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이채문 박신규
경북대학교 SSK다문화와 디아스포라연구단
도서출판 책과세계
재외한인 구술생애사 총서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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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문
 
오늘날 글로벌 시대의 첨병이라고 할 수 있는 디아스포라의 역
할에 대한 많은 연구 및 정책이 논의되고 있다. 특히 720여만명에 
달하는 재외한인을 이야기 할 때 조선족의 이주를 빼 놓을 수 없
다. 
국내외로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는 조선족의 이주에 있어서는 대
부분 문헌이 주로 다루고 있는 지역은 연길현, 훈춘현, 화룡현 및 
왕청현을 포함하는 간도지방의 조선족이 그 주요 연구대상이 되어
왔다. 그 외 신의주의 대안지역인 압록강 상류의 안동일대, 남만주
의 심양과 장춘 등지의 조선족도 많이 거론되어 왔다. 그러나 적지 
않은 조선족이 이주한 북만주 지방, 그 중에서도 내몽골과 접경지
역에 위치하고 있는 다우르족과 몽고족의 고향인 치치하얼지방의 
조선족에 대한 연구는 극히 미미하였다. 물론 최근에는 흑룡강 서
부지역의 조선족에 대한 연구가 일부 연구자에 의해 단편적으로 
진행되었으나 아직도 그 중요성에 비해 연구자들의 관심이 매우 
저조한 것은 사실이다.
본서는 바로 이러한 조선족 연구의 공백을 메우려는 시도에서 
시작되었다. 본서에서 연구대상이 된 조선족은 흑룡강성 치치하얼의 
대표적인 지식인인 전창국이다. 전창국은 일찌기 증조부의 생존시기
에 이주한 전형적인 경상도 출신 조선족의 후손이며, 교육자로서 그
리고 신문기자로서 이주민의 삶을 영위해 온 조선족의 대표적인 지
식인으로 불릴 만하다. 일찌기 격동의 문화대혁명을 겪으면서 반혁
분자로서 고난의 삶을 겪어왔고 이후 치치하얼 교육국의 소수민족 
관련 교육행정가로서 소수민족교육에 많은 역량을 쏟아 부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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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면서도 치치하얼 신문과 조선족의 대표적 신문인 흑룡강성 신문기
자로서 소수민족 조선족의 입장을 대변하여왔다.
본서는 구술로 기록된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삶을 7개의 장으
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제1장에서는 1932년부터 시작된 일본제국의 
만주 이주정책에 따라서 한반도 남부지역의 경상도 출신들이 어떻게 
이주되었는가에 대한 구술이 주로 포함되어 있다. 특히 한 많은 눈
(嫩江)유역 개척단의 일환으로 경상도에서 이주한 조선인들의 이
주와 정착에 관한 상세한 내용이 구술의 형태로 본서에 서술이 되어 
있다. 또한 초기 정착단의 일원으로서의 생활을 하다 일제가 패망하
면서 집단거주의 마을에서 거주하던 조선족들이 흑룡강성 전체로 이
주지가 확산되는 과정에 대한 중요한 증언들이 포함되어 있다.
제2장에서는 전창국의 소학교 시절을 비롯한 어린시절의 삶을 통
해 당시 조선족 이주민들의 초기이주생활을 살펴보려고 하였다. 특
히 군인의 신분으로 북조선에 파견된 전창국의 부친이 민족의 비극
인 6.25전쟁에 참전하여 고향인 낙동강 전투에서 고향을 지키려는 
사람들과 서로 총부리를 겨누어야 했던 비극적인 가족사에 대한 중
요한 증언이 수록되어 있다.
제3장에서는 중국의 대표적인 혁명과 광기의 시절인 문화대혁명
기 동안 학생 전창국의 삶을 통해 소수민족의 삶이 어떻게 진행되었
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홍위병에 참여하였지만, 파벌싸움에 의해 혁
분자의 타도대상인 고깔모자를 쓴 반혁명분자가 되어 수리건설
에서 노동을 하였고, 후일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시나리오인 
“엄동설한”의 배경이 된 우물파기에 참여한 희귀한 경험을 쌓게 된
다. 소수민족으로서 겪은 이러한 문화대혁명의 경험은 후일 치치하
 교육국 및 신문기자로서 활동을 하면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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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 주요 동인이 된다.  
제가 여기서 조금 치치하얼 지구, 조선족 저 나이 또래 학교에 
다니면서 문제 생긴 게 저가 저 때 뭐 조선족에 대한 그런 민족
감정 이런 쪽으로 너무 민족주의자라 해서, 문화혁명 때 저가 우
리 조선족뿐만 아니라 우리 치치하얼 시에서도 고등학교 때, 문
화혁명 때 고깔모자를 쓰고 감옥에 간 건 저 혼자에요. 그 때, 모
자가 3개 있답니다. 하나는 ‘혁명반대분자’ 모자, 체제를 반대한
다 해가지고 그 다음 하나는 ‘극단민족주의자’ 모자, 하루에 하나
씩 바꿨어요. 지금 말하는 ‘도적범’, 절도범이었어요. 문화혁명 때 
두 파 싸움하면서 그 학교 물건이 없어진 걸, 저가 더 훔친 거라 
해가지고. 그래 ‘절도범’ 모자 등, 그 간판을 3(세)개 걸고 다녔
습니다. 이, 이건 뭐, 지나간 이야기지만, 그 문화혁명 때 그 당
시에 고만큼 그렇게 참혹했어요. 그래서, 한 일 년 동안 감옥에 
가 있었습니다. 저가 1년 동안 있다가 농촌에 갔는데 농촌에 가
서 반역분자니까 집에 못 가게 합니다 (본문에서).
제4장에서는 전창국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에서 가장 왕성
하게 자신이 가진 재능을 사회생활에서 발휘하는 시기로 볼 수 있
다. 치치하얼 사범대학교에서 교편생활을 마치고 일생의 대부분을 
보낸 치치하얼 교육국에서의 소수민족교육에서 조선족을 비롯한 소
수민족교육의 행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시기이다. 초기에 조
선족 마을마다 설치되어 있던 조선족 학교에 대한 재정지원과 행정
시책을 직접 담당하면서 조선족 교육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를 시
정하는데 많은 관심을 가지되었다. 이 시기에도 역시 문화대혁명 시
기의 체제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은 그로 하여금 격동의 시기에 자신
의 이익보다 전체 인민, 더 나아가서 조선족의 교육에 더 매진할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하였다. 
그러니까 그래서 제가 (촌지)를 안 받은 건 그렇지만. 제가 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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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고 제일 좋은 것이 솔직히 말하자면 같은 민족을 처리를 하면
서도 아무래도 조선족을 생각하게 되겠죠. 왜냐면 내가 조선족이
니까. 소수민족이니까 솔직히 민족이니까 뭘 득봤겠어요? 제일 
먼저 조선족들은 민영교원 자체로 촌민들이 돈을 모아서 교원이 
하나도 없어요. 제가 몽땅 국가 편제로 다 해줬어요. 제일 먼저 
소학교 싹 다 벽돌집 지어줬어요. 그래서 전성적(全省的)으로 우
리 소수민족들이 제일 많지만 소수민족들이 학교 장비 수준은 한
들보다 높습니다. 치치하얼, 저 있을 때. 어디가도 뭐. 전성(全
省) 모범도 얻고 내가 그 사진을 찍어온 거에요. 제일 좋았죠. 다
른 민족들도 잘 해줬지만, 조선족들은 확실히 제일 득본 게 교원
들. 국가, 영원한 밥벌이 할 수 있도록 국가 간부로 제가 아니었
으면 누가 했습니까? 상상도 못하죠 (본문에서). 
마지막으로 제6장은 가족에 대한 서술 및 결혼생활에 대한 구술
로 되어 있고, 마지막 7장에서는 흑룡강성 교육기관과 한국과의 교
류 및 치치하얼 공정학원 한국어 교수로서의 삶에 대한 서술로 이루
어져 있다.
특히 기존의 적지 않은 조선족 연구서에서 문화대혁명에 관한 직
접 체험자의 경험에 관한 서술이 많지 않다는 점에서 본서는 매우 
큰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흑룡강성 치치하얼의 대표적
인 소수민족인 조선족 지식인으로서의 개인적인 생활에 사회구조로
서의 역사적 사건인 문화대혁명이 지속적으로 미치는 영향력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한 소수민족의 경험을 보여주는 구술사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소수민족의 생애구술사 간행의 일환으로 출간된 본서는 경북대
학교 다문화와 디아스포라 연구단이 2011년 출범한 이래 지속적으
로 추진해 오고 있는 재외한인 구술사 작업이다. 경북대학교 다문
화와 디아스포라 연구단은 2011년 9월 한국연구재단의 지원 하에 1
단계 사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한 이후, 2014년 9월 2단계에 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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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그 동안 본 연구단에서는 중국, 일본,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의 재외한인과 다문화를 주요한 연구과제로 하고 있으며, 그 성과물
로서 재외한인의 구술사를 지속적으로 단행본으로 출간하는 작업을 
진행해 오고 있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단에서 진행하고 있는 이러한 재외한인 구술사 
간행작업이 향후에는 전세계로 확산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
이고 있다. 오늘날 재외한인의 의의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지
대하다. 이러한 이름 없는 수많은 재외한인들은 과거 식민지 시대 
암울했던 조국의 독립에 대한 기틀이 되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 세
계로 뻗어가는 국력의 뿌리라는 점에서 이들에 대한 구술사 연구는 
매우 중요하며, 지속적으로 진행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본 
연구단의 이러한 재외한인의 구술사 집필작업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기대하는 바이다.
2016년 2월
경북대학교 SSK다문화와 디아스포라연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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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제1장  가족의 치치하얼 눈강이주············································13
▮ 증조부, 조부, 아버지 3대 치치하얼 눈강 이주·················14
▮ 1948년 전창국 출생과 아버지 군 입대·····························24
▮ 군입대 후 55년까지 아버지의 북조선 거주·······················27
▮ 내몽골 시절 어머니, 막내고모와 7살 때까지 성장···········30
제2장 글쓰기와 음악적 재능을 갖춘 청년기······························37
▮ 선명촌 소학교 입학과 독서편력·········································38
▮ 아버지의 소학교 재직 시절과 어려운 가정환경················42
▮ 중학교 시절 공산당 입당과 문예적 소양···························44
제3장 문화대혁명과 반혁명분자로서의 경험······························53
▮ 문화대혁명 초기 적극적인 홍위병 활동·····························54
▮ 홍위병 파벌 싸움과 반혁명분자로서의 수감생활··············57
▮ 수리건설 참여와 농촌 생산대 활동····································62
▮보람찬 생산대 노동단련과 말 사러 간 모험기····················68
제4장 중앙민족대학과 치치하얼시 신문기자 시절······················81
▮늦깎이로서 중앙민족대학 입학············································82
▮ 대학시절 비판적 글쓰기와 리더십·····································86
▮ 치치하얼시  신문기자 시절················································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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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교육자 및 교육행정가로서의 삶 시작····························103
▮ 치치하얼 사범대학에서의 교편생활··································104
▮ 중국어연구원으로 교육국 생활·········································106
▮ 중학처 부처장으로서 교육국 정년퇴직····························110
제6장 결혼과 초국가적 가족관계 형성····································117
▮ 32세때 3살 연하 조선족 간호사 김태연과의 결혼··········118
▮ 음악을 하는 아들 전봉과 미술 전공 딸 전은자··············121
▮ 전창국 5남매의 초국가적 가족관계 형성························126
제7장 흑룡강신문 특약기자와 공정학원 교수생활····················131
▮ 흑룡강신문 특약기자로서의 활동·····································132
▮ 엄동설한 시나리오 집필과 조선족 영화 창작··················139
▮ 치치하얼 공정학원 교수활동과 한국과의 교류 진행·······142
◆ 부록················································································149
1. 전창국의 흑룡강성 신문 기자 활동물······························151
2. 전창국의 교육국 시절 관련 투고 글································172
3. 주요사진 및 상장, 증명서 기록물····································195
◆ 찾아보기··········································································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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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창국 한국 방문 인터뷰 사진 (201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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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창국의 연보
1948년 (1세): 2월 17일 내몽골 자라터기 출생
            2남3녀 장남 출생
1948년 (1세): 4월 18일 아버지 군입대, 55년까지 북조선 거주
1955년 (8세): 7년간 어머니, 막내고모와 내몽골 자라트키 거주 
1957년 (10세): 치치하얼 선명촌 소학교 입학
1961년 (14세): 중학교 시절 공산당 입당
1964년 (17세): 치치하얼 조선족 중학교 졸업 
1966년 (19세): 문화대혁명 시기 고중 2학년 홍위병 활동
1968년 (21세): 홍위병 파벌 싸움으로 반혁명분자로 
           1년간 감옥 생활, 선명고중 졸업  
1970년 (23세): 69년과 70년 사이 수리건설 사업 다님 
1975년 (28세): 75년까지 농촌에서 생산대에서 일함
           농민출신으로 추천받아 중화민족대학 중문학부 입학
1978년 (31세): 치치하얼시 신문사 기자로 근무
           흑룡강성 신문 특약기자 활동을 제안 받음
1979년 (32세): 간호사 출신 조선족 김태연과 결혼
1980년 (33세): 치치하얼 사범대학 4년간 교편 생활
           장남 전봉 탄생(하얼빈 사범대학 작곡 전공) 
1984년 (37세): 장녀 전은자 탄생 (사천 미술대학)    
1984년 (37세): 치치하얼 교육국 중국어 연구원으로 입사
           민족교육 담당
1987년 (40세): 치치하얼 교육국 중학처로 발령   
2008년 (61세): 치치하얼 교육국 중학처 부처장으로 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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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2세): 치치하얼 공정학원 교수로 재직
2015년 (68세): 흑룡강성 신문 특약기자와 치치하얼 공정학원 
           교수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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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창국의 가계도
제1장  가족의 치치하얼 눈강이주 
증조부, 조부,아버지 3대 치치하얼 눈강 이주 
1948년 전창국 출생과 아버지 군입대 
군입대 후 55년까지 아버지의 북조선 거주
내몽골 시절 어머니, 막내고모와 7세때까지 성장 
 아버지 군 제대후 가족 상봉(1955년)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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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조부, 조부, 아버지 3대 치치하얼 눈강 이주
치치하얼 정말 간단하게 소개 올리겠습니다만 흑룡에서 치치하얼
은 50년도까지는 흑룡성의 성소재지가 치치하얼에 있었습니다. 그래
서 다시 조절하는 가운데서 성 소재지가 하얼빈으로 옮겨오고요. 그
치만 치치하얼시는 중국 흑룡강성에서 제일 북단에 있는 최대의 도
시오. 그러니 흑룡강성에서는 두 번째로 큰 도시가 되겠습니다. 
하얼빈이 제일 크고 다음으로 큰 도시는 치치하얼입니다. 그럼 치
치하얼 시에는 면적이 한국의 절반입니다. 토지 면적, 인구는 567만 
조선족은 약 2만명 있답니다. 그러니까 전(全)중국의 조선족이 200
만이니까 약 100번으로 따지게 되면 2만명이니까 적지 않은 숫자에
요. 그런데 치치하얼시는 이전에 그러니까 개혁되기 전에 중한수교 
전에는 치치하얼만해도 조선족 학교가 13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한수교 이후 우리 대량의 조선족들이 한국 진출 한 부분 
다수가, 다음 남방진출, 그 다음에 도시에 연해지구로 진출. 이렇게 
해서 지금은 조선족들이 치치하얼에 학교가 중소학교 합해서 하
나, 학교 열두개가 허물어졌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제 현실이구요. 
그 다음에 조선족마을에 가보게 되면 원래 한 300세대 살던 동네가 
여러 곳이였는데 그 300세대 살때는 그 마을에 지금 총 인구가 한 
50~60명씩 호수로써는 세대로써는 한 열 몇 세대가 살고 있는 이런 
상황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조선 동네가서 뭐 잔치를 한다 이런 소
리를 들어본 적도 없고 잔치를 하지 않고 결혼을 하지 않고 이러니 
아이 울음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형편이에요. 그래서 중국에서 심지
1장. 가족의 치치하얼 눈강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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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지금은 잔치를 하게 되면 저기 있는 조선족들이 우리 그 고장에
서 잔치를 하게 되면 한국에 와서 합니다. 한국에 다 와서 친척들이 
한국에서 모이는 숫자가 지방에서 잔치할 때 모이는 숫자보다 많고 
많아요. 이런 현상입니다. 그래가 이런 격변기에 처한 조선족이 지금 
현 상황은 이런데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느냐, 그래 우리 동북산성에 
조선족들 많이 몰렸고 일부는 내몽골도 몰려있는데 그럼 역사적인 
각도에서 놓고 볼 때 우리 흑룡강에 있는 조선족들이 그 구성을 보
게 되면 일부는 요녕 길림성에 있다가 흑룡에서 오신 분 극소수에
요. 다수는 언제왔는가, 1940년대 일제강점시기에 이민으로 왔습니
다. 흑룡강으로. 
우리 증조 할아버지때 40년도에 떠나오셨어요. 그런데, 저희한테
는 고모님한테는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때에 오셨어요. 40년도에. 
40년에 저희 할아버지하고 증조할아버지하고 할머니하고 그러고 저
한테는 인자 할아버지 볼 때는 다 같이 왔는데 큰할아버지가 남으시
고 둘째, 셋째 할아버지는 다시 해방 전에 한국으로 건너오셨어요. 
그러니까 거기에서 인자 작고하신 분들은 증조할아버지, 할머니, 그 
다음에 저 할아버지, 할머니. 저 할아버지, 할머니는 두 분이, 할머
니가 두 분이 있어요. 작은할머님이 계셨어요. 그래서 아까 그 책을 
쓴 오용화는 우리 둘째 고모님이신데, 둘째 고모님은 할아버지 둘째 
마누라 몸에서 난 그 자손이에요. 그 아까 그 우라모토 중학교 당서
기로 있었다는……. 그래서 막내고모가 지금 살아 계세요. 저에게 고
모 되는 분이 3살 때 여기서 떠났다니까 제가 연도수를 따져봤습니
다. 그러니까 40년도가 맞습니다.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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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할머니, 할머니, 고모(1940년 좌에서부터) 
우리가 올 때는 이민을 왔거든요. 우리 여기, 대체적으로 그 두 가
지로 나눌 수 있어요. 하나는 산재지구에 있으면서 강제이민이 아니
고 살 길을 찾으러 온 분들이 있고. 할아버지 때 와가지고, 일본사람
들이 여기, 눈강이란 곳에다가, 그 눈강, 개척땅이란 말이 있잖아요.
그 때 일본 사람들이 부락을 13개 만들 계획이었어요.
저의 아버지랑 할아버지랑 같이, 아버지가 그때 우리는 고향이 경
입니다. 요 얼마 멀지 않죠. 거 있는데 아버지 11살 때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를 따라서 오셨고 저한테는 증조할아버지가 되죠. 그때 
다수가 우리 눈강이라는 곳에 치치하얼 눈강이라는 곳에 일본인들이 
꾸린 집단 부락이 있었습니다. 한 부락에 100세대를 해서 13부락을 
만들 계획이었어요. 그래서 일본에서 일본사람들이 들어오고 그 다
음에는 다수가 우리 한국에서 대구, 부산에서 이민들을 강제로 모집
해서 흑룡강으로 왔어요. 
1장. 가족의 치치하얼 눈강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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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창국 할아버지 시대의 가족 이주 경로 :
경북 경산(옥산 전씨)에서 흑룡강성의 치치하얼까지
그때 주요 목적은 흑룡강성이 만주국에 건립되었기 때문에 일본
서 만주국을 장기 통치할 타산으로 수전농사를 일구었어요. 그래서 
흑룡강성에는 이전에 벼농사가 없었습니다. 하기에 흑룡강성에 있는 
벼농사는 몽땅 우리 일본인들과 한국인들이 오셔가지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흑룡강에 원래 없던 벼농사가 우리 조선 할아
버지 할머님들이 들어오셔 가지고 벼농사를 짓게 되었습니다. 그래
서 지금까지 벼농사를 하고 있지만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생활방식
이라던가 이런 것은 생산방식하고 관계가 많아요. 그 수전농사를 하
려 하게 되면 혼자서 하기 바쁩니다. 왜 그런가 하게 되면 특히는 
황무지를 일구어야하는 흑룡강이나 원래는 수전이 없었는데 논을 풀
고 도랑을 째고 강물을 해서 수전을 하려 하게 되면 반드시 새로 땅
을 일구어야하는데 땅은 삽이나 괭이로 뚜질 수 있지만 수리 건설이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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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물도량은 혼자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반드시 단합이 되어 집체
로 같이 일을 해야만이 농사를 지을 수 있었어요. 그것이 중국에 있
는 조선족들이 필연코 같이 합작해서 뭉칠 수 있는 계기가 그 생산
방식하고 관련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선족들은 어디에 가도 단합
이 잘됩니다. 싸움을 잘 하지 않아요. 그때는 생산력이 발달되지 못
했기에 무슨 일을 하려해도 서로 손을 맞추어야했어요. 왜 그런가 
하게 되면 저 집에는 쟁기가 있고 보습이 있고 이집에는 소가 있고 
그러면 소하고 쟁기랑 같이 서로 빌려주면서 같이 땅을 갈지요. 이
런 식으로 해야 되기 때문에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은 떨어지지 
못합니다. 
치치하얼 눈강 (2015.8 현장사진)
1장. 가족의 치치하얼 눈강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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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치하얼 오른쪽 눈강과 왼쪽 명성촌 수전 (2015.8 현장사진)
그게 이제 첫째 하나 생산방식에서의 우리 민족이 단합될 수 있는 
한 가지 게기가 됐고. 그 다음에는 조선족들은 수전 농사를 하기 때
문에 반드시 어디로 가게 되는가 하게 되면 물 있는 곳으로 가야합
니다. 그렇죠, 물이 없으면 수전을 못하는데, 그럼 물이 있는 데 가
려면 유일한 수원은 강인데 순 자연수이기에 그 때는 지금처럼 저수
지가 없습니다. 순 자연수이니 재해가 많습니다.  가뭄이 들면 벼가 
타서 죽고 홍수가 지든가 하게 되면 논이 다 잠겨버립니다. 그러면 
이 재해를 막기 위해서는 또 제방을 쌓아야죠. 한국에서도 제방이라
는게 있겠죠, 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이 제방은 할 일이 너무나 많아
요. 그러기 때문에 여럿이 같이 손을 모아서 해야만이 또 농사를 지
을 수 있었고 지은 농사를 또 보호할 수 있었고 이것이 우리 조선족
들이 꼭 같이 뭉쳐있어야 할 객관적인 조건이였고, 그 다음 또 습관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20
 
상에서 조선족들이 중국 동네가 가지고 그때 가서는 잘 어울릴 수가 
없었어요. 왜 그런가 하게 되면 먹는 음식, 습관이 다 다르잖아요. 
생활방식도 다르고...... 
그래서 처음에 갔을 때는 우리 조선인들이 자기 집이 없었기 때문
에 중국 분들이 사는, 중국의 흑룡강 쪽에는 그 만주족 그러니까  
만주족들이 만주국이였기 때문에 만족들이 통치하고 있는데 그런 구
역이기 때문에 조선족들이 들어가 집을 지을 수 없기 때문에 만족들
이 살고 있는 거기에는 물론 한족들도 거기서 같이 생활할 수 있었
지만 집안의 구도가 집안에 방 한 칸이 있다 하게 되면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게 되면 북쪽 켠에 방 한 칸, 구들도 놓았습니다. 
남쪽켠에 방 한 칸, 한 칸에 방을 두 개를 갈라서 우리가 들어가
기 전에는 한집식구가 만족도 있고 한족들도 한 집식구에요. 이렇게
해서 북쪽 켠에는 부모 내외간이 자고 아들이 결혼해서 남쪽방에는 
아들 내외가 자고, 저녁에 잘 때는 포장으로 이렇게 갈라놓는 이런
식이였는데 우리가 가서 집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만족들이나 
한족들이 북쪽켠에 방을 얻어 썼어요. 거서 잤습니다. 
일 년에 뭐 쌀을 한 되씩 준다던가 이런 식으로 그러면서 일군 것
이 후에 우리들이 조선 농장이였죠. 금방 또 말씀 올렸지만 흑룡강 
눈강이라는 곳에서 한 일본사람들이 불러서 부락이라 했는데 한 부
락에 100세대를 마을로서 하다가 한 일엳덟개 마을까지 하다가는 
45년도에 일본이 패망하는 바람에 그 농장이 없어지고 그 사람들이 
흑룡강 각지로 다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있는 흑룡강성
에 조선족 마을들은 그때 갈라져서 형성된 것이 마을이에요. 그래서 
우리 치치하얼 시에도 지금 13개의 마을이 있지만 좀 기본상 금방 
또 말씀 올렸지만 학교는 없고 동네는 작은 동네는 이제 아무도 없
1장. 가족의 치치하얼 눈강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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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니다. 큰 동네 50, 60명 살고 있는 이런 형편입니다. 이것이 지금 
격변기에 처한 우리 흑룡강성에 대체적인 상황이고요. 
치치하얼 시내 (2015.8 현장사진)
치치하얼 역 (2015.8 현장사진)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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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제까지는 우리 증조할아버지때부터 시작해서 저까지 이
미 4대째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아들을 봐서 아들 밑에 저 손자 손
녀도 봤습니다. 제까지 있는데 증조할아버지때 한국에서 중국에 오
시면서 가져온 유일한 물건이 딱 여러분들도 보셨겠죠 동그릇. 동으
로 된 뚜껑있는 그릇 있잖아요. 옛날에는 여러분들도 집에는 아마 
그런게 있을겁니다. 우리집에는 근 70, 80년 병년이 되어오면서 유
일하게 남은 게 이거 딱 하나에요. 조상으로부터 재물로 물러 받은 
것은 유일하게 저 동 그릇입니다.
전창국의 증조할아버지가 중국으로 가져온 동그룻
 
