때, 할머니 때 그때 왔어요. 저희 외할머니는 남조선.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40
 
한국 경상북도요. 그래서 경상북도 되게 좋아해요. 할아버지는 북쪽
이고요. 첨에 할아버지께서 길림 오셔서 정착하신 곳은 반석이죠. 할
아버지가 계속 거게서 사셨어요.
할아버지는 주로 농사지으시고요?
예. 근데 우리 집에 우리 아버지가 지금 자서전을 저희들한테 이렇
게 주셨어요. 근데 책처럼 만든 게 아니고요. 타이핑 해가지고요. 한 
때 많이 아팠던 거 후에 가서 알았어요. 그래서 아팠는데 혹시나 무
슨 일 생길까봐 자서전을 이렇게 썼어요. 보니까 할아버지 때 반석 
옆에 어느 산골에 오셔가지고요. 우리 할아버지는 제일 첨에 의식이 
다른 거 못 시켜도 아이들 공부는 꼭 해야 그 인식이 있었대요. 그
래서 그 쪼끔한 곳에 학교를 먼저 만들었어요. 우리 아버지가 첫째
예요. 그래서 우리 아버지를 공부시키기 위해서 첨에는 다른 곳에 
멀리 가요. 아버지가 하여튼 몇 시간씩 이렇게 다니는 길에는 늑대
도 있고, 늑대가 산에서 내려와서 잡아먹을 수 있는 그때 아홉 살 
때, 초등학교 다닐 때 그런 얘기를 쓴 거 같은데요. 그래서 하도 너
무 멀어서 그 근처에 학교를 하나 만들어서 우리 아버지랑 큰고모를 
공부시키기 위해서 시작을 했대요. 그 다음에는 우리 아버지가 남자
는 형제 넷이고, 고모 있어요. 그래서 우리 집에 아버지는 공부해서 
촌에서 나왔어요.
▮ 수력발전소 회계사였던 아버지
할아버지 대부터 아버지, 본인 대까지 가족사에 대한 말씀을 좀 듣
고 싶습니다. 그 다음에는 한국에서의 공부한 경험을 포함하여 지금
4장. 칭다오농업대학교 조미애 교수의 가족사와 한국 유학 경험
 
141
까지 살아오신 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세요?
저 아버님 대 그거는 못 가져 왔고요, 그냥 사진이나 제가 형제간의 
사진을 아버지, 급히 찾아다…. 계속 정리가 안 돼 있어가지고. (사
진 몇 장을 보여주며) 사실은 정말 여~(여기) 안에 좀 그 사진 몇 
장 최근에 거 있고요, 이거 대표적인 거 몇 장 찾아 왔어요. 옛날 사
진은 별로 없어서요. 그래서 이거 좀. 
저는 대게 좋아하던 우리 아버지 사
진이. 이제 수력발전소를 평생을 해
오셨어요.
아버지께서는 수력발전소에서 근무하
셨습니까?
예. 회계사로. 그래서 이 사진이 저 
대게 좋아하는 사진이거든요.
아버님 존함이 어떻게 되세요?
성함이요? 조광범. 조 광 자, 범 자. 
조광범~ 모범의 범(範)이에요.
아버님은 지금 살아계십니까?
예예. 78세. 35년생이에요. 아버님은 줄곧 길림에 사시다가 지금은, 
그~ 몇 년 전에 일본에서 지금 살고 있어요. 설 때 일 있으면 형제
들 모여가지고…예. 안에는 몇 장 제가 찾아서 좀 괜찮다 싶은 사진. 
찾아가지고, 형제간에 있어요.
(가져온 사진을 보이며) 이 사진은 아주 정정해 보이시는데, 이때가 
언제 촬영한 거냐면… 이때가 한 거의 아~ 제 생각에~ 거의 육십 
몇 세… 최근이 아니고요. 현재 78세니까 60세 그때 퇴직하기 전에 
2, 3년 동안이 아닌가 싶어요.
부모님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42
 
삼문하 수력발전소 탐방(아버지 조광범)
사진 배경은… ? 지금 제가 전화해서 아버지한테 물어볼 수도 있어
요. 이거 삼문하. 이거 되게 큰 수력 그~ 전력, 수력발전소, 대게 큰 
거 ‘삼문하’라고 (연변대학교 공동연구원을 가리키며) 아마 선생님은 
아실 거예요. ‘삼문하’라고. 여 교수님은 ….
‘삼문하수력발전소’가 있습니까?
그 얼마 전에 중국에서 양쯔강 위에 큰 댐을 건설하면서 많은 사람
들을 그냥 이민시켰잖아요. 유명한 댐입니다. 댐 이름이 있습니다. 
삼, 세 번째. 삼이란 삼(三), 문(門). 인제 거기에서 근무하는 거 아
니라 거기 회의하러 가실 때 직은 겁니다. 협(峽) 자는 뫼 산(山) 
변입니다. 산. (글자를 쓰면서) 삼문협(三門峽). 중국에 유명한 양쯔
강 댐입니다. 큰 발전, 수력발전 댐.
여기서 평생 봉직을 하셨네요?
아니에요. 여기에는 이제 지금 회의하러 여기서 사진을 찍었구요. 아
버지는 이제 다른 곳에~ 동북3성에 수력발전소 이래 만드는데… 인
4장. 칭다오농업대학교 조미애 교수의 가족사와 한국 유학 경험
 
143
제는 이제 하는데…. 그 여교수님 그거 아버지 거 그거는 못가지고 
왔구요. 하도 오래 전에 저한테 줘가지고.
한 5~6년 거의 됐을 거예요. 못 찾아가지고 그냥. 제 기억으로는. 
아니면 아버지 제가 어제도 연락 드려가지고 지금 반석에 설 쇠고 
있으니까 뭐 무슨 문제 있으면 연락, 언제든지 연락하면 대답해준다
고.
(다른 사진을 가리키며) 이 사진은 흑백사진이네요?
저희 엄마입니다. 아버지 옛날 사진이… 가지고 왔어요. 사실 재밌는 
거 저한테는 없더라고요. 보니까요. 다른 가족한테 있는 거 같아요. 
엄마 이름은 전명자예요. 아버지하고 4살 차이나요. 아~ 올해 74세
네요. 이 사진은 언제 찍은 거냐면… 아마도 그 결혼 한 다음에 얼마 
안 되지. 30세 전후?
어머님은 바깥일을 하셨습니까?
아~ 저 이제 또 얘기하면 어머니가 이제 거의 19살 때 아버지한테 
시집을 와가지고요. 민며느리라 하잖아요. 그래서 뭐 그게 뭐 책에는 
어떻게 만났다 그 얘기가… 자세하게 얘기하기에는 시간이 또 안 되
니까요,
▮ 아버지의 어린 시절과 학업과정
아버지는 어디에서 성장하셨는지 아세요?
그냥 그 때 들어와서 아버지는 이제 그 때에 초등학교 다닌 것 같아
요. 1939년도에 조선에서 따이수라고 마을이, 조그만 마을에 왔어
요. 그래서 그 때 얘기한 거, 아버지가 학교, 이제 초등학교 다닐 때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44
 
됐는데, 다닐 때 처음에는 그 무슨 진(鎭)에 보면 거리가 얼마나 되
나요. 한 20리? 20리.
그러면 매일매일 가다 오다 이제 하루에 20키로를 다니는 셈이고, 
이제 그래서 처음에 1학년은 이제 또 할아버지 친척집에 있었다가. 
1년 있어서 학생이 3명이 돼서 그래서 셋이 다니다가 이제 할아버
지 보니까 ‘이러면 안 되겠다’ 그래서 따이수에서 이제 뭐 걸상 이런 
거 뭐 이렇게 놓고 조선족 몇 분 같이 모여서 만들어서….
이제 제일 중요한 건 선생님이 있어야 되는데요. 그 선생님이 찾기
가 어려워서 할아버지가 장순에 가서 그 이제 문화 있는 사람을 초
청해가지고 이제 좀 시작을 했었는가 봐요. 근데 한 4학년까지 했었
나요? 그 다음에는 또 그 학교가 이제 선생님이… 뭐냐면, 문화 있는 
선생님이 그 선생님도 거기 별로 조건도 안 좋으니까 아마 그게 이
게 있기에는 또 안 좋아 하셨는지 어쨌든 학교가 해체가 됐어요. 그 
다음에 아버지 또 다시 그 진에 초등학교 끝날 때까지 이제 하고, 
그 다음에 중학교는 이제 길림시에 또 중학교가 있어요. 거기 다니
고. 그 다음에는 이제 그 다음에 이제 중쪼안. 옛날에는 중쪼안. 우
리 아버지 그때, 40명….
중등전문학교. 2년제. 그 땐 대학교는 없죠, 아예. 1940년대니깐. 그
런 식으로 해서 이제 중학교 졸업하고 이제 또 직장 취직하고, 이제 
또 책에는 직장에서도 어떤, 이런 얘기를 많이 하고.
그럼 평생 동안 수력발전소를 다녔습니까?
예. 그 다음에는 평생을 수력발전소 이제 동북3성에 제일 산골에서 
시작해가지고 거기에서 계속 회계를 이제 하면서 회계부터 회계사 
뭐 이렇게 해서 평생 종사해요. 그 중에는 또 아이들 키우는 그런 
얘기도 있죠. 저희 형제가 1남 2녀인데, 오빠 하나 있고 언니 있어
4장. 칭다오농업대학교 조미애 교수의 가족사와 한국 유학 경험
 
145
요. 저는 막내이고.
아버님 고향도 길림성입니까?
예, 반석. 길림 반석. 그러면 아니죠. 할아버지가 아버지 이레 데리
고 중국으로 온 것 같아요. 제 생각에. 할아버지가 맨 처음…. 할아
버지 웃대에… 아~ 아버지는 아마 제가 사진을 봤을 때는, 그거는 
제가 확실하게 못 드리겠네요.
그럼 할아버지는 언제 중국으로 이주해 오셨는지 아십니까?
할아버지는 1939년도에 길림성으로 왔으니까. 우리 아버지 1935년
생이니까. 그러면 조선에서 태어난 거죠. 조선에서 바로 그 길림성에 
지금 따이수 그 촌에 온 거에요. 할아버지가 조선에서 황해도에서 
오신 것 같습니다. 황해도는 뭐 해주도 있고 어디도 있고 하지만… 
뭐 바다 옆에라고 하던데…? 그러니까 아버지 고향은 황해도라고 봐
야죠. 그러니까 또, 또 옛날에 그저 저, 너무 복잡하니까 그냥 황해
도라 하는 거 말하는 거 같아요. 아버지는 1935년생이니까 4살, 5살 
무렵에 이제 할아버지 따라서 길림성으로 갔다고 이렇게 정리하면 
되겠네요.
할아버지는 무슨 일을 하고 사셨을까요?
뭐 예전에 그 우리 1세대 어르신들은 농사 아니면 뭐 거의 할 게 없
었을 건데요. 할아버지는 거의 다 농사… 와서도 그게 가서도 매 농
사를 하고 그랬었어요. 그냥 농사.
▮ 아버지는 사천성 수력발전소에서 길림성 전근
아버님은 이제 할아버지 따라서 길림성 가셔가지고 거기서 계속 성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46
 
장하시고, 수력발전소 일도 길림성 내에서 하셨네요?
아니에요. 길림성 내에서도 하고요, 사천성에 그 대개… 그때는 중앙
기업, 중앙에 소속된 기업을 들어가는 거, 아버지는 옛날에는 처음에
는 은행에 갔다가요, 왜냐하면 은행학교, 다녔던 중등학교가 은행 전
공이었어요. 그래서 신녕은행에도 있었다고 하고요.
10년 동안 계속 은행에서 일하셨어요?
아니요. 신녕에 있는 은행에. 은행에 있었다가, 그 다음에 또 중등학
교 있었잖아요? 지금은… 길림 재정학원. 길림 재정, 재무학원. 신녕
에서 학교에 또 가셨나 봅니다. 그 다음에 나중에 또 이 학교에 와
서 또 이제 총무, 총무부에서 회계를 했다가.
근데 그 때는 아버지 옛날에 성격은 좀 ‘내가 내 하고 싶은 일 해야 
되겠다.’ 그 때는 좀 총무 하는 일이 좀… 업무 이렇게 종사해주는 
거 별로 중시 안 했는… 안 되는 상황이라 거기 있기 싫어하는 거예
요. 대학이더라도. 그래서 나는 여기 아니라 좀 더 큰 역할을 하는 
데 가고 싶었나 봐요. 그래서 중력에 소속된 기업이다. 이제 말하고, 
이제 그때 다 중앙에, 그 때 다 정책이죠. 정책에 따라서. 너네들 그
런 데 많이 가라고 그런 거 있어가지고. 그래서 아버지는 거기 있기 
싫어가지고 이제 들어가는데, 결국은 이런 데 올지 모르고, 산골에 
들어가서~ 더 곤란한 데 시작하게 된 거에요.
근데 그때에는…. 수력자원 개발을 하는 거라 시골에 갈 수밖에 없
죠. 그래서 그때는 중력 소속 기업 그런 거 밖에 모르고. 근데 가보
니까 생활 조건도 안 좋고, 다시 돌아갈라 싶어 해도 그때는 못 가
는 거에요.
그런 과정에서 이제 사천성에 가서도 근무를 하셨던 거네요?
예. 사천성에 가서 이제 간 적이 있는데요. 조선족이 몇 명이 있어
4장. 칭다오농업대학교 조미애 교수의 가족사와 한국 유학 경험
 
147
요. 그래서 제가 기억나는 거 중에 하나는, 사천성에 있어 보면은 아
이들 교육문제가 생겨요. 그러면 교육문제… 이제 학교를 설립해야 
하는데 그거도 좀 생각이 안 되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조선족 몇 명
이 모여가지고 “아~ 이거 사천성에 사는 거 안 된다. 동북에 다시 
와야 되지 않나?” 그래서 그 한 조선족 4~5명 아니면 몇 가족의 사
람이 우리 아버지 이제 중심으로 해가지고 “안 되겠다~ 이거…” 북
경에 가서 이 전력부서 본사에 가서. 그 있죠? 그 왜 소속된 데에서 
거기에 가서 “우리도 가서 얘기해야겠다. 우리 사천성에 있는 게 아
니라 동북에 와야 된다”고요.
근데 처음에는 이제 몇 사람 이제 가서 이 상황을 다 이렇게 얘기해
도 다 이제 “너네 누구냐?” 상관하는 사람 없어요. 계속 거기서 업무
를 하는데 가서 앉아있고. 싫어할 정도로 앉아있고 그렇게 계속 있
었다가 이제 그 사람 보니까 “이거 안 되겠다.” 그래서 뭐 중앙에 소
속된 뭐 방문실에 가서도 아 얘기하고, 그래도 안 되는데. 하도 이제 
너무 거기에 있어 보니까 싫어할 정도로. 그  다음에는 이제 너무 
많이 이게 그니까 인제 사람이 와서 듣고 이런 상황을 뭐 이렇게 아
버지 대표로 다 이렇게 해서, 그 날에는 이제 그렇게 다 얘기해가지
고 끝나고. 그 사람 얘기는 없었어요. 그 다음에 다시 돌아간 다음에 
2달동안 거기에 얹혀가지고 계속 이렇게 이 상황을 이야기해주고. 
“우린 그게 너무 곤란하다.” 뭐. 그 다음에 돌아가 가지고는 이제 기
다리고, 소식을. 후에는 내려와 가지고 결국은 이 문제를 해결했어
요, 동북에 와서.
그게 왜 가능하냐면 지금 직장을 옮기는 거잖아요? 한국 같은 경우
에는 “내가 거기서 일하기 싫다.” 하면 그냥 거기서 나오면 되는데. 
공기업이잖아요. 국가 직속 중앙자원개발이니까. 그런 공기업에서 지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48
 
방기업으로 옮긴다 하면 그건 불가능해요. 근데 왜 가능하냐면 조선
족이기 때문에. “나는 그 한족 지역에서 못살겠다. 문화도 맞지 않고 
뭐, 음식도 맞지 않고, 자녀 교육도 문제 있고, 그래가 나는 조선족 
있는데, 동북에 가겠다.” 이렇게 했기 때문에 정부에서 허락을 한 거
예요. 지금 얘기하는 게 그게 소수민족이기 때문에 그게 그쪽에서 
나올 수 있죠. 여기서 동북지방은 동북3성을 말하죠. 흑룡강에서 길
림, 연변, 요녕 등지.
그럼 그때 사천성을 다니고 이럴 때에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저는 없죠. 결혼을 아버님이 23세, 어머니는 19세에 하셨으니까. 저
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죠. 제 위로는 다 났지만.
▮ 19년간 별거하면서 농촌 살이 하신 어머니
그래서 엄마, 아버지가 이제 또 무슨 일이냐면. 우리 아버지가 첫째
에요. 그니까 엄마가 첫 며늘. 맏이… 맏며느리로 들어왔어요. 그래
서 아버지가 이제 거의 농사를 안 짓잖아요. 계속 밖에 있었잖아요. 
그래서 자기 부모한테 효도 못했다는 거 정말 평생 미안해 해요. 우
리 할머니가 일을… 왜 제가 어제 얘기했던 거 점수를 구백 몇 점 
하겠어요. 우리 할머니가 그렇게 일을 남들보다 막~ 그저 저녁에 
11시, 12시까지 새벽까지… 그래서 마지막에 세상 뜰 때는요. 제일 
큰 소원이 환갑을 쇠고 싶은데, 3개월을 놔두고 힘들어서 무슨 암이 
걸려가지고 세상 떴었어요. 그래서 엄마, 아버지는… 환갑잔치를 못
하고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아버지 그 때부터 이제 집에서 제가 이런 효도를 못하니까 
4장. 칭다오농업대학교 조미애 교수의 가족사와 한국 유학 경험
 
149
우리 엄마를 희생시킨 거에요. 그래서 원래 엄마는 같이 아버지 데
리고 양촌으로 나올 수 있는데도, 거기서 농촌에다 19년 동안 놔뒀
어요. 그래서 엄마 거기서 19년 동안을…. 별거한 거지요.
이렇게 살았어요. 그래서 제가 이제 5살 땐가 4살 때, 그때가 이제 
모여가지고. 산골에서 가가지고. 그래도 엄마, 아버지 좋아가지고 한 
가족이 모였다고. 그래서 그 산골에 들어가서 또 땅 뭐 이렇게 해서 
우리 집에 제일 먼저 밭에 심고 해가지고 주위사람들 이렇게 나눠주
기도 하고.
그러면 사천성에 가서 몇 년 정도 살았는지 기억나세요?
그거는 기억이 안 나고요. 하여튼 이거는 정말 정말 고생되는 게 계
속 옮겨요. 이쪽에 끝나면 또 조선이랑 중간에 운봉수력발전소 있는 
거기서도 일을 하셨어요. 발전소 하나 건설해 놓고는 또 다 지어가
서 또 딴 수력발전소에서 짓는 데로 이동해서 일하시고 그랬지요. 
당시 중국에서 조선까지 건너가서 일을 하셨는가 봐요. 다했죠. 그렇
죠. 중국하고 조선 사이에 저 운봉수력발전소 거기에서도 일 하신 
적 있고, 사진도 있었던 거 같은데….
5세 때 처음으로 부모님하고 엄마하고 한 가족이 모였잖아요? 그곳
이 어딘지 기억납니까?
아~ 그거…. 예. 정말 정말 산골이에요. 정말 정말 산골이에요. 지금 
가면 사람이 없어요. 거기가 사천성은 아닙니다. 저 안도(安都) 그 
쪽도 아니고 그…. (생각에 잠기며) 아~ 그 어디… 화전? 아~ 화디
엔~ 길림시에 지굽니다.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딸로서 부모님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평가로 얘기하면… 그니까 우리 아버지가 언니하고 오빠는 있지만 
19년 따로 살았기 때문에 진짜 자기 손으로 키운 건 저 밖에 없어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50
 
요. 그래서 아버지가 그 얘기를 했는데요. 이 한 마디를….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게 손…. 제일 기특하게 키운 애라고. 그리고 훌륭한 거는 없고요. 
귀엽게, 애틋하게 키운… 자기 손으로 키운 거 저 밖에 없어가지고
요. 정말 특별한 사랑을 받아서 가족들 이제…. 뭐 애지중지. 떨어져 
있었으므로 어린 아이 때부터 성장하는 걸 곁에서 지켜본 거는 제밖
에 없으니까요.
▮ 가족사진, 아버지 세대의 돈독한 형제애
식구들 다 모인 거 제가 소개드릴까요? 그러면 몇 분. 형제간에 이
제 그 때는 고모 집에 아들이 이제 결혼할 때 다 엄마, 아버지 일본
에서 와가지고 모였어요. 예. (사진을 보면서) 이제 이건 우리 아버
지고, 둘째. 우리 아버지 동생. 삼촌. 큰 삼촌. 이거는 제일 막내 삼
촌, 그 다음에 이제 여자들이에요. 이거는 우리 엄마, 우리 큰 고모, 
고모, 제가 먼저 이거로 소개해 드릴게요. 우리 엄마, 큰 고모, 둘째 
고모, 그래 형제죠? 그 다음에 이게 큰 삼촌의 숙모, 그 다음에 둘째 
삼촌의 숙모, 셋째 삼촌의 숙모. 셋째 삼촌은 이제 제가 사진 다 한
꺼번에 있는 거, 제 사진이 정리가 안 되어 있어가지고요. 이거 우리 
집에 딸이에요. 제가 청도에 와서 이제 같이 찍은 거. 이거는 북경에
서~ 이거가 셋째에요. 남자 중에 셋째. 남자 중에 셋째. 둘째 삼촌
이에요. (다른 사진을 보이며) 이거 북경에서 모였을 때 사진입니다. 
아! 2008년도에요, 2008년도.
북경에서 무슨 행사로 모였어요?
4장. 칭다오농업대학교 조미애 교수의 가족사와 한국 유학 경험
 
151
아~ 이거는 이제 엄마, 아버지 2008년도에 일본에 갔어요, 처음에 
갔을 때 이제 북경으로 이제. 북경으로 출발하니까 그래서 거기 평
양 식당 있잖아요? 평양 식당에서. 원래 다들 아가씨 이쁜 거도 있
는데 그냥 이 한 장만 해서 이렇게…. 대표로 그냥 이렇게.
(다른 사진을 보이며) 이거는 우리 오빠집이에요. 지금도 이래 우리 
오빠 집에서 모아서. 이거는 2011년 정도 이제. 오빤 지금 반석에 
있어요. 이게 우리 오빠에요. 큰오빠. 오빠 나이는 지금…. 1962년생
인데.
(가계도를 그리면서) 이렇게 설명해드릴게요. 아버지, 어머니 밑에 
자식. 예예. 이렇게 가계도를 한 번 그려보면 저희들이 이해하기가 
쉽죠. 성함도 다 이렇게 해야 돼요? 남자는 세모. 여기는 세모가 되
겠네요. 여자는 동그라미. 그~면 셋이니까 동그라미. 아~ 그렇게. 
이게 가장 핵가족이네요. 여기 인제 제 밑에 딸이므로 내려가 가지
고 동그라미 그리면 되죠. 1세대, 2세대, 3세대. 직계가족이 이렇게 
되네요.
오빠 한 분이에요?
아~ 오빠 한 분 더 있는데, 그 이제 세상 떴어요. 원래 더 있었는데, 
이제 못 살아가지고. 언제 가셨냐 하면… 아주 어렸을 때. 1살 그 때 
아파가지고 못 살아 남았어요. 큰 오라버님이 62년생이고, 작은 오
빠는 일찍 죽고요. 오빠 밑에 언니요. 언니는 세 살 차이니까. 65년
생이네요. 저는 74년생이요. 나이 차이가 꽤 나지요. 이 중간에가 왜
냐하면 따로 살고. 아이를 안 가질라 했는데, 저는 의외로 생긴 아이
에요. 하하하!
의외로 생기신 자녀가 제일 똑똑하네요?
그래서 제가 임신됐을 때 할아버지는 안 하겠다는데요. 할머니가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52
 
“에이! 그래도 생명인데….” 그래서 저희 할머니를 감사해야 해요. 할
머니 때매 제가 살아남은 거에요. 날 출생 안 시킬라고 했다 이 말
입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싫다”고 했대요. 중절 수술을 해가 안낳을
라 했는지 그거는 모르겠어요. 그래서 싫어하는데 할머니는 인제 
“빨리 낳아라. 아인데, 낳아라.” 그래가지고.
큰오빠하고 언니분도 다 여기 청도에 삽니까?
아니요. 이제 오빠는 길림성 반석에 있고요. 언니는 이제 일본에서, 
예, 일본에서 돈 벌고 있어요. 일본에 그~ 국적 가진 거 아니고. 이
민 간 게 아니고요. 그냥 일시적예요. 그냥 돈 벌고…. 그래서 아버
님도 언니하고 같이 계신 겁니다.
아버지 형제분들은 어떻게 사십니까?
사실 우리 집에 재미있는 거는 이 아버지 형제간에가 더 재미있어
요. 아~ 정말 사실 이거는 남들하고 똑 같은데요. 사실은 정말 제가 
느끼면은 그 형제간의 우정이랑 이거 딱 보면요, 그 우정은 누구 집
에 그 형제가 못 따라오는 형제관계에요. 예, 정말 음… 돈 무슨, 어
려울 때 무슨 돈 주는 거는 그런 거는 기본이고요, 이제 무슨 일이, 
그냥 옛날에 어려울 때, 이제 아버지, 이제 아버지만 밖에서 이제 돈 
벌고, 할머니 때는 농사지어서 돈 벌잖아요? 그래서 동생 이제 결혼
시키고, 우리 엄마도 제일 일찍 오고.
우리 아버지는 큰 삼촌하고 차이가 열 몇 살 차이나요. 예예. 열 몇 
살 차이나요. 그래서 제가 우리 큰 삼촌의 첫 번째 딸이랑 나이가 
비슷해요. 나이가 비슷해요.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가 78세잖아요. 우
리 삼촌은, 큰 삼촌은 환갑도 안 쇠었어요. 아직 60세가… 아~ 조금 
넘었어요. 그 때 안 쇠었다고 너무 젊어가지고. 예, 육십이 조그만 
넘었어요. 한 열 몇 살 차이 나고요.
4장. 칭다오농업대학교 조미애 교수의 가족사와 한국 유학 경험
 
153
그래서 이 뒤에 형제가 결혼시키고 그런 거는요, 우리 엄마가 그래
서 우리 집에 제일 이렇게 만나서 하는 일이 ‘우리 엄마가 우리 이 
가족을 위해서 모두 희생했다.’ 아침에 4시에 일어나서 이 큰 가족
을 다 밥 먹이고, 그 다음에 저녁에 정말 뭐 11시, 12시에 자가지
고. 그 때는 시계가 없으니까요, 조금이라도 늦을까봐 정말 어떤 때
는 잠도 못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해 먹이고, 그 다음에 하루 
종일…. 그 때는 사실 다 똑같죠. 할머니고 우리 엄마도 이제 뭐 더 
농사 뭐 하다가 중간에 와서 애기 낳고. 그 다음에 또 특별히 할머
니는 오늘 애 낳으면 내일 아침에도 일어나서 밥 하고, 그 세 번째 
날에는 이제 밭에 가서 이제 농사짓고.
고모가 몇 째에요? 삼촌이 위에 세 명입니까?
그러니까 아버지 첫째, 그 다음에 첫 번째 고모 둘째. 이 둘이가 가
까워요. 우리 아버지랑 그 다음에는 거의… 보자…. (생각에 잠기며) 
그니까 두 번째가 큰 고모. 두 살 차이 날 정도에요. 그 다음에 처음
에는 이 두 아이밖에 없고, 중간에 사실은 또 못살아난 애기 있어요. 
그래서 그 다음에 한 10년 넘어서 이제, 그리고 우리 큰 삼촌 엄청 
귀여움 받고 살고요. 그 다음에 이제 둘째 삼촌, 그 다음에 셋째 삼
촌이고. 아! 또 그 다음에 고모요. 그 다음에 막내 삼촌. 아버지 형
제는 4남 2녀입니다. 장남인 아버지는 1935년생이고요.
▮ 현모양처, 어머니의 희생정신
그래서 이제 동생들 정말, 우리 엄마는 정말 할머니랑 같이 임신도 
하고요. 하여튼 그런 얘기에요. 젊었을 때 19살에 들어와서 20년 동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54
 
안 진짜 이 조씨 집에 봉사를, 종사를 하고. 자기 외갓집도 정말… 
근데 우리 엄마 성격이 좀 온순해서 시어머니랑 한 번도 안 싸우고, 
그거 아버지가 항상 우리 엄마가 이렇게 이제 가족관계를 원만하게 
유지시켜 나왔다고 칭찬해요. 엄마 밑에가 그 뭐죠? 동서들이 많아 
가지고요.
동서끼리도 많아가지고, 정말 우리 엄마 아래 동서도 만만치 않거든
요. 근데 엄마가 잘못했을 때는 얘기하고. 평생을 진짜 시어머니랑 
관계를 엄청 잘 처리해가지고. 묵묵하게. 아버지가 “그럼 니 가라” 
하시면, 가기 싫어도 묵묵하게 가서…. 그래서 집에서 만나면 우리 
삼촌은 얘기하는 게 딱 하는 얘기가 우리 엄마를 계속 이렇게 위에 
이렇게 받들어요. 우리 아버지 얘기 안하고 계속 엄마를 받들고, 계
속 받들고, 그 얘기를 계속해요. 아주 현모양처. 존경 받을 일이면
서…. 만사에 참으면서 사는 그런 조선족 여인의 표상. 하하하! 남편
은 밖에서 십 몇 년 동안 밖에서 일을 하시고 며느리만 집에서 대가
족을 이끄시느라 고생하셨다는 거. 그래서 우리 고모가 이제 진학할 
때요. 중등 뭐 그런 거 이제 입학 되가지고 자기는 이제 앞에 이제 
“일하는 거, 고생하는 거, 나는 절대 이렇게 안 살겠다. 꼭 나가야되
겠다.” 이제~ 입학시험 쳐서….
(연변대학교 공동연구자가 설명하며) 1976년부터 중국에서 대학 입
시를 회복했습니다. 문화대혁명 하는 동안에 대학 입시라는 게 없었
어요. 그냥 정치를 잘하고, 그 정부에 그런 거 잘, 의사를 잘 하는 
사람이면은 추천해서 대학을 보냈어요. 공농병(農工兵)대학이라고. 
공, 농, 병. 공인, 농민의 농, 병은 군사, 군대. 노동자 중에서 잘하는 
사람을 추천해 보내고, 농민에서 잘하는 사람을 대학에 추천하고, 군
대에서도 이래 추천해서 보냈어요. 그러다가 76년도에 대학입시를 
4장. 칭다오농업대학교 조미애 교수의 가족사와 한국 유학 경험
 
155
다시 했거든요. 그 때부터 입시가 있었습니다. 그래 지금 그 얘기입
니다.
그래서 고모 그렇게 이제 중등학교 올라가가지고, 그게 생활비, 아버
지가 원래도 부족한데요, 그거를 또 일부 또 보태줘요, 고모를. 그래
서 고모 학교 다닐 때 우리 아버지가 지지해주고, 동생들 결혼할 때
도 많이 보탬해주고, 거의 지탱이라고 하죠. 아버지가. 그래서 어제 
말한 대로 무슨 일 있으면 하여튼 얼마나 멀어도 무슨 큰 일이 있으
면 아버지가 모두 원활하게 해결을 해요. 구체적으로 말하면 얘기해
도 좀 길어지는데요.
어머니하고 삼촌 분들이 할머니, 할아버지 모시고 한 집에 살았습니
까?
한 집에요. 그러면 삼촌 분들이 결혼을 하시고 자녀가 또 생기잖아
요? 그런 상태에서 같이 살은 거는 아니고요. 결혼하기 전까지만. 제 
생각엔. 그 다음에 결혼하면 제가 놀러가잖아요. 어릴 때. 그러면 다
른 데도 있고, 처음에는 못 나가면 같이 좀 있고요. 제가 있을 때는 
할아버지 이 쪽 집에 있었다가 또 저 쪽에 저 옆집에는 삼촌 집에 
좀 있었다가 나중에 이제 밖으로 나가고. 나중에 또 밖에 나가고. 그
런 기억이 있어요.
삼촌분들이 결혼하셔가지고는 분가(分家)라고 하잖아요? 독립해서 
이웃, 가까운 거리에 독립 가정을 꾸리는 것도 같은 동네에 하죠. 같
은 동네에 담장 너머에다 만들죠. 아버지 형제분들이 화목하고.
고모는 또 계속 옆집에…. 후에는 할아버지, 우리 할아버지 집에, 옆
집에다가 고모 집을 하나 세웠어요. 지었어요. 다시. 고모 집을 지었
고, 처음에는 고모집이랑 삼촌집이 큰 삼촌 집 이렇게 마주보고 있
었어요. 근데 큰삼촌이 이제 우리 아버지 나온 다음에 큰 삼촌이 이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56
 
