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박경용
경북대학교 SSK 다문화와 디아스포라연구단
도서출판 책과세계
재외한인 구술생애사 총서
12
- i -
1)
 박경용(2012), “코리안 디아스포라 생활사 연구의 구술사 활용방법 - 
인류학적 관점을 중심으로 -”, 『민족문화논총』 20(1), 영남대학교 민
족문화연구소, p. 224.
2)
 사할린(Sakhalun)은 현재 러시아 령으로 되어 있는 섬이다. 고고학자들
에 의하면, 사할린 땅은 4~6만년까지 일본 홋카이도와 연결되어 있다가 
약 1만 년 전에 지금과 같은 섬의 모습으로 되었다. 사할린 명칭은 몽고
-타타르인이 13-14세기에 연해주와 사할린 지역에 들어와 아무르강에 
‘사할랸-울라’라는 명칭을 부여해 두었으며, 강 하구에 위치한 이 땅을 
‘검은 강으로 들어가는 바위’라고 불렀던 데서 유래한다. 1937년 파리에
서 간행된 지도에는 ‘사할린엔 앙가-하타(Schalien anga-hata)'라는 라
틴문자로 표시되었다. 1849년에는 러시아 탐험가 네벨스키 대위가 사할
린이 반도가 아니라 섬이라는 사실을 입증함으로써 타타르식 지명이 공
식 채택되어 ‘사할린’으로 오늘에까지 이른다. 한편 일본인들은 사할린을 
‘카라후토(樺太)’ 혹은 ‘북에조’라고 불러왔다. ‘카라후토’란 몽고인의 정
서 문
사할린 한인의 역사
2013년 현재 세계 160여 개국에 700만 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어 
지구촌 어디에서든 한국인을 만날 수 있다. 주요 거주 지역을 중심
으로 이주 현황을 살펴보면, 중국 200만과 미국 120만을 비롯하여 
일본 70만, 연해주와 사할린, 중앙아시아를 비롯한 구소련 45만 등
이다. 이들 재외 한인의 이주는 1860년대에 시작된 것으로 한 세기 
반이라는 장구한 역사를 갖는다. 이주과정은 이주자 개개인에 처한 
시대적 상황에 따라 자발성과 강제성을 띤다. 특히 시민권이 확립되
지 못한 전통사회에서는 국가나 절대 권력 혹은 식민지배 권력에 의
해 강제 동원되는 경우가 많았다.1)
‘검은 대륙’으로 표현되기도 하는 러시아 사할린2)으로의 한인 이
- ii -
착 이전부터 이 땅에 정착해있던 아이누족의 명칭을 차용한 것으로 ‘자
작나무섬’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일본인들은 아이누인들이 북해도의 옛 
이름인 에조에서 이주해 살게 되었다는 데서 카라후토를 일본영토라고 
주장한다. 구소련은 제정러시아 때부터 자국민 이주정책을 펼쳤으며 한
동안은 유형자와 그 가족들을 함께 보냈는데, 1905년 무렵 4만명의 러
시아인이 거주했다.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 승리로 북위 50도 이남 
36,090㎢의 땅을 러시아로부터 양도받음으로써 북부 사할린(러시아)과 
남부 카라후토(일본)로 양분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 
패배로 일본은 사할린으로부터 완전히 물러났다.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
해진상규명위원회(2006), 『검은 대륙으로 끌려간 조선인들 : 사할린 강
제동원의 기록』, pp. 305-310 참조.
3)
 이는 주 2)의 내용 중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사할린이 북부(러시아)와 
남부(일본)로 양분되어온 배경 속에서 이해 가능하다.