이것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온 데에는 가슴 아픈 추억이 있지요. 
1958년 중국에서 대약진이란 운동으로 강철생산량을 올린다고 집집
마다 다니면서 철물들을 거두어가서 재련소로 가져 갈 때입니다.  
촌의 간부가 집집에 다니면서 거두는데 조선족들이 고향에서 지고 
1장. 가족의 치치하얼 눈강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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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동그룻도 재앙을 면치 못했지요. 하루는 우리집에 와서 마대에 
매단 광주리에다 철물들을 담아서 저 까지 가는 중인데 제가 보니 
우리집의 동그릇이 맨 우에 놓여 있었어요. 동년의 기억 속에 제일 
인상 깊은 것이 이 동그릇이에요. 형편이 아무리 어려워도 생일날에
는 어머님이 이 그릇에다가 밥을 많이 담나주어 배를 불릴 수 있었
거든요. 나는 마당을 벗어난 간부의 뒤를 쫓아가 광주리에 담긴 동
그릇을 쥐여들고는 무작정하고 집안으로 뛰어 왔어요. 그 분이 못 
보았는지, 보고도 눈을 감아 주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갈 때는 우리 건천에서 있었는데 건천에도 지금 
보게 되면 우리가 갈 때는 아마 흑룡으로 간 만주로 간 사람들 가운
데 우리가 잘사는 집인 것 같아요. 왜 그런가 하게 되면 여도 와보
니까 90년대 와보니까 여기도 우리 산도 있고요 우리 산도 있습니
다. 산도 또 커요, 안에 과수원도 있고 그래서 그 과수원을 다른 사
람들한테 임대 해줘가지고 뭐 좀 수입도 되고 그 다음에 산을 고속
도로를 뚫다나니까 산을 좀 차지해서 정부에서 배상금도 많이 준 거 
같아요. 그러니 그것을 봐서는 우리 조상들의 살림이 좀 괜찮은 거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할아버지가 공부도 좀 하셔가지고 그 일본 
가가지고 그걸 부락장으로도 있었다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공부도 
하셨고 그러기 때문에 저의 부친도 11살 때 중국에 들어갔을 때도 
일본학교에 다니다가 들어갔습니다. 그만큼 공부를 시킬 수 있는 정
황이었으니까 아마 중국에 들어간 사람들 가운데 좀 괜찮게 살은 축
에 속하지 않나 이렇게 생각해봅니다. 
아버님은 29년도 생으로서 48년도에 군대에 가셨으니까 그 때 떠
나올 때가 40년도이니까 아버지가 소학교 다닐 때가 왔거든요. 
그래서 할아버지가 그 때 뭐, 한국에 계실 때 뭐 좀 글이나 좀 읽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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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그래 가지고 지금 말하면 동장, 촌장, 촌장으로 있었어요. 그 일
 말도 할 줄 아니까 한국에서 그, 저, 일본 학교 다녔었거든요. 공
부를 했어요. 아버지가. 여기 와 있으면서 할아버지가 만주에 있는 
저, 만주에 있는 여자들 버릇없다고 아버지 성가시게 했다고 저, 한
국에 가서 어머니를 모셔왔어요. 그래, 와 가지고 결혼을 했지요. 
▮ 1948년 전창국 출생과 아버지 군 입대
제가 태어나서 딱 두 달 만에 군대 가셨거든요. 제가 정월 초팔일
인데, 제가 48년도, 보니까 양력으로는 2월 17일이에요. 그런데 아
버님은 4월 18일 날에 군에 가셨어요. 그래 군에 가는 것도  너무 
극적이어서 청년회에 간부로 있었잖아요. 그 때 조선인 부락에 청년
. 뭐, 지금으로 말하면 간부겠죠. 청년사업을, 농회 청년사업을 했
는데, 군대 가는 사람이 그 때는 중국에서 사천해방, 동북해방이라고 
군대를 뽑을 때였는데, 아버지는 군대 갈 생각도 안하고, 그 분들 이
제, 역까지 바래다주고 와야 하는데, 바래주고, 너도 가자고 해서 그 
자리에서 군대를 가버렸습니다. 젊었을 때 군대 가는 사람을 보낸다
고 태래현 그 부근에 평양이라는 자그마한 역으로 전송을 갔는데 군
에 가는 친구들이 차에 타면서 ‘너도 가자’ 하니까 가게 된 거에요. 
두 달 만에 군대에 가게 되었잖아요. 딱 두 달 만에. 날짜를 보니 2
월 달에는 28일 뿐이잖아요. 2월 17일에 제가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4월 18일 날 창군을 하셨거든요. 그 년도가. 그러니까 저 태어난 지 
두 달도 안 되서 군대에 갔어요. 
1장. 가족의 치치하얼 눈강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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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창국의 아버지 전성렬 (1948년 군입대)
중국에서는 공헌이 큰 이런 영웅으로 치부되죠. 그래서 중국 현대
사를 배우신 중국에 오신 분들도 아시지만 장춘해방이라던가 다 참
가했죠. 이런 쪽으로. 그러다가 조선족이였기 때문에 운명이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조선족 이였기 때문에 북한에서 북조선에서 이 조선 
분들을 먼저 북조선에 조선전쟁이 일어나기 약 일 년 전에. 50년대 
일어나기 일 년 전에 군대에 있는 조선족 사람들 뽑아서는 북한으로 
보냈습니다. 뭐 때문에 보냈느냐 군사훈련이에요. 그 군사훈련 군관
학교는 강건군관학교라는 이름인데 북조선에서 제일 유명한 제일 초
기에 건립된 사관학교입니다. 그때의 교원들은 몽땅 소련에서 건너
온 교원들이어서 훈련을 시켰습니다. 무슨 의미인가 하게 되면 그때 
벌써 북조선 김일성을 위주로 한 지도부에서는 전쟁준비를 하고 있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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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는 것을 증명해주죠. 안 그러면 그분들이 뭐한다고 중국에 있는 
조선족을 데려다가 군사 훈련을 시켰겠어요. 군관학교를 꾸리면서. 
그때는 준비했다는 걸 의미하고 지금은 이미 이제 사료가 다 밝혀져 
가지고 대체적으로 다수가 북한이 남침했다는 걸 공개됐고 특히 소
련에 정보 비밀을 유출되면서 같이 같은 사회진영에 있던 소련에서
의 정보유출이 우리 한국한테 유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북
쪽에서 먼저 남침했다,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북조선하고 우리가 
한국에서는 계속 싸웠지 않냐 네가 잘했니 못했니. 그래가 그게 실
은 일 년 전부터 이런 것이 있었다. 그래서 저의 부친이 조선전쟁 
일어날 때 소위급을 그때는 소대장이죠. 여서는 소위급으로 계급을 
달고 인민부대로 개편됐습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조선족들을 데리
고 왔느냐. 첫째 하나는 두 가지로 이룰 수 있겠죠. 하나는 중국에서
도 북조선하고 같은 형제지간이라고 도와주라는 게 모택동을 위해 
도와주는 게 있을 것이고 그다음에 하나는 조선족들이 싸움을 해서 
한국하고 싸움해서 붙들려 들어와도 중국은 개입하지 않아요. 붙들
려오면 포로가 되니까 묻게 되면 조선사람이거든. 아 나는 북조선 
사람이다 하면 그거로 끝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중국에서는 정치적
으로 우리가 남북전쟁 우리는 개입하지 않았다는 이걸 쓰기로 해서 
조선 사람을 딱 고른 거죠. 그러니 저의 부친도 거기에 뽑혀서 와가
지고 졸업하고 전쟁 일어날 당시에는 제일 남침을 한 제일 선두부대
의 정찰소대장으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침을 할 때 부친이 제일 
먼저 서울 제일 먼저 들어왔고요. 그러니 뒤에 부대가 들어가기 전
에는 반드시 정찰이 따라가잖아요. 그러니까 부친이 정찰소대장이 
되어놓으니까 필연코 먼저 서울에 제일먼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경주를 거쳐 어디까지 갔는가 하게 되면 한국의 낙동강
1장. 가족의 치치하얼 눈강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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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부산까지 갔어요. 이제 김해, 낙동강만 건너서면 딱 해방이 될 
형편인데 그때 연합군에서 여러분들 아시는 인천등륙이 생겼죠. 인
천 등륙이 생겨놓으니까 제일 처음 첨단에 있던 사단이 북으로 후퇴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단은 기본상 멸종된 것으로 기록이 
되어있어요. 그 때 저의 부친도 전사하였다고 소문이 펴져 집에서는 
어머님이랑 친척들이 울고 야단법적이 났죠. 전쟁에 세상을 뜨신 줄 
알았는데 세상을 뜨시지 않으셨어요. 먼저 부상을 입으셨습니다. 지
뢰를 밟아서 여기 터졌고 그 다음에 어깨에 총창을 맞아서 피를 많
이 흘려 가지고 먼저 자동차에 실어 후방으로 보내다나니까 생명을 
구했고 그렇지 못한 기본상 북쪽으로 후퇴하면서 기본상 폭격으로 
세상 다 뜨셨고.  
▮ 군입대 후 55년까지 아버지의 북조선 거주 
 아버지는 48년 군 입대우 북조선에 있었죠. 55년도까지. 군관학교 
졸업하고. 조선. 여기에 봐서 역사가, 아버지가 중학교 갈 때, ‘너는 
알아라, 역사는 알아야 된다.’ 조선 사람들 아버지 같은 분들은 먼저 
조선 전쟁 일어나기 전에 1년 전에 데리고 가가 강건군관학교서 소위 
타고 나오셔요. 이, 전쟁 준비하느라고. 만일에 전쟁을 하다가도 적군
에 붙들려도 조선 사람들은 조선말을 할 줄 알기에 중국군이 참천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거든요, 하기에 붙들려도 괜찮잖아요. 조선 사람이
라고. 그래가 졸업하고 나와서 아버지가 조선의 전쟁에 첫 총을 쐈다
고 그래요. 남하할 때 서울에도 맨 처음 들어갔다고 그랬어요. 정찰 
소대장이니깐, 그러니까, 그 후에 그 사단, 오진우 사단장이 후에 북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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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국방부 부장이 되잖아요. 선두부대에서 제일 멀리 남하했기에, 
어디까지 갔냐면 저, 저 김해까지 갔잖아요. 낙동강까지 갔잖아요. 그 
사단이 다 멸종되다시피 했잖아요.
그때 아버지가 고향 경주 지나가면서 ‘저기 저 산만 넘어가면 우
리 집인데’하니까 그 사단장이 “전 소위, 며칠 있으면 해방하고, 해
한 다음에 집에 가.”라 했는데 못가고 그래 갔다가 후퇴하기 시작
했는데 후퇴하다가, 왜 후퇴했는가 하면 그 사단이 거의 멸종하다시
피 했는데, 먼저 부상을 입었어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보다 먼저 후
방으로 보냈어요. 그래서 살았지요. 안 그랬으면 죽었습니다. 죽었지
요. 못 나오죠. 거기 인천 상륙해서 중앙에 딱 그랬는데 그 사단이 
거의 다 죽었는데, 거의 뭐, 사단장이랑 몇 이 살았죠. 그래, 그 사
단장이 60년도 중국에서 3년 자연재해로 제일 곤란 할 때 북조선이 
우리 중국보다 잘 살았다 아닙니까, 한국보다 잘 살았잖아요. 그래서 
그 분이 그, 아버지에게 편지가 왔어요. 다른 사람들은, 후방에 있던 
사람들은 뭐, 진급 다 했는데 아버지는 부상 당해서, 그 다음에, 또, 
후퇴하고 하다가 뭐, 진급할 세가 없이 인제, 전쟁이 단판에 끝나가
지고 중국으로 오다나니까. 제대로 대우를 못 받는 거지요.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 중학교 졸업하고 간다 하고는 북조선에 가지 않았는
데, 또 아버지는 중국에 와서는 정부 관계 부문에서 어디 가겠는가 
물어보면, 그 땐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잖아요.
1장. 가족의 치치하얼 눈강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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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북한 군대생활 기록(1955년) 
 
아버지가 나는 아무 데도 안 간다. 고향 가겠다. 다른 사람들은 다 
성시에 분배를 받아 일자리를 찾았는데 아버지만은 자그만한 보따리 
하나들고 집에 왔어요. 농촌에 말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리해
가 안되었죠. 그 때 사람들은 그렇게 순진했다고요.
작은 고모님 말씀이 사변 나던 그 해에 치치하얼시로 다시 돌아와
서 어디로, 태래(현)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태래(현)에서 2년 
있다가 내몽골로 들어갔죠. 거기 같던 지방이 내몽골하고 태래(현)
하고 딱 붙은 경계거든요.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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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몽골 시절 어머니, 막내고모와 7살 때까지 성장 
저는 아직 돌도 차지 않고 몇 달 놔두고 그리고 고모 두 분이 시
집가고 시집 안 간 막내고모하고 세 식구가 살았죠. 그 때, 제가 알 
때는 5, 6살 때부터 진상이 다 있습니다. 다른 고모 두 분은 시집 
가셨고 아버지는 군대 가 가지고 사평해방, 장춘해방 다 하다가 
원군으로 뽑혀 나갔어요. 
우리는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뭐, 저, 아버지 없어놓으니까 8살까
지 아버지 없는 어머니 혼자서 논농사도 하시고 콩도 심고 살았으니
까, 대단히 고생했죠.
저는 4살 때도 생각이 나요. 아버지가 군에 가시다나니까 동생이 
없었잖아요. 5살까지 젖을 먹었습니다. 그래 우리 또래들이 와서 ‘놀
러 가자’ 하면 ‘좀 더 기다려’ 해놓고 어머니 품에 안겨서 젖을 먹었
습니다. 그것도 생각나요. 어머니 등에 업혀가지고 그 황지 개간하러 
가는데 업혀 따라갑니다. 그 때는 뭐. 내가 고 때 4살까지는 기억이 
똑똑한데, 부친이 군에 가고 없으니까 어머님 혼자서 벼농사도 해야 
되고 벼농사만으로는 또 안 되니까 그 때는 그 집단농장이 없고 
조식으로 했댔는데 50년대 초에는 호조라 하지만 우리 집에는 일꾼
이 없어놓으니까 어머니 혼자서. 저, 뭐, 개인으로 농사를 짓는 이런 
처지였어요. 그러니까 상당히 곤란했지요. 그래서 농사만 할 뿐만 아
니라 그 다음에 그 콩 밭도 메고 그래서 내가 업혀다니든 생각이 나
거든요. 그래, 여름에 막 햇볕이 쪼이는데 나는 집에 가자하고 울면 
어머님이 돈을 벌어야 너희 고모 공부시킨다고, 막내 고모님이 우리 
1장. 가족의 치치하얼 눈강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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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있었거든요, 우리 집에서 어머님이 그걸로 돈을 벌어서 고모님
을 학교에 보냈거든요. 중학교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가야 되는데 그 
때는 돈이 없어가지고 실업계로. 지금 말하게 되면 직업고중처럼 기
술 배우는 학교로 갔습니다. 고모님의 생각에는 빨리 기술을 배워 
졸업하여 돈을 벌어 집의 부담을 들려고 한 것이겠지요.
 
막내고모와 전창국 어머니(1952년) 
내몽골에서는 제가 태어나서 6살반 7살 때 떠났으니까 한 6~7년 
있었죠. 그러니까 아버님이 55년도에 오셨거든요. 55년도에 오시니
까, 그 때는 이미 내몽골을 떠나서 치치하얼쪽으로 오다가 중간에, 
지금 치크나이라고 지금 용강현에 속합니다. 치크나이라는 곳에 한 
해 농사짖다고 왔으니까, 이 지금 사는 곳으로 오셨으니까.  제가 그
저 내몽몰에서 큰 거는 한 7년 됩니다. 약 7년
쟈라이트기(扎赉特旗), 맨 그 해에 떠나 내몽고하고 붙은 치크나
이, 용강 현에 속합니다. 거기에서 반 년, 있다가 일로 왔으니까 결
국은 역시 55년도입니다. 저는 그 때는 쪼매나니까. 그 때는 학교도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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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갔죠. 아직 그 때는 내가. 아버지가 8살에 오셨으니까, 48년에 가
셔서 55년에 돌아오셨으니까. 그 때는 학교도 못 다니고 있을 때입
니다. 그 때 기억은 너무나 생생하고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4살, 
5살 기억이 없다고 하는데 저는 더 기억이 생생해요. 아마 너무 못 
살았던 탓인가봐요.
쟈라이트키에 있을 때 조선족 마을이 3개 있었는데 한 마을에 한 
20호도 안 될 정도로. 1, 2 간격으로 1부락, 2부락, 3부락이 있었는
데 저는 3부락에 있었습니다. 거기서 동년을 한 5살, 6살까지 있었
습니다.
거기 왔던 사람들 싹 다 이민 왔던 분들, 태래현으로 해서 건너갔
던 사람들이거든요. 그래서 다 이쪽 분들, 그 때는 태래현 거기서 이
제 조선 사람들은 벼농사를 해야 되니까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물이 
좋아요. 물이 좋다는 게 뭔가 하게 되면. 물 수질이 좋은 게 아니고 
농사를 지을 만큼 보가 자연수를 쓸 수 있는 상황이에요. 땅이 있고 
그래서 거기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농장에는. 기계로 물
을 퍼올렸잖아요? 거기에는 자연수를 그대로 할 수 있는. 보만 막게 
되면 수위만 조금 올려주면 그런 조건 그래서 글로 이사 가게 되었
어요.  그러니까 흑룡강의 벼농사는 완전 조선족들이 개발한 거거든
요. 중국 사람들은 60년대까지도 벼를 심을, 60년대 아니지 70년대 
초까지도 우리 치치하얼에는 벼농사가 없었습니다. 태래현에는 일찍 
벼농사를 했지만 흑룡강에 벼농사는 완전히, 일본 사람들이 우리 여
기 사람을 글로 간 목적도 주요하게는 양식 생산을 위한 거지요. 
일본놈들의 생각에는 만주국을 세울 때는 완전히 통치해서 오래 
살 거였으니까 쌀 생산하기 위해서 특히 장원한 독점 야심으로 조선
을 강점하고 있으면서... 일본 사람으로만 해선 안 되거든요. 일본 
1장. 가족의 치치하얼 눈강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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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도 얼마나 많았습니까? 글쎄 계획은 100만 이상 왔댔는데 그 
뒤에 다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그 일을 누가 해야겠어요? 여기 있는 
사람들이 가서 땅을 일궈야죠. 그래서 흑룡강도 조선족 분들이 가기 
전에는 흑룡강에는 수전농사라는 게 없어요, 있을 수도 없고요. 그러
니까 조선 사람을 그런 쪽으로 보냈지요. 그런데 이제 여기로 못 오
다나니까 해방이 되고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 여기서 살아
야 되니까 벼농사 하기 좋은 곳을 찾는 것이 글로 가게 되었지요. 
지금 태래현에서는 지금도 그 보의 물을 쓰고 있어요. 
거기 세 부락이 있었는데 학교가 있었어요. 조선 학교였어요. 저는 
학교는 못 가고 어머님이 계속 혼자 일을 해야 하는데 어머니 일 나
가시게 되면 학교하고 우리 동네하고는 좀 멉니다. 그런데도 어머님
은 저를 엎고 학교에 갔다놓고 사무실에 선생들 사무 보는 데에다가 
던져 놓고는 가요.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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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몽골 쟈라이트기 조선족 소학교 졸업사진 (1949년)
: 전창국 유년 보낸 학교 
  
그러면 선생들 중에 수업 들어가는 선생도 있고 안 들어가는 선생
도 있잖아요? 그럼 안 들어가는 선생님은 저를 달래고 그래 그거는 
또 괜찮은데 제일 그런 게 내 지금 학생들한테 말하고 싶은 게. 나
는 동네 밥을 먹고 컸다시피 했는데 어머니 혼자 일 다니고 하게 되
면 저는 겨울에든지 어디든지, 우리 동네에서 삼 부락이 있었는데 
아무 데나 문 딱 때리고 들어가요. 그 때 쪼매나니까 5살, 6살 때이
니까 관계합니까? 들어가면 거 할머니들이 구들목에 있던 식기를 꺼
내서는 ‘국이 왔냐? 밥 먹으라’하고 내어줘요. 누구 집에를 가도 다 
저를 위해서 준비되어 있었죠. 동네 밥을 먹고 자랐지요. 그래서 제
가 여러 다른 사람 은혜에 보답을 해야 된다는 그 신조가 그 때부터 
세워진 거 같아요. 만일 그 사람들이 마음이 그렇게 안 좋았고 인심
이 좋지 않았으면 저는 아마 굶어 죽었을지 몰라요. 그 생활이 너무
1장. 가족의 치치하얼 눈강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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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가슴에 딱 맺혀집니다.
어머님은 그 대신에 고된 일에 신체적, 정신적으로 너무나 시달려
서 성격이 너무 강한 쪽으로 되어버렸어요. 외삼촌 살아계실 때, 대
구에 계신 삼촌 살아계실 때 삼촌한테 물어봤어요. ‘어머니... 저, 성
격이 왜 그런가?’ 삼촌하고 너무 달라서 삼촌은 너무나 자상하세요.. 
‘그럴 수가 없는데... 그렇지만 한 가지는 내 말해줄꾸마’  ‘뭐요?’ 그
러니까 그 할아버지가 이제 아버지를 장가를 보내야 되겠는데 만주
에 있는 여자는 버릇없다고 할아버지가 기차를 타고 여기까지 와가
지고 데리고 갔거든요. 데리고 갈 때 딱 동생을 주기로 노인들 사이
에 말이 있었다고 그래요. 둘째를 데리고 가려고 했는데 그 날에는 
나가고 없었어요. 나가고 온 걸 어떻게 보내겠어요? 그래서 언니를 
대신으로 데려 왔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렇게 순한 게 왜 그렇게 
되었느냐. 그건 이제 어머님이 혼자 살면서 그 어려운 환경에서 가
정을 영위 하느라고 성격이 좀 달라지셨던 것 같습니다.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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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자료> 
흑룡강성  치치하얼
치치하얼은 중화인민공화국 흑룡강성에 있는 도시이다. 인구
는 553만 명, 면적은 4만3000km2이다. 일반적으로 이곳의 
주민은 한족이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만주족, 조선족, 몽골족, 
후이족, 다우르족도 거주한다. 치치하얼의 뜻은 다우르족의 
언어로 천연목장(목초지대)를 뜻한다.
치치하얼는 두루미고향이라고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또한 중국에서 제일 큰 습지원이며 광물질-마노가 현
지에서 유명하고, 7개구 9개 현으로 나누어져 있다.
중국 북동부에서 석유공업도시의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에 속하고 1691년에 지어졌다. 1931년에서 1945년까지
인 만주국시절에는, 일본인에 의해서 급속하게 발전했다.
자료출처 : 위키백과 
제2장 글쓰기와 음악적 재능을 갖춘 청년기  
선명촌 소학교 입학과 독서편력  
아버지의 소학교 재직시절과 어려운 가정환경
중학교 시절 공산당 입당과 문예적 소양
  
초중혁명열사대 기념사진 
(1965년: 맨뒤줄 우측 전창국)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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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명촌 소학교 입학과 독서편력        
선명촌에 집짓기 전에 중국 동네에서 한 해 남북 칸에 살았습니
다. 남북 칸이라는 게 한 방에 남쪽하고 북쪽에, 이건 만족들 문화거
든요. 한 집안에 못 살아나니까 북쪽 편으로는 부모님들이 살고, 결
한 자식들은 남쪽 칸에 살고 밤에 잘 때는 중간에 포장으로 이래 
가르는 그런 식으로 구들로 사는, 그런데 중국 집에 북칸에 한 1년 
살면서 학교 다녔거든요. 학교라는 게 인자 그 황지에다가 지은 쪼
매난 집, 선명촌하고도 조금 떨어져 있었습니다. 선명촌은 우리 집 
가다 나오게 되면 저, 길에 교통비 받는 곳 있잖아요. 생각나요? 우
리 동네 들어가기 전에. 교통료 받던 그 근방에 옛날 그 소학교가 
있었습니다. 그 때는 황지였으니까…….
공부야 뭐 제가 국민학교 2학년 때부터 소설책을 읽기 시작했어
요. 그게 아마 저의 삶을 기준했던 기초가 처음으로 읽은 장편소설
이 소련에서 출판한 <조야와 수라>라고, 독소 전쟁 때 소련의 유명
한 젊은 형제투사 조야와 수라가 독일 파쇼 놈들한테 붙잡혀서도 죽
음으로 두려워하지 않고 지조를 지키는, 아마 그게 저의 성격 형성
에 제일 처음으로 인상 깊었던, 나도 나라를 위해서나 저런 참된 사
람이 되어야겠다는 결심, 그 후에 또 읽은 <참된 사람의 이야기> 
이런 책들에 주인공들의 형상이 굳건하게 마음속에 자리를 굳혔는가 
봐요. 그 때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도서는 소련의 번역본이나 북조선
의 출판물이 다수였어요. 그래서 소학교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언제든지 책을 맘대로 볼 수 있는 것이예요, 그때는 전등불이 없어 
2장  글쓰기와 음악적 재능을 갖춘 청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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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는 호롱불을 켜하 하는데 어머님은 석유 기름이 아까와 책을 못
보게 하지요. 물론 공부도 잘 되였지요. 중학교 갈 때도 보숭(保送)
이라는 재도가 있어 시험도 면제하고 중학에 진학 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책을 너무 보다나니까 눈이 근시가 되여 소학교 졸업하고 중
학에 올 때 그 때는 안경 끼는 사람이 없었는데 저 혼자 안경을 꼈
어요. 석유 닳는다고 호롱불 켜는 것 까지 재한을 하니 그러다나니
까 나는 달밤에 밖에 나와서 그 책을 읽고 그랬어요.  중학교 올때 
안경 하나 맞추기도 그렇게 어려운데 어머니는  봐라. 안 봐야 하는
데 자꾸 봐가 눈을 버렸지 하면서 다른 사람보다 돈 더 쓴다고 푸념
을 하셨죠. 
근데 책이 없었죠. 학교에도 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무얼 
했는가 하면 신문을 보기 위해서 신문 배달을 했습니다. 그때는 우
전국에서 동내에 오는 편지나 신문을 일절 학교에다 맡겨서 집집에 
가져다 주기로 되였습니다. 신문을 배달하면서 신문을 마음껏 볼 수 
있잖아요. 그리고 그 다음에 책을 무더기로 좀 많이 생긴 것이  중
국에 그것도 국정인데 58년도에 치치하얼 시에 유명한 강철 회사가 
있는데, 강철회사에 조선족 분들이 몇 분 계셨어요. 그 분들을 그 정
부에서 노동단련 한다고 해서 조선 분들을 조선 동네에다가 내려 보
냈는데, 우리 집에 박 씨라고 오셨는데, 그 분이 대학교 다니던 때 
읽던 책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책에는 대학교 교재뿐만 아니라 소
설책들이 좀 있었어요. 소설책을 몇 권을 가왔는데 저한테는 제일 
기쁜 일이였지요. 그 때 본 책이 북조선에 리기영의 유명한 소설 < 
땅>, 그 다음에 최서해, 그 다음에 조기천이 쓴 시집. 우리가 그 때
는 접할 수 있는 책이라는 건 북조선의 것 뿐이었어요한국 하고는 
완전히 단절되었으니까. 그래서 저는 그 때 조기천의 시집이 조선전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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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기천(1913년 1월 6일 ~ 1951년 7월 31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시인
이다. 함경북도 회령 출신으로 아버지를 따라 시베리아로 이주하여 소왕령 조선
사범전문학교와 옴스크 고리키 사범대학 문학부를 졸업했다. 이루 중앙아시아 
크실오르타에 있는 조선사범대학에서 2년간 교원 생활을 했다. 이 시기를 전후
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광복 때 중국 동북 방면 소련군의 일원으로 북한으
로 들어왔다. 이후 조선신문 문예부에서 활동하면서 <두만강>, <을밀대에서 부
른 노래>, <땅의 노래> 등 다수의 시를 발표했으며 북한에서 박세영의 <<밀림
의 역사>>와 더불러 2대 걸작 서사시집으로 평가하는 <<백두산>>을 발표하면서 
북한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자리매김했다. 
 때잖아요. 그래서 조기천1)의 조선 시집이 이렇게 두꺼운데, 저는 
그걸 처음부터 끝까지 외울 수 있었어요. 저는요 지금도 어떤 거는 
지금도 생각납니다. 예를 들어서 “두만강”이라는 시가 있는데 “이 땅
의  북변을 굽이굽이 감돌아 흘러 흐르는 두만강이여, 그대의 찬 물
결에 얼마나 많은 흰 옷의 그림자 비꼈드냐. 찌푸린 낮, 누더기 옷 ,
재신이란 가슴에 웅키운 노예의 설음 ….” 이런 거지요? 조선 전쟁을 
묘사한 시는 <조선은 싸운다> 에요. “세계에 정직한 사람들이여, 지
도를 펼쳐라. 싸우는 조선을 찾아라. 그대들의 뜨거운 마음이 달려우
는 이곳에서 도시와 마을은  찾지 말라……” 이런 식으로 시작하는
데, 그 때는 다 외울 정도로 책을 너무나 좋아했어요.
  중학교에 와서도 도서관에 볼만한 책은 다 보았기에 방학에는 선
생님의 개인 도서를 빌려 보았는데 중학2학년 겨울 방학때 저의 조
선어어문 담임교사인 박옥순선생님(치치하얼시 중학교교장 지철의 
부인)의 책을 빌려 갔는데 그 중에 북조선에서 츨판한 소설책 <형
제>란 책인데 내가 책을 너무 보니 어머님이 나 못보게 하느라고 
장작을 넣은 난로에다 감추었지요. 그것도 모르고 불을 지핀 후 석
탄을 넣어려고 뚜껑을 열었을 때는 이미 책 변두리가 다 탔지요. 개
학하여 학교에 가서 선생님이 책을 가져왔는가 물을 때 잊어버리고 
가져 오지 못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 후 20여년이 지나 지교 
2장  글쓰기와 음악적 재능을 갖춘 청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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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님의 생일술상에서 이 비밀을 밝혔습니다.
선명소학교 기념사진 (1966년:맨뒤줄 좌측)
소학교는 57년도부터 61년도까지이죠. 3년 자연재해 시기이니까. 
소학교에서 굶은 기억이 제일 생생합니다. 중국에서 자연재해를 겪
으면서 60년대 초에 굶어죽은 게 중국 관영 통계에는 3,500만이 기
아로 굶어 죽은 게 3,500만이라고 통계가 나왔어요. 최악에는 자연
재해에다 소련 빚을 갚느라고 먹을 거 있는 거는 마구 다 기차로 소
련 빚 갚았거든요. 우리 동네에서는 입쌀 농사를 지어서 입쌀을 못 
먹게 합니다. 다 거두어가고 강낭쌀 갖다 주고 그랬습니다.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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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의 소학교 재직 시절과 어려운 가정환경
아버지는 당시 선명촌에서 제일 처음에는 오자마자 촌에서 회계
업, 장부를 관리를 하는 사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동네에 공부를 한 
분이 솔직히 말해서 그 때까지는 부친 혼자뿐이었어요. 일제 때 공
부를 좀 하고 그 다음에 또 북조선 강건군관학교 가가지고 올 때 제
가 그 학업 성적표를 봤는데 하여튼 몇 십 개 과목에 다 5점이었어
요. 소련의 채점제로 따라 배워 제가 소학교 공부 할 때만도 중국에
서는 5점제였어요. 제가 소학교 공부할 때까지만 해도 5점제였어요. 
1점부터 5점. 공부 못하면 2점, 2의 생김새가 오리같다고 우리는 공
부 못하는 학생을 놀리고 그랬었는데. 지금은 뭐 100점제이지만. 한 
과목도 4점이 없었어요. 너무나 훌륭하셨죠. 그래나니까 학교에. 촌
에 오니까 무조건 먼저 회계를 시켰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소학교 2
학년때인가 학교를 들어오셨어요. 그러니까 58년, 59년 전후로 학교
에 선생님이 모자란다고 학교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런데, 저가 여기가 또 다른 것이 이제 또, 학교 교원들은 국가편
제에 들고 하지만 어머니가 혼자서 살림하다나니까 병만 남았지요. 
그래서 아버지 봉급은 약값으로 다 들어가고. 그래서 우리 가정에 
다른 집하고 조금 다른 것이 아, 뭐, 교원 가정이 뭐 그렇게 곤란했
겠는가 그럴 수 있는데. 그건 몰라서 하는 소리이고, 주요하게는 어
머니 병 때문에 살림이 구차했어요. 그래서 우리 가정에 제일 곤란
한 것도 아버지가 사업을 잘 못 하시든가 돈을 못 벌던 것도 아니고 
다른 집보다 특별히 곤란했던 거는 어머니가 장기 병환으로 계시다
2장  글쓰기와 음악적 재능을 갖춘 청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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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까 거기에 이제 약값이 다 들어가잖아요. 지금처럼 의료보험이 
있었던 시기도 아니고 그런데다가 우리 또 아버지 오셔서 밑에 동생
이 넷이나 생겼죠. 그러니까 살기가 상당히 어려웠어요. 혼자 신경을 
너무 쓰다 보니까 마지막 세상 뜨실 때는 고혈압 심장병으로 57세
에 너무 일찍 세상을 뜨셨어요.
 
