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 태권도 사범 양원기의 생애사 -
박신규 이채문
경북대학교 SSK다문화와 디아스포라연구단
도서출판 책과세계
재외한인 구술생애사 총서
21
- i -
서 문
2015년을 기준으로 현재 중남미에 체류하는 재외한인은 105,243
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전체 700만명 이상의 재외한인에서 많은 비
중을 차지하지는 않지만 중남미 지역의 이주는 한국에서 해외이주법
(1962년)을 제정하여 자국민의 이주정책을 실시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고 특히 브라질의 경우는 한인 이민사회가 짧은 기간에 성공적으
로 정착한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중남미 한인 이주사를 보면 1904년에 이루어진 멕시
코 이민에서 공식적인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멕
시코 이민은 1902년에 이루어진 하와이 이민의 연결 선상에서 이해
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 19세기 후반의 조선은 조정의 무능, 양반 
및 관리들의 부정부패, 열강들의 침탈과 이권 쟁탈, 농민 반란 등 내
적 문제와 노동력을 필요로 하던 하와이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경영
자들의 이익과 맞물리면서 하와이 이민이 시작되고 같은 선상에서 
멕시코 이민도 진행되었다. 이후 일제시대, 해방, 전쟁과 산업화 과
정을 거치면서 중남미 지역은 당시 국토의 인구 밀도를 낮출 수 있
는 지역으로 급부상하게 된다.
  또한 1960년대는 한국과 중남미 관계의 한 획을 긋는 시기로써 
정치․외교적으로 한국은 1959년 브라질과 수교를 기점으로 1960년
대 초 대부분의 중남미 주요 국가와 수교 관계를 맺게 된다. 또한 
사회․문화적으로도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지속된 농업 이민을 통해 
중남미로 한국인이 대거 이주하면서 한인 사회가 형성되었고, 이를 
통해 중남미와 한국이 미약하나마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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련되었다. 이와 같은 중남미 한인의 이주사에서 본 서는 중앙아메리
카의 국가인 코스타리카로 이주한 재외한인 양원기 씨의 생애를 대
상으로 하고 있다. 양원기 씨는 코스타리카 최초 한인 이주자인 양
원건 씨의 동생으로 형님 양원건 씨가 68년 한국과 코스타리카 국
교 수립 이후 최초 이민자로 태권도를 보급하기 위해 코스타리카로 
정착한 이후 73년에 태권도 사범으로 이주한 사례로 중남미 한인이
주사의 내용을 풍부하게 해 주고 있다.       
본 구술사연구는 2011년 한국연구재단의 사회과학연구지원사업 
(SSK)의 하나로 경북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가 공동으로 컨소시움
을 형성한 “다문화사회와 한인디아스포라·트랜스 이주연구단”의 연구
물로 기획되었다. 2011년부터 경북대학교 “다문화와 디아스포라 연
구단”에서는 구 이주 지역인 독립국가연합, 일본, 중국과 신 이주 지
역인 중남미 등지로 이주한 재외한인연구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지
속적으로 재외한인의 구술사 연구에 매진해 왔다. 그 결과 본 연구
단에서는 총 20권의 재외한인 구술사 단행본을 출간하였으며, 이번 
중남미 국가인 코스타리카 지역의 양원기씨의 구술사연구도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1960년에서 70년대 이주에 해당되는 양원기 씨의 사례는 60년대 
부터 이주자가 국경을 초월하여 상품, 정보, 서비스가 연결되는 것을 
분석하는 초국가적인 이주(transnational migration)에 대한 사례로 
소개 될 수 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코스타리카에 거주하는 초기 이
주 교민에 대한 구술사 연구는 향후 재외한인 연구사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고 여겨진다. 
본 연구의 대상자는 1973년 코스타리카로 이주한 양원기 씨로 본
인의 형님인 양원건의 이주에 따라 가족이 연쇄이주 한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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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원기 씨의 형님인 양원건 씨는 한국외대 출신으로 콜롬비아로 국
비 유학생으로 떠나 이후 코스타리카로 한인 최초로 이주한 사례이
며 이주 이후 코스타리카에 태권도를 보급하였다. 이후 형님의 태권
도 도장의 확장으로 동생인 양원기 씨가 태권도 사범으로 1973년에 
이주하게 된다. 
형님이 코스타리카에 도착하셔서 태권도를, 집안 형제들이 그걸 생계 
수단으로가 아니고 좋아해서 태권도를 하게 되었는데 저희 형님이. 거
기서 태권도 도장을 오픈하셨어요, 중앙 다운타운에다가.태권도 중앙 도
장이라는 것을 처음 오픈하게 됐습니다. 제가 이주할 당시 코스타리카 
대사관이 없어 일본을 거쳐 공항에 겨우겨우 가 가지고 LA를 거쳐가지
고 코스타리카 공항에 입국을 하니까 1973년 10월 28일이었습니다. 제
가 도착하자마자 그 도장에서 여러 해 동안 같이 일하게 됐죠. 같이 도
와드리고. (본문에서).
양원기 씨는 중남미 지역의 이주민이 농업 이민으로 이주하지만 
농업 여건의 미비로 농업에 종사하기 보다는 의류봉제업으로 전환하
는 경우가 대부분의 사례인 것과는 다르게 코스타리카 지역에 한국 
문화이며 국기(國技)인 태권도를 보급한 사례로 중남미 한인의 전형
적인 모습과는 차이를 보여 중남미 한인들의 다양한 이주와 정착생
활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본 연구는 크게 5장으로 나눠진다. 제1장에서는 양원기 씨가 코스
타리카로 이민 가기 전 성장 배경과 이주 원인을 살펴보고 있다. 제
2장에서는 형님 양원건 씨가 코스타리카로 이주하는 과정과 양원기 
씨의 태권도 사범 생활로 구성되어 있다. 제3장에서는 태권도를 기
반으로 정착한 이민생활과 최초 이민자 가족으로 코스타리카 한인사
회의 기반을 마련하게 된 배경을 설명한다. 제4장에서는 태권도 사
범으로서의 개인 역사와 한인회장으로서의 역할, 한인사회의 교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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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할 등을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제5장에서는 자녀의 성장과 
정착, 2세들의 교육과 정체성 문제, 본인의 노년생활을 위한 한국 
귀환과 이중국적을 지닌 채 초국가적인 삶을 사는 현재의 일상을 보
여주고 있다.
한편 본 서에서는 한인의 재이주로 본국으로 귀환하는 사례가 증
가하고 있는데 양원기 씨도 자녀의 정착과 함께 노년의 안정적 생활
을 위해 한국으로 최근 귀환하였기에 재외한인의 이주, 정착, 귀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사례로도 의미 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경북대학교 다문화와 디아스포라 연구단은 2011년 9월 한국연구
재단의 지원 하에 1단계 사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한 이후, 2014
년 9월 2단계에 진입하였다. 그동안 본 연구단에서는 중국, 일본, 러
시아 및 중앙아시아의 재외한인과 다문화를 주요한 연구과제로 하고 
있으며, 그 성과물로서 재외한인의 구술사를 지속적으로 단행본으로 
출간하는 작업을 진행해 오고 있다. 
오늘날 재외한인의 의의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지대하다. 이
러한 이름 없는 수많은 재외한인들은 과거 식민지 시대 암울했던 조
국의 독립에 대한 기틀이 되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 세계로 뻗어가
는 국력의 뿌리라는 점에서 이들에 대한 구술사 연구는 매우 중요하
며, 지속적으로 진행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본 연구단의 
이러한 재외한인의 구술사 집필 노력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
심을 기대하는 바이다.
2017년 4월
경북대학교 SSK 다문화와 디아스포라연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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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 서 문··························································································1
제1장 코스타리카 최초 이민자 양원건의 동생으로 아주·····11
▮ 강릉 출생, 운수업을 하는 아버지의 차남으로 성장········12
▮ 군대 제대와 집안 가업을 잇는 사회생활 시작················14
▮ 형님의 코스타리카 이주·정착과 가족의 연쇄이주···········15
제2장 태권도 보급 및 사범생활 시작···································23
▮ 코스타리카 지역과 한국인 최초 이민자 형님 양원건·····24
▮ 코스타리카에서 태권도 보급 및 사범 생활 시작············27
제3장 태권도를 통한 코스타리카 한인사회 기반 마련·········33
▮ 75년 주 코스타리카 한국대사관 설립에 기여·················34
▮ 김종필 총리와의 만남과 외무부 장관상 수상··················37
▮ 태권도와의 인연과 태권도 사범의 역사···························41
제4장 코스타리카에서 태권도 사범과 한인회장으로서의 삶53
▮ 75년 주 코스타리카 한국대사관에서 결혼·······················54
▮ 교회 중심의 한인사회 형성에 주도적 역할 수행············56
▮ 세계 태권도 대회 코스타리카팀 단장 참가·····················66
▮ 코스타리카 한인회 운영과 한인회장 활동 ·····················70
▮ 90년대 의류업 시작과 한인 영주권 신청에 기여············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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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자녀 정착과 노년을 위한 한국 귀환··························89
▮ 호텔리어로 성장한 딸과 방재청에 근무하는 아들···········90
▮     2세들의 미국 거주 및 3세 교육과 정체성 문제·············92
▮ 한국으로 귀환하는 코스타리카 한인 2세의 삶················95
▮ 한국으로의 귀환과 이중국적 소유····································97
▮ 한국 귀환 이후의 삶 : 고국에 봉사하는 삶··················100
◆ 부록················································································106
1. 코스타리카 한인회 소식지················································108
2. 양원기 생애에 대한 본인 기록·········································112
3. 코스타리카 한인 기사 : 태권도와 한인회························120
◆ 찾아보기·········································································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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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원기 (2016년 인터뷰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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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원기의 연보
1947년 (1세): 7월 24일 강원도 강릉시 옥천동 탄생
3남 2녀 차남 출생
1968년 (22세): 형님 양원건 한인 최초로 코스타리카 이주      
       태권도 보급의 선구자    
1973년 (27세): 10월 여동생 양원숙과 함께 코스타리카 이주  
형님의 태권도 도장 운영, 사범생활 시작 
1975년 (29세): 주 코스타리카 대사관 개관, 결혼식 거행 
1977년 (31세): 딸 양수정 출생, 태권도 사범 생활 지속
대통령 특사인 김종필 총리와의 만남, 형님 대통령 표상
본인 외무부장관상 수상 
1978년 (32세): Puntarenas 항구의 한국 원양어선단 주재에 따
른 사건들을 태권도 인맥으로 해결 도움    
1980년 (34세): 아들 양정민 출생
1985년 (39세): 제7회 세계태권도 대회 코스타리카 태권도 대
표팀 단장으로 14명의 선수 인솔해서 출전  
제5대 코스타리카 한인회 회장 선출
1987년 (41세): 코스타리카 게포스라는 해변도시의 ‘한국학교’
당시 대통령 알베르토 몽헤 앞에서 태권도 시범 시연 
1991년 (45세): 영리 목적의 태권도 도장 운영을 정리, 부인이
경영하는 의류 사업 공동 운영  
1996년 (50세): 제10대 코스타리카 한인회 회장 선출
김영삼 대통령 중남미 순방시 과테말라에서 한인회 회장
대표로 5분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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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54세):  25년 지속적인 태권도 교육과 봉사활동
2013년 (67세): 한국 교민 30명 영주권 문제를 태권도 봉사활
동의 인맥을 활용, 한국교회로 이민국장을 초청하여 해결 
2016년 (70세): 노년의 삶을 한국에서 보내고자 10월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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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원기의 가계도
제1장 코스타리카 최초 이민자 양원건의 
동생으로 이주  
강릉 출생, 운수업을 하는 아버지의 차남으로 성장 
군대 제대와 집안 가업을 잇는 사회생활 시작
형님의 코스타리카 이주·정착과 가족의 연쇄이주
코스타리카 전체 지도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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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릉 출생, 운수업을 하는 아버지의 차남으로 성장 
저는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고 우스갯말로 지방의 특색이 있듯이 
강원도는 감자밭입니다. 강릉은 이제 그 어렸을 때만. 초등학교. 잘 
모르겠는데,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 올라왔죠. 
우리 어렸을 때는 초등학교 때, 저는 그 당시는 제가 초등학교 다
닐 때 상당히 그 고생을 별 그렇게 크게 안하고 일찍 그 아버지가 
그 아버님이 장사에 탤런트가 있으셔 가지고 강릉에서 생산되는 어
물들, 그 당시에 추억을 가지고 계셨어요. 군대에서 군 트럭, 민간들
이 사용할 수 있게 받아가지고 일반 이제 그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
도록 그런 허가를, 이해가 되시는지 모르겠네. 그래가지고 강릉에서 
그 해변 아닙니까. 강릉 잘 아시죠.
그 당시에 자기 차를 가지고 계셨으니까, 상당히 장사머리나 수완
이 앞서셨다고 봐야겠죠.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이니까. 60년 전 정
도 되겠네요. 제가 지금 나이가 70이니까. 60년 전에 그런 사업을 
하셨으니. 그래가지고 오셨을 때는 서울서 시골 사람들이 필요한 물
건들을. 의류 뭐 잡화 신발이니 뭐 모든 과자니 종합. 이런 물건들을 
싣고 오셔가지고 가게를 가지고 있었거든요 시골에서. 강릉에서. 그
래서 거기서 도매도 하고 소매도 팔고 그런 이제 그 했기 때문에 저
희들은 그 당시에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웠을 당시니까. 
그런데도 저희들은 뭐 옷을 입고 나가면은 아버지께서 사 오신, 서
울서 사가지고 오신 입고 나가면, 전부 고무신 신고 다니고 이럴 땐
제1장 코스타리카 최초 이민자 양원건의 동생으로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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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우리는 털신이라고 털, 이게 이렇게 달려가지고 이렇게 뚜껑 이
렇게. 밑에는 고무고 위에는 천으로 된 털신이요. 그걸 신고 옷을 골
덴, 골덴 아시죠, 골덴 그 잠바. 그런 거 입고 털모자 쓰고 나가고 
그러면 좀. 그래 가지고 그런 거 입고 나가고 예를 들자면, 그래서 
어린 시절은 참 조금 부유, 여유 있게, 금수저는 아니라도 한 은수저 
정도는 되지 않겠나, 그러면서 그런 생활을, 특별한 케이스죠. 
그 당시에 우리 대한민국에 거의 90%가 다 어렵게 사실 땐데, 그
러다가 제가 초등학교 졸업할 무렵에 그 당시에는 보험이 없었어요. 
보험제도가. 사고 몇 번 나면 그냥 망하는 거예요. 그 기사분이 아버
지하고 예 그 뭐 어렸을 때부터 친한 친구였는데 그 당시에 기사는. 
지금 기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자동차 기사 운전하는 기사들이 왜
정 때도 일본 왜정 때 일제 강점기도 그렇고 기사라 그러면 그 결혼 
대상에 처녀들이 결혼하고 싶어 하는 사람. 그 당시에 그런 기사였는
데 그분이 이제 같이 동업자로 저희 아버님하고. 그래가지고 같이 소
업을 하시다가 대관령을 넘어서 그 다음에 진부. 진부라고 있어요. 
그쪽으로 고속도로가 아니고 대로 그때 당시에 비포장도로니까 가로
수가 있고 한데 그 어렸을 때 제가 알기로는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
만 차가 이제 언덕에 내려오다가 이분이 새벽 세시, 네 시에 출발하
거든요. 왜냐하면 해산물 어물이니까 그때는 냉동시설도 없고 하니까 
바로바로 올라와야 되는데 그래봐야 10시간씩 걸리고 이러니까 동대
문시장 갔다가 물건을 풀어줘야 되고 그러니까 오다가 이 기사분이 
아버지 친구 같이 동업하시는 분이 길에서 졸았어요. 졸음 운전하셨
어, 그래서 차가 완전히 뒤집어져가지고 사고가 나고 뭐하고 그분이 
돌아가셨어. 돌아가셨다고. 그래서 그 관계 또 애매모호하게 되고 친
형제 이상 가까이 지내시던 분인데 이렇게 돼버리니까. 그렇게 시작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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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돼가지고 그 당시에는 보험이 없으니까 자동차 다 망가지고 그러
니까 서서히 이제 가세가 기울어지고 내리막길로 들어서게 돼가지고 
그다음에 서울로 우리가 이제 올라.. 서울로 이제 이사를 하게 되죠. 
그래 뭐 초등학교 어렸을 때 시절은 그냥 뭐 그런 대로 주로 서울에
서 이제. 뭐 어렸을 때 시절이라고 그래봐야 초등학교 때 올라왔으니
까. 아버님은 운수업을 하셨습니다. 운수업. 전국에 화물.. 그런 운수
업을 하셨습니다. 서울와서는 한일 고등학교를 졸업했지요.
저희 본적은 남원이요, 제주도 양씨라고도 그러고 삼손골이라고 
혹시 가보셨습니까? 거기서 우리가 나왔다 조상이 거기다 라고도 얘
기도 하고 남원이라고도 그래서 옛날 우리 어르신들은 고씨 구씨 양
씨끼리는 결혼을 못한다고 했잖아요. 지금은 그런 게 없지만  그래
서  남원에 가서 조상들 모시는 그 뭡니까 종씨들 예 모임 제사지내
고하는 그런.. 저도 가봤거든요 
▮ 군대 제대와 집안 가업을 잇는 사회생활 시작  
원출생지는 강원도 강릉입니다 제 종교는 기독교고요 어려서부터 
신앙생활 했고 코스타리카 가서 장로로 직불 받고 은퇴까지 하고 제
가 그 군에서 1973년 9월10일부로 제대를 하고 저기 저 어딥니까 
거 강원도 원통에서 12사단에서 하사로, 일단 하사로 해서 군 복무
를 마치고 대한민국의 4대 의무 중의 하나인 국방의 의무를 충실히 
하고 떠났습니다. 
저는 그 대한민국의 최고 최전방 휴전선 안에서 근무를 하다가 5
제1장 코스타리카 최초 이민자 양원건의 동생으로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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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10일 날 73년 제대하고 저는 사회생활을 해보지 않았습니다. 우
리나라에서 우리 뭐 대한민국에서 살 때 이 사회생활이나 직장생활 
해보지 않고 5월 10일 날 제대하고, 아버지하고 장인어른께서 하시
는 운수업 회사에 일 년 남짓이나 이년이나 거기 가서 일을 좀 도와
드린 거 뿐이죠.
그러다 보니까 그냥 그게 다예요, 없어요. 42년이 되니까 뭐 저도 
제 이민생활 42년이니까 군에서 26살에 한 2년 정도 군에 제가 보
충역으로 있다가 군에서 늦게 나갔어요 한 2년. 다른 사람들은 나보
다 2살 한 2년 일찍 제대했죠. 저는 2년 늦게 군대에서 나갔어요. 
그때 26살 땐가 제대하고 5월 10일 날 제대하고 10월 28일 날 코
스타리카 공항에 도착을 했으니까. 그 뭐 날짜까지 다 기억하네.
▮ 형님의 코스타리카 이주·정착과 가족의 연쇄이주  
코스타리카에 제가 거기를 이주하게 된 동기는 저희 형님이 이제 
그 저희 형님은 연세가 꽤 되시죠. 일흔이 넘으셨으니까. 저의 그 형
님이 살고 계셨거든요. 
저희 형님이 이제 가정이 가세가 기울어지고 아버님 부모들이 연
세가 많아지시고 하니까 저희 형님이 강릉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시
고 우리들끼리만 공부하게 됐어요. 그래서 서울에서 이문동 이제 그 
우리 형님이 외국에 꿈이, 외교관이 아니면 이제 뭐 그래가지고 그
렇게 기울어지고 하다보니까 알바도 하시고 대학 다니면서 하시다가 
아 결국은 아 이거 안 되겠다 여기서 이제 뭐 꿈을 키워나가기는 힘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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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고 머리는 있고 하니까 이제 그 졸업을 하는 동시에 내가 해외로 
나가봐야겠다. 저희 형님이 그 1966년도 문교부 시행 국비장학생 그 
당시에 상당히 시험이 어려웠죠. 그 당시에 한국외대 스페인학 어학
를 나오시고 국비장학생으로 어떻게 그 콜롬비아 보고타에 있는 
국립대학에 유학을 가셨어요. 
그 당시에 저희 형님은 콜롬비아의 국비, 문교부, 지금 말하면 교
육부인가요? 옛날 문교부, 지금 교육부 해외유학생 자격시험에 합격
이 되어 가지고 그 케이스로 국비장학생으로 콜롬비아 보고타에 유
학을 가셨어요. 그래 가지고 거기서 저희 형님이 거기서 인제 또 저
희 형수님을 초청해서 그 콜롬비아에서 결혼을 하셨죠. 결혼을 하시
고 학위를 받으시고 코스타리카 국립대학 총장 초청으로 그쪽으로 
또 다시 공부를 하기로 옮겼죠. 이주했죠. 콜롬비아에서 코스타리카
로 그리고 워너비라 그럴까 태권도를 하셨습니다. 태권도사범으로 
일을 하셨고 거기서 정착하시게 되셨죠. 저희 형님 양원건씨가 1968
년 한국 사람으로선 제일 먼저 코스타리카에 정착하게 되었죠.
저희 형수님은 같은 동문이에요. 외국어 대학 일본어과를 나오셔
가지고 우리나라의 시청, 시청 뒤에 있던, 지금은 그 은행이 없어졌
어요. 제가 여러 번 찾아가서 식사도 대접받고 그랬는데 그 당시에 
저희 형수님이 일본어과를 나오셔가지고 이 서울 주재 일본 도쿄은
행, 도쿄은행에 근무를 하셨거든요, 그 당시에. 그래 가지고 우리 형
님이 갑작스럽게 은행에 가서 만나서 대화하다가 내가 이렇게 됐다. 
나는 떠나야겠다. 그러니까 당신이 그 뭐야 우리 형수님보고 우리 
형님이 나는 떠나니까 내가 어떻게 되든지 앞으로 뭐 미래는 모르지
만 아무튼 나를 사랑하고 나는 갈 테니까 언젠가는 하여튼 내가 그 
초청을 하면은 누구 말마따나 군대 가면은 뭐 여자들이 고무신 거꾸
제1장 코스타리카 최초 이민자 양원건의 동생으로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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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신고 그런다는 식으로 좀 노파심에서 아마 모르니까 사람 일이라
는 게 떠나고 난 다음에. 그런데 아마 그런 구두의 약속이 있었는가 
봐요. 같은 동문이고. 뭐 그러다 보니까 우리 형님 먼저 가시고 연락
이 온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 형님이 너무 당황한 거예요. 나 지금 
여기 와봐야 뭐 방 원룸에다가 겨우 이제 공부하고 뭐 이렇게 하는 
상황인데 당신이 여기 오면 부담되죠. 네. 생활비도 그렇고 모든, 그
래가지고 그래도 어떻게 합니까, 온다는데. 벌써 사표 냈다는데. 그
래서 결혼하고 이후 코스타리카로 이주했죠.
그래서 코스타리카에 도착하셔서 태권도를 집안 형제들이 그걸 생
계 수단으로가 아니고 좋아해서 태권도를 다 형제들이 태권도를 하
게 됐습니다. 태권도를 하고, 하다보니까 생계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하다보니까 태권도가 뭔지도 모르는 나라에 한 사람도 누가 와서 태
권도를 보급한 적 없는 생소한 나라에 가서 살게 됐죠, 저희 형님이. 
그래서 태권도 도장을 오픈하셨어요, 중앙 다운타운에다가. 시내에다
가 institute 태권도 중앙 도장이라는 것을 처음 오픈하게 됐습니다.  
제가 도착하자마자 그 도장에서 여러 해 동안 같이 일하게 됐죠. 같
이 도와드리고. 
주위 형제들이 이제 다들 떠날 계획을 하고 있었으니까, 이민을. 
그러니까 저는 여기서 남아있고 안 남아있고 간에 특별히 지연이나 
학연이나 뭐 이런 게, 지지기반이라든가 좋은 집안도 아니고 평범한 
집안이고 하니까. 제가 여기서 뭐 결국, 집에 재산도 있어봐야. 또 
뭐...... 제 나름대로 생각은 또 좀 다르고. 그래서 한번 나가보는 것
이 좋겠다. 형님도 아버님 밑에서 살지 말고 한번 나와 봐라 좋으면 
살고 아니면 돌아가라, 그런 약속 아래 제가 가게 됐죠. 그래서 그 
당시는 이제 코스타리카에 우리나라 대사관이 없었어요. 공간이. 지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18
 