주는 우리나라의 이주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사할린에 한인이 살
기 시작한 것은 1870-80년대로 추정된다. 1897년 최초로 실시된 
러시아 전체 인구조사 자료에 의하면, 사할린 총 인구 2만 8천명 가
운데 한인은 67명인데 이 중 53명이 어부였다. 이들은 어업으로 생
계를 유지하기 위해 두만강을 넘어서 연해주에서 아무르강을 건너갔
다. 1923년에는 북부 사할린에 1,431명의 한인이 있었고 1931년에
는 소폭 증가한 1,760명이었다. 이들 한인은 초기 이주자들과 유사
하게 삶의 터전을 찾아 비교적 자유롭게 이주한 사람들로서 1937년
까지 지속된다. 하지만 구소련은 한인이 일본과 가까운 민족이라 여
겨 북부 사할린에서의 일본의 영향력 증대를 우려하여 1937년에 
1,150명의 한인을 연해주를 거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3)
한편 남부 사할린에서는 전쟁 물자 조달이라는 일본의 식민지 정
책에 의해 한인들이 이주했다. 1920년에 934명이던 한인 수는 
1934년에 5,813명으로 증가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주한 대다수는 
남부 사할린에서의 경제적 성공을 꿈꾸며 자발적으로 이주했다. 사
할린 이주사에서 1937-1945년은 가장 많은 한인들이 일제에 의해 
- iii -
반 강제적 모집과 강제징용 등으로 이주
한 이른바 ‘강제 이주기’에 해당한다. 이
들은 ‘모집’, ‘관 알선’, ‘징용’ 등의 경로
를 통해 대거 사할린으로 왔다. 일제는 
1937년에 시작한 중일전쟁이 태평양전
쟁으로 이어지면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나감으로써 심각한 노동력 부
족에 직면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의 이른바 ‘총동원령’은 한반도의 수많은 
젊은이를 사할린으로 동원하여 해방이 
되어서도 돌아오지 못하게 만든 이른바 
‘유형(流刑)과 기민(饑民)의 생활’로 만
들었다. 당시 동원된 한인들은 농업과 
어업을 비롯하여 의류, 벌목, 제지, 탄광 
외에 도로, 철도, 비행장 가설 등에 주로 
동원되었다. 태평양 전쟁 말기 사할린 
전체 한인 수는 4만 3천~6만 5천명에 
달하였는데, 아직까지 정확한 숫자조차 
파악되지 않을 정도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은 사할
린 한인들에게는 곧 해방으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큰 기대를 품게 했다. 
일본인들은 1946년 체결된 ‘소련지역에
서의 철수에 대한 미소귀환협정’으로 12
월에 29만 3천여 명이 일본으로 건너갔
<사할린 전도>
- iv -
4)
 이상의 내용은 다음의 문헌을 참고하여 정리하였다. 최길성(2005), “韓
人의 사할린 移住와 文化變容”, 『동북아문화연구』1, 동북아문화학회, 
pp. 243-271 ;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2006), 『검은 
대륙으로 끌려간 조선인들 : 사할린 강제동원의 기록』, pp. 310-318 ; 
다. 1947년에는 사할린 중국인들도 돌아갔으므로 한인들도 귀향을 
낙관했다. 1956년 10월에는 ‘일소공동선언’에 의해 한국인과 결혼한 
일본인 부인과 그 자녀들까지 2천 300여 명이 일본으로 철수했다. 
이후 개별적으로 귀환한 450여 명까지 포함하면 1945년 8월까지 
남부 사할린에 거주했던 약 30만 명의 일본인은 거의 철수했다. 하
지만 한인은 일본 여성과의 결혼자 등 1천여 명만 철수했을 뿐 나머
지 수만 명은 고스란히 그대로 남겨졌다. 이는 일본이 1943년 체결
된 카이로선언에 따라 ‘조선인은 일본 국적을 벗어나게 되었다는’ 입
장을 취하고, 1952년 샌프란시스코조약으로 일본이 전후 점령상태
에서 벗어날 때 ‘한국인과 대만인은 모두 일본 국적을 상실했음’을 
공식 천명했기 때문이다.
전후 한인의 귀환 문제에 소극적이었던 승전국들의 태도와 이해타
산도 사할린 한인의 발목을 묶어두는 데 일조했다. 소련은 전후 재
건을 위한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했다. 1946년 미소협정에서 일본으
로의 귀환 대상자는 일본 국적자로 규정됨으로써 창씨개명까지 강요
해서 일본인으로 규정되었던 사할린 한인들은 제외되고 말았다. 이
런 상황에서 소련은 당분간 일본식 운영방식과 노동력을 유지하면서 
소련식 사할린 개발을 추진해나갔다. 그 일환으로 러시아인 이민자
들이 본토로부터 유입되었는데, 일부는 강제 이주되었던 중앙아시아 
한인들도 포함된다. 1946년에는 북한으로부터도 노동력이 일부 유
입되었다. 이로써 해방 후 사할린에는 ‘선주(先主)한인’으로 일컫는 
기존의 한인과 ‘러시아한인’, ‘북한한인’ 세 부류가 혼재하였다.4)
- v -
이재혁(2011), “일제 강점기 사할린의 한국인 이주”, 『한국시베리아연
구』15(1), 배재대학교 한국시베리아센터, pp. 85-135.