전창국 아버지의 선명소학교 재직시절 졸업식 사진 
(1976년 앞줄 좌측 4번째)
 소학교 어린 시절의 기억에 저는 아침에 학교 갈 때 지개를 지고 
학교에 갑니다. 저의 기억에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지게를 진 것은 
저 뿐인 것으로 생각습니다. 북방 지구의 평원지대에 제일 큰 걱정
거리가 땔나무입니다. 생산대의 사원들은 짚이나 북대기를 나누어 
주기에 땔 꺼리가 걱정 없지만 교원가정에 일꾼이 없으면 분배를 받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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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못하지요. 우리 집에는 아버지가 교원이시고 어머님 병환으로 일
을 못하니 평시에는 제가 방과 후에 나무를 한 지개씩하여 날랐습니
다. 여름방학에는 아버지와 함께 언제나 강 건너 들판에 땔나무를 
하러 가지요. 어머님은 병환으로 계시면서도 집에 보탬을 하려고 힘
든 일을 다닙니다. 방학 간 제가 집에 있을 때는 동생을 집에 두고 
다니는데 제가 동생을 업고 일터로 젖먹이로 다니죠. 친구들과 놀아
도 동생을 보살펴야 해서 그때 제일 부러운 것이 누님이 있는 것이
에요. 
  모르는 사람들은 교원은 월급이 있는데 그렇게 곤란할 수 있느냐 
생각 할 수 있지만 그때는 나라가 어려울 땐데 농민들은 몰래 쌀을 
시내에 가져다 팝니다. 잡히면 무조건 압수하지만 먹고 살려고 모험
을 하지요, 쌀 한 근에 3원 하니깐 한 달 봉급으로 겨우 쌀 10여근 
밖에 사지 못해요. 다른 집에는 자전거, 라디오, 제봉침, 손목시계가 
다 있지만 교원가정에는 없지요. 하여 겨울 방학때는 아버지와 함께 
강에 얼음을 깨서는 긴 작살로 큰 조개를 잡아다가 양식보탬을 했어
요. 그 만은 괜찮은 거예요. 세상에서 배고픈 설움보다 더 한 것이 
없는 것 같아요
▮ 중학교 시절 공산당 입당과 문예적 소양   
소학교를 마치고, 조선 중학교입니다. 서만 조선인중학교. 강남 현
에서 성립될 때. 봄에 성립되어서 7월 달에 지금 자리로 이사 왔거
든요. 그게 48년도. 중학교가 서만 조선인 중학교. 원래는 강남에 있
다가. 선생님 그 내몽골 들어가실 때 가다 나면 강남 현에 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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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동네가 있는데. 그 강남 현에서 이 학교가 성립되었어요. 그 해 
가을로 48년도에 시내로 들어왔지요. 지금 자리로 이사 왔습니다. 
초등학교 3년, 중학교 3년, 고중학교 3년. 그 때는 다 3년씩. 6년제
였어요.
중학교 때 저가 남다르게 일이 생긴 것이 좀 책을 보고 하면서 너
무 좀 우리말로 하면 자고자대라 하던가요. 어릴 때부터  너무 야 
잘한다 저놈아 똑똑하다 이런 소리만 듣다나니까 중학교 와서도 그
런 나쁜 습득을 해가지고 면제시험 대우 받고 왔지, 그 다음에 중학
교 와가지고 우리 그 해 세 개 반에 한 교실에 50명씩 150명을 받
았는데 2학년 진급하기 전에 1학년 때 중국에 있는 공청단 청년조
직에 가입했어요. 
전교에 150명 가운데 1학년 때 공청단에 입당한 사람이 저 혼자
였어요. 그때는 대단했죠. 그런데 말씀을, 원래는 중국 공산주의 청
년단에 단장의 규정이 15살이 되어야만이 만 15살에 입단을 해야 
돼요. 그런데 저는 입단을, 그때는 소견이 있어야 됩니다. 당도 입당
을 하게 되면 소개인이 있는 것처럼 입단할 때 소개인이 있어요. 지
금도 있습니다. 소개인이 있어야 되는데 저의 소개인 누군가 하게 
되면 저의 반주임 김준식 선생이었어요. 그래서 반주임이 저보고 야 
니 묻거들랑 15살이라 해라. 자기가 지금까지 배양했던 그것을 포기
하기 싫어서. 그래가 저도 눈감고 선생님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하
여 저는 14살에 입단을 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인기를 끌었죠. 
  그때 저의 조선어 담임은 박옥순 선생이었어요. 그외에도 조선어 
교연실에 선생님들이 저를 몹시 사랑했어요. 집에 수장한 많은 책을 
빌려 주면서 보라고 했습니다. 1958년에 우파 모자를 쓴 윤일선생과 
홍서문 선생님들은 문화혁명초기에 북조선으로 건너 갔습니다 .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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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셨죠. 있어서면 문화혁명때 큰 봉변을 당하죠.
  중학교 2학년 때부터가 제가 처음으로 그 눈강 잡지에, 어떻게 해
가지고 초중 2학년 때, 그, 저, 장문 시험에 제가 전교에서 1등을 했
거든요. 고등학교 고등학생까지다 포함해가지고. 그래서 그해 
<12.9>항전 기념일 날에 학교에서 대회를 열어 표창을 했는데 저
에게 <로신선집>을 상으로 주었습니다.
전창국 초중학교 2학년시절 작문 게재되었던 
눈강 잡지 표지
 그 때 그건 저한테는 좋은 계기가 되었지만 그만큼 나는 좀 나쁜 
습성에 물들지 않았나? 자책하게 되었어요. 여러분들이 그거 분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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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너무나 사람들에게 받들렸어요. 쟤 참 대단하
다하고. 제가 한 고향 고등생 누나나 형님들 연애편지를 써 준 적이 
있는데 뒤에서 저를 보고 연회대장이라고 했답니다. 글을 쓰다나니
까 뭐. 중국에는 명절이 많지 않습니까? 학교에서 흑판보 낼 때마다 
나오는 시, 그런 건 제가 쓴 것이 많았거든요. 
  그리고 이제야 말씀 올리지만 저번에 만나셨던 음악 선생님,  초
중 2학년 때 그 분이 중학교 음악, 하얼빈 사범학교 음악학부를 졸
업하고 오셨어요. 오셔서 보니까 흑판에 그 사람이 나를 모르는데 
초중 2학년 1반 전창국 시가 자꾸 나오죠. 한 번은 그분이 이재 보
니까 우리 음악을 가리켜. 식당에 가는데 ‘창국이, 이리 와봐’ 부르더
라고요. ‘왜 그래요?’ ‘니... 보니까 시를 잘 쓰던데 가사 하나 쓰거
라. 내 작곡할게.’... 그래 나는 그 때 뭔가  자존심의 발로라 할가. 
‘선생님, 곡 먼저 다세요. 제가 가사 쓸게요.’... 아니, 무슨 말이 그렇
게 갑자기 나갔어요. 말을 하고 봐도 너무 맹랑했지요. 그 분이 자존
심에 쿡.. ‘야. 네가 지금 어데 먼저 곡을 하고 가사를 다는 법이 있
냐. 네가 곡을 아느냐? 곡도 모르면서 네가 가사를 어떻게 달아?’ 도
리에는 맞지요. 안 그렇습니까? 일반적으로 가사가 먼저 있고 그 가
사의 감정에 따라서 곡을 만들고 하는데 곡에 대한 그게 없게 되게 
되면 가사를 달고 싶어도 달 수 없게 되는 거예요. 
  그 말 한 마디에 저가 음악을 전공했습니다. 저는 음악을 안 하지
만 초중 2학년 때부터 악보를 자습했어요. 그래가, 저는 그 때는 오
선보가 없었잖아요. 중국에는 지금 오선보는 전문 음악가들만 쓰고 
일반적으로 도레미파를 1, 2, 3, 4아라비아 숫자로 하거든요. 지금도 
그렇게 해요. 근데 저는 그러니까 초중 2학년, 3학년, 고중 1학년, 2
학년. 문화혁명 일어나던 고중 2학년까지 4년 동안 악리를 통달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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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도 많이 했습니다. 저는 그 때부터 작곡을 했지요.  그래놓으니
까 저는 그 때부터 작곡을 했는데  지금도 불려지고 있잖아요. 지금
도 불러요.
  그 밤중에, 라디오도 사지도 못하고 돈이 없으니까. 그 광석라디오
라 해가지고 제일 하급적인 그거를 사서 조립을 해서 한밤중에 12
시에 듣습니다. 전문 한국 방송을. 그때는 알게 되면 무조건 목 따는
거에요. 그러니까 꼭 밤에 아무도 없을 때 몰래 들은 것이 그때 제
일 인상 깊은게 한국 연속 드라마 방송으로 나온 거 <삼현육각>. 
아 그 왕칠이란 놈의 그 이야기고 그 다음에 그때 인상에 제일 컸던 
것이 한국노래 가운데서 이미자 부른 <초가 삼간>으로 해서 , 그 
노래가 이미자가 한참 데뷔할 그때 그 노래가. 그걸 들으면서 저는 
그걸 한국노래책을 만들었습니다. 
  중학교에서 우리는 집을 떠나 시내 학교에서 합숙생황을 했어요.
그때 그 광석 라디오 부품을 사느라고 한 학기 동안 박일호란 동창
과 둘이서 한몫의 밥을 먹었습니다. 그 역시 부모없이 외숙모 슬하
에서 자랐는데 가정이 곤란했어요. 당시 한 달 식비가 9원이었는데 
둘이서 한몫 밥을 먹어야 하는데 아침에는 강낭떡 한 개반, 점심에
는 강낭떡 두 개, 저녁에는 수수죽 혹은 수수밥에 새래기국 한 사발, 
한창 먹을 때인데 반 배도 차지 않지요. 이렇게 배를 곯으면서도 하
고픈 일을 했습니다. 
  하기에 음악에 대한 소양이랄가 예술적 감수성이 좀 다르게 쌓아
졌는가 봅니다.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방황 할 때 마다 저는 자연히 
작곡, 작사로 마음을 달래지요. 부끄럽지만 몇 개만 예를 들지요. 두
파 싸움으로 처음 내몽골로 피신을 갔을 때, 1967년 정월 대보름의 
달을 올려 보다가 동창들의 그리움에 시달리다 지은 노래가 <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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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노래>입니다. 달 밝은 이 밤에 창가에 앉으면/ 끝없이 뜨오르는 
옛추억이여/ 시련을 박차고 싸워온 전우들아/ 오늘은 어디에서 이 
밤을 맞느냐…… 
  1968년 두파의 무력충돌로 학교로 가지 못하고 어린 대원들을 거
느리고 강을 건너 조선족 마을로 피신을 가려고 부둣가에 도착하니 
배사공들이 저쪽패의 전화를 받고는 반동들이라고 건너 주지를 않아 
할 수없이 초봄의 한기를 무릅쓰고 제방에 기대여 하루 밤을 새웠습
니다. 일이 안 될려니 또 비까지 내렸어요. <비내리는 부두가>라 
해가지고, 구슬픈 사공 노래 멈춘지 언제이냐/ 궂은 비 내리는 한적
한 나루터/울면서 갈 길을 찾아는 왜 왔든가/ 아, 돌아가는 나루
터…… 일이 안 될려니 몇일 후에 반대파에 붙들려 매를 맞고 몸 수
색을 하는데 피 묻은 속옷 주머니에서 이 노래가 나왔지요, 자산계
급의 감정을 송가하였다고 더 매를 안겼지요. 
 지금까지 40여년 동안 그래도 제일 많이 불려진것은 <고향 노래> 
이지요. 눈강물 구비구비 흘러드는 이 곳에/ 오붓이 자리 잡은 내 고
향 강북마을/ 관계수 따라 몇 리런가 기름진 옥답/ 언제나 나를 반
겨 손짓한다네/ 아, 예가 바로 내고향 선명이라오.  저녘노을 붉게 
붉게 돌아오는 저녘길에/처녀들의 노래소리 정답게 들려 옵니다/ 알
뜰 쌀뜰 땀흘리며 가꿔온 전답에/ 가을이면 익은  곡식 설래인다오/ 
아, 예가 바로 내고향 선명이라오
 1973년, 우리 마을에서 4명이 참군을 하는데 우리 생산소대에서 3
명이 가게 되였지요. 그때 중국에서 참군하게 되면 모두 일지리를 
찾을 수 있기에 누구나 다 참군하려 하지요. 농촌을 떠나는 유일한 
기회이지요. 돼지를 잡아서 환송대회를 열었는데 오락이 고조에 오
를 무렵 가는 이나 보내는 젊은 청년들이 다 부등켜 안고 울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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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장면에 뭔가 떠오르기에 회계의 책상에 업들어 이 노래를 작사, 
작곡하여서 나중에 고향이 그립고 친구가 보고 싶으면 이 노래를 부
르라고 하면서 그 자리에서 배워주었는데, 저가 우리 마을 악단을 
지휘하여 시 재일 큰 무대에서 조명한이란 마을 처녀가 독창을 하여 
인기를 끌었는가 하면 전 시 조선족운동대회에서 집체 무 반주곡으
로도 연주되었지요. 지금도 마을에서는 물론 한국의 고향친구 모임
이나 잔치석상에서도 자주 울려 퍼집니다. 
치치하얼 중학교 졸업사진 (1964년 : 뒷줄 좌에서 4번째 전창국)
고중 졸업할 때까지 할 때까지 하니까 모아놓으니까 이렇게 두꺼
워졌어요. 중국에는 그런 책도 출판을 할 생각도 못 하거니와 몰라
요. 그래서 저는 그걸 책으로 이만큼 책을 만들었는데 그 책에 공이 
얼마나 들어갔는가 하게 되면 어떤 노래들은 그걸 악보로 적어야하
기 때문에 한 번 들어서는 안 되잖아요. 두 번 들어도 안 됩니다. 심
2장  글쓰기와 음악적 재능을 갖춘 청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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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어는 열 번을 들어야 다 맞출 수 있어요. 왜 그러냐면 한번하고 
마니까 다음에서는 솔라솔미레미도 이렇게 나오는 게 아니고 실버들 
너러진 이러고 나니까 그거를 음으로 맞출라 하게 되면 그 한꺼번에 
안됩니다 몇 번을 들어야 그게 나오는데 그러니까 이만큼 몇 십곡을 
할 때까지 이만큼 두꺼워졌어요. 그래서 제가 처음으로 중국에 조선
어 가운데서는 한국노래집을 내 손으로 만든 게 있었어요. 그래서 
그게 다른 사람들이 다 필기를 해서 민가들에서 퍼지기 시작했습니
다. 그런데 그 책이 저가 대학교 가가지고 조선어 학부에 대학생들
이 가서 다니고 다니면서 필기하다가 결국은 내손에 못 들어오고 졸
업할 때까지 못 찾았어요. 그게 있었으면 참 좋은게 되겠는데. 거기
에는 이제 타향살이라던가 30년대 불려졌던 유행가. 그 유행가의 특
징이 뭐에요. 다 망향, 망해의 설움을 토로하고 고향을 그리워하고 
부모 처자. 그러니까 우리 그때 타향살이 하는거 다 그런 내용이잖
아요.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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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자료>
중국 공산당
중국 공산당(중국어 간체: 中国共产党, 정체: 中國共產黨, 병
음: Zhōngguó gòngchǎndǎng 중궈 공찬당)은 중화인민공화국
의 집권 정당으로, 일당 독재 체제로 국가를 통치하는 공산당 
가운데 하나이다. 
중국 공산당은 1919년 공산당의 5·4 운동의 결과로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인민민주독재 등의 
계급투쟁 강령을 중심으로 창당되었으며 천두슈, 마오쩌둥, 리
다, 마오둔, 리한준, 위슈송 등이 조직의 초기 멤버였다. 1920
년 10월, 베이징에서 리다자오, 장궈타오 등이 베이징 내 조
직을 담당하기로 창립대회를 가졌고 베이징 대학 마르크스-
레닌주의연구회로부터 당원의 골간을 이뤘다.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거쳐 1949년까지 중화민국에 맞서 도
시 노동자, 농민, 하급 지식인, 학생 등을 마오쩌둥 진영에 대
거 끌어들였고 스탈린주의와 신민주주의로 소비에트 연방과의 
연대를 강화함으로써 공산주의 이념을 여러 분야로 퍼뜨려갔
고 국공 내전에서 중화민국 국군과 싸워 이겼다. 중국 공산당
은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을 문화 대혁명에까지 
충분히 실행 후 덩샤오핑 이론, 장쩌민 《삼개 대표》로부터는 
경제 건설로 정책을 급변경 하였다. 
자료 출처 : 위키백과
제3장 문화대혁명과 반혁명분자로서의 경험 
문화대혁명 초기 적극적인 홍위병 활동 
홍위병 파벌싸움과 반혁명분자로서의 수감생활 
수리건설 참여와 농촌생산대 활동
문화혁명시기 투쟁동지들과 함께(1968년: 뒤줄 우측 전창국)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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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대혁명 초기 적극적인 홍위병 활동 
제가 중학교 온 후에 말을 줄여서 먼저 중국의 문화혁명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시는데 문화혁명은 상상도 못할 광란의 
10년이였습니다. 특히 66년도 모택동이 문화혁명을 발동을 할 때는 
자기 나름대로의 정치적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문화혁명은 
저는 지금 와서도 다시 지금까지는 중국에서는 정면으로 그 문화혁
을 백번으로 다 부정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어떤 면에는 문화혁명을 부정 안해요. 왜 부정 안하
냐. 모택동의 그 문화혁명은 결과만 보지 말고 물론 10년 동안 내란
이 생겨서 타격은 많이 되었지만 그렇지만 그거는 우리나라를 더 강
하게, 뭐 여러분들도 역사공부를 하셔서 아시겠지만 주요하게는 소
련하고 미국이 강국이였거든 그 60년대 그때는. 그래서 소련이 중국 
공산당의 생각에는 수정주의로 건너갔습니다. 그래서 미국을 위주로 
한 서방국가에서는 그 문화로서 중국을 이제 자본주의 국가로 변하
려는 이런 쪽으로 바람이 불었거든. 그래 되면 모택동은 이 운동으
로서 이걸 바로잡자. 그러니 이제 모택동은 맑스의 공산당 이 정책
을 보존하자. 사회주의 진영을 보존하자. 그때만 해도 사회주의 국가
가 13개 지 않냐. 그런데 소련까지 변절하고 나니까 중국은 그때는 
쿠바, 북조선, 중국 세 개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유럽의 불가리아 이
런 것도 다 자본주의로 건너가고 그래가 세 개 남았죠. 그런데 모택
동이 이래서는 우리 제3국가가 안되겠다. 제3국가라는 개념은 모택
동이 지어냈습니다. 그 미국을 위주로 한 것은 제1국가, 일본을 위
제3장  문화대혁명과 반혁명분자로서의 경험 
 
55
주로 한 것은 발전도상의 국가, 우리 못사는 아프리카 국가하고 중
국은 제3세계라 해가지고 그래서 나온 제3세계란 말이 모택동이 우
리 제3세계로 살아갈려고 하면 공산주의를 계속 견지해야 한다. 그
런 각도에서 했습니다. 지금 와서 제가 분석한 것은 모택동 이 출발
점은 우리 이념을 떠나서 나라를 변절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 속에서
는 그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적지 않은 나라에서도 그 공산주의 학설을 연구하는 그 때인데 모
택동이 이러고 나니까 그 밑에 사람들이 이 기회에 홍위병 운동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아까 저도 홍위병 완장을 타고 있었지만 그때
도 홍위병은 세상 무적이에요. 완장 하나만 타게 되면 중국 등지 어
디든지 다닐 수 있고 밥도 맘대로 먹고 기차도 맘대로 타고 기차표
를 그때는 동란 시기기 때문에 표를 끊을 생각도 할 필요도 없어요. 
그저 완장타고 올라가게 되면 태워다주고 어디가게 되면 어디까지 
실어다주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운동을 해서, 혁명을 해야되니까 그 
정도로 홍위병의 완력이 컸어요. 그래서 제가 홍위병 고등학교 2학
년때인데 학교 후군을 책임졌습니다. 선생님들이 사물을 볼라하게 
되면 제가 이걸 제 본에서 열어야 돼요. 내 없을 때 열면 큰일나죠. 
데워놓고 투쟁을 합니다. 학생들 앞에 세워놓고. 왜 홍위병에 동요하
지 않은데 허락하지 않은데 맘대로 사무를 보나, 이런 식으로 그만
큼 그렇게 홍위병이 너무나 강력한 시기가 있었습니다. 저도 그때 
그런 그런 한심한 짓도 많이 했습니다. 
저도 여기도 나왔지만 저기 나와 있는 사진은 저가 여학생 셋하고
고 우리 선생 한분하고 데리고 저 다섯이서 저 광저우까지 갔었어
요. 중국의 광저우. 다른 사람들은 기껏해야 장사나 북경가고 돌아오
는데 저는 그분들 데리고 저 광저우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홍위병 완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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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차고. 
고중 2학년 홍위병 시절 광저우에 갔을 때 
기념촬영(1966년: 뒤줄 우측 전창국)
그때는 왜 그래 갈 수 있었느냐 홍위병이면 세상을 열 때예요. 어
디가나 기차, 자동차, 돈 일절 안내고 탑니다. 나 혁명 간다 하면 태
워주는 거예요. 여관에 가면 공짜 밥 먹여줘요. 뭐 어디간다하면 다 
공짜였어요. 그렇기 때문에 전국을 다녔어요. 그게 저만 간 게 아니
고 좀 뭐 다리 저는 병신 내놓고는 그때는 학생들이 중학생들이 다 
전국을 다니는 그런 형편이에요 혁명을 한다고. 그게 홍위병 운동이
에요. 그러니 저도 거기에 일원으로 되어가지고 그때는 선생님이 학
생들을 만나면 절을 해야 하는 형편이에요. 저기 선생 한 분이 계십
니다. 저분은 내가 왜 데리고 갔는가 하게 되면 다른 사람 교원들은 
제3장  문화대혁명과 반혁명분자로서의 경험 
 
57
못갑니다. 
내 저가 물리를 좋아했어요. 원래는. 저는 이분이 물리 선생님입니
다 곽선생이라고.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제 선생님이신데 저가 선생
님이시지만 저를 동생처럼 아껴줘서 내가 물리도 잘하고 한데서 그
래서 그 선생을 데리고 나머지는 그래서 광저우에서 우리 두 달을 
있었습니다. 왜 있었는가 하게 되면 북방으로 오는 기차에 사람이 
너무 많아가 탈 수 없었어요. 그래서 12월달에 다시 이제 북방으로 
오게 되었는데 북방으로 간다고 군대 옷 오바를 줬습니다. 북방에 
가면 춥잖아요. 12월달이니까 지금 치치하얼 쪽으로 오게되면. 그래 
주면서 아 너희들 가서 이것을 붙여 보내라. 그 붙여 보낸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저 혼자 그 붙여 보냈어요. 그 잘 입었으니까 이제 
다시 붙여 보내도 이런 식으로 문화혁명이 있을 때였습니다.
▮ 홍위병 파벌 싸움과 반혁명분자로서의 수감생활
 홍위병 계파가 중국에서 두 개파로 갈렸습니다. 그때는 이제 공
안도 없고 검찰들도 없고 뭐 아무것도 세상에 그저 완전히 홍위병들 
세상이었는데 그러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그 홍위병 조직이 군
중 조직이 두 파로 갈라졌어요. 두 파로 갈라질 때 저는 어떻게 되
가 소수파에 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소수파는 공격파에요. 지금 
이 정권을 부숴야 된다는 것이고 저쪽 보수파는 지금 말하는 보수파
는 이 정권을 계속 옹호해야 된다는 그 두 파였는데 그 두 파 끝에 
그래서 여기도 저 사진이 몇 개 나왔지만 제가 이제 저를 잡을라 하
기 때문에 내몽골로 네 번 북경을 거쳐서 집녕이란 곳으로 세 번을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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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쳤어요. 
 왜 그런가 하게 되면 저가 이쪽학교 중학교에 있을 때 이쪽파에 책
임을 지고 있었어요. 그러면서 우리는 <2.9>팝니다. 이거는 역사적
으로 2월 9일날 공안국 앞에서 우리 단식을 했거든요. 뭐 민주를 달
라 우리 요구를 들어라. 그래서 이구파인데 이구파에 저가 연락원으
로 있었어요. 우리 학교에 조선족학교에 이파에 두목으로 있으면서 
거기다 또 걸고 있었어요. 그러고 또 선전부장으로 있었습니다. 그러
니까 저가 사회에서 잡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이제 
두 파가 새로운 정권이 건립되면서 학생이 두팬데 두패의 대표가 싸
인을 해야 돼요. 우리 다 연합하자. 그때가 68년도거든요.
문화혁명시기 전창국 계파 사람들 (1968년)
  
 그래가 연합을 하는데 저는 이 계파를 대신해서 싸인을 하고 저쪽 
파에도 두목이 있어요. 싸인을 해서 연합을 하자. 그래서 새로운 정
권이 설립됐습니다. 학교에도 교육 치치하얼 혁명위원회. 그때는 
제3장  문화대혁명과 반혁명분자로서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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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위원회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싸인을 하고 취직을 했어요. 그래
서 혁명위원회 부주임이 됐어요. 저하고 동기 졸업생 한반 동창인데. 
왜 그런가하면 그때 두 파 연합하는 공언이 돼서 그 지금 말하는 부
교장으로 있었습니다. 저도 싸인을 했으니까 출석하게 되면 부교장
으로 될 수 있었죠. 나는 아니다 나는 혁명하는 것을 혁명을 위해서 
한거지 직위를 탐내서 한게 아니다. 그러고 저는 싸인을 안했어요.   
  그러다나니까 그 다음에 건립이 되가지고 저쪽 패에서 시 지시대
로 반대파였던 사람들을 잡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혁명위원회 정식 
국가에서 공인하는 이 시 정부에서 잡았기 때문에 저가 붙들리게 되
었어요. 반혁명분자. 그래 저가 말이 좀 길어집니다만 우리 그때 기
수가 있었어요. 우리 패에 시위를 하게 되면 제일 앞에 있던 기수가 
제4중학교에 중국 학생이에요. 그분이 길을 뚫고 가다가 그 4중 학
생들한테 맞아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럴 수 있느냐. 그래서 제가 그 
학생들을 조직해서 시체를 들고 공안국 앞에서도 밤을 새우고 그 다
음에 군 부대 앞에서도 시체를 들고 단식도 하고 저가 조직했었습니
다. 그러니까 저도 필히 타도 잡아야 할 대상이 되죠. 그래서 도망쳤
는데 이제 혁명위원회가 건립되서 하다나니까 순조롭게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잡을 때 저를 잡으러 또 온 것이 저번에 가신 xx라
는 사람이 군중 독재 지휘부 있습니다. 그때는 모든 기층 조직이 마
비상태여서  군중 독재라는게 있습니다. 구마다 완장을 끼고 규찰대
라 해가지고 다니면서 잡는데 그 사람이 규찰대 사람들을 데려와서 
저를 잡았어요. 그래서 68년도 5월 몇 일 날에 잡혀서 일년동안 감
옥살이를 했습니다. 어디 가지도 못하고. 감옥살이하면서 계속 일도 
하고 무슨 석탄 캐려도 가고 보일러도 떼고 그런 일을 했습니다. 그
러니까 저가 반혁명 모자를 썼을 때는 우리 치치하얼시에는  뭐 학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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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이 반공쿠데타가 되였다는 말은 못 들어 모았어요. 우리 치치하얼
에는 저뿐이고요 중국 사람을 포함해서도 없었어요.
  그래서 이제 그저 그렇게만 하면 되는데 제일 견디기 바쁜 것이 
저 그래서 아까 말씀 올린 봐와 같이 좀 있다 질문하실 때 글로 써
주세요라고 했어요. 제가 투쟁 시 맞을 때 앞에 세워놓고 잘못 때려
서 귀가 한개 먹었어요. 지금까지 한쪽 귀는 못 들어요. 딱 하나만 
듣고 있는데 그렇게 매를 많이 맞았습니다. 매를 맞으면서도 저는 
제가 언제 그게 잘못됐다고 나는 왜 그런지 그걸 말하지 않았어요. 
제가 실례를 범했습니다만 모택동에 대해서 말해봐라, 그러면 모택
동은 중국 역사에서는 31년도 준의회에서 당내에 위신을 수립하게 
됐다. 모택동은 당 건립할 때부터 건립자인데 왜 31년도에는 10년이
나 늦어지는데, 중국 공산당 21년도에 상해에서 건립됐지 않았어요? 
  그래서 나는 이렇게 하면서도 말은 바른대로 해야죠. 이거는 내가 
하는 말이 아니고 중국에서 출간하는 정치책을 보라. 그러면 그 사
람들은 책을 보지 않으니까 몰라요. 그래서 내 정치선생한테 그때 
정치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이교장이라고 이씨라고 있었는데 그 사람
도 나도 잘 모르겠다. 학생들 운동때는 겁이 나서 모를 수가 없죠. 
그치만 거기서 바른 소리하면 모르겠다. 그럼 책을 가져와 무슨 책
이냐. 그래서 나는 어릴 때부터 책을 너무 봤기 때문에 그걸 기억해
서 어느 년도에 출판한 무슨 책인데 껍데기는 뻘건 걸로 돼있고 그 
밑에 어떻게 됐다. 제 9페이지 제 9쪽에 밑을 보게 되면 그 글이 있
다고. 그래서 와서 보니까 정말 있거든 할 말이 없죠. 그치만 그때는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매일 그저 맞아야죠. 그런데 또 어떻게 상황이 달라졌나 
하게 되면 68년도 연말, 69년도 되가지고 우리 동네 애들이 중학교
제3장  문화대혁명과 반혁명분자로서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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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오게 되었어요. 중학교 와서는 오니까 전교에서 학생들은 공부도 
안하고 매일 군중애회를 열고 투쟁들만 하죠. 아 저놈 타도하라. 그
런데 이제 그때도 3개  팻말을 달고 다녔어요, 목에 철사줄로 해가
지고 이렇게 나무판에 써가지고 현행반혁명분자 그다음에 저가 민족 
우리 조선 민족을 너무 고취한데서 민족주의자, 그다음에 밑에는 도
둑놈 절도분자,  이렇게 해서 매일 하나씩 바꾸 가지고  이렇게 다
녀요. 투쟁할 때마다 이 걸고  다녀요. 그런데 우리 고향에  애들이 
와가지고 보니까 우리 동네 저 사람  타도하니까 이 애들은 중학교 
금방 오면 모르지 않아요. 또 싸움이 붙었어요. 이거 우리 온 고향에 
애들은 저를 타도한다고 하면서 못살게 구니까 보호할려하고 저쪽 
편에는 이미 이거는 반역분자인데 너 거는 왜 공부를 해야지 왜 이
런 거 간섭하냐 너 저 현행 현 정부를 반대하는 사람하고 입장을 같
이하게 되면 너가 나중에 공부도 못한다 이런 식으로.
그래서 그 애들한테 득도 봤어요. 무슨 득을 봤냐 하면 얘들이 저가 
책을 많이 보다 보니까 거기 애들은 소학교때부터 역사를 한국의 역
사나 조선족의 역사를 몰라요. 딱 국가에서 내준 정치 그대로 하다
보니까 이분들이 와서 저를 데리고 아 우리가 오늘은 이 사람들 투
쟁하겠다 그래요. 
그러면 투쟁하러 가는데 문에 딱 걸고는 이야기하랍니다. 홍길동
전 이야기하라 심청전 이야기하라. 그때는 우리 교과서에 우리 중국
에 있는 것처럼 심청전 일반적인 그런 걸 다 모르고 있어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임꺽정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런데 그걸 이야
기를 하면 되는데 이야기를 하니까 안할 수가 없죠. 그래서 하다나
면 그다음에 말이 새나가지. 아 왜 학생들을 모아놓고 독서를 품었
다. 왜 또 그런 이야기 했냐해 그러면 또 그것 때문에 투쟁을 막아.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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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가 안가시겠지만 그때는 그렇게 정치가 사회가 난잡했었습니다. 
그게 10년. 
 제가 여기서 조금 치치하얼 지구, 조선족 저 나이 또래 학교 다니
면서 문제 생긴 게 저가 저 때 뭐 조선족에 대한 그런 민족감정 이
런 쪽으로 너무 민족주의자라 해서, 민족, 문화혁명 때 저가 우리 조
선족뿐만 아니라 우리 치치하얼 시에서도 고등학교 때, 문화혁명 때 
고깔모자를 쓰고 감옥에 간 건 저 혼자에요.  그 때, 모자가 3개 있
답니다. 하나는 ‘현행반혁명분자’. 체제를 반대한다 해가지고 그 다음 
하나는, ‘극단민족주의자’. 하루에 하나씩 바꿨어요. 지금 말하는 ‘도
적범’, 절도범이었어요. 문화혁명 때 두 파 싸움하면서 그 학교 물건
이 없어진 걸, 저가 다 훔친 거라 해가지고. 그래 절도범 그 간판을 
3(세)개 걸고 다녔습니다. 이, 이건 뭐, 지나간 이야기지만, 그 문화
혁명 때 그 당시에 고만큼 그렇게 참혹했어요. 그래서, 한 1년 동안 
감옥에 가 있었습니다. 저가 1년 동안 있다가 농촌에 갔는데 농촌에 
가서 반혁명분자니까 집에 못 가게 합니다. 
▮ 수리건설 참여와 농촌 생산대 활동
  69년도부터 70년도 초까지, 그 때까지만 해도 저는 고향에 가서도 
집에서 못 잤잖아요. 촌에서 반혁명분자라고 창고에 가둬놓고 했는
데. 그 전에 가기 전에 수리건설을 하는 데에 제가 따라갔습니다. 딱 
겨울에만 하는 일이니까. 69년도 가을에 가가지고 그 이듬해 봄까지 
했으니까요. 21살 경에 한 일이지요. 그런데 거기에 가는 거는  그
것도 여기는 또 원인이 있어요. 왜 거기에 가야되었는가 하게 되면 
제3장  문화대혁명과 반혁명분자로서의 경험 
 