제 큰 아들 노릇을 해야 하잖아요? 할아버지 모셔야 되니까. 그 다
음에 큰삼촌 집에 또 둘째삼촌 들어가서 있었다가요.
이거는 할아버지 집이고, 좀 멀리 큰 고모집이 있어요. 근데 이거 큰 
삼촌 집이 이래 마주 있었어요. 제가 거기 놀러가고. 근데 우리 아버
지 이제 산골에 왔잖아요. 큰 삼촌이 인제 일로 오고, 이제 둘째 삼
촌 또 이 집에 들어간 거예요. 이렇게 또 고모집이랑 마주 이렇게 
있고. 항상 계속 가깝게 이렇게. 저번에도 이제 그 고향에 갔을 때 
우리 삼촌이 우리 엄마랑 하시는 말이 더 많은 거예요, 삼촌이랑. 삼
촌하고 이 두 삼촌이 일이 더 잘해요. 이 큰 삼촌은 이제 학교에서 
이제 삼촌도 이 둘째 삼촌은 초등학교 교장까지 했어요. 교육자시지
요.
그래서 고향에 가면요, 엄마가 이제 삼촌 말하는 거 이제 형님이랑 
같이, 형님이랑 같이, “산에 가서 밭을 뭐 이거 얼마….” 이제 그런 
얘기를 우리 엄마하고 오히려 많이들 해요. 그래서 우리 작은 삼촌
도 우리 엄마를 얼마나 대게 존경스럽게 생각하시는지. 형수님이죠. 
엄마를 정말, 예, 존경을 해주고 그래요.
그곳에 사셨던 주소가 어떻게 되는지 기억나세요?
예. 따이수에서 이제 그때, 어제…. 그 때 하나 적어 드렸잖아요. 그
게 조선, 조선 소학교하고 초등학교가 우리 큰 고모랑 큰 삼촌, 둘째 
삼촌 다 거기에서 이제 교사로 아이를 가르쳐주고. 아~ 작은 삼촌은 
교사 아니에요. 작은 삼촌은 군대를 갔다가 지금 한국에서 돈 벌고 
있어요.
세 번째 삼촌은 한국에 가서 일을 하십니까?
예. 지금도 한국에 있어요. 나이가 많지 않아요. 우리 오빠랑, 우리 
오빠보다 두 살 많아요. 그래서 우리 엄마랑 할머니랑 같이 임신하
4장. 칭다오농업대학교 조미애 교수의 가족사와 한국 유학 경험
 
157
고… 그 전에도 함께 큰 거 있으니까. 세 번째 막내삼촌은 지금 한국
에 있는데 아이가 지금 연변에 있어요. 아들이 연변에 있어요. 두 번
째 삼촌도 한국에서 돈 벌다가 지금은 왔어요. 자식은 북경에 있어
요. 지금 큰 삼촌이랑 둘째 삼촌의 자식은 북경에 다 있어가지고, 지
금 어제 다 북경에 갔다고 그러대요.
고모는 어디 사세요?
고모는 이제, 큰 고모는 이제 아들 따라서 대련 갔고요, 아들은 대련
에 있고, 딸 한명은 이제 미국에 살고 있고요.
고모 밑으로는 몇 남 몇 녀입니까?
고모 두 분이잖아요. 큰 고모는 2녀 1남. 막내에. 그 다음에 큰 삼촌
은 그 다음에는 이제 다 하나 둘. 큰 삼촌은 딸, 그 다음에 아들. 둘
째 삼촌은 2녀. 딸 둘. 그 다음에 막내삼촌은 아들 하나. 막내고모는 
아들 하나. 다 아들 하나씩. 이거 보면은 이제 중국의 가족정책과 관
련되는 그런 현상을 엿볼 수 있겠지요. 그게 보일 수 있어요. 고모 
그 때부터 이제 하나, 그 때가 된 거 같아요. 하나만 낳기였다는 것
을요.
막내삼촌도 자녀가 아들입니다. 이제 올해 결혼해요. 그 때 또 다 모
여요. 왜냐하면 이거도 이제 올해 이번에 엄마, 아버지 일본에 오는 
거는 이제 고모부 때문에, 큰 고모 때문에 올라 했는데요. 근데 일찍 
세상 뜨셔서…. 그래도 다 모였어요. 근데 원래 사실 일본에서 한 번 
오는 거 돈 많이 들잖아요? 그래도 아버지 얘기하는 거는 꼭 와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9월 달 거의 10월 2일 그쯤에 결혼하거든요. 
사실 저도 조금 ‘1년에 어떻게 두 번씩이나 일본에서… 그것도 엄마, 
아버지 같이 오시는데. 그게 비용도 만만치 않은데’ 이렇게 생각해
요. 그래도 꼭 와야 된다고 해서. 그 때면 우리 한 가족이 또 모일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58
 
거예요. 그런 일을 통해서 뭐 한자리에 모이는 거지요. 청도에는 이
제 가족, 직계가족, 가까운 분들이 없어요. 아직은 없어요. 나 혼자
죠.
▮ 어린 시절과 공부과정
가족사는 이 정도로 정리하고, 이제 교수님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 그리고 인제 이수에서 태어나셔가지고, 다섯 
살에…?
저는 취자이허. 거기서 태어났어요. 취자이어. 리수는 할아버지가 한
국에서 금방 왔을 때 거기고, 그 다음에 한 번 이사해가지고. (지도 
보면서) 아~ 여기에서 태어났습니다. 취재하. 여기서 나서 한 네, 
다섯 살까지 살다가…. 이후 부모님하고 합가를 해가 이제 어디어디 
이렇게 이사를 좀 다셨어요. 산골에 들어갔어요. 그 때 인제.
그래가지고 공부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공부는 이제 1학년은 이제 그 농촌에 있는… 우리는 또 이제 그 수
력발전소라 해서 뭐 지어라고 하잖아요. “어데 어데 지~소!” 막 이
렇게 하잖아요? 그면 제일 조그만 데라도 다 학교는 돼있어요. 근데 
처음에 7살 때는 부모님이 이제 모이니까 상당히 기뻐해요. 그 때는 
온 몸을 해서 다 이제 일하려고, 엄마도 대게 먼 데 가가지고 정말 
한 시간, 한 시간 반 제일 끝에요. 우리 집 이쪽 끝인데 저 쪽 제일 
끝에 가서 제일 힘든 일을 했어요, 그래도 좋아서 그거는 나는 꼭 
해야 한다고 해서 그래 먼 데 가서 일하고. 집에서 저 볼 사람이 없
어가지고 1학년은 그저 농촌에 한 3키로 되는 데 저를 보내서 공부
4장. 칭다오농업대학교 조미애 교수의 가족사와 한국 유학 경험
 
159
하라고. 혼자. 혼자 보내는 거예요. 왔다갔다. 왕복 6키로지요. 혼자 
왔다 갔다 하면서 공부했지요.
그래서 저도 그 기억이 엄청 깊어요. 가기 싫을 때는 아버지가 엎어
서 좀 가다가 그 다음에 또 가고. 근데 후에는 인제 저도 좀 미안한
지 다른 친구도 있잖아요. 후에 그 친구들과 같이 다니고. 2학년부
터는 이제 우리 뭐 소속되는 초등학교 가서 이제 다니고. 한 4학년
은 또 다른 데 옮기고. 옮겨서 거기에 많이 있었다가 이제 구전으로 
옮긴 거예요.
중국은 초등과정을 뭐라고 부릅니까?
소학교라 합니다. 소학교. 근데 그게 이제 조선족 같은 경우에는 굉
장히 이게 취학, 그 학교 가는 비율이 굉장히 높습니다. 조선족 같은 
경우에는. 대부분 교육열이 높아서. 조선족들은. 당시에는 아직 의무
교육은 아직 아니었죠. 지금은 초등,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입니다. 그 
때는 아니죠. 예. 그 때는 학비랑 다 냈잖아요.
처음 다닌 소학교 이름이 기억이 납니까?
그냥 그 돌다 보면 그 지역 이름에다가, 자제(子弟)소학교. 자제. 자
녀인데, 형제 할 때 제를 씁니다. 아들 자, 형제 할 때 제. 그 다음
에 어디 어디 학교 옮겼어요. 그 다음에 홍석소학교. 붉을 홍(紅), 
돌 석(石). 그것도 자제 해서. 거기도 산골이에요. 거기서 왜냐하면 
발전소 만들거든요. 아~ 일단 아버지 직장 따라 계속 옮겨가면서 그
렇게 학교 다녔어요. 거기에서는 한참 살았어요. 근데 저는 중학교는 
이제 거기에 진(津)에 소속한 좀 큰 시(市)가 있잖아요. 그 때는 큰 
현(縣), 현. 현 소재지 되는 중학교까지 거기 갔다가요, 고등학교는 
그 현의 중점학교, 뭐 그런 거.
어느 현(懸)이에요?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60
 
화디엔. 화전. 중국에 ‘화디엔 시중’이라고 중점학교 있어요. 거기에
서 다니다가 연변으로 대학 간 거예요. 중고등학교 같이 붙어 있는 
거는 아니에요. 고등학교는 현에 가서 다녔어요. 이제 중점학교로 하
나 있어서 걸로 갔어요.
중국은 학제에서 소학교가 6년입니까? 5년입니까?
제가 그 때가 5년짼데요. 그 때가 우리 그 때에요. 5년째가 이제 끝
나는 시점, 저는 5년째 마지막이에요. 우리 그 때 나누는 거예요. 우
리 거기서 공부하는 사람은 5년으로 했고요, 공부 못하는 사람은 6
년 했어요. 딱 그 때였네요. 맞아요. 그럼 그 뒤에 6년으로 넘어가
는…. 그 다음에 6년으로 넘어갔어요. 그 때 제가 81년도 아마….
화디엔이 시에요?
그 때는 화디엔이 현이죠. 현. 1981년도에 초등학교, 아니 소학교 
다닌 거 같아요. 1학년 다닌 거.
중학교 이름은 기억납니까?
화전. 화전현…. 그건 고등학교가…. 중학교는 매 여기 ‘홍 쓰 더 즈디 
중 씨에’라고 있어요. 중학교는 3년. 고등학교도 3년. 다 똑같아요.
▮ 연변대학 농학 전공, 아버지의 영향
중고등학교를 3년씩 그렇게 마치고 대학은 어디로 갔습니까?
이제 농학원. 연변대학 농학원이죠. 연변대학교 농업대학. 전공은 농
학이에요. 농학과. 보통 중국에도 대학교 들어가면은 20세가 되는데, 
저는 좀 일찍 갔어요. 저 19살, 만 18살 안 될 때에요. 제가 기억에
는 1학년 그 때요. 남들은 다 18살 됐다는데 저는 안 되가지고 거기
4장. 칭다오농업대학교 조미애 교수의 가족사와 한국 유학 경험
 
161
서 젤로 일찍 된 거로…. 7살에 소학교 갔으니까. 그 다음에 또 5년
제니까. 한국에는 8세에 입학을 시키던데. 그거는 한국하고 같지요.
대학을 들어갔을 때 가족이 같이 간 것입니까?
혼자. 그 때는 혼자죠. 기숙사. 기숙사 생활을 하고…. 중국 대학은 
기숙사가 100% 기숙사 다 해요. 들어갑니다. 대학은 4년제고. 또 여
기 대학을 4년 마치고…. 그 다음에는 학교에 이제 학교 편집부, 농
대 편집부에서 2년 동안 근무하다가…. 대학마다 대학 연구소들이 
있잖아요? ‘학보(學報)’라 하거든요? (글씨를 써주면서) 편집부에 남
았죠. 학교에 남았죠. 편집부에.
그럼 취업하신 거네요?
그렇죠. 그 때 인제 저를 찾아와가지고 지금 말하면 별로 자랑할 건 
없어요. 근데 그 때 남게 된 이유는요. 그 때 아버지, 사실 저 평생 
아버지 영향 많이 받고 있어요. 아버지가 이제 전공 원래 거기 가지 
말라 그랬어요. 너 마음대로 가지 말라고. 저도 이제 다시 복습하는 
거, 이제 복습할라고 그 학교 갔어요. 첫해 대학 못가서 이듬해 다시 
하는 걸 뭐라 하지? 재수. 재수할려고 했는데요. 마지막에 통지서가 
왔어요. 입학 통지서. 마지막에 왔어요.
근데 아버지는 “이 전공이 안 좋으니까 다시 1년 더 하라.” 근데 왠
지 그 때는 여자앤지 뭔지 그냥 갔어요. 가서 아버지도 그냥 “그면 
니 할려면 해라.” 왜냐하면 공부하는 거랑 분배할 때 또 다를 수도 
있으니까요. “분배할 때 또 보자.” 그면 먼저 일단 대학 또 본과니까
요. 그거 본과 때문에 아마 전문대 안 갔을 거에요. 본과 4년제니까.
럼 본래 농업을 전공하지 않고, 뭐 다른 거를 하려는 꿈이 있었습
니까?
그 때는 특별히 제 생각에 없었지 않나 싶어요. 한국에는 점수를 맞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62
 
춰가지고 입학하는 그런 경우가 있던데요. 그럼 좀 갈등도 생기겠지
만은 뭐 농업에 대한 특별한 뜻이나 포부, 목표가 있었던 그거는 아
니에요. 저희도 저 운명이라 생각해요. 예.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대학에는 어느 학과를 지원했어요?
지원할 때는, 그 때는 좀 왜냐면 성적이 좋지 않으니까요. 제가 막 
쓴 거 같아요. 아무 거나 생각 없이. 성적 맞춰가 일단 연변대학교는 
적었죠. 그게 적었으니까 갔죠. 사실 아버지가요. 왜냐하면 수력 이
제 그런 데 있었으니까요. 그 쪽에도 아는 사람이 있으니까 저한테 
편지가 많이 와요. 편지를 써서 이렇게 해주는데, 이렇게 막 시도 써
주고요. 고등학교 3학년 때. 시를 써줘서 저를 이렇게 열심히 하라
고 하는 거도 있어요. 그리고 마지막에 지원서를 쓸 때에는 1지역, 
2지역 뭐 다 써놨어요. 근데 저는 그대로 안 쓰고요 제가 막 쓴 거 
같아요.
아버지는 그 당시 무슨 전공을 선택하길 권유하던가요?
당연히 자기가 하던 데. 회계 쪽으로요. 왜냐면 그 중앙수력발전소에 
소속된 학교가 장춘에 여러 개 있어요. 관련된 학교. 거기 관련된 학
교가 그게 있어요. 어쨌든 그런 데 들어가면 아버지도 아는 사람이 
있으니까 취업도 잘 되고. 취업을 생각해서 그런 거죠. 거기에는 이
제 아버지 역할이 회계사 그쪽에 하니까, 계속 이제 그쪽에 다 썼는
데, 저는 아무 것도 모르고 전부 떨어졌었어요. 후에 나중에 선생님 
보러 가니까 “니 지원서를 잘 썼기 때문에 거기 갔다”는 거예요. “아
니면 니는 못 간다.” 아버지는 딸에게도 자기 하던 일을 권유하려는 
생각이 계셨겠죠. 자기 하는 일 쪽으로….
그게 편리하니까요. 다른 거는 우리 아버지도 이제 익숙하지 않으니
까. 자기 영역이 편리하니까. 아니면 제 방향을 회계 쪽으로 바꿨을 
4장. 칭다오농업대학교 조미애 교수의 가족사와 한국 유학 경험
 
163
거예요. 제가 그 학교를 안 댕기면요, 3학년 때 저한테 회계 책을 
줬어요. “회계 책을 공부하라.” 그  때 이미 아버지가 회계사였어요. 
거기. 회계사고, 그래서 공부하라. 사실 자기 공부하는 거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그 때 두 가지만 얘기하셨어요. 이거 “책 보라.” 책하나 
탁 주고 그 다음에 “영어 하라.” 그래서 2학년 처음 가서부터 편지를 
우리 아버지 계속 써줘요. 그래서 편지에 써놓은 거 보면 정말 많이 
써요. 우리 아버지 편지 오는 건 제일 재밌는… 그래서 제 성장 과정
에서 아버지가 엄청 역할을 하는 거예요.
아버지의 영향이 컸네요? 또 막내딸에 대한 애정, 관심도 컸고요?
그래서 영어 하라 했기 때문에요, 제가 제일 기억 남는 거는 이제 
대학 다니면서 2학년 때, 다른 사람 다 전문 다 하잖아요? 저는 영
어 그 급을 올리는 거를 그 책을 테스트를 하나하나씩 해요. 저 하
나 뭐 좋아하냐면 운동을 좋아해요. 아버지 닮아서 그런지…. 농구 
아니고요. 그냥 달리기. 제가 매일매일 아침에 달리기해요. 이제 겨
울에는 아침에 4시, 5시 제일 먼저 일어나서 달리기하면은 샤워할 
데 없잖아요? 그 때 어디 있어요? 그럼 땀을 죽죽 흘려가지고 그 땀
을 이제 또 교실에 가면요. 정말 챙피한 그거는 자연스럽게 말라가
지고 또 이제 다음날에…. 근데 저는 그렇게 4년 동안 제가 꾸준히 
한 것 같아요. 그거는 누구 못지않게 해요.
어떻게 그렇게 조깅을 열심히 하셨습니까?
그거는 제 생각에는 유전이 아닌가 싶어요. 아버지도 달리기 좋아해
요. 아버지도 40세부터요. 매일매일 아침에 운동해가지고, 지금까지 
제 생각에는 춘하추동 이제 하루도 빠짐없이. 비오는 거 빼고는 딱 
반시간. 그러면 6시 반에, 뭐 6시에 나가가지고 딱 여섯 시 반, 체조
를, 그러면 저 매일매일 아버지 따라다니고. 제가. 저밖에 없으니까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64
 
요. 따라다니고. 그거 기억하고 있어요.
(웃으면서) 아버지 사랑을 혼자 독차지했네요?
그래서 언니가 아버지한테 막 불편해가지고요. 허허허! 삐지고 막 
그랬겠죠. 동생 편만 든다고요. 그거를 직접 말해요. 아버지한테요. 
심지어 언니들 싸워서 이제, 제가 기억나는 거는요. 둘이 언니랑 싸
우잖아요? 그면 언니를 저 작은방에 데려가 가지고 막 얘기를 하고. 
훈계를 하고. 그래서 이제 그렇게 자랐어요.
▮ 현실 안주를 바라지 않는 진취적 기상
연변대학을 졸업하시고 곧바로 한국 유학을 갔습니까?
아니오. 한국에 유학가기 전에는 농대에 있었어요. 거기 취직을 해서 
한 2년 동안 편집부에 있었구요. 그 다음에 이제 한국에 갔죠. 한국 
유학을 해야 되겠다는 동기랄까? 그 때는요, 나가면… 저도 이제 한 
곳에 있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계속 거기에 있는 거 발전이 없잖
아요? 정말 나가는 기회가 있으면 저는 꼭 나가고 싶어요. 기회가 
못 찾아 줄 뿐이지. 그런 문제에 대해선 영향 줬는지 안 줬는지 모
르겠고요. 사실 지금 저도 그래요. 저 발전을 하려고 그러지. 계속 
사실, 그 아버지 바란 건 아버지 사실 중간에도 실패가 많이 있을 
때도 있고, 근데 항상 무너지지 않았어요. 저는 여기서 그냥… 그거 
대개.
현 상태에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타입이 아니네요? 항상 발전을 
추구하는 태도라 할까요? 좋게 말하면 좀 진취적이라 할까요?
아버지가 이제 ‘나는 제일 바닥이 되도. 나는 여기서 무너지면 안 된
4장. 칭다오농업대학교 조미애 교수의 가족사와 한국 유학 경험
 
165
다. 나는 여기서 꼭 일어나야 한다.’ 사실 가족 일에, 여러 가지 일에 
그 기록을 보면요, 그 몇 번씩 그럴 때 있을 때, 근데 거기서 항상 
무너지지 않고, 나는 꼭 뭐 해서 이렇게 해가지고… 심지어 사천에서 
올 때에도 나는 꼭 이래 노력해가지고 그거를 달성해야 한다. 여러 
번 일이 있어요.
사실 제 느낌에는 아버지는 이제 문화대혁명 때문에 사실 기업에서 
참~ 잘 되다가 영도(領導) 돼서 막 이제 일이 잘 되가 막~ 했는데, 
문화대혁명 뭐 있고. 막 이래 하다가 또 이제 정말 중시했는데, 그 
다음에 또 무슨 이 발전소가 이제 끝나야 한다. 돈이 없어서 다른 
데 옮겨야 된다. 그래서 엄마가 또 농촌에 갔고. 그 다음에 또 이제 
무슨 일 있고. 그럴 때 항상 요령은 있었어요. 근데 그 때는 항상 아
버지가 거기에 쓴 거는, “나는 여기서 무너지면 안 된다. 나는 여기
서 꼭 일어나야 된다.” 이러면서 한번 두 번씩. 저는 그거는 후에 본 
거고요, 근데 저도 그 곳에 있고 싶지 않았어요, 한곳에 계속… 왜냐
하면 그 때도 그런 행세죠. 다 외국으로 나갈려는 그런 분위기고.
연변대학에서요?
그 때는 정말 ‘나는 한국에 가서 야~ 석사까지 박사까지 할 수 있으
면 나는 정말 제일 기쁘다.’ 그 생각밖에 없어요. (연변대학교 공동
연구원도 이에 동의하며) 예. 같은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저희들이 
학과가 그 때는 석사나 박사나 그걸 배양하는 그런 석사증, 박사증
이 없을 때거든요. 학부 졸업해서 대학에 취직하는 게 저희들한테는 
가장….
가장 행운이, 행운아죠. 그런데 나중에 중국도 대학교에서 학위가 없
으면은 밀려나는 그런 분위기가 차츰차츰 생겨가지고… 저희들이 나
갈 때까지는 ‘아~ 내가 석사, 박사를 안 하면은 대학에 그냥 발붙이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66
 
기가 힘들다.’ 이런 거 생각 안했습니다. 그런데 남들이 막 일본, 미
국 뭐 유학 가니까. 그게 너무 부러워요.
언젠가는 우리가 가야 되지.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근데 저희들 돌아
올 때는 학위를 안 하고는 이제는 힘들 정도로 그렇게 급속하게 변
했거든요. 근데 만약에 제가 그 때 한국 갈 기회 없어도요. 제가 그 
곳에 안 살 거예요. 제가 나올 거예요.
왜 그랬어요?
이게 해변, 이게 연태(煙臺)나 이런 데 나왔을 거예요. 연해지역으로 
나왔을 거 에요. 어디든지 나왔어요. 저도 나올 생각이 있고요, 이거
도 아버지 생각 영향 받아요. 아버지 그 때 퇴직 후에는 이제 외부, 
이제 이쪽에 연타이(연태)에… 회계니까 나와서 일 좀 하셨어요. 예. 
퇴직하고. 그래서 어쨌든 나왔을 거예요. 제가 거기는 안 있었을 거
예요.
인터뷰 중인 조미애(2013.2. 가운데)
4장. 칭다오농업대학교 조미애 교수의 가족사와 한국 유학 경험
 
167
▮ 한국과의 인연, 유학과 포스닥 연구
그 때 한국에 유학하기 위해 나오실 때가 몇 년도입니까? 몇 살 때
였습니까?
1997년도에요. 제가 24살 때에요. 결혼도 한국에 와서 신랑 만나서 
한 거고요. 그때 처음에 강원대학으로 갔어요.
그때 한국에 오던 과정이 좀 기억이 납니까?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그거는 이제 일단은 그 교수가 바란다 하면요. 선배님이 있으니까요. 
선배님이 그거 다 이제 안내서 나오는 거까지 뭐, 뭐 서류 필요한 
거, 우리 뭐 달라면 다 만들어 주고. 학비는 다 이제 학교에서 그거 
장학금으로 나오고. 한국에서요. 지방대학 중에 강원대 농대가 외국
인 장학금 제일 잘 지원해줬어요. 강원대가 국립대거든요. 다 장학금
으로…. 가장 잘 돼 있었어요.
연변대학 선배가 강원대학에 먼저 가 계셨네요?
예. 먼저 1년 전에, 96년도 갔어요. 정보를 다 주셨지요. 연변대 농
대하고 강원대 농대가 자매결연…. 가장 먼저 또 체결한 그런 관계에 
있어요. 그런 인연이 다 있었죠.
그러면 강원대에서 몇 년을 공부하셨어요?
석·박사를 다 했지요. 1997년부터 2002년도 8월 달까지. 2002년도
에 박사학위까지 다 마쳤어요. 박사학위를 받기 직전에 그때 애기가 
생겼어요.
그럼 결혼 얘기부터 먼저 해주세요?
신랑을 거기에서 만난 거에요. 강원대학교에서. 그래가지고 2001년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68
 
도 결혼했어요. 2001년이면 박사학위 받기 1년 전이지요. 근데 논문
을 한참 쓸 시기죠. 그래서 그게 더 외로우니까. 사실은 솔직하면 그
렇죠. 그래도 그 때도 뭐 모임이 많으니까. 그렇게 결혼한 사람도 두
루두루 있고요. 강원대 커플이 많아요. 우리 학생들도 거 커플이 생
겼잖아요. 지리학과에.
그런데 이제 그 다음에 졸업하고, 졸업하고 거기서 한 반 년 동안 
하다가 애기 생겨가지고, 집에 와서 애기 낳고, 중국에 와서 애기 낳
고, 그 다음에 애기 한 백일 되면 다시 돌아갔어요. 신랑이 있으니
까. 백일 돼서, 거기 가서 이제 또 포닥(post doc.) 자리를 이제 지
원서를 해서. 마침 이제 경희대학교에서 면접 오라고 그래가 다시 
왔어요.
연구는 어떤 주제였습니까?
그때 경희대학교에서 저는 동서대학원에서…. 이혜정 교수님이라고. 
의학. 동서의학을 연구하는 연구소죠. 한의학하고 같이. 한의학을 연
구했는데, 하지만 거기 기초연구를 또 생물 쪽으로 해요. 분자 쪽으
로. 그래서 그 어떤 한의학의 그 현상들을 분자생물학으로 왜 그러
냐를 설명하는 거. 경로를 있잖아요. 경로가 왜, 경로가 있나? 아직
도 그거 안 밝혀졌을 거에요. 피가 흐르는 그 흔적이 있잖아요. 그면 
경로가 계속 경로라 말하는데, 그면 경로가 어떻게 흘러가는가…?. 
경락(經絡). 경락이죠. 예예. 경락을 그러면 보이게 좀… 과학적으로 
하는 거를 처음에 북조선에 한 분, 과학자가 한 거예요. 근데 그런 
거 연구를 이제 거기 가서 한 2년 넘게 했어요. 교수님하고 같이. 
재미있더라구요.
성과가 있었던 모양이죠? 그거 밝혀냈습니까?
그 얘기는, 저는 거기 가서 그 예를 든 거에요. 거기 가선 저 관절염 
4장. 칭다오농업대학교 조미애 교수의 가족사와 한국 유학 경험
 
169
관련된 연구를 조금 했어요. 한의학에 보면은 침을 놓고 뜸을 뜨잖
아요? 그러면 분명히 호전이 돼요. 병이. 되는데, 이게 뭐 경락을 통
해 된다고 하는데, 이게 왜 되는가? 데이타(date)를 잘못 내거든요. 
그렇게 되는 과학적 근거를 잘못 낸다는 거지요. 그래서 제가 얘기
한 거에요. 저는 관절염 있잖아요? 관절염은 봉독으로 치료하면 효
과가 있어요. 벌침. 그럼 봉독 치료하면 왜 효과 있냐? 그거를 연구
를 좀 했어요.
그걸 좀 밝혀냈습니까?
그거는 이제 연골을 가지고, 연골. 연골, 토끼 가지고 실험을 해요. 
토끼요. 토끼 연골. 왜냐면 대부분 실험을 쥐로 하는데요, 이제 쥐는 
연골 뜯어내기 힘들잖아요. 그래서 토끼를 그 연골을 뜯어내서 그걸 
이렇게 잘라요. 그 다음에 그거를 배양시켜요. 배양시키는 과정에서 
봉독을 이렇게 넣어요. 그면 그 세포가 좋아지는지 이런 거를 분자
적으로 설명해줘요. 근데 실질적으로 좀 나아진 거를 보일 수 있어
요. 그거가지고도 논문 냈고요.
그걸 이제 우리 인간에 적용시킨다면 아주 또 획기적인 그게 아주 
획기적인 기초연구가 되는 거죠?
예예. 그래서 그때 동서의학대학원이니까요. 다른 연구도 있겠지만 
주로는 한의학에 있던 무슨 처방이나, 사실 아직도 그 이혜정 교수
님 하고 싶은 일은 한약이 다 섞여서 이렇게 신용하잖아요? ‘왜 다 
섞여서 효과가 나나? 왜 하나씩 하면 효과가 없냐? 사실 그런 여러 
개, 이제 이런 거를 과학적으로 혹시 설명할 수 있냐?’ 이런 연구를 
이제 주로 하지요. 
그런 연구를 잘해놓으면 인간의 어떤 질병 치료에도 적용이 가능하
겠네요?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70
 
그래서 그거를 과학적으로 좀 해석하려고. 이혜정 교수님, 여자 교수
님이에요. 경희대학에 이혜정 교수님. 그 때에 ASR이라고 제일 큰 
프로젝트 들어가요. 그 10년 지원하고 10억짜리일 거에요. 엄청 큰 
거를 따게 됐어요. 제가 있을 때요. 그래서 아마 큰 이제, 정말 대단
하신 분이에요. 이제 연구가 거의 완성이 되었겠죠. 당시 10년짜리
였으므로 그렇게 되지 않나 싶어요.
한의학 발전을 위해서 아주 중요한 얘깁니다. 왜냐하면 한의학이 서
양의학으로부터 비판을 받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문제거든요. “왜 
낫느냐? 밝혀내봐라”고 하지만, 못 밝혀내니까, 데이터를 못 내니까 
“그게 무슨 과학이냐? 너거 사이비 의술이다” 이러거든요. 이거는 아
주 중요한 얘기에요. 교수님 연구도 이런 기초연구라고 봐야죠?.
동물로 실험한 건 아니요.. 그 때가 사실 식물을 계속했잖아요. 그래
서 이제 포닥은 이런 거 하게 되었고요. 그 다음에 이제 일은, 그 때 
되면 “이제 중국에 가야 되지 않냐?” 그래서 그 다음에 이제 찾아보
다가는 청도에 오게 된 거에요.
남편과는 연애결혼입니까? 이 분은 중국 한족입니까?
우리 같은 학교에요. 연변대학 농학원이에요. 남편은 연령이 연하는 
아닙니다. 하하하! 저보다 두 살 위에요.
결혼식은 어떻게 했습니까? 중국으로 나와서 결혼을 하셨습니까?
예. 집에 와서. 중국 와서 했어요. 요즘 결혼식은 다 한국처럼 현대
식 예식장에서 하죠. 저도 현대식 예식장에서 했죠.
그럼 포스닥은 몇 년에서 몇 년까지 하셨습니까?
2001년도? 아니야, 2003년도부터 2005년도까지. 2년 넘게 했어요. 
포스닥은 이제 경희대학을 한 건데, 개인적으로 제가 한국학술진흥
재단 거기서 받은 거는 아니고요. 그냥 과제에서 포스닥, 포닥 자리
4장. 칭다오농업대학교 조미애 교수의 가족사와 한국 유학 경험
 
171
를 연구소로부터 받은 겁니다. 연구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딴 연구
비에서 그 돈으로 포닥 자리를 만든 거죠. 포닥까지 마치고 이제 중
국 들어왔어요.
조미애 교수(2013.2. 우측)
▮ 청도농업대학 교수 임용, 방문교수 내한
학교 잡(job) 구할 때는 청도 지역 이외에 다른 지역도 알아보셨겠
네요?
그렇죠. 예예. 근데 주로 이쪽으로 많이 보죠. 사실은. 중국 귀국은 
2005년도 12월 달에 저는 왔어요. 12월 오면서 바로 청도 소재 대
학에다 일자리를 마련하고요. 그 때는 이미 그걸 다 하죠. 다 끝나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72
 
고, 면접도 다 하고, 다 끝나고. 그 중간에 포닥하면서 와서 면접도 
하고. 자리 찾아 놓고 온 거죠. 자리 못 찾으면 또 모르죠.
한국에 더 계시려고 했습니까?
찾아야 들어오는 거죠. 못 찾으면 어떻게 들어와요. 대부분 다 그렇
게 했습니다. (연변대 공동연구자가 부연하며) 아~ 저는 재직으로 
나갔습니다. 학부~ 저는 학부 졸업하고 바로 취직해서. 조교로.
청도로 오신 거는 일자리 때문이라고 보면 되겠죠?
그렇죠. 일자리 찾으러…. 전문직으로서의 일자리를 찾아 청도 이곳
으로 꼭 들어오려고 한 이유라면…? (다소 생각에 잠기며) 근데 저
도 이쪽으로 올려고 그랬죠. 청도 지역이…. 이 지역이 좋으니까 이
쪽으로 찾는 거죠. 마침 또 이렇게 됐으니까.
어플라이(apply) 과정에 한족하고 민족 간 차별이랄까 그런 건 없습
니까?
그거는 없죠. 그거는 없어요. 오히려 대학들에, 중국 내에 대학들에
서 특히 연해지역 대학들에서요, 조선족 이런 박사 분들 선호합니다. 
왜냐하면 일본, 한국, 조선족문화 하면 알잖아요? 그게 다 요즘에 최
근에 박사 분들은 영어도 잘하거든요. 예. 그러니까 대외 교류 부분
에서 큰 작용을 하죠. 선호를 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 학교도 이제 오시는 여러 교수님요. 조선족이 제 생
각에 좀 그렇게 나쁜 이미지 없고 잘하는 열심히 하는 이미지 있어
가지고요. 제가 올 때도 전에 몇 분밖에 없어가지고요. 예. 좋아하시
는 거 같아요. 그때는 왜냐하면 많이 없어도 그래도 들어갈 수 있었
죠. 그렇게 유명한 대학이 아니니까요. 그냥 저희들은 일반 선 소속 
이런 거 밖에 안 되니까 요구도 그렇게 높지 않아요.
당시에 청도농업대학에 들어오실 때 장점으로 내세우고 인정받은 그
4장. 칭다오농업대학교 조미애 교수의 가족사와 한국 유학 경험
 