5)
 배수한(2010), “영구 귀국 사할린 동포의 거주실태와 개선방향 : 부산 
정관 신도시 이주자를 대상으로 -, 『국제정치연구』 13(2), 동아시아국
제정치학회, pp. 5-10. 제Ⅱ장(사할린 동포의 영주귀국 현황) 참조.
더구나 당시 한국은 남북 분단과 6.25전쟁에 더하여 냉전체제 아
래 소련과는 국교 정상화가 이뤄지지 않아 사할린 한인들은 한국 가
족들과는 연락조차 불가능한 채 수십 년을 경과했다. 그간 일본 귀
환 한인들의 잔류자 귀환운동과 사할린 한인들의 귀환요구 시위 등 
일부 노력도 있었지만 모두 무위로 끝났다.
사할린 한인의 귀환운동은 1985년 소련 고르바초프 정권의 등장
과 더불어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1988년 ‘88올림픽’을 전후해서 모
국방문단 사업이 추진되고 1990년 한소 국교 수립으로 비로소 고국 
땅을 밟을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대한적십자사 주도로 사할린 한인
들의 영주귀국 사업이 정례적으로 추진 중이다. 현재 안산 고향마을
과 시립전문요양원, 인천 사할린동포회관, 춘전 사랑의 집, 고령 대
창양로원, 서울과 부천의 임대아파트, 부산 정관 신도시 등의 사회복
지시설에 3천여 명의 영주 귀국 사할린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거주
하고 있다.5)
고령 대창양로원 개요
영주 귀국 사할린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거주하고 있는 대창양로
원은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매촌리에 있는 노인복지시설이다. 대
창양로원은 1987년 3월 13일 설립 인가된 사회복지법인 대조구국원
(대표 오기문) 산하 기관으로 일제강점기 사할린으로 징용된 동포들
을 대상으로 노인 복지 서비스를 실천하고 있다. 대창양로원은 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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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고령군(1996), 『고령군지』, 고령군지편찬위원회 ; 고령군청 홈페이지
강점기 사할린으로 강제 징용되어 갔던 동포를 보호하기 위한 국내 
최초의 양로원이라는 데에 상당한 의의가 있다.
대창양로원 건물(구)
대창양로원 내부(구)
대조구국원은 대창양로원 외에 대창요양원과 대창재가노인복지센
터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대창양로원은 일제강점기에 사할린 동토
로 강제 징용된 동포 가운데 무의탁 영주 귀국 희망자와 미망인 및 
국내 불우 노인들의 보다 나은 생활을 돕고자 1993년 5월 19일 설
립되었다.
2010년까지 대창양로원에 거주해온 영주 귀국한 사할린 동포 현
황은 다음과 같다. 1994년 4월 45명(남 24, 여 21)과 1997년 25명
(남 10, 여 15)을 비롯하여 1999년 5월 18일 15명(남 6, 여 9), 
2000년 11월 2일 1명(남 1), 2001년 16명(남 2, 여 14), 2003년 
7명(여 2, 남 5), 2004년 8명(남 1, 여 7), 2005년 4명(남 2, 여 
2), 2008년 2명 등 총 59명(남 20, 여 39)이다. 2013년 2월 현재
는 영주 귀국 사할린 할아버지, 할머니가 23명으로 대폭 줄어들어 
일반인도 함께 돌보고 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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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goryeong.go.kr) ; 배수한(2010), “영구 귀국 사할린 동포
의 거주실태와 개선방향 : 부산 정관 신도시 이주자를 대상으로, 『국제
정치연구』 13(2), 동아시아국제정치학회, pp. 5-6. <표 1> 참조.
7)
 경북대학교 대학원(고고인류학과)에 재학 중인 김수민 양은 유유원 할
아버지와의 면담과정에 동행하고 구술생애사 일부도 정리해주어 고마움
을 표한다. 구술자료는 더블린 코어(Dublin core)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목록화(3-05LH12102012권오석001)하였다. ‘3’은 구술자료, ‘05’는 대
구, 부산, 울산을 포함하는 경상도권역, ‘LH'는 구술생애사, ‘12102012’
는 2012년 10월 12일, ‘권오석’은 구술자, ‘001’은 구술자료 일련번호를 
각각 나타낸다.
시설 현황은 부지 면적 4,570㎡, 연건평 1,637㎡이다. 지하 1~지
상 3층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강당, 물리치료실, 거실, 요양실 
등이 갖추어져 있다. 2014년 2월 9일 신축된 새 시설로 재입주하기 
전에는 폐교된 옛 안림초등학교 교사를 임시 거처로 사용하기도 했
다.