63
아, 우리는 힘들게 일하는데 저 놈은 가둬놓고 일도 안 시키느냐? 
그래 가지고 제가 따라갔죠. 따라갔는데 박 대장이라고 우리, 제가 
있던 생산대에 그, 박 대장이 <천장배기>라고 이름을 지은 소가 부
랑스럽고 말을 잘 안 들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그 소를 안 부리려고 
해요. 그러니까 누구도 안 부린다고 하니까 니나 몰고 다니면서 도
랑을 판 흙을 차에 싣고 다니라고 했어요. 그때는  누구라도 죽으라
면 죽고 살으라면 살 때인데 거역 못하고 시키는 대로 좋다고 일을 
했어요. 그런데 그게 문제가 생겼지요... ‘소는 우리 생산대에 주요한 
재산인데 왜 반혁명분자한테 그 소를 맡겼느냐?’ 그래 가지고 그 현
지에서 비판대회가 벌어졌습니다.
  이렇게 계급의식이 높지 못하다고 박대장은 물론 촌의 다른 간부
들도  많은 욕을 받지요. 그러니까 가둬 놓지 말고 일을 시켜야 하
는대  일하니까 또 군중둘과 접촉을 하게 되죠. 저야 어쨌든 노동개
조를 해야 하기에 상관이 없지만 다른 사람들도 따라서 고초를 격게 
되지요. 그런데 일이 우습게 번져 졌습니다. 20여일 토방일이 끝나
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누구도 소차를 몰고 가려하지 않지요. 
다들 빠른 마차를 타고 집으로 가고 재 혼자서 느린 소차를 몰고 근
100리 되는 길을 떠났습니다. 차에 누워 흘러가는 그름을 쳐다보는 
나의 눈에 눈물이 아니라 피가 흐르는 감각이였어요. 생산대에 도착
했을 땐 자정이 넘었습니다. 
  그러다 또 어디에 가게 되었느냐 하면, 그 때 생산대에서는  여름
에 집승먹이 양초 베기를 하는데 힘 좋은 몇 사람만 갑니다. 거기 
가면 잘 먹죠. 양초 베기는 힘이 너무 들어요. 긴자루를 메운 산도
(钐刀)를 가지고 허리까지 자란 풀을 쳐 넘겨야 하는데 한줄로 마주 
써서 하는 일이기에 따라 잡지 못하면 그 길로 집으로 보냅니다. 하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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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에 줄땀을 흘리면서 죽기내기로 해야 합니다. 여기는 아직까지 중
국에는 짐승이 있잖아요. 트럭이 없으니까 소나 말이 주요한 운수도
구이여서 생산대에서는 여간한 일이 아닙니다. 겨울을 날려면 사료
로 이런 풀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걸 가을에 가가지고 몇 십 차씩  
베여 저장을 하지요. 가게 되면 힘이 들어 다 안 가려고 합니다. 그
런데 힘 좋은 사람들하고 욕심 있는 사람들 돈 욕심 있는 사람들은 
가죠. 나는 그런 데에 따라 다녔어요. 그런데 그러자 여름이 다 끝나
고 돌아오자마자 이 놈은 있으면 또 사람을 시켜서 지켜야하니까 시
끄럽잖아요. 우물파기 하러 가게 되었지요. 아이고, 잘 되었다 이 놈. 
내가 가려고 간 게 아니고 사람들과 접촉 못하게 한다고, 그래서 그
렇게 우물파러 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도 말씀 올렸지만 토방일, 제방 쌓는 일 하러 갔다가 저 혼
자서 마구간에서 잤잖아요. 그 최 씨라는 분, 지금도 저한테 은인이 
되지만도, 그 분이 밤 12시인데. 저는 촌에는 생산대 마구간에 구유
가 있잖아요? 말들이 먹는 구유에 먹다 남은 짚이랑 좀 깔려가 있잖
아요? 거기에서 혼자 자는데 이 사람이 혼자 밤중에 보러 왔더라고
요. 그 최 씨라는 분이 일 갔던 분이, 다른 사람들은 다 뜨뜻한 구들
에서 자는데 나는 다른 사람들하고는 접촉 못하게 하니까 할 수 없
이 마구간에서 그런 데에서 누워 있었죠.
  그런데 그 다음에는 그런 일에 안 가게 되였어요. 안 가는 원인은 
70년대 돌아와 가지고 형새도 좀 안정되고 제가 일을 워낙 잘해 놓
으니까 년말에 농촌에 생산대에서 그 때는 생산대라는 단체인데 집
체 생활하는데 대장을 선출합니다. 근데, 제가 뭐 우물 파러도 갔었
어요, 사료하는 데에도 갔었구요. 그 다음에 저 도랑 파는 일을 하면
서 보니까 워낙 잘하니까, 자를 대장 시켜라 그러니까 상급위 공사
제3장  문화대혁명과 반혁명분자로서의 경험 
 
65
에서 그 사람은 독재대상인데 안된다는 게지요. 사람들은 농촌인데 
일 잘하면 되지 그런 거 관계할 거 있나하면서 70년도 연말에 부대
장으로 당선 되었어요. 아까 말한 박 대장이 계속 대장이고. 제가 부
대장 되었어요. 농민들 관계 안해요. 71년에 정대장으로 올라갔습니
다. 농촌에는 중국 사람들 1년에 한 번씩 대장을 바꿔요. 촌장 1년
에 한 번씩 왜? 다 힘들어서 안 하려고 그래요. 우리 동네에서 4개 
생산소대가 있는데 제가 2대입니다. 2대 대장을 6년을 했어요. 75년 
학교 갈 때까지, 우리 생산대가 제일 잘 살았어요. 돈벌이가 제일 잘 
되었어요. 고거 돈벌이 된 거는 후에 뭐 우리 농사를 잘 지으니까.
농사를 짓는 것도 제가 이제 말씀을 드리면 무엇 때문에 다른 데
에는 생산경력이 그리 많은 사람들이 하는 데도 생산량이 올라가지 
않느냐? 다 옛날 방식으로 하니까 그게 틀렸어요. 젊은 사람이 처음
으로 가서 우리 중국에서는 땅이 넓으니까 모 심을 줄 모릅니다.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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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대전우 환송식 사진 (1970년: 두번째줄 우측에서 4번째 전창국)
  70년대 그 때까지만 해도 위에서는 모 심어서 생산량을 높여라 
지시를 하지요. 하지만 우리 여기는 면적이 커 놓으니까  산종이라
고 벼 종자를 싹 태워 그대로 논판에 뿌립니다. 몇 십 년 동안 농사
를 한 상일군이 종자를 뿌려는데 이건 기술일이거든요.  골고루 뿌
려야 하잖아요. 넷이서 오십미터 폭을 잡아서 앞에서 논바닥을 고루
어 나가면 흙물이 가라 않기 전에 종자를  뿌려요. 제가 대장 하면
서 내가 하겠다고 하면서 종자를 뿌렸습니다. 봄에 가서 올라오는 
거 보면 제가 뿌린 게 제일 골고루 뿌려졌어요. 대장 잘하는 것 봐
라라, 이제 부터 젊은 사람 시켜라. 저는 우리 동네에서 제일 젊은 
스물 몇 살 때 생산대장이 되었어요. 그래, 그 다음에 농사기술. 물 
보는 게 제일 기술이에요. 지금은 살초제가 있어서 약을 뿌려서 했
지만 그때는 하지에 물로 피를 잡아야 됩니다. 약이 없잖아요. 물로 
제3장  문화대혁명과 반혁명분자로서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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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잘못 잡게 되면 벼 모가 다 죽게 되요. 그래, 물을 보는 ,제가 
수감원도 했어요. 그런대 가을에 가 보니 제가 한 게 벼가 잘 되었
어요. 그 다음에 논 둑 메는 게 기술일입니다. 그 논을 갈아놓고 평
평한 데에다가 몇 번 마수께 되면 논둑이 안 알립니다. 해마다 논둑
을 하는데 한 해는 제가 혼자 떴어요. 떴는데 하나도 잘못 된 게 없
어요. 그래도 젊은 사람이 다르다고, 믿을 만 하다고 했지요. 제가 
한 2년 하다나니까 다른 소대에서도. 생산소대에서도 젊은 사람을 
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제일 재미났어요. 대학교 갈 때만 해도 
우리 생산소대에서 은행에서  저축한 대로 다 분배하게 되면 격차가 
너무 크다고 상급에서 못 하게 합니다. 하루에 한 사람 앞에 3원 이
상 분배를 못 하게 해요. 제가 대학교 간 후에 부끄러운 소리지만 
제 고등학교 같이 있던 분인데 그 분이 3년 동안 재가 저축해 놓은 
돈을 모두 분배를 했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좋아하죠. 어쨌든 
분배를 많이 하니까. 그런데 생산의 밑천이 없어지잖아요. 그런 만큼 
우리는 잘 살았습니다. 같은 촌에 있으면서도 농민들 수입이 다 달
랐어요.
이런 식으로 농촌에서 있다가 저가 어떻게 무슨 생활을 했든지 어쨌
든 나는 농촌에서 자랐기 때문에 촌에 대한 그런 애착이 심해서 일
을 부지런히 했어요. 중국에서는 집체로 농사를 짓잖아요. 집체로 지
을 때 우리 촌에 네 개 생산소대가 있는데 어떻게 되가지고 제가 처
음에 생산대장으로 추출이 되어서 우리 이 생산량이 최고로 올라갔
습니다. 이렇게 75년도까지 6년 동안 농사를 지었습니다. 벼농사를. 
그래서 저는 벼농사에 대해서는 자신감이 좀 있습니다. 오랫동안 해
서. 
  그러기에 70년대 초에 우리 동네에서 처음으로 우리가 모를 키우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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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벼를 심는 실험을 하고 역시 대 면적으로 확대하였습니다. 처음
에는 욕도 많이 먹었습니다. 품이 너무 더니 모를 심으면서도 밥 팔
아 죽 사먹겠다고 비웃기도 했지요. 하지만 가을에 가서 소출을 보
니 산종보다 급이 더 났지요, 그제야 농민들은 수긍을 하고 새 농법
이 차츰 접수되기 시작했습니다. 몇십년 굳어진 습관을 고치기란 쉬
운 일이 아니지요.
▮보람찬 생산대 노동단련과 말 사러 간 모험기
  솔직히 말해서 6년간의 농촌 노동단련이 저의 인생을 정립하고 운
명을 바꾸어 놓은 좋은 계가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가 
후에 대학을 갈 수 있은 것도 그와 갈라 놓을 수 없지요. 
기실 농촌에서 벼농사 한 가지만으로는 수입을 그렇게 울릴 수 없지
요. 저는 다종 경영에 많은 힘을 기울였습니다. 다른 생산대에서는 
벼 집을 그대로 팔았지만 우리 생산대에서는 새끼를 꼬아서 팔았고 
다다미, 섬을 역어서 팔았습니다. 그 때 상점에 새끼 꼬는 기계는 있
었지만 다다미와 섬을 짜는 기계는 없었습니다. 하여 우리는 자체의 
힘으로 다다미와 섬 짜는 자동기계를 만들어 수익을 몇배나 올렸지
요. 
  그리고 우리는 동(구리)조물업도 하여 많은 득을 봤습니다. 우리 
치치하얼시는 중공업도시여서 큰 공장들이 많아요. 중국의 첫 1만 2
천 톤 짜리 수압기도 우리 시에 있습니다. 그에는 공장에서 조물을 
하다 튀여 나온 철물이나 구리들이 많았는데 우리는 공장과 연계하
여 그 재를 실어다가 철물이나 동을 가려 낸 후 공장의 수요에 따라 
제3장  문화대혁명과 반혁명분자로서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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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광로에 녹여서 반입하면 큰돈벌이가 되죠. 물론 높은 기술이 필요
하지만 한창 더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생산대장일 뿐 아니라 촌의 청년단 총서기 사업을 맡았
고 문예선전대 대장직까지 겸하여 밤낮 바삐 보내야 했죠. 낮에는 
생산대의 일을 해야 하고 공사나 촌의 회의에 다녀야죠, 밤에는 청
년들을 조직하여 모택동 저작을 학습하고 토론해야죠, 또 밤 늦게까
지 악대훈련과 선전대의 문예프로를 작성하고 지도해야 하고, 하여
간 눈코 뜰 새 없이 돌아쳤지만 힘든 줄을 몰랐습니다. 그 만큼 성
과도 뚜렷했습니다. 우리 마을의 문예선전대가 구를 대표하여 전 시 
문예경연에 참가하여 많은 상장을 타온 것은 말 할 것도 없거니와 
그 당시 전 중국에 훙등찌(红灯记)를 비롯한 문예종목이 8개 뿐일때 
우리 촌에서는 저가 조선농촌에 농민들은 경극(京剧)을 알아 듣지 
못한다고 우리말 무대 연극으로 만들어 출연을 하였는데 절찬을 받
은 것은 물론 주변에 명성촌에 순회공연까지 갔습니다. 
  그 당시 인기가 좋아 구의 문화관 쇠(薛)관장이 국가의 정식 간
부 편제를 가지고 와서 문화관으로 취직하라고 몇 번이나 강권했지
만 왜서 인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어요. 농촌에 같이 일하던 내막을 
아는 몇 동료들은 저를 보고 머저리, 바보라고 했어요. 바보니깐 바
보같은 모험도 경력도 있었습니다. 
  1973년 가을, 100여 헥타르 면적 논판의 벼가 익어 가는데 생산
의 운수가 문제였어요. 그 때 북방 농촌에서 운수는 말차로 합니
다. 운수차가 적어도 6대가 되여야 되겠는데 소차까지 하여 겨우 4
대 , 말은 3마리를 메워야 나락 실은 차를 끌 수 있지요. 돈 3000원
을 준비하여 한마리라도 사자고 작심하였는데 그때는 당지에서 말 
한 마리 값밖에 안됩니다. 그럴 지음 한 마차부가 어디에서 주어 들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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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는지 내몽골에 가게 되면 말 한 마리에 5-6백 원밖에 안 한다고. 
그래서 그곳에 가서 사기로 작심하였는데 감히 나서는 사람이 없었
어요. 말도 모르고 말도 탈줄 모르고 위험하다고 해서,제가 가야죠. 
그런데 소문이 나서 다른 생산대에서도 말을 사겠다고 따라 나섰어
요. 
  그래서 제4대의 총각 배봉수씨, 촌의 마차몰이 꾼 이항구씨, 그리
고 부근 마을 따훌족 쵸씨라고 말을 잘 고를줄 안다고 통역삼아 그
를 데리고 갔어요. 따훌족말은 몽고말과 70-80%가 통합니다. 기차
를 타고 치치하얼에서 하이라얼까지, 하이라얼 식품회사에서 양씨라
는 기술원을 또 길 안내겸, 통역으로, 같은 몽골말이지만 지역마다 
차이가 많아 못 알아 들을 처형이니까요. 거기에서 차를 타고 ,차에
서 내려 말을 타고 나흘 째 만에 외몽고와 인접한 신바후얼줘치(新
巴呼尔左旗)란 곳 우숴무 경내에 갔어요. 숴무란 몽고말로 원래는 
동내라고 하는데 지금은 공사(公社)라고 합니다. 
  가고 보니 이런 곳에서도 사람이 살 수 있을까 할 정도로 황량했
지요. 초원이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주위에 몽고뽀 두개만 달랑, 그 
외는 말과 양떼 뿐. 한 몽고족 대장과 함께 6명이 양 한 마리를 통
채로 삶아 밤이 새도록 술을 마시고 나서 아침에 몽고뽀를 나서 보
니 벌써 수 백마리의 말을 몰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술자리에
서 가격은 이미 다 정해진 것이기에 고르면 되지요. 우리는 말을 잡
을 엄두도 못내죠. 다 야생말이 되여서 그들이 잡아 주지 않으면 그
대로 잡아가라 해도 안됩니다. 몽고족 기마수들이 토마깐(套马杆)가
지고 날파람나게 야생말을 정복하는 그 장면은 이전에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지요. 우리가 타고 갈 길을 들인 말 4마리와 야생
말 16마리, 말 20마리를 사서 놓았지만 집에까지의 운수가 문제 되
제3장  문화대혁명과 반혁명분자로서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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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지요. 유일한 방법은 몰고 가는 것이에요. 하이라얼(海拉尔)부터 
치치하얼 까지는 철길이 있지만 철로운수 방식을 택할 수 없었어요. 
경비도 문제지만 더 관건적인 것은 기차에 실으려면 국가의 검역증
이 있어야 해요. 그 당시 검역을 할려면 하얼빈에서 와야 하는데 짧
은 시간 내에 불가능하죠. 그 뿐 아니라 숴무에서 하아러얼까지도 
말을 몰고 갈려면 또 몇 일이 걸려야 하고, 당지의 사람을 찾아서 
몰고 가면 그 돈도 적지 않지요.
  최후의 결론은 우리가 몰고 대흥안령을 넘어 집에 가는 것. 문제
는 같이 가야 할 다른 두 분은 말을 탈줄 모리지요. 저는 어릴 때 
몽고에서 자랐기에 말에 대해서 잘 알고 있기에 큰 문제가 안 되고 
이씨란 평생을 마차를 몰았기에 아무런 애로가 없죠. 해서 몇 일 간
은 전문 말 타는 연습을 했습니다. 그리고 가두어 놓은 말은 굼기기 
시작했습니다. 몽고인들의 말에 재대로 먹여 놓으면 갈 때 말을 잘 
안 듣는다고, 너희들의 재간으로는 말을 후려잡지 못한다고. 와중에 
우서운 일도. 몽고인들과 매일 술을 마셔야 하는데 그들은 매일 말
을 타고 가서 사다 나르죠. 
  올 때 쯤 되어서 우리도 인사로 술 대접하겠다고 저하고 이 씨, 
배 씨 셋이서 몽고인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말을 타고 술 사러 떠났
어요. 웬걸, 몽고인들은 고작해야 한 둬 시간이면 되는 것을 우리는 
아침에 떠나서 해가 질 무렵에야 목적지에 돌아 왔어요. 남아 있던 
사람들은 길을 잘 못 들었는가 싶어 마중나와 있었어요. 몽고인들은 
이런 급하게 해야 할 일이 있을 때는 말 무리에 가서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는 말을 골라서 그 먼길을 단숨에 달려 옵니다. 그렇게 타고 
와서는 든든한 장 때에 몇일 굶겼다고 말 무리에 풀어 두는데 그 이
듬해에 가면 안장띠를 둘렀든 자리에 털이 달아 없어진 자리에 흰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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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이 돋아나요. 그래서 급한 일로 말을 고를 때 말 무리에 가서 배 
밑을 보고 힌 털이 난 말은 고르지를 안아요. 한 물이 갔기에 잘 뛰
지 못한다고, 그르면 그 말은 죽을 때 타는 사람이 없지요. 왜 장대
에 매여 두는가? 금방 그렇게 장시간 달려온 말에 풀을 먹이든가 물
을 먹이면 그 자리에서 즉사한답니다. 적어도 3일은 굶겨야 한다 해
요. 그 곳에서 경험한, 친절을 보인다고 이 몸의 찌그기로 엽초담배 
종이에 발라 준다든가, 나이차(奶茶)를 혀로 핥은 그룻에 부어 권하
든가, 시혼제(試婚制)의 풍속으로 잠자리 들기… 이런 세절은 줄여야
지요.
  길 떠날 준비로 양가죽 옷을 하나씩 챙겼어요. 제는 당지의 대장
이 선물 한 것인데 햇양 6마리의 가죽이라야 옷 한 벌이 된다고 합
니다. 잠을 잘 때 깔고 덮고 해야 하니까 대단히 큰 것이지요. 그 뿐 
아니라 저는 그들이 가정에서 사양하는 젖소까지 한 마리 선물 받았
으나 몰고 올 수가 없어 아쉬웠지만 포기 했어요. 매 사람이 토마깐
까지 하나씩, 우리에게는 필요외의 소장이지만 그것을 들고 다니지 
않으면 말들이 업신여기고 말을 안 듣는다고 하기에. 그리고 말들을 
몇 마리씩 한조로 가죽 끈으로 달아 놓았습니다. 몽고인들은 그대로 
풀어 놓고 몰고 오련만 우리 재간으로는 엄두도 못 내죠. 떠나는 날 
목민들이 몇 십리 까지 따라 오면서 전송했어요. 물론 말을 타고 달
렸지요. 그들이 가르쳐 준대로 첫 날에 수 백리를 달렸습니다. 힘이 
진해야 말들이 말을 듣는다고 하기에. 대흥안령의 비탈까지는 몇 일 
이면 될 줄 알았는데 초원에는 강의 상류나 습지가 되여 말을 몰고 
건널 수 없기에 많이 돌아야 해요. 첫 날에는 매우 순리로웠지요. 그
런데 이튼 날 일어 나보니 새끼를 밴 8마리 암말이 몽땅 낙태를 했
어요. 가슴이 아파도 할 수 없는 일이지요. 하루 종일 달렸으니깐요. 
제3장  문화대혁명과 반혁명분자로서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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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흘 째 되는 날 일이 생겼어요. 자그마한 강이 있기에 말 물도 
먹이고 우리도 점심을 먹자고 밥 보따리를 풀었어요. 부지런하게 쵸
씨란 길 안내원이 물 뜨러 간다고 말 옆을 지나는데 말의 오른쪽 편
으로 가다나니 말이 가타부타 없이 앞발을 들어 그 분의 어깨를 내
리쳤어요. 그 자리에서 꼬그라 졌는데 가 보니 어깨쪽 팔이 빠져 탈
골 됐어요. 죽는다고 고함을 치지요. 사람이 오른 쪽으로 접근하면서 
허리를 약간 굽히면서 지나가야 하는데 반대 방향으로 같으니 적으
로 봤겠죠. 말들 앞발에 가족 끈을 맬는 필히 오른쪽으로 접근하여 
발통을 만져도 괜찮거든요.
  주변 수백리 안에 사람 그림자라곤 볼 수 없는 대서 이런 봉변을 
당했으니 황당하죠. 다른 두 분에게 보살피라 하고 말을 타고 목적
지도 없이 사람을 찾아 무작정 달렸어요. 몇 시간 후에 한 목민을 
만나서 손짓 발짓 해가며 그 분을 모시고 왔을 때는 밤중이 됐어요. 
우등불을 밝혀 놓고 처치를 했지요. 마침 그 목민은 순 몽고인이여
서 다른 목민과 같이 탈골된 뼈를 맞출 줄 알았어요. 허벅지 만큼 
부은 팔을 우리 몇이서 붙들고 그 분이 어떻게 하니 맞추어 넣었어
요. 쵸씨는 황소 같은 울음을 터졌지요. 이튼 날 아침에 일어나서 다 
들 하는 말이, 길 안내가 저렇게 되었으니 말들을 원래 곳으로 몰고
가서 물리고 쵸씨를 데리고 집으로 가자는 거에요. 저는 끝까지 우
겨서 말을 몰고 집에 가야 한다고 했지요. 우리는 돈 300원을 그 목
민에게 주면서 이 쵸씨를 하이라얼까지 실고 가서 집에 연계를 하여 
사람들이 와서 데려 가기로 약속을 하고 또 길을 떴습니다. 그 목민
의 말에 의하면 하이라얼까지 따구루처(大轱辘车)로 밤낮으로 사흘
을 가야 된다고 했어요. 우리는 그 목민만 믿고 그 쵸씨를 맡기고 
떠났습니다. 몇 일후에 대흥안령에 들어서기 전에 몇 호가 모여있는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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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도착하여 양고기, 소고기를 싸서 삶고, 밀기루를 사서 떡을 
만들었죠. 초원에서는 인가가 없어도 몽고뽀만 있으면 물이나 먹을 
것이 걱정 없지만, 초원에 목민들은 방목을 떠나도 길손들을 위하여 
먹을 것을 챙겨 놓지요. 하지만 이제 산속에 들게 되면 인가는 물론 
물과 먹을 것이 제일 큰 문제여서 그것부터 챙겨야죠. 입산하여 첫 
몇 일은 구렁지대여서 순조로웠어요. 
  그런데 거기서 또 생각지 않은 일이 생겼죠. 하루는 달빛을 빌어 
잠자리를 준비하는데 배씨가 와서 말들이 다 일어났다고 하는 거예
요. 저도 온 몸의 피가 다 머리로 치솟아 올라오는 것 같았어요. 머
리 속이 그대로 공백이 된 거에요. 밖에 나가 보니 우리가 타고 온 
길들인 4마리 말만 있고 다른 말들은 흔적이 없어요. 물어 보니 배
씨가 하는 말이 들에 쳐서 말려 놓은 풀이 있기에 먹이를 준다고 한 
아름을 안고 갔는데 달빛 그림자에 말들이 놀라서 튀어 나오는  것
이에요. 원래 초원에서 말들은 선 풀만 뜯어 먹지 베어 놓은 것은 
먹지 않습니다. 너희들은 이곳에 있으라고 말을 남기고는 말을 타고 
쏜살 같이 왔던 방향으로 찾아 떠났습니다. 후에 보니 그 두 분도 
따라 왔어요. 그리로 달려 갈 수 있는 것이 몽고인들의 말에 의하면 
말들이 아무리 멀리 가서도 갔던 길을 찾아서 원래의 살던 고향으로 
온다고 했어요. 그들의 소개에 의하면 십여년 전에 흑용강의 빠이쵄
(拜泉)란 지방에서 이곳에 와서 말을 사 갔는데 이듬해 봄에 말들
이 그까지 찾아 왔더래요. 후에 그 곳에서 사람들이 다시 찾아 와서 
주기는 했지만 초원사람들의 분부대로 초원의 흙을 좀 가져다 두었
다가 봄이 되면 그 흙을 코에 대여 냄새를 맛게 하면 고향생각을 안
한다고 한말을 재미로 들었는데, 하여 우리도 흙을 좀 챙겨 왔죠. 이
러나 자러나 왔든 길을 다시 찾아 달려갔습니다. 
제3장  문화대혁명과 반혁명분자로서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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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를 달렸는지 가다 나니 저 멀리 어렴풋이 말들이 보였어요. 
말들이 며칠간 배를 굶어서 풀을 뜯어 먹고 있지요. 좋아서 미칠 것 
같았지요. 처음에는 모르고 말에서 내려 다가서니 옆에 붙지도 못하
게 피하지요. 그래서 그 두 사람은 기마 옆에 숨겨 두고 저 혼자서 
말의 배 옆에 붙어서 다른 쪽으로 접근하여 고삐를 잡았죠. 일이 되
려니 말에 다들 고삐가 있어 쉽게 잡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저절
로 흥타령이 흘어 나왔지요. 와서 물건을 점검하다 치명적인 한 가
지 일을 발견, 말들 위에 실었든 먹거리가 다 뿌리쳐 나가고 없었어
요. 원래는 약 보름으로 생각하고 준비를 했는데 일 주일양도 되지 
않게 남았어요. 낙망에 빠졌어요. 다른 말은 버리고 탄 말만 가지고 
산을 넘어보자. 길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하니 사람 목숨만은 건지
자는 거죠. 허허벌판, 달빛을 타고 노래를 부르면서 두 분을 달랬어
요. 
  그때 배씨는 태래현 서광촌의 남씨라는 처녀와 약혼한 사이였고 
이씨는 결혼을 하여 아이 둘을 둔 아버지이지요, 해서 제가 말하기
를 고생스럽더라도 말을 집에 까지 몰고 가게 되면 배씨는 동내 영
웅이 되는데 약혼녀가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하겠냐, 이씨보고는 
형님 참고 집에까지 가 봅시다. 눈 새까만 자식, 허리 잘록 마누라가 
기다리고 있는데 힘을 내야죠. 그래서 길을 계속 재촉 할 수 있었는
데. 정작 흥안령심산에 들어서니 고생이라기보다 생존의 위협을  받
게 되였습니다. 그해의 8월 보름날이 양력으로 10월1일, 중국의 국
경절이기에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런데 흥안령에 눈이 내렸어요. 미
처 생각지 못한 상황이지요. 산길에 가기가 원래 힘든데 눈이 내리
니 길은 더 험하고 더 큰 일은 풀이 눈에 묻혀 말 먹이가 없어졌어
요. 초원에서는 하루에 몇 백리씩 달렸는데 산에 서는 하루에 몇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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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도 못가지요. 왜서인가 하면 돌 산에 말발굽이 달아서 피가 나니 
말들이 걷지를 못해요. 앞에서 당기고 뒤에서 밀고 하여도 얼마 가
지를 못해요. 그런데 말들이 먹이는 안 먹이더라도 물은 먹여야 하
는데 물을 한번 먹이려면 한 나절이 걸려요. 산 속에 수원이 많지 
않는데다 강물은 저 골밑에 있기에 말들에게 물이 먹이려면 그 가파
른 비탈을 오르내려야 하지요. 사람도 다니기 바쁜 그 길을 말들을 
몰아서 가야 하니 고생은 말 할 것도 없고 완전히 생에 대한 본능으
로 움직이는 샘이지요. 말들이 물 먹는 그 기회에 우리도 간단히 요
기를 하죠. 하루에 한번 먹는 밥도 배를 채울 수 없었어요. 땅땅 굳
어진 만투(馒头)에 서금에 절인 통무우를 칼로 조심스럽게, 혹시 많
이 베여 내여 남의 눈치를 살까 싶어 조심하면서. 
  몇 일이 지나니 사람도 말들도 여위여 볼품이 없이 되였지요. 눈 
위에 다 양가죽 옷을 깔고 누우니 그들도 그 때는 남정이라지만 눈
물을 흘렸어요. 지금 까지는 물론 몽땅 한대서 잦지만 지금처럼 눈
위에서 자 본 적은 없었지요. 단도직입적으로 이제는 다른 고려 말
고 말들을 몽땅 버리고 몸만 빼서 살고 보자는 것이지요. 말은 집체
의 재산이니 죽어도 버려서는 안 된다고 제가 우겼지만 기실은 저도 
동요가 없는 것은 아니에요. 아직까지는 막다른 골목에 까지 오지 
않았다는 그 짐작하나지요. 그래서 밤에는 하늘의 별로서 방향을 찾
고 낮에는 나무의 잎사귀 자람, 그것도 안 될 때는 벌레구멍을 찾아
서라도 방향을 짐작하고 죽기 내기로 산을 넘었어요. 집을 떠나서 
벌써 45일, 후에 안 일이지만 동내에서는 난장이 났지요. 다들 산에
서 잘 못된 것으로 짐작 했죠, 찾아서 떠나려 해도 어딘 줄도 모르
거니와, 그 때는 통신이라는게 없어 서로가 연락이 두절되었지요. 
  그의 맥을 버려두고는 관두에 산을 벗으나 인가를 만나게 되였어
제3장  문화대혁명과 반혁명분자로서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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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살아났죠. 그런대 사람이랑 말들이 다 허기에 빠졌어요. 내몽골 
짜란툰(扎兰屯)까지 와서는 한 발자국도 갈 수 없었어요. 말 한 마
리는 여위여서 일어서지도 못해요. 여기에 기차가 있으니 기차로 운
수 할 것을 약정하고 무작정 역에 역장을 찾아 가서 사정을 했어요. 
돈도 한 푼 없다, 집에까지 실어 주게 되면 그때 가서 곱으로 더 운
비를 주겠다고, 갈 때 저는 가방에 있든 군복을 찾아 내여 알지도 
모르는 당지 사람한테서 개를 한 마리 바꾸어 식당을 빌려 삶아 놓
고 역장을 막무가내로 끌고 왔어요. 문화혁명때 군복은 누구나 선호
하는데다 제 것은 작은 고무부가 입다가 준 것이어서 주머니가 4개 
달린 군관복이어서 인기가 더 좋았죠. 좋은 소리를 다 했어요. 그 때
는 차 바곤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 보다 힘들었어요. 그 분이 하이
라얼을 거쳐 하얼빈 철로국과 연계를 달아 이튿날에 그 분들 도움으
로 넘어져 있는 말까지 몽땅 기차 바닥에 실어 치치하얼까지 갔어
요. 
  죽은 말 고기를 안주로 성공의 축배를 올렸지요. 사람들이 살아 
왔다고 욱 몰려 왔다가 몸에 나는 냄새에 다 저 만큼 피해 가서 올
렸어요. 양고기의 노린내, 몸에 까지 베인데다 지독한 잡냄새, 재가 
배씨의 아버님께 인사를 갔더니 노인이 여위여서 몰라보게 되였어
요. 아들의 생사로 마음을 썩였겠죠. 마을의 착한 마차몰이 꾼 이씨
는 그 이듬해에 기관염으로 세상을 떴어요.. 지금 그 배 씨는 한국에
서 일 하고 있습니다. 팔이 빠졌든 그 쵸 씨는 우리가 살아서 돌아 
왔다는 말을 듣고 팔을 목에 걸고 병원을 뛰쳐나와 우리를 보러 왔
어요. 거기에 전대장이 있기에 꼭 살아 올 줄 알았다 하면서 엉엉 
울음을 터뜨렸어요. 그 바람에 옆에 사람들 까지 눈시울을 적셨네요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78
 