173
런 부분은 뭐 있을까요?
이 학교요? 학교가 저를 채용한 이유라면요. 하나는 외국에서 왔으
니까 연구 업적을 볼 때는 그것도… 그쵸. 전공 방향. 학과에. 그 때
는 이런 인재가 적으니까요.
지금 연구도 박사학위 논문 쓰신 그 쪽으로 계속 연관되게 하십니
까?
근데 지금 제가 포닥 하는 거 사실 지금 못 하고 있어요. 옛날에는 
화학이잖아요? 계속 농업 쪽으로 지금 하고 있어요. 포닥을 경락 그 
쪽으로 연구했지만, 이 연구는 지금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어요. 왜냐
면 저 포닥만 그거 하기 때문에, 취직할 때는 석사과정, 박사과정 그
걸 더 묻거든요. 그래서 그거 하나 가지고 의과대학에 가기는 어려
워요.
포닥했던 주제를 더 발전시키면 나중에 노벨상까지 받지 않을까 싶
은데요? 그게 중요한 연구라고 생각됩니다. 하하하! 그 후에 서울대
학교에 연수도 가셨다던데요?
그거는 서포트 있잖아요? 그거 한국에 재단 있어요. 저는 2009년도
에 갔거든요. 연변대학교에 게시는 이광준 그 분도 제가 잘 알고 있
어요. 제가 받은 연구비는 한국고등교육재단. SK에서 후원하는 거
죠. 근데 요즘 그거 받을 수 있는 거는 대단하신 분이네요. 그 프로
젝트 있지만요. 연변대학에는 추천이죠. 경쟁이 엄청 세다고 하던데
요. (연변대학교 공동연구자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저는 경
쟁이 아니라 저 개인적으로 신청서 따로 개인적으로 신청하는 거예
요. 센터를 통과해야 돼요. 근데 센터 들어가는 거 그거 학교 경쟁이 
엄청 해요. 한 십 몇 명 중에 2명을 선발하거든요. 근데 관계망도 
많이 있고 해서 제가 2년 만에 했잖아요.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74
 
방문교수는 언제 몇 년 동안 연구하셨어요?
어거는 서울대학교 수원 캠퍼스에서 1년 했어요. 2009년 8월 31일
부터 2010년 9월 1일까지. 이 연구의 주제는 고추종이요. 고추. 채
소 원래 했었어요. 바이러스 높은 종 개발 관련…. 질병. 고추 병해. 
병해 그런 거 관련해서.
한국하고는 다 이렇게 인연이 있네요?
저는 정말 한국에 평생을 감사해야 해요. 제가 이렇게 되는 거, 한국
이 저를 키웠구요. 그래서 항상 이제 여러분 오셔도 저는 당연히 해
야 하는 거고. 이제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더구나 또 저뿐만 아니라 
사실 한국에 정말 노무현 대통령 많이 감사해야 되구요. 그 노무현 
대통령 있기 때문에 조선족들 다 살았고요. 다 살구요. 다 잘 살게 
됐구요.
어떤 측면에서 노무현 정권 때 우리 조선족에 좋은 영향이 있었나
요?
그때 다 갔어요. 그때. 입국 심사를 굉장히 좀… 많이 배려를 했죠. 
해외 교포… 국내 취직 비자를 그 때부터 실행했습니다. 그 전에는 
브로커를 걸쳐서 초청을, 한국 분이 초청을 해야 들어갈 수 있었죠, 
(연변대 청도동창회 회장을 지칭히며) 어제 그 회장님이 여러 번 강
조했잖아요. 초청한다면 절대 기대하지 말라 하는 거. 오늘처럼 이래 
앉으셔가지고. “아~ 저 한국 가고 싶습니다.” “제가 돌아가서 초청을 
해줄게요.” 이렇게 초청을 해야 가거든요. 그전에는. 근데 노무현 정
부 때… 김대중 정부 때도 추진은 했습니다. 근데 노무현 정부 때 그
것이 낙실이 됐거든요. 그 때에 그…. F2 비자. 그거 뭐죠? 그게 그
러니까. 장관, 여자 장관 있었잖아요. 그거 누구죠? 강금실. 그쵸. 법
무장관. 강금실 맞아요? 그 분이죠? 그 분이 많이 일을 추진을 했었
4장. 칭다오농업대학교 조미애 교수의 가족사와 한국 유학 경험
 
175
어요.
▮ 이방의 칭다오, 실력으로 인정받기
청도에 오셔서 본격적으로 교수사역을 하시지 않습니까? 청도 지역
에 조선족 교직원들과의 네트워킹은 어떻게 형성하셨습니까?
아~ 우리끼리요?
조선족으로 봐서는 청도 여기가 이방인이고 한족들 사회 아닙니까? 
어차피 청도가 연변과는 다르니까 그런 네트워킹에 있어서는 다소 
불리한 모습들도 있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점에서 그럴까
요?
인간관계 그런 거요. 예를 들면 이제 뭐 프로젝트 신청할 때 아는 
사람 있으면 더 잘 될 수 있고. 저희는 그런 거 없구요. 그 다음에 
또 평시에도 일을 처리할 때 정말 간단한 일이지만 여기 동네에서는 
아는 사람 없으면 조그만 일도 처리하기도 예…. 그렇지만 제일 중요
한 거는 다 자기 실력이 있어야 되죠. 어디에 가면, 만약에 여기서 
실력이 뛰어나면 누구든지 또 잘 봐줘요. 하나는 공평하게, 최소한은 
실력이 있으면 공평하게 다 대해줘요. 그거 있기 때문에 여기서 살 
수 있는 거지, 만약에 그것도 없으면… 그 다음에 정치적으로는 사실
은 정말 불리하죠. (연변대 공동연구원을 가리키며) 여선생님은 이
제 연변에 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유리한 거예요. 저희들은 그런 
거 포기하고요.
실력으로요?
예. 그냥 포기하고 그냥 우리는 교수생활에 이래 평생에 끝까지 60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76
 
세까지 하자 그저 그런 거 밖에 없어요.
여기 청도농업대학에 처음 오실 때 대학 자체 내에서 좀 서포터를 
해주는 그런 인간관계라도 있었습니까?
서포터는 그렇게는 거의 없어요. 연줄. 연줄은 그렇게 뭐…. 그런 것
도 없이요. 그냥 인터넷으로 원서를 내고, 합격자 중에 면접고시 하
고. 실력이 출중하고 그렇지는 안하고요. 아니에요. 그 다음에 저는 
유리한 거는요, 부부가 같이 이래 들어온 거니까 딸리는 거 없어요. 
다른 사람들 한 사람 들어오고, 와이프는 좀 소개, 일자리 찾아 달라 
하면 좀 어렵잖아요? 그면 저희 둘이는 다 이제 같이 하니까요. 그
거도 유리한 면이에요. 그게 아주 유리한 점이죠. 유리한 면이 된 거 
같아요.
남편도 청도농업대학에 같이 그 때 들어왔어요.  농약 연구를 했죠. 
아~ 그럼 2005년 같은 해에 같이 청도농업대학을 면접은 같이 하고
요. 그 다음에 이제 남편도 포닥 1년 하다가 이제 후에 들어왔죠.
한국에서는 이렇게 부부 교수로 같은 대학에 있는 게 상당히 이례적
인데요?
아니요. 중국은 다르죠. 중국에는 교수들 그냥 강사랑 비슷하지 않나
요? 그쵸? (연변대 공동연구자가 부연하며) 아니죠. 틀려요. 같아요, 
계급은 같아요, 우리. 계급은 같지만 사실은 중국에는 하도 많으니까
요, 사실 한국에는 교수는 상당히 존중을 엄청 많이 받고, 둘이가 교
수되기도 상당히 어렵잖아요? 차이가 크죠. 한국은 시간강사 많으니
까, 전문직 교수 비례가 적잖아요. 근데 중국은 시간강사 없고, 조교
부터 다 전문직이니까요. 그래서 그 말씀이에요.
중국은 시간강사가 없어요?
(연변대 공동연구자가 부연하며) 시간강사 없습니다. 한 학과에 보
4장. 칭다오농업대학교 조미애 교수의 가족사와 한국 유학 경험
 
177
통 학부생 2~300명 되는 학과라도 전문직 조교부터 교수까지 한 
15명 정도는 기본이에요. 근데 한국은 아니잖아요. 학과라 해봐야 5
명, 4명 교수도 있고, 다 그러면 시간강사 쓰잖아요.
(연변대 공동연구자가 재직학교 사정을 거론하며) 연변대학에는 지
리학과 학생이 320명 정돈데, 교수 티오(TO)가 19명인데 현재 일
하고 있는 사람은 14명입니다. 여기는요?
지금 우리 학원, 지금 시로 얘기하는지 모르겠지만…. 여기 생명과학
학원이면…. 단과대학이면 또 다르죠. 얘기한 거랑. 직원이 90명 정
도. 행정직원 다 포함해서요. 학생은 구체적으로, 왜냐하면 반이 1학
년도가 한 6개 반이 돼요. 6개면 한 40명으로? 180명? 한 반에 30
명 정도. 3~40명 정도로 하면은 약 200명 정도 되네. 그면 전체가 
한 8~900명? 그렇죠. 한 학년이 180명 정도 되니까. 그 다음에 대
학원 연구생도 있고요. 우리 학교 학생이 한 2만 5천명? 거의 3만명 
돼요. 학생이 좀 많죠. 근데 이게요, 산동성 사람이 많아요. 사람이 
너무 많아가지고. 근데 일반 대학도 이렇게 사람이 많아요. 하긴 뭐 
중국은 사람이 많으니까 다 그런 거 같아요.
(연변대 교수가 부연 설명을 하며) 우리 보통 학교 꾸리는 데 균형
을 잡아줘요. 수익하고 지출하고 하는데. 한 개 자연반에 50명이 돼
야 균형을 잡거든요. 수지가 맞다고 했어요. 근데 우리 학교는 그게 
잘 안 됩니다. 학생 수가 적어요. 지금 말하면 90명 중에 아마 한 
40명 정도는 행정직원일 거에요.
(구술자가 설명하며) 4~50명까지 안 돼요. 왜냐하면 그 중에 실험
원도 포함되니까. 실험원도 행정이에요, 실험원도 전문직 아니에요. 
그래도 한 2~30명 정도가 행정직일 겁니다. 우리는 생명과학학원입
니다.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78
 
90여 명 교직원 중에 조선족은 몇 분이나 되세요?
3명. 분산되어 있어요. 각각 학과에. 세 분이 파워는 발휘하기 힘들
지요. 절대 안 돼요. 그래도 만약에 파워를 하려 해도 여기에 지방 
분위기가 또 있어가지고요. 지방 분위기. 다 자기 지방끼리 똘똘 뭉
쳐요. 그런 거도 있어요. 네. 교직원 중에서. 제 생각엔 다 그래요. 
지방 분위기라는 그거는 이제, 그거는 제가 느끼면요. 한국은 정말, 
상당히 강하게 느끼는데요. 저는 그거는 좀 잠재적인 거. 그 드러난 
점, 잘 안 살펴보면 잘 안 알려질 정도로 잠재적으로 다 있어요. 작
용하는 게 있어요. 그러고 학교 출신, 동문, 그 분들끼리 어떤 그런 
것도 조금 있어요. 근데 그렇게 심하지는 않아요.
연변대학 출신은 좀 있지요?
예. 그 세 분도 다 우리 같은 학교. 농학원 나왔어요. 세 분은 연변
대학 출신이면서도 이제 조선족이고. 같이 다 한국에 유학해서 여기 
와서 취직했죠. 공통점이 크지요. 조선족이 많은 분들이 그래요.
연변에서 나오면 다 연변대학 출신이에요. 예를 들면 20명 중에 지
금 세 명은 다 같은 학교 나왔어요. 다른 한 2~30명 되는 조선족 
중에요, 한 8~90%는 연변에서 나왔죠.
청도지역이 상업도시고 상당히 물가가 높은 도시인데, 교수로서 이
렇게 생활하시기에 경제적으로는 어떻습니까?
근데 여기는 물가가 높은 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 않나요? 연길
에 비해서. 그 다음에 월급은 높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생활하기는 
이제 부부 다 월급 합하면 생활하기는 별 문제는 없죠. 여기 올 때 
학교에서 뭐 아파트 같은 거 그런 거 조금 도움 주었어요. 그거는 
이제 부티엘로…. 1차로 박사 한 명당. 부티엘로 한 달에 천 원씩 나
와요. 그거 원래 현금으로 줘야 하잖아요? 그냥 천 원 씩, 다달이 
4장. 칭다오농업대학교 조미애 교수의 가족사와 한국 유학 경험
 
179
10년 동안.
아파트는 자체 구입했어요?
그 값이 이제 시가 좀 낮게. 아~ 학교 측에서 그런 거를. 학교 아파
트 단지 내에서. 지역 내에서 이제 교수로서 생활하는데 있어서 어
려움이 없어요. 여유로운 거보다는 어제 회장님처럼 조금 사업을 하
는 거는 시세를 많이 타잖아요. 좀은 더 안정적인 부분은 있어요. 좀 
그렇죠. 덜 그런 편이죠. 공무원 좀 비슷하게 그런 거 안 타고. 저는 
이제 뭐 어디 무너진 느낌은, 그런 걱정은 안 하죠. 최소 나는 60살
까지 여기는. 그쵸? 그거 하나는 조금 안정적인 편이죠. 그 다음에 
조금 자기가 노력하면 프로젝트 따고 그러면 조금 더 잘 살 수 있
고. 기본은 이제 다 마찬가지죠.
지난번에는 고등교육재단에서 연구비 받았다면 다음에는 한국연구재
단에 받으면 되겠네요?
한국연구재단 또 있어요? 그게 무슨 재단인지 나중에 소개 좀 해주
세요. 저 선생님한테 정보 또 받으면 연구비 받아서 한국가야겠다.
▮ 칭다오로 이주해 오는 조선족들 
청도에 이주해 오신 조선족의 경우 1세대, 2세대 이런 구분이 어느 
정도 가능하십니까?
초창기라 하더라도 우리 부모세대에 오는 건 거의 없었어요. 제 생
각에는 없어요. 부모세대는 지금 거의 60대, 70대인데. 저 부모님도 
70세 넘었으니까요. (연변대학교 청도동창회 회장을 지칭하며) 지금 
회장님처럼 50대 분들도 많아요. 저는 지금 거의 30대 말쯤 올라가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80
 
는데, 지금 50대에 여기 와서 창업하시고 그런 분들이 많아요.
회장님처럼 사업을 초기에 하셨던 분들, 그 다음에 선생님처럼 교직, 
그 이후에 또 어떤 캐릭터들이 청도지역에 있습니까?
예. 저는 이쪽으로 공부해서 와 있고요. 저희 학교에도 지금 한국에 
가서 공부해서 여기 와서 취직하고 하신 분이 꽤나 돼요. 한 스물 
몇 명. 시기별로 이주자의 특성을 분류할 수도 있지만. 예를 들어, 
취직하러 공장 취직으로 오신 부류가 있고요. 아예 사업하러 오신 
부류, 다음에는 학교 졸업해서 대학교 같은 데 전문직으로 오는 부
류로 나눌 수도 있겠죠. 연변대학의 농학원 경우에는 나올 수 있는 
사람 다 나왔어요.
이거는 한국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수한 인재 분들이 서울로 올라
가듯이, 연변대학교에 우수한 인재 분들도 얘를 들면, 모 교수님 같
은 분은 조선족 전문가잖아요. 북경민족대학, 북경대학 이렇게 나가
셨던 것처럼 농대도 우수한 교수님들 나가실 수 있는 분들 이미 다 
연변 밖으로 나가셨다고 봐야죠.
우리가 쉽게 나갈 수 있는 것이… 왜냐면 저희 선배들이 지금 한국
에 여러 대학에 가서 먼저 가 계셨어요. 그 분들 통해서 저희들도 
가게 된 거예요. 저희들도 또 학생이 필요하면 우리 학교에 뒤에 후
배들 소개해주고 그래서 선생님들 많이 나갔어요.
한국 같으면 지방대학에서 서울 쪽으로 옮기듯이, 대학 학생들은 어
떻습니까?
연변에 학생들이 고등학교를 마치고 연변 소재의 대학에 많이 들어
가느냐, 아니면 청도 소재의 대학에 많이 들어가느냐? 그 비율을 정
확히는 추산 못하지만요. 북경대학을 못가면 북경에 있는 대학에 가
고, 상해 복단대학 못가면 상해지역에 대학을 보내고. 거의 95%는 
4장. 칭다오농업대학교 조미애 교수의 가족사와 한국 유학 경험
 
181
다 나갑니다.
청도의 경우는 어느 정도입니까?
(연변대학교 공동연구원이 설명하며) 근데 청도는 중국에서 거의 뭐 
일류대학이 없습니다. 청도에는 그렇게 고급대학이 없어요. 그래도 
연변대학을 선택하기보다도 같은 점수의 청도로 올 수 있으면 청도
로 오는 거죠. 왜냐면 지역이 좋으니까. 연변대학에 오는 우리 애들
은 좌절감을 느끼면서 한 1년을 적응합니다. 자기는 못나갔다는 그
런 좌절감 때문에 우수한 쪽 애들한테 떨어지죠. 그러다가 다시 일
어나서 재기를 하고 그럽니다. 힘들어요. 우리 애들 공부시키기가.
연변대학에서는 전부 강의를 중국어로 합니까?
(연변대학교 공동연구원이 설명하며) 그렇죠. 조선민족학과 말고. 지
금 학생도 조선족 학생보다 중국학생이 많죠. 대부분 중국학생입니
다. 옛날에는 7:3 이랬는데, 요즘에는 8:2 정도 밖에 안돼요. 엄청 
적습니다. 그리고 한쪽에서 호남성, 하남성 이쪽에서 오는 애들은 엄
청 우수한 애들이 와요.
▮ 칭다오의 조선족 네트워크
교수 전문직이 상업하고 비즈니스 하시는 분들보다는 생활적인 측면
은 좀 시세를 덜 타시고 안정적이라는 게게 장 큰 차이점이고 또 다
른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아니면 인간관계나 이런 부분들은 조선
족이라는 맥락 속에서 다 동일하게 이루어지는지? 아니면은 주로 상
업하시는 분들하고 교류가 조금 뜸한지?
적죠. 기업 경영하는 사람은 사실 많이 하고, 연변대학 이런 동문회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82
 
해가지고 이렇게. 저는 여기서 비서장 했기 때문에 회장님이랑 이렇
게 접촉이 많이 됐고요. 근데 저는 그래요, 저는 사실은 밖에 많이 
보고 싶어요. 자기 우물 속에서, 사실 연구하면은 계속 자기 연구를 
몰두를 해야 하는데. 저는 왜냐하면 이렇게 회장님 만나고, 정말 좋
으신 분이에요. 저도 지금 바빠서 이런 일을 못하고 있는데, 회장님 
얼굴을 봐서 저는 못 끝나는 거 같아요. 너무 저한테 잘 해주셔가지
고, 정말 좋으신 분이더라고요. 저는 이제 다양한 사람이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밖에를 많이 경험하고 싶어요, 사실 우리 재단을 통해
서도 다른 대학교 이제 두루두루 봤기 때문에, 저는 정말 밖에를 많
이 어떻게 생겼나 보고 싶고, 저의 성장과정에도 큰 도움 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해요.
(연변대학교 교수님이 부연 설명을 하며) 아까 그 질문하신 중에 기
업하는 분들이 사회 네트워크하고 우리 대학에 있는 전문직에 있는 
분들이 조선족 네트워크 사이에 어떤 구별이 있는가 하면… 구별이 
있어요. 기업을 하면 정부를 안 통하면 안 되거든요. 정부 관료에 인
증이 절실히 필요하고. 또 자금이라는 게 은행을 통해서 해야 하잖
아요? 은행 역시 이것도 사회의 하나의 금융 네트워크잖아요? 근데 
그런 네트워크가 조선족이라는 불이익이 많이 옵니다. 조선족 하고 
한국기업하고는 자매에요.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어요. 근데 중국 
자체에서 한국 기업에 대한 불신, 예를 들어 야반도주 한다거나 이
런 것이 있기 때문에 조선족 기업가들이 그런 데에 조금 불이익을 
당합니다, 함께. 그렇지만 아까 얘기했듯이 우리 전문직에 있는 분들
은 첫째는 내 능력만 있으면 내 프로젝트 따는 데 내 계획서가 우수
하면 제가 따는 거예요. 기업하고는 틀리죠. 그리고 저희들은 교육부
하고 네트워크가 직행으로 돼 있어요. 상하 수직계열로. 근데 기업 
4장. 칭다오농업대학교 조미애 교수의 가족사와 한국 유학 경험
 
183
네트워크는 수평 네트워크가 더 크잖아요.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
 연변대학 동문회 외에 청도지역에서 가입해 있는 사회단체나 조직
이 있습니까?
어제 회장님 말씀하듯이 과학문화인협회. 여기는 어떤 분들이 주로 
참가하느냐 하면요. 과학문화인에는 주로 이제 전문직이죠. 그 대학
에 있으신 분들. 모여서 연구하시는 분들, 문화인. 이 분들이 많아요. 
꽤나 돼요. 이 분들이 다 연변 출신자들 아닙니다. 조선족 전체. 청
도에 계시는 조선족. 문화 과학 분야 전체. 주로 대학에 계신 분들 
다 하죠.
그리고 기업가협회도 아주 활약을 적극적으로 하고요. 그 회장님도 
잘 하시죠. 그 다음에 기업가 골프협회 회장님 하시고. 골프협회 같
은 경우에는 한국에서도 기업가 분들이 있대요. 계절마다 오셔서 게
임도 하시고. 또 뭐 사업에 대한 것도 하시고. 매체에서 신문매체에
서 이런 거 좀 많이 보도합니다.
과학문화인협회는 어떤 활동을 합니까?
이렇게 외부, 북경에서 뭐 조선족 있는데 초청해 와서 실제 이런 거 
강의하던가, 아니면 어느 자기 전공의 교수를, 예를 들어 우리 식품
의 교수 와가지고 영양에 대한 강좌를 하던가. 학술 교류를 많이 하
는 거죠. 좀 이렇게 교류할 수 있게끔 도와도 주고요.
지난 번 2001년 10월인가? 제가 흑룡강신문을 읽는데, 최근에 조선
족 사회에 대한 위기감 때문에요. 북경대하고 민족대학하고 조선족 
연구하는 분들이 한국연구재단에 후원을 또 받아가지고요. 청도에서.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지요. 2박 3일로 학술회를 했는데, 논문도 엄
청 발표를 했고. 그런 거 다 이런 과학문화인회에서 같이 이렇게 했
다고 신문 제가 다 봤습니다.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84
 
향우회 활동은 안 하십니까?
향우회는요. 향(鄕)이나 진(鎭) 쪽에서 많이 하고 있어요. 저는 길림 
쪽에잖아요? 사람 그렇게 많진 않아요. 그래도 연변 사람이 많이 나
오니까. 왕청향우회니 뭐 안도우회…. 그 쪽에가 사실 많이 되고 있
어요. 그러면 연변향우회는 현 단위, 시 단위로 합니다. 6개의 시, 2
개의 현. 현과 시 단위 다 합니다. 그 다음에 고등학교 출신. 1중. 
저희 신랑은 용정에 뭐 2증. 거기도 지금 전에도 한 번 모였어요. 
모교 동창회도 하고요. 저는 이 쪽에잖아요? 별로 없어요. 찾기도 어
려워요. 저는 연변대학동문회 비서장 하고요. 
연변대학 비서장은 어떤 일을 하세요?
비서장은 한국에서 총무나 간사 격이죠. 그냥 심부름 하는…. 회장님 
뭐 하라면 제가 다 하죠. 경비 다 총무 총괄하시고. 연계를 다 하고. 
그 많이 배우고 있어요. 이제 1년 했어요. 3년이 한 기(期)에요. 김 
회장님은 이제 3기 회장님이세요. 이제 1년 지났어요. 회장님은 그 
기업의 대표라고 할 수 있죠. 저는 정말 학술 쪽의 대표라 할 수 있
고 비슷비슷해요. 사실은. 청도에서 전문직에 계신 분들은 아무래도 
어제 회장님께서 말씀하셨던 뭐 위기나 이런 부분들처럼 일반 변화 
시세는 좀 덜 탄다고 봐야겠죠.
5장. 내몽고 출신의 청도대학교 이승철 교수의 
삶과 조선족사회 전망
이승철(2013.2)
5장. 내몽고 출신의 청도대학교 이승철 교수의 삶과 조선족사회 전망
 
187
■ 이승철 연보
일제강점기 : 증조부모님 대에 함북 길주에서 연변 이주
1977년 : 중국 내몽고자치주 출생
1996년 : 내몽고자치주에서 초등, 중고교 졸업 
2000년 : 연변대학교 지리학과 졸업
2000년 : 한국 유학, 강원대학교 대학원 입학(관광학)
2002년 : 강원대학교 관광학 석사 
2006년 ; 강원대학교 관광학 박사
2006년 : 중국 산동성 청도대학교 관광학과 교수 취임
2011년 : 결혼
2014년 : 현재 청도시 거주
▮ 칭다오 도시 구성
먼저 청도의 인구를 포함해서 도시구성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청도시가 총 인구가 900만 정돕니다. 900만 정도고. 시가지에는 
280만 정도가 살고요. 그리고 구로는 시남구(市南區), 시북구(市北
區), 사방구(四方區) 그리구 노산구(노山區), 청양구(城陽區). 그리
고 황도구(黃島區). 이렇게 7개 구가 있구요. 근데 올 2012년도에 
지금 사방구하고 시북구를 합치기로 계획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행정구역을 합쳐서 구(區)를 하나 줄이고. 그 담 옆에 도시로는 즉
묵시(卽墨市). 그리고 교주시(교州市), 교남시(교南市). 그리고 내서
시(箂西市). 평도시(坪度市). 이렇게 행정적으로 청도시에 소속돼있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88
 
습니다.
그래서 청도시는 행정급수로는 지방급 도시로서 부성급 도시고요. 
중국에서 7개의 계획단독도시 중에 하납니다. 그러면은 경제는 산동
성에서 관리를 안 합니다. 직접 중앙정부에서 관리를 하거든요. 그래
서 청도시 급수가 높은 이유가 주로 단독으로 나온 도시기 때문에 
급수가 높게 됩니다. 청도시는 지방급 도시구요.
‘청도’라고 하면은 그냥 방금 전에 말씀드린 보는 도시가 청도에 소
속돼있구요. 예를 들어서 청도시라면은 실은 시가지만 얘기하는 거
예요.
그럼 구(區)하고 시(市)하고 어떤 차이가 있는 겁니까?
구는 청도에 속해 있는 하나의 작은 단위죠. 그게 구예요. 그 구의 
급수가 옆에 있는, 제가 방금 아까 말씀드린 현급 시하고 동급이거
든요. 급수가 똑 같거든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뭐 청도 경제로 
보면은 산동성에서는 1위가 안되고요. 한 2위정도 됩니다. 행정적으
로. 1위는 동영입니다. 동영시. 동영시가 경제가 잘돼 있는 이유가 
거기에 유전이 있습니다. 지하자원. 기름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그쪽
이 1위고 그 담에 청도시가 2위고. 아마 3위가 지금 제남일 거예요. 
산동성에 제남시가 있습니다. 성도(省都)입니다.
근데 청도시 주요 경제가 아마 제가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사방구… 
원래 있던 사방구하고 시북구 쪽에 중공업이 모여져 있습니다. 그게 
강철공장 그리고 솜 공장. 그니까 섬유죠. 섬유 쪽으로 간 공장이 많
이 모여 있구요. 그리고 시남구 같은 거는 주요 상업지역입니다. 그  
다음 노산구 같은 경우는 계획으로는 상무(商務)로 되어 있습니다. 
은행이라든가 모든 업무, 행정기관 업무 보는 것, 금융과 관계된 그
런 구역을 하나 따로 노산구에 설치하고 있거든요.
5장. 내몽고 출신의 청도대학교 이승철 교수의 삶과 조선족사회 전망
 
189
칭다오시 전도(2013.2)
▮ 칭다오의 한국 기업과 조선족
저희들은 경제특구로 알고 있습니다만…?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90
 
여기가 경제특구가 아니죠. 경제특구는 몇 개 신천 같은 곳이… 청도
시에 경제개발구가 있습니다. 따로 있지요. 면세구역이 있습니다. 거
기가 황도(黃島)에 있습니다. 특구 성격입니다. 거기에는 세금도 틀
리구요. 그래서 세계 500대 기업이 거기 많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한국에 포스코 같은 경우에도 거기 가 있구요. 그리고 면세구역도 
있구요. 처음에 외국 기업들이 청도에 들어온 이유가 주로 여기 세
금정책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2년 면제하고 3년… 근까 반만 내는 
걸로 되어 있었거든요. 세금을. 그래서 많이 들어오는 거죠. 지금 2
년 전부터 그걸 다시 해제했습니다. 그 제도를요. 외국기업이 너무 
많이 들어 왔으니까요. 외자(外資)가 너무 많으니까요.
시남구와 황도구를 잇는 교주만 대교 전경(2013.2)
그럼 한국 기업들도 초기에는 다 그기에 들어갔습니까?
5장. 내몽고 출신의 청도대학교 이승철 교수의 삶과 조선족사회 전망
 
191
한국기업, 대기업들이 많이 들어갔죠. 초기에는 청양구가 한국기업이 
참 많습니다. 무역회사라든가 뭐 공장이라든가 거의 다 여기에 모여
져 있거든요. 그 이유는 특정 구에 청양구에 많이 모여 있는 이유라
는 것은요. 청양구에는 원래 땅이 쌌죠. 시내에 들어가면 땅 사기에
는 너무 비싸잖아요. 그렇죠. 도심 쪽이니까.
그러면 청양구에 한국 기업이 많이 몰림으로 인해 가지고 연변이라
든가 동북으로부터 조선족들이 많이 이동해온 것입니까?
많이 몰리죠. 그 주변에 많이 밀집하는 것도 이와 관련이 됩니다. 그
것 때문에 많이 청도에 온 거죠. 근데 문제점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
다. 지금 많이 한국 기업들이 다 떠나고 있거든요. 그러면은 이 사람
들도 일부는 자리에서 떠나야죠. 이제는. 연변에서 오시는 우리 조선
족들이 청양구 거기 1차 주거지를 마련하였다가 다시 이제 흩어지는 
그런 과정이 있다던데요. 그게 한국기업의 성쇠와 관련 있는 거지요.
청양구의 종족 구성은 어떻게 됩니까?
소수민족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한족 위주고요. 딴 소수민족은 여기
에는 거의 없습니다. 산동지역이 예전에 제나라 하고 노나라가 있었
는데 그건 중국인이 주로 사는 지역이니까 남쪽, 서쪽 서남쪽하고는 
좀 틀리죠.
청도의 경우에 한족이 대다수라고 보고, 다른 종족과 비교해 볼 때 
조선족은요?
조선족은 지금 통계수치에 의하면, 한국어를 아는 사람이 50만이거
든요. 청도에. 그거는 대사관에서 통계수치가 그렇게 나와 있거든요. 
한국어를 아시는 분 숫자죠. 상당히 높은 걸로 봐야 되겠죠. 젤 많은 
민족이라고 봐야죠. 그리고 기타 소수민족은 거의 없다고 봐야죠. 상
주 한국인이 한 10만 명 정도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한국어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92
 
를 아는 사람이 50만이라고 했으니까 한 35만 정도라고 봐야죠. 이
걸 보더라도 알 수 있지요. 중국인들 중에도 한국어 아는 사람이 상
당수 있을 거고요. 그러니까 사십 몇 만이 있다고 봐야 되지 않겠습
니까? 결국 한국 기업이 여기 진출 많이 했다는 그런 거하고 다 연
관되는 것으로 봐야 되겠죠. 가끔 어떤 분들은 청도를 ‘한국 인천시 
청도구’라고 하거든요. 한 시간이면 어차피 비행기타고 왔다 갔다 하
고 하니까. 인천시 청도구! 그렇게 얘기하는 분들도 있더라구요. 인
천에서 한 시간 거리지요. 비행기 1시간이면 오죠. 1시간 20분 정
도. 김해에서는 1시간 50분이면 오죠. 여기가 다 원래 촌지역이 좋
으니까 시골 땅이었잖아요. 지금은 다 개발돼가지고요. 청도 외곽지 
변두리에는 농촌 부분도 포함돼있습니다. 여기에서 한 10분, 15분 
정도만 나가며는 보이실 겁니다.
▮ 증조부모가 함경도에서 연변 이주
선조 세대의 가정적인 배경과 공부과정에 대해 이야기해 주십시오?
고향이 내몽고에요. 고향이 내몽고구요. 부모님은 교삽니다. 중학교
에서 교사를 하고 있구요. 교사를 한 거는 할아버지 때부터 실은 중
국에서 교사를 했지요. 저희들이 내몽고에 들어간 거도 원래 고향은 
연변 쪽이에요. 저희 본(本)은 한국에서는 본이라고 하겠지만 함경
북도에요.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은 함경북도 길주군 영북면이에요. 
그렇게 돼서 또 저희 노할아버지죠. 할아버지의 아버지 대가 그때 
중국에 들어온 거예요. 연변 쪽으로 들어왔다가 중국의 문화대혁명 
알지요? 그때 할아버지가 평강을 지원하느라 흑룡강까지 가신 거에
5장. 내몽고 출신의 청도대학교 이승철 교수의 삶과 조선족사회 전망
 
193
요. 교사 신분으로 해서 집안이 온 집안이 거기로 간 거죠.
갔다가 후에 한 10년 정도 흑룡강 치치하르라는 시가 있습니다. 거
기에 있다가 다시 내몽고에서 조선족 중학교를 설립을 하게 된 거에
요. 그래서 다시 흑룡강에서 내몽고로 들어가게 된 거에요. 그래서 
제1기로 내몽고 조선족 중학교에 교원으로 들어간 거에요. 들어가서 
그렇게 계시다가 아버지도 내몽고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요. 그 
전에는 흑룡강에 계시다가 내몽고에 들어오는데 흑룡강에서 중학교
를 졸업하시고 그 다음에 다시 내몽고에 와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문화대혁명 때는 대학교를 못 다니니까 고등학교 끝나서 다시 연변 
쪽으로 들어가신 거에요.
그 때 상황에 대해서는 고등학교 졸업이면은 초등학교 선생하기에는 
별 문제가 없으니까 거기에 들어가서 초등학교 선생을 좀 하시다가 
다시 중국의 상황이 전반적인 상황이 좋아지니까 문화대혁명이 끝나
는 그 시점에서 다시 아버지가 내몽고로 들어오신 할아버지가 내몽
고에 계시니까. 그래서 다시 들어와서 대학교 시험을 다시 공부해요. 
보고 그 다음에 대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하시고 다시 내몽고에 고등
학교에 들어와서 선생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저는 내몽고에서 태어났고 그리고 내몽고에서 자랐고 초등학
교부터 고등학교까지는 전부 다 내몽고에서 끝났구요. 초등학교 중
학교는 조선족 중학교 그러니까 저희들이 얘기하는 내몽고에 있는 
그 학교 하나밖에 없어요. 거기에서 졸업하고 고등학교는 중국인 학
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했어요.
그러면 그때 당시에 내몽고에 조선족이 좀 많았습니까?
저희들이 있을 때 그러니까 한 20년 전에 보면 통계수치로 보면 한 
4만명 정도 내몽고에 살았다는 통계수치가 있습니다. 주로 경상도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94
 