금은 있잖습니까, 코스타리카 공간이 이제 있다고요. 있는데 그 당시
에는 없어가지고 비자를 어디 가서 받았느냐 하면 일본 도쿄, 동경
에서 저하고 여동생 둘이서. 찾질 못해가지고, 워낙 자그마한 나라다 
보니까 이 영사관을 찾질 못해가지고. 택시를 타고 하네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동경 도쿄, 동경 주재의 코스타리카 영사관을 찾아가는
데. 뭐 그 당시에는 내비게이션이 없고 이럴 당시니까. 주소만 가지
고 찾아가는데. 못 찾았어요. 그냥 못 찾고. 택시비가 얼마나 많이 
나올까봐서, 그래가지고 거기 갔어요. 한국 대사관. 동경 주재의 한
국 대사관, 한국 대사관에서 한국 대사관 여직원이 한국 사람이 그
쪽의 영사하고 통화를 해서, 몇 시까지 근무를 하냐. 늦더라도 좀 기
다려 달라. 비행기 타고. 그 당시에 판아메리카 비행기, 없어졌죠. 
미국 회사 비행기, 아주 옛날 비행긴데 그걸 타고 이제 가야되는데 
그래서 시간을 맞춰서 겨우겨우 찾아가가지고 영사 확인 받고. 그래
가지고 공항에 겨우겨우 가 가지고 LA를 거쳐가지고 코스타리카공
항에 입국을 하니까 1973년 10월 28일이었습니다, 가게 됐죠. 하여
튼 재밌는 에피소드 같고.
저희 형님이 코스타리카에 영주권 넘버가, 고유 넘버가 없었거든
요. 우리 대한민국 코스타리카 이민청에 우리 대한민국의 사람에 대
한 고유번호가 없었어요. 왜나면 한국사람 하나도 안사니까 그러니
까 우리가 들어가 사는 바람에 고유번호가 생겼어요. 처음에 들어가
니까 이민청이 코스타리카 고유번호를 만들어준 게 179입니다, 1번
이 형님이고 2번이 형수님, 저가 3번, 동생이 4번, 5번, 6번 이렇게 
되었어요. 형님 먼저 오고 그 뒤를 저와 여동생이 오고 디음에 저의 
부모님, 그리도 남동생이 따라 오게 되었죠. 그 뒤를 이어 저의 처가 
식구들, 처제, 처남 그리고 동생네 처가댁들이 코스타리카에 오게 되
제1장 코스타리카 최초 이민자 양원건의 동생으로 이주
 
19
었어요. 사돈들을 모두 합치면 가족만 한 50여명이 되지 않을까 생
각이 듭니다. 지금은 과테말라, 한국, 미국,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
고 있습니다.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20
 
<보충자료> 
코스타리카 주요개황 ①
자료출처 : 한국정보화진흥원  
제1장 코스타리카 최초 이민자 양원건의 동생으로 이주
 
21
코스타리카 주요개황 (한국과의 관계)  ②
1962년 8월 15일 한국과의 외교관계를 수립하였고 민주주
의, 평화, 인권, 녹색성장 등 공동의 가치에 기반한 우호 협
력관계를 지향하고 있다.  
 1962년 수교 당시에는 양국간 교역이 거의 없었으나 지난 
50년간 꾸준히 증가하여 2013년에는 수출 2.3억불 수입 2.7 
억불 등 총 5억불에 달하는 교역액을 기록하고 있다. 한국의 
대코스타리카 주요 수출품은 자동차, 인쇄회로, 철강판, 타이
어 등이며, 코스타리카의 대한국 주요 수출품은 컴퓨터 부품 
및 반도체 등의 제품이 주를 이루며, 커피, 파인애플 등의 대
한국 수출도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2016년 10월 솔리스 코스타리카 대통령이 방한하여 조세정
보 교환협정, 과학기술 혁신 및 창조경제 협력, 치안협력 
MOU 등을 맺고 양국 간 실질협력을 ICTㆍ인프라ㆍ환경ㆍ
보건의료 등 새로운 성장동력 분야까지 확대하는 의견도 교
환하는 등 두 국가의 관계를 확장시키고 있다. 
자료출처 : 코스타리카 개황 (외교부 중남미국) 
제2장 태권도 보급 및 사범생활 시작
코스타리카 지역과 한국인 최초이민자 형님 양원건
코스타리카에서 태권도 보급 및 사범생활 시작
코스타리카 태권도의 선구자 양원기의 형님 
양원건 (1968년 코스타리카 최초이민자)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24
 
1)
 코스타리카 출신 첫 NASA 우주인 프랭클린 창 디아스가 있음 
▮ 코스타리카 지역과 한국인 최초 이민자 형님 양원건  
코스타리카 총면적은 5만 7천 평방킬로메타고요. 국교는 천주교고 
라틴아메리카는 전부다 무조건 천주교입니다. 그게 뭐 다른 종교 별
로 인정도 안 해주고 기후는 영상 20에서 30도정도 오르락내리락 
하거든요, 건기가 거기는 건기하고 우기로만 구분이 돼있습니다. 그
러니까 겨울이 없습니다. 제가 이번에 와서 옷값 꽤 많이 들었거든
요 동복을 사 입어야 되니까 거기서 뭐 이런 옷이 필요가 없어요. 
그런 나라에 살다가 와가지고 상당히 거 지출을 좀 했죠. 
그리고 그 나라가 말입니다, 그 나라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았
죠. 중미내전 때 엘살바도르 내전 때 니카라과 하고 뭐 전쟁이 많았
죠. 오래했죠. 그걸 뭐 중재를 잘해 가지고 오스카르 아리아스라는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뭐 그런 
우주인이 없죠. 달나라에 거 나사에서 뭐 이런 우주인이 있습니다. 
코스타리카사람이 나사에서 일하고 그분도 이제 은퇴를 했는데 그 
사람이 이제 그 중국계 코스타리카 사람인데 그 우주인1)이 또 유일
하게 있고 또 세계적인 조각사 있습니다. 그 교황청에서 일하시는 
분인데 세계적인 조각가, 영국이니 유럽이니 프랑스 파리니 세계적
으로 국제도시에 그분 조각품이 다 있거든요. 그런 세계적인 조각가
가 있고 그 작은 나란데 그 또 잘 알려진 축구가 말입니다.  코스타
리카가 아주 또 축구로 잘 알려져 있고 잘 합니다. 
제2장 태권도 보급 및 태권도 사범생활 시작 
 
25
아 뭐 450만정도 인구인데 그런 특출한 인물들이 많이 있고 그 
다음에 아웅산, 전두환 대통령 당시 국무요원들을 인솔해서 수행을 
하는 도중에 그 북한에서 아웅산, 미얀마죠. 거기가 미얀마 아웅산 
테러 사건 때 거기서 그 테러가 있을 때 우리 국무요원들도 죽고 거 
많이 죽었죠. 거기 돌아가신 분 중에 한 분이 이범석 외무부장관이 
그분이 이제 코스타리카 방문하실 때 방문하시고 돌아가셨거든요. 
사고로 인해서 그때 제 딸이 화동으로 공항에 나가서 색동저고리 입
고 대사님 연락 와서 부탁한다, 그래서 공항에 나가서 그분을 환영
하고 했는데 참 그 신문 매스컴을 보고 그 뒤로 얼마 안 돼가지고 
그 코스타리카 신문에 첫 페이지에 아주 대문짝하게 났었거든요 그
때 그 장관님이 명단에 들어가 있어서 정말 울었습니다. 그 당시를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그래 가지고 그 당시 대통령 이름이 알베르토 몽헤라는 대통령인
데 그 대통령께서 우리 세계적으로 그런 예는 없을 거예요. 제일 먼
저 북한하고 단교를 선언했습니다. 단교를 선언해서 거기 무슨 공간
은 없었지만 문화원 같은 게 있었거든요 다 추방시켰어요. 다나가라
고 그래가지고 지금은 모르겠어요. 그분이 우리나라에 국빈 특별한
일이 있으면 사임하셨지만 vip로 계속 초청으로 했습니다.
코스타리카는 거기 그쪽은 다 스페인 식민지였지 않습니까, 그쪽
은 많이 안 섞였고 코스타리카는 많이 섞여서 백인이 많습니다. 그 
약간 까만 사람들 아주 까맣지 않고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과테말
라도 그렇고. 과테말라는 거의 순수 인디오들 그런 분들이 많죠.
코스타리카는 중남미에서 교육수준이 가장 높은 나라 중에 하나거
든요, 고등학교까지 의무교육입니다. 자기 공부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고 돈 안내고도 사회보장제도가 우리나라보다 엄청 앞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26
 
서가 있었거든요. 지금이야 뭐 레벨이 우리가 엄청 선진국이지만 50
년, 60년 전에 사회보장제도가 의무화 되어 있었거든요. 그 당시 대
통령이 갈데롱이란 대통령인데 사회보장제도를 제일 우선적으로 만
들어 놔가지고 지금까지 의무화 되어 있습니다. 오늘 내가 어느 가
게 가서 일하면 내가 보험을 들어줘야 돼요, 안 들면 바로 적발이 
되고 조사가 나오거든요. 감독원들이 나와서 조사를 해서 적발이 되
면 엄청난 과거에 밀렸던 것까지 합쳐가지고 엄청난 벌금, 다 계산
해가지고 나온다고요, 이자까지 붙어가지고 그러니까 의무화되어 있
기 때문에 외국 사람도 들어야 되고 무조건 들어오면요, 그러니까 
어떤 사고가 날지 모르니까 아주 엄합니다. 그런 사회보장제도가, 보
험제도가 멕시코서부터 과테말라. 뭐 코스타리카 온두라스 살바도르 
이 남미 중미 5개국에 남미 11~ 유럽 스페인까지 비슷한 건 포르투
갈 그쪽으로 다 쓰고 남미에서 유일하게 스페인어를 안 쓰는 나라가 
브라질 아닙니까. 근데 제가 브라질 여러 번 가봤는데 스페인어 다 
통해요 그러니까 어마어마하죠.
코스타리카라는 미국에 상당히 가깝게 인접해있다 보니까 미국문
화가 많이 들어와 있고 미국에서 은퇴하신 분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나라 중 하나에요, 치안이 가장 안정되어 있고 그래서. 대부분
이 영어는 다 합니다 사람들이. 영어, 그 나라의 언어가 스페인어지
만 라틴아메리카는 전부 다 스페인어죠. 근데 그 우리나라도 스페인
어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어도 웬만큼은 다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고. 미국 사람들이 한 몇 만 명 와 살고 있어요, 거기. 기후가 좋
고. 사람들이 완전히 그 깨어져 있어요. 그리고 과테말라는 주로 에
스파냐어로 해서 인디오라 그러고, 인디언, 토종 그 인디언들이 대부
분의 국민들이 그런 인종이에요. 한 90%정도 될 거야 아마. 8,90%
제2장 태권도 보급 및 태권도 사범생활 시작 
 
27
가 전부 그 원주민, 인디오들로 형성이 되어가지고 교육수준도 좀 
낮고, 인구는 많은데 면적은 상당히 크죠. 코스타리카보다 몇 배는 
더 큰데 그런 나라하고 인구 밀도도 높고 하다 보니까 이 상당히 그 
깨어 있지 않고. 
그에 비해 코스타리카는 너무 깨어있고 그런 게 높다 보니까 국민 
수준도 높고 개인 국민 소득도 높고 하다보니까 사람들이 많은 경쟁
이 생기고 라이벌이 생기고 코스타리카가. 그리고 대기업들이 많이 
또 FTA 맺고 하니까 세계적인 대기업들이 많이 들어오고 하다 보니
까 이제 그 우리 한인들이 조그마한 가게 매장 두 개 세 개 갖고 있
는데 경쟁에 따라서 갈 수 없죠. 그러다보니까 조금 여유 있는 나라, 
조금 덜 깨어있는 나라. 그리고 달러와 환율이 달러나 거의 비슷합
니다. 게사라고 그러는데 게사라는 건 과테말라의 특유한 천연 보호
물 천연 그 새 이름인데 그 쪽에만 있어요. 코스타리카에도 종종 나
타나긴 하는데 참 보기 힘든 새이지요. 그 게사라는 새 이름으로 화
페단위를 만들었고  단위가 근데 달러 환율하고 비슷해요. 그래서 
돈 모으기도 좋고 수월하고. 코스타리카는 지금 530:1정도 될 겁니
다. 그런데 과테말라는 뭐 거의 비슷하니까 그런 조건 때문에 과테
말라로 오래 전에 이주하신 분들이 여러 가정 되시죠..
▮ 코스타리카에서 태권도 보급 및 사범 생활 시작
제가 도착하자마자 형님 도장에서 여러 해 동안 같이 일하게 됐
죠. 같이 도와드리고. 그 당시에는 여러분들 잘 아시다시피 중국 홍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28
 
콩 영화배우, 지금은 그 사람들이 다 세상을 떠나고 한창 선풍을 일
으켰던 이소룡, 영어로 말하면 브루스 리 인데, 그 무술배우가 한창 
세계적으로 세상에 선풍을 일으킬 때 아프리카 사람까지도 그 당시
에 그 흉내를 내고 할 정도로 선풍, 지금 한류가 세계적으로 그 하
듯이 그 당시에는 선풍을 일으킬 당시인데, 그 당시에는 태권도 붐
이 일어났었습니다. 코스타리카에. 그래서 도장이 너무 범람해지고 
학생들이 많아지고 하다보니까 제가 도움을 요청해서 제 형님이 일
손이 딸리니까 와서 도와달라고 해서 갔는데 와보고 2,3년만 살아보
고 좋으면 계속 살고 아니면 돌아가라고 너 편한대로 싱글이고 하니
까 너 마음대로 하라고 해서 갔었거든요. 그래서 뭐 2,3년만 살고 
돌아온다고 했는데 올해 떡국 한 그릇 먹고 이제 새해가 되면 떠나
야지, 떠나야지 했는데 42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태권도가 그때 세계적으로 붐을 일으킬 당시니까 그때 당
시에 협회를 조직을 하고 여러 가지 태권도에 관한 일을 많이 보시
다 보니까 태권도가 불모지에서 엄청난 인구로 불어나기 시작했습니
다. 전국적으로 그러니까 손이 딸리니까 초청을 받았어요. 군에 있을 
때 그때 당시에 지금은 무비자니까 아무 문제가 없는데 그때 우리나
라가 코스타리카가 수속을 받아야 돼서 나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군에 있을 때 수속을 받았죠. 그때는 뭐 소양교육을 받아야 되
고 신원조회가 끝나야 되고 굉장히 어려웠어요. 그 기한이 5개월이 
걸렸어요. 해외한번 나가려면 그래서 수속절차를 받고 형님이 초청
장을 보내주셨어요 코스타리카로 그때가 이제 73년 10월 28날짜도 
안 잃어버립니다. 그때 코스타리카 공항에 도착했죠. 
제2장 태권도 보급 및 태권도 사범생활 시작 
 
29
<보충자료>
중앙아메리카 이주의 역사 ①
중앙아메리카는 과테말라, 벨리즈, 코스타리카, 엘살바도르, 온
두라스, 니카라과, 파나마 등 7개국으로 구성되며  2016년 예
상 총인구는 약 4,900만명에 달한다. 
역사적으로 중미 5개국은 스페인으로부터 비슷한 시기에 독립
하였으나 파나마는 콜롬비아로부터 5개국에 비해 1세기 늦게 
독립하였고 벨리즈는 1981년에 영국으로부터 완전 독립을 얻
었다. 독립 이전에는 영국령 온두라스라고 불렀다.
경제 사회적으로 중앙아메리카는 단일하지 않은데 중미각국의 
총생산은 코스타리카와 파나마에 집중되어 있고, 일인당 소득
도 국가별로 큰 차이를 보인다. 코스타리카와 파나마는 2103
넌 기준 10,000달러를 넘으며 온두라스 2,200달러, 니카라괴
는 1,850 달러 정도로 격차를 보이며 인종구성에서도 과테말
라는 원주민 인구가 다수이고 코스타리카는 백인 인구가 비교
적 많은 편이다.
자료인용: 위키백과 및 임상래(2004), 중앙아메리카 이민의 경향과 특성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30
 
중앙아메리카 이주의 역사 ②
1970년대 이전까지 중미의 이주는 수출농업에서 필요로 하는 
인접국간의 역내 이주가 주를 이루어 일시이주의 성격이 강했
고 남성위주였다. 특히 20세기초부터 코스타리카의 바나나 농
업이 발전하여 인접 니카라과인들의 이주 시작되었다. 또한 
중미는 전체적으로 커피 농업 지역으로 이주가 생겨났다. 
중미는 7-80년대를 거치면서 산업화, 근대화, 정치적 폭력, 
내전, 경제구조 조정 등의 복합적 원인의 결과로 이주가 진행
되어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에서는 미국, 멕시코, 벨
리즈로 향하였고 니카라과인들은 코스타리카로 이주하였다. 
중미의 국내이주는 주로 미개척지로 이주하여 농사를 지어 80
년대에는 삼림이 크게 감소하였다. 
통계에 의하면 중미국가 중 벨리즈, 코스타리카, 파나마만이 
나가는 이민보다 들어오는 이민이 많은 나라이다. 1990년과 
2000년을 비교할 때 벨리즈의 전체인구에서 이민자가 차지하
는 비율은 3.8%에서 14.8%로 증가, 코스타리카는 3.7%에서 
7.8%로 증가하였고 파나마는 2.6%에서 2.9%로 증가하였고 
나머지 나라의 이민자는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90년대 이후 중미 이주의 특징은 경제위기, 정치적 혼란, 중
남 국가간의 경제적 차이 등으로 인접국간의 역내이주보다는 
역외이주가 증가, 미국 이주가 전체의 70%를 차지하는 경향
을 보였다.
자료인용: 위키백과 및 임상래(2004), 중앙아메리카 이민의 경향과 특성 
제2장 태권도 보급 및 태권도 사범생활 시작 
 