사할린 영주 귀국자들과의 만남
연구자가 영주 귀국한 사할린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처음으로 뵙
게 된 것은 2012년 10월 12일이다. 당일 연구자는 모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모인 점심식사 자리에서 원장(신월식)의 소개로 인사를 
드렸다. 원장은 연구자의 방문 목적과 연구의 의의를 설명하고 격의 
없는 이야기의 장을 잘 마련해달라고 부탁드렸다. 이는 이후 할아버
지, 할머니들과 원활하게 접촉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당일 권오
석(1933년생)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후 연구자는 이러저러한 바쁜 일로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만나
지 못하다가 해가 바뀌어 2013년 1월 들어 집중적으로 면담할 수 
있었다.7) 구술자료를 전사하여 생애사 1차 편집을 마무리한 후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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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유유원 할아버지의 일제 강점기 사할린 강제이주와 나이부찌(內淵)탄광
의 노동생활에 대한 구술내용은 다음의 자료집에도 수록되어 있다. 일제
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앞의 책, pp. 10-24.
9)
 이재혁(2011), “일제 강점기 한인의 사할린의 한국인 이주”, 『한국시베
리아연구』15(1), 배재대학교 한국시베리아센터, p. 117 <표 7> 참조.
년 7월~10월에는 2단계 보충 면담을 실시하였다.
지금까지 면담한 구술자는 아래 <표>와 같이 할머니 6명과 할아
버지 4명을 포함하여 총 10명이다. 연령은 70대 1명 80대 4명, 90
대 5명이다. 구술자들은 대부분 80세를 넘긴 고령으로 일부는 청력
이 떨어지고 발음이 부정확해서 의사소통에 어려움도 있었지만, 과
거 사할린에서의 경험을 소상히 기억하고 있었다. 구술자 중에는 필
자와 동향인도 있어서 동류의식 때문인지는 몰라도 저녁까지 물려가
며 5시간 동안이나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특히 1916년
생으로 곧 100세를 바라보는 유유원 할아버지는 사할린의 탄광에서 
일하던 당시 상황을 비교적 소상히 기억하고 계셨다.8)
구술자들은 사할린에서 태어난 단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경상도 
출신이다. 70대 초의 사할린 출생자도 부친의 고향은 경상도다. 이
는 대부분이 고향과 가까운 양로원을 택한 결과지만, 한편으로는 강
제동원 시기에 사할린으로 동원된 한인들 중 경상도 출신이 압도적
으로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1992년 사할린노인회에서 작성한 지
역별 ‘강제징용 보상 청구자 명부’에 의하며, 1,167명 중 경상도 출
신이 경남 373명, 경북 323명 등 총 796명으로 전체 70%를 상회
한다. 다음은 충남 105명, 충북 95명으로 뒤를 잇는다. 지리적 근접
성에도 불구하고 호남지역은 전북 48명, 전남 39명으로 현격히 적은 
숫자인데, 경상도 내에도 시군별 편차가 상당하다.9) 경남의 경우 합
천이 60명으로 가장 많고 밀양 55명, 진양 51명 순이다. 경북은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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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위의 글, p. 115. <표 6> 참조.
성이 87명, 경산 64명 등으로 압도적으로 많은 반면, 나머지 지역은 
모두 30명 이하다.10)
구술자
출생년도
출생지
거주지
직업
(기술)
비고
권오석
1933(81)
경북 선산
유즈노사할
린스크
사진사
부친 징용
이원두
1921(93)
경북 칠곡
고르사코프
벌목, 운송
재혼, 본인 
모집
김옥저
1932(82)
경남 남해
홈스크
건축일, 
바느질공장
재혼, 부친 
자유이주
곽병수
1924(90)
대구
루가웨이
농사
정신대 모집 
회피
최숙이
1924(90)
경남 울산
유즈노사할
린스크
탄광, 농사
남편 강제모집, 
시가 가족 이주
장계분
1930(84)
경북 군위
포로나이스
바느질공장
, 농사
재혼, 부친 
자유이주
유유원
1916(97)
경북 봉화
브이코프
탄광, 벌목
재혼, 일제 
군부 명령
권순애
1931(82)
경북 선산
마까로브
제지공장, 
보일러공
부친 자유이주
권영출
1921(93)
경남 밀양
네벨스크
목재소, 
청소부
남편 징집
이병인
1943(71)
유즈노사
할린스크
오와
바느질공장
미혼, 부친 
징용
영주 귀국 사할린 한인 구술자 개요
연구자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한 분 두 분 접하면서 그동안 몰랐
던 사실들을 하나둘 알아가는 재미에 푹 빠졌지만, 한편으로는 염려
도 됐다. 태어나서 어린 나이에 고생하며 사할린으로 가서 어렵게 
살아온 기억들을 되살리면서 갖게 되는 감정상의 기복이 정신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점에서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 x -
11)
 박경용(2013a), “사할린(Sakhalin) 한인의 생활사와 스토리텔링 방안-
고령 대창양로원 영주 귀국자의 구술생애사를 중심으로-”, 『스토리텔링
을 통한 고령군지역사회 연구』, 대구: 책과 세계, pp. 99-146. 본서의 
서문 내용은 당시 연구과정을 기술한 보고서 일부 내용을 전제한 것이
다. 위의 글, pp. 99-106 참조.