쪽 많습니다. 거의 다 경상도에요. 저희 같은 사람을 빼곤 거의 경상
도 사람들이구요. 그래서 군집을 해 촌단위로 군집을 해서 살고.
보통 동북3성은 좀 많이 알고 있지만 내몽고까지 조선족이 살고 있
다는 얘기는 잘못 들었습니다. 4만 명이라도 굉장히 많은 수잖아요? 
정확한 통계인지는 몰라도요?
정부통계지요. 제가 그 얘기를 십 몇 년 전에 들었거든요. 지금은 그
렇게 안 되지만은 그때 보면은 많아 보였지요. 왜냐하면 거의 다… 
내몽고 동부지역이란 것이 지금 ‘통료’란 것이 한 개의 도시 이름이
고. 그 다음에 위에 올라가면 ‘흥암’에 맹 단위가 지역 시에 해당되
는 행정구역이에요. 거기에 흥암면하고 좀 더 올라가면은 또 ‘점흥’
이란 곳이 있어요. 그 곳에서 주로 거기에 군집해서 살고 있었기 때
문에 동부지역에 보면 조선족이 많았다고 봐야죠. 거의 각 지역마다 
한 만 명 정도는 있을 거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제가 말하는 세 개 
지역 중에서 보면 제일 많은 곳이 저희 흥암면이죠. 그래서 거기다
가 조선족 중학교를 설립하게 된 겁니다.
그 당시에 학교까지 설립했으므로 그 지역에서는 조선족들이 상당히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겠는데요?
내몽고도 소수민족 지역이다 보니까요. 조선족은 또 더 소수민족이
었기 때문에 별로 힘 쓸  수 없죠. 하지만 민족학교 설립이란 그 자
체가 의미가 있는 거죠. 대단한 창립… 그런데 지금 얘기를 들어보면 
거의 학생이 다 저희 세대들처럼 밖에 나와 있으니까 학생이 얼마 
없어 이제는 거의 없어진 거죠. 그렇지만 학교 급수도 그때만 해도 
높았습니다. 성(省) 소속의 학교였거든요. 지금은 거의 지방으로 내
려왔고요. 학생이 없다보니까.
5장. 내몽고 출신의 청도대학교 이승철 교수의 삶과 조선족사회 전망
 
195
내몽고자치주
거기 내몽고에서 초중까지 조선족 학교를 다니시고 인제 고등학교를 
중국학교로 가셔서 대학진학까지 하게 되었는데, 부모님들의 교육열
이이나 자식들에 대한 기대감들이 컸나 봅니다?
그렇죠. 저희 부모님 다 학교에 몸을 담고 있었으니까. 대학교는 저
희 세대는 기본이라고 보셨죠. 그리고 저는 저희 집에서 저희 가문
에서 제일 나이가 어린 편입니다.
가족이 어떻게 되십니까?
저희 위에 누나가 있구요. 그리고 저희 아버지 쪽에 친지분이 고모
하고 전부 다 길림성 쪽에 있습니다. 거의 다. 전부 다죠. 전부 다 
학교에 몸을 담고 있습니다. 교육자 집안이라 봐야죠. 저희 세대까지
만 해도 거의 다 교육계통이에요. 교육 쪽으로 있고. 저희 아버지는 
저를 교육 쪽으로는 오지 말라고 그렇게 하셨는데. 의학 쪽으로 좀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96
 
많이 했으면 좋겠다 그랬는데 제가 공부를 그렇게 못했으니까요. 하
하하!
▮ 내몽고에서 고교 졸업 후 연변대학교 지리학 수학
그래도 뭐 교수님은 유학도 다녀오시고 하셨는데요?
그래서 의과대학을 제가 갈 때도 실은 1지원으로 의과대학을 지원을 
했습니다. 붙지는 못하고 연변대학이 3지원에서 들어갔고. 그때 점
수가 딱 그래가꼬 연변대학을 가게 된 거죠. 내몽골에서 연변대학으
로요.
연변지역에는 친지분들이 좀 살았습니까?
연변지역에 저희 큰고모집이 연변지역에 있었습니다. 왕청. 그리고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큰고모하고 고모 자식분들도 거의 다 
지금 학교에 몸을 담고 있습니다.
연변에는 자치주로서의 독특한 성격들이 있던데, 내몽골에서 성장해
서 연변에 오니까 또 다른 어떤 느낌이나 분위기를 경험한 부분이 
있었습니까?
연변은… 제가 어떻게 보면 저희 조선족은 내몽고 지역에 살았기 때
문에 조선족 습관이란 것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처음 연변대학을 
갈 때는 입학을 할라 그럴 때는 연변이란 곳이 진짜 자기 뿌리를 찾
아가는 느낌이었죠. 그러니까 저는 본이 연변 쪽에서 왔으니까 연변
대학을 가니깐 자기 생각하고 많이 틀린 거예요.
어떤 점들이 그렇습니까?
연변이라면은 조선족들이 작은 곳에서 모여살기 때문에 자기의 민
5장. 내몽고 출신의 청도대학교 이승철 교수의 삶과 조선족사회 전망
 
197
족, 완전한 습관들을 가지고 살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가보
니까 실은 딴 도시랑 별 차이가 없는 거예요. 처음 연변에 올 때가 
1996년도입니다. 96년도에 대학교에 들어갔거든요. 그때만 해도 제
가 느끼기에는 민족적인 독특한 요런 모습들이 다른 도시랑 많이 비
슷했었다는 거죠. 저는 별 다르게 민족지역이라고 해도 조선족 특성
이 유일하게 한 가지 거의 다 한국말을 한다 그 자체뿐이지 딴 거는 
별로 저한테는 틀린 것이 없었거든요. 느낌상으로 그냥 작은 도시 
제가 살던 곳이랑 같은 작은 도시… 제가 살던 곳은 몽골어를 한다
는 거고 거기는 그냥 한국어를 하는 거고. 별로 차이가 없었거든요.
대학 4년 동안 다니시면서 공부를 할 건지 대학을 마치고 취업을 할 
건지 고민도 하셨을 텐데, 대학생활에 대해 얘기해 주십시오?
공부요? 하하하! 대학교는 다 똑같지 않겠습니까. 놀기도 많이 놀았
고. 실은 그때 저희들 그때만 해도 대학교 입학률이 4년제, 2년제 
합쳐서 20% 정도밖에 안됐어요. 20%도 안됐죠. 거의 20% 밖에 안
됐기 때문에 학교 경쟁은 좀 심했죠. 저는 별로 공부를 안했습니다. 
그냥 60점 이상만으로 만족하고 그렇게 살아 왔고요. 대학교 4년 동
안 가끔씩 외국어 같은 영어는 필수과목이에요. 중국에서는 불합격 
맡기도 하고 F받기고 하고요.
그렇게 된 이유가 제가 보기에는 적응이 안 되서 그런 것이 아니라 
개인 자체가 공부를 안 해서 그런 거죠. 딴 지역에 와서 내가 공부
를 하니까 힘들어서 이거 안 되겠다라는 그런 것보다 처음부터 공부
를 안 해서 그렇게 됐고. 졸업하는 해까지 실은 제가 재수를 한 거
예요. 다시 시험을 보고 그러다가. 재수란 거는 새로 대학을 가려고 
한 게 아니고요. F학점을 맞으면 다시 필수과목 대학 4학년 때까지 
영어를 듣기 시험을 봤거든요. 유일하게 그 한 과목을요.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198
 
제가 대학교 때 공부한 것이 젤 어려운 것이 수학하고 영어였어요. 
수학이 안 되는 이유가 저희들이 보면 중국인 하고 차이가 있는 면
이 그 방면인 것 같애요. 저희들이 이해능력이 좀 아마 중국인들보
다 차이 난 것 같아요. 왜냐하면 중국인들은 직접 중국어로 모든 수
업을 받고 대학교에 오면 계속 중국어로 수업을 받는데 저희 같은 
경우에는 중학교까지는 조선족 언어로 수업을 받고 교육을 받고 하
다보니까. 고등학교에 와서는 일부는 중국어로 이렇게 하기 때문에 
이해능력이 많이 모자란 것 같아요. 뭘 얘기를 하면 이건 어떻게 이
해를 해야 하는지 거기에 많이 딸린 것 같죠. 중국인들하고 그래서 
성적을 보면 거의 다 중국애들이 성적이 높았거든요. 저희들보다는.
▮ 한국 유학 동기와 지리학에서 관광학으로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그런 것 같애요. 그래서 공부를 안 하다가 제
가 유학을 가겠다는 생각은 그때 딱 학과에 좋은 기회가 있었습니
다. 그때 교수님 한분이 여러 가지로 잘 지내다가 저하고 얘기를 한 
거예요. 혹시 유학에는 생각이 없느냐? 그때가 제가 3학년 2학기였
으니까 2학기였죠. 그렇게 말씀을 하시고 내가 반년 동안 생각을 해
봤습니다. 공부를 하기 싫어하는 상황에서 다시 가서 공부를 마칠 
수 있을까? 그리고 한국이란 곳이 내가 적응을 할 수 있을까? 많은 
고민을 하는데 이 고민이라는 것은 실제적으로 중국에서의 취업을 
비교를 하는 거예요.
중국에서의 취업은 그때 제가 생각했던 길은 두 가지였어요. 한 가
지는 다시 내몽고에 들어가서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선생을 하던가 
5장. 내몽고 출신의 청도대학교 이승철 교수의 삶과 조선족사회 전망
 
199
아니면 행정적으로 저희들이 지리학과였으니까 토지국이라는 데… 
한국의 국토보안국 그런 데 가서 일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성공을 할려면 제일 짧은 길이 아마 공부라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그래서 4학년 들어가면서 제가 결정을 했거든요. 
유학을 아무튼 한번 해보고 싶다. 그때 저희 어머님이 한국에 계셨
어요. 어머님은 한국에 계시고 아버지하고 할아버지는 계속 고향에 
있고. 그러다가 2000년도에 제가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직접 강원대
학교로 입학을 하게 된 거죠.
연구자들과 함께(2013.2. 우측 두 번째)
그러면 강원대학교에 선배님들이 계셨습니까?
제가 강원대학교 간 거도 거의 다 선배님들이 그쪽에서 정보를 주어
서… 당시에 강원대학교 하고 연변대학교 간에 교류가 좀 있었다고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00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자매대학으로 그런 것도 있고 그런데 혜택은 
없습니다. 꼭 혜택이 있다는 거보다 그냥 저는 방법이 없이 강원대
학에 간 거예요. 선택할 여지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지리학과 쪽
으로 제가 알고 계신 그 교수님은 학교 두 학교 밖에 없습니다. 하
나는 강원대학교. 여기는 관광과 그리고 하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교. 
계속 지리학과 쪽으로 하는데 GIS로 하고 싶은 생각이 있느냐? 그
런데 문제가 그때 GIS를 할려면은 한 1년 정도 기다리고 다시 나가
야 했기 때문에 제 생각으로는 어차피 공부를 할려면은 빨리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학과는 밀려나고 어차피 저야 그전
에 공부를 안했으니까 다시 공부를 한다는 생각을 하고 갔기 때문에 
그래서 강원대학교 관광과로 들어가게 된 거에요. 꼭 관광을 공부하
고 싶어서 간 건 아니구요. 상황이 그렇게 됐기 때문에 제가 선택을 
할 수 있는 여지가 그렇게 밖에 없다고 저는… 그때 말씀을 해주셨
던 교수님이 당시에 강원대학교에 아시는 교수님이 있었거나 선배들
이 있으셨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진행된 거죠.
등록금이나 생활비도 비쌌을 텐데요?
장학금은 그냥 다 받았죠. 첫 학기는 당연히 못 받았죠. 그때는 두 
번째 학기부터는 거의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딴 학교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겠지만은 강원대학교는 유학생에 대한 제도가 그나마 괜
찮은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전문 유학생 회관도 있고요. 전문 유학생 
기숙사도 있구요. 다 전문적으로 되어있기 때문에요. 그리고 저희들 
갈 때는 학부생이 없었습니다. 전부 다 대학원생 꼭 중국에서 졸업
을 하고 대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많이 왔거든요. 편입은 몇 명이 
있었는데 그거는 한국에서 공부하다가 다시 편입을 해 올 수는 있지
만 중국에서 직접 편입을 할려는 학생은 없었거든요. 그래서 강원대
5장. 내몽고 출신의 청도대학교 이승철 교수의 삶과 조선족사회 전망
 
201
학교에서는 뭐 생활비는 저희들이 알아서 혼자 밖에 나가서 여러 가
지 일을 해야죠. 거의 자기 생활하고 그런 데는 별 지장이 없었거든
요. 저희는 중국어 좀 가르치고 박사과정 들어가서 교수님이 수업을 
좀 주시고 하면은 저희들이 생활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 강원대학교에서 관광개발론 박사학위 취득
강원대학교에는 언제 유학했습니까?
제가 2000년도에 강원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연변대학교 졸업하고 
안 쉬고 바로 들어갔지요. 2000년도에 강원대학교에 입학을 해서 
2002년도 7월 달에 석사를 마치고 그러고 계속 거기서 박사과정을 
했어요. 지도교수를 바꾸고 다시 거기서 박사과정을 시작하게 된 거
죠.
논문은 어떤 주제로 작성했습니까?
논문은 저는 저 소비자 행위 쪽으로, 소비자 행동론 쪽으로 했었거
든요. 논문 제목이 리스크 감소… 관광 쪽을 중심으로 해서 리스크 
감소행위. 한국인들이 중국에 관광을 오는데 어떤 리스크들을 감수
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런 리스크들을 어떻게 해소를 할 것인지 하는 
거죠. 지금 보면 좀 더 보완했으면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박사는 언제 받으셨습니까?
2006년도에 받았습니다. 2006년 7월 달에요. 저희는 좀 빠르다고 
봐야죠. 4년이면요. 유학생들은 거의 다 5년, 6년 하죠. 늦게까지 하
는 사람들은 7, 8년도 있지만, 거의 다 5, 6년 정도는 하죠. 저는 석
사, 박사 합쳐서 6년 정도에 다 끝냈으니 좀 빨리 했죠. 나름대로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02
 
열심히 했다고 봅니다.
한국 유학하셔서 아시겠지만 한국이란 학풍이 지도교수랑 관계가 굉
장히 중요하잖습니까?
그렇죠. 저는 실은 좋은 기회를 만난 것 같아요. 제가 석사에 들어갔
을 때 지도교수님이 퇴임 2년 전이었어요. 빨리 제자 졸업을 시켜야 
하는 상황이셨지요.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제가 졸업을 안 하면 지
도교수님은 퇴임을 하셔야 되는데. 그래서 거기에 비교를 하면은 지
도교수님이 좀 빡세게 요구를 했습니다. 꼭 2년 안에 졸업을 할 수 
있게 좀 빡세게 했죠. 그리고 교수님이 퇴임을 하시니까 다른 지도
교수님이 또 그 자리에 들어가셔야 되잖아요. 들어오셨는데 제가 또 
거기에 제가 들어갔거든요. 그러면 제가 제일 첫 제자잖아요. 그래서 
또 빡세게 했습니다. 뭐 저도 교수님한테 얘기를 말씀을 드렸거든요. 
교수님 열심히 해가지고 중국에 빨리 들어가야 되기 때문에 열심히 
해가지고 3년 반쯤으로 생각을 하고 있다고 지도교수님도 그렇게 해
봐라. 일단은 그렇게 진짜 그렇게 된다면은 널 보내줄까 안 되면은 
방법이 없는 거 아니냐? 어차피 이거는 나 혼자 얘기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좀 열심히 하니까 3년 반 때 논문을 제출하니까 지도교수님
이 안 된다 그러더라구요. 
어떤 이유로요?
“아직 좀 더 준비를 해야 되지 않겠느냐?”라는 거죠. 그리고 “3년 반
이란 것이 박사가 우습지 않느냐?”라고요. 너무 빨라서. 그래서 구체
적으로는 시간도 그렇고 저 개인적으로 준비가 실제 그렇게 잘 안 
됐구요. 제가 3년 반 만에 중국에 들어왔습니다. 들어와서 논문 조
사를 시작을 했습니다. 3년 때. 그러니까 수료를 다 하고 중국에 들
어와서 한 반년동안 계속 조사를 했습니다. 설문조사를 하던 거를 
5장. 내몽고 출신의 청도대학교 이승철 교수의 삶과 조선족사회 전망
 
203
제대로 해야 되니까. 하다가 3년 반 때 지도교수님께 제출하니까 안 
된다고 하고 다시 한국에 들어와라. 내가 어느 정도 했는지 다시 한 
번 보자. 그래가지고 3년 반 만에 들어와서 제가 연구한 결과를 거
의 다 죽 책상에 펴놓고 어떻게 어떻게 됐습니다 하니까. 그러니까 
그럼  다음 학기 졸업해라. 괜찮다. 지금 보니까 설문조사도 거의 나
왔고. 설문지도 직접 개발하고, 통계 척도도 개발하고요.
통계는 뭐 어떤 방식으로 냈습니까?
SPSS하고 AMOSS 하고 그 두 개 밖에 없었어요. 지금 한국에서도 
AMOSS로 많이 한다던데요. 그래도 그때 2006년 정도쯤 되니까 
AMOSS 일찍 시작한 편이죠. 얼마 쓰는 분들이 잘 없는데 그때 다 
잘 쓰는 거죠. 그러니까 방법론적으로 저희가 문제가 많이 있었습니
다. 실제적으로 통계 쪽에는 방법론적으로요. 근데 그때는 사람들이 
잘 모르니까 그렇죠. 다들 그러냐 하면은 그렇습니다 하고 넘어 간 
거겠죠.
근데 그때부터 저희 지도교수님이 로지모임으로 좀 할 수 없겠느냐 
하는데 근데 그거는 도저히 못 할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그거는 안 
될 것 같고. 어쨌든 어느 정도 본론까지 쓰면은 그래도 일단 한국에
서 보면은 일단 설문조사의 결과는 나온 다면은 저희들이 뭐 전공쪽
을 빼고 통계결과 자체만 보면은 괜찮게 나왔다면은 그래도 쓸만하
다고 했으니까요. 그때 정도면은요.
그때 설문 척도 할 때 설문조사도 꽤 많이 했겠네요?
내가 중국에 와서 한 600부정도 한국인 대상으로 사천성에 가서 했
거든요. 600명의 한국 사람들을 일일이 만나서 했죠. 저희들은 설문
조사 심층면담법이 아니에요. 그냥 설문지 돌리는 것이죠. 그리고 중
국에 있는 사업가들 관광 쪽에 있는 사업가들에 대해서는 심층면담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04
 
법을 했거든요. 시간이 총 반년정도 걸렸죠. 그리고 다시 들어와서 
졸업을 하고.
▮ 산동성 청도대학 교수 임용 
박사 학위를 받으시고 중국 가서 전문직 교수가 돼야 하겠다는 생각
도 있으셨겠지만, 한편으로는 한국에서도 포스닥이라든지 여러 가지 
기회들도 있을 텐데요?
포닥은 한국에 그때 저희들 전공 쪽에는 포닥이 거의 없었습니다. 
갈 수 있다고 하는 곳이 경기대학교. 저희는 관광개발 쪽이었기 때
문에 갈 수 있는 학교가 경기대학교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저 개인
적으로. 그리고 저희 지도교수님도 그 학교를 나왔구요. 근데 세종대
학교 같은 경우는 호텔학과가 괜찮다고 하다 보니까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고 봐야죠. 포닥을. 그리고 한국에 남아서 계속 일을 한다는 
것은 생각을 안 해봤습니다. 저는 박사과정 시작할 때부터 공부를 
마치고는 중국에 들어가겠다는 생각 그것 밖에는 안 해봤거든요. 한
국에 남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어요.
중국으로 내가 꼭 돌아가야 되겠다고 생각을 하신 어떤 이유가 있으
십니까?
제가 아무리 한국어를 한다고 해도 실은 외국인이에요. 한국에서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국립대는 못 들어갈 거고요. 사립대에 들어가는
데 사립대에서는 저희가 알고 있는 바로는 3년을 못 넘거든요. 전임
강사로 들어가도 3년을 못 넘기 때문에 그 3년 시간을 낭비하고 다
시 중국에 들어와서 학교에 들어간다. 좀 늦지 않았을까 하는 고민
5장. 내몽고 출신의 청도대학교 이승철 교수의 삶과 조선족사회 전망
 
205
을 많이 했습니다. 실은 대학교에 가서 전임강사 할 수 있습니다. 선
배들도 저희들보다 몇 해 일찍 먼저 하신 분들은 그렇게 하다가 저
희 때 딱 들어오니까 시간이 딱 맞았지만 저희 그때 좀 더 늦게 들
어왔으면 힘들었을 거예요. 지금 저희 쪽에 지금 매년 해마다 신입 
들어오잖아요. 보면은 박사를 졸업해도 들어오기가 힘듭니다. 졸업했
다 해도 그 시점에도 그 생각을 한 거예요. 빨리 중국에 들어가야 
자리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을 했거든요. 그것도 예를 들어서 2년제
에 전문대에 들어간다는 거는 박사학위를 받고는 별 문제가 없었고
요.
그 당시로 보면 지금도 박사면은 전임으로 전문대면은 크게는 문제
가 없습니다. 근데 저는 그 4년제에 들어가고 싶었거든요. 대학교를 
들어가 보고 싶었기 때문에. 그래서 빨리 들어가야 내가 자리를 잡
을 수 있다고 생각을 했고 빨리 졸업하고 싶은 이유도 거기에 있었
습니다. 졸업을 하고 그냥 직접 중국에 들어온 거에요. 중국이 전 고
향이라고 생각해요. 조선족이지만 한국에 뿌리가 있어야 된다고 해
야 되지만 저희들은 몇 세대를 지났기 때문에 어차피 저는 중국인이
라고 생각을 하고.
그때 학위를 하시고 바로 청도지역으로 오셨습니까?
예. 여러 지역들이 있었는데… 제가 선택을 한 대학교가 다섯 개 정
도 있었습니다. 지원할 대는 서류로 하죠. 공고가 다 뜹니다. 중국에
도 사이트에 각 학교의 사이트에 가면은 어느 주에 몇 명 몇 명씩 
다 나와 있거든요. 그중에 제가 생각을 해봤습니다. 북경 상해나 갈
까? 강원대학교를 졸업해서 가기 힘들더라구요. 북경이나 상해는 당
연히 못 간다는 건 아니고 노력을 하면 가겠지마는요. 거기에 가서 
경쟁하기에는 좀 힘들다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리 저희가 해외파라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06
 
고 하지만은 미국에서 중국유학생이 젤 많지 않겠습니까? 거기에 더 
유명한 대학교도 많고 제가 들어올 때 자기 자신을 타킷을 이선도
시… 일선도시가 아니라 상해나 북경 같은 대도시가 아니라 광주 같
은 대도시가 아니라 이선도시라는 것이 산둥성의 제남, 청도 연해도
시서 또 절강성의 여러 도시 그리고 사천성의 몇 개 도시. 그렇게 
제가 목표를 잡고 들어왔거든요.
다시 동북지역으로는 들어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다. 고향 쪽 동
쪽으로는 남쪽으로 좀 더 오면 좋겠다 그래가지고 젤 처음에 사천성
에 조사를 하고 거기에 생활하기가 좋다고 생각을 해가지고 거기에 
거의 자료가 다 오케이가 됐습니다. 월급까지 얼마 달라 결정이 나
고요. 그리고 저희도 부모님 의견을 좀 들었습니다. 사천에 대학교가 
있는데 그렇게 가고 싶다 그렇게 했을 때 부모님이 너무 남쪽이고 
너무 내륙이고 폐쇄된 쪽이 아니냐? 사천성은 다시 한 번 생각을 해
봐라. 그래서 그러면 제 대안이 산둥성 하나 절강성 하나다. 그러면 
북방, 저희 종족이 거의 북방에 살았으니까 북방지역에 속하는 도시
가 산동이 낫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듣고 제가 산동대학교에 서류를 
넣고 다시 청도대학교에 서류를 넣습니다. 산동대학교 저도 가봤습
니다. 면접을 하겠다고 해가지고 면접을 가봤는데 그해 산동대학교
에 관광과가 있었습니다.
거기는 실은 중국에 들어갈려면 자리가 있어야 됩니다. 자리가 안 
난 거에요. 그러면 한 1년 정도 기다려야 된대요. 그래서 거기는 포
기했고 청도대학에는 또 예전에 제 석사 때 교수님하고 청도대학교 
퇴임하신 교수님이랑 조금 인맥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만나고 다시 의견을 들었습니다. 청도에 들어오려고 하는데 청도대
학이 괜찮으냐? 청도해양대학교가 괜찮으냐? 말씀하시기를 다 좋고 
5장. 내몽고 출신의 청도대학교 이승철 교수의 삶과 조선족사회 전망
 
207
나쁜 것이 있으니까 해양대학교 같은 경우는 애들이 청도대학교보다 
훨씬 높습니다. 청도대학교 같은 경우는 산동성이구요. 위탁을 해서 
관리를 하고 있으니까 학교 레벨은 당연히 해양대학교가 훨씬 높습
니다. 근데 관광 쪽을 보면은 연구결과랑 모든 걸 보면 그래도 청도
대학이 산동성뿐만 아니라 전국에서도 유명하다. 어떻게 선택하느냐
는 너 알아서 해라. 그래서 개인적으로 최종적으로 선택은 그래도 
자기 전공 쪽을 발전하기 위해서는 학교보다 전공이 더 중요하지 않
겠느냐 해가지고 다시 청도대학으로 들어오게 된 거죠. 그래서 2006
년 12월 달에 정식으로 수속을 마치고 들어왔거든요. 2006년 8월 
달에 졸업식 다 끝내고 모든 걸 한국에서 끝내고 들어와서 수속을 
밟고 한 5개월, 4개월 정도 기다린 거죠.
당시에 청도대학으로 오실 때에 한국 같은 경우는 교수의 TO 자리
가 나면 지원자들이 많지 않습니까? 중국은 워낙 나라가 커서 경쟁
도 상당히 심했을 텐데요?
저희가 들어올 때도 제 자리 제가 말로 듣기로는 한 열 명 정도 경
쟁이 붙은 거죠. 그니까 제 전공이 이득을 본 것이 실은 청도 쪽을 
보면은 한국분들이 많이 계시고 산동성 자체가 한국, 일본 손님도 
많이 오고 상주 외국인도 많고요.
전공하고 잘 맞으셨네요?
그러다 보니깐 제가 걸린 것 같애요. 실은 딱 누가 논문을 더 많이 
썼다 잘 썼다 거의 비슷비슷했던 것 같애요. 거의 다 비슷비슷했고 
제가 한국에서 유학을 해서 들어온 것이 비교우위라고 봐야 되죠. 
그때 그 상황에서. 그래서 들어올 수 있었던 것 같구요. 뭐 당연히 
저희가 여기 아시는 교수님 인맥도 좀 당연히 그것도 작용을 했겠
죠. 여러모로 종합적으로 볼 때 낫겠죠. 그래서 들어올 수 있었던 것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08
 
같고요.
저희 실은 단과대학 발전 방향이 외국 쪽에서 많이 하신 분을 많이 
할려고 하거든요. 거기다 지금은 포닥을 꼭 했던 분들을 많이 모집
하고 있거든요. 포닥이야 뭐 경력이잖아요. 학위보다 경력 있던 사람
들을 많이 모집하고 있거든요. 제가 총 2년이라도 더 늦게 들어왔으
면 안 됐을 것 같애요.
그만큼 급변하게 바뀌고 있다는 거네요?
그렇죠. 저희들 세대가 유학을 제일 많이 간 세대에요. 90년대 초기
부터 90년대 중후기까지 그때가 제일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중국 개
방이 78년도였어요. 그때 그 세대 자라난 저희들 저 세대가 가정상
황도 많이 좋아지면서 생각도 많이 바뀌어지고 부모님 생각들도 가
장 많이 바뀌어진 세대가 저희 세대에요. 70년대 후기 문화대혁명 
끝나는 그 시점에 태어난 애들이 해외로 많이 갔거든요. 그래서 저
희들도 그 붐에 그냥 따라서 간 것 같애요.
▮ 이방의 소수민족이지만 안정적인 전문직 
결혼은 언제 어디서 하셨습니까?
결혼은 제가 작년에 했습니다. 작년에 했구요. 결혼식도 한국에 가서 
했죠. 한국에서 같이 공부한 사람이 아니고요. 중국에 들어와서 다시 
알게 된 여성입니다. 결혼식을 한국에 가서 한 이유는요. 저희 와이
프 부모님이나 친지분들이 전부 다 한국에 계십니다. 저는 뭐 다 이
쪽에 있지만. 한국에 가서 한번 하고 중국에 와서 간단하게 한번 하
고. 고향에는 원래 법대로 따지면은 고향에 가서 한번 해야 합니다. 
5장. 내몽고 출신의 청도대학교 이승철 교수의 삶과 조선족사회 전망
 
209
그런데 고향에는 별로 친지도 없고 하다 보니깐 청도에 와서 한번 
간단하게 부모님이랑 여기 다 와서 저희 주변사람들 이렇게 해서 간
단하게 또 했거든요.
청도지역에서 비즈니스 쪽에 계시는 분들은 한국과의 어떤 경제적인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러니까 한국기업
들이 많이 들어오고 그럴 시기에는 사업도 잘되었고 식당도 잘되었
는데 요즘은 인제 한국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등 경제적인 상황이 안 
좋아지니까 위기를 경험하게 되는 모습들이 좀 있더라고요? 전문 직
종에 계신 분들은 어떻습니까?
저희들은 영향을 안 받죠. 어떻게 보면은 저희들이야… 사업하시는 
분들은 진짜 제가 보기에는 청도에 들어오신 조선족 분들은 거의 다 
한국기업이 있기 때문에 여기 오신 거거든요. 처음에는. 말로는 사업
하시는 분들은 그렇죠. 저희 전문직에 있어서는 왜냐면 저희들이 모
집하는 사람도 거의 다 중국학생이고 조선족을 모집하는 것도 아니
고 전문적으로 한국을 상대해서 하는 거가 아니고 뭐 직장 쪽으로 
봐서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연구하는 전공 쪽으로 봤
을 때는 사실은 한국분들이 많이 들어오지 않으면은 당연히 저희 연
구에서는 좀 문제가 되겠죠. 하지만 뭐 연구방향을 바꾸면 되니까요. 
중국 국내 꺼를 연구해도 별 문제가 없으니까. 전문직은 별 영향이 
없다고 보면 돼요. 경제적으로도 좀 안정적이 되고요.
연변은 조선족 자치구로서 조선족으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아무래도 
네트워크라든지 좀 서포팅 되어지는 부분들이 심적으로 편할 것 같
은데 이런 면이 청도는 어떻습니까?
전 그렇게는 안봅니다. 연변이란 지역이 조선족이 많다고 해가지고 
개인한테 혜택이 간다는 건 없다고 보거든요. 단 조선족의 전체에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10
 
대한 평균적으로 봤을 때 좀 더 혜택이 갈 수 있지만 개인한테는 혜
택이 없다고 봅니다. 연변이나 청도나 차이가 없구요. 저희 조선족으
로서 그냥 청도에 와서 일을 하고 있다 했을 때 저희 직장을 볼 때 
이런 당연히 소수민족이기 때문에 중국인들이야 딴눈으로 보겠죠. 
어떤 상황에서는. 하지만 그것이 직접적으로 한사람한테 영향까지 
가게 한다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러니까 왜냐하면 거기 지표 거기
에 다 딱딱 되어있기 때문에 거기에 맞는 사람 예를 들어서 두 사람
이 똑같다. 그럼 제가 떨어질 수 있어요. 준비를 해야 되요. 그거는 
어차피 저희들이 외지에 와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는 생각을 하
고 여기에 살아야지 아니면….
기본적으로 내가 실력을 갖추고 경쟁을 했을 때에 평가지표에 따라
서 내가 우위에 있을 수도 있고 또 경쟁상대에게 질 수도 있는데, 
내가 꼭 소수민족이라고 해가지고 과격한 피해를 받는 것은 아니라
는 말씀이시죠?
절대로 아닌 것 같습니다. 제 직장은 그런 것 같애요. 딴 직장은 모
르겠습니다만. 딴 학교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예를 들어서 저도 지금 이미 부교수 되는데 부교수 경쟁에도 여러 
사람이 경쟁을 해야 됩니다. 여러 사람이 진급을 해야 하는 경쟁을
요. 보니까 한국체제하고 다르더라구요.
▮ 중국 교수체제의 특성
저희는 이제 전임강사 되고 조교수, 부교수, 교순데 전임강사부터 일
괄적으로 교수라고 하고요. 그 다음에 연봉에 차이가 있지만 학교에
5장. 내몽고 출신의 청도대학교 이승철 교수의 삶과 조선족사회 전망
 