31
중앙아메리카 이주의 역사 ③
코스타리카는 중미에서 이주민이 많은 나라로 2000년대 전체
인구의 7.8%가 외국인이고 중미로부터의 이민자는 주로 학력
이 낮고 농업에 종사한다. 그러나 그 외의 지역에서 온 이민
자는 10년 이상의 고학력자가 다수이고 전문직에 종사하거나 
은퇴자가 많은 편이다. 코스타리카로 오는 이민은 주로 니카
라과에서 바나나와 커피농장으로 오며 이들은 국경에 인접한 
지역 출신들이 많이 온다.       
코스타리카로의 이민은 중미지역 역내 이주의 70%이상이 코
스타리카행을 선택하며 역외이주자 중에는 미국인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영국 신경제재단의 행복지수 조사에서 코스타리카는 2009년
과 2012년 1위에 올랐다. 143개국을 대상으로 삶의 만족도, 
기대수명, 탄소지수 등 정신적 행복과 물질적 풍요를 반영한 
지수다
그러나 유엔 중남미경제위원회 보고서를 보면, 2000~2010년 
물가 상승률이 10.1%로 중남미 평균(7.8%)보다 높다. 빈곤층
은 17.8%에 이른다. 상위 20%가 소득의 49.3%를 가져가는 
반면 하위 20%는 4.7%밖에 못 가져, 16.5배가 차이 난다. 소
득격차를 나타내는 지니계수는 1990년 0.438에서 2012년 
0.504로 나빠졌다. 유엔개발계획의 인간개발지수로 보면 세계 
62위로 나타났다 . 
자료인용: 임상래(2004), 중앙아메리카 이민의 경향과 특성
한겨레신문 2014.7.11. 김순배통신원 기사 
제3장 태권도를 통한 코스타리카 한인사회 
기반 마련
75년 주 코스타리카 한국대사관 설립에 기여
김종필 총리와의 만남과 외무부 장관상 수상
태권도와의 인연과 태권도 사범의 역사
 주 코스타리카 대한민국 대사배 태권도대회 
원로사범으로 참석(2011년)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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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년 주 코스타리카 한국대사관 설립에 기여  
제가 73년도에 가 가지고 75년도에 대한민국 코스타리카 주재 대
한민국 공간에서, 그 당시에 대한민국 공간이 없었습니다. 75년도에 
이제 아 그거부터 먼저 말씀드려야겠네요. 공간이 없었는데. 이게 그 
영웅담인데. 75년도에 우리 대한민국 공간이 생겨나게 개설된 동기. 
왜 코스타리카 대사관이 개설되게 된 동기. 어떻게 해서 개관이 됐
는지. 여기에는 저희 형제들이 저희 형님하고 저하고의 노력이랄까
요, 도움이랄까 협조로서 대한민국 공간이 우리 대한민국 공간이.    
우리 공간이라는 것은 대한민국에 사시는 분들은 잘 이해를 못 하실 
거예요. 왜냐하면 대한민국 공관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하나의 그 
공공기관이면서 대한민국이 작은 나라거든요, 그게 대한민국입니다, 
대사관이. 그 당시에 그 북한이 먼저 코스타리카에다 공관을 남한보
다 먼저 공관을 한번 개설하려고 노력을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그럴 당시인데 저희들이 한국 공관을 먼저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멕시코 대사님께 연락을 했지요. 멕시코에서 그때 당시에 김
용식 외무부 장관 그때 당시에 외무부 장관이신데 아마 그쪽으로 본
부로 연락을 해서 외무부 본부에 연락을 해서 지금은 외교통상부라 
그러죠? 그 당시에는 외무부였는데. 그래서 연락을 하니까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긴급회의를 열고 빠른 시일 내에 코스타리카에 빨리 대
사를 파견해야 된다는 의견이 모아졌지요. 그래 가지고 멕시코의 이
장이 대사님께서 한국정부에다가 연락을 하셔가지고 본국 정부에서 
제3장 태권도를 통한 코스타리카 한인사회 기반 마련  
 
35
외무부 장관이 그 당시에 스페인 마드리드에 계시는 이복형 공사님
을 대사로 발령을 하시게 됐어요. 마드리드 계시던 분을, 지금 그분
이 누구신가 하면 경기도 고양시에 가면 벽제군에 중남미 문화원이
라고 있습니다. 지금 문화원 원장님으로 계십니다. 그분이 지금 코스
타리카로 아무 동행하는 분도 없이 가방 하나만 딱 드시고 외교부에
서도 아마 그런 전례가 없는 특별한 케이스로, 비밀리에. 그렇게 해
서 스페인 마드리드에 계시던 이복형 공사님을 코스타리카 대사님으
로 발령을 내리셨어요. 우리 대한민국 정부에서. 
그래서 그분이 코스타리카로 오시게 되어 가지고 저희들이 연락을 
받고 그 75년도에 저희들이 코스타리카 사무소에 있는 산호세 국제
공항에, 그 공항 이름이 후안 산타마리아공항인데 그 공항에 저희 
형님하고 저하고, 그리고 이제 그 혹시 그 당시 좀 불안해서 태권도 
유단자들, 제자들을 좀 데리고 오라 해서 같이 그 공항에 나가서 대
사님을 접견하게 마중을 나가서 그 대사님을 모시고 호텔로 저희들
이 안내했죠. 그때부터 시작이 된 거죠, 대사관을 개설 할 모든 일들
이 진행이 돼가는 과정이고. 그리고 워낙 외교관에서 외무부에서 베
테랑으로 그리고 아주 그 능력 있는 대사님으로서 외교관으로서 알
려져 계신 분이기 때문에 정부에서 그런 분을 또 파견을 하셔가지고 
코스타리카로 아마 발령을 하신 것 같아요. 그래서 저희와 협력해가
지고 75년도에 대한민국 공간이 그 건물도 얻으러 다니고 뭐 대통
령께, 그 나라 대통령께 신청하시고 그리고 이제 그 매스컴에서 와
서 기자들이 취재할 때 대한민국 우리 태극기를 게양을 하는 순서가 
됐는데 그 당시에 그 공간에 직원도 없고 아무도 없었어요. 그렇다
고 대사님이 국기 게양을 하기는 좀 그렇잖아요.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36
 
주 코스타리카 한국대사관
그래서 그동안에 자네가 여러모로 불철주야 수고가 많았으니까, 
그리고 열심히 일을 했고 수고를 많이 하고 많이 도왔으니까 자네가 
이런 영광을 가져보라고. 절보고 태극기를 게양을 하고 올리라고 하
더라고요. 그냥 뭐 조그마한 사무실이고 그 자리에 종종 가보거든요 
지금도. 40년이 넘었는데도 그 자리에 한번 가 봐요. 그리고 그 장
소에 국기 게양을 하는데 그게 너무 제가 거창한데다가 비교하면 주
제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9.28 서울 수복 때 그런 영화를 제가 
여러 번 봤거든요. 그 해병대, 중앙청 국기게양대에다 서울수복을 할 
때 국기게양을 할 때. 그런 어마어마한 감동적인 스토리를 거기다 
비교하면 안 되지만 저는 그런 걸 연상을 했어요. 
조그마한 나라라도 그래도 우리나라에요 그게. 대한민국 대사관이
제3장 태권도를 통한 코스타리카 한인사회 기반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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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그게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고 우리나라라고. 대한민국이라고요. 
거기 나와 있는 대사관은 대통령이에요. 코스타리카에 있는 대통령
이 누구냐 하면 대사님이라고. 그걸 잘 인식을 못하시고 계시는 분
이 혹 가다 있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 안하거든요. 그래서 거기서 국
기 게양을 하니까 그 사진을 찍고 무지무지한 감동을 제가 잃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 김종필 총리와의 만남과 외무부 장관상 수상  
1977년에 대통령 특사로 특사자격으로 그 당시에 총리를 지니신 
김종필 총리께서 이 라틴아메리카 순방을 하셨어요. 모든 그 똑같이 
대통령 예우를 해드렸거든요, 코스타리카 정부에서. 왜냐면 이복형 
대사님이 그 당시에 워낙 외교를 잘하셔가지고 꼭 대통령 예우를 했
다고 원수 예우를. 그래서 그 총리께서 오셔가지고 날 보고 대사님
이 이복형 대사님이 그때 교민회장으로 있었으니까 총리가 계신 호
텔에 가서, 대사관에서 벤츠, 공용차를 내줄테니까 벤츠를 타고 그 
호텔을 가서 총리님을 만나서 인터뷰를 하라고. 그걸 원하시니까 교
민대표 누가 인터뷰를 하고 싶다, 그러시니까 제가 그 교민대표로 
가서 그 총리님하고 한 한 시간 가까이 인터뷰를 하는 과정이 그 재
밌는 인터뷰가 있는데 그래서 아, 그 인터뷰를 하는 와중에 뭐라는
가 하면 참 수고가 많다 하면서 어떻게 무슨 일로 여기 와서 이렇게 
살게 됐냐고 예 태권도로다가, 나름대로 국위선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총리께서 뭐라 그러시는가 하면 그 당시에, 아 내가 파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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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과이 갔었는데 내가 유럽 전역으로 해서 거의 세계를 한번 돌다시
피했는데 순방을 하다시피했는데 내 파라과이 가서 당한 수모를 지
금도 털어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그런 말씀을 제게 하시더라고. 
무슨 수모를 그렇게 겪으셨습니까 총리님, 그때 특사 자격으로 오
셨으니까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특사자격으로 오시니까 특사님 어
떻게 그렇게 무슨 일로 그런 어려움을 당하셨습니까, 내가 질문했거
든요, 그러니까 리셉션, 파티에서 그 국가 고위 삼부요인, 여야국회
의원들 다 했겠지. 모임장소에서, 다 파티가 끝나고 마무리 지을 무
렵에 그 나라 파라과이 국회의장이 총리님 사적으로 뵙자고 그러더
래. 그래서 그 귀빈실에 가서 단독 인터뷰, 통역을 통해서 인터뷰를 
하는데 뭐라고 얘기하는가 하면 다짜고짜 그 나라 국회의장이 하는 
말씀이 대통령한테 연락하라, 역사를 감추면 그건 내가 또 비판의 
대상이 되니까 그래서 그 파라과이 국회의장이 우리 저 김종필 총리
님께 요거는 내가 조금도 보탬이나 섞은거 이게 하나도 없어. 내가 
뭐 그럴 이유도 없고 사실 그대로 말씀드리는 거니까.
그러면서 뭐라는 가하면 한국 정부에 본국 정부에 연락을 해서 대
통령한테 바로 연락을 해서 그때 당시에 박정희 대통령, 한 4만톤급
이나 5만톤급 여객선이나 화물선이나 파라과이에 좀 본국 정부로에서 
보내달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시더래요, 그 국회의장이. 그래서 우리 
김종필 총리께서 뭐라고 그러셨나, 그 큰 배를 왜 파라과이에 보내달
라고 하십니까 하니까 당신네 이민 와있는 동포들 있죠, 한사람도 남
기지 말고 몽땅 실어다가 당신네 나라에 좀 데리고 가주시오 이러대. 
문제가 보통 문제가 아니야. 매스컴에서 뭐 신문만 열면 한국 사람들 
그 브로커들, 또 살인사건 뭐 싸우고, 부정부패, 부조리, 한국 사람들
이 매스컴에서 막 오르락내리락 하니까 내가 국회의장으로서 말씀을 
제3장 태권도를 통한 코스타리카 한인사회 기반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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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리니까 당신이 대한민국 특사로 왔다니까 대한민국 대통령한테 직
접 보고를 하셔 가지고 그렇게 해 달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 잘 오시다가 파라과이에서 그냥 국회의장한테 그런 이
야기를 딱 듣고 나시니까 아무것도 안 보이고 그때부터 스트레스 받
기 시작하는데 이 머리가 아프고 온몸이, 그래서 제가 태권도를 하
다보니까 조금 이제 그 지압 같은 거 할 수 있으니까, 그저 총리님 
제가 조금 잘 하진 못하지만 지압을 해드릴까요 하니까 예, 해주면 
좋으시죠. 그러더라고요. 한 10분 동안 해드렸더니 아 좋다고 괜찮
다고, 제가 좀 엉터립니다 이러니 그런 분들이 한국에서 얼마나 좋
은 사람들한테 지압받고, 마사지 받고 그러시겠어요. 그런데 뭐 거긴 
아무도 없으니까 나름대로 해서 도와드렸죠. 드리니까 아우 좋다 그
러시더라고. 진짜 좋은지 안 좋은지 모르겠지만 이게 총리님을 내가 
막 주물렀다니까. 그리고 나니까 뭐라 그러시냐 하면, 그런데 여기와 
가지고 또 그런 분 들을 만났다 이거에요. 정부에 고위층에 있는 분
들을 뭐 별의 별사람 다 만났어요. 장관들도 만나고 대통령... 그런 
모임에서 그 나라가 워낙 좁으니까 우리가 그 알려져 있더라고요 보
니까. 그러니까 그 형제분들이 와가지고 이렇게 국위선양을 잘하고 
그분들이 좋은 이미지로 이야기를 한국 사람에 대해서 어떠냐고 물
어봤더니 이러이러한 사람들이 와서 살고 있다, 그러면서 국가의 공
공기관에 와서 자원봉사도 이렇게 열심히 하고 내가 알기로 이름이, 
이름까지 뭐라고 대더래, 그러면서 이렇게 이렇게 하고 있다는 소식
을 들으니까 내가 그때 받았던 스트레스가 다 풀어지는거 같다 뭐 
그런 말씀을 하시고 이분이 떠나시면서 하여튼 몸 건강하라고 그러
고 잘되기를 기원한다고 떠나시면서 인사를 하시면서 모든 그 예정
의 모든 과정을 이렇게 하시듯이 정리하듯 본국 정부에 가서 청와대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40
 