제3장  문화대혁명과 반혁명분자로서의 경험 
 
79
<보충자료>
사진으로 보는 문화대혁명 
문화대혁명 시기 반혁명분자에 대한 타파와 비판하는 사진
자료출처 : 전창국 개인 수집 사진 
제4장 중앙민족대학과 치치하얼시 신문기자 
시절
늦깎이로서 중앙민족대학 입학
대학시절 비판적 글쓰기와 리더십
치치하얼시 신문사 기자 시절
중앙민족대학 입학 (1975년: 정중앙 전창국)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82
 
▮늦깎이로서 중앙민족대학 입학  
한 6년 동안 농촌에서 생산대로 일했어요. 감독 생활을 하면서 일
을 했는데 제가 워낙 일을 잘하고 해놓으니까, 촌에 촌민들이 대학
교에 보낼 때마다 저를 추천했지만 추천할 때마다 역사적으로 오점
이 있어서 위에서 비준을 안 해요.
내가 대학에 들어간 75년도에는 대학 시험을 치는 게 아니고, 추
천하는 제도였어요. 전 사실 시험 치는 해에 저도 1등 했어요.  72
년도에 대학시험을 쳤을 때는 저는 치치하얼대학에 붙었습니다.  그
런데 같이 시험 치러 왔던 그, 장 씨라고 그, 이름 유명한 사람이 있
는데, 모주석께 편지를 써가지고, ‘아, 우리는 혁명하느라 공부도 못 
했는데 시험을 치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가 붙느냐?’ 해서 저는 치치
하얼 대학교에 붙었는데 학교가 마음에 안 들어 통지서 와도, 안 갔
습니다. 
 근데 어떻게 어느 하다, 제가 가던 75년도인가, 저 북경 중앙 민족
대학에서 조선족 분이 우리 지방에 초생허러 오셨어요. 정치계에 있
는 김 씨라는 조선 분이 오셔가지고 성에 가니까, 흑룡강 교육청
서 치치하얼 가면 치치하얼에 좋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 조선 분
이 되니까 그 때는 학생이 뭐, 반혁명 되고 적지 않아요? 기본적으
로 없잖아요. 그래서 그 분이 와서 듣고는 정황을 알고자 촌민들 모
아놓고 의견을 들어 봤지요. ‘이 분이 어떤가?’  빈하중농으로 구성
된 촌민 대표들이 울면서 ‘이 좋은 아를 반혁명인가? 학교 보내 달
라.’ 그 교수님이 학교에 이야기 해가지고 그래서, 28살 때 학교를 
제4장 중앙민족대학과 치치하얼시 신문기자 시절
 
83
갔어요. 그때 국가 규정이 최고로 24살 인데 특별히 비준해서, 저, 
28살에 학교에 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우리 촌민들이 어릴 때부터 고생하면서 컸는데 이런 사람을 
대학에 안 보내게 되면 누구를 보내느냐. 그때는 국가에서 규정이 
24살을 초과하지 못합니다. 국가 규정이 그랬어요. 근데 그때는 저
는 벌써 28살이였어요. 우리 중국에서는 20살이 되면 다 장가를 갑
니다. 그래서 저는 28살까지 혼사가 생겼지만 저는 절대 동의 안했
어요. 솔직히 말하면 그때 대장으로 있고 모택동 저작을 학습을 잘
해서 강연도 다니고 대단했죠. 어느 한 해는 시 모주석 저작 적극분
자 대표대회에 가는데 전 구에 몇이 안되는데 우리 마을에서 저와 
저의 아버지가 가게 되였어요. 
농촌에서 예술단으로 활동 (1974년: 맨뒤쪽 우측 2번째 전창국)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84
 
중앙민족대학교 다닐 때 동창이 보낸 편지(1975년)
  
  아버지는 구의 교사 대표로 저는 농민대표로. 그러고 또 구와 시
를 다니며 문예연출을 하게 되면 시의 큰 극장에서 각 구의 연출단
들이 륜번으로 하루씩 바꿔서 하는데 다른 예술단이 할 때는 오는 
사람이 많이 없죠. 우리 촌예술단이 가서 하게 되면 그 극장에 꽉 
차도록 그만큼 그렇게 인기가 있었어요.
  그러니까 농민들이 보내자, 보내자 그래가지고 그렇게 됐는데 가 
보니까 24살인데 28살이 들으니까 국가의 규정이 안 되서 너는 못
간다 그래서 저는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초생을 오셨든 분이 조선분
이에요 김씨. 그분이 너무나 아쉽게 생각했는지 그때는 농촌에 전화
가 없었어요. 그래서 시교육국에 가서 제가 있는 초생반공실에서 북
제4장 중앙민족대학과 치치하얼시 신문기자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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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에 장거리 전화로 하는데 마침 중앙민족학원에 주요 원장들이 회
의를 하고 있었어요. 전화로 한참 중국말로 회보를 해요. 그때 원장
확대회의에서 가결을 했어요. 받자고 말입니다. 안 그러면 갈 자격도 
안됐는데 특수하게 삼사비준을 받아가 갔어요
  앞에서 말한 그 장씨란 분이 그해 시험을 치고 보니 점수가  0점
이었어요, 후에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빗대고 <공백지선생>이라고 
별명을 달기도 했지요. 그는 말하기를 지금 시험은 옛날 수정주의 
교육방식을 회복하는거다. 시험치지 않고 추천해서 대학가야 한다. 
그래서 중국의 특수한 공농병학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은 공인, 
농은 농민, 병은 군대요, 여기서 우수한 사람을 뽑아서 보내야 한다.
그래서 저는 농촌에 있으니까 농촌에 농민 신분으로 추천을 받아가 
대학에 갔습니다. 
  정든 고향, 고마운 생산대 시원들과 이별하기가 너무나 아쉬웠어
요. 만일 촌민들의 추천, 빈하중농 대표들의 한결 같은 지지와 협조
가 없었다면 제가 어떻게 농촌을 떠날 수 있었겠어요. 제가 사심없
이 생산대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일을 한만큼 그대로 보상을 받았다
고 생각합니다. 혹시 여름 점심 휴식 때 제가 곤해서 잠이 들면 아
주머니들이 자지도 아니하면서 옆에서 파리를 쫓아주었어요, 잠을 
못 잘 가봐, 그리고는 일 시간이 되여 일터로 가면서도 깨우지를 않
습니다. 이런 분들을 두고 간다는 것이 저는 양심적으로 매우 죄스
러웠어요.
  다른 사람이 대장을 할 때는 집을 짓는다 하는데 저는 대학에 갈 
때 집은 커녕 외지에 생산대 일보려 다니다가 남겨 놓은 빚도 못 갚
고 대학에 갔습니다. 이듬해 방학에 마을에 왔을 때 이 사정을 안 
사원들이 요구하여 그 빚을 면제 해 주었어요.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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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시절 비판적 글쓰기와 리더십  
  중문학부에 갔습니다. 중국어 문학하부에 갔는데 가자마자 학생회 
회장이 됐습니다. 나이가 제일 많잖아요. 그래서 대학교 학생총회 선
전부부장까지 겸했급니다. 고등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온 건 저 하나
뿐이에요. 중힉도 재대로 졸업 못하고 온 학생도 있고 일부 소수민
족 학생은 소학도 졸업 못 한 학생이 있어요.
  그래서 나이도 많지 그런데다가 그때 등소평이 금방 올라왔을땐데 
그 운동을 하느라고 등소평을 비판하는 운동을 하느라고 공부도 안
하고 어디를 갔는가하면 청화대하고 북경대학에 갔댔어요. 가가 뭘 
보는가 하게 되면 학생들을 조직해서 대자보로 된 비판문장, 보고 
소위 말하는 계급의식을 높이기 위한 사회견학활동이지요. 보고 화
서는 비판문장을 쓰는 거예요. 그때는 누구를 비판하는가 하면은 등
소평을 비판합니다. 근데 북경대학에서 대자보를 보는데 그, 청화대
학, 북경대학, 중앙만족학원 모두 한 구에 위치 해 있어요. 그래서 
청화대학 먼저가보고 북경대학에서 그 대자보를 보는데 보다가 그 
북경대학 청화대학 다 봤지만 그렇게 유명한 대학이 쓴 문장답지 않
다고. 내가 입속말로 중얼거렸지요. 
  근데 그 말이 누가 들었냐면 그 뒤에 강 씨라고 우리 중문학부에 
당위 서기가 들었습니다. 내 그땐 이미 회장으로 됐을 땐데. 학부나 
대학 대학의 령도들은 다 익숙하고 안면이 있어요. 강씨란  당위서
기가 하는 말씀이 아 그럼 가서 우리도 청화대학, 북경대학 못지 않
제4장 중앙민족대학과 치치하얼시 신문기자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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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비판문장을 네가 하나 쓰라. 그래서 와 가지고 그 이튼 날 오전 
내내 썼어요. 그래서 재가 문장을 쓰고 붓글씨 쓰는 학생들을 열 몇
이 불러가지고 오전 과당수업 만료 종이 울리기 전까지  몇 십장을 
써가지고 식당으로 가는 길옆에 쫙 붙였습니다. 제가 쓴 그 문장을. 
그 제목이 뭔가 하게 되면 우리말로 번역하게 되면, 이름은 등소평
이라 안했지만 중국이 자본주의 길로 가는 것이 왜 이렇게 쾌속이냐 
입니다. 그때 중국은 자본주의를 못가도록 막아야하는 땐데 등소평 
딱 올라 올 쯤에는 개방이라고 하기는 이르고 하지만 시세가 좀 바
뀌어 지고 있을 때였어요. 그러면 모택동이 원래 주장했던 그 공산
주의 학설하고는 좀 멀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이것이 잘못됐
다는 걸  제 딴에는 논리적 풀어서 썼는데 학생들 밥 먹으러 가다 
그 대자보를 보느라  길이 막혀 식당에 가지를 못합니다. 길이 꽉차
가지고, 그런데 그게 문제가 생겼지요. 
 이튿날 아침에 중앙방송국에 민족학원에 나쁜 바람이 분다고 방송
으로 나왔어요. 그때는 중국에  문화혁명 전반과정에 학생운동에 즈
음하여 통속적으로 <량쇼이왠>(两校一院)아란 말이 있었어요. 무슨 
말인가 하게 되면은 량쇼는 청화대학교, 북경대학 있고 이왠이라는 
것은 민족학원이었어요. 그래서 당서기가 얼굴이 새까매졌습니다. 이
건 내하고는 관계없으니까 네가 썼다 해서 내가 쓰라해서 썼다고 말
하지 말라했습니다. 아 그건 걱정마세요, 제가 그럼 반혁명모자까지 
쓴 사람이 그걸 겁내겠어요. 그래서 그건 괜찮은데 그래 가지고 얼
마 안 있어서 천안문 사건 알죠 학생운동. 그 사건 때 문제가 생겼
죠. 그런데 저는 그걸 모르고 있었는데 천안문 사건 때 저를 천안문
에 못 가게 합니다. 가게 되면은 또 무슨 학교가 학교에 큰 죄를 가
지고 올까봐. 그래서 저는 못 갔어요. 그 대학교에 정치부에 있는 한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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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저한테 귀띔을 해줘요. 그 분도 조선분이에요. 그래도 저 민
족은 저 민족을 아끼는지 그 사람도 알거든요 너가 중학교 때도 반
동을 해가지고 타격을 받았는데 너가 대학교만 온 것도 대단한데 여
기 천안문 사건도 휩쓸려들게 되면 너는 졸업도 못하고 간다, 그러
니까 가지말라. 나는 못나가게 하니까 안 나갔는데 결국은 나갈래도 
나가지 못했어요. 그치만 제가 어떻게 가만히 있겠어요. 그 운동은 
주은래총리, 중국에서 제일 세계적으로 공인해주는 유일한 총리지 
않냐. 그래서 우리 연합국에서도  추모한다고 기를 낮추었잖아요.
  어떤 사람들은 왜 다른 나라의 총리나 총통이 연합국에서는 기를 
안낮추는데 이번만은 기를 절반으로 낮췄느냐 추모를 하기 위해서. 
그래서 연합국이 그때는 이렇게 답변을 했지요. 세상 뜰 때 은행에 
돈 한 푼 없이 외국에 저축하나 없다면 너 죽을 때 이렇게 추모를 
해주겠다고 ,이렇게 청렴한 분이였어요. 그래서 국민들이 그 사람이 
세상을 떠다나니까 그 사람을 추모해서 생긴 것이 천안문 사건의 시
조입니다. 
  저가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그래서 지킨다는 것을 알았으니깐 저
는 대문을 못나가기에 한밤중에 예술계에 찾아갔습니다. 제가 예술
계에 찾아간 것은 예술계에 예술을 하는 교원들의 다수가 조선 분들
이에요. 조선분들은 교육을 중시하다나니까 상대적으로 다른 민족들 
보다 공부를 많이 했으니까  대학초생이 회복되어 일찍이 학교에 왔
기에 졸업 후에 많은 사람들이 학교에 교원으로 취직을 했습니다. 
저보다 나이가 다 어려요. 저는 28살에 갔지만 그들은 이미 28 전에 
대학을 졸업하고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어요. 그래가 자는 걸 12
시에 가서 깨웠어요. 야 일어나, 일어나. 그런데 선생이라지만 전공
이 다르다 뿐이지 나이가 어리죠. 그래서 형님 형님하는데, 일어나, 
제4장 중앙민족대학과 치치하얼시 신문기자 시절
 
89
그러니까 왜 그래 한밤중에. 야, 지금 전 나라가 떠들썩하고 북경, 
청화대 아들은 밤낮으로 지금 천안문에 서 있는데 너내들은 잠이 뭐
야. 그럼 어떻해 형님 말해요. 그래 일어나 뭘 써야지. 그래서 한밤
중에 미술하던 사람들이니까 붓이나 쓰는 거는 많은데 천막이 없지 
않아요. 어디다 쓰겠어요. 그래서 예당에 강연하는 예당에 면막천이, 
이런 색깔 이거보다 진붉은 그걸 뜯어가지고 플랜카드를 만들었습니
다. 거기다가 흰 광고분으로 뭐라고 썼는가하면 경애하는 주은래 총
리 전국의 각 민족 인민은 당신을 그립니다. 이런 글을 쓰고 나니까 
한 두시가 됐어요. 그러니까 천안문까지 한 서너 시간은 걸어 가야
돼요. 이 사람들 가서 천안문 앞에다 그걸 기다랗게 해서 붙였죠. 저
는 붙이고 왔다고만 알고 있었지요. 그런데 얼마후 천안문 사건이 
위법행위라 해서 관상용으로 기록편 영화를 찍었는데 기록편이 영화
에서 보니까 그게 제일 선명하게 나타나가 있어요. 지금도 이제는 
학교에서도 알겁니다. 작년 재작년까지만 해도 누가 했는지 몰랐어
요. 그때는 감히 말도 못하고 후에는 다시 평정이 되여도 다 흩어졌
기에 
  새삼스럽게 밝히는 사람도 없었어요. 지금 와서는 평전되고 그 사
건이 바로잡히다보니까 그게 이제 좋은 일로 됐어요. 그래서 작년 
재작년에 그 중문학부회 건립 경축대회를 하는데 치치하얼 시장하고 
저한테 청첩이 왔어요. 그때 치치하얼 시장이 한족인데 중앙민족
대학교 저의 후배 졸업생이에요. 시장이야 학부에서 자랑할만한 인
물이고 저야 뭐 아무것도 아닌 평민인데 학부에 빛이 된다고 생각했
는지 저를 꼽은 것 같아요. 그때는 아직 <사회복지학계론>이 출판
사에 교부만 되고 아직 출판전인데도 말입니다. 이제 세상이 바뀌었
으니까 그게 이제 좋은 일로 되어 있습니다.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90
 
북경이화원 방문 
(1977년: 우측 첫번째 서있는 전창국 )
  그래서 대학교 공부하면서 그런 쪽으로도 역할을 하고 대학교가서
도 저는 사회활동이 너무 많아 공부를 못했습니다. 대학교 중국어문
학전공이 금방회복되여 교사가 너무 부족했어요. 기초 학과를 할 때 
제가 학생들을 가르쳤어요. 제가 공부는 못하고 그 사람들을 가르쳤
죠. 그때 소수민족으로 국가 요직에 있던 중앙위원을 학교에서 지정
하여 저보고 도우라 해서 한책상에 앉아서 공부도 했습니다만 ……
  북경이 되어서 우리 대학에 사회 활동 임무가 너무 많아요. 중요
한 명절은 물론, 평시에도 북경시에서 매일 외사 활동에 참가 할 서
람들을 요구해요. 이 모든 활동의 학생파견 일정을 대학학생회에서  
제4장 중앙민족대학과 치치하얼시 신문기자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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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학부로 임무를 하달합디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서로 갈려 하다
가 후에는 여간한 기념 활동에는 가지 않으려 합니다. 제가 참가한 
활동만 해도 국가 화국봉주석 접견, 미국총통, 독일총통, 모택동 주
석 기념관착공활동, 5.1 국제노둥절, 10.1국경절 국가연회, 소수민족
이 참석해야 할 활동에는 우리 대학에서 꼭 가야 하지요. 그 외에도 
저가 대학에 있을 때 10여년 동란 때 파손되었던 대학의 모든 익기
를 모두 다시 수리 하여 관악대를 건립하였고 무용대, 합창대를 조
직하여 전례없는 학생들의 과외 활동 고조를 일구고 북경의 무대에
도 올라가 현대 학생들의 풍모를 과시했지요. 그 당시 저는 학교의 
문화 환경을 조화 할 목적으로 아침 기상 종이 울리면 5호 건물에 
저의 숙소가 있는데 매일 악기를 가지고 나가 연주를 합니다. 트롬
펫, 색소폰, 바리톤, 스라이 등입니다. 그 때의 그 영향은 매우 크지
요. 몇 십년이 지난 지금도 동창들은 그 때의 학창시절을 회억하면
서 재일 재미있을 때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참 세상이 좋을라니까 두 가지 일이 생겼습니다. 하나는 
저가 중국에서 유명한 작가 루쉰, 문학을 하시는 분들은 아실 겁니
다. 중국에서 제일 유명한 세계적으로도 공인해주는 유명한 작간데 
여기 <아큐정전>라던가 <약>이라던가 그런 소설 쓴 분이에요.
 그 사람 아들이 중앙 방송국에 처장으로 있었습니다. 선전처에 처
장으로 있었는데 그분이 모택동에게 편지를 썼어요. 부친이 이미 세
상을 떴지만 부친 동시대에 분들이 곧 세상을 뜨니까 그분들이 세상
뜨기 전에 아버지 저작을 정돈해 달라. 그러니까 모택동이 그 보고
를 받아보고 기한 내에 완수하라고 지시를 내렸어요. 그래서 모택동 
지시가 되놓으니까 전국에 30개 대학교에 그걸 맡겼습니다. 단순히 
로신 편집부의 힘으로는 그 많은 양의 일을 해 내지를 못하지요. 주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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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천두슈(陳獨秀)로 중국의 사상가, 혁명가, 정치가. 베이징대학 문과대학장으로 
1917년 후스[胡適]와 함께 백화문(白話文)을 제창하는 한편, 유교사상을 비판하
는 글을 발표하였다. 1921년 중국공산당 제 1차 전국대회를 개최하고 중앙서기
에 피선되었다. 코민테른의 지시를 따라 중국국민당과 합작했으나 1927년 국공
합작이 깨지자 총서기직에서 축출 당했다.(두산백과 참조) 
요하게는 주해를 다시 달고 틀린 곳을 바로 잡고 하는 일입니다. 그
런데 북경에는 세 개 학교가 당첨되어서 북경대학하고 북경사범대학
하고 민족대학 우리대학이 됐는데 다른데서는 다 중문계 유명한 사
회학자들이나 인문 교수들이 가셨는데 우리는 교원이 없어서 제가 
가게 되었어요. 그게 얼마나 좋은 기회였는지 그래 가서 제가 그 한 
것은 몇 달밖에 되지 않지만 다른 학교에서 일 년 이년 공부한 거보
다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어요. 
  무엇인가 하게 되면 루쉰이 쓴  소설집 <방황> 우리 대학에서 
맡고, 잡문집은 북경대학에서 맡았고 북경사범대학교에서는 <양띠
수>(两地书)라고 로신이 서광평과의 오고 간 편지부분을 맡았지요. 
그래서 루쉰이 쓴 작품이 중국의 공산당을 건립한 진독수 제일서기
가 북경의 교수로 있을 때 모주석께서 그때 북경도서관에서 관리원
으로 일했었습니다. 그때 쓴 소설이었는데 루쉰이 그 작품을 중국의 
공산당건립자인 진독수2)가 꾸리는 맑스주의 첫 간행물 신청년(新青
年),중국말로 하면 새청년, 그 간행물에다가 루쉰이 작품을 발표
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몇 십년 지나다나니까 그 주회가 다 틀렸어
요. 발표했던 간행물도 이름이 틀리고 발표됐던 연대수나 심지어 중
요한 역사 사실마저도 많이 틀렸어요. 그래서 그걸 다시 바로 잡는 
일을 저가 맡았어요. 그래서 저는 북경도서관, 청화대학 도서관, 우
리 중앙민족대학도서관, 그다음에 도서관이란 도서관은 다 다니면서 
20년대부터 30년대까지 사료를 뒤지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북경도
제4장 중앙민족대학과 치치하얼시 신문기자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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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관에는 이미 그 없고요 어디가 제일 많은가 하면 북경도서관, 북
경대학 도서관하고 청화대학 도서관에 많았는데 제가 들어갔을 때는 
20년대 30년대 초기에 그 신문들이 잡지들이 이미 문화혁명때 건사
를 안 해 가지고 석어가지고 펼치지를 못할 정도였어요. 얼마나 가
슴 아픈 일이예요. 이건 역사의 기록인데, 사실 이 내막은 다른 사람
들은 알 수가 없어요, 보지를 못하니 깐요. 
  그 문화가 말살되고 해서 마침 제가 했던 거는 ‘새청년’ 그 잡지는 
좀 위에 놓여있어서 그걸 찾았어요. 그래서 보니까 다 틀렸어요. 원
래 출판했던 선집에 나왔던 주회가. 본문하고도 틀리고 그래서 저가 
그걸 다하고 다 탈고가 된 다음에 루쉰 선집 편집부에 넘겨주었습니
다 두껍게. 두껍게 넘겨주는데 이미 제가 졸업하고 나와가지고 그 
전집이 나왔는데 저한테로 몇 십권을 보냈다고 그래요 그 싹 다 기
념으로. 
  그런데 저는 중앙민족 우리 중문학부에다가 도서관에다 전증했습
니다. 내가 했다지만 기회를 주지 않으면 할 수가 없지 않아요. 그리
고, 소설부분의 주해를 단다고 하지만 다른 문장하고 관련된 것이 
많지요. 하여 K라는 인물 주해를 달려고 하니 도무지 출처를 찾을 
엄주가 나지 않지요. 하여 이 인물이 로쉰의 잡문에 자주 나와요. 할 
수없이 북경대학에서 잡문부문을 맡았기에 그리고 찾아 갔습니다. 
거기에서 생각 밖에 로신과 동시대 뿐만 아니라 로신과 딱 친구인 
찡춴도(姜川岛)란 교수님을 만났지요. 하지만 너무나 충격적이였지
요. 그 때 까지도 역사문제가 밝혀지지 않아 복직을 못하고 북경대
학 조습한 반지하실에서 혼자 그 과중한 일을 하고 있었어요. 그 분
은 전국적으로도 유일한 권위자이고 유명한 학지이니 그 외에는 북
경대학에서 그 일을 할 만한 사람을 찾을 수 없지요. 제가 로신편집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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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정식 소개신을 가지고 갔는데도 그 분은 경계를 하면서 질문을 
회피했어요. 저도 같은 무산계급독재의 대상이 된 경험이 있기에 그
의 조심성을 이해하고도 남지요. 하지만 그가 로쉰과 딱 친구였다는 
한 가지 만도 저는 꼭 그의 말문을 열기로 작심했어요. 3번 만에 끝
내 그와 로쉰과의 재미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때 제
가 재일 관심하는 로신과 제자인 쉬광핑(许广平)과의 사생연(师生
恋)까지 포함해서…… K란 인물에 대한 주해는 끝까지 비밀을 고수
하였지만 나로 말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후에 알려진 일이지
만 K란 후에 4임방의 한 인물이었어요. 하기에 탈고를 마치고 로신
선집 편집부에 갔을때 그 분들도 하는 말이 이 주해는 우리가 알아
서 처리한다고 얼버무려 넘기더라고요. 후에 제가 치치하얼시 교육
에서  근무당시 무심결에 제 대학시절  민족대학에서 저의 현대문
학과임이셨든 오 선생님이 중국 인민일보 재4면에 북경대학 강교수
의 서거를 추모하여 쓴 글을 보고 그 분이 세상을 하직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다음에 거기서 제가 또 제일 먼저 중국의 사회학의 창시자인 
한분이 계세요 중국분이. 그분을 만난 것이 저의 평생을 바꿔놨다고 
볼 수 있고 저가 사회복지학개론을 쓸 수 있던 동기가 아마 그때 생
긴 것 같아요. 그분은 모택동이 제일 지적했던 중국에서 제일 유명
한 그때 말하는 자상 지식분자의 대표인물이에요. 푸이쇼퉁(费孝通)
그 분이 중국의 사회학의 창시자인데 그분이 저가 군사훈련하는데 
찾아오셔서 그분이 내가 나이가 많으니까, 우리 그때 신입생 군사훈
련 할 때는 외성에 가서 실습을 했습니다 군사훈련. 진짜 중국에서 
유명한 39군 거기서 실습을 할 땐데 그분하고 한 침실에서 몇 달 
동안 뒹굴었어요. 그게 저가 사회학을 책을 만들게 된  게기가 되겠
제4장 중앙민족대학과 치치하얼시 신문기자 시절
 
95
고.   
중앙민족대학교 조선족 학생들
(1978년: 두번째줄 우측 두번째 전창국)
  그래서 그 다음에 저가 사업에 창간하고 부터는 대단히 순조로웠
습니다. 그런데 제가 희망하던 대로 다른 사람만큼 저 뭐 동창들 가
운데 벌써 장관급도 된 사람들 있거든요. 우리 그 예를 들면 중국의 
시진핑은 우리 동기에요. 그 사람은 청화대학에 출신인데 지금은 국
가 주석인 사람. 그 사람 저하고 동깁니다. 국가주석 류소기의 아들 
류원도 북경 사범대학역사학부 후기생이지요. 물론 국가 거물급의 
후예들과 비교하는 자체가 우스운 일이지만 도리는 이렇다는 말 입
니다. 그렇게 해도 되지만 우리는 무엇 때문에 같은 중국에 있는 중
국인이지만 왜 그만큼 발탁이 되지 않느냐 그 가운데는 솔직히 말하
자면 정치적 문제도 있겠지만 결국은 민족적인 문제가 많죠.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해요. 근거를 들겠습니다. 우리 중국에는 다 민족 국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96
 
가라고 해서 지금 선전하고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우리 그 저 
당 안에는 반드시 이름, 출생, 민족을 밝혀야 됩니다. 
  그럼 미국은 중국보다도 조선 민족이 많습니다. 민족을 따지게 
되면 몇 백 개 민족이 세계에 걸쳐서 많지만 그렇지만 미국은 민족
을 안 따지지 않아요. 그래서 흑인도 총독이 될 수 있어요. 중국에서 
뭐 소수민족이 총독이 된다 그거는 이론적으로 되지도 않고 사실상
으로도 불가능하게 되어 있잖아요. 그게 이제 이념의 차이. 저는 어
떤지 여기 사회문제에 관심하다나니까 이방면에서 자연히 많은 문제
를 두고 생각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말씀드리지만 아까도 등소평
을 지금 제가 11월 달 되게 되면 블로그에 문장 쓴 것이 딱 1년째 
돼요. 그러니 이제 학부가 없어져서 전문학교부터 출근 안하고 집에
서 할 일 없어 블로그에다 글을 씁니다. 
글을 쓰는데 아직 삼 백 며칠인데 254개인가 발표가 되었어요. 올 
때까지요. 기본상 하루에 한 글씩 썼는데 그런데 일단 민감한 문제
는 삭제됩니다. 우리 헌법에는 언론 자유 무슨 자유가 있지만 안 되
는거예요. 제일 처음에 저는 뭣도 모르고 그냥 받아들였는데 그 다
음에 알고 내가 질문을 했어요. 무엇 때문에 내가 쓴 글이 삭제되느
냐. 그때는 그 사람들 공개적으로 답변을 해야죠 그거는 인터넷에 
뜨니까. 이제 알고 보니 이제 안전 부분에서 간섭을 하죠. 안하면 그 
인터넷을 찾아 내버리니까 그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서 할 수 없이 
말을 들어야 해요. 
  그게 무슨 말인가 하게 되면 제가 90년대 초에 한국 광주에 갔다
가 광주학생운동 열사 기념관에서 묵도 인사를 한 게 있거든요. 그
게 중국에까지 알게 되어 중국 공안부분에서 찾아왔어요. 너 뭐 자
본주의 국가에 가서 그 사람에게 왜 인사를 했느냐. 그거는 중국만 
제4장 중앙민족대학과 치치하얼시 신문기자 시절
 