211
서 활동이나 이런 부분에서는 큰 차이가 없는 편이거든요.
중국에는 그 차이죠. 중국 같은 경우에는 교수에도 A, B, C 등급이 
있어요. 교수에도 1급 교수, 2급 교수, 3급 교수 이렇지요. 중국에서 
교수라고 했을 때 부교수 이상을 교수라고 하거든요. 한국과는 다르
죠. 중국에선 급수가 강사면은 조교수죠. 그리고 강사 위에 저희들은 
부교수가 있고 정교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중국에서는 교수에 올라
가기가 힘듭니다. 경쟁을 해야 되기 때문에요. 제가 한 2년 전에 됐
으니까 그때도 저희들이 경쟁했을 때 제가 비교우위에 있기 때문에 
정정당당하게 딴사람들보다 지표 위에 있습니다. 그래도 저희는 점
수로 하기 때문에 점수가 제가 높기 때문에 그거는 피해를 하게끔 
만든다 그럴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저희가 피해의식이 있다 그런 
건 저 개인적으론 없습니다. 딴사람은 모르겠습니다만.
열심히 하시다 보니까 교수도 일찍 되셨습니다?
중국에 나이가 거의 정상이라고 봐야죠. 저희 지금 단과대학에도 저
희 나이대가 많거든요. 저희 전임 교수가 26명. 26명 정도 되거든
요. 거기에서 저희 나이 또래가 30대에서 40대까지가 열 명은 최소
한 열 명은 되거든요. 저희 단과대학이 젊다고 봐야죠. 한 열 명 정
도 되니까 거의 다 4, 5년 안에 새로 들어오신 사람들이죠.
단과대 구성원 비율로 볼 때 또 동료교수들 중에 조선족 교수는 얼
마나 되십니까?
작년에 한분이 들어왔습니다. 일본에서 졸업을 하고 지리학 쪽으로 
하고 들어왔습니다. 작년 7월 달에 들어왔으니까 아직까지 수업은 
없고 이번 학기부터 수업을 하게 되는 거죠. 그분이야 어떻게 생각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생각에는 피해까지 간다거나 소수민족
으로 해서 피해까지 간다고는 생각안합니다. 당연히 사소한 사생활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12
 
개인적인 접촉에 있어서 소수민족이기 때문에 그 분들도 접촉을 할 
때 조심스럽게 접촉을 하죠. 왜냐하면 민족 습관이 있을 수 있기 때
문에 그분들이 중국인하고 중국인들 친한 그런 관계하고 저희들하고 
그분들하고 친한 관계가 조금 차이는 있죠. 어떻게 보면은 근데 그
것이 친한 것이다 그런 건 아닌 것 같애요.
그런데 당연히 상식적인 수준에서 나올 수 있는 거지요?
그 정도지 저희가 직장 동료들이랑 같이 뭐 나이 비슷한 교수님들끼
리 나가서 술 한 잔 하고 빰빠라도 한번 하고 다 같이 잘 노는 것 
같아요.
조선족 교수회라든지 이런 모임을 만들어서 서로서로 선배교수님들
로서 후배교수들에게도 조언도 해주고 식사자리도 갖고 하지는 않습
니까?
저는 조금 그쪽으로는 딴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청도지역 ‘조선족
문화인협회’라고 있습니다. 몇 번 얘기를 했지만, 저는 참석을 안했
어요.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실마리를 드리면은 조선족협회라는 
것이 실제적인 사회에 대한 반환을 해야 되는데 보통 협회란 자체가 
거의 근래는 한 두 세 번 만나서 같이 술이나 한잔하고 끝나는 거거
든요. 그럼 전 별 의미가 없다고 보거든요. 예를 들어서 사회를 위해
서 조선족 문화 향상을 위하여 조선족 학교에 가서 실제적인 일을 
좀 한다 그러면 전 참석을 할 거에요. 그냥 술 한 잔 하면 저 선배
님들 많이 만나서 술 한 잔해요. 그거하고 상관없거든요. 선배님들도 
꽤 많습니다. 청양 쪽에도 계시고 강원대학에서 오신분도 계시고 연
변대학 쪽에도 계시고 저희들은 자주 만납니다. 가끔씩 만나서 얘기
도 하고 뭐 거의 다 전 교수님들 만나죠. (함께 구술자로 참여해준 
내몽고 출신 사업가를 가리키며) 친구들이야 이런 이 친구도 실은 
5장. 내몽고 출신의 청도대학교 이승철 교수의 삶과 조선족사회 전망
 
213
제 동창이거든요.
연변대학교 동창이십니까?
아닙니다. 내몽골 쪽에요. 고등학교 동창도 여기 한 10명 정도 있습
니다. 청도에요. 이들은 전문직이 아니고 전부 다 사업을 하고 있어
요.
사업을 하시는 분들은 청도가 사업이 잘 되는 지역이기 때문에 나오
셨겠네요?
여기가 한국 일하기 좋지요. 그분들도 청도에 한국기업이 많기 때문
에 거의 다 한국을 상대해서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주로 복장 쪽에. 
(함께 구술자로 참여해준 내몽고 출신 사업가를 가리키며) 이 친구
도 복장 쪽에 일을 하고 있고. 한국에 일 많이 하다가 이제는 알파
를 하거든요. 알파는 한국은 의미가 없죠. 그걸로 시작해서 다시 딴 
거를 하고 있고. 거의 대부분은 복장 쪽으로 하면서 한국하고 많이 
거래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을 복장이 아니더라도 딴 일을 
한다 해도 한국과 상관있는 일을 하고 있고 변호사도 있고. 직업군 
따라 비즈니스 쪽에 계시는 분들은 지역적 특성에 의해서 들어오시
는 분들이 많고요. 전문직에 계시는 교수님들이나 이런 분들은 지역
적 특성 요인보다는 본인의 좀 더 나은 선택적인 요소들이 더 많이 
작용하지요.
교수님들은 본인의 진로 조건에 의해서 청도지역으로 많이 들어오시
는가 봅니다?
그렇죠. 저희들은 도시에 한국… 제가 조선족이기 때문에 한국분들이 
많기 때문에 제가 여기 온 거는 절대 아니거든요. 적응의 양상이나 
패턴이 좀 다르죠. 오히려 전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저희들은 월급을 
받기 때문에 지역 자체가 저희들한테 더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14
 
제가 청도에 있는 대학교가 예를 들어 사천 있는 대학교하고 비교를 
해볼 때 전 청도를 선택할 겁니다. 청도가 도시가 더 좋아요. 제가 
살기에는 더 편할 것 같고 그래서 여기를 선택하게 된 거고. 또 뭐 
꼭 어느 대학교가 더 좋다 해서 갈 수도 있습니다. 근데 저 개인적
인 선택은 제 경험으로는 사천도 됐고 실은 청도대학도 됐는데 제가 
청도대학을 선택한 이유가 청도 쪽을 선택한 이유가 청도는 기후도 
좋고. 저희들은 사업하는 사람이 아니라 돈을 얼마 많이 벌고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여기에서 월급 받으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풍경도 괜찮고 좋은 도시에서 기후도 괜찮은 도시에서 안일
하게 살 수 있는 그런 환경이 더 좋다 그래서 선택하게 된 것 같아
요.
▮ 칭다오 조선족 사회의 문제점과 향후 과제
지역사회 지도층으로서 가실 수 있고 나름대로 지식층이신데 앞으로 
청도지역에서 조선족 사회의 모습들이 어떻게 바뀌실 거라 예상하십
니까? 조선족 사회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
요?
조선족에 대한 문제점이란 거는 제가 본 조선족 진상에 대해서는 전
반적으로 볼 때 젤 중요한 문제점이 조선족 문화 교육수준이 점점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거든요. 전반적으로 볼 때는요. 특출한 몇 몇 
분은 당연히 있겠죠. 전반적으로 볼 때는 당연히 이거는 한국 회사
하고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하나가 통하기 때문
에 많은 사람들이 공부를 안 하고 직접 회사에 와서 한국으로 먹고 
5장. 내몽고 출신의 청도대학교 이승철 교수의 삶과 조선족사회 전망
 
215
살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면은 전문지식이 필요 없다고 생각 
들거든요. 그러다가 일을 하면서 그 업무에만 충성을 하게 되면 자
신이 한평생 동안 살아 갈 수 있다고 보거든요. 하지만 그건 너무 
큰 문제점이에요. 왜냐하면 업무라는 것은 항상 발전하기 때문에 그 
업무에 익숙해졌다고 해가지고 그 회사에 100년 동안 있을 수 있다 
그거는 절대 아니거든요. 그래도 전문적으로 자기 소질을 높이고 다
시 가서 업무를 배우면서 그 업무를 발전을 시켜야 거기에서 계속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항상 조선족들은 한 회사에서 2, 3년 3, 4년
을 못 버텨요.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보거든요. 그것이 현재 각 도시
에 있는 조선족의 진짜 문제점이라고 봐요.
그리고 한국회사에 있으면은 그 회사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는 비교
우위에 있다고 보거든요. 나는 직접 한국 사장하고 같이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면 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의 말을 옳다고 생각해야 
된다. 관리자로서. 그렇게 되면은 자기가 지도자로서 밑에 일하고 있
는 사수들 실은 여러 관계분들 그래서 중국인들이 한국인이나 조선
족에 대해서 많은 이견을 갖고 있다는 걸 아마 알고 있을 겁니다. 
아마 알고 계실 겁니다. 주 이유가 중간에 있는 관리자가 자기 일을 
잘 못하기 때문이에요. 한 가지 일에서 예를 들어서 중간에 있는 업
무자가 상하관계를 잘 처리해 주면은 실제적으로 서로 오해 갈 수 
있는 일들을 많이 해결할 수 있는데 일처리 자체, 그니까 방법론적
으로 그 자체가 틀려져 있기 때문에 그거를 어떻게 처리할 줄을 모
르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은. 그래서 더 많은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그것이 젤 큰 문제점이라고 보거든요.
조선족들이 점점 수준이 떨어지면서 예를 들어서 취업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많은 조선족들이 지금 취업을 하다가 2, 3년 뒤에는 그냥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16
 
취업을 다시 못하게 되거든요. 놀고 있는 사람들도 많아요. 예를 들
어서 전문지식이 있다면은 그 자리뿐만 아니라 딴 자리에 갈 수 있
는 선택권이 있을 수 있는데 그걸 많이 고민을 안 해요. 당연히 ‘한
국회사가 많기 때문에 벌어먹고 살 수도 있다’라는 생각도 맞겠지만
은 장기적으로 볼 때 그건 조선족들의 문제점이라고 봐요. 향후로 
조선족이 발전을 보면은 청도를 한국회사가 떠나면서 조선족들이 많
이 떠날 거라고 보고 있거든요. 저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다른 분들도 그런 말씀들을 하시던데, 현재 그런 모습들이 나타난다
고 봐야겠지요?
저희 친구들 원래 여기에 훨씬 많았습니다. 거의 다 딴 도시로 갔거
든요. 문제가 여기에서 돈벌이가 이제는 잘 안 된다는 이유가 제일 
중요합니다. 한국 회사가 많이 떠나면서 남방 쪽이나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여기서는 할 일이 없으니까. 계속 한국을 상대해서 일을 
했으니까. 이 친구 같은 경우는 인제는 한국 오더(order)만 아니라 
미국이나 러시아 오더도 받고 있기 때문에 어차피 어디에 있으나 똑 
같거든요. 하지만 전문 그것만 하다가 발전을 못하게 되면은 그냥 
죽게 되는 거지요. 저희 친구도 절반정도는 청도에 있다가 갔거든요. 
다른 도시로. 그것이 추세가 될 거에요. 그런 추세가 한 10년 내로 
나타난다고 저는 그렇게 봅니다. 10년 내로 진짜 잘되는 기업은 발
전을 잘 해가꼬 계속 살아남고 그 중간에 실력이 조금 있는데 여기
에서 버티면 한국 물을 따라서 어디에 많이 모이게 되면은 거기에 
따라 갈 수밖에 없어요.
5장. 내몽고 출신의 청도대학교 이승철 교수의 삶과 조선족사회 전망
 
217
조선족 상점 밀집구(2013.2. 성양구 민성로)
제2의 청도를 찾아서요. 그렇죠. 또다시 이동을 하게 될 겁니다. 저
희 세대는 여기에 많이 왔겠지만 저희 세대 후대들도 전부 다 청도
에 있잖아요. 근데 이분들은 저희들의 후세대들은 아마 여기에서 자
랄 겁니다. 왜냐하면 여기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청도 쪽에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아마 한국이 어디에 간다. 한국분들이 어디에 많이 
모인다. 나도 거기에 가서 일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안가지게 되겠지
만. 저희 세대까지는 저희도 먹고 살아야 되니까는 이동을 많이 할 
것 같습니다. 전문직으로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딱 조선
족으로서 조선족 연변지역에 가 살아야 된다고 보지는 않죠. 그렇죠. 
세대가 많이 바뀌셨고 지금 참 안정적인 삶을 실제로는 한국기업과 
상관없는 상황이니까요. 한국어학과 같은 경우에는 문제가 되겠죠. 
전문 인력 배양이기 때문에 지방을 위해서 오신 한국기업이 많으면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18
 
많을수록 한국어는 많이 필요하니까. 그런 특수학과 전문 인력을 빼
놓고는 별로 저희 같은 경우에는 걱정을 안 하거든요.
좋은 지적을 해주셔서 저희들 참 궁금해 했던 부분들이 좀 이해가 
됩니다. 개혁개방정책 이후에 연변에 있는 조선족분들이 고향을  떠
나와서 새롭게 정착했던 대표적인 도시가 청도라는 점에서 저희들이 
연구해 보자고 해서 살펴보니까 경제적 상황에 따라서 다시 제2의 
청도를 찾아서 이주를 해가야 되는 이런 상황들이 생기는 것 같습니
다. 그것도 이주 상황 속에서 직업군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죠.
6장. 동북요리 식당의 자영업자 최위의 삶과 
자녀교육
최위(2013.2)
6장. 동북요리 식당의 자영업자 최위의 삶과 자녀교육
 
221
■ 최위 연보
- 1968년 : 길림성 설안시 출생
- 1987년 : 고향에서 초ㆍ중ㆍ고교 졸업 
- 1988년 : 통화농업대학교 입학
- 1991년 : 대학 졸업 후 농약 장사
- 1992년 : 심양에서 어머니와 김치 장사, 처가 식당 근무
- 1994년 : 통화농협 1년 근무
- 1995년 : 고향에서 냉면가공 공장 6년 운영 
- 2002년 : 산동성 위해 이주, 식당 2곳 운영
- 2013년 : 칭다오 <쇠가마맛집> 동업
- 2014년 : 현재 위해와 칭다오를 오가며 식당 운영 중
▮ 할아버지가 동북 길림성 설안 이주
경상도 말투가 좀 있는 것 같습니다?
있어요? 우리 그쪽에는 강원도 말이 많이 비슷하다던데. 강원도 쪽
으로. 동북에 있는 저 우리 고향마을에는 전부 다 평안도,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다 옛날에 그 할아버지, 할매들이 중국에 건너와서 
같이 한 부락에서 살았으니까요. 그리고 음식도 뭐 전라도, 경상도 
그런 게 있었거든요. 전부 다 비슷해요. 제 아버님 어머님이 아니고
요. 할아버지. 할아버님께서 [중국으로] 넘어 오셨고. 아버지, 어머
님이 중국에서 태어나셨고. 저는 3세대에 속한다고 봐야죠.
가게 이름은 어떻게 됩니까?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22
 
명함 안 나왔어요. 아직 안 찍었어요. 저번에 찍었는데, 며칠 있어야 
나온데요.
이름을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이름이요? 이름은 중국어로 하죠. (종이에다 적으며) 여기다 적어볼
게요. 최(崔)갑니다. 최 위(蘶). 한 글자 이름입니다. 왠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중국 이름 안 썼으니까. 옛날에 애(아이)명은 동욱. 어
릴 때 인제 고향 거~서는 많이 불렀죠. 그래요. 학교 다니면서. 이
게 좀 어려운 한잡니다. ‘웨이’라는 게 ‘위대하다’라는 뜻이죠. 산이 
대단히 대단히 크다는 거죠. 우리 아버지가 이름을 지었는데, ‘최’ 자
가 산이 제일 큰 산이잖아요. 밑에는 ‘가’ 자잖아요. 큰 ‘가’ 자. 그래
가 이 뒤에 이름하고 이게 맞아야 된다 하면서 그러더라고요. 그래
가 이것도 크게 지었는가 봐요. 웨이. 웨이.
올해 생년과 나이는 어떻게 됩니까?
나이. 한국 나이로 46세. 생년은 1968년도. 길림성 설안에서 태어났
습니다. 설안시.
그럼 할아버지 때 오셨는데, 혹시 그런 말 들어보셨습니까? 할아버
지가 언제, 무엇 때문에 길림성으로 가게 되셨는지?
그거는 옛날에 저 말 듣기로는 저 중국 땅이 오면 이제 먹을 게 많
했잖아요. 우리 조선 땅에 먹을 게 없었는가 봐요. 그래가지고 여기 
와가지고… 여기 오니 땅도 많잖아요. 땅도 많고 하니까 밭도 부치고 
그러면서 살아나갔지요. 그런데 저 조선전쟁이 일어나고 못 갔죠. 처
음에는 살다 올라고 했는데. 근데 이제 하도 못사니까 그래 되고. 아
예 이제 그때 길이 막혔지요.
6장. 동북요리 식당의 자영업자 최위의 삶과 자녀교육
 
223
▮ 6.25전쟁, 할아버지 형제간의 상호 총질
우리 작은 할아버지는 그때 고 전쟁 일어나기 직전에 한국으로 장사
를 다녔어요. 그래가 장사 다니면서 한국에 들어갔는데 전쟁이 일어
난 거죠. 전쟁 일어나고 하루 묶고. 거기서 작은 할아버지는 한국 군
대에 참전하고. 우리 할아버지는 인민군 참군(參軍) 지원 갔고. 형제
가 그래 됐어요.
그 후에 저기 한 10년, 십 몇 년 전에 우리 할아버지 살아계실 때 
작은 할아버지 왔어요. 와가지고 둘이서 만나가 그런 얘기를 하고. 
서로 총질을 했는 거.
당시 길림성에 계시던 우리 동포분들께서 인민해방군으로 북한으로 
지원 갔어요?
그렇지요. 중국군대로 해갔고 북한으로 갔죠. 그런 경우가 많아요. 
전쟁 나가서 부상당한 분들도 많고, 돌아가신 사람들도 많고. 역사의 
비극이죠. 정말 비극이죠. 형제간에 어떻게 그렇게…. 그래가 그때 
작은할아버지가 그러더라고요 “나는 뭐 6.25전쟁에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는데…” 하시면서. 개성. 개성 있죠? 그때 개성을 뭐 어떻게 
들어갔었고. 뭐 인민군을 전부 다 전멸시켰다고 우리 할아버지가 또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저 왜 한국에서 우리보고 담판을 하자 했나
요? 하하하!
아버지하고 큰삼촌이 아주 어릴 때 우리 할아버지가 참전을 했죠. 8
년. 군대 가서 8년을 있었다 하더라고요. 중국 군대죠. 근데 군대에 
가서 거기 조선전쟁도 있고 뭐 여러 가지가 있었겠죠. 그 시간이 8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24
 
년이래요.
그때 당시에 군대 갔다 오시면 사회적으로도 명예도 있고 그럴 시기 
아니었습니까?
그거는 이제 문화가 어느 정도로 되는가를 봐야 되죠. 문화가 없으
면 아무런 것도 없죠. 글을 못 배워서 그렇죠. 그리고 이제 탔는 뭐 
공 세운 거 훈장들이 많더라고요. 그래가 이제 할아버지 돌아가실 
때 그거를 다 태워버렸습니다.
할아버지 두 분이 현재 모두 살아계십니까?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여기 왔다 가서 우리 할아버지가 세상도 뜨
고, 작은할아버지는 몸이 안 좋았는 것 같애요. 그리고는 이제 연계
도 끊어지고. 작은할아버지는 한국에 사셨습니다. 어디냐 하면, 저기 
서울에서 살다가 후에는 경기도에. 경기도 미군기지에서 있었데요. 
그리고 무슨 상세한 급수는 모르겠는데, 무슨 사단참모랑 육군 사단
참모인지? 그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사단 참모면은 스타인데. 최소
한 스타. 모르겠어요. 좀 급수는 있다 하더라고요.
고위직 군인이셨네요. 평생을 군인으로 사셨네요? 존함이 기억나십
니까?
작은 할아버지 이름은 최을만. 할아버지 존함은 최육만. ‘만’자 돌림
인가 봅니다. (종이에 글자를 쓰면서) 어르신들 돌림자 한자 이름이 
이렇게 ‘만(萬)’이든가? 모르겠어요.
▮ 농협 서기였던 아버지의 3남 2녀 형제자매들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낳았는데, 아버지 외에 자식을 몇 명이나 낳았
6장. 동북요리 식당의 자영업자 최위의 삶과 자녀교육
 
225
습니까? 
아버지 형제가… 아버지 있고. 삼촌 둘이에 고모 둘. 출생 순서대로 
따져보면, 맨 위에 아버지고. 아버지 장남이지요. 그 다음에 둘째 삼
촌. 그 다음에 고모. 그 다음에 삼촌. 그 다음에 고모. 그래서 이제 
작은 4촌 누나 아버지 되시는 큰 삼촌이 세상을 떴어요. 젊었을 때. 
결혼은 하시고. 병으로요. 그 나머지는 이제 다 살아계시고.
아버지, 어머니도 다 살아 계세요?
예. 지금 고향에 계십니다. 가끔 우리 집으로 오시기도 하고요. 아버
지는 연세가 올해 71세. 어머니는 67세. 4세 차이. 이제 이분들은 
다 길림에서 태어나 거죠.
아버지 형제, 삼촌들이 두 분 계시네요? 고모님들하고는 다 어디 사
시는지요?
고모님은 둘 길림에 있어요. 한 분은 청도에 있고. 큰 고모님이. 청
도 이촌(李村)에. 세상을 떴고. 여기는 큰 고모. 작은 고모는 막내. 
(가계도를 가리키며) 여기 중간에 삼촌. 지금 다 한국에 가 있어요. 
다 한국 갔어요. 돈 벌러요. 큰고모, 작은고모, 삼촌 다 갔지요. 몇 
년 될 걸요. 오래 됐을 건데, 고모는 한 10년도 안 됐겠나? 왔다 갔
다 합니다.
아버지는 길림에서 어떻게 사셨습니까?
우리 아버지는 공무원. 정부에 저 농협. 농협 있으셨고. 옛날에 대대
(大隊)로 하면 어떻게 땄는지 모르겠어요. 향(鄕) 밑에 촌. 촌에 서
기질을 한 10년 하고. 공산당원이기도 했고. 아버지는 옛날에 공부
를 잘했어요. 학교 다니고 그래가지고 농협에 들어갔어요. 거기서 간
부질하다가 후에 이제 퇴직을 하셨죠.
어머니도 일 하셨습니까?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26
 
어머니는 계속 일했지요. 젊었을 때는 왜 그때는 일을 많이 했었어
요. 뭐 전부 다 힘든 일 하고. 또 부녀협회 대장 뭐 해샀고. 사는 거
는 뭐… 작은 아버지가 저 계속 이래 10년간 아팠어요. 아프셔가 병
원비 약값 하고. 계속 그래 되셨는 거예요. 그래가 되게 곤란했어요. 
무슨 병이냐면 신염(腎炎). 신장. 콩팥 병. 신우염이니 신증후군이니 
뭐 콩팥도 병이 많습니다. 장남이니까 아버지가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셨어요. 할머니, 할아버지도 오래 사셨어요.
아버지는 몇 자녀를 낳으셨습니까? 사장님 형제분?
우리 형제요? 내하고 내 여동생. 둘뿐입니다. 내가 장남. 내가 위에
입니다. 내 여동생은 내보다 4살 어려요. 지금 42세.
▮ 통화농업전문학교 졸업과 다양한 직업생활 
고향에서의 성장과정과 공부과정에 대해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고향에서 길림성에서 성장했지요. 여기서 어릴 때는 저 고중(高中, 
고등학교)까지 다녔어요. 고향에서. 조선족학교 다녔습니다. 그 다음
에 공부하기 싫어가 1년 집에서 놀다가 새로 이제 시험쳐가지고 대
학교 가서. 농업, 농업 배웠죠. 농업 전공이죠. 통화. 통화에 그 농업
대학교 다녔어요. 통화농업대학. 3년제 전문학교. 내가 몇 년도에 학
교 갔는가 하면 88년도에 갔어요. 88년 입학해서 91년 졸업이네요.
대학 졸업 후에는 무슨 일을 했습니까?
그때 그래가지고 졸업하고 집에서 장사 좀 했어요. 그때 무슨 장사
였는가 하면, 이제 농협에 있는 약을. 농약 같은 거 이제 다른 데서
는 없는 데 갔다 주고. 산골 같은 데. 장사를 했어요. 고 한 반년 하
6장. 동북요리 식당의 자영업자 최위의 삶과 자녀교육
 
227
고 그러다가 이제 우리 엄마하고… 저 심양에 김치장사 하러 갔어요. 
심양에서 김치 장사. 못살았으니까. 그래서 그거를 여덟 달을 했어
요. 근데 도저히 못 하겠더라고요.
최근에 김치장사가 청도에는 굉장히 많다고 하던데 그때는 좀 일찍 
하신 편 아니에요?
그때는 좀 작은 장사지요. 지금처럼 이렇게 현대화된 그런 게 아니
고. 장사를 어떻게 했는고 하면, 어머니 직접 김치 담가가지고 밀착
을 해가지고요. 그걸 공장으로 크게 키워볼 수도 있을 건데, 당시에
는 뭐 그런 생각도 없었고. 그 다음에 우리 처갓집이 그때 연길에서 
식당을 했어요. 연길. 거기서 좀 도와주다가. 그래 와서 94년도에 내
가 출근했어요. 정식으로 농협에. 농협에는 94년부터 들어갔거든요. 
중간에 공백은 내가 왔다 갔다 하고.
농협에는 얼마나 근무를 하셨습니까?
93~4년인가 농협에 있다가. 1년. 후에는 이제… 그러니까 그게 저 
한국에서는 대출해주는…. 이제 옛날에는 뭐였는가 하면 이게 전부 
다 집체재산이잖아요. 공공재산이라고요. 옛날에는 촌, 향 집체재산
이잖아요. 개인소유가 안 됐잖아요. 옛날에 중국에. 그래서 이제 등
소평이 올라와서 개인물로 다 하라 했잖아요. 개혁 개방을 하면서요. 
근데 그때 이제 집체에 있는 모든 물건 집이고 뭐고 팔아야 될 거 
아니에요. 그 재산을 다 팔은 돈을 그걸 정부에서 우리가 그 회사에
서 그거를 맡아서.
그걸 중국말로 무엇이라 합니까? 
이게 이제 농민들 그러니까 이제 재산을 집체, 집체재산을 한개 전
문 조직이 이래 맡아서 관리를 해줘요. 그러면 이제 못사는 사람들 
돈 없을 때 대출을 해줘요. 이자를 좀 받고. 농사를 좀 지어가지고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28
 
돈을 갚고.
그걸 한국과 대비하면 농협에도 그 자금부서가 있거든요. 농협에서 
자금 관리하는 업무 그런 거라고 보면 됩니까?
그거하고는 조금 틀린 게 모든 재산이 집체재산이거든요. 원래 이제 
집체로 정부로 들어갔어요. 정부에서 통일로 광고를 했어요. 아니면 
돈 많은 사람들 다 가져가잖아요. 그래서 정부에서 없는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요. 그때 처음으로 시도한 거지요. 이자를 좀 받고 
해주지요.
근데 거기서 나름대로 쭉 근무했으면 지금 많이 좋았겠죠. 지금 있
었으면 좀 월급이나 직위가 많이 올라갔겠죠. 간부로 올라갔을 텐데. 
하지만 여~는 이제 내가 배운 게 농업이고. 우리 근로는 또 농업형
이잖아요. 그때 또 조선족 시장이 있었거든요. 설안시에서 제일 큰 
서기가 조선족이었거든요. 그때 했으면 막 올라갔죠.
농협에서 나오시게 된 이유가 있습니까?
하루 종일 사무실에만 앉아있기가 힘들데요. 나는 좀 돌아다니면서 
활동적인 일을 하고 싶었는데.
농협을 나온 후에는 무엇을 했습니까?
농협 나와서는 장춘에 갔다가. 장춘에 거~ 또 큰 식당이 있었어요. 
큰 식당 거기서 경비질 두 달 하다가 그것도 안 맞아 나와 버리고. 
그리고 집에서 이제 시장에 집을 지었어요. 그때 사람 찾아가 시장 
바닥에다. 쪼만하게 지었어요. 가게를. 그래가 그거 해가 거기서 이
제 순대도 해가 팔고 냉면도 팔고. 고향 설안시장에서요. 그리고 그
걸 이제 겨울에 하니까는 손이 상해요. 우리 집사람이 손이 다 불어
텄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그걸 그만 두고 집으로 갔어요. 후에 셋집 
맡은 데 거기서 이제 점원으로 들어가 배달했죠. 배달하고 그러다가 
6장. 동북요리 식당의 자영업자 최위의 삶과 자녀교육
 
229
냉면 가공장 했죠. 그때 이제 누가 임대한다 해가 그거를 임대해가
지고 그리고 냉면 가공장을 내가 8년을 했어요. 좀 오래 했지요. 8
년 하다가 한 6년 정도 되서 고향에서 그 다음에 식당을 했고요.
그 때 돈을 좀 버셨나요?
근데 쓴 게 더 많아요. 어떤 데 많이 썼냐면, 친구들이 다… 내 혼자 
고향에 있고 친구들은 밖에 다 일찍 나갔다 말이지. 놀러오면 한 달
씩 놀러오고. 마을에도 이제 집이 있으니까 전부 다 이제 점심 저녁
은 우리 집에서 같이 놀고먹고. 냉면 한 그릇 도와주고. 그 다음에 
식당을 하다가 그때 소주에 우리 친구가 한명 있어가 놀러갔더라고
요. 우리 친구들 다. 그래서 소주에 한번 갔다가 상해에 갔다가 북경
에 갔어요.
▮ 2002년 산동성 위해(威海) 진출, 동북요리 식당 운영
여기 위해(威海)에 내 처남이 있어요. 그리고 위해에 들어오니까 깨
끗하더라고요. ‘아~ 여기가 살 곳이구나.’ 그래가 이제 위해에다 장
사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큰 시내가 있고. 사는 곳은 위해가 좋
겠다고. 그래가 위해에다가 식당 잡어가 거기서부터 시작했어요.
위해시에는 언제 왔습니까?
2002년 왔습니다. 2002년 식당 해가지고 이듬해 사스(SAS) 맞아가
지고 거의 한 2년 동안 한 30만원 날리고. 그래가 2005년부터 장사 
잘되기 시작했어요. 여기 위해에서는 냉면하고 동북요리 위주로 했
어요. 그것하고 사스하고는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요? 사스 있으면 
사람들이 안다니잖아요. 통제를 했잖아요. 30만원을 날렸어요. 봉급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30
 
줘야 되지. 집세 내야 되지. 물세 내야지. 애 학교를 이제 거기서 고
향에서 댕겼지요. 큰 거 그때 이제 9살 위해 거기 학교에 돈 써가 
넣고. 거기 뭐. 돈 들어가는 게 정신이 없고.
2005년부터 재기를 하셨군요?
네. 2005년부터. 그래 하다가. 식당이 잘 된 이유는 맛 하나뿐이지. 
우리 집의 냉면수. 2009년에는 돈도 없었어. 다 빚 갚고. 2009년도
에 그때 이제 친구… 그니까 친구 형의 빈집 하나 남아서 세가 나가
있어서 그거를 내가 맡아가지고 식당 하나 더 하고. 2개를 운영했었
지요. 그러다가 2년 반 했어요. 2년 반하고. 우리 큰 딸이 올해 대학 
입학시험 치잖아요. 그래가 그 식당은 제가 작년 겨울에 팔고. 이제
는 원래 하던 거 10년 전에 하던 거 그거 하나만 붙들고 이제 아~
(아이) 공부시키고.
위해에도 식당이 있고 여기도 새로 하고 있는데…?
이거는 이제 내가 다른 사람들과 같이 해가지고. 이제 다른 사람 자
본하고 내 기술하고 합친 거죠. 이제 위해에 있는 식당은 내 아내가 
운영합니다. 딸도 거기서 공부를 하고 있고. 위해에 있죠.
▮ 2013년 청도(靑島) 진출, 동업으로 제2의 시도
이제 청도로 오셨는데 여기에다 식당을 하시게 된 이유가 있으신가요?
인구가 많잖아요. 소비층이 두텁고. 그리고 위해하고 그게 틀리지. 
소비하고 인구밀도가 여기 청도가 훨씬 높죠. 지금 여기서 식당을 
새로 하는데 있어서 여러 사람들과 같이 하는 것은… 혼자서 하면 
너무 힘들어요. 계속 자금이 딸릴 때 이때까지 내가 버텨내다가. 
6장. 동북요리 식당의 자영업자 최위의 삶과 자녀교육
 
231
리고 그 사이에 집도 위해에다 하나 뽑았지. 경제개발구. 자금이 안 
되잖아요. 그니까 혼자 하면 자금이 막히고 또 힘들고. 그래서 둘이 
서이 같이 조금 큰 거 해보자 한 거지요.
지금 이거는 세를 얼마에 맡은 거에요?
6만원. 1년에. 여기 2층까지 해서 273평입니다. 이제 이걸 3명하고 
하는데, 이제 돈 조금 많이 낸 사람도 있고 적게 낸 사람도 있고. 이
제 이익은 비율에 따라서 나누고. 동업(同業)이지요. 동업자들은 나
하고 친구들이죠. 고향이더라도 조금 떨어져있는 데 사는 친구지요. 
한국에선 불알친구라고 하는데. 고향친구. 불알친구. 길림에서 그런 
말 안 써요.
<쇠가마맛집>(2013.2)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32
 