에 가서 보고를 한 거에요. 김종필 총리께서. 
대통령 앞에서 브리핑을 해요, 뭐 나라마다 다시 다 브리핑을 했
겠지. 코스타리카 갔더니 두 형제가 이렇게 이렇게 하고, 국위선양을 
하고 있더라, 국위선양을 북한 공간을 저지 시키고 거기서 먼저 우
리나라 공간을 개관해서 태극기를 올리게 한 장본인들이 이 두 형제
다 이렇게 해가지고, 대통령 각하께 보고를 드립니다 하고 보고를 
했네. 다음 달에 박정희 대통령 친필로, 친필로 무공, 국민무공훈장 
있죠? 국민무공훈장 그거하고 그 다음에 외무부장관, 김영식 외무부
장관 포상, 대통령 포상하나, 외무부 장관 포상하나 그게 대사관으로 
파우치로 왔어요. 코스타리카 공간으로. 그래서 이복형 대사님이 전 
교민들 다 모이게 하고 기념사진 찍고. 그때 김종필 총리께서 특사
로 오실 때 대사관 만찬에 우리 형제들도 다 갔었거든요 다 가서 뭐 
얘기도, 궁금한 거 말씀하시면 보충도 해드리고. 그 당시에 경호원이 
없으니까 우리 태권도 배우는 유단자들, 그 현지인 유단자들 그런 
아이들 이제 그 검은 띠 그런 아이들을 잘 그거해서 그 계시는 호텔 
이런데 배치해놓고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을까봐.,그리고 북한 공간, 
북한 외교관들이 와있는 그 숙소에도 항상 감시하게끔 어떻게 활동
을 하고있는지 그런 것들도 인포메이션을 알려주고 그랬거든요. 그
러다 보니까 박정희 대통령께서 포상을 하사를 하셔가지고 지금도 
마이애미가면 제 형님 집에 대통령께서 하사한, 박정희 대통령 무공
훈장 그게 그대로 잘 보관되어있거든요. 
제3장 태권도를 통한 코스타리카 한인사회 기반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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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와의 인연과 태권도 사범의 역사
태권도는 제가 좋아서 시작했지요. 저희 집안 식구들이 운동을 다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학교 다닐 때부터 배우고 군에서도 하사
관 학교를 나왔거든요. 원주. 원주에서 하사로 가서 교육도 가르치고 
자대에 돌아와서 태권도도 가르치고 그랬거든요. 그리고 군에 있을 
때는 딱 한 가지만 예를 들면, 포상을 한 번 받았어요. 제 나름대로
는 탤런트가 없는 것 같은데, 군에서 군대에서 그때 당시에 70년도 
당시에 군의 부조리, 내무반의 폭행, 상관들의 그, 요즘도 그런 일이 
빈번한데 그 당시에도 40년 전에도 그랬거든요. 
그래 가지고 그 전 군이 60만 대군인데 국방부에서 선별하는데 
제가 거기에 추천이 됐어요. 우리 그 사단의 연병장이 거기다가 막
사를 짓고. 실내에서 하는 게 아니라, 실내에서 하면 사람들이 관람
을 못하잖아요. 내무반에서 하면 제대로 된, 바깥에 가건물, 내무반
을 만들고. 연극을 하라 그래서 한 2개월 동안 소대장님 한 분하고 
그 내무반 해가지고. 우리는 점호도 없고 그래 가지고 매일 그 교육
을 받았어요. 정화. 대한민국을 정화시키는 것. 그 자리에 누가 오셨
는가 하면 한신장군, 가장 뭐 대한민국에서 제일 높은, 군에서 제일 
높은 수뇌들이 다 왔거든요. 그게 연병장에 대낮에 별이 말입니다. 
밤의 별처럼 많이 떴다고 그래서. 그런 자리에서 제가 내무반장으로 
거기서, 그 한신장군 그 분들이야 다 돌아가셨겠지. 아주 유명한 일
군 사령관도들.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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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높은 수뇌 분들이 오셨을 때 그 12사단 연병장에서 제가 연극
을 해가지고 그게 잘못하면 군대란 데가 잘하면 영웅이 되지만 잘못
하면 엄청난 제재가 따를 수도 있고 한데, 열심히 해가지고 장군들
이 말입니다. 정말 만족해가지고 헬기타고 다들 와가지고 있다가. 근
데 딱 끝나자마자 12사단 사단장이 우리 연대장님보고 내일 당장 
포상휴가 보내라고. 휴가 보내라고. 만족해가지고. 군에 있을 때는 
그런 좋은 경험이 있습니다. 좋은 역사가 있고. 
사회에 나와서도 태권도 했죠, 사회에서도 좀 하고 그랬는데 호신 
그걸로 운동하고 관심이 많았어요. 저는 합기도도 좀 했거든요. 합기
도 하고 태권도. 군에서 저 하사관 학교에서 태권도 가르치고. 그래
서 그 이 뭐 그렇다 보니까 뭐 좋다 보니까 좋아하는 운동이고 하다 
보니까 그리고 불모지에 가 가지고 태권도 불모지죠, 
제2회 세계태권도 선수권대회 코스타리카 대표팀 참석
제3장 태권도를 통한 코스타리카 한인사회 기반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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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태권도의 태자도 모르는 나라에서 저희 형님, 태권도 그 
일로 코스타리카로 갔죠. 제가 그래서 제가 태권도, 제가 두서없이 
말하지만 다 정리를 하실거죠, 75년도에 오셔서 그 다음에 한 5년간
이니까 80년도부터는 태권도만 쭉 하시다가 한 10년간 태권도를 영
리 목적으로 하고 태권도도 오래 하고 너무 많은 데 도장들이 전국
에 개관이 되고 개설이 되고. 편의점처럼 돼버리니까, 태권도 도장이 
전국에. 저런 범국가적으로 생각하면 참 기쁜 일이죠. 
그런데 제 개인적으로 사영리를 생각하면 제 라이벌이 되죠. 제가 
이제 그런 거 안 해도 되는데 괜히 제자들한테 그러지 말고, 제가 
하던 도장들 다 양보해주고 십 원도 안 받고 도장을 다 인수해줬어
요. 시골 지방 도장부터 다 주고 신임할만한 제 제자들을. 그래서 이 
사진보니까 생각이 나는데요. 그 나라 그 도장하는 관장들은 자기 
나라 대통령 사진 안 붙여놓습니다 절대로. 관공서 아니면. 관공서도 
잘 안 붙여놔요. 그 나라 사람들은 대통령을 숭배하거나 그런 거 안 
해요. 가보면 제 사진하고 제 형님 사진 갖다 걸어 놓습니다. 북한에 
뭐 무슨 김정은이나 그런 거 걸어놓듯이 그걸 가장 영광으로 생각한
다고 그 사람들은. 사인 하나만 해 주면, 매년 정기 태권도 대회가 
있는데 매년마다 국립 체육관에서. 거기서 어떤 때는 저희가 대사님
하고 늦게 대회에 입장하면, 그건 위법인데 어떤 면에서는. 우리나라
에서 대통령이 들어오신다고 해서 모든 경기를 중단시키거나 그런 
거 없잖아요. 아니 저가 대통령도 아닌데 국립 경기장인데 거기서 
경기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도 그런걸 보여주는 거예요. 스승
에 대한 예우. 모든 동작이 올 스톱되는 거예요.
관중들이 한 몇 천 명 모이는 자리에 그 스톱 하면 모든, 그러면
서 저 관장님께. 대사님께는 경례 그거는 없어요. 관장님 누구누구에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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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마에스트로, 마스터 누구누구한테 경례 하면 모든 사람들이 태권
도 막 시합하고 있는데 막 이러고 있는데 시합 중인데도 모든 경기
가 중단됩니다. 그리고 저희들을 향해서 인사를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다음에 "계속" 하면, 전부 한국어거든요 용어가. 그러면 경기가 계
속 진행이 되는 거예요.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그 관중들한테, 관중
들은 이해 못할 거 아니에요. 야 저거 무슨 뭐 독일 뭐 독재체제도 
아니고 그런 식으로다가 그렇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좋아한다
고요 자기들은. 우리가 그렇게 하라는 얘기를 안했는데도. 그런 전통
과 전례가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어요. 인터넷 들어가 보시
면 코스타리카 태권도 역사 하면 저희 형님 이름이 바로 나오거든
요. 양원건이라고. 저는 원기고.
 코스타리카 제자들과 함께 기념 사진 (2017.4)
제3장 태권도를 통한 코스타리카 한인사회 기반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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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태권도는요, 영리목적으로만 가르친 게 아니고 앞으로의 
우리의 삶의 터전을 기반을 닦아나가기 위해서 앞으로 많은 한국교
민들이 이주해서 와서 살 때 남의 나라에 와서 살다보면 법적인 제
제도 많이 받고 어려운 일도 많이 생기거든요.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이게 통하지 않습니까, 인맥이란 게 있잖아요. 관계 이런 걸 위해서 
저는 이제 그 나라의 이민청의 경찰들, 경찰청하고 이민청하고 다릅
니다. 우리나라하고 마찬가지죠. 
그 다음에 이제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마약단속반, 이 미국도 
DEA(Drug Enforcement  Administration)라고 있거든요, 마약단속
반이 말입니다. 그 힘이라는 것이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일반 경찰들
하곤 다릅니다. 그 마약단속반. OIJ라고, orcanismo investicacion? 
jubicial에 대한 약자거든요. 여기를 제가 30년을 가르쳤거든요. 보수
는 없습니다. 보수 없이. 그 나라의 대법원장, 이 분은 돌아가셨어요. 
대법원장으로부터 표창장을 받았거든요. 봉사했다고 해서. 그래서 이
민국 경찰청 마약단속반 검찰청, 이게 미국으로 말하면 FBI입니다. 
사법살인사건이나 뭐가 나면 여기에 대한 단속으로 경찰이 가야, 일
반경찰이 와서 처리하거든요. 이사람들이 가기 전에는 절대 터치를 
못해요. 어떤 그 강력사고나 범죄 모든 게. 그래서 특별한, 강력한 
수사기관이죠. 이 사람들을 매년 6개월 씩 정기적인 수업이 있거든
요. 1년 내내 있는 게 아니고 6개월 코스로 태권도 수업이 있어요. 
태권도하고 제가 그 다음에 또 합기도도 했거든요. 그래서 호신을 
가르쳤기 때문에 나라가 조그마하다보니까 어디 가도 만나고, 저리 
가도 만나고, 그래서 제 신분을 항상 조심해야죠. 말 한마디도 그렇
고 행동도 그렇고. 나라가 조그마하고 하니까 아는 사람이 많으니까 
대의적으로 이런 데서 조심하고 잘 조심해서 지내며 살았습니다.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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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제 다큐멘터리로 나오는데요. 2막으로 들어가는데 제가 말씀
드리면, 이런 분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이게 통하겠
습니까. 이게 뭐 사회에 좀 봉사했다고 해서 요새 억울하게 경찰들
에게. 감옥에 갔다던가 하는 사람들을 구제해 나올 수 있을 수가 없
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안 되죠. 그게 통하지도 않고. 그런데, 제가 
너무 아주 뭐 잘못된 사람이 아닌 이상은 어떻게 하든지 구제해 가
지고. 그거에 대한 스토리가 나오거든요. 드라마처럼 나오는데.
78년도 당시에 그 항구, 우리나라로 말하면 인천항구 정도 될 거
에요. 그 지역 이름이 항구 이름이 푼타아레나스라는 곳인데, 푼타아
레나스 그 항구 이름이 왜 우리나라에 그 원양어선단들이 그 당시에 
한 여라 한 20척정도 배가 들어오고 나가고 그래서 잡은 고기를 어
디다 수출했냐 하면은 바로 운반선이라고 그래 가지고 나르는 배가 
오면은 일본에서, 일본으로 수출했어요. 그니까 그 그게 생선회용으
로 바다와 노인에 나오는 고기 있잖아요, 그런 고기들을 잡아서, 생
선을 잡아서 코스타리카에 그 지역에, 인근에 그 고기가 많이 잡히
거든요, 그 고기를 잡아서 일본으로 수출했어요. 
그 당시에 우리나라가 원양어선 옛날에 70년도 그 당시에, 80년
도 그 당시 그 그때 당시 근데 거기서도 그런 문제들이 많이 생겼어
요. 그 망망대해에서 그 선원들이 고기를 잡고 그러다보면 그 뭡니
까, 스트레스 많이 받잖아요, 뭐 우울증이랄까 가족 생각, 그 다음에 
한국에 들어오면 회포를 풀기위해서 술 마시고 뭐 이러다보면 또 거
기서 불상사가 많이 일어나요. 그러니까 점점 그 수준에 있게끔, 자
기가 대한민국 사람이라는 거 그거도 항상 인식하고 매사에 좀 조심
을 해야 되는데 그렇게 인식 못하고 자기 나름대로 행동하다보니까 
실수가 많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 당시에 제가 거기 또 태권도 도장
제3장 태권도를 통한 코스타리카 한인사회 기반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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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직원이 하나있었거든요 직원이, 그래서 그 하루는 가니까 저희 
도장을 막 두드려, 선장 여러분, 선장님들이 찾아와가지고 저 무슨 
일이냐니까 배가 출항을 못한데. 다 압류되어있데 검찰에, 법원에. 
그 압류 되어 가지고 내가 이거 저 우리 같은 동포도 아니신 분도 
더군다나 좋지 않은 그런 일들이 있었는데 그래서 그 그렇게 되면
은. 이제 하루는 가보니까 경찰청에 다 구류, 압류되어있다고 그래
요. 선원들이. 이걸 어떻게 하면 좋냐 이거야. 하루에 배는 시동을 
끌 수가, 그 엔진을 끌 수가 없대요. 24시간 켜놓는데. 그럼 하루에 
들어가는 그.. 재정이 돈이 엄청난데 그 여러 척이니까 배가. 그 배
도 중요한 사람이 들어가 있고. 그 경찰청이 들어가 있는. 그런데 뭐 
손에는 뭘 잔뜩 들고 왔어 선장들이. 이제 그 뇌물이지. 그래서 내가 
일단 그게 뭡니까, 양담배 뭐 위스키 뭐. 주류 이런 걸 들고왔어, 그
래서 이걸 어떻게 뭐 갖다 주면서 해결해보려고 아마 그러는데 벌써 
검찰에까지, 괜히 이런거 했다가 선장님들까지 같이 들어가게 되니
까 그건 다 도장에 보관해두라고 보관해두고 한번 일단은 가서 보
자, 그래서 이걸 다 두고 가서 봤단 말이에요. 
가서 가보니까 머리 숙이고 있는데 그 당시 70년도 78년도 당시
니까 우리 국민의식이 그때 만해도 상당히 수준이 미달, 미달이랄까 
뭐 지금이야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겠죠. 그래가
지고 가서 보니까 진짜 많은 우리 선원들이 거기 이제 무슨 구류, 
임시로 그 해놓은데 있잖아요. 경찰청에, 보호소에. 보호소라고 그래
야되나? 잘 말이 안 나오네 그래서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배가 출
항을 못하고 있는 거야, 거기 기관장도 있고 갑판장도 있고 직책 있
는 분들이 다 들어가 있으니까, 배가 출항을 못해. 그래가 압류, 티
켓이 다 붙어있고 배는 출항도 못하고 그렇게 됐어. 또 거기 태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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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던 제자의 뭐 아버지가 검찰에 관한, 경찰청 그래 가지고 찾아
가서 내 그 모든 걸 또 내 자존심이고 모든 걸 다 이렇게 접어두고 
가서 어떻게 합니까, 우리 범국가적으로 볼 때 엄청난 손해란 말이
야. 그 당시 그 회사들이요, 돈이 없었어요, 나가서 정부에 다 융자
받아서 정부의 그 국민들의 세금들이었다고. 그걸 가지고 원양어선
단들이 그때 나갈 당시였죠. 회사에 그런 뒷받침이 있을 수, 다 그 
국가지원을 받아가지고 나가, 그런 돈이니까 따지고 보면 국민들 세
금이거든요. 
근데 나도 그 한국 사람인데 모른 척 할 수는 없잖아. 그래서 이
제 모든 인맥을 동원해가지고 경찰들은 다 내가 그 신분증만 와서 
보이면 내 도장에서 무료로 가르쳐 줬거든요, 돈 안 받았어요 경찰
들은. 무조건 경찰들은 돈 안 받았어. 그 사람들이 돈을 낼만한 여유
도, 보수도 많이 받지도 못하니까. 그래 가지고 해결해줬어요. 그래
가지고 다들 그냥 출항을 한, 며칠을 남기고 출항을 하게, 배가 다 
떠나게 되니까 그 선장들이 고마워가지고 자기 배에다가 초대를 해
서 그 맛있는 회 그거에다가, 배에서나마 준비해 가지고 그때 당시 
동아일보 기자가 왔었어요. 그래서 그 내가 있다가 기자보고 이런 
건 쓰지말라고, 불미스러운 일이니까 덕스럽지 않으니까. 국위선양도 
아니고, 국위선양이 아니라 그건 완전히 손상이 되니까 그런 거 알
려지면 우리 국민들한테도 알리지 말아달라고 본국에다가. 그때당시 
동아일보 기자가 왔었다니까. 그래서 내가 그 양반을 안내하고 뭐 
관광도 시켜드리고 이래가지고 모든게 잘 해결되어 가지고 있었던 
일들, 그런 일들이 78년도에 있었었지요.
제3장 태권도를 통한 코스타리카 한인사회 기반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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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자료>
태권도의  역사 ①
태권도의 역사는 연원을 중심으로 보면 영고, 동맹, 무천 등
의 원시종교의식 때부터 시작된 행위가 발전하여 전통무예로 
이어지고 이를 바탕으로 지금의 태권도가 완성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고, 태권도라는 용어가 쓰이기 시작한 광복 이후로 
보는 시각도 있다. 
태권도의 연원을 고대로부터 보면, 고대 고분벽화나 불상, 문
헌들에서부터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 이후 고려시대에는 
‘수박희(手搏戱)’라는 무술이 자주 언급되는데, 수박희는 삼국
시대부터 행해지던 택견이 체계화 된 무예로 진화되었고 조
선시대에도 수박희가 계속 성행하여 수박희로서 인재를 시험
하여 뽑기도 하고, 왕이 관람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일
제강점기에는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과 무장 항일운동에 수단
으로 사용될 것을 우려하여 무예수련을 금지하였으나, 태견의 
명맥은 이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과 무장 항일운동에 수
단으로 사용될 것을 우려하여 무예수련을 금지하였으나, 태견
의 명맥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자료출처 : 조정미(2013). 대한민국의 국기, 세계로 나아가다
국가 기록원 홈페이지 자료,   
태권도의 역사  ②
광복 이후 1961년 9월 16일 대한태권도협회를 창설되고  
1963년에 제44회 전국체전에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1971년에는 태권도의 우수성과 가치를 인정받아 국기(國技)
로 정해지고, 1972년에는 태권도 중앙도장 겸 시합장인 국기
원을 개원하였다. 1973년 서울에서 개최된 제1회 세계태권도
선수권대회에 참가한 19개국의 대표들이 세계태권도연맹을 
창설하였다. 
이후 태권도는 1986년 제10회 서울아시아경기대회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고 1988년 서울 올림픽과 1992년 바로셀
로나 올림픽에서 시범경기로 채택되어 경기를 치룬 후, 2000
년 시드니 올림픽대회에서 정식 경기종목으로 채택되어 명실
상부한 세계의 스포츠가 되었다.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태권도가 채택되기까지의 추진 경과 
-
1961년 : 9월 대한태수도협회 창립
-
1963년 : 제44회 전국체육대회 경기종목 채택
-
1965년 : 대한태권도협회로 개칭
-
1972년 : 국기원 준공
-
1973년 : 제1회 세계선수권 대회 개최
-
1986년 : 제10회 아시안게임 태권도경기 실시
-
1988년 :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 1992년 바로셀로나올림픽 시범경  
          기 실시
-
2000년 :제27회 시드니올림픽, 2004년 제28회 아테네올림픽, 2008  
         년 제29회 베이징올림픽, 2012년 제30회 런던올림픽 정식  
         종목 실시
-
2013년 :태권도 올림픽 핵심종목 채택
자료출처 : 조정미(2013). 대한민국의 국기, 세계로 나아가다
대한태권도협회 홈페이지 자료, 
제3장 태권도를 통한 코스타리카 한인사회 기반 마련  
 
51
태권도의 해외진출 ③
태권도의 해외진출은 기본적으로 진출 시기별로 구분되고 있
다.  
제1시기는 1940년대부터 1957년 전후의 시기로 택견의 형
식에 수박도를 기본으로 하는 형태로 전파되면서 태권도 사
범들이 개인 자격으로 산발적 해외진출한 시기이다.
제 2시기는 1958년부터 1972년 전후로 군인들을 중심으로 
한 국가적 파견 단계이다. 1958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온 베트남의 고딘디엠 대통령이 전방의 29사단의 태권도 시
범을 보고 시범단의 베트남 유치를 간청했다. 국방부 주도로 
우리나라 최초의 국군 태권도 시범단이 구성됐고, 최홍희가 
인솔책임자로 임명되어(태권도 신문, 1998, 10, 5) 베트남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을 순방하면서 시범을 보였다. 따라서 이
후 베트남을 최초로 하여 일본, 싱가포르, 홍콩, 대만, 태국, 
필리핀, 구미 각지에 거의 모든 나라의 군부, 경찰, 일반인들
에게 태권도가 보급·소개되기에 이른다. 
70년대 국내외의 태권도 인구가 급속도로 확대되자 태권도
가 국제적 스포츠로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 줄 
기구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972년 태권도의 기본 사업인 
심사, 경기, 교육 등을 수행할 기구로서 ‘국기원’이 건립되었
다.
자료 출처 : 김경지 2008.  ‘문화기술적 접근을 통한 태권도 전공자의 
해외진출 활성화 방안 ’, 경희대 박사학위 논문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52
 
태권도의 해외진출 ④ 
제 3시기는 1973년부터 1985년 전후의 시기로 1973년에 대
한태권도협회는 제 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를 서울에서 개
최하고 그 해 5월 30일 서울에서 프랑스, 홍콩, 대만, 크메
르, 미국, 아이보리코스트,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보르네이 
등의 대표가 모여 세계태권도연맹(WTF)을 창설함으로써 태
권도의 세계적 중흥에 앞장섰다.
4단계는 1986년부터 1992년 전후의 시기로 1986년에는 태
권도가 아시안 게임 정식종목으로 채택됨과 동시에 개막식 
공개행사에서 태권도 시범을 아시아에 방송함으로써 엄청난 
홍보효과를 내게 되었다. 아시안 게임에서도 금메달 8개중에
서 7개를 획득하는 등 종주국으로서의 위상을 드높였을 뿐 
아니라 아시아 각국에 아시안게임 출전을 위한 태권도 인구
의 저변을 확대한데 그 의의가 크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 단계는 1993년부터 현재까지로 전 세계 7,000여 만 
명이 수련하는, 더 이상 태권도가 한국인만의 것이 아닌 세
계인의 것이 된 세계적 공유문화 단계이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 및 올림픽 영구종목으로 확정에 따라 
태권도 수련인구의 폭발적 증가와 그 저변확대의 파급효과는 
따라서 현재 세계태권도 연맹에 소속되어 있는 국가는 2016
년 현재 아프리카 지부티가 207번째 회원국으로 승인 받아 
태권도가 207개국으로 전파되어 있다. 
자료 출처 : 김경지 2008.  ‘문화기술적 접근을 통한 태권도 전공자의 
해외진출 활성화 방안 ’, 경희대 박사학위 논문  
제4장 코스타리카에서 태권도 사범과 
한인회장으로서의 삶
75년 주 코스타리카 한국대사관에서 결혼
교회 중심의 한인사회 형성에 주도적 역할 수행
세계태권도 대회 코스타리카 대표팀 단장 참가
코스타리카 한인회 운영과 한인회장 활동
90년대 의류업 시작과 한인 영주권 신청에 기여
 양원기씨의 마약단속경찰증 
(태권도 관련 자원봉사)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54
 
▮ 75년 주 코스타리카 한국대사관에서 결혼 
제가 결혼은 75년도에 했습니다. 73년도에 가서 75년도에. 다행
히 외국 사람하고는 안하고, 같은 동포끼리 결혼을 하게 됐습니다. 
초청을 해서. 장인 어른하고 저희 아버님하고 같이 근무하셨거든요. 
같이 일을 하셨어요. 제가 방문을 하고 오고가고 했지만 결혼까지는 
생각을.. 이성적으로는 생각을 안했었는데, 거기 가보니까. 저희 아
버님도 몇 개월 살다 가셨거든요. 다니러 오셨었어요. 여기 와보니까 
아니 뭐 한국 처녀가 하나도 없고. 아가씨들은. 거기서 있다 보면 현
지인들과 결혼을 해야 할 것 같고 하니까. 제 자신도, 그게 어렵죠. 
뭐 그게 나쁘진 않지만 언어나 문화나 모든 게 다 다르니까. 살아가
는 데 언어가 뭐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데 결혼생활을 한다는 거 자
체가 어렵거든요. 
코스타리카에 온 지 한 2년 밖에 안됐는데 이민 간 지, 뭐 그러더
니 아버님이 와서 보시고, 다시 한 번 나오셨었거든요. 와서 한 번 
보니까 장인 되시는 어른하고 업종이 같은 회사에서 같이 일하시다 
보니까 약주도 한 잔 하시면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하시다 보니까 
여기 있다가는 총각으로 늙어 죽겠다, 한국 처녀들이 하나도 없더라. 
그러니까 뭐 생각지도 않은 와중에, 뭐 약주도 한잔 하시고. 우리 장
인어른이 굉장히 과묵하시고 말씀을 잘 안하시는 분이시거든요. 사
장님이시고 하니까 하루는 그러시더래요, 제 장인이. 그러면 멀리서 
찾지 말고, 가까이서 한번 찾아봅시다. 가까이에 누가 있습니까? 우
제4장 코스타리카에서 태권도 사범과 한인회장으로서의 삶
 
55
리 딸이 어떻습니까? 이렇게 된 거에요. 그래 가지고 시작이 돼가지
고 서신도 오고 가고, 서로 이제 교제하다가, 저희 어머님하고 그쪽 
코스타리카로 오신 거예요. 집사람하고. 그래서 와서 새겨보고, 대화
도 해보고. 저는 따로 나가 있었으니까. 도장에. 도장에서 숙식을 하
고 있었고. 저희 집사람 될 사람이 왔을 때 저희 어머님하고 다른 
집에 있었거든요. 시간 날 때 일 끝나고 데이트도 하고 교제도 하고 
이러다보니까 뭐 너무 제가 어렵고 하니까 돌아가려고 하다가, 하나
님이 도와주셨죠. 한국 사람을 그래도 그렇게 만났다는 게. 그래서 
그 다음 해에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역사적이죠. 대한민국 대사관에
서 결혼식을 올리게 됐습니다. 
75년도 3월쯤에 대사관 개관을 하고 11월 15일 날 한국 아가씨
들이, 처녀들이 하나도 없는 나라, 그런 나라에서 한국 아가씨를 만
나서 처녀를 만나가지고 초청을 했죠. 거기 있는 아가씨가 아니고, 
거기 있는 한국 아가씨가 아니고 제가 가서 초청을 해서 그런 영광
을 누려보시는 분들 많지 않을 거예요. 보통 우리나라에서 결혼식을 
하면 사업적인, 비즈니스, 결혼예식장 있잖아요. 돈을 주고 뭐 주례
하시는 분들 초청해서 사례비 드리고 그렇게 통례가 그렇게, 아니면 
교회나 성당이나 가든파티나 뭐 이렇게. 저는 대한민국 정부가 인정
해주는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대사님 주례로다가 변호사들 앞에서. 
공인된, 그런 자리에서 대한민국 태극기 앞에서 결혼식을 올렸거든
요. 대한민국 대사관 앞에서 그 당시에 샴페인이니 포도주니 이런 
거 상당히 비싸고 할 땐데 다 초청해서 대사관저에서, 대사관관저가 
아니고 대사관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거기서 파티하고 그런 또 영광
을 저는 또 얻었습니다.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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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중심의 한인사회 형성에 주도적 역할 수행 
현재 한인은 400명 정도 됩니다. 이 교회도 있고 대사관이 있고  
교회가 한인교회가 두 개가 있고요. 하나는 거의 뭐 그렇고 한 개가 
코스타리카 한인교회 유일하게 잘 성장하고 있습니다. 교인이 한 
200여명 되죠, 퍼센트로 따져서 교민이 한 3~40프로 교민이 나온다
고 봐야 되고 코스타리카는 이제 뭐 교민 중심의 사회가 아니고요. 
교회가 먼저 생겼습니다. 
현지인 교회 단기 선교 활동 한 곳 (2017.4)
제4장 코스타리카에서 태권도 사범과 한인회장으로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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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스타리카 현지 교회 단기 선교 활동하는 모습  (2017.4)
그래 가지고 그 지금 저 경기도에 가시면 저 벽제라고 고양군을 
가시면 중남미 문화원이라는 문화원이 있습니다. 그게 아마 매스컴
에 인터넷 들어가 보십쇼. 그 분이 코스타리카 초대 대사님을 하셨
거든요, 이복형 지금이라도 누르면 바로 나올 겁니다. 그분이 오셔 
가지고 이제 그분도 이제 예수를 믿으시는 분입니다. 크리스천이시
니까 교인도 없고, 교회도 없고 하니까 이제 기도원이라고 해서 한
인 기도회 해서 같이 이제 신앙생활 한 번 시작해보자 대사님이 이
제 주가되셔가지고 사모님하고 거기서 이제 모여가지고 성장하고 그
러다보니까 거기서 서로 어려운 분들 돕고 협력하고 사모님께서 장
갑을 끼고 수건을 두르고 가게를 오픈하면 페인트칠까지 다해주시고 
선두에서 교민들을 사회를 위해서 하시니까 그냥 자동적으로 힘이 
모아져서 잘 발전해나가게 된 경우입니다.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58
 