12)
 박경용(2013b), “사할린 한인 김옥자의 삶과 디아스포라 생활사-‘기억
의 환기’를 통한 구술생애사 방법을 중심으로-”, 『디아스포라연구』 
7(1), pp. 165-198.
건강을 챙기고 있는 양로원의 사회복지사는 연구자에게 그런 가능성
을 지적해주기도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이야기 도중 억류되다
시피 했던 기억에 대해서는 격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으며, 가족 구
성원의 상실을 포함한 특히 어려웠던 역경에 대해서는 눈시울을 붉
히기도 했다.
구술자들은 건강상태 등을 고려하여 양로원에서 선별해준 사람들
을 기준으로 무작위로 선정했다. 면담은 점심식사 후의 휴식시간을 
이용하여 거주하는 방 안에서 진행됐다. 대부분의 면담은 자유롭고 
편안한 가운데 이루어져 1인당 평균 1시간 40분 정도 실시됐다.
사할린 한인들에 대한 구술 채록작업은 2012년도 경북대학교 대
구경북지역사회연구 특성화사업단의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과정
에서 시작되었다. 채록된 구술자료는 발음 해독이 힘든 1명(이원두)
을 제외하고 모두 전사되었으며, 일부 내용은 보고서로 작성되었
다.11) 구술자 중 1인(김옥저)에 대해서는 구술생애사 자료를 바탕
으로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생활사’에 대한 논문으로도 산출되었
다.12)
사할린 한인의 이주와 적응, 생활사에 대한 구술내용은 본 연구단
의 연구 방향과도 부합될 뿐만 아니라, 관련 연구의 지평을 확장시
킬 수 있다. 이와 같은 생각에서 사할린 한인에 대한 학술적 연구와 
- xi -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키려는 목적에서 연구단의 ‘재외한인 구술생애
사 총서’로 간행하게 되었다. 1차 녹취록 전문은 검독 후 부족한 부
분에 대해서는 2014년 4월 보충 구술과 사진 촬영 등의 보완조사를 
실시하여 완성하였다. 이를 위해 연구단에서는 현지조사에 필요한 
약간의 연구비도 지원하였다.
이번 기회를 통해 사할린 한인의 이주와 적응, 생활사를 테마로 
하는 구술생애사가 세상에 나올 수 있어 퍽 다행으로 생각된다. 하
마터면 책상 서랍 속에서 묻혀버릴 뻔했던 구술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연구단의 ‘재외한인 총서’로 간행될 수 있도록 힘써주신 박
경용 공동연구원께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본서가 사할린 한인의 삶
과 디아스포라 생활사에 대한 이해를 돕고 향후 이 분야의 연구에 
기폭제가 되길 바라마지 않는다.