위해에 있는 식당도 친구끼리 동업하신 겁니까?
그건 개인. 나 혼자 합니다. 여기 청도에는 집이 없어요. 여기는 왔
다 갔다 하면서 하죠. (함께 일하는 여성에 대해 동업자냐고 묻자) 
이모. 장모님 동생. 장모님 동생이니까 이모죠. 처이모. 이제 내가 
여기 며칠 있다가 저쪽에 며칠 있다가 그러죠. 좀은 힘이 들비요. 이
렇게 사업을 확장하는 거죠. 
여기서는 활동을 안 하시다가 처음으로 식당을 하시는데, 동업자인 
친구 분들은 여기에서 좀 활동하셨던 분들입니까?
친구들은 아니요. 아~ 여기에 하나는 있었어요. 여기 몇 년 있었고. 
그 친구를 통해서 필요한 정보 같은 건 자연스럽게 얻어요. 그거도 
있고. 내가 직접 여기 몇 번 왔었어요. 돌아보려고. 시장조사를 한 
거지요.
잘 모르는 지역에서 무언가 새로 이렇게 큰 식당을 한다는 것이 좀 
부담도 되셨을 테고. 또 식당을 개업하시면서 여러 가지 행정적인 
부분이거나 인간관계나 이런 것들도 아마 이 지역사람들과 좀 달랐
을 것 같은데 어려움들이 있지는 않은가요?
고향사람 도움을 봤죠. 설안향우회. 여기는 가입안했고. 우리는 위해
에 따로 있어요. 여기 청도에도 있고. 위해에는 작으니까 사람이 적
어요. 청도는 많고. 여기는 고향 분들이 많아요. 300명은 될 건데요. 
설안 회원 참가하는 사람이 한 300명 넘는다 하더라고요. 예전에. 
시장조사 하셨을 때 청도에 제2의 식당을 내면은 성공하겠다라는 무
언가 확신이 서야 이거를 열 거 아닙니까? 그런 정보 같은 거를 나
름대로 수집하셨을 건데요?
네. 남의 집 가서 물어도 보고 남의 묵는 것도 보고 그래 했지요.
6장. 동북요리 식당의 자영업자 최위의 삶과 자녀교육
 
233
▮ <쇠가마맛집>의 2가지 메뉴, 찜과 냉면
(솥에서 요리 중인 것을 가리키며) 지금 이 메뉴가 무엇입니까?
찜 종류입니까. 한국식이죠. 여~ 솥에서 나오는 음식 그대로. 가마
솥. 갈비찜, 잉어찜, 돼지갈비찜, 소갈비찜, 오리찜 등등. 아마 그 옛
날 그 시골에서 먹던 것이라 보면 돼요.
제가 사는 대구에 가면 동인동이라는 동(洞)이 있는데 ‘동인갈비찜’
이라 해가지고 양푼에다 담아가지고 내놓습니다. 20여 업소가 시내
에 밀집해 있는데 대구 오시면 그거 한번 맛 한 번 보세요.
네. 이건 철가마솥에다 요리하는 겁니다. 이거는 이 지역에선 좀 흔
하지 않은 음식입니다. 이렇게 솥으로 걸어놓고 하는 건 없죠. 예전
에 한국에서도 시골 시장통 있잖아요. 큰 가마솥에 놓고 푹~ 고와가
지고 그걸 해가 국밥주고 고기 잘라주고 그렇게 했다 하던데요. 그
런 개념입니다. 그거 연변에도 옛날에 할아버지 사시고 그럴 때 그
런 게 있었디고 합니다. 시장통에. 어릴 때는 저렇게 솥 걸어놓고 하
는 게 많이 있었지요. 장작이 떼고.
건물 안에 가마솥이 있는 게 좀 특이하네요?
고거를 이제 한다고 벽을 뚫어가 솥이 보여요. 가마솥이 여섯 개죠. 
갈비찜, 오리찜 등 여러 가지에요. 중국에 음식이 한 가지가 아니에
요. 한 가지로는 승부를 보기 어렵습니다. 좀 힘듭니다.  한 가지 성
공한 건 순대국밥집. 이건 거의 성공을 했어요.
이 근처에 저희들이 보니까 한국 음식점이 굉장히 많더라고요?
많아요. 한국 분들이 와서 식당 운영하는 경우 많아요. 이거 하고 우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34
 
리 냉면 하죠. 두 개 가지고 승부 걸고. 냉면은 주로 여름 위주로 하
고. 여름에 많이 먹죠. 겨울에는 찜 위주로 따뜻한 거를 하고. 사시
사철 메뉴는 돌아오지요. 여~ 주변에는 냉면은 더러 있고, 이런 찜 
메뉴도 있는데요. 맵게 하고. 옛날에 할매들이 하는 이런 음식을 하
는 데는 거의 없어요.
전통식 쇠가마(2013.2)
이거는 길림성의 옛날 전통 개념이지요. 맛도 그렇고. 1차는 맛이 
중요한데요. 맛은 주로 제가 맞춥니다. 집에서 해 먹던 거니까요. 어
느 정도는 알죠. 옛날부터 가정에서 쓰던 걸 상품화 한 거지요.
음식 조리하는 데 조언을 해주시는 분이 있습니까?
경리가. 내가 왔다 갔다 하니까 어떨 때는 내가 여기 가게에 없잖아
요. 그럼 주로 이제 경리가 맛을 내야 되요. 경리. 내 이모님 기술잡
6장. 동북요리 식당의 자영업자 최위의 삶과 자녀교육
 
235
니다. 이제 내가 다 배워주고. 내 아내의 고향은 맹 우리 설안. 고향 
사람이지요. 위해에 생활하다가 여기도 한번 내봐야 되겠다. 청도를 
타킷으로 잡은 이유가 있겠죠. 장사를 할라면 사람이 많은 곳을 가
야지. 그게 중요하지 다른 건 없어요. 사람 많은 속에다가. 그리고 
이제 기후라든가 남방 쪽으로 가면 우리가 적응이 잘 안 돼요. 기후. 
돈은 더 많이 벌어요. 남방이. 그리고 청도 여~는 뭐 우리 하는 음
식이 이 조선족들하고 동북에 한족들한텐 입맛이 맞으니까. 청도에 
조선족 사람들이 많잖아요. 동북사람들이. 그래가지고 여기 청양으로 
왔지요.
▮ 딸 2명 생산과 교육, 언어 문제
자녀는 몇입니까?
딸 둘. 큰 거 하나는 이제 올해 19살. 이제 대학 입학시험 칩니다. 
작은 거는 8살. 차이가 많이 나죠. 11살. 늦둥이죠. 안 낳을라 하다
가 형제가 있으면 좋잖아요. 나이 차이가 좀 많지만, 하나면 좀 외롭
잖아요. 그래서 이제.
딸만 둘인데 아들에 대한 애착은 없습니까?
원래 없어요. 우리가 하나를. 원래는 하나. 우리 부모님들도 하나만 
잘 키워라 계속 그랬어요. 이제 후에는 조금 나이 먹고 좀 같이 형
제를 하나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우리가 앞으로 없어도 지
네 형제끼리 서로 도울 수도 있고. 지금 살기가 좀 힘들잖아요. 경쟁
이 심하고, 서로 등치고 간 빼 먹고 하는 사회에 그래도 형제라도 
있으면 의탁이 되고. 그래가지고 하나 더 낳았지요. 아들 뭐 딸 그런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36
 
개념 없어요.
학교는 어디 다닙니까? 엄마가 데리고 있습니까?
예. 학교는 위해에서 다녀요. 하나는 위해1중. 올해 대학 시험 칩니
다. 위해에 조선학교는 없어요. 한인학교는 있고.
아이들이 한국말 잘 합니까?
어렸을 때 고향에서 조선족학교 2학년 첫 학기 배우고 여기에 위해
에서 중국학교 그대로 2학년 들어가서 배웠다고요. 그래서 한국말은 
잘해요. 중국말은 더 잘하고. 작은 거는 이제 우리가 집에서는 계속 
한국말 하고. 밖에는 학교 가서는 한국말 하면 못 알아들으니까 중
국말 해야 되고. 집에서는 계속 한국말 쓰고.
집에서는 계속 한국말 쓰신다고요?
그러다가 이제 습관이 안 되니까 중국말이 편해요. 한 가지를 말하
면 간단하게 한마디만 하는데 한국말은 이래 막…. 3가지 4가지로 
존댓말도 하니까 좀 어렵죠. 근데 얘들이 계속 중국말을 한다고요. 
습관적으로. 그럼 이제 한 번씩 좀 욕 얻어먹고.
가정에서는 한국말을 하도록 하네요?
글은 쓸 줄 몰라도 말은 할 줄은 알아야죠. 글은 이제 크면 이제 배
우면 인터넷을 해가 배우기 좋으니까 말을 할 줄 알아야 글을 배울 
수 있으니까요.
사장님 댁은 좀 낫네요. 어떤 집에는 그런 문제 때문에 아예 집에서
도 어린애한테 그냥 중국말로 해버린다고 하더라고요?
그렇죠. 편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이제 영영 한국말 못하게 되는 
거죠. 근데 이제 어릴 때요. 집에서 계속 한국말 하고 밖에 나가서 
중국말 하던 애들은 학교 가서 이해하는 게 조금 더 늦어요. 학교 
선생들이 그래요. 이제 조금씩 올라가서 나이 좀 10살씩 되면 괜찮
6장. 동북요리 식당의 자영업자 최위의 삶과 자녀교육
 
237
은데 고 사이에 젤 처음에 학교 가서 힘들다고 해요. 중요한 시기죠. 
그래서 중국선생들은 애들한테 “집에서 한국 말하지 말고 중국말해
라”고 한대요. 애들이 좀 힘들어 한다 그러더라고요.
그런 선택은 특히 아이한테 좀 중요한 시점이네요? 선생님 말을 수
용하는 가정도 있죠? 
그렇죠. 그런데 이제 어떤 분들은 글을 쓸 때 중국에서는 한국말들
이 필요가 없잖아요. 나가면 한국말로 알아듣기도 힘들고 물건 사고
도 중국말로 해야 되고. 그래서 중국말로 완전하게 하게 하지요.
그런 문제 때문에 사장님이 좀 고민도 하셨겠습니다?
근데 뭐 내 욕심에도 그렇게 조선족 우리 언어를 모르면 좀 배워서 
하고 그러면 안 좋겠나 싶어요. 다 잊어버리면 뭐 중국 사람하고 다
른 게 없죠. 겉만 조선족이지 실제 속은 중국 사람하고 같은 거죠.
그런 생각이라서 마음이 놓이는데요. 주변에 보면 사장님과 같이 생
각 안 하는 분도 계시죠? 조선족 가정에서요?
아뇨. 그런 사람 적어요. 근데 애들이 말을 안 들어요. 애들이. 그리
고 요즘에는 우리는 이제 외국에 한 번도 안 나가고 여기서 장사하
고 있었잖아요. 가게(식당) 하고 있으니. 한국에 이제 그 젊은 부모
들 한국 가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집에서 애를 보잖아요. 그러면 돈
을 벌어서 청도나 위해에서 집을 사고. 그럼 학교는 중국학교 다니
지, 조선학교 없잖아요. 그러면 애들이 학교 갔다 집에 오면 중국말
을 해요. 편하니까. 그러면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얘기를 해요. 한국
말로 하라고. 애들이 말을 안 들어요. 부모 말 듣지, 할배 말 할매 
말을 안 들어요. 그래서 개들은 완전히 중국 사람이 되는 거죠.
그런 사례가 더러 있죠?
그렇게 되죠. 다 한국말 하라 하는데, 어떤 사람은 조건이 안 되고.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38
 
[한국 등으로 돈 벌러] 밖에 나가면 부모가 지 자식을 못 챙겨주고 
하니까. 할매 할배 옆에 있으니까. 그게 애들이 말을 안 들어요.
▮ 한국 방문의 로망
예전에는 한국 붐이 막 불어날 때 그런 부모들이 외국에 많이 나가
지 않았습니까? 요즘도 많이 나가는 추세입니까?
요즘은 모르겠어요. 나는 여기 대해서 크게 뭐 알아보지도 않고. 그
리고 나는 항상 나갈 생각을 안했으니까. 어떻게 나가고 그런 걸 몰
라요.
왜 한국에는 관심을 안 가지셨어요? 나도 나가서 돌아봐야지 이런 
생각을요?
옛날에 정말 그 말 하니까 그거 생각난다. 옛날에 출근하면서 그때 
나도 공무원직 했으니까. 그거 하면서 한국 나가면 그것도 옛날에 
한 이십 몇 년 전에는 돈이 됐잖아요. 중국 봉급 300원 받았는데, 
한국 가면 하루 일당이 300원이잖아요. 그래 되잖아요. 그래가 그때 
하겠다고 여러 군데 알아봤어요. 스물 몇 살 때. 근데 이제 그때 이
제 우리 집사람이 딱 임신했다 하더라고. 그래서 ‘아~ 임신하면 그
럼 내 자식 내 키우고 내가 같이 있어야지.’ 그러다 안 갔어요. 그런 
생각에 장사했어요. 좀 가정적인 생각이랄까요? 하하하!
한 번도 안나가본데 대해 미련을 가진 분들이 적지 않거든요?
그렇죠. 그렇더라고요. 그럼 언제 기회 되면 놀러갈 수 있고. 사실 
저도 뭐 언제라도 한번 놀러가겠다고 여권을 지금 3번이나 바꿨어
요. 한 번도 못 가는 게 연장은 안 되데요. 5년 되면 또다시 연장해
6장. 동북요리 식당의 자영업자 최위의 삶과 자녀교육
 
239
야 되니까. 원래는 한번 갔다 오면 연장이 되잖아요. 우리는 안 나오
니까 여권을 폐기시키죠. 폐기되고 새로 이제 수속을 하고. 지금도 
또 하나 있는데 친구들끼리 다 해놨는데 언제 기회 되면 한번 놀러
가야지. 그런데도 못가고.
3번씩이나 여권 만들었으니 한국에 대한 열망은 상당히 가지고 계시
네요?
계속 언제나 가보자 하고 있지요. 근데 이제 나는 거기 고향에 가고 
싶었어요. 한국 경상도 거창. 거창 거기는 상당히 자연이 잘 보존된 
곳이라던데요. 거창 그게 와룡리지요. 무슨 면이라 하든가? 거창 신
원면. 그 옛날에 할아버지 알려주더라고요. 고향 거기 이제 마(麻)가 
많이 난댔죠. 와룡리.
그리고 이제 저 어디 가고 싶은가 하면 저기 저 제주도? 그리고 부
산 해운대. 내가 말은 많이 듣고 티브이도 좀 봤어요. 해운대. 해녀
들이 내려가서 건지는 해물 그거 썰어가지고 그거 딱 보고 싶고. 전
복. 해삼. 제주도에서 그런 거 이제 좀 먹고 싶은데. 부산에서 내 아
는 형님분이 있는데 중국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장사를 하다 오면 
얘기하고 얘기하고 해요. 그래가지고 부산 해운대가 어떻게 했다고 
해요. 그리고 티브이 보면 해녀들 제주도에 내려가서 물질도 하대요. 
근데 그게 비쌀 겁니다. 곧바로 잡아와서 거기서 바로 회를 먹으면 
맛이 틀리잖아요. 싱싱하고. 자연산 회니까.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40
 
연구진과 함께 한 최위(2013.2. 우측 두 번째)
우리는 위해에서 친구들하고 낚시하러 차 몰고 멀리 나가요. 나가서 
이제 배타고 들어가서 낚시하고 나와서. 내가 낚시 취미가 좀 있어
요. 길림 바닷가에 해녀 이런 거 없어요. 길림에는 이제 연변 훈춘 
쪽에가 바다가 있죠. 근데 그거는 막혔잖아요. 그게 러시아 막혔거든
요. 내려가다가. 어떻게 보면 내륙 지방이죠. 15키로미터를 러시아하
고 북한하고 두만강 하류를 접했으니까. 내륙이죠.
▮ 큰딸의 태권도 수련
딸래미가 우리 큰딸이 한국에 갔다 왔어요. 학생 교류로 다녀온 게 
아니고요. 어릴 때 아홉 살 쯤에 태권도 배워서. 태권도는 조선족 전
6장. 동북요리 식당의 자영업자 최위의 삶과 자녀교육
 
241
통 무술 아닙니까. 그 몇 년도던가? 요 한 3년 가을 초중 때 갔나? 
세계태권도시합 가 가지고요. 
딸은 태권도를 [산동성] 여기서 했습니까? 아니면 저기 고향에서?
아니요. 위해에 와서 몇 년 다녔어요. 애가 몇 년 했나? 아홉 살 때
부터 해가 16살 때까지 17살 때까지 했나? 그리고 이제 고중에 올
라가니까 학업이 바쁘니까 그래가 못했어요. 품도 땄어요. 검은 띠 
있습니다. 3단. 꽤 됩니다. 검은띠 1단에서 3단까지 갈려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위해시 운동대회 때 여자 선수로 참가했어요. 전문으로 
태권도 하는 학교가 있어요. 체육학교가 있어요. 체육학교서 1, 2등
이 나오고, 야~는 이제 전문이 아니잖아요. 야~는 3등 했고.
실력이 대단한데, 태권도를 배우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모르겠어요. 태권도학교 다니면서 태권도 도장 있다니까 이제 지 뭐 
어디서 봤는지 계속 그거 하겠다고 했어요. 본인이. 태권도는 한국에 
그거 아닙니까? 국기(國技). 전통의 무술인데 그 뭐 위해 같은 데도 
태권도학원이 몇 개 있습니다. 옛날엔 잘 됐어요. 지금은 경기도 안 
좋고 그래서 한국 분들이 많이 빠졌고. 그리고 지금 태권도 도장 운
영하는 게 옛날처럼 그렇게 성하지 못합니다. 옛날에는 뭐 한 번씩 
하면 몇 십 명씩 됐잖아요. 많았지요. 태권도는 또 올림픽 종목이기
도 하고. 이제 한국에서 태권도 전문 사범들 나와서 점수 매겨서 이
제 한국에서 도장찍어가지고 태권도 단수 딸라고.
(연변대학교의 공동연구자가 부연하며) 우리 연변대학교는 전문 태
권도관이 있습니다. 대학 안에. 그래가 전문 교수도 있고 해마다 중
국 전국태권도대회를 또 개최해요. 연변에서. 또 한국과 교류도 하
고. 연길 시내에서도 가끔씩 간판을 보거든요. 한국에서 사범 오셔서 
하기도 하고. 태권도 체육대학 안에도 학과가 있겠네요. 전문태권도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42
 
관 했습니다. 태권도관.
따님이 올해 대학시험 친다 하던데, 문과로 다닙니까? 아니면 이과
요?
문과. 대학을 어떤 쪽으로 지원하려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지는 남동
쪽으로 큰 시내 쪽으로 들어가겠다고 하던데. 근데 아직도 그 개념
이 없잖아요. 올해 대학 시험 쳐요. 6월달에. 태권도 과는 아니고요. 
무슨 경제학과 뭐 좀 해보겠다 하는데 모르겠어요. 지가 이제 점수 
나오는 거 보고 학교를 선택해야 되니까 전공은 점수에 따라서 학교
를 선택해야 합니다.
▮ 청도에서의 식당 운영 전략
청도시에서 이제 식당을 얼마 전에 개업하셨지 않습니까? 그럼 여기
서 식당으로서 자리를 잡으셔야 할 텐데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십니
까? 여기서 승부 걸어서 하겠다 어떤 전략 같은 거는요?
그런 결심이 있고 전략이라는 거는 맛으로 승부해야지 다른 거 없어
요. 맛이죠. 식당 사업은 그 외에 다른 거 없어요. 첫째는 맛입니다. 
맛없으면 아무리 잘해놔도 안 먹는데. 지금은 우리가 식당을 열어놓
고 오는 걸 기다리면 안돼요. 지금은. 내가 이제 식당을 여럿 해오
고. 동북에서도 식당을 했어요. 그래 했는데 제일 중요한 게 내가 소
비층을 선택을 합니다. 그래서 메뉴가 나옵니다. 그러면 소비층이 하
나 둘 셋  있지만 나는 이 중간 두 개 소비층을 하겠다 그러면 이 
소비층에 소비할 수 있는 조건, 입맛 여기다 맞차가지고. 그리고 이 
두 개는 없애버리고.
6장. 동북요리 식당의 자영업자 최위의 삶과 자녀교육
 
243
지금 식당은 주요 고객을 어떻게 설정하고 계십니까? 
조선족하고 중국인. 동북 입맛에 맞는 중국인. 그리고 연령층은 좀 
낮게. 지금 젊은이들이 사업하고 스트레스 받으니까 자극성 있는 음
식 많이 찾죠. 맵게 해서 정신을 잃는 그런 쪽으로. 이게 이제 나이 
많은 고객은 너무 맵게 못 먹지.
방금 말씀하신 그런 전략들이 어느 정도 먹혀서 자리 잡기까지는 대
략 어느 기간 정도로 보십니까?
기간은 이제 올해 7월 달 되면 승부 볼 것 같은데요. 뭔가 나는 지
금 이 맛으로 승부를 안내도 여름 되면 어차피 냉면을 먹잖아요. 냉
면에서 승부를 볼 수 있으니까. 그때도 사람 많고. 그 다음에 사람이 
들어와야 메뉴를 볼 수 있으니까. 그때 먹어보고 맛이 어떤지 판단
하겠죠. 그 집에서 먹어보고 입소문. 먹어본 사람이 “아~ 그 집에 
서비스도 좋고 맛도 있고....” 그러면 이걸 소문을 내잖아요. 그럼 멀
리서도 찾아오잖아요. 찾아오거든요. 그럼 그 정도 되면은 상당히 성
공했다고 봐야겠죠. 첫째는 맛이겠죠. 맛이 제일 중요하지. 여름음식
인데 맛이 없으면 안 먹지 뭐.
맛의 노하우 비법. 예를 들어, 갈비탕 이 비법은 잘 얘기를 안 한다 
하더라고요. 영업비밀이라고. 저희는 뭐 경쟁이 아니니까 사장님 비
법 말씀해주셔도 되지 않을까요?
비법 없어요. 집에서 해먹던 음식인데. 이 맛을 개발하느라고 특별히 
신경 쓰고 그런 거 별로 없어요. 이제 옛날에 저 엄마가 하던 음식
이니까. 우리가 어릴 때부터 먹고 컸으니까 입에 저절로 배이니까. 
이제 딱 그 맛 내버리면 되지요.
그전에 여기 거주도 안 하셨고, 위해에 또 기존의 식당이 있고 가족
도 위해에 있는데 왔다 갔다 합니까?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44
 
예. 왔다 갔다 하는데, 매일 출퇴근은 못하고. 차 몰고 오면 빠르면 
2시간 반 보통 3시간 조금 안되게. 빨리 밟으면 한 140씩 130씩 밟
으면 2시간 반. 그럼 막 카메라 막 찍히고.
위해에서 영업하는 식당은 주 메뉴가 뭣입니까?
동북요리. 거기도 다 있어요. 그것도 있고. 그런데 이제 전문적으로 
전문으로 안하니까 소문이 이것보다 못 날 수도 있어요. 내 아내가 
혼자서 직원들 데리고 합니다. 주방장은 따로 있죠. 볶음해주고 그런 
거 다 따로. 위해에서도 냉면 하죠. 냉면은 최곤데. 그래서 뭔가 좀 
더 넓은 쪽으로 온 거죠. 왜냐면은 계속 하던 거니까 특미가 있죠. 
면도 직접 하니까.
이런 업을 하시는 분은 모임 같은 데 많이 다니면서 사회관계를 형
성함으로써 하나의 전략이지 않습니까?
오픈할 때 너무 급하게 해서 여긴 이제 고향 분들은 안 불렀어요. 
다음에 언제 조금 조금씩, 몇 명씩 불러야죠. 너무 한 번에 음식 다 
차리기도 어렵고. 위해에서 친구들 한 열 몇이 오면 여기에 동생들 
좀 있고 그래 간편하게 개업했어요. 
여기가 타향이지 않습니까? 또 소수민족인 조선족이고 그런 측면에
서 나름대로 어떤 대비 전략들을 마련하셨는지요?
맛이죠. 여기 지금 한족들이 매운 걸 이제 젊은 애들 잘 먹어요. 지
금은 좋아해요. 옛날에 그 산동(山東) 애들은 냉면을 안 먹었어요. 
그리고 맥주 마셔도 온도, 여름에 그대로 뜻뜻하게 해서. 차운 거 안
마셨죠. 한족들도 저 한국 분들하고 사업을 하잖아요. 그럼 이제 한
국 사람들 하는 거 조금씩 조금씩 이래 하더마는 그게 이제…. 
바뀝니까?
예. 바뀌지요. 지금 한족들이 그래 이제 그래도 좀 위에 쪽에 보면 
6장. 동북요리 식당의 자영업자 최위의 삶과 자녀교육
 
245
절반 이상이 아직도 찬 맥주를 먹어요. 지금 냉면은 우리가 중학교 
근처에 있었어요. 그래가지고 거기서 애들이 점심에 밥 먹을 때 우
리집 와서… 여름 덥잖아요. 한 그릇 먹고 한 그릇 먹고 그게 이제 
입맛에 들어서 부모들 데려오고. 부모가 맛들이고 친구들 데려오고 
그래가 지금 중국 사람들이 많이 와요. 
이런 거 어떻게 생각을 했어요? 찬 음식 먹던 민족한테 이제는 냉면
을 먹이고요?
그리고 해변가에서 냉면 장사가 진짜 힘들어요. 처음에 왜 그냐면 
여름에 아무리 더워도 바닷가 물 탁 치면 선선하잖아요. 그럼 냉면 
생각이 싹 없어져요. 그래서 위해에 ‘이조곰탕’이 이름 남기고 했어
요. 골목길에 바람이 새갔고 거까지 가면 선들선들하면 오싹해져요. 
거 골목이 이상해요. 자리가 진짜 좋아요. 냉면은 그 자리 가면 좀 
안되죠.
현재 식당을 지금 위치, 지점에 선택하신 이유가 있으십니까?
여기는 저쪽에보다 자리는 못해요. 저기 위에보다 여기서 한 200미
터만 더 가도 자리는 굉장히 좋거든요. 그리고 저쪽으로 2키로 들어
가면 전부 다 조선족들 많아요. 그리고 한국 분들도 많고. 그런데 여
기 선택한 거는 따로 떨어졌고 이런 방식은 맛있으면 찾아서 온다는 
거죠. 그 다음에 한 개는 주차장이 넓어요. 주차가 여기는 무료입니
다. 여기는 차가 한 열 몇 대씩 들어오니까. 앞으로는 주차가 안 되
면 밥 먹으려 안 옵니다. 주차가 잘되니까. 안쪽으로는 주차가 안 되
더라고요. 내가 많이 찾아봤어요. 그리고 집이 너무 나지막하고 좀 
그래요.
위해 거기는 한국 분들이 많이 안 사십니까?
옛날에는 많이 있었어요. 지금은 많이 빠졌어요. 그것도 이제 경기와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46
 
관련되죠. 경기가 2008년부터 크게 안 좋았잖아요. 조선족은 얼마나 
되는지 잘 모르겠어요. 조선족 모임 같은 것도 있죠. 우리는 이제 우
리 저기 설안조선족협회가 따로 있고. 그리고 뭐 오상[시] 분들도 
흑룡강 쪽으로 많이 있죠.
한국 사람이 많이 잘 먹어가지고 중국 사람들이 따라함으로써 맛을 
바꾸는 효과가 있던데, 위해에서는 그런 효과가 없습니까? 한국 사
람들이 영향을 미친 부분은요?
있지요. 노래방문화. 지금 한족들이 전부 다 살면서 그리고 이제 조
선족들은 노래방에 안가고 옛날에는 잘 갔잖아요. 지금은 이제 먹고 
가서 샤워하고 바람 쐬고 집에 가서 그게 제일 편하지. 거기 가면 
뭐 술 먹다 오고 힘들기만 하지. 술 먹기 무서워요. 진짜 할 수 없어
가 사업 때문에 먹는 사람은 많지.
조선족사회의 술 문화가 한국 따라한 거죠?
하이튼 피가 그런 모양이에요. 전 세계 먹는장사 인구비례 따라서 
한국이 제일 잘 되는 것 같애요. 나도 옛날에는 술 많이 마셨죠. 근
데 이제 뭐가 좋은가 하면 위해에 한족 중국 사람들은 한국 문화에 
이제 그쪽으로 음악, 음식, 그 다음에 이거 복장. 이런 문화를 많이 
받았어요. 이게 한류라고 하든가요? 중국 사람들 지금 저 불고기 구
이도 좋아요.
7장. 조선족 청년 김호원의 프랜차이즈 헤어샵 
개설의 꿈
김호원(2013.2)
7장. 조선족 청년 김호원의 프랜차이즈 헤어샵 개설의 꿈
 
249
■ 김호원 연보
- 1983년 : 연변자치주 연길시 하남구 출생
- 1999년 : 고향에서 초ㆍ중ㆍ고 졸업
- 1999년 : 산동성 칭다오 이주, 2년간 식당과 주점 근무 
- 2002년 : 칭다오 소재 한국인 미용실 7년 근무
- 2009년 : 브랜드 ‘이가자미용실’ 근무
- 2011년 : 쟈민헤어샵 독립 개원
- 2014년 : 현재 미용실 운영 
▮ 할아버지 때 연변 이주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김호원(金浩元)이요.
몇 년생이십니까?
네. 1983년생이요. 올해 서른이죠. 여기 청양구(城陽區)에 거주하고
요. 이 헤어샵은 제가 운영합니다. 간판에 ‘김경민헤어샵’ 되어 있는 
거는… 이 자리에 처음에는… 그걸로 했거든요. 지금은 다른 걸로 고
쳤어요. (2명의 직원들을 가리키며) 저분들은 직원입니다. 저하고 
직원 두 명이 일하죠. 여기 두 분은 나이가 모두 스물일곱. 고향사람
은 아니지만, 흑룡강성과 요녕성 출신이에요. 모두 조선족이고요. 채
용을 했죠.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50
 
어떻게 청도로 오시게 되었습니까?
청도에요? 여기는 이제 혼자 왔고. 그런데 어릴 때는 어디 있었냐 
하면 동북에… 이제 동북쪽에…. 동북3성. 고향이 동북쪽이지요.
태어나신 곳은 어디세요? 
연변이에요. 연변자치주 연길이레요, 연길시죠. 그 다음에는 하남이
요. 하남구요. 제 아버지도 고향이 여기입니다. 그렇다고 봐야죠. 할
아버지 고향도 연길인 걸로 알고 있는데…. 할아버지는 못 봤어요. 
아버지한테 얘기 들은 것도 없고요. 고향. 그냥 그쪽에 계셨다고만 
그냥 그렇게 알고 있었어요. 이제 할아버지 때부터요. 처음에 동북에 
온 게 할아버지 그 윗대는 아닐 꺼에요. 할아버지 때에 오신 걸 꺼
에요. 할아버지 때 한국에서. 
할아버지 지금 살아 계십니까?
안계시죠. 돌아가시고. 할아버지 얼굴도 못 봤어요. 할머니는 봤고. 
아버지한테 그런 이야기 들은 것도 없어요. 할머니로부터도요. 할아
버지가 언제 동북으로 가셨는지? 그리고 뭘 하러 가셨는지에 대해서
요. 글쎄. 그것까진 저희도 잘 모르겠어요. 그런 이야기를 전혀 못 
들어서요.
아마 저희들이 생각하기에는 … 할아버지 시대 일제 강점기잖아요? 
조선이 1910년부터 36년 동안 일본 식민지를 받았잖아요. 그때 뭐 
강제로라든가 혹은 살기 위해서 동북으로 이주를 많이 했겠죠. 그래
가 인제 오늘날 동북3성에 조선인들이 정착한 걸로 그렇게 알고 있
죠. 아마 할아버지도 당시 그렇게 되지 않았었는가 싶어요. 지금 할
머니는 살아 계세요.
할아버지는 돌아 가셨고 할머니는 연세가 얼마쯤 될까요? 
일흔이요. 70세. 할아버지도 살아계신다면 칠십대 정도 되실 텐데 
7장. 조선족 청년 김호원의 프랜차이즈 헤어샵 개설의 꿈
 
251
제가 얼굴조차 모르므로 너무 일찍 돌아가셨는가 봐요. 일찍요. 그러
니까 못 보셨죠. 제가 지금 서른 살이잖아요. 할아버지 얼굴을 모르
니까. 할아버지 살아계시면 한 72세나 75세 될 꺼잖아요? 일찍 돌아
가셨지요.
기회 되면 동북 이주과정에 대해 할머니한테 여쭤보세요?
할아버지가 어떻게 동북으로 나오셨는지는 잘 모르겠고요. 아버지한
테 여쭤보면 할아버지가 어떻게 언제 나왔는지 좀 얘기가 조금 나올 
거 같네요. 뭐 대화를 거기에 대해서 아버지 하고는 안 해봤으니까
요. 다음에 만나면 한번 해봐야겠어요. 아마 할머니는 잘 아실 것 같
네요. 할머니는 올해 칠십 세이신데, 연길에 계십니다. 아버지가 장
남이시니까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어요.
아버지 형제는 몇 분이나 되세요?
다섯명이요. 아버지는 둘째요. 아버지 형제자매 중에 맨 맏이는 고모
님이고요. 큰 고모. 그 다음에는 저희 아버지고요. 두 번째. 아버지
가 장남이죠. 그 다음에 또 삼촌 있고요. 그리고 또 남자 동생 한명. 
또 있어요. 그러고 작은고모. 마지막입니다. 큰고모. 아버지. 큰삼촌. 
작은삼촌. 막내 고모.
인제 사장님 대(代)로 내려오면, 형제자매는 몇이십니까?
둘이요. 두 명. 제가 장남입니다. 여동생이 있어요. 스물일곱.
아버지는 몇 살 되세요?
쉰다섯. 오십 오세. 어머니는 오십 넷. 한 살 차이죠.  
결혼을 하셨겠네요?
아직 안했습니다. 뭐 당장 계획은 없지만 해야죠. 할 때 되면…. 여
자 친구는 있습니다.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52
 