97
그럴 뿐만 아니라 저가 그때 왔을 때만 해도 저가 친척들을 찾는다
고 동해안을 갔을 때만 해도 한중수교 전인데 저도 머리끝이 섬뜻섬
뜻한 환경이었어요. 가는 곳마다 저 빨갱이네 빨갱이 나라에서 왔다
고. 가는데 마다 발 맡에 숨겨두고 마음 떨리면서 살지 말고 신고하
고 편안하게 살자. 그럴 정도로 그렇게 그때는 이념 차이라 해가지
고 그런 거 많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중국은 지금도 아직까지는 그 일당제니까 방법이 
없게 되어있습니다. 방법이 없어요. 그걸 또 다른 각도에서 보게 되
면 중국의 현실에서는 그것도 아직까지는 먹혀 가고 있다는 현실로 
존재합니다. 존재하는 본신부터가 존재의 가치가 있지 않는가 또 이
런 쪽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그렇지만 마음을 바꿀 수 
없어요. 그렇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저까지는 아직 그거에 대한 그걸 
그리고 살겠습니다. 
▮ 치치하얼시  신문기자 시절  
대학 졸업 후 치치하얼 시 일보사에 기자로 갔습니다. 제가 뭐, 쓰
기를 좋아하다보니까. 그런 쪽으로 분배를 받고 했는데 원래는 조선
중학교에서 저를 중학교로 데리고 가려고요. 교장 분들이랑 뭐 성에. 
심지어 저가 신문사에 지원해 이미 출근을 했는데도, 성 조직부에다
가 신고서를 썼어요. ‘왜 조선족인데 조선중학교를 안보내고 저런 신
문사에 보냈느냐’ 근데, 제가 그 때 저를 데리려 오신 교장님하고 말
씀을 한 게... ‘나는, 나도 조선 사람이라 조선학교 가는 게 좋은데...’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98
 
그 때만 해도 제가 가지 말아야 할 이유를 설명을 했어요. 담도 
크게 우리 시 정부, 조직부장 집에 찾아갔어요. ‘왜 못 가느냐?’ 지금
도 문화혁명의 여독이 있어서 두 파가 갈라져있어요. 그래, 내가 가
게 되면 나를 때린 선생이 지금, 학교에 출근하고 있는데 내가 가게 
되면 그 사람은 어떻겠어요? 또, 교장이나 당 서기든지 꼭 그런, 이
런 쪽으로 가기 마련이죠. 제가 싸우기도 불편할 뿐 아니라 우리, 선
생님들이나 우리 동료들도 심기가 불편하지 않겠느냐? 하니 못 간
다. 위에서 들어보더니 ‘말하는 게 맞다. 그럼 어디 가겠느냐?’ 나는 
‘하여튼 조선 중학교 내놓고는 아무데도 가도 된다.’고 그 부장님의 
말씀이 ‘제일 급한 게 방송국하고 신문사 여기 두 군데 중에 골라
라.’ 그래서 제가 신문사를 골랐어요. 
그래, 신문사를 갔는데 기자를 했는데 글쎄요 딱 하고 싶던 사업
이었는데 제가. 이제, 정부의 시장이나 다른 관원들을 따라 자주 취
재를 나가게 되면  제가 쓴 문장이 잘 나가지를 못해요. 
그래, 그래서 그 신문사 사장님이 ‘야. 너 참 안타까워 죽겠다, 어떻
게 어쩌겠냐? 사장의 말인즉, 너무 바른 대로 쓰지 말고 좀 눈치보
면서 듣기 좋은 말을 좀 쓰라는 것이에요. 내가 ‘사장님 하라는 대로 
내가 쓰면 되지 않느냐. 마음 속에 없는 말이지만.’ 그래서 어떻게 
말하나 들어보니까, ‘아니다. 너 이전에 역사문제도 있고 해 가지고 
우리는 좀 거칠어도 큰 문제가 없지만 너는 문화혁명때  그런 일이 
있고  해서 우리가 기사 취급할 때 너 때문에 많이 신경 쓰인다는 
것이예요. 그래서 저의 당안 서류에 아직도 그 재료들이 그대로 보
존되어 있다는 것을 또 확인했지요.
  그 해에 중문학부 졸업한 학생이 저 혼자 뿐이였어요. 몇 년 동안 
대학 졸업한 사람 그것도 중문학부졸업이어서 일보사에서는 얼마나 
제4장 중앙민족대학과 치치하얼시 신문기자 시절
 
99
다행으로 생각했겠어요. 원래 기자들은 이미 년새가 많아 새로운 사
람을 받는 것이 오죽 긴박했겠어요. 그래서 나를 기자로 잘 쓰고 싶
어했지요. 그런데 위에 시 선전부라는 당 선전부에서 몇 번 기사 쓴 
거 보더니만, 좋지 않거든요.  회의에서 신문사 사장님 말씀이 시 관
계부문에서 몇 번 말이 있었다고 저에게 귀뜸 해 주었습니다 
  신문기자는 78, 79, 80년도까지요. 저는 그, 우리 거기는, 공업하
고 상업, 농업, 한 조였어요. 지금은 신문사가 커져 분공이 새분화 
되였지만 그땐 공업 농업 상업 다 하나. 그 때, 조장까지 해서 도합 
4명이었어요. 근데, 그 큰 시를 다 돌아다녀야 되니까 임무가 과중
했죠, 그 때는 하루도 빠짐없이 돌야 다녀야 했어요. .
  저도 수장을 잘 하는데, 신문 기자 기록들이 그건 하도 오래 되어
가지고. 있을는지는 뭐 찾아봐야겠고요. 근데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저를 소개한 건, 그, 치치하얼에서 나온 그, 무슨 제가 쓴 문장은 그
런 데 나온 게 많거든요. 뭐, 치치하얼 교육이라든가, 안 그라믄 시
에서 꾸리는 잡지, 그런 데 그런 건 있습니다.
  저는 치치하얼 태생이고 여기서 공부했고 그러니까 여기 기본 사
항. 저, 중국 사람들 포함해서 내 나이 또래 가운데에선 저가 중국 
사람보다 더 잘 안다고 봐야죠. 시정에 대해서는요. 하기에 제가 기
자시절 시의 류치(刘琪)라는 시장에게 긴 편지를 썼어요. 우리 시 
중심을 가로 질러간 호수가 있는데 흐르는 물이 아니어서 환경을 오
염시키니 돈을 들려서라도 이를 개조해야 된다고 말을 했지요. 우리 
사장님은 두려워서 편지를 못하게 해요. 어느 하루 지방에 같이 갔
다가 오면서 저가 그 편지를 시장에게 주었어요. 그 후에 만났을 때 
그의 말이 생각은 참 좋은데 지금 형편에 그 보다 더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많으니 다음에 보자는 것이에요. 그것이 30여년이 지난 지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100
 
금에 와서야 해결이 되었어요. 그것도 그럴 것이 제가 중학시절에 
전교의 수백 명 학생들이 그 공원에 가서 의무노동을 한다고 맨 손
으로 그 호수의 진흙을 파 올린 적이 있지요, 자연히 동년의 회억이 
담긴 그기에 신경이 쓰인가 봐요. 보시다시피 지금 노동호의 경관은 
우리 시 관광코스의 주요한 자리를 매김하고 있지요. 
  치치하얼일보사 기자사절 제일 득을 본 것은 흑룡강신문사이지요. 
조선족 신문기사를 쓸려면 외지 농촌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그때는 
교통이 불편하여 기자증이 없으면 다니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우리 
구내의 기차나 자동차나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었지요. 왜 그런가 
하면 그 당시 행정구역이 시와 지구가 분리되어 있었기에 시내의 교
통은 신문사나 공중버스를 이용하면 되지만 조선족 마을은 대부분 
지구 농촌에 있기에 한 행정소속이 아니기에 단위의 차를 쓸 수 없
었어요. 지금은 시와 지구가 합병되어서 문제가 없습니다만……
제4장 중앙민족대학과 치치하얼시 신문기자 시절
 
101
<보충자료>
1976년 천안문 사건
1976년 톈안먼 사건(天安門事件) 또는 제1차 천안문 사태는 
중화인민공화국에서 1976년 4월 5일에 있었던 대중반란으로, 
문화 대혁명 이래의 마오쩌둥주의 절대화 풍조와 마오쩌둥 
식 가부장적 체제에 대한 민중의 저항을 나타낸 사건이었다.
1976년 1월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사망하자, 중화인민공화국
에서는 ‘주자파(走資派)’ 비판 운동이 일제히 일어나, 오랜기
간 신중국의 건설 및 국제 무대에서의 중국의 위신 증대에 
기여한 저우언라이 총리를 추도하려던 중국 민중의 의지는 
꺾이고, 다시 극좌 조류가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1976년 4월 4일 
청명절(淸明節)에, 베이징의 민중은 손에 손에 화환과 플래카
드를 들고 천안문 광장에 있는 영웅기념비를 향해 시위행진
하였다. 저우언라이의 자필 비문이 새겨져 있는 기념비는 민
중의 화환에 의해 제단으로 변하였다. 그러나 베이징시 당국
과 관헌은 이 기념비에 바친 화환을 모두 철거하였고, 다음날
인 5일 격노한 대중은 반란을 일으켜 건물과 자동차 등에 방
화를 하는 등 일대 소요가 야기되었다. 
이 사건은 공안당국과 군에 의해 반혁명사건으로 철저히 탄
압되었으며, 덩샤오핑(鄧小平)에게 책임을 물었고 그 뒤 화궈
펑(華國鋒)은 정식으로 총리의 자리에 올랐다.
  자료 출처 : 위키백과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102
 
 루쉰(魯迅, 1881.9.25~1936.10.19)의 생애
 중국의 문학가이자 사상가이며, 본명은 周樹人이다. 자는 豫才이
며, 루쉰은 대표적인 필명으로 浙江省 紹興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
났다. 1898년 난징의 江南水師學堂에 입학, 당시의 계몽적 신학문
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902년 졸업 후 일본에 유학, 고분학원(弘
文學院)을 거쳐 1904년 센다이의학전문학교(仙臺醫學專門學校)에 
입학하였으나, 문학의 중요성을 통감하고 의학을 단념, 국민성 개
조를 위한 문학을 지향하였다. 
1909년 귀국하여 고향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1년 신해혁명이 일
어나자, 신정부의 교육부원이 되어 일하면서 틈틈이 古書 연구 등
에 심취하였는데,  1918년 문학혁명을 계기로 <狂人日記>를 발표
하고 <孔乙己>, <고향>, <축복> 등의 단편 및 산문시집 <野
草>를 발표하여 중국 근대문학을 확립하였다. 특히 대표작 <阿Q
正傳>은 세계적 수준의 작품이다. 1920년 이후에는 베이징대학, 
베이징여자사범대학 등의 교단에 섰다. 
1927년 가을 상하이의 租界에 숨어 許廣平과 동거하며 문필생활에 
몰두하는 한편, 創造社, 太陽社 등 혁명문학을 주창하는 급진적 그
룹 및 新月社 등 우익적 그룹에 대한 논전을 통하여 매우 전투적인 
사회 短評의 문체를 확립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 뒤에 대두된 민족주의 문학, 예술지상주의 및 小
品文派에 대하여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였다. 또 이 해부터 版畵 운
동도 지도하여 중국 신판화의 기틀을 다졌다. 
그의 저작은 일찍이 <魯迅全集(20권, 1938)>, <루쉰 30년집(10
권, 1941)>으로 출판되었고, 중국에서도 상세한 주석을 가한 또 
다른 <루쉰전집(10권, 1956~1958)>이 간행되었다
 
자료출처: 루쉰 <문학과 지성사>  
  
제5장 교육자 및 교육행정가로서의 삶 시작  
치치하얼 사범대에서의 교편생활 
중국어연구원으로서 교육국 생활
중학처 부처장으로서의 교육국 정년 퇴직
교육국 중학처 근무시절 (1990년대)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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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치하얼 사범대학에서의 교편생활
치치하얼에다가 사범대학을 설립했어요. 사범대학에 선생이 없다, 
그런데 제가 보니까 중국어를 배웠거든요. 그 사람, 중국어 교원이 
없어. 아이고, 잘 되었다. 사장이 찾아와서 ‘저 사람 우리 달라.’고 
그 때는 대학교 졸업생이 전시적으로 많지 않으니까 사범대학 가서 
가가지고 몇 년 교편 잡았습니다. 제가 가서 열은 게 현대한어, 고대
한어하고, 사자, 3과목을 열었습니다.
치치하얼 사범대학 교편시절 (1980년: 앞줄 좌측 전창국)
제5장 교육자 및 교육행정가로서의 삶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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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대학교 그 교장님이 사장님하고 이야기는 있었어요. 그런
데 이야기는 있었지만 아직 정식으로 준다, 안 준다 대답도 없었는
데 그 교장님이 사범대학교에 조직부에 가서 얘기를 해놓으니까, 교
육국에서 국장을 보냈어요. 보내가지고, 교육청에 청장 어른이 오셨
죠.
  우리 신문사 찾아와가지고. 전 씨. 저, 우리 교육, 사범학교는 교
육국에 속하거든요, 그 데리고 가겠다. 그러니까 그 사장님은 내가. 
인맥으로 찾아서 갈려는가 생각하고 나를 도운다고 허락을 한거죠.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동의를 했어요. 그럼, 주꾸마. 그 사람 보내
놓고 나서 그 사장님은 내보고 너도 내하고 관계 좋은데 가고 싶으
면 말을 해야지, 기실 아무 관계도 없는데, 그 분이 그렇게 생각하더
라고요. 학교는 꾸려야 하는데 중국 사람들 중에 대학생이 정말 적
었어요. 그 때는 할 수 없이 저를 억지로 데려간 거죠. 제가 지나간 
경력 때문에, 언론계에 너무 민감하잖아요. 83년도? 84년도까지인
가? 3년도 말인지? 아니 4년도. 그러니까 그 때. 만 3년이네요. 제가 
가서 모집하던 그 학생이 졸업하고 나갔으니까 그 때는 2년째, 그 
다음에 2기 더 받았으니 만 3년, 해로는, 4년 있었네요. 학제말이 나
왔지만 문화혁명이후 교육 개혁으로 학제를 졸였어요, 단과는 2년 , 
본과는 3년, 하여 4년제 학재가 회복되어서 3년제의 교육을 받은 공
농병학원에 대해서 어떻게 볼 것인가로 쟁론이 많았지요. 하여 저는 
교육국 근무 시 시끄러움을 피하느라고 5년제 연변대학 함수를 2년 
사이에 모든 과목 시험을 통과하여 순리롭게 졸업을 했습니다. 대학
을 두개 다닌 셈이지요. 
거기 있었으면 저는 오히려 교육청 간부보다 더 좋은데. 그 때 교
원들은 그랬어요, 저는 쓰기를 좋아하니까 학교에 있었으면 좋은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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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교원들이 생활이 정말 구차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다 학
교를 떠나려는 그런 중국 현실이었어요. 근데, 저는 제가 떠나려는 
게 떠나려 했던 게 아니고 저를 여기 학교에 데려왔던 그 국장님이 
시 교육청에 교원실을 꾸려야해요. 교원실이란, 교원들 진수, 연수하
는 이걸 조직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중국에 다른 수학, 뭐, 영
어, 물리, 다른 연구원은 다 있는데 중국어 연구원이 없어요. 저가, 
조선 놈이 중국에서 한 3년 했어요. 그래서 그 3년 하다가 이제 행
정에로 저를 배치를 했어요. 후에 북경대학을 졸업한 중국어연구원
을 받은 후에 저를 행정으로. 시교육국 중학교육처로 조동을 했죠. 
▮ 중국어연구원으로 교육국 생활
84년도에 교육국 가서 제일 처음 갔을 때는 중국어연구원으로 갔
습니다. 대학교에 교수로 있다가 성인 교육 가운데에서 성인 교육, 
중국에서는 금방 할 때인데 성인 교육 중국어학과에 연구원이 없었
어요. 
그런데 그 몇 년 들어 간 사이에 대학 졸업하고 중국어를 배운 사
람은 조선족 저잖아요. 사범대학에서 교육국에 와서 중국어연구원
로 사업했습니다.
전문적으로 제가 무얼 하게 되었는가 하게 되면 그 책자는 하도 
오래 되어서 찾을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성인들 국가에서 아직 교
재가 없었기 때문에 지방에서 중국어, 한어라고 하는데 어문교재를 
중국말로 하면 한글 교재를 제가 만들었습니다. 지금 말하면 성인 
제5장 교육자 및 교육행정가로서의 삶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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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에서 그 때는 각 한 개 공장이 종업원이 적어도 3만명 되는 
공장이 여러 개 있었는데 각 공장마다 다 대학이 있었어요. 거기 대
학에 중국어 교재를 제가 편찬했거든요. 중국어 교재를 그리고 출제, 
입학 시험, 초생관련 모든 업무를 제가 다 했습니다. 
교육국 근무시 눈강지구 교육연수원
(1980년대말: 좌측 두번째 전창국)
그러다가 시 정부에 시 교육청에 우리 치치하얼 시는 특수하잖아
요. 본토 흑룡강의 토착민족이 다 치치하얼 시에 있습니다. 다른 데 
조선사람 목단강, 가목사, 뭐 하얼빈, 아성, 뭐 어떤 학교는 민족학
교라고 하면 다 조선 학교이지만. 치치하얼 시만은 민족 교육이라 
하면 조선 사람 많지 않아요. 다른 소수민족이 더 많아요. 다우르족
만족, 몽골족, 어원커족, 끼르끼저족, 생각하다가 다른 사람들 안 되
잖아요. 같은 소수민족이니까. 또 내가 교육국에 있으니까, 네가 행
정 맡으라. 제가 이걸 맡게 되었지요. 이거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민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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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교육과로 따로 행정실을 내여 왔습니다.
저가 조선족하고 관계 제일 많을 때가 시 교육청 간 다음에 저가, 
민족교육을 처음으로 가자마자 조선족, 소수민족, 민족교육을 책임졌
습니다. 한, 7~8년 동안 그래서, 조선족은 물론 이제, 기타,  다우르
이라던가 여기에 있는 소수민족이 많습니다, 치치하얼에. 그 가운
데에서도 다우르족이 제일 많고요. 여기 다우르족은 민족구잖아요. 
전국에서 5개 뿐인데. 자치는 아니고 민족구로 해가지고 다우르족이 
많습니다. 그 때, 인제 제일 덕 봤다는 게, 우리 조선족 학교에서 덕 
보기 마련이죠. 위에서 경비 같은 게 내려오게 되면 제가 아무래도 
조선 사람이다 보니까 조선학교에 많이 보내고 그래서 치치하얼에 
동네가 13개 있는데 학교가, 국민학교가 13개였어요. 마을마다 다 
있었죠. 원래는 7개뿐이었는데, 제가 국가에 돈이 있으면 경비를 조
달해가 조그마한 이런 마을에도 학교를 다 꾸렸습니다. 어떤 학교는 
학생 다섯에 교원 한분, 이렇게 헤서 최고로 13개까지 있을 때였
습니다. 그래, 기타 소수민족은 또, 뭐, 물론 돈을 주지요. 주는데, 
민족이 여러 개 되어서 조선 사람처럼 이렇게 종합적으로 다스리
기가 힘들어요. 민족마다 다 다르니까 만족도, 다우르족도, 그리고 
그 다음에 기타 회족, 어룬춘족등 많습니다. 
우리 흑룡강 성에서 소위 말하는 5개 민족이 세대민족이라 해서 
옛날부터 여기 살아온 민족이라 해가지고 5개가 있는데, 그 분들을, 
그 민족들을 잘 보살펴야 합니다. 중앙에서 돈이 많이 내려오거든요. 
조선족들은 이제 이민민족이라 해가지고 기실은. 다른 돈을 뜯어서 
일로 주는 그럴 때입니다. 솔직한 말로는 그래요. 조선족을 대상으로 
내려오는 경비는 있을 수가 없거든요. 뭐, 정부에서. 아, 그러니까 
그, 세대민족, 원래 여기 있던 토박이 민족을 위주로 한다. 
제5장 교육자 및 교육행정가로서의 삶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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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 치치하얼뿐만 아니라 다른 지구에는 우리처럼 이래 
복잡하지 않아요. 하얼빈이나 목단이나 다른 곳은 다 조선족이 위주
고, 다른 민족은 기본적으로 학교가 따로 없으니까 문제없는데 치치
하얼 시가 제일 특수해요. 흑룡강에서 제일, 여러 민족학교가 다 있
어요. 그러니까 다스리기가 힘들어, 그래서 제가 계속 한 7-8년 동
안, 그, 이걸 책임지고 있었던 원인이 다른 사람이 올라가게 되면 해
내지를 못해요. 저는 좋은 점이 뭐였는가 하게 되면 몽골말도 할 줄 
알지, 다우르족 말도 할 줄 알지, 뭐, 이렇게, 생소한 데 가도 술 한 
잔 먹으면서 저거 말로 노래 한 마디를 하고 나면 내가 알고 싶은 
정황을 다 쏙쏙 들이 인적 관계가 가까워지잖아요.
눌하 조선족 학교 (우측 첫번째 전창국)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110
 
  당시 정부의 경비조달 혜택으로 소수민족 학교의 전반 교육질이 
전시의 평균을 초과 하였고 학교설비는 한족학교 보다 훨씬 좋았지
요.  하기에 저는 시를 대표하여 성에 가서 경험 소개도 어러번 하
였고 우리 시에서 현장회의도 자주 열리고 성내나 심지어 전국 각지
에서 참관도 여러번 왔습니다. 그 때가 우리 시 민족교육의 전성기
였습니다. 그 당시 국가의 지정 된 경비도 찾아서 학교로 보내내야 
하고 특수 교육으로 시의 재정 지원도 받아야 하기에 시 재정국은 
물론 시의 관계책임자나 시장하고도 실갱이 질을 많이 했지요. 가만
히 있으면 누가 줍니까. 지금 와서 가 보세요, 완전히 무시당하고 있
지요. 소수민족 간부마저 배치가 되지 않고 기타 부서 한족이 민족
교육업무를 대리하고 있습니다. 
▮ 중학처 부처장으로서 교육국 정년퇴직
전반적으로 민족교육을 관계하는 그러다가 내부구조 변경이 생기
면서 민족교육과를 없애고 기초 그러니까 중학교, 중학과라고 중학
을 우리는 초등과 중학을 포함해서 중학이라고 하거든요 중국에서
는, 그래서 중학처를 설립하면서 중학처에 부처장으로 왔습니다. 대
학은 성 교육청과 성 정부에서 관계합니다.
와서 무얼 하는가 하게 되면 원래 하던 민족교육 이것도 관계하고 
전시에 중고등학교 교육, 교학 업무를 맡았습니다. 그래서, 중고등학
교에 저가 퇴직할 때까지 전시에 중고등학교 입시, 시험, 출제, 초생, 
제가 다 했거든요. 일반국장보다도 더 막강했어요, 권력이. 제가 관
할하던 게 우리 치치하얼 시 인구가 567만인데 우리 학생만 해서 
제5장 교육자 및 교육행정가로서의 삶 시작
 
111
100만이거든요. 직접 업무 맡으니까 실권은 제일 교육국에서, 시 교
육청에서 실권 있는 거는 딱 우리 부문이에요. 다른 부문은 일반적
인 보조 부문이어서 돈벌이가 안 되었는데, 유독 우리 처만은 돈이 
많이 유통되게 되어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졸업장 하나만 해도 돈이 얼마에요? 교재 편찬하고 
다 제가 했었는데 다른 사람들 하게 되면 중국에는 공산당 몇 년 하
게 도면 처 간부들은 다른 데로 갑니다. 저는 거기에서 그렇게 오래 
했는데도 안 보내요. 왜? 마음을 놓아요. 왜 마음을 놓아요? 이 놈은 
먹을 줄을 몰라. 초생할 때, 고등학교 갈 때 저번에도 말씀 올렸는지 
모르지만, 국가에서 돈을 경비지출 절약하기 위해서 고등학교 갈 학
생들이 많을 때는 여러 면으로 학부장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겅우가 
많아요. 그 때는 전시적으로 고등학교 진학이 매우 어려웠어요. 중
학, 대학입학은 각기 95%,70%에 달하지만 고등학교 진학율은 43%
밖에 안됩니다. 경쟁이 치열하죠.
  예를 들겠습니다. 가정해서 한 고등학교에 100명을 모집할 수 있
는 규모인데 70명만 정식으로 초생을 하고 30명은 자비생을 받아요. 
그래서 학교 운영경비로 쓰지요. 자비생은 한 사람이 그 때 중국 돈
으로 중국에는 2만 2천원 받았습니다. 얼마에요? 그런데 초생할 때 
쪽지가 와요. 만약 그 쪽지로 돈 받고 하게 되면 만원을 가져 와서 
주머니에 넣어 줌니다. 그 사람들 만원을 가져와 주어도 제가 명액
을 한개 주게되면 그래도 1만 2천원 남아요. 저는 하나도 안 받았지
요. 안 받으면 나만 안 받으면 모르겠는데 윗 사람들이 못 견디는 
거에요. 중국에는 솔직히 말해 그런 체제에서는 청렴이라는 것이 통
하지 않아요. 같이 부패해야지. 부패하지 않으면 발탁도 안 시켜주고 
과장자리 돈 얼마다, 국장자리 돈 얼마다, 심지어 파출소 소장도 값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112
 
이 얼마라고 공개된 비밀이지 않습니까. 솔직히 지금은 많이 나아졌
다고. 지금 잡고는 있지만 거기서 생활하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그래서 머저리가, 바로 우리 처에 일반 간부들도 집을 몇 채나 바꿨
어요. 그 때는 돈으로 잡을 사는 것이 아니고 영도들에게 코밑치성
만 잘하면 집을 좋은 것으로 바꾸어 줍니다. 1년에 10명만 하면 10
만이잖아요, 10만이면 시장 가격으로도 집 한 채 살 수 있어요. 그
러니까 그래서 제가 해서 안 받은 건 그렇지만. 제가 그렇게 해가지
고 제일 좋은 것이 솔직히 말하자면 민족교육 문제를 처리 할 때 떳
떳하지 않습니까? 일 처리를 하면서도 아무래도 조선족을 생각하게 
되겠죠. 왜냐면 내가 조선족이니까. 소수민족이니까 솔직히 민족이니
까 뭘 득봤겠어요? 제일 먼저 전시 조선족학교들에서는 민영교원 ,
자체로 촌민들이 돈을 모아서 교원을 초빙하여 학교 교학을 하는 것
이 하나도 없어요.
  제가 몽땅 국가 편제로 다 해줬어요. 제일 먼저 소학교 싹 다 벽
돌집 지어줬어요. 그래서 전(全)성적으로 우리 소수민족들이 제일 
많지만 소수민족들이 학교 장비 수준은 한족들보다 높습니다. 치치
하얼, 저 있을 때. 어디가도 뭐. 전성 모범도 얻고 내가 그 사진을 
찍어온 거에요. 제일 좋았죠. 다른 민족들도 잘 해줬지만, 조선족들
은 확실히 제일 득 본게 교원들. 국가, 영원한 밥벌이 할 수 있도록 
국가 간부로 제가 아니었으면 누가 했습니까? 상상도 못하죠. 
  그 때 돈을 갔다 주는 건 받지 않으니 고맙다고 술 한잔 마시면 
끝이고 그러니 국가 교육청에서도 마음을 놓죠. 그래서 지금도 시장
을 포함해서 제가 초생하러 갈 때 되면 쪽지를 보내여옵니다. 큰 종
이를 쓰면 너무 뚜렷하게 나타나잖아요. 쪽지에다가 어느 학교에 누
구누구 보살펴 달라, 이런 조그만 쪽지 오는데 저울로 달 수 있을 
제5장 교육자 및 교육행정가로서의 삶 시작
 
113
정도로 많이 옵니다. 시에 정부 각 기관 국장급 이상간부들, 친척들. 
친구들, 뭐……. 사회 관계망이 얼마입니까? 그래서 또 머저리라고 
말을 들었습니다. 저번에 갔을 때 생각나실지 모르겠는데 현지조사
가 끝난 날에 불고기 먹는다고 우리 같이 갔지요. 나이 많은 분아 
있었지요 x씨라고, 그 씨가 문화혁명 때 고등3학년 학생이었어요. 
내 잡을 때 그 사람들이 날 잡았어요. 나는 그 가슴 아픈 역사를 뭉
게고 지금도 아무런 허물없이 잘 대해 주죠. 그러니 뒤에서는 저의 
한 반 동창들은 저놈은 머저리라고 하지요. 저 너를 잡으러 갔던 사
람을 관용이 대해 주고. 저의 생각에는 지나간 일들을 따질 필요 뭐 
있느냐. 사실을 밝히는 것은 역사의 진실을 기록하기에 좋지만 매듭
을 풀지 않으면 되레 짐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시간이 많이 흘러 간 
후 그 사람들은 세상에서 제일 믿을 만한 사람은 뭐, 저라고. 집에 
무슨 일이 생겨도 저한테 물으러 옵니다.
  99년도까지인가? 내 만 60세 그래서 솔직하게 말씀 올리지만, 60
대까지 정년퇴직 하면서 처급으로 있는 건 아마 조선족 혼자였을 거
에요. 그러니 다른 데로 발탁되어 가는 간부들이 저 보다 더 안타까
워하고 귀띔을 해 줬어요. 너는 경력이나 능력으로 보나 얼마든지 
승진 할 수 있는데 왜 가만히 있느냐고. 기실 저의 외부 인맥도 괜
찮았지요. 저가 잘 아는 치치하얼시 부시장이 저와 친구여서 한족
지만 개고기를 좋아 해서 자주 우리 집에 내외 동반하여 오시는 데
다 그 후에 국가 정협 부주석으로 발탁 되였지요, 또 그 당시 우리  
시 부시장이 저의 복경 중앙민족대학 후배 졸업생이지요, 하여 옆에 
사람들은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룹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에게 손
을 내밀지도 않았습니다. 
 그 뿐인가요, 저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습니까. 교육국국장, 시장,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114
 
시위 당서기 강화문은 물론, 국가에서 흥용강교육현장시 저를 하얼
에 데리고 가서 대회의 주체 발언으로 우리 성의 왕줘수(王佐书)
성장님의 강화문, 그리고 전국을 대상으로 발행한 <21세기 교육혁
의 서광>이란 제목으로 흑룡강의 교육성과 홍보물로 CD을 만든 
대본도 제가 쓴 것이지요. 전성에서 이렇게 중요한 기회를 저에게 
준다는 것은 저를 믿는다는 것이겠죠. 무슨 일을 해도 저는 문제가 
안 생기니까 그 바람에 저가 뭐 거기를 따랐으면 저도  행정으로 막 
올려 췄을 건데 저는 뭐... 저, 퇴임할 때까지 그 자리에 물려 앉힌 
거예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보통 다른 학교로 전근 안하게 되면, 다른 
부서로 전근 안하게 되면, 혹은 다른 정부기관에 전근 안하게 되면, 
사전에 55세 돼서 집에 가라고 보내요. 저는 가겠다고 해도 안 보내
고 더 하라. 그래서 할 수 없이 만 60세까지, 그 때는 60이 되잖아
요. 그 저, 실업 현상이 많아가지고 정부에도 지금 대학생, 정부에 
넣어야겠는데 자리가 없잖느냐. 나이가 안 되어도 봉급을 두 배 올
려줍니다. 집에 가라고 사전 퇴직하라고 봉급 두 배 올리고. 그래서 
많이 내보냈습니다. 본인이 요구하면 50세에도 되고 55세에도 되고.
다 그렇게 나갔어요. 보편현상이었어요. 억지로 정부 그, 인원을 
줄이는 거죠 그런 식으로. 저는 가겠다고 해도 못 가게 해가지고 할 
수 없이 하기 싫어도 그래도 믿고 저, 저 그런데 좋은 게, 그 때는 
뭐, 제가 구체적인 업무는 안하고 새로 온 사람들 봐주고 그러니까, 
책 볼 시간이 많았죠. 혼자 사무실을 쓰면서 이제는 비서도 없잖아
요. 퇴직하고 나니 혼자 딱 있잖아요. 혼자 글 쓸 기회도 있었고, 그 
때 글을 많이 썼습니다. 
제5장 교육자 및 교육행정가로서의 삶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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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국 근무시 초빙한 신임교사들과 함께 (치치하얼 중학교)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116
 