저는 종교생활을 가서 한 게 아니고 저는 학교도 중고등학교도 미
션스쿨을 다녔고 초등학교 때는 시골에 전쟁 나가지고 배가 고프니
까 그 당시에는 교회 나가면 선교사들이 많이 들어와 있어요. 외국 
선교사. 시골에도 와있었다고요 선교사들이. 그래가지고 뭘 많이 도
와주고 가고 그랬다고요 교회에다가. 그러니까 이제 아이들이 이 연
필도 made in USA라고 잠자리표 라고 학교 다닐 때 그거 가지고 
있으면요. 그게 부러지지도 않고 깎은 나무도 향냄새가 나고 너무 
좋은 거기다가 그 당시에 우유를 말입니다. 65년 전에 그 당시에 우
유를 말입니다. 우유를 그 이런 통을 받아가지고 한 통 받아가지고 
선물로. 그러니 교회 나가면은 뭘 좀 그런 걸 주고 선물로. 학용품 
주고 노트 주고 그러니까 애들이 그게 하나님을 믿고 그런 것보다도 
야 교회 나가면 야, 그걸 채워 와서 학교 와서 그걸 자랑한다고요.  
너는 어떻게 이걸 선물로 받았냐 그러면 너 교회 나와라 이거야. 교
회 나가면은 1년 동안만 노트에다가 요절이라고 그래가지고 요만한 
성경 말씀 중요한 성경말씀 아주 중요한 말씀들 있잖아요. 그걸 주
일학교라 그래 가지고 그 주일학교 아세요? 그걸 주일학교 선생님이 
요절을 외우라 그러면 외워가지고 그걸 다 외우고 날짜 쓰고 붙여놓
으면 12개월 딱 된 날 12개월 크리스마스 때 결산을 해보고 다 외
우고 다 하면은 이 그 큰 통에 들은 우유를 받아오고 그랬어요.
그래 가지고 그걸 이제 밥에 쪄주잖아요. 그럼 그게 과자가 되는
데 설탕 넣고. 밥에다 찌면은 과자가 되고 그냥 우유 맛이. 그걸 탁 
타가지고 과자 만들어가지고 와서 먹는 거야. 그 하나 먹고 싶어가
지고 그냥 하나 달라 그러면 줍니까 거? 안주죠. 어떻게 하다 보면 
요만치 얻어먹으려고 옆에서 먹고 싶어가지고. 아무것도 과자도 없
고 할 그 당시니까. 교회가라 그래서 어떻게 가야 되냐 그러니까 자
제4장 코스타리카에서 태권도 사범과 한인회장으로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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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만 따라오라고. 그래 가지고 교회 나가게 됐어요. 교회 나가가지고 
열심히 했거든요. 그리고 제가 좀 탤런트가 있는가 봐요. 그래가지고 
추수 감사절 때는 미국에서는, 그때 저 날 보고 주일학교 선생님이 
무슨 DNA가 좀 있었는가 봐요. 날보고 연극을 한번 하래요. 그래가
지고 다윗 영어로 데이비드 다윗과 골리앗을 하는데 날 보고 다윗 
역할을 한번 해보라고. 그래가지고 연극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까 연말까지 잘 했더니 연말에 진짜 그 꿈이 꿈은 언젠간 이루어진
다는 게 내 꿈은 그때 그거였거든요. 우유 한 통 받아가고 그 연필, 
잠자리 그 잠자리 연필 그거하고 노트. 그때 그 당시에는 그건 뭐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이 너무 좋았죠. 그걸 탁 받던 날 그래가지고 
시작되니까 아 재밌는 거야 교회 생활이. 그런데 우리 어머님 부모
님들은 반대하셨어요. 그 때 조상들 유교사상에다가 미신 뭐 이런 
거 하니까 야 예수 믿으면 우리 저 다 안 된다. 그런데도 그 교회 
가는 날은 빠지지 않고 갔다고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고 그게 아
니고 시작은 그렇게 됐지만...... 
거기서부터 그런데 우리 오 남매가 내가 우리 형님을 전도한 적도 
없고 우리 형님은 목사님이시고 나는 장로고 셋째도 과테말라 사는
데 장로고 넷째도 과테말라 집사 다섯째도 LA사는데 거기도 이제 
그 열심히 신앙생활 집사 여동생은 두 여동생은 집사고 형님은 목사
님이고 선교사, 저는 장로 그리고 셋째도 장로 과테말라에서 살고 
있는데 그래서 집안이 이제 그 누가 이렇게 전도해라 가라 와라 예
수 믿으면 뭐 구원 받는다 이런 거 아니고 그냥 자기들이 알아서 각
자. 저 그래서 이상하게 그게 하기가 싫거든요 형제 전도하기가 제
일 어렵거든요. 제일 어렵고 가족 부모들 뭐 형제들 친구들 제일 어
려운 게 야 너나 잘해, 너 예수 믿는 놈이 왜 그 모양이야 그 소리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60
 
나 듣고 잘못하면 시험 들고 이러는데 근데 우리 식구들은 어떻게 
다 그래가지고 다 예수 믿게 됐어요. 그래서 중간에 낙오 안하고 그
래도 그 뭐 이런 말씀 드리면 이해가 잘 되실는지 안 되실는지 모르
지만 기독교에서는요, 교회에서는 그래요. 특히 장로교에서는 장로가 
되는 건 쉽지가 않아요. 3분의 2가 찬성이 있어야 되고 그게 쉽지가 
않다고.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 부족한 거 
단점 뭐 이런 거 너무 잘 알고 너무나도 이민교회에서는 더욱 더 어
렵다고요. 그런데 저도 떨어졌었죠. 한 두 번 떨어지고 그러다가 저
는 뭐 안한다고 했어요, 나중에. 그런데 저는 때가 되니까 이게 해가
지고 가문의 뭐 영광이니 뭐니 영광까지는 뭐 아니라도 참 어렵습니
다, 장로교에서는. 그래서 그만한 교회 봉사도 해야 되고 헌금도 남
들보다 몇 배를 더 해야 되고 그 기본이 있잖아요. 십일조도 해야 
되고 100만원이면 10만원을 기본 뭐 해야 되고 하나님한테 바치는 
드리는 예물도 해야 하고 그러니까 그런 건데 그래도 해서 신앙생활 
하고 마지막까지 그 예를 들어서 제가 다니던 교회는 교회가 주년 
33주년인데 지금. 이때까지 장로를 배출을 많이 했어요.
코스타리카 한인 교회, 한인 장로 교회. 그런데 이건 뭐 기록 역사
니까 교회에 대해서 물어보시니까 얘기하는데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이건 저 신앙적인거니까 조금만 하면 교만이 되고 자기 잘났다고 이
렇게 하는 비춰질 가능성이 있거든요. 내막을 누가 이걸 읽어보고 
이렇게 책이 발간되잖아요. 그럼 읽어보고 야 이걸 그 자기 그 자기 
굉장히 그걸 나타내는 거 그걸로 오해가 될 수 있거든요. 왜냐하면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드리려고 하는 거거든요 제가. 이걸 뭐 보태고 
빼고가 아니라. 
예를 들어서 33주년인데 여러분들이 장로가 됐었어요. 그런데 교
제4장 코스타리카에서 태권도 사범과 한인회장으로서의 삶
 
61
회가 갈라지고 한 번 갈라졌어요. 갈라졌는데 거기 장로가 몇 분이 
또 나갔어요. 교회를 따로 그 그래서 누가 몇천평짜리 땅을 기증을 
해가지고 교회를. 근데 참 이게 우리 인간으로서는 생각이 안 되는 
그 일들이 많이 일어나요. 하나님 일은. 그래서 가서 자기들이 개척
해가지고 했는데 결국은 운영이 안 돼서 결국은 문을 닫았어요. 거
기 장로들이 나간 사람들은. 거기 가 가지고 대충대충 해가지고 장
로로 추대해서 장로 세워서. 투표는 했겠죠. 그 사람들도. 그런데 이 
한인 교회에서 그런데 이걸 참 잘 좀 기록을 하셔야 될 것 같아요. 
왜냐하면 이게 상당히 좀 중요한데 교회에 대해서 말씀드릴 것도 뭐 
있나 했는데 물어보시니까.
교회는 그 저 이민생활하시는 분들 아주 중요하죠. 왜냐하면 거기
서 시작됐거든요 교민사가. 코스타리카는 교민회가 먼저 생긴 게 아
니고 교회가 먼저 생기고 교회 중심인 교민사회. 그러니까 이게 좀 
바뀐 거에요 순서가. 제가 갔을 때 교회는 없었죠. 제가 창립 멤버
죠. 그래서 아이 참 내가 이랬다, 저랬다 하면 안 될 것 같아서요. 
그래서 제가 교회가 33주년 됐는데 많은 장로를 많은 장로는 아니
에요. 장로 여러 분을 배출을 했는데. 끝까지 그 임기를 마치고 공식
적으로 기념패도 받고 그 은퇴식까지 제대로 하고 마무리 지은 사람
은 아주 죄송합니다만은 제 혼자 뿐입니다. 다 딴 데로 가고 전입가
고 그러니까 한 뿌리에서 시작해가지고 끝까지 교회 없는 데서 가정
예배부터 드리면서 시작해가지고 한번 저 책을 한번 구입해보세요 
그게 도움이 많이 될거야. 중남미 문화원을 가면 문화원에 연락하셔
가지고. 거기 가면은 그 분들이 그 역할을 많이 또 하셨어요.
그 이복형 대사님이라고 30년 동안 30몇 년을 그 외교관생활 하
시면서 그랬는데 그 사모님이 쓴 내일 또 태양은 뜬다? 그 뭐라 최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62
 
근에 발간한, 그 자서전에 보면 그 책을 제가 두 권이나 얻었었는데. 
자서전을 발간했거든요. 그걸 보면 코스타리카에 대해서 많이 나온
다고. 교회가 없었어요. 75년도에 거기 가니까 73년도에 거길 가니
까 없더라고 아무것도. 현지인 교회에 나가보니까 스피크가 안 되니
까 언더스탠드를 못하니까 아무 의미 없죠. 그리고 거기 교회는 오
순절 교회가 돼가지고 개신교들이 저는 장로교 출신인데 어렸을 때
부터 쭉 성장과정이 장로교만 다니다 보니까 예배드리는 예식이 전
부 이렇게 너무 광란적으로 이렇게 손뼉을 치고 한 세 시간 씩, 두
시간씩 예배를 드리니까 서서 앉지도 않고 그러니까 너무 힘들고 어
렵고 일단은 이해를 못하니까. 그래서 아 안 되겠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 교민들 중에서 오신 분들이 이제 새로 한 가정 두 가정 세 가
정이 모여가지고 예배 드리고 가정예배부터 드려봅시다, 그러다가 
오시다가 누가 이복형 대사님이 75년도에 오시게 된 게 알죠. 
이복형 대사님 내외분들이 오셔가지고. 믿는 분들이시니까. 나도 
예수믿는 사람인데 이러고 되겠냐 우리끼리라도 예배를 이제 드려보
자 우리가 주관이 돼가지고 이제 해보자 그래가지고 사모님이 워낙 
열성적이신 분이니까 뜨겁고. 사모님이 헌신적으로 앞장서셔 가지고 
한인 기도회라고 해가지고 한인들이 모여서 처음 예배를 시작을 이
제 드리게 됐죠. 
이제 그때 당시에 어려웠어요. 이민 오신 분들이. 남미서 올라오신 
분들이 아르헨티나에 사시다가 나쁜 중개인들 만나서 사기당하고 그
래 가지고 그때 이민 많이 갔잖아요. 한국 사람들이. 아주 많이 갔는
데 그래가지고 이제 올라오신 분들 미국에서 가는 하나의 루트니까. 
거기에서 있다가 비자 받아가지고 미국으로 이제 가시고 비자 받아
가지고. 그때는 비자가 필요했으니까. 지금은 무비자지만 그때 당시
제4장 코스타리카에서 태권도 사범과 한인회장으로서의 삶
 
63
는 비자 없이는 못 들어갑니다. 그 비자 좀 받고 그 살았다는 경력
이 있어야 비자를 받거든요. 미국 대사관에 가서 비자 받으려면. 그 
여행하는 사람 여행하다가 여권 내밀고 비자 달라면 안주거든. 여기
서 좀 살다 보니까 몇 년도 살고 비자 받고는 가게 정리하고 미국으
로 가셔가지고 그분들도 다 그렇게 된 분들도 많고. 그래가지고 교
회는 그렇게 해가지고 한인기도회라고 시작이 돼서 저희 도장에서
요.
교회는 이민과 연관성이 있거든요. 세상의 모든 이민사가 다 그래
요, 미국도 그렇고. 예수 안 믿는 분들이죠? 공항에 딱 도착하면 교
회에서 나와. 자기 교민들 전도하려고. 그러니까 세탁소하시는 분 만
나면 세탁소하게 되고. 뭐 슈퍼 마켓하시는 분 만나면 마켓 하게 되
고. 이렇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가지고 한인 기도회로 시작돼가
지고 하다보니까 조금씩 교민들이 늘어나잖아요. 
그러다보니까 어 이거 장소가 비좁네, 불편하네. 교제하기도 그렇
고 밥 먹기도 그렇고 하다보니까 애들 돌잔치도 있고 결혼식도 할 
때도 있고 이거 뭐 안 되겠네, 그러다 보니까 그건 아닌데 장소가 
협소해지고 그리고 남의 집 장소에 자꾸만 가서 집에서 예배를 드리
다 보니까 그 여러 가지 폐나 민폐가 되는, 뭐 폐는 아니지만 좀 불
편하죠. 가정에서 예배드리려니까. 그러다보니까 다음은 이집 다음은 
요집 이렇게 옮겨다니다보니까 불편하죠. 불편하잖아요. 
그래서 저희 형님 도장, 태권도 아카데미 중앙 도장에, 그러니까 
저희 형님이 그러면 그러지 말고 저희 도장에 의자도 다 있고 하니
까 접었다 폈다 하는 의자. 쫙 펴놓고 그 아주 뭐 훌륭하죠. 그 예배
드리기가. 그러면은 거기서 예배를 드립시다. 해가지고 가정을 전전
하다가 결국 저희 형님 도장. 그러다 저희 형님이 미국을 가시게 되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64
 