▮ 연길에서 고교 졸업 직후 청도(靑島) 이주 
연변… 연길에서 태어나셔서 학교 공부를 비롯한 성장과정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어릴 때 기억 뭐… 소학교 다녔죠. 소학교는 조선족학교죠. 다니던 
학교는 아마 없어졌을 꺼에요. 이제는 뭐 거 학생도 적고 하니까 뭐. 
학교들이 적어지죠. 여기서 소학교 나오고 중학교 나오고, 고등학교
까지도요. 연길에서 다녔습니다. 대학은 안 나왔어요. 한국에서는 초
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요렇게 나가지만, 여기서는 소학교 다음에 
초중학교, 고중학교 등으로 나가죠. 초중. 고중.
고등학교 졸업을 하면 나이가 몇 살 됩니까?
열여덟, 열아홉. 저는 열여덟에 졸업했어요. 그러면 1년 빠르지요. 
소학교엔 일곱 살에 1학년 들어갔으니까. 연길에서는 고중 마치고 
대학도 가죠. 저는 고중 과정까지는 공부하느라고 뭐 특별한 다른 
일을 하지는 않고. 저는 뭐 대학 공부를 하기 싫어 나온 거에요.
다른 도시도 많은데, 청도를 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뭐 이제 한국인들도 많고 그래서 일단은 언어가 통하니까. 이제 뭐 
쉽게 어떤 돈 벌 수 있는 것도 많고 , 일단 언어가 통하고 … 그러니
까 뭐 많이 청도 온 거고.
몇 년도에 오신 거에요? 
1999년도에. 일단 열여덟 살에 나왔어요. 학교 나… 이제 안다니고 
바로 이제 나왔어요. 고중 졸업과 동시에 네 바로. 그때 누구하고 같
이 나온 게 아니라 혼자 나왔어요. 연길에 청도까지 오는데 시간이 
7장. 조선족 청년 김호원의 프랜차이즈 헤어샵 개설의 꿈
 
253
만만치 않다고 하더라고요. 이틀, 3일 기차 타고 3일 와요. 제가 옛
날에 여기 올 때요.
연길에서 어떤 경로로 청도까지 들어오셨어요?
기차타고 심양까지 와서. 심양에서 이제 청도로 온 거죠. 먼저 연길
에서 심양까지 와서. 그 다음에… 청도. 심양에서 이제 갈아타요. 몇 
시간 걸리는가 하면 글쎄 한 3일 걸리는 걸로 알고 있는데. 지금. 3
일. 비행기는 많이 안 걸리죠. 비행기는 한 시간 반 정도.
오실 때 가족들이 어떻게 하던가요?
“니 돈 벌러 그렇게 멀리 가나?” 이렇게 하면서 반대를 하시죠. 허허
허! 여기까지 온 거는 큰 뜻을 품고 왔어요. 하여튼 뭐 돈 벌기 위
해서요. 당시 고중 졸업하면 이발. 미용 기능이 없지 않습니까. 바로 
이 사업을 못하죠. 배워야죠.
▮ 2년간 식당 서빙도 하고, 주점 웨이터도 하고
뭐 다른 일 처음에는 하다가. 그리고 우연하게 기회가 있어 가꼬 미
용실에 출근하면서 이제 시작… 미용을 시작 한 거에요.
처음에는 어떤 일 하신 거에요?
뭐 서빙도 하고… 음~ 뭐 여러 가지 다 했죠. 이제 웨이터도 하고. 
웨이터는 술집도 있고 호텔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죠. 저는 술집이
죠. 그리 해가 돈을 모은 거죠.
청도 여기 정착자금이랄까? 이런 거 아버지가 조금 지원해준 거 없
어요?
뭐 옛날에 그런 게 없죠. 그냥. 돈 집에서 지원 안 받고. 그냥 몸만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54
 
나온 거에요, 청도 여기 처음 와갔고 처음에는 식당 서빙했어요. 조
선족 식당에서요. 술집 웨이터도 다 조선족이 운영하는 술집이었습
니다.
한족들이 운영하는 술집도 있었을 텐데, 조선족 식당이라든가 술집
에 취업을 하신 이유라도 있습니까?
일단 조선족 분들이 운영하는 데는 한국인들이 많이 다니고 하니까 
이제 직원들도 조선인들을 이제 많이 구하죠. 이제 월급도 조금 더 
많이 주면서 구하죠. 돈은 많이 못 벌었어요. 당시 식당 서빙하고 술
집 웨이터하면서 한 달에 월급 받은 거는… 뭐 식당에는 월급이 적
죠.
얼마쯤 받았습니까?
그때 한 8백원. 8백원에서 1천원 정도. 그 다음에 웨이터 할 때는 
뭐 3천원, 4천원 정도. 많이 올랐죠. 식당하고 술집은 일한 시간이 
또 조금 다르죠. 이게. 식당은 주로 이제 낮 시간에 하고, 웨이터는 
이제 저녁에 밤까지 일하고. 저녁부터 새벽까지.
이제 자본을 축적하는 과정인데 이 두 가지 일을 그러면 몇 년쯤 하
셨어요? 
2년. 2년 좀 안되게 했어요. 두 가지 다요. 2년 동안 돈을 조금… 못 
모았어요. 돈 못 모으고. 당장 미용실을 채릴 수 없죠. 기술을 익혀
야 되죠. 그 다음에는 미용실에 들어갔죠.
▮ 한국인 미용실 7년 근무
그러고 이제 미용실. 청도 시내에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미용실로요. 
7장. 조선족 청년 김호원의 프랜차이즈 헤어샵 개설의 꿈
 
255
한국에서 오신 분이죠. 옛날에 시내에서 했었어요.
미용실 규모가 어땠습니까?
컸죠. 청도시에서 그 당시에 제일 처음으로… 이제 한국 미용실 규모
가 제일 크고. 처음으로 나온 미용실. 이제 한국 미용실이었어요. 1
호점. 그렇다고 봐야죠. 거 직원들이 열  여섯명 정도. 사장… 원장
님 빼고. 합하면 열여덟 명. 많이 컸죠. 청도 시가지 저기 번화가. 
시내 중심부에 있었어요.
손님들은 어땠어요?
그 당시에는 많았죠. 가격도 비싸고 그랬는데. 이제 처음으로 한국식
으로 그런 걸 이제 오픈하니까 손님은 많았죠. 그 한국인 사장님은 
돈 아마도 많이 벌었겠죠. 지금은 아마… 없어요. 지금은 이제 한국 
들어갔다고요.  돈 벌어가지고 들어간 거겠죠. 아마도.
근무했던 미용실이 그 당시 1호점이면 그 뒤에도 한국인 미용사들이 
들어 왔습니까?
네. 들어왔죠. 한국인들이. 여기 부근에 미용실이 하나 또 있어요. 이 
거리에 하나 있어요. 그것도 한국 분이죠. 이제 투자하신 분은 조선
족이고요. 이제 그냥 월급쟁이로 원장 하시는 분이 한국 사람이고요.
미용실 입사하면 처음에는  가위를 안 맡기죠?
그렇죠. 무슨 일부터 하냐고요? 처음에는 뭐 다 하죠. 일단은 청소부
터 이제 시작을 하는 거죠. 청소하고 샴푸하고 뭐 정리하고 이런 거. 
물건 정리하고 머리 깎고 나면은 샴푸로 머리 감겨주고. 그런 일 위
주로요. 이게 결국 배우는 과정이죠
미용실에서 이런 견습 과정을 몇 년이나 하셨어요?
7년. 오래 했어요.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7년까지 기술을 익힐 필요
가 있냐. 뭐 이렇게도 생각이 드는데 글쎄요. 저도 이제 같이 가르쳐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56
 
준 분이… 일하면서 이제 느끼고 하니까 이제 뭐 오래 해야 된다고 
생각해가지고 그렇게 한 거 같애요.
7년 동안 하면 기술이 마스터 되죠?
네. 다 되죠. 이제 한 4년쯤 하면은 어느 정도는 할 수는 있거든요. 
그 때 가위를 맡기죠. 주면서 깎아봐라 이래 하죠. 허허허! 그런데 
이제 전 서툴렀죠. 아마도.
월급도 다르죠? 가위잡고 실제 깎기 시작하는 거 하고요?
네. 틀리죠. 월급도…. 처음 미용실 들어가니까…  웨이터 하던 월급
에 비하면 미용실 첫 월급이 차이가 많죠. 이전보다 아예 떨어진다
고 봐야죠. 전에는 미용실에 처음 들어가면 월급이 없었어요. 그때 
시기는 한국 미용실이 처음이고 하니까. 그때 한국 미용실 사장님들
이 이제… 중국 직원들 월급 안주고 많이 했었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이제 중국 경제도 좋고. 중국 미용샵도 많이 생기고 하니까. 이제… 
직원들도 딸리고 하니까. 이제 한국 미용실에서 직원 월급을 조금씩 
주기도 해요. 옛날에는 안줬어요.
그러면 어떻게 일을 할라고 합니까?
그러니까 애들이 일단은 한국사람 하는 거니까 배울러 들어가는 거
죠. 목표는 한국 꺼라고 하니까… 배우는 목적으로 이제 들어가는 거
죠. 돈보다는. 뭐 돈 벌려고 하면은 굳이 뭐 그런 고생하면서 굳이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 당시에 한국 미용기술에 대해서도 상당히 호감이 있었습니다. 꼭 
배워야 되겠다는 그런 생각이 앞섰죠. 옛날에는 그게 마음이 그랬어
요. 그리 해가 4년 견습을 하고 그 다음부터 이제 본격 깎기 시작했
던 거에요. 처음에 들어가서는 돈 하나도 안 받고.
얼마쯤 지나니까 월급을 주던가요?
7장. 조선족 청년 김호원의 프랜차이즈 헤어샵 개설의 꿈
 
257
3개월이요. 3개월 이후에. 미용실에서 그때 첫 월급이 얼마…? 3백
원. 그전에 웨이터 근무하면서 3천원, 4천원 받았는데 3백원이면 이
거 십분의 일밖에 안되는데…. 무급 3개월 후에 3백원! 이제 3백원 
받기 시작해가지고 올라가는 거에요. 이제 뭐 그거도 이제 자기가 … 
이 현실에 따라서… 기술이 되는 만큼 월급 올려주는 거죠. 이제 차
순 대로. 저 경우는 뭐 그냥… 저는 그냥 빨리 올라간 편이죠,
시간이 얼마나 지나서 천원까지 올라갔어요?
8개월? 9개월인가? 8 내지 9개월에 천원. 나오기 전까지 최고 얼마
까지 받았냐면요. 6천원까지 받았어요. 그면 뭐 일류 이제 헤어디자
이너로서 인정을 받았다기보다는. 최고 6천원. 이거 퇴사할 때 받은 
거에요. 이제 7년 근무하고 나올 때는 내가 독립을 해야 되겠다는 
그런 생각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거까지는 없었어요.  그냥 이제….
미용실(청도시 성양구, 2013.2)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58
 
▮ 브랜드 <이가자미용실> 재취업
여기 그만 두시고 그 뒤에 바로 이 미용실을 개업한 겁니까?
아니에요. 우리가 그냥 다른 미용실에… 이제 한국 미용실에서 또 근
무했었어요. 두 번째 다른 한국 미용실. 그러면 그 미용실도 시내에 
있었죠. 처음에 이제 시내 오픈했던 미용실이에요.
왜 여기서 7년 일하고 다른 곳으로 옮겼습니까?
이제… 그때 처음으로 들어간 샾은 한국에서 제일가는 브랜샵이었고. 
중국에서도 이제 지금 많이… 이제 미용실이 프랜차이즈 사업도 막 
크게 하는 미용실이고 하니까. 그래서 이제 들어갔었죠. 이게 브랜드
고 하니까 도전… 뭐 기술 같은 게 있나 해서 들어간 거였죠.
여기는 브랜드 아닙니까?
네. 이건 브랜드 아니고 그냥 한국분이 와서 그냥 이제 했던 거고. 
브랜드라는 건 이 머리도… 이제 프렌차이즈가 한국말로 하면은 뭐 
프렌차이즈 그 있잖아요? 무슨 식당 그것도 그렇고. 미용실도 한국
에서는 프렌차이즈가 굉장히 이제 많죠. 많이 있잖아요. 그렇게 이
제… 브랜드 뭐 이가자 음식점. 이가자. 여기 중국에 진출했던 거지
요.
브랜드 있는 것하고 없는 것의 차이는 뭐에요?
차이가 많죠. 먼저는 신기술적으로도 차이가 나고. 네. 그러고 이제 
뭐… 여러 면에서 차이가 많이 납니다. 브랜드하고 그냥 식하고. 일
반 소비자들도 머리 깎으러 오는 사람도 수준이 많이 틀리죠. 많이. 
여기 오는 손님분들은 뭐 돈을 기꺼이 많이 지불하고도 깎을 수 있
7장. 조선족 청년 김호원의 프랜차이즈 헤어샵 개설의 꿈
 
259
는 멋쟁이 뭐 이런 분. 허허허! 그렇다고 봐야죠. 멋쟁이라고. 비용
도 차가 있지요. 머리 깎는 비용이 차이가 많이 나죠.
미용 가격 차이는 얼마쯤 됩니까? 예를 들면…?
뭐~ 가격 차이가 커트 같은 경우에는 중국에서 그때 뭐… 한국분이 
이래 자르면은 어… 30원정도 했거든요. 그때. 그냥 제일 큰 샵에서
도 그런데 이제 브랜드 같은 경우에는 150원 정도 … 커트 한번 하
는데요. 30원 대 150원. 허허허! 다섯 배인데요. 그렇죠. 그러니까 
자연히 인제 브랜드 있는 미용실에 오는 분들은 지갑에 돈이 좀 있
고 수입이 좀 나은 사람들이고. 멋을… 외모를 가꾸려 하는 이런 분
들이죠.
그러면 인제 미용사들도 이제 기술이 좋아야겠습니다?
네. 그쵸. 그 위에는 이제 뭐…  기술도 좋아야죠. 제가 여~ 처음 다
닌 미용실 근무하다가 여기(두 번째 미용실) 간 거는 뭐… 나름 기
술력을 바탕으로 해서 내가 찾아간 거지요. 급여는 브랜드샵에 들어
가면 적게 주죠.
고객들이 돈을 많이 내고, 미용실은 돈을 많이 버는 데도요?
아니에요. 그건. 이제 이건 기술적 일이고. 이제 미용업계 같은 경우
에는 이제 뭐 한국도 똑같잖아요? 보면은 자기가 다니던 브랜드샵에
서 다른 브랜드샵으로 옮기면은… 그 브랜드에 대한 기술을 인정 안 
해주잖아요. 자기만의 브랜드샵에 실력을 인정을 해주니까. 한국 같
은 경우에는 뭐 그런 게 많잖아요? 거의 다 이제 5~6년씩 하고 거
기 디자이너… 브랜드샵의 모든 디자이너들은 이제 거의 다 그 샵에
서 뭐 8년, 10년씩 있는 직원들이죠. 특별히 선생님들 같은 경우에
는 거의 다 8~9년. 스텝부터…  거의 이제…  여기서 이제 해요, 미
용을 하는 거죠.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60
 
이가자미용실은 직원이 몇 분 정도 되던가요?
그때는 한 30 몇 명 됐어요. 기~업이죠. 한국에서도 기업이잖아요. 
소기업이죠. 서른 명쯤 직원이 되니까 뭐 사장, 원장이 있고. 뭐 뭐 
이렇게 직위가 있겠죠. 많죠. 조직이.
어떻게 조직이 구성되나요?
거기는 사장님, 회장님이 있고. 회장님은 전국 커버하는. 전 세계 이
제 …. 회장 있고. 그라고 사장님 있고. 사장은 이제 청도에 이 점의 
사장이 아니에요. 그거도 이제 세계 관리하는 데 사장님. 청도 본사
에 사장이 있고. 그 다음에 이제 원장님이죠. 이가자 원장님. 원장님 
저기 브랜드 이가자 자체… 이가자가 이 사장님 이름이거든요. 원장
님. 자체가 원장님이고요. 그라고 이제 그 밑으로 이 원장님 밑으로 
이제 뭐… 가게… 각 가게마다. 어떤 가게는 이제 사장님 있고. 어떤 
거는 원장님 직영점으로 오픈한 것도 있고.
그런 식으로 되고. 이제 그 샵 안에 이제 뭐 지점에 원장님. 그렇게
도 되고. 또 밑으로 이렇게 두게 돼 있죠.
▮ <이가자미용실>의 조직 구성
이가자미용실 있을 때 30여 명 직원들의 조직구성에 대해 말씀해주
세요?
많죠. 이제 팀장님 있고요. 그 다음에 부원장님 있네요. 이 위에. 팀
장님 위에 부원장님 있고. 그라고 팀장님 있고. 그라고 점장님 계시
고. 그 다음에 실장님 계시고. 그렇게 이제 돼 있어요. 그러고 밑에 
매니저 있고. 매니저 밑에는 이제 뭐… . 깎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7장. 조선족 청년 김호원의 프랜차이즈 헤어샵 개설의 꿈
 
261
이제 없어요. 매니저까지. 거의 끝났다 보면 돼요.
매니저는 무슨 역할 합니까? 
매니저는 이제 외부 일도 보고. 그러고 이제 고객님 관리까지 하죠. 
이제 뭐 거의 토탈로 보셔야 하겠지요. 아마도. 이제 실장님, 점장님 
급은 그냥 실내에 일들을 이제 많이 보는 편이구요. 미용실 안에 있
는 일. 팀장님은 그냥 거의 한국 분들만 관리한다고 보시면 되요. 그
러면 매니저는 현장에서 직접 인제 관리를 하고. 외부 것도 하고 이
제 실내에 꺼도 하고. 조직이 컸어요. 일단은. 저는 초기에 그냥 하
급사원으로 들어간 거였죠.
그 당시 30명 직원들의 민족 구성이라 할까요? 한족, 한국사람, 조
선족 외에 또 다른 종족들이 섞여 있었나요?
조선족하고 한국사람, 한족 그렇죠. 조직 중에서 매니저 빼고 다 한
국 사람이죠. 매니저는 그때 당시 다 한족입니다. 한족들이 한국말 
할 수 없었어요. 그땐 그냥 통역… 이제 통역하고 이렇게 하는 거죠.
그러면 굳이 매니저를 한족으로 왜 둘까요?
어차피 중국 시장을 진출하려면…  한국 기업들이 중국 시장 진출한 
원인은 중국 고객이 못 미더워 하기 때문에 진출한 거겠죠. 한국 분
들만 구할려고 중국에 진출한 건 아니잖아요? 미용실이 이제 특히 
청도시내에서 하니까. 뭐 이런 조선족이 많이 있는 곳도 아니니까 
중국분이 필요하다 이렇게 보면 되겠죠. 그러면 일반 그 사원들… 실
무로 이제 머리를 깎고 서비스해주는 이런 분들 구성은 거의 한국 
분들이죠. 한국 선생님 여섯 명… 일곱 명에 이제 교포 분 두 명, 한
족 분 한명이었어요. 교포는 조선족이죠. 이제 일곱 명은 이제 한국
에서 오신 분들이죠.
조선족은 많지 않고, 주로 한국사람 위주로 구성이 돼 있네요?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62
 
그렇죠. 이제 어차피 이제 뭐 한국 브랜드고 하니까. 이제 한국… 그 
비싼 가격에 뭐 굳이 이제…  중국 사람들 이제…  같은 중국 사람
한테서 비싸게 줄려고 안하죠. 많이. 한국 미용실이고 가격도 비싸고 
그러니까 이제… 미용기술에 대해서 중국인들이 한국미용 기술에 대
해서 선호하는, 좀 뭐 좋아하는 그런 부분이 있었지요. 옛날에는 많
이 심했죠.
▮ 정체된 한국 미용기술
한국 거에 대해서 이제 많이 지금은 안 그렇습니다. 지금은…. 네. 
많이 떨어졌죠. 왜 그런가 하면요. 한국미용도 이제는 발전이 없잖아
요. 그냥 이 몇 년 동안 그냥 … 이제 거기에서 정체됐다고 봐야겠
죠. 요즘에는 거의 홍콩, 일본 … 그 쪽에 꺼도 중국에서 이제 많
이… 지금 이제 잘 먹히고 있어요. 외국미용 중에서 한국미용이 가장 
먼저 상륙했습니다. 청도에.
처음 들어가니까. 한국 미용사들 실력이 당시 어떻던가요? 이제 상
당히 마스터하셨기 때문에 어느 정도 평가가 가능하죠?
(웃으면서) 옛날에는 많이 색다르고 그런 점이 많았죠. 지금도 보면
은 많이 이제 차이가 나죠. 이제 한국 거는 이제 어떻게 봐야 되겠
어요? 나쁜 건 아닌데 한자리에서 많이… 이제 변동이 없다 봐야겠
죠. 모든 게 이제 거기에서 정체가 된 상태라고 보시면 되요. 손님들
도 보면은 3, 4년 … 거의 이제 TV도 보고 하면은 거의 그 스타일, 
거기에서 이제 보류가 되잖아요. 한국에도… 저도 한국에서 이가자 
본점인 서울 청담동점에서 1년 반 근무 했었거든요.
7장. 조선족 청년 김호원의 프랜차이즈 헤어샵 개설의 꿈
 
263
이제 한국인들은 거의 자기만의…  거의 한국 사람들만의 그 스타일
이 고정이 돼 있잖아요? 뭐 30대에서는 이런 스타일… 20대는 뭐 
이런 스타일. 50대는 이런 스타일. 이제 여자…  특별히 여자분들은 
머리, 헤어스타일이 고정이 돼 있잖아요. 그런데 중국분들은 이제… 
중국에서는 그 스타일이 고정이 안 되고. 뭐 이제 20대, 40대에 막 
이제… 변화를 많이 원하니까. 이런 저러한 변화를 많이 원해요. 그
러니까 지금 같은 경우는 이제 일본, 홍콩 이런 스타일이 많이 먹히
고. 홍콩이나 일본은 변화를 수용하면서 고객들하고 접촉하고, 한국
은 변화를 수용하지 않는다고 평가할까요. 그렇죠. 한국에서 지금 미
용… 한국미용을 중국에서 보면 그냥 서비스가 이제 많이… 그렇다
고 봐야죠. 그런데 요즘에는 일본 미용샵들도 많이, 일본 디자이너들
도 많이 들어오고 하니까 이제 많이… 옛날보다는 한국 그게 이제 
많이 떨어졌죠. 지금은.  
▮ 변화를 선도하기 위한 노력
원장님은 그걸 알고 계시기 때문에 대처를 하시겠네요?
대처를 하고 있는데 뭐. (웃으면서) 거의 저도 한국 미용실에서만 
있어가꼬, 고거 고치기가 힘들죠. 과거 한국 미용실에서 배웠던 기술
에서 이제 플러스알파를 해서 나만의 어떤 새로운 변화를 시도해야 
하죠. 예. 노력을 해야 되죠. 그게 필요하겠죠. 살아남기 위해서는…. 
노력 중이에요.
어떻게 노력하십니까?
책도 많이 보고. 그러고 이제 해외 같은 데도 기회가 있으면 많이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64
 
다니고. 그렇게. 실제 미용기술을 눈으로 보고 그 추세, 변화라는 걸 
익히기 위해서 해외여행을 가기도 하죠. 해외여행을 하면 현지 미용
실에 직접 들어가 보기도 하고 그래 하지요 그것도 하고… 이런저런 
거 다 해요. 미용 관련 학술대회라든가 뭐 아카데미라든가 그런 데
도 참여하기도 합니다. 그런 데도 이제…. 결국 살아남기 위한 노력
이라고 보면 되겠죠.
청도 지역에서도 미용 업계에 경쟁이 상당히 있는 모양이죠?
굉장히 심하죠. 요즘에는 뭐 똑 같다고 보면. 한국 하고 거의 비슷하
다고 보면 될 것 같애요. 여러 명이서 경주도 그렇고… 여러 분야에
서 다요. 기업인… 다른 사업 하시는 분들도 비슷한 말씀하시더라고
요. 미용업계도 마찬가지지요.
서울 청담동 본점에서 1년 반 동안 일하셨하고요?
네. 이가자미용실…. 청담동. 여기가 서울에서도 유명한 곳이죠. 부자
들 많이 사시고. 어~  그때 스물다섯? 넷인가 스물다섯인가 그렇습
니다. 
▮ 청도 이주 직후의 정착과정
처음에 연길에서 청도에 열여덟 살에 오셔가지고 부모 곁을 처음 떠
나서 대도시로 온 거 아닙니까? 그때는 숙식 같은 건 어떻게 해결했
어요?
그때는 소개소 있었거든요. 소개소. 뭐 그런 거. 그게 이제 숙식 제
공도 하면서 일자리가 있으면 소개도 해주고 그런 식으로 하는 게 
있었어요. 거기에서 이제. 당시에는 그런 곳이 여러 곳 있었습니다. 
7장. 조선족 청년 김호원의 프랜차이즈 헤어샵 개설의 꿈
 
265
여기 청도에. 지금은 없을 거에요. 아마 지금은 뭐 경제도 좋고. 또 
요즘에는 거의 다 이제 가게마다 직원을 구한다고 다 직접 써 붙이
고 하니까.
그때는 직업소개소란 게 있었네요?
잠을 자기 위한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지요. 밥값 식대도 주고 잠자
는 값도 지불하고. 밥은 뭐 그땐 뭐 직장에서 점심을 먹기도 하고 
했지만요. 그 당시에 어떤 데는 이제 먹는 거 해주고, 어떤 데서는 
안 해주는 데도 있죠. 여기 직업소개소에서 당시에 두 달 지냈어요. 
그럼 뭐 거쳐 가는 과정인데.
직업소개소 두 달 있다가 그 다음에는 거취를 어떻게 마련했어요?
그 이후에는 그냥 어릴 때 룸에서 일할 때 룸싸롱, 노래방 거기 웨
이터 할 때 그냥 잠깐 거기 있었어요. 그 이후에는 미용실에 근무하
면 거의 숙식 제공이 되니까. 직업소개소에서는 두 달. 그 뒤에는 내
가 자취라든지 살라면 뭐 내 개인 거처할 때가 있어야 되잖아요? 뭐 
집… 집을 뭐를 방을. 두 달 직업소개소에서 나온 뒤에는 내가 그때 
그 당시에 출근하는 데서 숙식 제공해줬어요. 기숙사.
▮ 2011년 쟈민헤어샵 독립
공간이 상당히 넓은데, 사장님 건물이세요?
아니죠. 세를 냈죠. 몇 평이냐 하면 100평정도 그래 되죠. 좋은 평수
로. 상당히 넓어요. 이게. 한국 미용실은 이렇게 크게 안하죠. 동네 
미용실 같은 경우에는 뭐 여러 칸도 낼 수 있는 규모죠. 한국에서는 
보통 작게 하죠. 그렇죠. 세금이 좀 나가요.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66
 
이가자미용실에서 몇 년 하신 거죠?
여기서 5년… 6년 될 것 같애요. 여기서는 처음에 들어 가가 천오백 
원부터 시작했어요. 그  다음에 6년 근무하고 나올 때는 6천원까
지… 그때 6천원. 거기 6년 근무하고 이제 여기 개원했어요. 그렇다
고 봐야죠.
여기 개인 헤어샵은 몇 년째 일하고 있습니까?
이게 2년 2년 조금 넘었어요. 2011년 몇 월 달입니까? 7월 달. 이
름은 ‘쟈민헤어샵’입니다. (간판을 가리키며) ‘김경민헤어샵’ 저건 옛
날 이름입니다. 옛날에 ‘김경민’으로 했었죠. 그냥 안 바꾸고 그대로 
놔두고 있어요. 요즘에 이제 통일로 간판 고거 하거든요… 통일 디자
인 …  이게 모두 다. 그래 가지고 지금 안고치고. 이제 곧 고쳐야
죠. 쟈민헤어. 쟈민헤어미용실. 쟈민… 쟈민이 무슨 뭐 브랜드는 아
니에요 제가 만든 겁니다. 무슨 뜻이 있는 건 아니고요. 그냥 이제… 
저도 이제 잘 모르겠어요. 중국 이름… 중국 글자로 이제 해석을 했
고요. 중국 글자로 했어요. 어떤 경우에는 돈 많이 벌게 하기 위해서 
뭐 이름 짓는 곳, 작명원에 가서 짓기도 하죠. 그런 식으로 많이 하
죠. 나는 이래 안했습니다. 뭐 굳이… 그런 데까지 그렇게… 안했어
요. ‘자’와 ‘민’ ‘엔’. 영어로. 엠. 제이. 제이 엠이 두 개. 뜻은 없어요. 
허허허!
임대료는 월 얼마 정도 들어갑니까?
백 평이니까 꽤 나가죠. 월 만원이요. 만원이면 한국돈으로 2백만원. 
이백만 조금 넘죠. 적지 않죠. 수입은 뭐 많이는 아니고… 뭐 먹고는 
살죠. 힘들죠. 요즘엔 경제가 안 좋고 하니까. 힘들죠. 한국에서는 
이러게 혼자서 하면은 힘들 꺼에요. 월세 2백만원 하는 데는 아마 
잘 없을 거에요. 근데  방법이 없죠. 중국에서는 다 거의 이 같이… 
7장. 조선족 청년 김호원의 프랜차이즈 헤어샵 개설의 꿈
 
267
가격이니까. 지금 두 사람 월급 주고, 월세 주고. 유지비가 또 있잖
아요. 전기세 내고. 하지만 적자 되면 문 닫아야죠. 허허허!
<쟈민헤어>(구 김경민헤어뷰티, 2013.2)
미용기술이 뛰어나신 모양입니다?
뛰어난 건 아니에요. 허허허!
여기 주변에도 미용실이 어디 하나 보이던데요?
저게 중국 미용실 하나 있잖아요. 여기는 한인이 하는 데고요.
발전하기 위한 노력을 하시는데, 앞으로 계획은 어때요?
뭐 돈 벌어서 이제 뭐 브랜드샵 하던지 뭐… 그 목표를 이제 크게 
발전을 시켜야죠. 쟈민헤어뷰티를 그 이름으로 해서 뭐 지점을 내
고… 그런 식으로요. 이제 브랜드샵이라고 하는 뭐 그것까지는… 그
냥 체인점 뭐 그런 쪽으로 많이 해야겠죠. 중국도 이제…  중국 시장
도 프렌차이즈 같은 거 이제 지금 막~ 시작하는 단계고 하니까 그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68
 
렇게 하고 싶죠. 그런 큰 포부를 갖고 있습니다. 지점을 낸다던지. 
그런데 그게 몇 년 후쯤 가능할 건지는 모르겠어요. 허허허! 더 노
력을 해봐야겠지요. 
▮ 쟈민헤어샵 개업과정
쟈민헤어뷰티를 만들기까지는 고향에서 부모님이라든가 이제 이런 
분 지원이 좀 있었습니까?
있었죠. 여기 개원할 때요. 제가 벌은 거 하고 부모님 지원하고 비율
이 반반이요. 개원할 때 인테리어하고 비용도 상당히 들었죠. 월세보
다는 많이 더 들죠. 설비가 막 한국에서… 한국에서 구매하는 가격에 
배로 다 사와야 되고. 오다(order) 비용? 미용기계들도 이제 다 사
와야 되고. 이제 설비 같은 경우에도 한국에서 다 들어오니까. 이제 
다 따블(double, 두 배) 가격으로 들어와가 사야 되고. 그 외 미용도
구는 다 한국 거니까.
미용 도구도 한국에서 들여옵니까?
예. 요즘에는 제품들도 다 한국에서 들어와요. 한국시장보다 다 따블 
가격으로 이제 사용을 해야 된다는 거라고 보면 되요.
왜 따블로 사야 되죠?
재료상들이 이제 중간에서 한국 갔다가 중국 시장에 이제 파니까. 
뭐 딱 되더라고요. 계산. 저도 이제 한국 시장을 이제 … 이제 그냥 
몇 개월에 한 번씩 가보면은 중국에서 판매하는 가격하고 한국에서 
구매하는 게 딱 절반 정도 차이나더라고요. 그래서 상당히 비용도 
높습니다. 그래서 이제 한국분들은 중국에서 이제 미용…  이제 파마 
7장. 조선족 청년 김호원의 프랜차이즈 헤어샵 개설의 꿈
 
269
같은 거 하시면은 한국보다 많이 비싸다고 하는 소리가 그 소리죠. 
비쌀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한국 약을 써주는데 가격은 한국에서의 배
로 들어와서 해야만이 되니까요.
<쟈민헤어샵> 내부 장식물(2013.2)
미용가격이 올라간다고요?
그래 가격 밖에 올릴 수가 없죠. 중국에서는. 그러니까 한국보다 당
연히 가격들이 다 이제 비싼 거죠. 중국 사람들 호주머니 사정이 안 
좋은 경우에는 비싼 미용 혜택을 받기 어렵다고도 생각되지요. 서비
스 비용이 높으니까요. 그러니까 중국분들은 이제 받아들여요. 그 가
격을. 쉽게. 그러니까 한국분들한테서는 이제 비싸게 느껴지는 거죠. 
한국에서는 이제 그 정도 가격으로 했는데 중국에서는… 이제 뭐 이
렇게 다블 가격을 주고 하니까 이제 좀 비싸다고 느끼죠. 그런데 중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70
 
국분들 같은 경우에는 그냥 옛날부터 한국 제품보다는 그저 그 가격
대에서 그냥 해왔었으니까 이제 뭐 별 비싼 걸 못 느끼는 거죠. 한
국분들은 이제 많이 비싸다고 하죠.
한국에서는 남자 미용실에 커트가 7천원에서 1만원 정도 하는데요?
네. 커트는 이제 좀 싸죠. 파마, 염색 가격들이 많이 비싸죠. 여기서
는 남자는 그냥 커트하는 건 30원 정도죠. 커트만. 30원이 한국 돈
으로는 6만원 아니 6천원이죠. 여성 파마는 여러 가지가 있죠. 파마
는 이제 기본이 300원부터죠. 기본이 300원. 한국 돈으로 약 6만원
인 거죠. 사용하는 제품에 따라서 조금씩 틀린 거죠. 제품에 따라 올
라가죠. 최고 비싼 건 10만원 넘죠. 15만원 정도. 꾸준히 노력은 하
는데, 뭐 브랜드화까지는. 하하하! 글쎄요. 열심히 해봐야죠.
▮ 2006년 부모님 한국 노동 이주
이곳에 부모님은 다녀가셨겠네요?
네. 다른 데서.
얼마 전에 이제 구정이 지났잖아요. 구정마다 고향 가시는 거죠?
안가요. 요즘은 이제 고향에 또 식구들이 다 밖에 나와 있으니까. 어
디냐면 거의 한국에 다 있어요. 아버지, 어머니가요. 아버지, 어머니
는 돈 벌러 한국 갔죠. 아버지, 어머니가 50대니까… 언제 나가셨냐
면요. 한 6년, 7년 됐겠어요. 제가 여기 청도 온지가 지금 12년 되
니까, 제가 여기 나온 후 몇 년 계시다가 바로 한국으로 나갔지요.
한국에는 어머니, 아버지가 순수하게 돈을 벌기 위해서 나갔어요. 그
러니까 뭐 명절 때도 같이 만나기가 어려워요. 어렵죠. 이제 한국에 
7장. 조선족 청년 김호원의 프랜차이즈 헤어샵 개설의 꿈
 