<보충자료>
중국의 교육제도
중국의 교육부는 국무원 교육행정부서로서 전국교육업무를 주관하
고 있으며 전국교육사업를 총괄계획, 관리하고 있다. 각 직할시에는 
교육위원회가 설치되어 있고 각 성과 자치구에는 교육청이, 각 지방 
시, 구, 현에는 상응하는 교육국 혹은 교육판공실이 설치되어 있다.  
중국의 교육과정은 취학전 교육, 초등, 중등, 고등으로 구분되며 취
학전 교육은 3~5세의 아동이 유치원에서 교육받는 과정이다. 학령
아동의 유치원 입학율은 43.8%이다. 
초등교육은 6~11세의 아동이 초등학교에서 교육받는 과정으로. 전
국에는 456,903개의 초등학교가 있고 초등학생은 1억2156만 여명
이다. 학령아동의 초등학교 입학율은 99.1%에 이르며 초등학교는 
일반적으로 지방정부가 설립하나 개인이나 민간단체가 설립한 곳도 
있다.
중등교육은 12~17세의 청소년이 중등학교에서 교육받는 과정을 말
한다. 초등중학교, 보통고등중학교, 직업고등중학교와 중등전문학교
는 모두 중등학교에 속한다. 보통중학교는 초등중학교과 고등중학교
으로 나뉘며 학제는 각 3년이다. 초등중학교 졸업생의 일부는 고등
중학교으로 진학하고 일부는 직업고등중학교이나 중등전문학교로 
진학한다.
고등교육은 중등교육 이후 진행되는 전문대학과 4년제 대학, 대학원 
교육을 말한다. 중국에서 고등교육을 실시하는 기관은 대학, 학원
(단과대학)과 고등전문대학이 있다. 
21세기 들어 중국정부는 교육을 우선발전의 전략적 지위에 놓고 "
과학교육흥국(科敎興國)"을 전략방침으로 제창했으며 교육체제개혁
과 전인교육을 계속 심화시키고, '9년 의무교육제 보급'과 '청장년 
문맹퇴치'를 교육 중점사업으로 계속 추진하고 있다. 
자료 출처 : 중화인민공화국 주 대한민국 대사관 교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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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결혼과 초국가적 가족관계 형성 
32세때 3살 연하 조선족 간호사 김태연과의 결혼
음악작곡 하는 아들 전봉과 미술하는 딸 전은자
전창국 5남매의 초국가적 가족관계 형성
 전창국, 김태연 부부
▮ 32세때 3살 연하 조선족 간호사 김태연과의 결혼 
32살에 결혼을 했는데 뭐라고 할까. 우리 한 동네에 있었는데 저
는 그 존재도 몰랐어요. 제가 농촌에 가 있을 때 문화혁명 때 밑에
서 봤다고 그래요 내 맞는 거를. 저는 고등학교 2학년 자기는 중학
교 2학년생이었는데 투정 맞을 때 계속 봤다고 그래요. 근데 지는 
기억하는데 저는 잘 기억 못하잖아요 한 동네에 있어도.
전창국, 김태연 부부 젊은시절 
제6장 결혼과 초국가적 가족관계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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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촌에 갔을 때 대장으로 있을 때 한 여자애가 남자애의 부추김을 
받으며 다리 절면서 다니는 것을 보았는데 지금 부인이 소아마비로 
그랬어요. 중국에 만분의 일이 완쾌율인데 마침 중학을 졸업하고 간
단한 의학상식을 전수 받고, 그 때는 시의 간부들이 농촌에서 일했
잖아요? 우리 시 <5.7 간부학교>에 그 간호사로 들어갔습니다. 간
호사 그러니까 침이나 놓고 하는 위생학교 졸업하고는. 간호사로 들
어갔죠. 거기서 병을 앓았는데 마침 직장이 있어 놓으니까 하얼빈
서 3년 입원해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소위 완쾌되어서 집에 왔는데 걷지는 못하고 있을 때이지요. 친구
의 집에서 친구의 여동생과 같이 있는 그를 처음 재대로 면목을 악
혔지요. 김씨라고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평시에 만나면 매부
라고 부릅니다. 자기 여동생 주겠다고 해서 말입니다. 하루는 그 집
에 놀러 갔는데 그 여동생하고. 둘이 또 한 반 동창이라고 하네요, 
거기에 지금 부인되는 이가 왔어요
  그래 못 걸어놓으니까 나는 오빠 되는 각도에서 격려의 이야기를 
많이 했죠. 힘 있게 살아가라고. 내가 그때 무슨 노래를 불러 주었는
가 하면, 그때는 누구도 부르지 않던 <홍도야 울지 마라 >를 불러 
주었지요. 나는 완전히 동정이었죠, 오빠가 있다는 그 말이 그에게 
힘을 가져다주었는지. 아, 그런데 그 후에 저 추천되어서 학교에 가
니까 편지가 오고 겨울에 입으라고 옷도 해가 보내고 그 때는 봉급 
받았잖아요. 마지막에는 떼려야 떼지 못할 정도로 졸업할 때 북경 
학교에 찾아왔어요. 이미 그렇게 된 바에는 같이 살자 그러나 저러
나 지금 잘 살고 있습니다.
 동네에서 하여튼 다 반대했어요. 내일 금방 잔치를 해야겠는데 나
랑 같은 동배의 친구들이 너무 안타까워 ‘형님. 어떻게, 다시 생각해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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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 하여튼 동네에 동의하는 사람 없었는데 내가 생각도 못했어요. 
 
전창국, 김태연 부부 결혼식 사진 (1980년)
  그들의 생각엔 그렇게 좋은 직장에 그 재간에 어디 가면 더 좋은  
배우자를 못 얻느냐는 그것이죠. 그 때 그는 진짜 병자이라고, 병신
한테 가니까. 그 다음에는 너무 안 되어서 아버지 어머니한테 물어
봤어요. 부모님들이 왜 반대하는 가구요. 어머니가 ‘야, 야는 약물에 
폭 담가 놨던 게 그게 아이는 낳나?’ 이렇게. 부모들 생각에 자식내
기 못한다 그거고. 친구들은 너 그러면 아주머니라고 부르지도 않는
다고 옆에서 으름장을 놓는 거예요. 내일 내 잔치할 판인데 아직까
지도 그런 소리 하냐고 그러면 내 이제 형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하면서 저를 만류했어요, 그럴 정도로 너무 반대했었어요. 그런데 어
제6장 결혼과 초국가적 가족관계 형성 
 
121
떻게 반대해도 좋다, 나는 내 나름대로 결혼을 택했습니다. 그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요. 
  그 다른 친구들이 결혼 할 때는 저가 시내에 가서 하이야를 구하
여 혼례를 했는데 저는 결혼 할 때 생산대의 소차를 타고 농촌에서 
소박한 혼례식을 올렸지요. 장난들이 얼마나 심했는지 총각 위원장
이 장가 간다고 신혼부부가 앉은 차를 몰고 밭고랑을 횡단으로 가로 
질러 가니 우리가 견딜 수가 있습니까, 고약스럽게 우리가 깔고 앉
은 이불 밑에는 둥 군 돌을 깔아 놓았으니깐요. 3일 째 처가에 가서
는 대들보에 매 달려 발 바닥에 매를 안기는 혹형까지 당했지요. 그
때는 재미로 아직 그런 풍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51년생으로, 계속 공장 위생소 병원에 출근하다가 내가 
91년 폐암 진단 받았잖아요 그래서 사직하고는 지금까지도 집에서. 
가무를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헤어지지도 못합니다. 
▮ 음악을 하는 아들 전봉과 미술 전공 딸 전은자  
아들은 전봉, 딸은 전은자. 전은자가 내년 봄쯤에, 친구를 사귀였
는데 친구의 부모와 친척들이 다 한국에 있어요. 그 부모들이. 사돈
될 집에서는 내년 봄에 서울에서 잔치를 하자 하기에 그때는 서울에 
올 겁니다.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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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전봉 
  아들은 음악 작곡합니다. 대학원은 일본에서 공부를 했는데 원래
는 대학원을 마치고 미국으로 계속 공부 가기로 생각이 있었는데 소
원을 이루지 못했네요. 일본에 10년 넘어 있다가 금년에 중국으로  
돌아 와 하알빈 사범대학에 취직하려는데 잘 될지 모르겠습니다. 지
금은 임시로 친구가 꾸리는 음악학교에서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습니
다. 
  아들은 80년도 생, 딸은 84년도 생인데 사천미술대를 졸업하고 대
련에서 건축설계를 하고 있습니다. 딸이 대학가던 그해에 대학 입학 
점수선이 하얼빈공대를 많이 넘었섰는데 애가 미술을 하겠다 해서 
문화성적이 최고라고 미술대에서 먼저 특기생으로 초생을 하여 가는 
바람에 그 쪽에는 포기하고 말았지요. 저도 중국의 정책에 따라서 
출산재한 요구에 따라 독생자녀 증서까지 발급 받았습니다. 후에 소
수민족은 아이 둘을 가질 수 있다 해서 또 하나를 두었지요.
제6장 결혼과 초국가적 가족관계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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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식들이 이런 전공을 하게 된 것은 제 영향이 있지 않았나 봅니
다. 저는 중학때 부터 작곡을 했는데 어떤 노래들은 지금도 불러지
고 있잖아요. 전봉이도 저를 따라 배웠는지 중학교때 학교의 악대 
대장으로 있었죠. 그래서 음악에 흥취를 느꼈는데 학교에서는 그에
게 큰 희망을 가지고 있었죠. 그 당시 중국에서는 고중때 부터 대학
입시를 준지하느라고 반을 문과 이과 두개 반으로 갈라서 상과를 합
니다. 음악은 문과에 속하는데 문과에서 전봉의 수학이 제일 좋았지
요. 예술계 입학때는 수학성적을 총 점수에 넣지 않았습니다. 하여 
많은 선생님들이 우리를 찾아와서 이과로 변경 할 것을 권했지요, 
하지만 본인 음악을 하겠다 하니깐 방법이 없지요. 할 수없이 피아
노는 음악전공의 필수 시험이기에 대학 예능 시험 1년 반을 앞두고 
피아노를 사 주었지요. 
  전봉의 악리(乐理) 나 은자의 미술 기초는 모두 제가 집에서 개별 
지도를 했지요. 은자 역시 미술을 하겠다 해서 고등학교 진학 후에 
미술 입시 준비를 했지요. 옆에 분들의 많은 책망을 들었어요. 왜냐 
하면 어떻게 제 자식을 가지고 실험을 한다고, 이렇게 늦게 시작해
서 대학에 붙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둘 다 대학을 갔습니다. 
그래서 아들의 이 사진을 가지고 왔잖아요. 이눔아가 전교에서 하얼
사범대학이 전국적으로 이름 있잖아요.……. 거기 음악학부에 갔는
데 전교에서 악리 시합을 합니다. 이놈이 1학년 신입생인데 대담하
게 신청을 하러 갔어요. 옆에 선생이 ‘야, 이 과목은 개강도 안하고 
배우지 못했는데 네가 무얼 안다고 하느냐’ 하지만 사합에서 1등을 
했습니다. 선생하고 공동 1등을 했어요.. 이 사진이 바로 학술위원회
에서 발급한 상장이에요. 그 상장을 찍어왔어요. 그게 뭔가 하게 되
면. 제가 집에서 가르쳤어요. 악리란  모르는 사람은 신비하게 생각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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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선생이 가르칠 때도 대단히 어렵게 배워 주는데 기실은 그기에 
다 내재적인 규칙과 공통적인 원리가 있는데 그것을 가르쳐주면 저
절로 빨리 배워 낼 수 있지요. 딸도 미술을 했는데 미술을 제가 집
에서 많이 가르쳤지요. 큰 인물은 안 되었지만 이거로 밥벌이를 하
고 있으니 성공이라고 할 수도 있지요. 그래 혹시나 안 믿으실까봐 
내가 그 대학교 때 했던 그림들을 사진으로 찍어서 가지고 왔습니
다. 제가 대학교 때 했던 그 겁니다. 그 때는 왜 그렇게 무엇이나 하
면 잘 되는지요. 뭐든지 잘 되어요.
  76년 대학교 때 대학에서 등수평 비판 대자보 흑판보를 내여야 
하는데 마침 미술계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거느리고 외지에 사생을 
가고 없어 흑판보 앞에 그림을 그리지 못해 당위 선전부부장이 저를 
찾아 왔어요. 저가 대학 학생회 선전부장으로 있었거든요. 그래서 제
가 하겠다 하고 그림을 두개 그려서 흑판보를 내였지요. 앞에는 맑
스를 위주로 한 엥켈스, 레닌, 스탈린, 모택동 5대 위인, 흑판보 마
지막 끝에는 군중들이 등소평을 밟고 있는 그림이었는데 후에 미술
학부의 주임이 저를 찾아 왔어요, 미술 학부로 전학을 하라고 말입
니다. 솔직히 말해서 마음이 동했어요. 그 사람이 중문학부에 영도를 
찾아가서 사정을 해도 놓아 주지를 않아서 가지를 못했어요. 그의 
말씀이 지금 저의 수준이 2학년생 보다 더 높으니 미술을 하게 되면 
전도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주임의 허락으로 저는 미술계의 
여러 활동에도 무람없이 참가하고 많은 것을 배웠지요.
제6장 결혼과 초국가적 가족관계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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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미술 교육에 영향을 준 전창국 대학교 시절 습작들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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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창국 5남매의 초국가적 가족관계 형성
아버지가 55년 북조선에서 돌아오신 후 형제들이 태어났는데 여
동생 3명, 남동생 1명으로 5남매가 되었어요. 
친척 환갑에 참석한 전창국 부모 (좌측: 아버지, 우측: 어머니,1970년대) 
제가 대학교 시절에 영향을 받은 그것이, 부친의 한 말이 있습니
다.  “창국아 다른 거는 모르지만 조선전쟁은 우리가 먼저 총을 쐈
다. 그 총도 내가 제일 앞장선 사람이다. 그건 불가피한 사정이었
어”. 그렇지만 그때는 이 말은 누구도 할 수도 없거든요 아는 사람
도 없었어요. 조선 전쟁의 내막. 지금은 다 공개된거고. 특히 소련의 
제6장 결혼과 초국가적 가족관계 형성 
 
127
비밀 정보가 누설되면서 북한에서 남침한 그 사실이 세상에 돌다나
니까 이제는 공연한, 그때는 그 말이 입 밖에 내는 사람이 부친은 
몰래 내한테 언제든지 이거는 바뀔 수 있을 날이 있을 것이다. 이 
말을 했기 때문에 선생님한테 말씀을 올리지만 부친이 56세 때 교
장에 계실 때 아버님 빨리 집에서 이 책을 만드세요. 아버지는 조선 
전쟁의 첫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끝까지 경험했었는데 아버지가 세상 
뜨게 되면 이걸 누가 압니까. 그래서 이걸 안 쓰게 되면 누가 알겠
습니까. 그래서 부친이 저의 말 듣고 집을 짓다가 교통사고로 57세
로 세상을 떴습니다. 
1979년 전창국 부친 강화담화 발표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128
 
  아버님은 온 동내의 존경을 받아시면서 좋은 일도 많히 하시고 성
의 노력모범까지 되셨고 세상을 뜨신 후 골회도 열사릉묘에 모셔졌
지만 그 게 저에게는 안위가 되지 않아요. 살아 생전에 효도를 못 
한 것이 가슴에 못으로 박혔어요. 아버님이 세상 뜨신 이듬해에 어
머님도 한여름 더위에 힘들게 콩밭을 메고 오시다가 도랑 옆에 스러
져서 세상을 하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십 몇년 동안 환갑 집에 가지 않습니다. 가면 눈물부
터 나요. 부모님들이 60을 고개를 못 넘겨서 환갑잔치를 치르는데에 
가면 눈물부터 나요. 그래서 한 십년동안 환갑집에 발을 끊었습니다. 
한 십 몇 년 지나고 나니까 약간 조금 돌아오는데 그때는 어려운 가
정에서 너무 가난한 가정에서 크니 눈물이 너무 헤펐어요. 그런데 
문화혁명때 눈물이 너무 말라버렸어. 그래서 내가 신문에 수필을 썼
는게 <눈물의 변주곡>이라 해가지고 정감의 변화를 글로 썼습니다
만 그 후로는 어떻게 인성의 회복이랄까 또 눈물이 생겼어요. 그런
데 제가 생각하기에 그게 약한 게 아니고 다른 한, 그 남자가 눈물
을 흘리는데서 약하다는 거 보다 오히려 강한 표현이 아닌가 싶기도 
생각이 듭니다.
  우리 오남매는 지금 남동생 전충국 한국 서울에 있습니다. 한국 
마누라를 구해서 거기서 살구오. 그 다음에 첫째 여동생 전창옥은 
몽골 아영기 조선중학 학교 교원이에요. 이미 퇴직했습니다. 
 둘째 여동생 전연옥이는 농촌에 시집갔습니다. 지금 한국 가가 있
습니다. 둘째 여동생 연옥이는 내 학교 간다고 공부 못하고 집에서 
뒷바라지했지요. 가가 제일 불쌍하지. 막내 여동생 보옥이라고 있어
요. 보옥이도 시내 국민학교에 교원으로 있었습니다. 지금은 남아공
에 가가 있어요. 유학간 딸 공부 시킨다고.
제6장 결혼과 초국가적 가족관계 형성 
 
129
<보충자료>
조선족 사회의 한국 이주
조선족 사회는 1990년대 개혁개방과 한중수교를 계기로 대규모 인구인동이 
일어났다. 개혁개방으로 조선족 인구의 절반 이상이 원거주지를 떠나 중국의 
대도시나 연해부로 이동하였다. 한중수교 이후부터는 조선족이 한국, 일본 
등 해외로 진출하게 되었다. 
특히 한국으로 이주는 2007년 방문취업제를 기점으로 그 속도가 가파르게 
증가하였다. 외국인출입국관리본부의 통계에 따르면 2015년 7월 31일 현재 
1,801,410명의 체류외국인 중 조선족이 차지하는 비율은 30%가 넘는 수치
로 623,432명이다(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 2015). 
행정자치부의 2014년 통계상 우리나라 국적을 취득한 중국 동포는 7만 6천
921명이다. 조선족의 한국 이주 목적인 방문취업(H-2)은 갈수록 주는 추세
라면 정착 목적의 재외동포(F-4), 영주자격(F-5) 등이 늘고 있다는 점이
다. 방문취업 사증 취득자 수는 2007년 22만 8천686명에서 2009년 30만 6
천283명, 2011년 29만 5천464명, 2013년 23만 739명으로 감소 추세가 뚜
렷하다. 반면 재외동포 사증 취득자 수는 2007년 3만 4천695명에서 2013년 
28만 130명으로, 영주자격 사증 취득자 수는 2007년 1만 6천460명에서 
2013년 8만 7천497명으로 늘었다.
지난해 3월 기준으로 재외동포(F-4)를 국적별로 보면 전체 25만 363명 중
에 중국 동포가 17만 3천499명(69.3%)이며 이 가운데 20대에서 40대까지
가 11만 9천762명으로 전체의 47.8%에 달한다. 현재 우리 정부가 60세 이
상의 중국 동포에 대해 재외동포 체류자격을 주는 것을 고려하면 20∼40대
의 비중이 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중국에서는 '조선족 공동화' 현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한중 교
류 확대와 우리나라 기업의 중국 투자 때문에 중국 동포들이 한국 기업이 
있는 베이징(北京)·칭다오(靑島)·상하이(上海) 등지나 한국으로의 이주와 정
착이 급증하면서 지린·헤이룽장·랴오닝성의 조선족 집거 지역은 해체 위기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자료 출처 : 법무부 출입국 외국인 정책본부 통계 자료 및 연합신문 2015/2/4
제7장 흑룡강신문 특약기자와 공정학원 
교수생활
흑룡강신문 특약기자로서의 활동
엄동설한 시나리오 집필과 조선족 영화 창작 
치치하얼 공정학원 교수활동과 한국과의 교류 진행
한국 방문 활동 (1990년대)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132
 
▮ 흑룡강신문 특약기자로서의 활동 
  치치하얼 신문사 기자 할 때 동시에 흑룡강신문사 특약기자 시작
했어요. 이것도 하고 그것도 하고. 원래는 흑룡강일보 (중국어)치치
하얼시 주제기자로 계약 중이였는데 치치하얼 신문사에서 놓아 주지 
않아서 조선글 심문사와 계약을 했어요. 빼앗길 염려가 없었으니까  
동의를 했어요. 제일 첫 계약 맺은 거는 그것도 어떻게 됐는가 하면 
김 씨란 분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주재기자로 있었는데 하얼빈에 가
고 싶어 했어요. 그런데 조동을 안 해줘요, 여기 사람 없으면 안 된
다. 그래서 이 사람이 군중부에 부장 최 씨라고 유명한  술꾼인데 
그 사람 술 한잔 먹여서 같이 술 들고 우리 집에 찾아 왔어요. 이 
일은 누가 맡을 사람 있으면 된다 해놓으니까 저를 찾아온 거예요. 
내가 지금 하얼빈으로 가야되겠는데. 내 평생 일인데. 그렇잖아요. 
그때는 얼마나 하얼빈 가고 싶어 했겠어요. 그런데 이 기자 일을 받
을 사람 없어서 그러니까 저 동생 이러고 하면서 이거 좀 일 좀 해
달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사람 찾을라 해도 마땅한 사람이 없
다. 그 다음에 이 일을 맡지 않겠냐고 중학교 어문선생님을 찾아 가
보라 그랬어요. 
  내가 신문사 출근하면서 다니기도 힘드니까 안하겠다하니까 안된
대요. 신문사에 그 사람이 어디서 말을 들었는지 전창국이 아니면 
다른 사람 받을 사람 없다. 니 그 사람 잘 동원해 봐라. 그래 가서 
찾아 왔는데 신문사 특약기자를 관리하는 군중부 부장을 데리고 또 
제7장 흑룡강신문 특약기자와 공정학원 교수생활
 
133
왔어요. 우리집에요, 술 먹으면서. 우리 저 김 기자를 신문사로 데리
고 가겠으니까 좀 받아달라고. 그래서 제가 할 수없이 특약기자 일
을 맡았지요. 안면을 봐서 말입니다.
취재 내용 및 취재료 기록 
  본격적인 특약기자는 8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계속 하고 있습니
다. 확실히 바빴지만 저 쓰는 게 빠르거든요. 그 때는 컴퓨터 없었어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134
 
요. 타자기로 하는데, 제가 근무하는 교육국 중학처에서는 타자원을 
여섯이나 바꿨어요. 내 글은 알아란필이 되어서 알아보는 사람이 없
어요. 원래는 글을 좀 잘 쓰지는 못했지만 알아보도록 썼었는데 글
을 쓰는 양이 너무 많아 속성 필기를 본 따서 사회주의 하면 사 자
에 금 하나 쭉 그어놓으면 우리 타자원  알아 봐요. 그때 국가 행정
부문에는 무슨 재료가 그렇게 많은지 , 그 일을 어떻게 해 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흑룡강신문 특약기자로 활동한 취재 기사 (1988년도)
  컴퓨터가 생기고 했지만 제가 많이 높이 쓴 거는 국가 정치협상 
부주석으로 있던 주철농(周铁农)이라고 그 분이 우리 문교부시장 있
을때 강화를 시작해서 흑룡강성 성장에 이르기 까지 교육에 관한 강
화문을 썼습니다. 국에 국장들은 일반적으로 교육국에도 비서실이 
제7장 흑룡강신문 특약기자와 공정학원 교수생활
 
135
있잖아요? 비서실에 있는 거는 한 달 전에 계획에 따라서 국장님 강
화 같은 거는 그들이 하는데, 어디 급하게 혹은 임시로 시찰 오셔서 
한마디 하겠다하면 사무실에서 또 찾아옵니다. 강화 중에 업무에 관
계되는 건 제가 써요. 거르기에 저는 60세까지 남아 있었던 게 글을 
써 주니까 써먹을 수 있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있으려고 해도 찾아
서 담화를 하여 봉급을 올려주면서까지 집에 가라고, 중국에는 아직
까지 퇴직할 때가 4년 남았는데 봉급을 두 곱 올려줄게 하면서 자리
를 비우면서 돈 받아 챙기고는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을 앉히는 거죠. 
현실이 그러니까, 그런 데서 저는 살아왔어요. 사람들은 저 사람은 
마음가짐이 좋다 어떻게 해도 좋고 의견이 없고 반발을 하지 않으니
까요.  
흑룡강 신문 인터넷 기사 (2009년도)
  
교육국 시절 취재 가는 일에서 저는 시간이 있죠. 왜요? 뭐 직장에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136
 
차가 있어 어디 시찰 간다 차 달라 하면 차 줘요. 취재하고 와가지
고는 저는 뭐 계속 저는 처장이지만 외지에 나가게 되면 황제처럼 
받들렸어요. 아무 데나 가도 저한테만 잘 보여도 그 만한 수확이 있
을 수 있지요, 성급 학교 평선, 사업 질량분석, 학교 발전 기획 등 
모든 업무를 우리 처에서 관활 하니 등한시 할 수 없지요. 확실히 
그 때는 모든 사업을 추진하기 쉬웠어요.  만약 그때 영화를 찍으러 
와도 돈 한 푼 안 내고 찍을 수 있었어요. 현성이 먼 곳에 떨어져 
있으니까 할 수 없이 일본 차를 가지고 출장가야 해요. 국산 차 중
간에서 고장나면 일을  할 수 없으니깐요. 제가 그 차를 많이 썼습
니다.  
  저는 소수민족교육을 몇 년 하다가 그 다음 기구조정으로 업무부
문을  합병한 후 전시 중고등학교 업무를 봤으니까 내가 어디 가겠
다 하면 갈 수 있어서 서업조건이 매우 좋았죠. 가게 되면 이까지 
왔으니 조선 동네 한 번 가보자  해요. 그 사람들은 잘 알아요. 조선 
동네  있는 현에 내려가게 되면 조선 집에다가 촌장한테 개 잡아라 
조선 사람들끼리 모여서 즐길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가게 되면 조
선족 마을이나 사람에 대한 기사를 쓰서 투고도 하기에  겸사겸사 
일이 다 잘 되는 거죠. 그 때의 취재 범위는 흑룡강의 서북지구와 
내몽고 전역이였지요. 하기에 내몽골에도 자주 가야 합니다.
  지금도 계속 하고 있어요. 그 때는 처음 할 때는 계약서가 있어요.  
활동경비 500원, 경비는 싫다. 뭐 그리고 사진기도 사주고 그랬지만 
계약서 하게 되면 뭐가 있어야 하는가 하게 되면 반드시 톱 기사 1
년에 4편은 완성해야 해요. 일반적으로 저는  톱기사가 많이 나가는
데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저는 편하게 했죠. 어떤 사람은 계약을 해
서도 임무완성을 못하게 되면 취소해버립니다. 너는 자격 없다. 저는 
제7장 흑룡강신문 특약기자와 공정학원 교수생활
 
137
그런 쪽으로 신경 써 본 적...... 내가 쓰기 싫어서 안 쓴 거지. 임무 
못 완수한 적은 없어요. 
흑룡강 신문 특약기자 계약서
  신문기사 뿐만 아니라, 저는 조선어 전공이 아닌데 성에서 1년에 
한 번씩 조선어학술대회를 합니다. 저는 쓰면 무조건 1등이에요 어
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어요. 목단강에 있는 조선어 교육부에 부장이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138
 
전화 왔어요. 형님, 금년에 형님 쓰지마. 금년엔 자기가 쓰겠다고. 
형님만 쓰면 제 몫이 없다고, 그 때 우스갯소리로,  한번은 오상사범
조선족학교를 빌려서 학술 논문 평선을 했는데 저가 그 때 1등 했다
고 돈을 상금으로 돈 500원 줬는데, 1000원도 넘게 썼어요. 이분들 
상금 받았다고 안가고 기다리다가 밥을 먹다나니까 상금 모자라서 
또 돈 500원 더 보탰습니다. 그 때는 참 재미도 나고, 정말 재미났
어요.
  흑룡강 신문은 중국어로는 안 해요. 완전히 우리 조선어로만. 그런
데 국내 조선어로 나오는 신문 가운데서, 뭐가 다른가 하게 되면 다
른 성에 것은  조선어로 쓰지만 흑룡강성 신문은 완전히 한국어 문
법으로, 발음법도 한국어로 씁니다. 그게 요렇게 변한 지는 한 7-8
년 됩니다. 저가 쓸 때는 조선어로 썼고요. 지금은 이제 다 한국식으
로, 그래서 중국 최대의 한글신문이라는 말이 거기서 나왔습니다. 다
른 데는 아직까지 원래의 조선어규범으로 꾸리고 있습니다. 그 다음
에, 한국어로 발행을 하는데 제일 처음에는 말썽 많았어요. 이거 못 
알아 듣는 말 너무 많다. 그런데 차츰차츰 시간이 지나니까 어차피 
우리도 이 길을 걸어야 된다. 그렇잖아요. 마치 조선족들이 말하는 
가운데  중국에 살다나니까 중국말 자꾸 섞어 하는 것처럼 글은 같
은 글이다. 그게 글로벌 시대에 새로운 지식을 배우는 데에 유리하
지 않느냐? 그런 생각이지요. 
제7장 흑룡강신문 특약기자와 공정학원 교수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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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동설한 시나리오 집필과 조선족 영화 창작 
교육국에서 저는 퇴직하기 전에 저 혼자 사무실에 있으면서 그 때 
쓴 게 중국어로 엄동설한 (嚴冬雪寒)이라고요, 하나 쓴 게 있어요. 
69년에 제가 사람들 몇 번 데리고 저 소련하고 인접한 변경에 우
 파러 갔어요. 옛날에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 우물을 파게 되
면 돈이 많이 생겨요. 그만큼 위험해요. 보통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우
물을 파다가 물 안 나오면 또 다시 파야 하는데 목숨 걸고 하는 일
이에요. 그래서 중국에는 한족들 우물 파는 사람 없어요. 
  회사는 단체에서 지들이 기계로 우물을 팠으면 팠지 인공으로 우
물을 팔 엄두도 내지 않지요. 다 조선족들이 소련땅 쪽으로 가게 되
면  백분의  백이 다 조선분들이 우물 팝니다. 그만큼 돈이 많으니
까 악을 쓰고 목숨을 걸고도 일을 하는데. 그러고 우리는 이제 수백 
헥타르 논밭이 다 물에 잠기고 먹을 게 없어서, 내년 봄에 땅을 갈
라면 돈이 필요하고 그래서 제가 사원들, 건장한 사원들 하고 우물 
파러 갔어요, 옛날에 우물파기 경험 있는 사람 한분을 찾아서  사원
들 몇이 가가지고 우물을 팠어요. 그걸 해서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살기위해서 이렇게 고초를 겪었다고. 이런 내용이지요.
  그래서 그걸 또 다시 한 번, 조선족의 삶의 현장을 반영한 그런 
영화를 평생에 그 영화를 찍겠다. 마음을 먹은 원인이 중국의 다른 
민족은 몽고족들은 자기 연출에, 배우들에 해서 영화가 있는데 유독 
조선족은 조선족 글도 있고 문화는 발달했다면서 조선족 연출하고,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140
 