니까 정리가 되니까 그 다음에 제가 하는 도장, 아카데미라고 그래
가지고 태권도 아카데미 도장 거기서 예배를 드리는데, 자꾸만 동네
가 보니까 제가 운영하는 동네가 태권도 하는 도장이 그 동네가 좀 
좀 조금 뭐 우범지대는 아니라도 절도나 이런 거 하는 사람들이 많
이 왔다 갔다하고 동네가 좋지 않은 지역에다가 도장을 잘못 제가 
선정을 했는데, 그러다보니까 교인들이 제가 아침 일찍 일어나가지
고 청소하고 예 꽃도 이제 갖다가 누가 기증한 꽃이 있으면 거기다
가 없으면 저라도 그냥 하나 이렇게, 그리고 목사님이 안 계시니까 
돌아가면서. 참 그때 에피소드가 이제 많습니다. 
교수님들도 마찬가지지만 박사님들도. 아무나 다녀가 가지고 하나
님 말씀 전하고 그러면 되겠습니까 그거. 돌아가면서 말입니다. 오늘
은 다음 주는 당신입니다, 누구 집사님 다음에는 말씀 전하시고 처
음에는 그랬어요. 처음에는 어떻게 했는가 하면 한국의 유명한 조용
기 목사님, 그러고 명성교회 유명한 김삼환 목사님 이런 분들 그냥 
뭐 사랑의 교회 누구, 소망 교회 누구 목사님 테이프 넣어서 모아놨
다가 테이프, 카세트 테이프 틀었거든요. 사회는 이제 집사들이 사회
를 보되 그 뭡니까, 집사들이 진행 순서만 맡아가지고 하고 다음에
는 우리 그 곽선희 목사님, 예 제목은 뭐 오늘 설교를 대신으로 목
사님 설교를 대신하겠습니다. 그러고 테이프 듣고. 아 그것도 뭐. 그
런데 다 듣다 보니까 맨날 들은 테이프 또 듣게 되고 재탕이 자꾸만 
되고 그랬지요.
나중에 제직회에서 그러지 말고 집사님들이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성장도 할 수 있는 그만큼 신앙생활도 하고 그랬으니까 혼자서 공부
하고 그 저 자료를 만들어가지고 나름대로 간증도 하고 그래 가지고 
돌아가면서 하십시다. 하고 회의를 해가지고 제직회에서 그게 만장
제4장 코스타리카에서 태권도 사범과 한인회장으로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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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치로 통과가 되고 결정이 가결이 되어버렸네. 그래가지고 순서만 
되면요 어디 놀러가지도 못해요. 집에서 앉아가지고 공부하고 연설
하고 그런 뭐 에피소드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래 가지고 하여튼 그 
뭐 그런 과정을 주로 거치다가 결국은 집을 하나 사게 돼가지고 뭐 
돈이 조금씩 모아지다 보니까, 점점 커지다 보니까 가정집을 하나 
샀어요. 샀는데 그리고 이제 교민들이 많아지다 보니까 집을 하나 
사가지고 집을 헐어내고 안에 그 있을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집 
이라는 게 막 허물면 안 되잖아요. 방이 네 칸인데 이게 대들보가 
있고 기둥이 있고 그런데 기본 상식인데 그 뭐 그럴 돈도 없고 여유
도 없고 하니까 이 뭐 마스크 쓰고 모자 하나씩 쓰고 그 해머 있잖
아요, 망치 큰 거 그거 가져가서 그냥 밤에 가서 물 벽에다가 물 갖
다 뿌리고 그걸 깨고 허물어내고 거 집이 안 무너진게 신기, 그래 
가지고 이렇게 만들어가지고 거기다가 싹 아주 싸구려 싼 양탄자 깔
고 페인트칠하고 시멘트 좀 바르고 그래 가지고 뭐 이러다보니까 교
회는 3천 3백 평이고요. 모든 기준 설비는 다 되어 있습니다. 이게 
뭐 교회인데 목사님이 계셔야죠, 목사님이 안 계셔 그래가지고 교인
들이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때 오신 목사님이 지금도 저하고 한국
에 나와 가지고 교류하는데 아직 은퇴 안 하셨어요.
지금 경기가 안 좋아서 옛날은 한 300명 됐는데, 이제는 한 200
명 사이, 확실히 제가 떠나온 지도 4,5개월 되어서 모르겠는데 150
에서 한 200명. 그래서 제가 거기서 다 이루어 진 거예요.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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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태권도 대회 코스타리카팀 단장 참가
우리 대한민국에서 개최한 세계 태권도대회, 제가 1985년도에 제 
14명을 인솔해가지고 태권도 대회에 참석을 했습니다. 제7회 세계태
권도대회, 그때 총재가 김운형 총재님이었고요. 그래서 저희가 그때 
이 코스타리카는 아주 저 좀 열악한 여러 면에서. 그래서 14명이, 
이번 우리 저 교수님도 얼마 전에 브라질 가셨습니다만 경비가 어마
어마하거든요. 14명을 인솔해 오려면 한국 왔다 갔다 하는 왕복 비
행기 표, 88올림픽 하기 전이니까. 그 때 우리 대사님께서 말씀을 
드렸더니 대사님이 국회의원 총재님 김운형 총재님한테 전문을 보내
가지고 이러이러한 상황이 있으니까 코스타리카는 좀 열악하다, 본
국 정부에서 지원을 좀 해주면 어떻겠냐 그래가지고 제가 말씀드려
가지고 대사님이 본국 정부에다 연락해가지고 그러면 본국 정부에서 
답이 오는 게 어떻게 왔냐고 하니 당신네 나라 비행기가 있지 않느
냐? LA에서 그때 당시에는 김포, 김포공항까지의 왕복은 당신들이 
끊고, 코스타리카와 LA는 당신네 나라 비행기가 있지 않느냐. 한국 
비행기표는 도와주겠다. 여기서 중미, LA까지는 당신네 비행기로 와
라 하니까 이게 얼마나 인색한지 한국, 코스타리카 정부에서 이걸 
안도와주는 거예요. 이 사람들은 좋아하는 게 축구. 축구는 열심히 
도와줘요. 축구는 협회가 잘 운영되고 재정도 많고. 태권도는 그 당
시에 너무 어려워가지고 재정도 없으니까. 그래가지고 본국 정부에
서 비행기 표를 도와줘가지고 제가 단장으로 해가지고 제7회 세계태
제4장 코스타리카에서 태권도 사범과 한인회장으로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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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도대회에 갔다 왔잖아요. 
와 가지고 대회가 끝나고 어떤 친구들은 기술을 좀 더 교육을 좀 
더 받고 싶다, 그래가지고 미 8군에 태권도 사범, 미군들을 가르치
는 친구들이 있어 가지고 그 친구들 사범들이 숙식 다 제공하고  태
권도를 무료로 배울 수 있는 장학금을 줘가지고 몇 개월 있다 나타
났어 그 친구가. 이 친구가 자기 형님이 뭔가 하면 편집국장이야. 그
나라에서 제일 유력한 신문인데, 편집국장이 제일 높은 사람이야. 그 
돌아와 가지고 내가 그 도와준 게 너무 고마워서 매스컴에다가 전면
에 다 내버리고 그 내 이름까지 집어넣어가지고 이렇게 그 자기 사
범이 이렇게 많이 도와주시고, 태권도를 위해서 이렇게 해주시고 내
가 또 이렇게 가서 교육 받을 수 있는 그런 배려를 다 해줬다, 이 
코스타리카, 우리나라 같으면 그걸 모르겠어요. 우리나라에서 그런 
걸 갖다가 편집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거기서는 그런 게 통하는 
나라니까 그런 연줄이 있고 매스컴에서 그냥 한국 사람의 이미지를 
완전히 올려놨다고 그 친구가 한국 갔다와서.
그래 가지고 상당히 이미지가 좋았죠. 본국 정부에 돌아와 가지고 
자기들이 매스컴에다가 굉장히 열풍적인 아주 그 홍보를 했죠. 한국 
정부에 대한 고마움, 그런 좋은 국위선양이 됐죠. 그리고 작년에는 
이제 코스타리카 2014년 월드컵 제 8강까지 올라간 나라죠. 그래가
지고 잘 하고 있고.
그 다음에 1987년도 코스타리카의 해변 도시, 케포스 입니다. 케
포스라는 조그마한 시골의 어촌인데요. 어촌인데 어촌 도시가 아니
고 어촌입니다. 아주 보잘 것 없는 시골 도신데. 이 도시에 우리나라 
정부와 자매 결연을 맺은 시골의 초등학교가 개교를 하는 그런 행사
가 있었습니다.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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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자들 태권도 승급 시험 참가 (2017.4)
 제자들 태권도 승급 시험 참가 (2017.4)
제4장 코스타리카에서 태권도 사범과 한인회장으로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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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정부에서 대사관을 통해가지고 컴퓨터, 아이들 가방이니 
신발이니 피아노니 그런 지원도 해주고, 그게 여기서 뭐 한글을 가
르친다는 게 아니고 학교 이름이, 명명을 한국 학교라는 타이틀을, 
그러니 까 학교 이름이 한국 학교에요. 
그런데  그 당시에, 주 코스타리카 한국대사관의 대사님이 김재훈 
대사님이셨습니다. 처음 오픈을 해야 되는데 그 행사 중에 그날 행
사 중에 한 부분을 저를 보고 맡으라고 그런 것이, 뭐냐하면 태권도 
시범을 보이라고. 모든 그 절차의 경비는 대한민국 공간에서 부담을 
할 테니까 버스 대절하는 거, 학생들 가서 시범할 학생들 다 해서 
준비하라고 해서 준비해서 한 20여명의 태권도 부원들을 인솔해가
지고 개교 한국 학교에 가서 시범을 보이는데, 누가 오느냐 하면은 
우리나라 같으면 이게 뭐 상상도 할 수 없죠. 시골 학교에 우리나라
로 말하면 저 여수나 어디 저 어촌에 아무리 코스타리카하고 자매결
연을 맺었다 하더라도 우리나라 박근혜 대통령이 거기까지 가실 거
라곤 상상도 못할 일이죠. 그런데 차로도 비포장도로였거든요 그 당
시에. 그런데 수행원들 데리고 거기 4시간 걸리는 데 자가용으로, 
거기를 대통령이 직접 그 참석을 하신다. 그래서 저는 설마 대통령
이 그까지 오실까 했는데 시간 됐는데 대통령이 오신 거예요.
그래 가지고 그 스케줄에 맞춰서 대통령 앞에서 태권도 시범을 보
이게 된 거죠. 그 당시에 대통령이 알베르토 몬케라는 대통령이 어
떤 대통령이신가 하면은, 전두환 대통령께서 그 당시에 미얀마를 방
문하실 때 국무위원들, 국회의원들을 그 당시에 국무위원들하고 인
솔을 해서 같이 동행해서 미얀마를 가셨잖아요. 아웅산 테러 사건 
기억나시죠? 그 테러사건 때 우리나라 국무위원들이 돌아가시고 거
기에 대표적인 그 당시의 국무위원인 이범석 외무부장관께서 코스타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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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카를 다녀가셨어요. 특사 자격으로 대통령 취임식 때. 그 때 돌아
가셨는데 그 당시에 코스타리카 오실 때, 방문하실 때 저희 딸이 아
직 7살인가 할 땐데 화동으로다가 공항에 나가가지고 꽃다발을 들고 
나갔지요. 정말 그 때 뵈었는데 같이 식사도 하고 정다움도 나누고 
했는데 그 이후로 얼마 안 되어 가지고 그런 사건이 나서 돌아가셨
잖아요? 정말 훌륭하시고 정말 멋지게 생기신 분이더라고. 정말 잘
생기시고 키도 크시고 인격적으로 존경받는 의정자가 아니신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돌아가셨어요. 그런 사건이 있을 때 이 세계에서 
제일 먼저 북한하고 단교를 선언한 대통령 바로 그때 오신 분이거든
요. 단교, 북한하고는 더 이상 외교관계를 안하겠다. 문화 관계 교류
도 안하겠다. 모든 걸 완전히 단교를 한 대통령이 누군가 하면 이 
분이에요. 알베르토 몬케라는 대통령. 그래서 우리나라의 이제 우리 
국가의 특별한 행사 때 해외에 있는 귀빈들을 초청할 때는 꼭 순위
에서 빠지지 않는 대통령으로 주욱 전해 내려오고 있는 그런 대통령
이십니다. 
▮ 코스타리카 한인회 운영과 한인회장 활동 
제가 1989년도에 우리나라의 20개 정도 진출업체가 코스타리카에 
들어와 있었거든요. 마낄라 미국으로 수출하는 회사들 제품하는 회
사들이 20여개가 들어와 있었는데 그때 당시에 한국 사람들이 보면 
직원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하다보니까 약주도 한잔 하다 보고 
하다 보면 같은 동료들끼리도 싸우고 흉기로 이런 문제점도 생기고. 
제4장 코스타리카에서 태권도 사범과 한인회장으로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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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가지고 법정에 서게 되고 그런 일들이 있었거든요. 
그럴 때 코스타리카에서요, 그 당시에 대법원장이 저희 양아버지
나 다름없이. 거긴 대법원장이라 그래 가지고 부하 직원한테 판검사
나 그런 사람한테.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권력남용을 못하잖아요. 그 
아주 세계적인 민주국가로 알려져 있는 나라거든요, 코스타리카가. 
그럴 당시에 양아버지나 다름없는 그 분을 찾아가서 사실대로 얘기
하고. 우리 동포들끼리의 문제였고. 그래가지고 검찰에 송치돼있는 
상태에서, 98년도에 현지에 20여개의 진출업체들이 와있었는데 별
의 별 일들이 많았죠. 예를 들자면 그런 어려움이 있을 때 검찰에서 
송치해가지고 감옥에 가있는 사람을 선처해달라고 제가 말씀드려가
지고 대법원장이 판검사님들하고 의논을 해서 결국은 그래가지고, 
법정에 경찰에서 송치돼있는 상황에서 여러 사람 그런 문제들이 있
었을 때 다 찾아와서 대법원장한테 말씀드려가지고. 그리고 본인이 
아무리 제가 그 알고 그래도 본인이 합의를 안 해주면 예를 들어서 
흉기로 상해를 입혔는데 한국인들끼리, 해를 입은 분이 나는 그 사
람을 고소 안 하겠다 그러니까 제가 이제 그 역할을 할 수 있었지
요. 그 사람이 불만이 있거나 고소하겠다는 그런 상황에서는 안 되
죠. 상해를 입은 사람이 합의서를 쓰고 나는 순간적으로 술을 한 잔 
마시고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제가 가서 형무소에 면회를 갔거든요. 
그런데 한번 저 놀란 것은 형무소 안에 앉아있는 사람이. 거기는 
그 옷도 잘 안주고 후지다 그럴까요, 죄인들에 대해서. 그 보니까 옷
을 그냥 그대로 입고 있더라고요. 사회 그 자기가 있던 그 당시 상
황을. 피자국도 좀 묻어 있고 운동복을 입었는데 우리나라 그 저 태
극기 있지 않습니까, KOREA라고. 태극 마크. 그걸 입고 형무소에 
앉아있어. 기가 막혀서 여보쇼, 나는 내가 뭐 잘했다는 게 아니라 나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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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여기 온지가 몇 십 년 됐는데 아직까지 불명예스럽게 단 한 점의 
오점 없이. 다른 걸 갖다가 입혀주고 제가 회수해 왔고 그래서 그 
다음날로 석방이 됐습니다. 석방이 돼가지고 이제 반성문 쓰고 뭐 
대한민국 공안에 안 알리고. 왜냐면 참 알리다보면 이제 매스컴에 
나가니까 국위가 손상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발 알리지 말아달라
고 그래 가지고 굳이 매스컴에 안 나갔어. 신문에 안 나가고 그냥 
조용히 그냥 마무리 짓는거죠. 검찰에서 그렇게 도와줘서 지나가고 
그랬어요. 
또 96년도, 97년 김영삼 대통령 중남미 순방때 과테말라에서 이
제 캠프를 그 뭐랄까 기지를 그 장소를 거기서 안 움직이셨다고 더 
이상. 거기서 어떤 그 공문을 내리셨는가 하면 대통령께서 라틴아메
리카에 주지하고 있는 대사관의 교민회장, 그 나라의 교민회장, 그 
나라의 교민회장 참사, 대사 세 사람이 전부 과테말라로 집결하도록. 
명령을 하신거야, 오더를 내리신거야. 그래서 우리 신원조회 다하고 
청와대에서 벌써 신원조회 다 끝나고 인적사항 다, 그 다음에 그 붙
이는 그 VIP 그것까지 받고 비행기를 타고 과테말라로 갔는데 과테
말라 메리어트 호텔, 그 호텔에 캠프가 설치되어 있어 가지고 뭐 우
리 대한민국 대통령도, 뭐 오바마 대통령 못지 않더라고요. 
가니까 그 인근에 호텔주변에 경호가 얼마나 삼엄한지 저 경호실
에, 그 나라 현지 거기 왜냐하면 거기 게릴라들이 옛날에 많이 출몰
했었거든요. 그래서 그 다른 나라는 그렇게까지 경호를 삼엄하게 안
하는데 과테말라는 원래 게릴라들이 옛날에 많았어.   
그 당시에 교전도 많고 이래가지고 그 가서 아주 무슨 공항 통과
를 하듯이 그런 검사 다 받고 들어가서 그 큰 넓은 홀에서 어떻게 
대사님이 뭐라 그러시는가 하면 이거 누가 지적이 될는지 모르는데 
제4장 코스타리카에서 태권도 사범과 한인회장으로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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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우리나라에서 온 교민회장, 그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는데 거
기 대해서 5분 이내로 브리핑을 좀, 대통령, 대통령님 앞에서 브리
핑을 해주십쇼, 하면은 본인이 해야 되는 상황이었지요. 
코스타리카 한인회 홈페이지 5대, 10대 한인회장 양원기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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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제가 교민회장으로 일을 맡아보고 있는 중이니까 저하고 
대사님하고 참사님하고 세 명이서 이제 그 중남미의 메리어트 호텔
에 참석하게 돼서 이거 누가 지적하련지도 모르는데 그걸 정말 모르
겠습니다. 저는 지금 심장이 약해서 그런지 겁이 많아서 그런지 몰
라도 뭐 요런 자리거든요, 이 테이블하고 비슷하네요. 근데 이게 앉
아서 하는 게 아니고 대통령께서도 서서 계시고 모든 사람들이 이제 
그 서있는 자리네요. 이 테이블이 꼭 이런 테이블이네요. 그리고 이 
테이블 앞에 무선마이크가 하나씩 다 있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지적
이 될 런지 모르는데요. 그런 거 한번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쉽지 
않잖아요. 대통령 앞에서 누가 지적이 될 런지 모른다는데. 남미 거
기 여러 나라잖아요. 거기서 다 왔죠. 
중미, 여러 나라에서 와가지고 있는데 대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자기 생각에는 양원기 회장이 과거의 그런 대통령 포상도 받고 그랬
으니 그런 영웅담이 대한민국 공간이 생기게 된 동기가 이러이러한 
역사가 있으니까 혹시나 백에 하나라도 그렇게 대통령으로부터 지적
이 될 상황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이 드니까 저는 언변, 말주변이 없
고 발표력이 없는데 그것 참 겁나네요. 이렇게 말하니까 뭐 말할 때 
보더니 잘 하던데 뭘 그래. 연습 좀 하면 되고 그렇게 시간을 많이 
내주지도 않을 거야, 대통령 순방 때니까. 잘해야 5분, 6분 정도 될 
거야. 준비를 하라 그러시더라고요. 그러니까. 준비를 안 하면 되겠
잖아요. 갑자기 그거 지적해가지고 덜덜 떨다가 내려오면 말도 못하
고 그러니까 나름대로 준비를 열심히 했죠, 간단하게. 내용이 그겁니
다 지금 이, 그래서 지금 제가 말씀드렸던 공간이 그 대한민국 코스
타리카 주재 대한민국 공간이 생기게 된 동기 매 년도에 어떠어떠한 
일로 인해서 역사를 하게 된 그 동긴데, 지금 대통령 그 당시 지금 
제4장 코스타리카에서 태권도 사범과 한인회장으로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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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님이라고 안 그러고 그 당시는 전부 각하라고 할 때거든요. 
아 지금 김영삼 대통령 각하께서 들어오고 계십니다라고 말하고 그
러니 마음의 준비를 좀 하라는 거죠. 알려주시는 거죠. 그래서 제가 
긴장은 참 되는데 속으로 기도를 했죠. 저한테 차례가 오더라도 지
적이 되더라도 그거 급할 때는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이다 보니까 
급할 때는 꼭 찾게 되더라고요.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긴장 좀 안하
게 잘 조리 있게 재치 있게 지혜롭게, 잘 그 제가 지적이 되면 발표
를 좀 잘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한테 기도하고 
딱 들어와서 정부 수석인지 하는, 아 모르겠어요. 어떤 분인지 청와
대 대변인인지 하는 분이 가져온 그 기록을 열면서, 오픈하면서 대
통령께서 지적하시는 분 그 시간은 많이는 못 드리고 한 5분에서 7
분정도 간략하게 말씀을, 정해진 순방 기간이 한정돼있다 보니까 많
은 시간을 못 드립니다. 5분에서 7분정도 간략하게 말씀해주시면 고
맙겠습니다 하고 말하더라고요
그래서 연습을 계속 한 거예요, 연습을 하고, 그러면서 딱 오더니 
자 대통령 들어오시면 질문 혹시 하시면 어떻게 답변을 하고 이런 
교육을 간단하게 시키더라고 그래서 그렇게 받고 거기 보니까 아니 
그 줄을 이렇게 서있는데 보니까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분들 다 
있어요. 합참 의장님 별 뭐 4개 이렇게 다신 분들, 그 다음에 뭐 국
회의장, 장관 그런 분들이 다 이렇게 서있는 자리에서 탁 들어오더
니 코스타리카 딱 나오는 거예요. 정신이 팽돌더라고, 정신이 아찔하
더라고. 코스타리카에서 오신, 그게 다야 그게 끝이야 더 질문도 안
해요. 코스타리카에서 오신 양원기 교민회장님이 오셨습니까? 그러
더라고, 그래서 또 교육 받은 게 있어 가지고 뭐 대답도 하지 말고 
손만 이렇게 자연스럽게 한쪽 손을 들라고 하더라고요, 청와대 비서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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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에서. 그래서 시킨 대로 했죠. 손을 딱 드니까, 아 일천구백 몇 년, 
아 이거 겁나는 거예요. 우리가 해외 나가있다고 해서 아 난 내 알
바가 아니다 뭐, 내 마음대로 떠들어도 되고 마음대로 살아, 그게 아
니에요. 청와대 이 모든 있었던 영웅담이라고 해야하죠, 영웅담이 청
와대에 다 기록이 되는 거예요. 대통령이 몇 번이나 바뀌었는데 그
동안에. 근데 그대로 보관되어 있는거야 이 역사가, 어 그래가지고 
그때 당시에 몇 년도 이 그 상황을 대통령님 앞에서 간단하게나마 5
분 이내에 뭐 여정이 바쁘시니까 그래서 내가 이 김영삼 대통령 얼
마 전에 돌아가신 거 보니까 아이고 참 대통령님 하고 저분하고 나
하고 인터뷰를 했는데, 그래서 그 오 분 이내에 해달라고. 그래서 고
대로 그때 당시에 있었던 상황을 그대로 말씀드렸죠. 대통령님께서 
이렇게 보더니 고개를 이러더라고, 딱 한마디 하시더라고. 참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김영삼 대통령께서 참 국가를 위해서 수고를 많이 하
셨네요. 그래서 난 긴장이 되가지고 막 이게 나름대로 정신을 바짝 
차리고 나름대로 브리핑을 해드렸는데 내가 끝나고 나서 대사님, 대
사님 제가 잘했습니까, 아유 잘하던데요, 난 대통령 앞에서 그렇게 
말 못할 것 같은데. 아 막 띄우더라고. 아 난 뭘 무슨 얘기를 제대로 
했는지 모르겠는데. 아 기억은 나요 내가 뭘 연습을 많이 해가지고 
왔으니까. 그래서 그 대통령 앞에서 브리핑을. 다른 사람들은 다 멀
리 브라질에서, 과테말라에서 비행기를 뭐 하루 반나절씩 타고 왔는
데 이 자기들이 지적이 됐으면 이야기를 할 게 많은데 내가 되게 뭐 
그중에서도 아마 선정이 된거 같아요. 특별한 케이스니까. 북한 공간
을 들어와있는 뭐 할려고 한, 저지시키고 대한민국 공간을 먼저 세
우고. 지금까지도 북한 공간이 없거든요. 아웅산 테러 사건때 당시 
코스타리카 대통령이 단교를 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냥 그렇게 단절
제4장 코스타리카에서 태권도 사범과 한인회장으로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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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금까지도 단교를 외교관계를 안 맺고 있다고. 문화원이 있었거
든요? 문화원까지 다 쫓아버려서 아무것도 없다고.  
번복해서 말씀드릴 필요는 없겠죠. 그래서 지금 요 내용을 이게 
내가 그러니까 참 그 어떤 면에서는 제가 그 해외 나가서 불법을 대
한민국을 비방을 했다든가 반한단체라든가 뭐 이런 그런 게 아니고 
이때까지 저야 정말 나라를 위해서 열심히 국위선양을 하고 열심히 
뛴 사람으로서, 그렇지만도 이 모든 그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본국 정부에서 기록돼있고 세부적으로 잘 기록하고 있고 어디를 가
든 간에 좋은 일 나라를 위한 일, 선한 일 국위선양 이런 거는 세상 
떠나는 날까지 어디서 살든 간에 잘 해야겠다 그런, 제가 그런 경험
과 체험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 
한인회는 그 인제 그 부인회가 있거든요. 한인회 내에 소속에 한
인 부인회가 있어요. 그래가지고 그 분들이 고아원이나 양로원, 우리 
정부에서 보면 영부인들이 고아원 방문하고 사회복지사업 그런 거 
사회복지기관 이런 단체, 이런 데 가서 봉사하고 바자회하고. 뭐 바
자회도 하고 그런 예 하는데 주로 그런 사업을 어디서 하는가 하면 
교회에서 해요. 교회에서 우리가 안 팔린 옷들을 다시 지교회, 지교
회라기보다는 뭐 지교회라 그래야지 우리가 후원해주니까. 같은 교
리적으로 같은 그건 아니에요. 그 사람들은 무슨 교회인가 하면 여
호와의 성에라고 하는 교회인데 오순절 교회 뭐 이런데 이게 순복음 
교회야, 순복음 교단인데 조용기 목사님도 여러 번 다녀가시고 했는
데 그때 그 그런 교회들이고 그 교회에서 제가 그 우리가 팔다 남은 
재고들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을 저 남은 것들을 기부하면 그 사
람들이 그걸 팔아요. 그걸 팔아가지고 교회 짓다가 못 지은 거 그걸 
뭐 보수도 하고 마무리 짓고 바닥도 깔고 그리고 어려운 사람들도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78
 
도와주고 뭐 이렇게 해서 교회가 교민의 일을 겸해서 한다 그럴까! 
교민회는 사실상 그렇게 할 만한 재정이나 모든 게 재력이 없으니까 
그 이제 교민회관도 잘 못 짓고 있거든요. 못 짓고 있고 땅은 이제 
부지는 구입해놨어요. 그런데 모르겠습니다, 경북대학교나 그런 건 
정부 차원에서, 그건 대학에서야 지원해줄 수 없지만 뭐 하여튼 그
런 계획이 있으면은 그런 그 2세들 육성을 위해서 2세들의 교육 육
성을 위해서 한국 정부에서 지원이 있다면은 좋겠어요.
▮ 90년대 의류업 시작과 한국인 영주권 신청에 기여 
90년대 말에 20여개의 봉제업체가 코스타리카에 진출이 되는데 
봉제업체에 진출을 하면 교민들이라기보다 주로 이제 공장을 세우고 
현지인 고용 형태의 봉제업이었지요. 
코스타리카에서는 주로 여자 의류 사업 중심인데, 왜냐하면 퍼센
트로 봐가지고 그 나라에, 여자들이 많고 그 남자들의 지상천국이라 
그래요. 왜냐하면 8:1이라고 그래요 비율이. 여자 8에. 확실한 집계
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태권도 제자나 흘러들어온 얘기를 전해드리
면. 여자 8명에 남자 1. 여자 의류업이 중심이고 그래서 윤리, 도덕
적으로 보면 남성들이 조금 이제 바람기가 많고 이혼율이 많고 좀 
그런 확률이 많습니다. 그래서 스패니쉬로 말하면 마티스모라 그러
는데 마티스모가 뭐냐면 남성 우월주의. 우리가 보면 마티스모, 굉장
히 그 자동차 탈 때나, 극장 들어갈 때나, 식당에서나, 레스토랑이나 
보면 의자 내리고 무슨 여왕폐하 정도로 예우를 한다고요. 그렇지만, 
제4장 코스타리카에서 태권도 사범과 한인회장으로서의 삶
 
79
저도 잘 몰랐어요. 그런데 집에 들어가서는 굉장히 그 우월해요. 꼭 
옷을 사 입어도, 저희들이 옷을 사 입으면 가게 와서 옷을 사 입잖
아요. 꼭 남편이 옷을 좋아해야 그 옷을 사 입지, 남편이 이래 봐가
지고 꼭 보여줘요. 마음에 안 들고 No 하면 절대로 안 사줘요. 혼자 
사 입으러 오는 여성들도 많지만 대부분의 여성이 나와서 꼭 보여줘
요. 그리고 탈의장에 옷장에 같이 들어가서 같이 다 본다고요. 보고. 
확인한 다음에 카드가 결제가 되는 것이지, 막 결제가 안돼요.
저도 의류 했습니다. 25년간, 가게를 열어가지고 여러 군데에 다
가 해 가지고. 사실 나는 장사할 줄도 모르고 DNA도 없고 장사에 
대해서. 제 성품도 그렇고. 그런데 우리 집사람은 어머니가 장모님이 
함경도 함흥이세요 고향이. 그래 가지고 1.4 후퇴 때 오셔가지고 이 
비즈니스 이런 데, 장모님은 음식도 잘 못하시고 그래가지고 집사람
이 장녀인데 4남매 중에 장녀인데 거의 다 살림을 도맡아가지고 하
다시피 집안 살림을 우리 집사람이 그래 가지고 음식이나 요리나 이
런 거 아주 교회에서도 참 이제는 뭐 아주 알려져 있었죠 동네에. 
그리고 교민회장도 제가 몇 번 하다보니까 초대하고 뭐 이런 일이 
많을 때도 열심히 내조를 해줬고, 이후 의류 사업은 우리 집 사람이 
주로 하고 저는 이제 태권도 하고 겸했죠. 그 사람은 그 사람 대로 
그 일을 하고 나는 나대로 태권도를 운영하고, 남은 시간에 봉사하
고 뭐 그런 쪽으로다가 이제 쭉 해왔죠. 뭐 그런 상태에요.
그런데 최근에는 FTA를 맺어가지고 우리나라의 사람이 주인인 
세계적인 패션 forever21이 들어왔는데 그게 바로 제가 하는 가게 
바로 앞에 정면에 어마어마하게 매장을 열었어요. 3층으로 해가지고 
직원들만 해도 몇 십 명이 되는 그런 대기업으로 딱 완 배치해가지
고. 가게 하난데 바로 앞인데 그게 게임이 되겠습니까? 해서 아.. 이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80
 