2014년 6월
경북대학교 SSK 다문화와 디아스포라연구단
- xii -
대창양로원 내부(신축, 2014.2)
대창양로원 외부(신축, 2014.2)
- xiii -
차 례
◆ 서문···························································································
제1장. 3국 4가지 다른 이름의 김옥저
     - 사할린 디아스포라의 표상 -·············································19
  1. 한국 출생, 4살 때 도일(渡日)············································21
  2. 9세 때 사할린 이주·····························································28
  3. 해방 전후 5번의 귀국 시도와 좌절····································35
  4. 해방 직후의 상황, 일본인 송출과 러시아인 유입··············44
  5. 결혼생활과 자녀 양육··························································61
  6. 30여 년의 노동생활·····························································72
  7. 사할린의 일상생활·······························································84
  8. 3개국 4가지 이름, 아직도 ‘가네야마 시즈꼬’··················102
  9. 한ㆍ소 수교와 영주 귀국···················································113
  
제2장. 40년간 사진기술자로 살아온 권오석
    - 부친의 징용으로 운명 지워진 사할린 이주 -····················133
  1. 10세 때 아버지 찾아 사할린 이주····································134
  2. 사할린의 학교생활·····························································136
  3. 철공소 6년 근무하다 사진관으로······································137
  4. 아내 손명자와 결혼, 5남 생산··········································138
  5. 제사의례와 놀이·································································139
  6. 2012년 영주 귀국······························································140
  7. 40년 사진관 근무, 최고액의 연금 수령···························142
  8. 사회주의 체제의 특성························································144
  9. 민족 간 혼인, 한국어 문제················································145
- xiv -
제3장. 정신대 피하려고 사할린으로 시집간 곽병수
    - 결혼 하루 만에 사할린 이주 -··········································149
  1. 정신대 피하려고 사할린 결혼 이주··································150
  2. 넷째 며느리로 평생 시부모 봉양······································153
  3. 시아버지 강제 이주 후 가족들 초청·································155
  4. 먹고 살 길을 찾아 여러 곳으로 이사·······························157
  5. 일본에 먼저 간 종조부······················································159
  6. 생선공장 일하다가 손가락 절단········································161
  7. 영주 귀국한 자녀들, 서툰 한국어·····································162
  
제4장. ‘모집’ 남편 따라 식구들이 이주한 최숙이
    - 강제 모집 남편 따라 사할린으로 -···································165
  1. 19세 결혼 이듬해에 남편은 사할린 행····························166
  2. 21세에 남편 찾아 사할린으로 ·········································167
  3. 온 가족들이 사할린으로 이주 ··········································169
  4. 남편은 탄광 일하다가 46세 사망·····································170
  5. 센탄파 탄(炭) 선별 노동···················································171
  6. 한인들의 상호관계·····························································172
  7. 일본-러시아 시대의 과도기 생활·····································173
  8. 3개국 언어의 혼용·····························································175
  9. 자녀 공부와 직업생활, 동포결혼·······································176
  10. 농사지어 생계유지···························································178
  11. 브이꼬프 20년, 유즈노사할린스크 30년 살이················181
  12. 한인들과의 놀이와 관광··················································183
  13. 한국으로 열린 문·····························································184
- xv -
제5장. 낳은 자식, 데려온 자식 6남매 키운 장계분
- 평생 농사꾼 조선 여성의 모성애 -··········································187
  1. 10세에 일본 시즈오카현 이주···········································188
  2. 사할린 마까로브 정착, 조선학교 4년 수학······················190
  3. 18세에 함경도 출신 남성과 결혼·····································191
  4. 바느질공장 4년 노동, 연금 계산법···································193
  5. 농사지어 자녀 치송····························································195
  6. 재혼, 낳은 아이와 기른 아이············································197
  7. 기른 정, 자녀 교육과 혼사················································199
  8. 영주 귀국 14년째·······························································202
제6장. 작은 체구로 큰땅을 주유하며 살아온 유유원
- 큰땅 거주 18년 만에 영주 귀국 -···········································205
  1. 봉화 대흥동 출생과 서당 공부··········································206
  2. 22세 결혼 후의 생활·························································207
  3. 일제 강점기 왜관 군부 호출·············································210
  4. 일제 군부 명령으로 사할린 이주······································211