조선족이 배우가 되고 조선족 생활을 반영한 영화는 하나도 없어요. 
있어도 중국 배우들이 와서 조선족역을 한 게 있었지요. 제가 그래
서 조선족 영화를 찍을 때 그 사람들 쓸 때 조건이 다 조선 사람들
끼리 해보자. 뼈 속에 조선놈이란 것이 그게 있어요
엄동설한 시나리오 원본
  
  문화혁명 때 민족주의자라는 모자를 쓴 것도 실은 제 민족에 대한 
애착이겠지요. 그런 생각이 지금도 살아 있은 것이지요. 시나리오로 
창작을 마치고 국내 영화 제작사와 연계를 하려고 하는데 마침 인터
넷에 올라가니까 한국에서 그 해 2007년인가요? 아, 해외에 시나리
제7장 흑룡강신문 특약기자와 공정학원 교수생활
 
141
 모집한다는 소식이 들려요. 보니까 벌써 제4분기 평선이 며칠 안 
남았어요. 그래, 제가 인터넷으로 그, 이런 중국글로 된 것도 되는가.  
했더니 된다고 하기에 그대로 보냈는데 그대로 되돌려 왔어요. 이걸 
번역을 하라. 왜 번역하라는가? 한국에 시나리오 극본을 평선 할  
교수분 들이 다 중국어를 모르니까 우리 글로 번역해라. 그래서 뭐 
며칠 안 남아가지고, 한 이틀 저녁인가 씨름해 가지고 한국어로 번
역하여 보냈는데, 또, 그 해 7편 했는데, 또 제게 추천작으로 당선 
되었어요. 그 시나리오, 그 시나리오 한국 영화 시나리오 마켓에 올
라가면 거기에 있을 겁니다.
  세계적으로 모집했었는데 외국인으로 딱 하나고, 그 해 올라온 걸 
6개상을 수여했는데 제가 추천작으로 올라왔습니다. 외국사람으로 
계약은 안하고 여기서 좀 더 홍보를 해서 하려고 했는데. 전에 중국
에 젊은 영화 감독 장률이랑, 박준희랑 이전에 우리 끼리 약속이 있
었어요. 우리 조선족끼리 영화를 찍어 보자고. 장률아랑은 후에 결국
성공은 헸지요, 한국의 분들이 투자를 해서 부산영화제에서 상까지 
받았지요. 그런데 제가 공정학원에 초빙되어 한국어 학과 개설에 설
치 하다 보니까 그만 영화 제작이 영향을 받아 시간이 지나서 흐지
부지. 그 후에 한국 영화제작사에서 전화는 몇 번 받았어요. 오시게 
되면 한 번 인터뷰 하자 만나서, 그런 거는 있었지만 그거는 여기에 
올려놨기 때문에 그 분들도 여기에 올라온 거 보고 전화 왔더라고
요. 그 때는 한창 학교 출근하고 바쁠 때이니까 그런 쪽으로 신경도 
쓰지 않았고요. 인터넷 여러 영화제작사에서 올라와서 보고 간 것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어요. 
  그 때 기실은 제가 직장에 있을 때 어느 회사에서 왔으면  돈 크
게 안 쓰고 영화로 나올 수 있었어요. 그 때 저 인맥으로만 해도 얼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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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든지 해 줄 수 있었는데……. 
  그 때는 제 여건이 안 되어서……. 결국은 하지 못하고 딱 그 때가 
퇴직하기 전이었거든요. 그 때만 왔으면 흑룡강 현장에 가도. 저 아
는 인맥으로, 현장에 가서도  돈 안 받고도 촬영지나 잠자리도 뭐든
지 제공 받을 수 있었고 시 정부에서도 해줄 수 있는, 시 정부에서 
안 되면 우리 교육국에서도 그만한 그걸 지원 해  줄 수 있거든요.
그러면 우리 그게. 우리 시 뿐만 아니라 우리 교육국 이름이 나는데. 
저번에 정율성의 삶을 담은 영화 <태양를 향하여>에도 우리 치치
하얼교육국 이름이 올린 것처럼  그 밑에 다 우리 시 교육국 이름이
나 차치하얼시 이름이 나면 다 좋은 일이지요. 중국의 유명한 작곡
가 정율성은 조선족 분으로 중국과 북조선의 군가를 작곡한 사람인
데 저가 국가 군부의 계획에 따라 정율성의 시나리오를 쓴다고 몇 
달 북경에 가 있었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낯을 중요하게 여기잖아요. 
▮ 치치하얼 공정학원 교수활동과 한국과의 교류 진행
  치치하얼 우리 여기 3개 대학에서 한국어학과를 개설했는데요. 우
리, 그. 공정대학에서는, 그 소생이 안 되가지고 끝난 지가 삼 년 되
었습니다. 치치하얼대학도 국립대학이지만 전에는 3개 반을 초생하
다가 지금은 겨우 한개 반 유지하고 있고, 우리 공정대학에는 한 개
반을 초생하다가 한개 반을 채울 수 없어 다른 전공으로 분산시키고
하여 한국어뿐 아니라 일어하고 러시아어 전공 초생을  중지하고 영
어학과 한개만 공동어로 남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 대학교에 외국
제7장 흑룡강신문 특약기자와 공정학원 교수생활
 
143
어학부는 이제 없어지고, 영어만 남아 있습니다. 
  얼마 전에, 한국 연수원에서 두 분 오셨었는데 그 분들이 무슨 우
리 조선족 역사에 대해서 쓴다고 우리 학교를 방문했지요. 한국과 
교류할 땐 한 몇 기 졸업생들 중에 한 몇 십 명, 전라도 대학으로 
많이 유학을 보냈습니다. 만일 그때 경북과 교류가 되였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치치하얼대학 한국어학과 교연실주임도 경북대학 졸업
한 분인데…….
치치하얼 공정학원 한국어 교육 관련 기사 
  한국은 예전에 여러 번 갔다 왔어요, 학생들을 그리로 유학 보내
야 되니까요. 그 유학생, 유학 가는 학생들. 현재 주로 조선대학, 광
주대학, 남부대학, 목포대학, 다 전라도 쪽으로 보내죠. 그 쪽으로 
이미 계약이 있어서 다른 곳엘 보낼 수 없죠. 그 외에도 저가 사 교
육국에 있을 때 부터 시작하여 한국의 6개 대학, 3개 고등학교, 3개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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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자매결연을 맺고 학술교류와 상호 방문을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치치하얼 지구에서 한국하고 대학교나 민간단체들, 
정부 지간에 교류 활동 있을 때마다 제가 계속 따라 다녔거든요.  
뭐 통역 삼아 또 정부를 대표해서 나가다보니까, 제가 가게 되면 통
역도 되고 정부, 그, 저, 관원도 되니까 그만큼 경비가 절감된다고 
해서 될 수 있으면 제가 많이 따라 다녔습니다. 그래서 자주 가죠. 
근데, 근래에는 학교에, 한국어학과하면서 유학생들 보내는 거 외에
는. 정부쪽으로는 안 갔습니다.  저 교학에 지장 주지 말자. 애들 공
부하는 데 지장 주지 않게……. 제가 그런 민족에 대한 애심이 없다
면 아예 전에 이 대학에 오지도 않했을 겁니다. 
  저는 퇴직을 하고 한국에 대학과 중국어학과 원어민 교수로 취직 
하려고 갔지요. 며칠이 안 되어 치치하얼공정대학 총장이 부총장 한
분과 교수 한 분을 파견하여 한국에까지 찾아왔어요. 하는 말씀이 
지금 공정대학에도 외국어 학부를 설립하여 한국어 학과를 설치하려
는데 좀 와서 같아 사업을 하자고 말입니다. 정말 큰 고뇌에 빠졌으
요. 왜냐하면 저에게는 돈이 정말 수요 되었어요. 한국에서 취직하게 
되면 그 수익이 중국과는 비교가 안 되죠 돈을 그렇게 중히 여기는 
가고 생각하시겠지만 저의 내막을 알고 보면 수긍이 갈 겁니다. 
  제가 평생에 큰 고비를 3번 겪었어요. 문화혁명 때 반혁명분자로 
정신적 타격, 1991년에 패암이라 해서 육체적, 정신적 타격, 1995년  
마누라가 노무송출일을 보다가 한국 브로커들에게 100만원 사기, 중
국에서 인민패 100만원은 그 때는 천문 숫자지요. 지금도 그렇지만 
물론 그 브로커들은 법적제재를 받았지만 그것이 제에게 준 타격은 
너무나 컸어요. 민사 소송을 하지 못하니 재가 그 빚을 다 값아야 
해요. 그러니 저에게는 돈이 중요했어요. 하지만 다른 일이 아니고 
제7장 흑룡강신문 특약기자와 공정학원 교수생활
 
145
한국어, 우리 민족 글을 가르친다 하니 아까움을 매치고 중국으로 
돌아와 대학의 한국어학과 교수, 한국어전공지도위원회 주임으로 취
임되어 사업을 했습니다
 
전창국 교수가 집필한 사회복지학개론서 
  그리고 사회복지 관련 책을 제가 만들었어요. 우리 대학에 가정
(家政)스비스라 해서 전공이 있었어요. 가서 보니 배워야 할 과정을 
보니 너무 적고 개본 내용이 너무 협소하기에 이 책을 만들어 보려
고 생각을 했고 그 전에 한국대학을 견학하면서 중국에서도 오래 잔
아 이 학과를 개설하겠다 판단하여 중국에선 처음으로 만들어졌는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146
 
데, 만들고 보니까  아직까지, 이른 것 같아요. 학개론을 개강했습니
다. 선택과여서  각 학년의 학생을 대상으로 시간을 모두어 하다나
니 지정된 시간에 수백명이 동시에 청강하니 마이크로 서서 해야 합
니다. 힘이 들지만 견지를 핬어요. 다른 대학에 초빙되여 가지 안으
면 계속 해 볼가 합니다. 이러나 저러나 중국에서는 처음으로 개강
하는 학과나까요. 이 책을……. 사용……. 각 대학에 이 학과가 없으
니까. 책이 안 나가고 있어요. 사회학도 있고  일부 복지학 내용도 
언급은 되고 있는데 사회복지학은 중국 대학에는 아직 없습니다. 북
경을 비롯한 몇개 대학에 이 학과개설을 위한 건의서를 보냈는데 아
직은 회신이 없습니다. 중국에서는 처음입니다.  
  또 한국어학과 하면서 아이들 교재가 없어가지고 제가 하나 만들
어 봤습니다. 기념으로 드리겠습니다.< 실용 한국어 회화>인데 한
국어 학과 학생들의 교재가 너무 부족하여 만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출판된 책자중에서는 갸장 종합적이고 현대판의 간물이죠. 전에는 
책을 쓰면 원고비도 지불하여 주는데 지금은 돈이 없으면 책자 출간
도 안됩니다. 저는 대학과 합동을 하여 출간하게 되면 힉교에서 수
고비도 주기로 되였는데 저는 수고비를  받기는 커녕 모든 책자를 
학교 도서실에  기증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한국 광주대학에서 
한화 240만원을 책자 발간에 쓰라고 보내여 욌지만 저는 한 푼도 
남구지 않고  그것 마저도 모두 대학에 넘겼습니다. 한국어의 발전
에 자그마한 기여라도 되였으면 하는 그 마음이겠지요. 부끄럽습니
다만
제7장 흑룡강신문 특약기자와 공정학원 교수생활
 
147
전창국 교수가 집필한 실용한국어 회화 책
  지난해에 일 년 동안  공정대학의 요구에 따라 선택과목으로 사회
복지학개론을 개강했습니다. 선택과목이어서 각 학년의 학생을 대상
으로 시간을 모두 하다보니 지정된 시간에 수백명이 동시에 청강하
니 마이크로 서서 해야 합니다. 힘이 들지만 견지를 했어요. 다른 대
학에 초빙되어 가지 않으면 계속 해 볼까 합니다. 이러나 저러나 중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148
 
국에서는 처음으로 개강하는 학과나까요. 
흑룡강신문 투고된 전창국 교수의 글 (특약 기자 생활 회고 : 2006년)  
 흑룡강신문의 전창국 교수가 쓴 SSK 연구단 기사 (2015.9.5.)  
 
149
부  록
1. 전창국의 흑룡강 신문 특약기자 활동물 
2. 전창국의 교육국 시절 관련 투고 글  
3. 주요사진 및 상장, 증명서 기록물
 
151
1. 전창국의 흑룡강성 신문 특약기자 활동물 
1-1. 1988년 4월 25일 기사 : 치치할시 조선족 중학교 군사훈련 소개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152
 
1-2. 1988년 7월 15일 기사 : 치치할시 조선족 중학교 지철교장 소개 
부록 : 1. 전창국의 흑룡강성 신문 특약기자 활동물 
 
153
1-3. 1998년 8월 기사 : 교육사업 및 치치하얼 조선족 마을 홍수피해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154
 
1-4. 1998년 9월 기사 : 치치하얼 조선족 중학교 교육과 선명촌 농부소개
부록 : 1. 전창국의 흑룡강성 신문 특약기자 활동물 
 
155
1-5. 1989년 3월 : 새학기의 치치하얼 조선족 중학교 중퇴 비율 보고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156
 
1-6. 1989년 : 치치하시 조선중학교 배구팀과 조선족 주임의사 소개
부록 : 1. 전창국의 흑룡강성 신문 특약기자 활동물 
 
157
1-7. 1989년 11월 : 한족 고아를 입양한 조선족 부부 이야기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158
 
1-8. 1989년 : 눈강평원 미을과 서광촌 지도부 소개
부록 : 1. 전창국의 흑룡강성 신문 특약기자 활동물 
 
159
1-9. 1989년 12월 : 치치할시 정부 민족 정책 소개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160
 
1-10. 1990년 1월 : 흥선촌 분교 설립 소개
부록 : 1. 전창국의 흑룡강성 신문 특약기자 활동물 
 
161
1-11. 1990년  : 치치할시 학생간부 최동일 학생 소개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162
 
1-12. 1991년 : 명성촌 종이공장과 고려병원 한희원 원장 소개
부록 : 1. 전창국의 흑룡강성 신문 특약기자 활동물 
 
163
1-13. 1993년 : 치치할시 첫 중한합자 기업과 선명촌 부녀 운동회 소개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164
 
1-14. 1993년 : 각지 체육 운동회 소식 및 소학교 새교재 연구 토론회 소개 
부록 : 1. 전창국의 흑룡강성 신문 특약기자 활동물 
 
165
1-15. 1994년 : 항일독립운동가 신영호의 묘 이전 관련 기사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166
 
1-16. 1993년 : 조선족 교육개혁 연구 토론회 
(오상조선족 사범학교, 흑룡강신문사 과학교육부 공동주회 :토론자 참석)
부록 : 1. 전창국의 흑룡강성 신문 특약기자 활동물 
 
167
1-17. 1994년 : 중한합자기업 톱밥으로 목탄 만들어 수출 소개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168
 
1-18. 2007년 : 치치할시 민족종교 사무국 국장 박수길 취임 소개
부록 : 1. 전창국의 흑룡강성 신문 특약기자 활동물 
 
169
1-19. 2009년: 치치할직업학원 한국어 교육 소개 (흑룡강신문 인터넷 기사)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170
 
1-20. 특약기자 활동 관련 취재 내용과 취재료 기록 
부록 : 1. 전창국의 흑룡강성 신문 특약기자 활동물 
 
171
1-21. 흑룡강신문 특약 기자 계약서
172
 
2. 전창국의 교육국 시절 관련 투고 글 
2-1. 교육잡지  ‘치치하얼 교육’  2001년 10월에 실린 글
부록 : 2. 전창국의 교육국 시절 관련 투고 글
 
173
2-2. 교육잡지  ‘치치하얼 교육’  2001년 10월에 실린 글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174
 
2-3. 교육잡지  ‘치치하얼 교육’  2001년 10월에 실린 글
부록 : 2. 전창국의 교육국 시절 관련 투고 글
 
175
2-4. 교육잡지  ‘치치하얼 교육’  2001년 10월에 실린 글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176
 
2-5. 교육잡지 ‘치치하얼 교육’ 2001년 11월에 실린 글
부록 : 2. 전창국의 교육국 시절 관련 투고 글
 
177
2-6. 교육잡지 ‘치치하얼 교육’ 2001년 11월에 실린 글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178
 
2-7. 교육잡지 ‘치치하얼 교육’ 2001년 11월에 실린 글
부록 : 2. 전창국의 교육국 시절 관련 투고 글
 
179
2-8. 교육잡지 ‘치치하얼 교육’ 2001년 11월에 실린 글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180
 
2-9. 학성정협 (치치하얼 정치협상) 2002년 5월에 실린 글
부록 : 2. 전창국의 교육국 시절 관련 투고 글
 
181
2-10. 학성정협 (치치하얼 정치협상) 2002년 5월에 실린 글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182
 
2-11. 학성정협 (치치하얼 정치협상) 2002년 5월에 실린 글
부록 : 2. 전창국의 교육국 시절 관련 투고 글
 
183
2-12. 눈강 잡지 (치치할시 조선족 중학교 문집 :1985년 제 1호 표지)
                    전창국 초중 시절 글이 실림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184
 
2-13. 눈강 잡지 (치치할시 조선족 중학교 문집 :1985년 제 1호 목차)
부록 : 2. 전창국의 교육국 시절 관련 투고 글
 
185
2-14. 눈강 잡지 (치치할시 조선족 중학교 문집 :1985년 제 1호 내용)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186
 
2-15. 눈강 잡지 (치치할시 조선족 중학교 문집 :1985년 제 1호 내용)
부록 : 2. 전창국의 교육국 시절 관련 투고 글
 
187
2-16. 눈강 잡지 (치치할시 조선족 중학교 문집 :1985년 제 1호 내용)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188
 
2-17. 눈강 잡지 (치치할시 조선족 중학교 문집 :1985년 제 1호 내용)
부록 : 2. 전창국의 교육국 시절 관련 투고 글
 
189
2-18. 눈강 잡지 (치치할시 조선족 중학교 문집 :1985년 제 1호 내용)
조선어 학습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190
 
2-19. 눈강 잡지 (치치할시 조선족 중학교 문집 :1985년 제 3호 표지)
부록 : 2. 전창국의 교육국 시절 관련 투고 글
 
191
2-20. 눈강 잡지 (치치할시 조선족 중학교 문집 :1985년 제 3호 목차)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192
 
2-21. 전창국 이력서 : 중공중앙조직부 1988년 (1)
부록 : 2. 전창국의 교육국 시절 관련 투고 글
 
193
2-22. 전창국 이력서 : 중공중앙조직부 1988년(2)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194
 
2-23. 전창국 이력서 : 중공중앙조직부 1988년(3)
 
195
3. 주요사진 및 상장, 증명서 기록물
3-1. 주요 사진
전창국 아버지 군 귀환후 막내고모와 촬영 (1955년)
전창국 아버지 선명촌 교장 시절 (앞줄에서 좌측에서 7번째)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196
 
일제시대 전창국 장모 집앞 촬영 (좌측 장모 어린 시절)
전창국 부인 김태연 젊은 시절 (우측: 전창국 부인)
부록 : 3. 주요사진 및 상장, 증명서 기록물
 
197
선명촌 홍수시 중국 국무원 총리방문 (1989년)
우수한 홍수대처로 천안문 관장 국기 선명촌 수여 (1989년)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198
 
광주 학생 운동 회생자 참배 
경주 화천 전창국의 고조할아버지 묘
부록 : 3. 주요사진 및 상장, 증명서 기록물
 
199
 전창국의 둘째 고모 가족 사진 (둘째 고모부 북한군으로 참전) 
전창국의 세 고모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200
 
3-2. 교사 곽문기의 동생인 곽명기가 전창국에게 보낸 편지(1)
      홍위병 활동시기로 글에 나오는 그들은 반대파를 지칭(1968년)
부록 : 3. 주요사진 및 상장, 증명서 기록물
 
201
3-3. 교사 곽문기의 동생인 곽명기가 전창국에게 보낸 편지 (2)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202
 
3-4. 교사 곽문기의 동생인 곽명기가 전창국에게 보낸 편지 (3)
부록 : 3. 주요사진 및 상장, 증명서 기록물
 
203
3-5. 전창국 부친 북조선 군기록 1955년작성 (1)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204
 
3-6. 전창국 부친 북조선 군기록 1955년작성 (2)
부록 : 3. 주요사진 및 상장, 증명서 기록물
 
205
3-7. 전창국 부친 북조선 군기록 1955년작성 (3)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206
 
3-8. 경주 화천 종문에서 전창국에게 보낸 편지
부록 : 3. 주요사진 및 상장, 증명서 기록물
 
207
3-9. 경주 화전 전씨 전창국 족보 (1)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208
 
3-10. 경주 화전 전씨 전창국 족보 (2)  
부록 : 3. 주요사진 및 상장, 증명서 기록물
 
209
3-11. 경주 화전 전씨 전창국 족보 (3)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210
 
3-12. 경주 화전 전씨 전창국 족보 (4)  
부록 : 3. 주요사진 및 상장, 증명서 기록물
 
211
3-13. 경주 화전 전씨 전창국 족보 (5)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212
 
3-14. 경주 화전 전씨 전창국 족보 (6)  
부록 : 3. 주요사진 및 상장, 증명서 기록물
 
213
3-15. 흑룡강성 교육청 민족교육 사업에 특별히 공헌한 것을 기념하여 
성민족 사무위원회가 수여한 영예 증서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214
 
3-16. 치치하얼시 인민정부가 수여한 전시 민족 단결진보 모범개인에서 
수여하는 영예 칭호
부록 : 3. 주요사진 및 상장, 증명서 기록물
 
215
3-17. 전창국 대학교 시절 미술 습작 작품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216
 
3-18. 전창국의 우물파기 경험을 통한 시나리오 엄동설한 집필 (1)
부록 : 3. 주요사진 및 상장, 증명서 기록물
 
217
3-19. 전창국의 우물파기 경험을 통한 시나리오 ‘엄동설한’ 집필 (2)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218
 
3-20. 전창국의 우물파기 경험을 통한 시나리오 엄동설한 집필 (3)
부록 : 3. 주요사진 및 상장, 증명서 기록물
 
219
3-21. 전창국의 우물파기 경험을 통한 시나리오 엄동설한 집필 (4)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220
 
3-22. 시나리오 엄동설한 집필 (4) 중국어 번역본
부록 : 3. 주요사진 및 상장, 증명서 기록물
 
221
3-23. 시나리오 엄동설한 집필 (5) 중국어 번역본
 
223
찾아보기
(ᄀ)
강건군관학교 / 25, 27, 42
강제이민 / 16
강철 회사 / 39
강철회사 / 39
건천 / 23
결혼 / 4, 14, 20, 24, 38, 75, 
117, 118, 120, 121
경주 / 16, 26, 28, 198, 206, 
207, 208, 209, 210, 211, 
212
계획 / 16, 33, 116, 117, 131, 
135, 142
공산당 / 9, 37, 44, 52, 54, 
60, 92, 111
광저우 / 55, 56, 57
광주학생운동 열사 기념관 / 96
교육국 / 1, 2, 3, 9, 84, 94, 
103, 105, 106, 107, 110, 
111, 113, 115, 116, 134, 
135, 139, 142, 143, 149, 
172
교육청 / 82, 105, 106, 107, 
108, 110, 111, 112, 116, 
213
교육청  / 105
군관학교 / 25, 26, 27, 42
김일성 / 25
군대 / 23, 24, 25, 29, 30, 57, 
85
길림성 / 15
김억수 / 38, 42, 44
김일성 / 25
김태연 / 9, 117, 118, 120, 
196
(ᄂ)
낙동강 / 2, 26, 27, 28
내몽골 / 1, 9, 13, 15, 29, 30, 
31, 34, 44, 48, 57, 70, 
77, 136
농촌 생산대 / 62
농촌생산대 / 53
눈강 / 2, 13, 14, 16, 18, 19, 
20, 46, 49, 107, 158, 
183, 184, 185, 186, 187, 
188, 189, 190, 191, 216
(ᄃ)
다우르족 / 1, 36, 107, 108, 
109
대형마트 / 54, 57, 62
동그릇 / 22, 23
동북산성 / 15
등소평 / 86, 87, 96, 124
(ᄆ)
만족 / 17, 20, 38, 86, 107,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224
 
108
만주국 / 17, 20, 32, 36
만주족 / 20, 36
모택동 / 26, 54, 55, 60, 69, 
83, 87, 91, 94, 124
목단 / 107, 109, 137
무산 / 94, 152
문화대혁명 / 1, 2, 3, 4, 9, 53, 
54, 79
민족주의자 / 3, 61, 62, 140
(ᄇ)
반공쿠데타 / 60
반역분자 / 3, 61
반혁명분자 / 1, 2, 9, 53, 57, 
59, 61, 62, 63, 79, 144
벼농사 / 17, 30, 32, 33, 67, 
68
부락장 / 23
부상 / 27, 28
북경대 / 86, 87, 92, 93, 94, 
106
북조선 / 2, 9, 13, 25, 26, 27, 
28, 38, 39, 40, 42, 45, 
54, 126, 142, 203, 204, 
205
북조선  / 25
(ᄉ)
사진결혼 / 38, 42, 44
사천 / 9, 24, 122
사천해방 / 24, 30
사회복지학개론 / 94, 145, 147
새청년 / 92, 93
생산대 / 9, 43, 53, 62, 63, 
64, 65, 66, 67, 68, 69, 
70, 82, 85, 121
선명촌 / 9, 37, 38, 42, 154, 
163, 195, 197
소학교 / 2, 4, 9, 14, 23, 34, 
37, 38, 39, 41, 42, 43, 
44, 61, 112, 164
수리건설 / 2, 9, 53, 62
수리건설  / 62
수전 / 17, 19, 33
수전 농사 / 19
수전농사 / 17, 33
시나리오 / 2, 131, 139, 140, 
141, 142, 216, 217, 218, 
219, 220, 221
(ᄋ)
아큐정전 / 91
엄동설한 / 2, 131, 139, 140, 
216, 217, 218, 219, 220, 
221
엄동설한  / 139
연해지구 / 14
예술단 / 83, 84
요녕 / 14, 15
용강 / 31, 74, 114
우물 / 2, 64, 139, 216, 217, 
218, 219
위생소 병원 / 121
찾아보기
 
225
이주 / 1, 2, 13, 14, 17, 129
인천등륙 / 27
일본 / 2, 5, 16, 17, 20, 23, 
24, 32, 36, 54, 102, 122, 
129, 136
일본 말 / 24
일본 학교 / 24
일본학교 / 23
임정수 / 9
(ᄌ)
장춘해방 / 25, 30
쟈라이드기 / 31
전봉 / 9, 117, 121, 122, 123
전성렬 / 25
전연옥 / 128
전은자 / 9, 117, 121
전창국 / 1, 2, 118
전창옥 / 128
전춘국 / 128
조기천 / 39, 40
조선 농장 / 20
조선전쟁 / 25, 26, 40, 126
조선족 / 1, 2, 3, 4, 9, 14, 15, 
18, 19, 20, 22, 25, 26, 
32, 33, 34, 36, 39, 49, 
50, 58, 61, 62, 82, 95, 
97, 100, 106, 108, 109, 
112, 113, 117, 118, 129, 
131, 136, 138, 139, 140, 
141, 142, 143, 151, 152, 
153, 154, 155, 156, 157, 
166, 183, 184, 185, 186, 
187, 188, 189, 190, 191
조선족 학교 / 3, 14, 108
조선족학교 / 112
주은래 / 88, 89
중국어 연구원 / 9, 106
중국어연구원 / 103, 106
중문학부 / 9, 86, 89, 93, 98, 
124
중학처 부처장 / 9, 103, 110
중한수교 / 14
중화민족대학교  / 84
진독수 / 92
집단 부락 / 15, 16
집단농장 / 30
집단농장 / 30
쟈라이드기 / 31
(ᄎ)
창군 / 24
천안문 사건 / 87, 88, 89, 101
청년회 / 17, 24
청화대 / 86, 87, 89, 92, 93, 
95
촌장 / 24, 65, 136
치치하얼 / 1, 2, 3, 4, 9, 10, 
13, 14, 16, 17, 18, 19, 
20, 21, 29, 31, 32, 36, 
39, 40, 50, 57, 58, 59, 
60, 62, 68, 70, 71, 77, 
81, 82, 89, 94, 97, 99, 
100, 103, 104, 107, 108,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226
 
109, 110, 112, 113, 115, 
131, 132, 142, 143, 144, 
153, 154, 155, 172, 173, 
174, 175, 176, 177, 178, 
179, 180, 181, 182, 214
치치하얼 공정학원 / 10
치치하얼 공정학원  / 142
치치하얼 사범대학 / 9, 104
치치하얼대학 / 82, 142
치치하얼시 / 14, 36, 58, 81, 
89
치치하얼시  신문기자  / 97
(ᄐ)
태래 / 24, 29, 32, 33, 75
태래(현) / 29
특약기자 / 9, 10, 131, 132, 
133, 134, 137, 149, 151, 
170
(ᄑ)
파벌 / 2, 9, 53, 57
포로 / 26
(ᄒ)
하얼빈 / 9, 14, 47, 71, 77, 
107, 109, 114, 119, 122, 
123, 132
한국어학과 / 142, 143, 144, 
145, 146
한족 / 4, 20, 36, 89, 110, 
112, 113, 139, 157
한중수교 / 97, 129
해방 / 15, 24, 25, 27, 28, 30, 
33
혁명 / 1, 2, 3, 4, 9, 37, 45, 
46, 47, 52, 53, 54, 55, 
56, 57, 58, 59, 61, 62, 
63, 77, 79, 82, 87, 93, 
98, 101, 102, 105, 113, 
114, 118, 128, 140, 144
혁명위원회 / 58
호조식 / 30
홍위병 / 2, 9, 53, 54, 55, 56, 
57, 200
회계 / 42, 50
흑룡강성 / 1, 2, 4, 9, 10, 14, 
17, 20, 21, 36, 134, 138, 
151, 213
흑룡강신문 / 100, 131, 132, 
134, 148, 166, 169, 171
흑룡성 / 14
하얼빈 / 14
해방 / 15
An Oral Life History of Chang-guk Chun, a Chinese Korean Intellectual 
in Qiqihar, China  by Chaimun Lee, Shinkyu Park
Copyright ⓒ A Project on Multicultural Societies and Diaspora,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Published by BookandWorld. Daegu, Korea
재외한인 구술생애사 총서
18
중국 치치하얼 조선족 지식인 전창국의 생애사
2016년 2월 28일 초판 발행
지은이 이채문 박신규 
펴낸이 김영모, 
펴낸곳 책과 세계   등록 | 2007년 2월 2일, 제2010-000004호
주소 | 41565 대구광역시 북구 경대로 95(복현동)
전화 | 053-953-2417   전자우편 | bookandworld@naver.com
ⓒ경북대학교 SSK 다문화사회와 디아스포라· 트랜스이주 연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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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8-89-94255-79-8  94330   ₩1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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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저서는 2014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4S1A3A20436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