게 모르긴 몰라도 하나님 뜻인가 보다 그만 하라는 뜻인가 보다. 해
서 접고 렌트를 하고 집도 렌트를 하고 정리를 하고 또 이렇게 다 
해주시더라고. 옛날 살던 집도 매매가 되고 세 가지가 한꺼번에 쫙 
연결이 돼가지고 정리가 되더라고. 아 그래 떠나라는 뜻이구나. 정리
해가지고 이렇게 돌아오게 됐습니다.
초기 의류업 할 당시 그때는 교민들도 없었고. 그러니까 나중에 
알고 보니까요. 그 당시에 한국에서도 그런 그 회사를 운영할 만한 
그런 그 자본을 가지고 나올 분들도 없었고. 다들 어려웠고. 그게 전
부 국가에서 지원해주는 그런 그 시스템으로다가 융자를 받아가지
고. 그러니까 그렇게 그 이렇게 말씀을 좀 드리면 그런데 그런 그 
나쁜 국가관 없이 오셔가지고 회사가 문을 닫게 되니까 모든 물건이
나 모든 것을 다 정리하고 본국에 돌아가지도 않고. 그런 분들도 제
가 뭐, 이런 건 정말 극비죠. 그래서 제가 말씀을 못 드립니다만, 거
기 같이 살다 보니까. 그렇게 해서 본국에 돌아가지도 않고. 그 다음
에 코스타리카에 유명한 모자회사가 들어와 있었어요. 세계적으로 
많은 나라에 납품하고 있는 영한 모자라고. 백 회장이라고 경인 방
송국 이사장도 하고 지금도 사장이시고 백, 아이고 그 하여튼 유명
한 분인데 아무튼 그분이 오랫동안 거기서 영한 모자라고 세계적으
로 아주 그 잘 알려진 모자 회사인데 들어와서 괜찮았었죠. 잘 하시
다가 얼마 전에 정리하고 떠나고 그랬어요.
영주권 신청 관해서는 2013년 일인데, 얼마 안됐죠? 한 2년 전 
얘긴데 제가 오래 살다 보니까 저는 군에 있을 때 벌써 이민 수속을 
해가지고 코스타리카 공항에 딱 도착하니까 그런 예가 없는데 저희 
형님이 뭘 딱 주시더라고요. 영주권이더라고요. 법적으로 어려움 없
이 입국해서 살게 됐기 때문에 영주권이 없는 어려움이란 걸 잘 못 
제4장 코스타리카에서 태권도 사범과 한인회장으로서의 삶
 
81
느껴봤거든요. 그런데 최근에 교회 목사님의 동향을 보니까, 아 저희 
교회 목사님이 영주권을 신청하신 지 1년이 넘도록, 영주권을 신청
했는데 영주권이 안 나와서 제가 이민국하고 연관이 돼 있으니까 접
수증이라도 한번 줘보십시오 하고 접수증을 가지고 이민청에 목사님
을 모시고 시간을 약속을 하고.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죠.
장관급인데 이민청장이. 제가 뭐 특별한 사람도 아닌데, 그래서 
약속을 해서 이민청장하고 시간 약속을 하고 목사님을 모시고 갔는
데, 이민청장을 만나서 이제 목사님 일로만 갔어요. ‘왜 우리 목사님
이 이 영주권이 안 나옵니까’ 그러니까 인터넷에 들어가 보시더니 
비서를 시켜서 컴퓨터에 들어가 보더니 무슨 서류가 부족해서 이렇
게 됐습니다. 한 달 이내로 연락이 갈 겁니다. 그러면 그때 아마 영
주권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이민청장이 말씀을 해주시더라
고요. 저도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요. 30여년 넘게 태권도를 무료로
다가 전국 공공기관을 가르쳐주고 했는데 나도 좀 뭔가 대가를 받을
게 있어야 되지 않겠나! 나라를 위해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조금 
억울하더라고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강산이 3번이나 변한다고, 30
년이란 긴 세월을. 정부가 바뀌어도  뭐 하든 간에 지속적으로. 그러
니까 이왕 하는 건 끝까지 해야 결실이 나타나는 것 같아요. 하다가 
내가 이렇게 해봐야 알아주겠나 하면 안 되겠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가지고 이민청장에게 나도 좀 오기라 그럴까 그런 
게 생기더라고요. 나도 이럴 때는 동포들을 위해서라도 유익한 일을, 
덕을 봐야 되지 않겠는가. 합법적으로. 불법적으로는 아니더라도 합
법적으로는 도움을 받아야 되지 않겠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 가지고 이제 첫 스타트가 한 게 그거에요. 그래서 이민청장
을 만나가지고 얘기하니까 이렇게 됐고. 그러니까 한 달만이면은 제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82
 
가 보니까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1년이 넘도록 안 나오던 영
주권이 한 달 만이면 나온다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민청장. 직접 
인터뷰는 하늘의 별따기라고 봐야 되겠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죠. 
그래 가지고 저 하니까 목사님이 역시 목사님은 목사님이시더라고
요. 죄송합니다. 종교적인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그걸 가리고는 제
가 제대로 얘기가 안 될 것 같아서. 그래서 과정을 좀. 종교적인 게 
개입이 되더라도 이해를 해주시면 감사하더라고요. 
목사님이 뭐라 그러시냐하면, 절 보고 그래요. 제가 또 교회에 직
군이 그 있다 보니까. 장로님, 저 혼자만 영주권을 받으면 되겠습니
까? 저는 몰랐어요. 우리 교회에 우리 교민회에 교민들이 그렇게 많
은 분들이 영주권이 없이 어려움을 많이 겪으면서 살고 있는 줄은 
몰랐어요. 그러면서 절 보고 그러더라고요. 이렇게 많은 분들이 영주
권이 없는데 저만 영주권을 받으면 되겠습니까? 해서 아니, 제가 알
기로는 영주권으로 어려움이 있는 분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
러니까. 어떻게 교민회장을 여러 번 하신 분이 그런 사항도 파악을 
못하셨나 이거에요. 왜냐하면 저도 미국에서도 조금 살았어요, 1년 
가까이. 살았다고 할 순 없죠 다녀갔다고. 그런데 우리 동포들이 세
계 어딜 가더라도 내가 영주권이 없습니다. 내가 법적으로 이런 어
려움이 있습니다. 하고 이마에 써서 광고하고 다니는 사람이 없습니
다. 되도록 자기 개인 프라이버시가 있기 때문에 알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조그마한 나라 코스타리카지만도 그걸 전 모르고 살았어요.
제가 거기에 대한 불찰이 많죠. 그걸 제가 파악을 하고 협조하고 
그런 분들의 어려움을 덜어드려야 될 직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에
요. 교민회장을 몇 번을 했는데 그것도 제대로 몰랐으니. 그래서 얼
마나 됩니까 하니까 많습니다 그러대요. 그래서 안 되겠더라고요. 우
제4장 코스타리카에서 태권도 사범과 한인회장으로서의 삶
 
83
리가 이민청장에게 부탁해서 인터뷰를 한번. 우리 교회에 와서 교민
청으로 와서 한번 좀, 그것도 무리한 부탁이죠. 더군다나 일요일날. 
장관급인데 그런 분을. 경호원까지 다 있는데. 아무리 그.. 비서에다
가. 그래가지고 일이 되려니까 그런 부탁을 드렸는데도 그분이 기꺼
이 흔쾌히 승낙하시더라고 이민청장이, 이민국장이. 그래가지고 몇월 
며칟날 비서를 부르더니 그 스케줄을 빼고 한인 동포들의 인터뷰 스
케줄을 집어넣더라고 거기다가. 야 그게 저는 이게 야 이거 참 오래 
살다 보니 별의 별 일이 다 있구나. 저는 한번 해봤는데 이런 좋은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거든요. 그래서 그 며칟날 약속을 해서 거기 
가서 접수를 다 받았죠. 그러니까 한 30가구 정도. 가정들이 신청을 
했어요. 
그런데 한 사람은 지금도 아마 영주권을 못 받지 않나 하는 생각
이 들어요. 바보 같은 생각이라고 그럴까 어리석은 생각이랄까. 오
랫동안 영주권을 못 받고 있는 가정인데 단체로 모이는 활동에는 
잘 안 나타나고 조용히 자영업을 하는 사람인데 교회에 나오라고 
해도 교회도 안 나오고 교민회도 안 나오고 아무 단체도 활동을, 
외국생활에서는 이민생활에서는 그런 것들이 자기에게 엄청난 마이
너스가 되거든요. 도움이 절대로 필요한 나라에서 해외 살면서. 나
그네 생활이라고 그래야 되나. 그렇게 하는 분이 좀 안 되어서 집
에 초대해 식사하면서 몇 월 며칟날 이러이러한 일이 있으니까 당
신도 등록을 해가지고 이민청장의 그 인터뷰를 좀 받아보라고 자문
을 좀 받아보라고 하니까. 절 보고 뭐라 그러냐하면. 처음 그런 사
람이 나타났어요. 아니 회장님 거기 갔다가 인터뷰 한다 그랬다가 
이민경찰들 거기다가 잠복시켜놨다가 다 치워라 그랬다 바로 그냥 
이렇게 하는 거 아닙니까? 교수님 박사님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84
 
그 분도 우리 대한민국에서 대학까지 다 공부하고 가신 분인데, 야 
그렇게 소극적으로 그렇게 야 어느 나라 이민청장이 자문해준다고 
해놓고 이민경찰 불러다가, 지금 생각해도요 너무나 안타깝고. 내가 
볼 때 그 사람 아직까지도 못 받지 않았나, 영주권을. 그리고 그 자
문을 받았던 사람들은 정말 그 이민청장이 약속했던 빠진 서류를 
다 제출했더니 바로 다 영주권을 받았어요. 지문을 찍고 이민국에
서 영주권을 다 받았어요.
제4장 코스타리카에서 태권도 사범과 한인회장으로서의 삶
 
85
<보충자료>
중남미 한인 이주의 특징 ①
중남미로의 한인 이민은 이민학자나 국가기록을 통해 분석해 
보면 현재까지 시기별로 5시기로 구분된다.
구체적으로 1905년 멕시코 이민을 시작으로 1921년 쿠바로 
재이주한 제1기 (1903-1921), 1920년대 소수의 일본국적 
조선인(장승호와 김수조 등)들이 일본인 이민자들에 섞여서 
이민 온 것과 1956년에 57명의 반공 포로들이 브라질과 아
르헨티나로 이민 온 제2기(1922-1956), 1963년 브라질로의 
농업이민을 시작으로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볼리비아 등으로 
집단 이민이 시작된 제3기(1963-1971), 1972년 브라질 정
부가 한인 이민 억제 정책을 시작하게 되어 공식이민이 중단
되고 대신 서독에서 광부 또는 간호원으로 일했거나 베트남
에서 계약 노동자로 일했던 사람들이 계약이 만료된 후 한국
으로 귀국하지 않고 남미 국가로 불법 입국하여 체류한 제4
기(1972-1980), 그리고 1980년 이후 가족초청, 투자이민 
등으로 중남미 한인사회가 새로운 성장 단계를 맞게 된 제5
기(1981-현재)로 구분할 수 있다.
중남미 한인들의 출신 지역은 1921년 이전에는 서울, 인천출
신이 다수였고 1963년 이후에는 대부분 남한 출신과 소수의  
북한 실향민 출신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의 이주 동기는 주로 
경제적 이주와 북미로 재이주하기 위한 경유지로 중남미를 
선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자료출처 : 국가기록원, 재외한인의 역사 중 중남미 편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86
 
중남미 한인이주의 특징 ②
 
1960년대에 들어서 남미의 한인 이민은 농업이민으로 한국 
정부에 의한 최초의 집단 이민이었다. 1962년에 해외이주법
을 제정하여 잉여인구를 외국으로 내보냄으로써 인구압력을 
줄이고자 하였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등은 광대한 농토를 
개발하여 경제를 발전시키고자 했다. 따라서 1960년대의 농
업이민은 송출국과 수용국 간의 이해관계가 일치해서 시작된 
기획이민이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전반기는 멕시코가 중남미 한
인사회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1987년 멕시코 정부가 무역 자
유화를 실시하고 미국이 중남미 국가들에게 관세 혜택을 주
면서 멕시코의 한인사회는 급증하였다. 1980년대 후반에 에
콰도르에서 이주한 한인 이민자들이 자본과 사업 경험을 바
탕으로 의류업을 새롭게 발전시켰다. 그러나 2003년부터 브
라질과 아르헨티나의 경제가 부활하면서 멕시코로 유입되는 
한인들의 수는 줄어들고 대신 유출하는 인구가 증가하기 시
작했다. 
중남미로의 한인 이민은 소규모이겠지만 증가할 가능성이 있
다. 멕시코가 미국과 맺은 북미자유무협협정, 한국과 칠레 사
이의 FTA 협정, 2000년대 중반 이후 중남미 국가들의 전반
적인 경제 상황의 호전 등의 조건들은 한국인들을 중남미 국
가들로 유인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이민 1.5세와 2세들
이 현지 국가의 주류사회로 진출하면서 한인사회가 보다 안
정된 이민공동체로 정착할 가능성이 높다. 
자료출처 : 국가기록원, 재외한인의 역사 중 중남미 편  
제4장 코스타리카에서 태권도 사범과 한인회장으로서의 삶
 
87
  
중남미 한인이주의 특징 ③
중남미 재외한인 단체 분포  
자료출처 : 김영철 (2016). 중남미 재외동포사회와 한류, 한국민족문화 58
제5장 자녀 정착과 노년을 위한 한국 귀환  
호텔리어로 성장한 딸과 방재청에 근무하는 아들
2세들의 미국 거주 및 3세 교육과 정체성 문제
한국으로 귀환하는 코스타리카 한인 2세의 삶
한국으로의 귀환과 이중국적의 소유
귀환 이후의 삶 : 고국에 봉사하는 삶
 미국 마이애미에 거주하는 손녀와 손자 (2016년)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90
 
▮ 호텔리어로 성장한 딸과 방재청에 근무하는 아들
저는 코스타리카에서 태권도를, 저도 나름대로 도장을 현지에서 
몇 군데씩 했고 하다가, 워낙 소규모 작은 나라니까 크게 성공을 하
려면 대국에 가서 해야죠. 브라질이나 미국이나 유럽 같은 큰 나라
에 가서 해야 하는데 저는 처음에 단추가 코스타리카라는 첫 단추가 
꿰어졌으니까. 그것도 한 번씩 몇 년씩 10년, 20년 사니까 이주하기
가 상당히 쉽지 않겠더라고요. 그것도 하나의 기반인데. 그리고 이제 
그 딸이 서른 아홉이네. 올해 12월 7일이 생일이었었거든요, 며칠 
안 지났네. 아들은 서른 다섯. 두 사람은 다 마이애미, 플로리다에 
살고 있어요. 거기서 인터네셔널 유니버시티라고 해서 FIU라고 하는
데, 그 대학을 나와 가지고 딸은 호텔경영학을 전공해가지고. 메리어
트 호텔에서 12년간 근무를 하고 인터네셔널 마케팅 팀장으로 승진 
했다가 아주 좋은 자리였죠. 그런데 결혼을 하는 바람에. 제 사위는 
한국 사람이 아닙니다, 프랑스 사람입니다. 프랑스에서 아비뇽 출신
의 사람인데 그 마이애미에 있는 은행에 근무합니다. 그 은행이 아
마 그 잘 알려진 펀드 은행인데, 크레딧 아그리콜이라고 유럽 은행
입니다. 아마 랭킹하면 4,5위정도 올라가요. 거기 지점장 위에 있는 
자리인데 좋은 보수, 연봉도 많죠. 좋은 집에서 지금 아주 뭐. 마이
애미 비치에 살고 있거든요. 아주 그 상류층으로 잘살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휴가 때 이제 마이애미 가서 있다가 코스타리카 왔다가 갔
다가, 추울 때 말입니다. 철새처럼 추울 때는 이제 날아가서 따뜻한 
제5장 자녀 정착과 노년을 위한 한국 귀환 
 
91
나라에, 올해는 어쩔 수 없이 추위를 제가 겪어야 될 사정이 있어서 
여기 있는데요.
프랑스인과 국제결혼한 딸 양수정과 시댁 가족들
아들은 같은 대학에서 졸업을 하고 지금 대학원 코스를 하고 있는
데. 좀 쉬었다가 지금 이제 방재청이라나? 재난. 그거 대학원 코스로 
그걸 공부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 대학을 나오고 거기서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직장을, 대학에서. FIU라고. Florida International 
University라고 그러는데. 그 대학에서 졸업을 하고 일을. 그 친구는 
원래 컴퓨터하고 생물학을 전공했습니다.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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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세들의 미국 거주 및 3세 교육과 정체성 문제 
제 조카들은 보스턴, 지금 살고 있는 데는 메를린, 그 저 워싱턴에 
살고 있거든요 두 형제가. 두 살 차인가 그래요 두 형제가. 우리 사
위들은 다행히 둘 다 두 아이들이 다 코스타리카에서 낳았다고요 출
생을. 큰 아 이름은 소하고 양소하, 둘째 아들은 수산이라는데 양수
산. 다행히 두 사람 다 이민 2세, 한국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사위가 
조카사위가 조지타운대학을 나와 가지고 경영학을 공부했는데 삼성
에 나와 가지고 삼성에 스카우트돼서 삼성 본사에서 회장을 비롯해
서 이건희 회장님을 비롯해서 이사진들을 교육을 시키는 전략, 전략
팀의 이사진들을 교육시키는 그런 부서에서. 그때 제가 한국 나와 
가지고 거기 올라가봤지 않습니까. 거기 경호나 보안이 무슨 저 청
와대 들어가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청와대 내가 몇 번을 가봤는데 
청와대는 아무것도 아니더라고. 그래가지고 삼성의 본사에 이건희 
회장님 집무실까지 가봤잖아요 제가, 그 백으로다가. 
그런데 하여튼 두 사람이 한 사람은 경영학을 전공한 금융계에, 
한 사람은 둘째 조카사위는. 그리고 큰 조카 사위는 삼성에 있고. 그
리고 지금 그 국방부에서 일하고 있거든요. 미국 국방부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 조카아이들, 두 아이들은 보스턴 대학을 나왔습니다. 
 3세들도.. 그러니까 3세들은 연결하기가 좀 그렇네요. 우리 손주들, 
예를 들자면, 저같은 경우에는 알아듣죠 한국말로 얘기하면 알아듣
는데 자기 아빠가 프랑스 사람이니까 이 불어하지 뭐 한국말도 좀 
제5장 자녀 정착과 노년을 위한 한국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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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듣지 복잡합니다. 영어해야지. 그러니까 미국이라도 마이애미니
까 이 스페인 그 쿠반들이 완전히 잡고 있거든요. 거기는 시장도 쿠
반, 그러니까 도지사 그 부인, 주지사 누구죠 대통령 잭 부시 그 주
지사가 또 부인이 또 멕시코 사람이에요. 그러다보니까 이 마이애미 
전역 플로리다는 이민국 들어가다 보면요 공항에. 다 태어나기는 거
기서 태어난 사람들이지만 혈통이 다 쿠바 사람들이거든요. 그래서 
말을 잘 안하려고 그래요. 영어가 제가 짧으니까 스패니쉬로 하면, 
거기 공용어가 스페인어에요 영어 스페인어. 그러니까 법적으로는 
해도 돼요. 근데 좀 뭐랄까, 너 이렇게 오래 산 사람이 영어도 잘 못
해 이런 식으로 아주 그 기분 나쁘게 하는 official immigration이 그
런 사람이 있다고. 그 뭐 여권은 코스타리카 여권이지, 말은 스페인
어를 하지. 본적은 본국은, 뭐 이런 사람이 들어오니까 이렇게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다보니까 아이들이 거기서 살다 보니까 우리 손
주 손녀들 경우에는 인척들이 또 프랑스에서 오면요. 불어를 한다고 
손주들한테. 그러면 꼬마가 말이에요. 5살 밖에 안 먹은 놈이 손가
락으로 이래요. 아버지 사촌들이 이런 사람들인데 이런다고 아니 프
렌치 No, Only 잉글리쉬 자기 난 사람이니까. 이거지. 자기 아버지
가 프랑스 사람인데도 잘 못 알아듣는다 이거야. 그러니까 영어로 
이야기하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 보니까 3세 정도 가면 주체성
을, 뿌리를 찾기가 어려워지지 않겠나. 그래서 우리 딸아이가 자꾸만 
물어봐요. 
올해 7월 달에 제가 기지를 여기서 잡아야죠. 둥지를 트니까 본국
에 돌아와 가지고 아이들한테 교육도 좀 시키고. 7월 달에 프랑스에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 초청받아 갔다가 오면서 사위는 마이애미로 
가고 자기들은 한국으로 가서 아이들한테 한국을 보여주고 싶고. 그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94
 
리고 자기도 몰라요. 한국말을 그렇게 잘하지도 못하고 자기 엄마가. 
한국말 가르쳐준다고 가르쳐주는데 보면 순 엉터리야 보면. 뭐 이상
한 말로 카카오톡에 온 거 보면 야 이상하게 찍혀가지고 온다고. 
한글로 해서 보내오긴 보내왔는데 보면 이게 아니야. 그럼 우리가 
교정을 해서 다시 보내주고. 이 카카오톡을 누가 발명을 했는지 이
런 분을 표창을 줘야 된다고. 저 같은 사람이 대통령 포상을 받을 
게 아니라 카카오톡 창립자를 대통령 표창을 줘야 돼. 그런 사람을 
포상을, 특별한 상을 주셔야 해
 미국 마이애미에서 부인과 손녀가 김밥 만드는 장면
제5장 자녀 정착과 노년을 위한 한국 귀환 
 