  5. 사할린에서의 일제 군부의 일···········································214
  6. 해방 직후 귀국하려고 12개국 주유 ································215
  7. 해방 후의 노동생활 ··························································216
  8. 결혼과 6남매 자녀 생산····················································220
  9. 민족과 다문화 관계 : 차별, 혼인······································223
  10. 연금으로 소련 생활 17년················································226
  11.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영주 귀국····································229
  12. 건강관리···········································································231
- xvi -
제7장. 부부가 함께 제지공장에서 일했던 권순애
    - 제지공장 평생 노동자 -····················································235
  1. 아버지가 먼저 일본 오사카 이주······································236
  2. 1943년 오사카 경유 사할린 이주·····································237
  3. 사할린의 해방 전후 생활상과 이발소 근무······················240
  4. 17세 결혼과 4남매 자녀 생산··········································244
  5. 종이공장 21년 노동생활····················································246
  6. 52세 은퇴 후 연금 수령, 연금제도···································250
  7. 남편의 사망과 장례 및 제사의례······································253
  8. 사할린 한인의 북한 행, 공민증 발급·······························255
  9. 한국말과 혼인관계, 4남매 자녀들·····································258
  10. 퇴직 후 텃밭 농사, 산나물 채취·····································262
  11. 사할린 사람들, 음식문화, 거주지····································263
  12. 사할린 한인의 애환, 영주 귀국······································266
제8장. 23년간 5가지 일을 전전한 권영출
    - 모집 노동 간 남편 찾아 사할린으로 - ····························271
  1. 결혼 4년 후 남편 찾아 사할린 행 ··································272
  2. 1942년 사할린 가는 길·····················································274
  3. 사할린 도착 첫 날의 풍경·················································277
  4. 남편은 탄광 노동, 고단한 생활········································278
  5. 독신 징집자들의 배고픔····················································280
  6. 5남 생산, 35세부터 미역 닦기 노동································282
  7. 통조림 공장, 집 청소, 목재소, 보일러실 노동 ···············284
  8. 한국과의 소통, 영주 귀국·················································287
- xvii -
제9장. 누나와 함께 평생 바느질하며 살아온 이병인
- 징용자의 아들로 사할린에서 태어나 -·····································293
  1. 징용 간 아버지, 사할린 예스고르스크 출생 ···················294
  2. 아버지 별세, 1950년대 후반의 삶····································296
  3. 10대부터 바느질공장 노동················································298
  4. 민족 차별, 이동 제한·························································300
  5. 자본주의 이행기 불만, 저축 손실·····································303
  6. 한국 방문 및 영주 귀국····················································304
◆ 참고문헌·················································································307
◆ 찾아보기·················································································309
제1장. 3국 4가지 다른 이름의 김옥저
- 사할린 디아스포라의 표상 -
1932년생 김옥저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20
 
김옥저 연보
ㆍ1932년(1세) - 경남 남해군 설천면 덕신리 출생
ㆍ1932년(1세) - 생후 보름 만에 생모 사망
ㆍ1935년(4세) - 일본 동경 이주
ㆍ1939년(8세) - 일본 이와테현 이주
ㆍ1940년(9세) - 러시아 사할린 노다 이주
ㆍ1945년(14세) - 사할린 노다국민학교 졸업
ㆍ1946년(15세) - 제사공장 화부(火夫) 노동
ㆍ1949년(18세) - 철공기술자와 결혼, 노다 거주
ㆍ1950년(19세) - 유즈노사할린스크 이주, 첫딸 출산
ㆍ1956년(25세) - 1남 1녀 생산, 박씨 남편과 이혼
ㆍ1958년(27세) - 홈스크 이주
ㆍ1958년(27세) - 한씨 남성과 재혼, 2남 1녀 생산
ㆍ1961년(30세) - 건축노동 시작
ㆍ1967년(36세) - 막내아들 출산, 건축노동 퇴사
ㆍ1968년(37세) - 바느질공장 입사
ㆍ1970년(39세) - 아파트에서 단층 주택 이사
ㆍ1976년(45세) - 한씨 남편과 사별
ㆍ1978년(47세) - 유방암 수술
ㆍ1983년(52세) - 바느질공장 25년 근무 후 퇴사
ㆍ1992년(61세) - 관광단 일원으로 한국 첫 방문 
ㆍ1996년(65세) - 한국 영주 귀국, 대창양로원 거주
ㆍ2014년(83세) - 현재 고령 대창양로원 거주
제1장. 3국 4가지 다른 이름의 김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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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출생, 4살 때 도일(渡日)
■ 1932년 남해군 덕신마을 출생
태어나신 곳은 어디십니까?
태어난 곳은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나는 설천면 덕신리에서 났어. 
그래 네 살 되어가지고 일본에 나갔지. 우리 아버지 나가가 공부하
고 있었고. 거기서 태어나가지고 아버지는 일본에 먼저 혼자 가셨지. 
공부하러 가셨지. 어머니는 내 낳은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날 낳은 엄마는 정(鄭)가래요. 날 낳고 보름만에 죽었데요. 얼굴도 
모르지. 그때부터 할머니 손에 컸어요. 일본에 아버지한테 가게 되는 
4살까지. 오빠도 3살 위엔데 함께 키았지요. 할머니가 참 고생이 많
았겠지요.
그래 후처로 우리 아버지가 [일본에서] 얻었는데. 어머니 있다고 내
하고 오빠하고 우리 할머니하고 같이 나갔지요. 일본에.
어릴 때 가셨는데, 고향에 대한 기억이라도 남아있습니까?