271
나가 있으면 해마다 설 쇤다고 고향 가는 것도 힘들고. 시간이 되면 
우리가 한국으로 가고. 아니면 한국에서 이제 일이 안 바쁘시면 중
국에 오시고 이렇게 해서 만나고요. 제가 때로는 어머니,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 한국으로 갑니다.
한국에 어머니, 아버지는 어디에 계세요?
서울 독산동 쪽에요. 어디? 독산. 독산이요. 서울. 뭐 경기… ? 네. 
서울 독산동 맞습니다.  독산동 있어요. 그쪽에 계신다고 들었어요.
아버지, 어머니는 사업 하십니까?
아니에요. 그냥. 특별한 기술이 없으시니까 그냥 출근해요. 무슨 일
을 하시냐면 식당에서 일하는 거예요. 식당에서 아버지, 어머니가 같
이 계세요. 같이 일하죠. 동생도 한국에 있어요. 어머니, 아버지와 
같이요. 동생은 스물일곱 살인데 일하지요. 동생은 이제 그냥 회사 
다녀요. 동생은 기술이 있지 않아요. 고향 연길에서 온 가족이 지금 
다 또 흩어져 있어요. 고향을 떠나서. 그렇게 살고 있지요.
할머니는 어떻게 사세요?
연길에서 할머니는 다른 친척들과 이제 같이 있어요. 할머니에게는 
인제 고모가 계시고. 삼촌들이 두 분 계신데, 할머니는 큰삼촌 집에 
함께 살아요. 본래 한국 가기 전에는 아버지, 어머니 하고 같이 사셨
어요. 고모님하고 삼촌들은 다 연길에 사십니다. 돈 번다고 이제 참 
각국으로 흩어져서 살아요. 하하하! 고향 연길에도 그 조선족들이 
많이 바깥으로 이주를 하셨어요. 뭐 어떤 마을은 젊은 사람이 별로 
없어 텅 비다시피 해요. 나이 드신 분들만 계시고. 그렇다 하더라고
요. 한국도 마찬가지지요.
시골은 이제 기업들이 적고 하니까, 젊은 분들이 이제 근무할  그런 
데가, 이제 자리가 없죠. 공부를 해도요. 젊은 분들은 그래도 기업들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72
 
이 많아야 나가서 돈 벌 수 있는 이런 기회가 많은데, 연변에는 이
제 작은 동넨데 기업들이 적고. 그러니까 다 이제 밖으로 나오는 거
죠. 밖에 나오면 이제 큰 도시 가면은 회사라던가 그런 기업이 많으
니까 밖에 나오는 거죠.
▮ 단골관계 유지 전략
고향분들이 청도에 좀 사세요?
뭐 좀 산다고 하더라고요. 글쎄 만나는 못 봤어요. 향우회 이런 것도 
하나 봐요. 제가 알기로는 뭐 상당히 많이 사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 향우회를 할 때 체육대회에도 간혹 나가봐요. 연변향우회 체육대
회 1년에 한 번씩 해요. 가요. 행사장에 길이 막힐 정도지요. 사람들
이 많이 모여서요. 많죠. 조선족. 이제 조선족도 이제 다 모이면은 
많죠.
조선족들이 미용실을 운용하는데 도움이 되는 부분은 없습니까?
현재 미용실을 경영하는데 있어서… 음~ 도움이 되는 부분요? 조선
족이 조선족 업소에 가려고 한족이 운영하는 미용실에 안가고 그런 
건 없어요. 네. 그런 건 별 도움 못돼요. 한편으로는 같은 민족, 같
은 동족 도와준다는 차원에서 조선족 업소에만 가고 싶은 마음도 있
을 수 있는데요. 글쎄요. 실제로는 그런 거는 별로 없는 것 같애요.
단골관계는 있으시죠?
네. 그런 건 있죠. 그거는 뭐 모든 영업하시는 분들이면 단골 잡는 
거는 이제 자기만의 수단이죠. 이제 필요로 하니까요. 한편으로는 서
비스 업종의 경우 그게 상당히 중요한 거지요. 서비스 업종은 음식
7장. 조선족 청년 김호원의 프랜차이즈 헤어샵 개설의 꿈
 
273
점도 그렇고. 이런 미용실은 이제 고객 품위에 맞게 기술을 개발하
는 것부터 필요하죠. 그 외에 또 이 단골관계를 형성하고 유지시켜
나가기 위한 전략이랄까? 그런 게 많죠.
단골고객 유치, 관리 전략 몇 가지만 소개해주세요? 비법이랄까 그
런 거?
비법보단 별로 없는 것 같애요. 뭐 따뜻하게 대해주는 거겠죠. 네. 
뭐 그냥 말이라도 그렇고. 여러 면에서 이제 따뜻하게 대해주면 될 
것 같애요. 친절하게. 첫째는 여기 찾아오시는 분들이 각양각색의 머
리 스타일에 대한 각각의 어떤 개성이 있지 않습니까? 요구가 있고. 
그런 걸 이제 미용실에서 맞춰주어야 하는데. 고객들의 구미를 다 
맞춰주기 힘들고. 거기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죠. 허허허! 스트레스 
받죠.
한족도 고객으로 오실 것이고, 조선족도 오실 거잖아요? 그럴 경우
에 언어는 어떻게 사용해요?
언어는…. “오서 오세요!”라는 첫 인사라든가, “어떻게 깎아드릴까
요?”라든가 무슨 대화를 하지요. 그럴 때 뭐 이제 우리 다 중국말을 
배우고 하니까. 이제 할 수 있으니까 중국말 다 하잖아요. 고객이 들
어오면은 인사하고 “어서 오세요!” 카고, 머리 깎을 때 “이렇게 깎을
까요?”, “저렇게 깎아요?” 하고. 그런 대화를 하잖아요. 이제 뭐 그럴 
때는 헤어스타일 책자라든가 그림 같은 거 보여주고 그러죠. 중국말
로 하죠.
그 중에는 조선족도 있을 건데요?
네. 조선족들은 조선말로 하고. 첨에 어떻게 구분하느냐고요? 이제 
들어오면은 인사하면은 받아 주잖아요. 그러면 다 표시가 나죠. 고객
들이 들어오면서… 이제 미용실 간판이 한국말로 써 있잖아요? 조선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74
 
족은 한국말로 보통 인사하지요. 그러면 알죠. 간판 보고 자기가 중
국인인 경우 한국말 못한다면 중국말 할 것이고요. 그러므로 첨에 
들어올 때 표시가 나요. 조선족의 경우에는 머리 깎으면서도 대화를 
할 때 다 한국말로 이야기해요.
조선족하고 한족하고 머리 깎을 때 고객 중에 좀 차이나는 그런 거
는 별로 없어요. 뭐 까다롭다든가 이런 거. 헤어스타일에 대한 뭐 요
구사항이라든가 그건 다 똑 같애요 그거는 뭐 어느 민족이나 어느 
나라나 아무튼 그거는 없고. 그런 거는 다 똑 같은 거 같애요. 근데 
이제 그 대신에 이제 한국분들은 이제 뭐 스타일이 고정이 돼있으니
까 쉽죠. 상담이 거의 필요가 없죠. 상담 이렇게 많이 상담할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이제 중국분들은 이제 뭐 다양하게 자꾸 꾸밀려고 
하니까 이제 뭐 상담을 충분히 많이 해주고. 한국분들은 이제 거의 
다 스타일이 고정돼 있으니까. 나이대가 달라도 고정이 돼있으니까 
뭐 상담이 빠르고. 한국분들은 그런 걸 느끼지요.
그걸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모르겠네요?
허허허! 네. 한국미용은 대개 단순하다고 저는 느껴요. 제가 생각하
기에. 미용을 많이 해봤는데요, 보면 한국미용이 되게 단순하고 쉽다
고 느껴져요. 한국미용은 연령대에 따라서 고정되어 있어요. 그런 걸 
이제 민족성에 따라서 헤어스타일도 이게 좀 차이가 나는 것 같애
요. 한족하고 조선족 외의 고객들은 없어요. 이 청도에는 다른 종족
은 별로 안삽니다. 중국에 55개 종족이 있지만요. 여기에는 주로 세 
개 민족이 있거든요. 위구르족, 몽골족 그런 쪽의 사람들은 뭐 별로 
없어요. 아직은 그런 분들은 못 봤어요.
7장. 조선족 청년 김호원의 프랜차이즈 헤어샵 개설의 꿈
 
275
▮ 청도에서의 타향살이 애로사항
청도까지 이제 멀리서 왔잖아요? 이런 타향에서 살아나가는데 어려
움은 어떤 게 있습니까?
타향살이의 어려움. 허허허! 많죠. 여기서 한 12년 정도 살았는데요. 
뭐 여러 면에서 생활면도 그렇고. 너무 많아요. 여러 면에서 많죠. 
이런 저런 저런….
나에겐 여기가 타향이죠. 중국을 지배하는 대다수 종족인 한족이 아
니고 또 소수민족 편인 조선족이고. 그런 입장이지요. 그런 걸 복합
적으로 볼 때 뭐 어려운 점들 많죠. 처음에는 이제 말투가 안 되죠.
말투가 다릅니까?
네. 이 지방에 이제 말, 중국말이긴 한데… 이제 이 동네에서 쓰는 
지방말이 있죠. 처음엔 그게 제일 힘들었고. 연변에서 사용하는 중국 
어투하고 말투하고 여기 말투하고 달라요.  여기는 이 동네 지방말
이 따로 있어요. 뭐 한국에서 부산하고 서울사람 말, 사투리 그런 것
처럼요. 네. 그런 식으로 이제… 중국도 이제 더 심하게 틀리죠. 그
러므로 확연히 표시가 나요. 말투가 다르면….
그래서 이 지방 사람이 아니라는 그걸로 인해서 차별받는 그런 게 
있습니까?
옛날에는 있었어요. 심했어요. 어떻게 심했냐 하면요. 여~ 옛날에는 
이제 그런 … 지방 그런 게 틀리다 보면은 뭐 은행엘 가도 많이 이
제 지방 그쪽에 사람들 먼저 우선으로 막 해주고요. 그런 게 있었어
요. 그랬어요. 한국에는 순서대로 번호표 뽑잖아요. 온 순서대로. 근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76
 
데 여기 옛날에는 그런 게 없었죠. 중국에도 옛날에는 없었는데 이
제 몇 년 전부터 지금 나오고 그게 다 은행마다 있고. 지금은 다 있
어요. 그게 없을 때는 일찍 와도 이 지방사람 먼저 해주고. 그럴 때
는 상당히 속상하죠.
지금은 한 12년 사시니까 이쪽 말투를 닮아 갑니까?
네. 이쪽 말을 많이 따라가죠. 따라가고. 뭐 이렇게 외모는 조선족이
나 한족이나 구별이 안 되지만요. 요즘에는 말투도 구별이 잘 안돼
요. 모습도 요즘에는 애들이 요즘 한족 애들도 이제 어린애들은 워
낙에 많이 꾸미고. 뭐 그러니까 별로 그런 게 이제 차별(구별)이 안 
돼요. 차별화 되는 것도 있지만은 그래도 요즘에는 이제 막 애들… 
한족 애들도 많이 이제 한국 옷이라든가 헤어스타일도 거의 한국 미
용실에서도 하고. 손질도 이제 애들 많이 하고 하니까요.
조선족 청년 김호원(2013.2)
7장. 조선족 청년 김호원의 프랜차이즈 헤어샵 개설의 꿈
 
277
아까 청도에 왔을 때 말투 때문에 불편함이 좀 있었다고 이야기했었
는데, 또 다른 불편한 점은 없으세요?
청도 지역에서 타향살이… 조선족으로 살아가는 어려움요? 뭐 불편
하다면은 이제 무슨 수속 같은 거 밟을려면은 절차 같은 거 밟으면
은 이제 중국에는 고향으로 가서 하는 거 뭐죠? 서류 같은 거 이제 
다 해야 되니까 그런 점에서 많이 불편하죠. 이제 이 지방에서는 안 
해주니까 본래 자기 살던 고향에 가서 수속 같은 거를 밟아야죠. 그
게 이제 제일 불편한 거죠.
무슨 수속을 밟는 일인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세요?
여러 면에서 이제… 집을 산다든가 아니면 이제 뭐 외국에 갈려고 
한다든가 뭐 이런 거 할려면 수속을 밟아야 절차가 있어야 되는데, 
이제 자기 고향에 가야만이 그 절차가 가능해요. 할 수 있으니까. 이
제 그게 많이 불편하죠. 자기가 어디 사는가 확인 증명서도 떼야 하
고. 그런 행정 서비스가 고향을 떠난 이런 곳에서는 못해요. 한국에
서는 어디든지 발급할 수 있다던데요? 전자시스템이 잘 돼가지고. 
그런데 중국에는 아직 안돼요. 그러므로 멀리 고향을 가야 돼요. 거
기서 다른 사람이 만들어가지고 우편으로 부쳐준다든가 그렇게도 안 
되고… 집에 본인이 직접 가서 이제 해야 되겠죠. 고향에 친척들이 
있더라도, 거기에 삼촌한테 부탁이 안돼요. 여권이나 신분증 같은 거 
할려면 무조건 중국에는 본인이 가야 돼요. 그러 면에서 많이 불편
하죠.
(업소 종업원을 가리키며) 이분들은 어디 출신입니까? 고향이요?
한분은 흑룡강성이고 한 분은 이제 길림성. 모두 동북입니다. 저까지 
하면 동북3성에 한 사람씩 다 있네요. 허허허! 여기 두 사람 2년씩 
근무 중입니다.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78
 
▮ 청도의 매력과 단점
앞으로 여기 청도에서 계속 사실 겁니까?
살아야죠. 여기서 저는. 청도에 뭐 큰 매력을 느꼈다기보다는 뭐 그
냥 살기는 좋은 것 같애요. 여기는 한국 기업인을 포함해서 한국인
도 많고 조선족도 많잖아요. 한국인이나 조선족이 많이 안 사는 곳
하고 비교를 해볼 때 청도가 미용업과 관련해서 매력이 있는 거는 
아니에요. 이점 좋은 점은 더 없죠. ‘왜?’라기보다는 어차피 조선족, 
한국사람 많은 동네에는 이제 같은 동업하는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경쟁력들도 이제 심해지잖아요. 이제 조선족도 없고 한국사람 적은 
동네에 가면은 이제 경쟁력…. 같은 한국 이런…  영업하는 분들은 
경쟁력이 일단 좋고. 그렇고. 비교적 이제 한족들한테 인기를 더 많
이 끌겠죠. 그런 곳에서는 이제 한국인이나 조선족으로서 간판을 걸
고 하면은 좀 특색을 나타낼 수 있다는 얘기겠죠. 같은 조선족 동업
자들끼리 경쟁을 안 해도 된다는 거. 뭐 고객 확보에서 그렇죠. 단골
관계에서나.
(웃으면서) 그러면 그런 데로 가셔야겠네요?
가야죠. 돈 많이 모아서 가야죠. 그런 게 있죠. 처음에 조선족이기 
때문에 또 조선족이 여기 많고 한국인이 많아서 청도 지역에 적응하
기가 나을 것이라고 해서 여기로 온 거는 아닙니다. 처음에는 제가 
여기 미용실을 할려고 왔을 때는 그냥 살려고 해서 왔어요. 친척들
이 여기 다 있거든요.
네. 그래가꼬 청도가 좋다고. 지금. 그런데 옛날엔 나는 내가 어렸을 
7장. 조선족 청년 김호원의 프랜차이즈 헤어샵 개설의 꿈
 
279
때 청도를 생각하고 다시 이제 들어 왔는데. 이제 생각보다 영~ 아
니더라고요. 어떤 부분에서 그러냐면 뭐 이제 특별히 돈버는 데서 
힘들죠. 살기는 좋은데 이제 돈 벌기가 힘들죠.
살기가 좋다는 건 어떤 측면에서 그렇다는 겁니까?
그냥 집 사고. 이제 먹고 뭐 이제 그냥 생활하기가 좀 좋다고 봐야
죠. 돈 벌기에는 별로 안 좋고. 왜 안 좋냐고요? 뭐 이런… 동족의 
조선족들 경쟁이 심하고 그래서요. 뭐 그런 것도 있고. 그러고 이제 
청도에 보면은 저도 북경에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보면은 몇 
년 만에 다시 이 청도에 미용실 하나 내러 왔거든요. 근데 옛날하
고… 특히 보면 뭐 외국기업이랑 있어도 되게 허접한 기업들만 여기 
많이 모인 거 같애요. 기업들이 경기 부진으로 좀 많이 빠져나간 뭐 
그런 경향이 있지요. 빠져나간 거는 인구가 줄어든 거고요. 그러면 
이제 기업들이 있다 해도 되게 이제 제대로 안된 기업이라 할까? 그
냥 개인 장사들이 많죠.
청도에는 한국 기업이라 해도 거의 다 이제 보면은 개인… 그냥 한
국에서 그냥 대출해가꼬. 한국에는 대출이 잘 되잖아요? 한국분들이 
거의 보면 70~80%로가 개인 대출해서 여기 와서 뭐 뭐 회사 사무
실 하나 차리고 직원 한두 명 있고 이런 사무실이 기업들이 대개 많
은 거 같애요. 뭐 기업… 말로는 기업인데 기업이 아니죠. 이런 게 
많죠. 이제 그런 장사 하시던 분들이 보면은 청도가 이제 경제 위기
에 타격받아서 그런 게 이제 많이 빠져나갔죠, 큰 도시 북경 뭐 심
천 뭐 이런 데 한국 기업들 다 큰 기업들이 들어가고. 그런 제대로 
된 기업들이 들어가니까 뭐 지금 이 이후에 경제 위기에도 많이 흔
들리지는 않잖아요? 그것 보면. 그러니까 청도가 제일 심각한 거 같
애요. 그런 것들이 미용업계에도 영향을 미치죠. 영향이 많죠. 여러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80
 
가지로 영향이 많죠.
▮ 청도의 외가 친척
어떤 친척들이 있습니까?
외가 쪽에 있어요. 좀 됐어요. 뭐 이모님, 외삼촌도 계시고요
어머니 고향은 어딥니까?
다 연변이었어요. 외가 쪽은 친척들이 청도에 거의 다 왔어요.
외가 친척들은 어떤 일로 청도로 오셨어요?
다 이제 회사 이쪽으로 와서 일하면서요. 돈 벌려고요. 지금 청도에 
뭐 외삼촌, 이모 다예. 외삼촌은 여기에 한분요. 이모도 한분이요. 
외가 쪽 친척 자식들 있어요. 그러면 사촌이 되겠지요. 이종사촌. 외
가 이분들이 청도에 먼저 오셨어요. 뭐 마음이 든든합니다. 친척들이 
계시기 때문에.
외가 식구들이 청도로 올 때 어떤 도움이라도 주었습니까?
청도에 대해 이런 말 저런 말 좋은 말만 들었죠. 이분들이 상당히 
청도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고나 할까요? 내 어릴 때부터요. 음으
로 양으로 이분들 통해서 오는데 도움을 받았지요. 청도 여기에 대
해 경제 쪽으로 많이 애기해주더라고요. 그렇게 이제 알려주더라고
요. 여기 추천도 해주셨죠. “야! 니 청도에 와가 이거 쫌 해봐라” 이
런 추천요. 추천받고 온 거죠. 이제.
그러면 미용업은 어떤 동기로 하게 됐습니까?
어차피 내가 해왔던 거 그냥 미용이니까. 연변에서 여기 처음 올 때
는 미용할 생각 안했잖아요. 미용을 어느 순간에 해봐야겠다 그런 
7장. 조선족 청년 김호원의 프랜차이즈 헤어샵 개설의 꿈
 
281
계기는요. 옛날에 이제 일하던 데서 웨이터 할 때 사장님이 이제 룸
싸롱 사장님이 미용실 투자했었거든요. 그때 이제 아까 말한 한국 
원장… 한국 미용실 투자하신 분은 교포분이었어요. 룸살롱에 사장님
이 투자하고. 이 한국 분은 이제 와서 일적으로, 기술적으로만 하고 
그런 식으로 했었거든요. 그러면서 이제 룸살롱에 사장님이 나보고 
이제 웨이터가 나한테 안 어울린다고 말해주었어요. “내가 미용실 
투자했으니까 그쪽에 기술 조금 배워봐라” 해가지고. 그렇게 해서 
이제 시작한 거예요. 이게 미용 쪽으로 가게 된 동기라면 동기지요. 
처음에 연변에서 여기 올 때는 미용사가 되겠다고 해가 온 게 아니
었어요. 오히려 처음에는 미용 일을 싫어했거든요.
시작하고 나니까 잘한 거 같습니까?
뭐 잘한 거 같기는 한 것 같애요. 가끔씩은 뭐 후회할 때도 있겠지
만. 그래도…. 이왕 한 거 시작했으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죠. 한 
분야에서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온리 원(only one)이 함 돼보겠다는 
생각. 하하하! 두개가 아닌. 뭐 그런 뭐 포부를 가지고 하면 불가능
한 거는 아니지요.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국인과 중국인 또 이런 업계 성향이라든가 고객 성향도 좀 파악했
고. 해외 여행하면서 변화를 하기 위한 노력도 하고 있고요. 우리 조
선족이 또 응용 능력이 있는 민족이잖아요?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여기 청도에 계시는 외삼촌이나 이모 가족들하고는 한 번씩 만나겠
네요?
네. 그분들은 여기 머리 깎으려도 와요. 네. 외롭지는 않죠. 그분들
이 미용실 개소하는데 좋은  위치 설정 문제에 대한 조언도 해주시
고요.
결혼은 언제 하실 겁니까?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82
 
네. 뭐 사업적으로 안정이 돼야 결혼을 하죠. 아직은 이게 안정이 안 
됐다고 봐요. 투자금은 다 뽑아냈죠.
처음에 이거 개업할 때 투자금은 얼마나 들어갔어요?
인테리어 하고 기구 사들이고. 인테리어 한 20만원 정도 들었어요. 
인민폐로요. 네. 중국돈으로. 인민폐 20만원이면 한국 돈으로 이게 
약 4천만원인가요? 그 정도. 꽤 들어갔지요? 제 나이로 적은 돈은 
아닙니다. 개원 2년 만에 투자금을 뽑았어요. 이제부터는 돈을 보아
야지요. 허허허!
결혼 계획은 세우셨나요?
뭐 글쎄요. 아직은 뭐 결혼 쪽은 생각 안 해봤으니까. 제 친구 또래
들은 더러 결혼도 했어요. 연변 고향 쪽에는 결혼 연령이죠. 남자 서
른 살이면 이제 지금은 결혼할 나이죠. 결혼 적령기. 그 시기죠. 요
즘에는 20대는 결혼 많이는 안하잖아요. 30세 전후로 많이 하잖아
요. 여자도 20대 후반 돼야 하고요. 이제 보통 20대 후반이에요. 여
자들은.
 
283
찾아보기
6.25전쟁 / 13, 223
가정교회 / 74, 78, 82 
강원대학교 / 7, 13, 139, 167, 
187, 199, 200, 201, 205
개혁개방정책 / 8, 218
경박호 / 64
경희대학교 / 7, 139, 168 
고아산 / 35 
고중(高中) / 19, 21, 22, 226, 
241, 252, 253 
과학문화인협회 / 183
교남시(膠南市) / 2, 187  
교주만((膠州彎) / 4, 190
교주시(膠州市) / 2, 187
공안국 / 7, 83
길림대학 / 6, 11, 17, 23, 24, 
25, 28, 48 
길림성(吉林省) / 3, 5, 6, 7, 
11~13, 17, 22, 23, 40, 59, 
74, 139, 145, 146, 152, 
195 221~223, 226, 234, 
277
김호원 / 5, 6, 8, 9, 14, 248, 
249, 276
내몽고 / 5~7, 13, 186, 192, 
193~196, 198, 212, 213
내몽고자치주 / 7, 187
내서시(來西市) / 2, 187
노산구(嶗山區) / 2, 187, 188
대련(大連) / 1, 5, 6, 9, 11, 
59, 70, 72, 73, 157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84
 
대흥촌 / 95, 96 
동북(東北) / 11, 13, 25, 28, 
55, 60, 97, 99, 128, 147, 
148, 191, 206, 221, 235, 
242, 243, 250,  251, 277
동북3성 / 3, 5, 8, 9, 12, 15, 
18, 59, 60, 82, 95, 124, 
129, 142, 144, 148, 194, 
250, 277
동북요리 / 7, 13, 220, 229, 
244
동서의학대학원 / 7, 139, 169 
두만강 / 240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 6, 
18, 62, 63, 67, 154, 165, 
192, 193, 208 
목단강(牧丹江) / 61, 62, 92 
목단강시(牧丹江市) / 11, 59, 
61, 62
반석(盤石) / 7, 12, 139, 140, 
143, 145, 151, 152
발해 / 64
발해대학교 / 65
북경(北京) / 1, 2, 5~7, 9, 
11, 12, 17, 19, 23, 30, 31, 
33, 35, 41, 48, 65, 95, 
99~101, 104, 105, 130, 
142, 147, 150, 151, 157, 
180, 183, 205, 206, 229, 
279 
사방구(四方區) / 2, 187, 188 
사천성 / 12, 145, 146~149, 
203, 206 
산동성(山東省) / 1~3, 7, 11, 
13, 41, 72, 86, 177, 187, 
188, 204, 207, 221, 229, 
241, 249
산동반도 / 1, 2, 4 
삼문하(三門河) / 142
삼릉(三稜) / 59, 62
상지(尙志) / 96~99, 135
상지시(尙志市) / 7, 95, 96, 
100
상해(上海) / 1, 2, 5, 6, 9, 
11, 17, 30~39, 41, 46, 50, 
찾아보기
 
285
54, 56, 95, 130, 180, 205, 
206, 229 
생산대(生産隊) / 65 
서울대학교 / 137, 173, 174, 
설안시 / 221, 222, 228
설안조선족협회 / 246 
성양(城陽) / 4
성양구(城陽區) / 2, 4, 8, 42, 
84, 88, 89, 111, 217, 257 
소수민족 / 3, 9, 11, 13, 52, 
82, 126, 148, 191, 194, 
208, 210~212, 244, 275
쇠가마맛집 / 221, 223
시남구(市南區) / 2, 187, 188, 
190
시북구(市北區) / 2, 18,7 188 
신녕 / 146 
심양시(沈陽市) / 7, 9, 75, 
221, 227, 253
안후이성 / 35
안휘성 / 5, 6, 11, 17, 34, 
35~38, 45, 46, 48, 50 
연길(延吉) / 8, 14, 20, 48, 
127, 131, 178, 227, 241, 
250~253, 264, 271
연길시(延吉市) / 51, 249, 250 
연대(煙臺) / 1, 3, 4, 9 
연변(延邊) / 13, 14, 18, 20, 
22, 23, 26, 29~31, 48, 55, 
74, 100, 106, 131, 132, 
139, 148, 157, 160, 164, 
167, 170, 172~178, 180, 
184, 187, 191~193, 196, 
197, 209, 210, 212, 217, 
218, 233, 240, 241, 249, 
250, 252, 272, 275, 280~ 
282  
연변대학교 / 13, 21, 23, 30, 
33, 38, 40, 44, 45, 48, 51, 
55, 102, 104, 106, 119, 
121, 123, 124, 127, 128, 
130, 132~134, 139, 142, 
154, 160, 162, 165, 173, 
179~182, 187, 196, 199, 
201, 213, 241 
연변1중 / 17, 21, 22, 23, 55
연변지방 / 7
연변조선족자치주 / 7, 139
연변향우회 / 55, 184, 272 
오상(五常) / 24, 246
왕청향우회 / 184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86
 
요녕성(遼寧省) / 3, 59 ,249 
용수진 / 21 
용수평 / 21 
위해(威海) / 1, 4, 6, 9, 13, 
40, 41, 43, 45, 221, 
229~232, 235~237, 240, 
241, 243~246
위해시(威海市) / 7, 8, 229, 
241
이가자미용실 / 14, 249, 258, 
260, 264, 266
이승철 / 5~7, 13, 186, 187
이주(移住) / 1~3, 5~9, 
11~14, 17, 18, 30, 38, 59, 
60, 93, 95, 96, 108, 111, 
139, 145, 179, 180, 187, 
192, 218, 221, 249, 
250~252, 264, 270, 271
이창구(李創區) / 2, 87, 88, 
110, 113, 114
이촌(李村) / 4, 12, 75, 79, 
87~90, 110, 114, 225 
인민해방군 / 223
자영업 / 4~8, 12, 13, 18, 94, 
220 
자하문식당 / 40, 41 
쟈민헤어샵 / 14, 249, 265, 
266, 268 ,269 
장춘지질대학 / 11, 26~30, 45 
장춘지질학원 / 6, 17, 26
재이주지 / 8~10, 12, 126 
재정착지 / 6, 9, 108 
조미애 / 5, 7, 9, 12, 138, 
139, 166, 171
조선전쟁 / 120, 222, 223
조선족 / 1~14, 16~18, 
22~24, 26, 47, 48, 52, 
59~63, 73, 75~79, 81, 82, 
84~88, 89, 91~93, 95, 96, 
99, 100, 108~112, 114, 
118~120, 123, 126, 127, 
130~132, 134, 135, 144, 
146~148, 154, 159, 172, 
174~183, 189, 191, 193, 
194~198, 205, 209~218, 
228, 235, 237, 240, 
243~246, 248, 249, 254, 
255, 261, 271~279, 281 
조선어문 / 120, 136 
조선족언어 / 12, 121 
조선족교회 / 6, 11, 58, 59, 
찾아보기
 
287
74, 78
조선족사회 / 12, 13, 85, 132, 
186, 246
조선족 집거지 / 4, 12, 87, 
108
조선족학교 / 120~124, 135, 
136, 226, 236, 252
조운 / 5~7, 9, 12, 94, 95
중앙교회 / 59, 76, 77, 79, 81 
즉묵시(卽墨市) / 2, 187 
지방말 / 275
천안문광장 / 65
천진(天津) / 1
청도(靑島) 11, 12, 14, 1,7 
18, 25, 30, 37, 38, 41, 
43~46, 48~55, 70~74, 79, 
81, 82, 85, 88, 91, 92, 95, 
96~100, 108~111, 118, 
126, 127, 130, 134, 135, 
139, 150, 152, 158, 170~ 
172, 174, 175, 178~184, 
186~192, 204~207, 209, 
210~218, 225, 227, 230, 
232, 235, 237, 242, 250, 
252~260, 262, 264, 265, 
270, 272, 274, 275, 
277~281
청도농업대학 / 7, 13, 139, 
171, 172, 176
청도대학 / 13, 186, 187, 204, 
206, 207, 214
청도시(靑島市) / 59, 111, 
187, 188, 190, 242, 255, 
257, 261
청양(城陽) / 43, 76, 79, 88, 
89, 110, 118, 136, 212, 
235
청양구(城陽區) / 110, 187, 
191, 249
청양지구 / 110
최용식 / 5, 6, 11, 58~60
최위 / 6, 7, 13, 220, 221, 
240
칭다오(靑島) / 1~9, 11~17, 
38, 45, 50, 51, 59, 78, 88, 
95, 108, 126, 138, 175, 
179, 181, 187, 189, 214, 
221, 249
칭화대 / 23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88
 
통화  / 81, 221, 226
통화농업대학 / 7, 221, 226
통화농업전문학교 / 13, 226
코트라(KOTRA) / 55, 56 
평도시(平度市) / 2, 187 
한국기업 / 31, 45, 47, 110, 
182, 191, 209, 213, 217
한족(漢族) / 3, 19, 26, 44, 
48, 52, 62, 67, 110, 115, 
118, 120, 124, 125, 128~ 
134, 148, 170, 172, 175, 
191, 235, 244, 246, 254, 
261, 272~276, 278
한족학교 / 119~133
한풍원 / 12, 94, 95, 111, 
113, 114, 116, 118
해관(海關) / 41, 43, 52
호구(戶口) / 17, 22, 30, 33
화룡시 / 18, 21 
화룡향우회 / 55
홍춘식 / 5, 6, 9, 11, 16, 17, 
25, 46, 49
홍콩 / 2, 50, 262, 263
황도(黃島) / 4, 190 
황도구(黃島區) / 2, 187, 190 
흑룡강신문 / 109, 183 
흑룡강성(黑龍江省) / 3, 5, 7, 
11, 12, 59, 60, 62, 65, 92, 
94~96, 99, 100, 249, 277
An Oral History of Chinese-Koreans in a New Settlement, Qingdao
by Gyeong Yong Bak, Chaimun Lee, Bishun Lu, Hyunchul Lee
Copyright ⓒ SSK(Social Sciences Korea) Multiculture and Diaspora 
Project,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Published by BookandWorld. Daegu, Korea
재외한인 구술 생애사 총서
9
중국 신흥정착지 칭다오(靑島) 조선족 구술사
2014년 6월 30일 초판 발행
지은이 박경용 이채문 여필순 이현철
펴낸이 김영모, 
펴낸곳 책과 세계  등록 | 2007년 2월 2일, 제2010-000004호
주소 | 702-832 대구광역시 북구 복현동 690-1
전화 | 053-953-2417   전자우편 | bookandworld@naver.com
ⓒ경북대학교 SSK 다문화와 디아스포라 연구단
  http://diaspora.knu.or.kr
ISBN  978-89-94255-42-2  94330   ₩15,000
*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재사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와 책과 세계 양측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 이 도서의 국립중앙도서관 출판시도서목록(CIP)은 서지정보유통지원시스템 
홈페이지(http://seoji.nl.go.kr)와 
국가자료공동목록시스템(http://www.nl.go.kr/kolisnet)에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CIP제어번호: CIP2014019753)
* 이 저서는 2011년도 정부재원(교육과학기술부 사회과학연구지원사업비)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습니다(NRF-2011-330-B0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