95
▮ 한국으로 귀환하는 코스타리카 한인 2세의 삶
코스타리카에 유학와 있는 그러니까, 코스타리카에 살고 있는 교
포의 자제들이 한국을 많이 겨냥하고 나오는데 그래도 취직이 좀 되
더라고요. 왜냐하면 그 아이들이 영어, 스페인어, 한국어를 하니까. 
한국어를 왜 잘하느냐 거기서 태어난 아이들이에요. 그런데 한국에 
갖다 놔도 별로 뒤지지가 않아요. 왜냐하면 한국 학교가 있거든요. 
한글학교. 거기서 기초를 배워가지고 여기서 나와서 공부를 하다보
니까 4년제 대학을 여기서 나오다 보니까 한국말을 너무 잘해요. 그
러니까 대기업에서 주로 어떤 그 파트에 집어넣는가 하면은. 엘지나 
대우나 삼성에서 해외출장, 해외출장 다니면서 라틴아메리카 지사 
이런 데 보내가지고 시장조사하고 이런 데. 언어가 자유자재로 잘 
 미국 마이애미 방문시 손자와 기념촬영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96
 
되니까. 놀고 있는 학생들이 별로 없더라고요. 호텔경영학을 전공하
면 호텔의 경영도 그렇고 모든 면에서 다 잘 하고 있는데 코스타리
카는 그게 잘 안돼서, 그리고 코스타리카가 적은 교민 사회지만 한
국 부모들이 교육열이 세계에서 최고 아닙니까? 일본이나 한국 세계 
최고 아닙니까. 그러다보니까 거기서 의류업 종사하면서도 한국에 
있는 아파트 다 팔아가지고 몇 억씩 되는거 다 팔아가지고 다 투자
하는 거예요. 미국의 조지타운대학, 워싱턴. 조지타운대학 그리고 뉴
욕의 존 홉킨스. 그리고 우리 조카는 콜롬비아, 오바마 대통령이 나
온 대학원 거기도 나오고. 코넬 대학 코넬도 나오고. 그 조그마한 나
라에서 미국의 명문대학이라는 명문대학 거기서 다 수료를 하고. 지
금 다 잘하고 있어요. 집에서 놀고 가만히 백수로 있는 애들은 없어
요, 아직까지, 제가 알기로는. 2세대들은 이제 한국에 많이 와 있죠. 
한국 와서 군에나 가고. 직장. 왜냐하면 3개국어를 하니까 아무리 
취업난이 어렵다 하더라도 그 아이들은 다 미국 고등학교를 나왔어
요 거기서. 그러니까 여기 또 한글학교가 있고 하니까 한글을 또 부
모들이 다 다문화가 아니고 100% 한국 사람이니까 엄마아버지가. 
그런 문화에서 자라다 보니까 한국말을 잘한다고. 교회에서도 거기
서 태어난 아이들도 여기 데려다 놔도 그렇게 손색이 없을 정도로 
한국말을 잘하거든요. 그러니까 한국어, 스페인어, 영어 3개국어를 
하니까 대기업에서 채용을 잘 해요. 그래서 여기서 실업자로 놀고 
그런 아이들은 없어요. 의사들은 있고. 산부인과 의사도 있고.. 일부 
있긴 있는데 국가 기관에서 일하는.. 거의 뭐 중국사람들은 있어요. 
뭐 축구협회 회장이니 국회의원도 했고 장관도 한 사람은 있는데 한
국 사람은 없어요
그런데 거기 코스타리카의 교민들의 자제들은 지금까지 제가 이렇
제5장 자녀 정착과 노년을 위한 한국 귀환 
 
97
게 보면 예를 들자면요. 저희 딸, 딸을 예를 들자면은 이제 거기서 
미국 학교, 고등학교는 링컨 링컨 스쿨이라고 완전히 미국 문교부, 
미국 교육부에서 세운 학굔데 우리 아들도 그 학교 나오고. 미국 가
가지고 플로리다에 있는 대학을 나왔는데 호텔경영학을 전공을 했어
요. 호텔 경영학. 그 당시에 한창 그 과가 붐이었지 한국에서도. 드
라마에 있잖아요, 호텔리어라는거. 그 당시에 한국에서도 엄청난 붐
을 일으켰던 호텔경영학을 전공해가지고 메리어트호텔에 입사를 해
가지고 12년 동안 미국에서 근무를 했는데 어디까지 올라갔느냐 하
면은 인터내셔널 마케팅 팀장까지 올라가고 디렉터까지 올라갔는데 
결혼을 했어요. 결혼을 하자 그만, 아이를 낳고 하다보니깐 그만뒀습
니다만 그 자리가 제가 생각해도 좀 안타까워요. 좀 아깝고. 그런 자
린데 남편 되는 우리 사위가 프랑스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금융계
에 일을 하는데 프랑스 은행인데 크레딧 아그리콜, 농협 같은 곳이
죠, 우리나라로 말하면. 인터넷에 한번 들어가 보시면 나올 겁니다. 
세계 아마 랭킹 5번째로 하는 유럽 은행이던데, 거기 이제 마이애미 
은행에 지점장 다음에 위에 디렉터로 지금 하고 있거든요. 마이애미
에서. 아주 그 상류층에서 잘들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만
두게 됐어요 우리 딸아이가. 그런데 좋은 아주 직장에서 일을 잘 하
고 있었죠.
▮ 한국으로의 귀환과 이중국적 소유 
저는 시민권이 있습니다. 이중국적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적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98
 
도 회복해서 대한민국 국적도 회복했고요. 원래 없었습니다. 상실되
어 있었는데 말소가 되어 있어 가지고 우리나라의 법이요, 옛날에는 
외국 국적을 취득을 하면 우리나라 국적이 버려야 돼요, 상실이 돼
요 그런데 이 법이 바뀌어져가지고 대한민국 정부에서 이중국적을 
허용했어요. 제가 한국 국적을 취득하게 된 동기가 왜냐하면 버릴 
수도 없잖아요 제가 완전히 비즈니스가 거기 있는데 그걸 버린다는 
것도 그게 잘 생각해야 돼. 그렇게 되면 복잡해져요. 모든 서류가 그 
다 내 번호가 시민권 번호로 들어가 있는데 그걸 포기를 한다는 건 
그건 안되죠 함부로. 그래서 65세 이상이니까 정년이 이제 65세 이
상 된 사람들은 대한민국 정부에서 이중국적을 허용했어요.
 코스타리카 커피 농장 방문
제5장 자녀 정착과 노년을 위한 한국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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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스타리카 재래시장
 코스타리카 커피 농장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100
 
국에는 2015년 10월 5일 날, 온지가 얼마 안됐습니다. 그래서 
갑작스레 동네에다 집 하나 얻고. 앞으로 내년쯤이나 아파트 어디 
하나 보러 다니려 갑작스레 와가지고. 저는 생각에 야 이거 한국나
가서 아무것도 없는데, 지연도 없고 학연도 없고 다 중간에서 이민
나가는 바람에 다 끊기고 없어가지고 친구도 없고.
이런데 나와 보니까 또 교회 나가니까 얼마나 친절하고 좋은 분들
이 많은지, 친구들 뭐 이런 분들 사귀고 해가지고 살면은 같은 동폰
데 동질성이 있는데 금새 사귀죠 뭐. 아무 걱정 없겠더라고요. 
▮ 한국 귀환 이후의 삶 : 고국에 봉사하는 삶
한국에 아직 처가댁이 있어요. 저희 부모는 다 돌아가셨어도 저희 
장인 장모님은 아직 살아계시거든요, 그게 뭐 부모님, 같은 부모님 
아니겠어요? 그나마 그동안에 조금 더 잘 효도도 못하고 마음은 있
었지만 제대로 못한 거 얼굴도 좀 뵙고. 그나마 돌아가시기 전에 저
희 장모님이 요양원에 계시거든요. 근데 거기 좀 찾아뵙고 그 돌아
가시기 전에나마, 부모님이 이렇게 친부모한테 못한 거래도.
그래서 저는 이제 돌아갈 때가 되지 않았는가, 아직까지 이모님도 
계시고 처가댁도 아직 여기 있고. 이게 사는 게 어떤 면에서는 우리 
삶의 하나의 뭐랄까 삶의 리듬이 없다 그럴까요. 어떻게 보면 막혀
있는 것 같고 인간관계에서. 이렇게 살다가 세상을 떠난다면 이게 
뭐 추석때 그래도 가족들도 우리 부모님들 화장을 안 하고 아주 좋
은 그 묘지에 공원 묘지에, 교회 저기 포천 경기도 포천 있지 않습
제5장 자녀 정착과 노년을 위한 한국 귀환 
 
101
니까, 거기 묘지에 교회 묘지에 안장. 우리 부모님들이 어머니 아버
지가 이제 두 묘지가 이렇게 나란히 좋은 장소에 그 당시에 그게 어
려운데 교회를 다니시다 보니까 그런 그 좋은 혜택을 받으셔가지고 
그 우리가 매달 관리비 공원 관리비만 내면 이제 되는데 그 때가 되
면 추석이고 구정이고. 40년 동안 저는 이제 완전히 뭡니까. 이산가
족도 아니고 이거 뭐.. 이산가족 아닌 이산가족이라고요. 그리고 뭐 
탈북자 아닌 탈북자 비슷하게. 그렇게 살았는데 이 그리고 거기서 
신앙생활도 해요. 거기서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한 교회에서 40년동
안 몸담고 이제 다 은퇴했으니까. 지금 와 계시는 분은 몰라요 지난
달에 오셨는데 새로 부임해 오신 분은 제가 아직 얼굴도 못 뵈었고. 
제 4대까지는 저하고 직접적인 연관이 많았는데. 그래서 결론은 이
제 아 이게 뉴스만, 이제 맨날 보죠. 구정 때 성묘 가고 추석때 성묘 
가고 구 정때 부모님 그 뭐 찾아 뵙고 저는 뭐 부모님들 다 돌아가
셨지만은 아직도 장인어른 살아계시고. 그 뭐 좀 사람이 오가고 하
는, 우리 민족은 혼자서는, 미국사람들은 산속에 가서도 잘 살아요 
혼자서. 그 민족성이 달라요. 한국 사람들은 씨족 국가 부족 국가 그
래가지고 동네로 안동 김씨 어디 민씨 해가지고 옛날 역사를 봐도 
끼리끼리 한 가족이 동네 가도 한 가족이 전부 살거든요. 그런게 우
리는 우리 다음 세대는 우리 애들은 뭐 그런거 하면 질색할거예요. 
그런데 저까지만 하더라도 세대가 그렇다고요 저도. 그리고 이제 뭐 
교민들도 이제 뭐 떠나시는 분도 많고 지금 거기 있는 분들도 다 이
제 떠나려고 그러는 분들도 많아요.
또 거기 뿌리내려봐야 뭐 특별한 것도 없고 그리고 보험 아까 말
씀하셨는데 보험은 이제 의무에요. 의문데 노후가 의무자 건강보험 
그거하고 연금 연금인데. 연금은 뭐 우리 같은 사람들은 몇 십년을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102
 
부어야 하기 때문에 제대로 혜택을 받을 만한 사람도 없고 연금 타
먹는 사람들도 없고 연금 줘봐야 몇 푼 되지도 않고 그러니까 몇 백 
불 나오고 그건 연금이라고 볼 수도 없고, 그건 기대도 없고 그리고 
하지도 않고 그냥 건강보험이지요.
근데 건강보험이 그 의무에요, 우리나라처럼 의문데. 그거 뭐 들어
도 그렇고 안 들어도 그렇고 그 병원이 워낙 뭐 의료시설이 좋은 병
원은 좋은데 개인병원들 잘돼있는 데 많은데, 그 국립병원들은 시설
도 없고 예를 들어서 내가 갑자기 MRI를 찍는다든가 뭐 맹장수술을 
해야 된다 그러면 뭐 몇 개월 기다려야 하니 급한 환자는 그냥 죽는 
거죠 결국. 그러니 그런 혜택도 못 보는 거지 다른 개인병원에 가면 
혜택이 안 되니까. 그리고 이거 다  똑같아요 우리나라. 개인 보험도 
있잖아요, 우리나라에 국민건강보험 말고 또 하나 또 드는 거 있잖
아요 개인보험. 대부분이 보니까 두 개씩 가지고 계시더라고. 저는 
뭐 지금 국민건강보험밖에는 없습니다마는 그 뭐 상당히 비싸더라고 
다른 걸 또 들려면. 그러니까 우리나라 교민들이 웬만하면 아프면 
당장 죽을병 아니면 꼭 한국으로 나오죠. 한국으로 나와 가지고 그 
보험이 없지만도 보험이 없어도 거기보다 싸다. 뭐 몇 백 만원 내도 
예 한 돈 천 만원 내도 여기가 싸고 또 신뢰가 가니까 믿음이 가니
까. 지금 여러 분 나와 있어요.
우리 살던 곳에 캐나다에 있던 분도 오고 암 말기도 오고 그러니
까 우리나라 지금 의술이요, 지금 저는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
는데 뭔가 하면은 그 죽은 사람만 죽은 사람만 못 살린다 이거야 우
리 대한민국은. 미국이요, 미국이 앞서가지 않습니다. 캐나다요 캐나
다 사는 교포들이 다 여기서 수술을 받고 있거든요. 그리고 미국은 
검사를 하는 데 암이 있잖아요, 그러면 검사하는데 보통 15일 20일 
제5장 자녀 정착과 노년을 위한 한국 귀환 
 
103
30일씩 바로 안 해줘요. 저희 지금 인척이 한 분 와있다 그랬잖아
요, 제가 말씀드렸죠. 오늘 판정이 났는데 그 다음 다음날 수술했더
라고요. 예. 아주 이 완전히 들어내 버렸어요. 나는 경희의료원이 오
래돼가지고 그 병원에 한 17년 이제 그.. 저에 대한 모든 자료가 거
기 다 있으니까. 모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리고 제가 한국에 나오면 무언가 나라를 위해 좀 보탬이 될까. 
사실 제가 거기 어렸을 때 태어난 사람도 아니고 26살 때 내가 거
기서 살았는데 가서, 그런데 이제는 좀 고국에 그리고 내가 그동안
에 살아온, 살아온 이야기를 학생들한테 이야기해 주고 싶어요.
우리 컴퓨터 배운 학교. 안양상업고등학교인데, 너무 친절하게 잘
해주고 그러셔서 돈 10원도 안 받고 무료로 전부, 무료강좌. 그래서 
저도 그랬죠. 나도 이렇게 해외에서 오래 살다 왔는데 자라나는 청
소년들을 위해서 그 나의 살아온 과거, 나의 살아온 이야기를 한번 
간략하게나마 자라는 청년들한테, 중 고등학교 학생들한테, 그런 기
회를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연락드리겠다고 했어요.
안양 상고에서 내가 보니까 기꺼이 그냥 한번 언제 와서 그 중고
등학생들한테 국가관이라던가 요즘 없잖아요. 대한민국에 학생들이 
국가관이 뭐고 역사고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런 걸 좀 심어줄 수 있
는 그런 계기가 되면, 여기 와서 가만히 있고 관광이나 다니고 이러
면 사람이 삶이 무의미하잖아요. 그러니까 죽으면 되겠어요? 거기서
는 그만치 했으니까 여기 와서 모국에 들어와서 찾아보면 뭔가 아까 
그거에요 박사님이 얘기하신 경북대학교에 와서 대학원생들한테 자
연스럽게 커피나 한잔 마셔가면서 물어보는 거 답변도 해드리고 내
가 살아온 과거의 이야기들을 이렇게 하면서 이것이 우리가 진정 바
라는 애국, 그러면서 우리 국가관을 좀 심어주고 어린 세대들한테,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104
 
젊은 세대들한테 좀 내가 나가서 살아보니까 그래서 결국은 모국으
로 돌아왔고. 돌아와서 그냥 세월만 보내는 그런 나머지 삶을 살고 
싶지 않다. 젊은 세대들한테 국가관을 심어주고, 이렇게 하니까  지
금 이렇게 변화 되고 있다 그 나라도. 
코스타리카는 처음엔 태권도 불모지였거든요 한사람도 태권도 인
구가 없던 나라에서 지금 한 2만명이 넘는다고. 전국에 직원이 다있
어요. 우리 얼굴은 몰라도 우리 형님하고 나하고 얼굴은 모르지 그
러니까 세대로 따지면 몇 세대 내려왔는데 증손주 정도 될거야 아
마. 손주의 손주까지 그런 세대로 내려왔는데 그분들이 우리 이름은 
몰라도 김정은, 김정일 사진 붙여놓듯이 도장에 우리 사진을 붙여놓
은, 우리 사진 갖다 붙여놓은 애들이 많아요. 그 사진 좀 찍어서 보
내 달라 그러고 새로 도장 오픈하는 아이들은 여기 저 메일로 들어
온다고, 인터넷으로 들어와 가지고 난 누구누군데 나는 선생님 잘 
모르는데 사진을 좀 하나 보내주면 내가 확대해가지고 도장에다 얼
굴을 붙여 놓고. 내가 사진을 붙여놓을라고 그런다고. 
지금 보면 이제 한국이 살기 힘들 때는 자꾸 나가더만 요즘은 그
래도 한국이 좀 괜찮아지니까. 다시 들어오시는 분들이 많죠. 그러니
까 역이민이라고 해요 역이민. 제가 여기 몇가지 사항들이, 엄청 중
요한 사항들이 몇 가지가 있거든요. 대통령을 만나뵀던, 김영삼 전 
대통령 만난 이야기. 김종필 총리 이야기, 대사관 이야기 등. 그리고 
여기와서 북한동포들이 와서 하는 얘기가 너무 안타깝다 이거에요. 
아니 여기서는 아무리 그래도 자기가 열심히 노력만하면 자살을 할 
단계까지 그런 어려움은 처하지 않을텐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안
타깝다고 제발들 우리 동포들 자살 좀 안했으면 좋겠다고. 서로 협
력해가면서 사랑하면서 살아가면 얼마든지 살 수 있는 나란데 왜 자
제5장 자녀 정착과 노년을 위한 한국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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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을 하냐 이거야. 왜 그 불명예스런 세계 랭킹에 올라가지고 그러
느냐. 그래서 자라나는 세대들한테 제 이야기와 함께 올바른 국가관
을 심어주는 이야기를 해 주는 봉사활동을 하고 싶어요.
부  록
1. 코스타리카 한인회 소식지  
2. 양원기 생애에 대한 본인 기록
 
3. 코스타리카 이민 기사 : 태권도와 한인회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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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코스타리카 한인회 소식지 : 고국소식  
부록 1. 코스타리카 한인회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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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110
 
부록 1. 코스타리카 한인회 소식지
 
111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112
 
2. 양원기 생애에 대한 본인의 기록
부록2. 양원기 생애에 대한 본인 기록
 
113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114
 
부록2. 양원기 생애에 대한 본인 기록
 
115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116
 
부록2. 양원기 생애에 대한 본인 기록
 
117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118
 
부록2. 양원기 생애에 대한 본인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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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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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코스타리카 이민 관련 기사 : 태권도와 한인회
3-1. 태권도 명예의 전당 : 코스타리카 관련 부분(최초 보급자 양원건) 
부록3. 코스타리카 이민 기사 : 태권도와 한인회
 
121
3-2.  코스타리카 대표팀과 75년 세계태권도 대회 참석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122
 
부록3. 코스타리카 이민 기사 : 태권도와 한인회
 
123
3-3. 1979년 코스타리카 대사관에서  개최한 ‘한국의 밤’ 행사 기사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124
 
3-4. ‘코스타리카 한국학교’ 관련 한국신문 기사
부록3. 코스타리카 이민 기사 : 태권도와 한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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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126
 
부록3. 코스타리카 이민 기사 : 태권도와 한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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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코스타리카 한인회’ 홈페이지 및 페이스북
부록3. 코스타리카 이민 기사 : 태권도와 한인회
 
129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130
 
132
 
찾아보기
(ᄀ)
가정예배 61
강릉 12
건강보험 97
교민사회 60
교회 60
국민무공훈장 40
국비장학생 16
귀환 92
김영삼 대통령 71
김종필 총리 37
(ᄂ)
남원 14
(ᄃ)
대법원장 68
(ᄆ)
마약단속반 45
(ᄇ)
박정희 대통령 38
방재청 89
봉사활동 100
부인회 75
(ᄉ)
산호세 35
스페인학 어학과 16
(ᄋ)
안양상업고등학교 98
알베르토 몽헤 25
양원건 16
영주권 18, 76
외무부 장관상 37
운수업 14
의류업 76, 78
이민청장 79
이복형 공사님 35, 37
이중국적 94
인솔 65
(ᄏ)
케포스 66
코스타리카 17
코스타리카 한인회 68,70.71
콜롬비아 16
(ᄐ)
태권도 16
태권도 대회 64, 65, 70
태권도사범 16,18
찾아보기
 
133
태극기 35
(ᄑ)
파라과이  38
프랑스 91
(ᄒ)
한국 학교 66, 68
한국대사관 34, 37
한국외대 16
한인 장로 교회 59, 61
한인회장 68,71,73
텔리어 88
Costa Rica 42 years, My living story : An Oral Life History of Won 
Ki Yang, a Taekwondo Master by Shinkyu Park, Chaimun Lee 
Copyright ⓒ A Project on Multicultural Societies and Diaspora,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Published by BookandWorld. Daegu, Korea
재외한인 구술생애사 총서
21
코스타리카 42년, 나의 살아온 이야기 
- 태권도 사범 양원기의 생애사-
2017년 4월 30일 초판 발행
지은이 박신규 이채문 
펴낸이 김영모, 
펴낸곳 책과 세계   등록 | 2007년 2월 2일, 제2010-00000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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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학교 SSK 다문화사회와 디아스포라· 트랜스이주 연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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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8-89-              94330   ₩1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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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저서는 2014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4S1A3A20436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