기억은… 어떻게 하는가 하모 내를 세워가지고 노래시키요. 그때 아
버지가 그래 또 일하러 가신다고 두루매기 입고 나가시는 거 내가 
아버지 두루매기 붙잡고 울고 하는 거 그것도 생각나고. “옥저(玉姐)
야! 내 갔다 오께!” 하고. 그런 거 생각나고. 또 손님들이 앉혀놓고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음식을 맹글어가 대접도 하고 그랬지. 한 
내만한 아이가 우니까 작은 엄마가 와서 치즈 먹이대.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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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기억이 나네. 그래 내가 내려가서 이래 들어다봤어. 근께 내가 
자빠졌지 뭐. 나도 그 아이처럼 ‘엄마~!’ 하고 울었지. “아이고! 야~
가 안하던 짓도 하네.” 했던 그것도 알고. 또 한 번 우리 오빠하고 
논밭에 가는데, “니 엄마 저기 가면 있다” 한께 햇볕에 발가이 되는
데, 그거를 내가 쫓아갔어. 그래 울고 그래 하는 거 보았고.
그때는 위에 오빠가 세 살 차이라. 일곱 살. 우리 남동생은 여기서 
안 낳았어. 일본에서 낳았어. 근께 우리 동생하고 [호적상으로] 내가 
바뀌었은께. 내가 일본에서 나~가(태어나가지고) 있는 택이 됐지. 
동생은 한국에서 낳은 택이 되고.
■ 4세 때부터 일본 동경 생활
부모님 존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우리 아버지 김제복. 어머니는 최순향. 외가는 남해도가 아니요. 아
버지가 나를 낳은 어머니하고 남해에서 결혼을 하셨겠지만, 키운 어
머니는 우리 아버지가 일본 동경에서 결혼하셨지. 같이 공부하는 사
람들끼리. (부모님 사진 뒷면의 주소를 읽으며) 충청남도 청양군 청
양면 중산리. 최순향. 1903년생. 아버지는 김제복. 남해군 설천면 덕
신리. 덕신 마을이 있습니다. 남해대교 다리 건너자마자 오른쪽 거기
가 설천입니다. 오빠 사진은 없어요. 우리 오빠 사진하고 우리 아버
지 사진은 해방 나고 나서 러시아 사람 그거 하는 바람에 다 태워버
렸어. 엄마 사진도 있었는데 어디 갔는지 없어요.
아버지는 일본 어디서 살았습니까?
그래 있다가 4살 때 일본으로 나가가 아홉 살 때까지 있다가. 아홉 
제1장. 3국 4가지 다른 이름의 김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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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이 아이라. 1학년. 일본 동경 1학년 올라가가 갔어. 이와테깽(현)
에 갔어. 조선사람은 삭 다 실어가 아버지가 부끄러버가 일을 떼~가 
나갔어요. 그때 우리 아버지 일하던 자리에 우리 어머니의 조카 있
었어요. 조카도 와세다대학인가 어딘가 일본 대학교 공부하러 와가 
있었어요. 근데 그 사람한테 맡겼어요. ‘내가 그 사람들 돈 벌이 해
가 고향 내보내겠다’고 생각했지요. 어떻게 하나? 일본에 다들 돈 벌
러 온다고 온 사람들이 아니여? 그래 돈 벌도록 일시키가 고향 내보
내겠다. 동경은 도시 아녀? 거기 주소는 도쿄시 쇼자키쇼 이쪼메이
찌반찌.
거기 그러면 아버님 혼자 계셨습니까?
그때 그런께 장개 갔잖아요. 거~ 내 키우던 어머니. 새로 오신 어머
니지. 그래 인제 나는 엄마 없이 할머니하고 고향에 있었고. 있다가 
새엄마한테 장개 들 때 내하고 오빠하고 할머니하고 동경에 나갔죠. 
동경으로 가서는 학교 안 들어갔지요. 그때 내가 네 살에 갔으니까 
유치원에 갔지요. 조선말밖에 모르니까 우리 아버지가 나를 유치원에 
넣었지요. 우리 오빠도 아마 유치원에 들어갔을 끼요. 그래 거기서 
우리 오빠도 1학년 공부 올라가고 나는 유치원에 있었고 그랬어요.
유치원 이름이 혹시 기억이 납니까?
그거는 모르겠어. 코지키. 우리 유치원이 못 사는 사람끼리만 사는 
가운데에 있었어. 그 유치원에. 그 유치원에 불까지 날라 캤는데. 그 
마을에 불이 났어. 내 아는 거는. 불이 났는데 유치원에 갔다가 우리 
아버지들이 가서 불 안 붙으라꼬 바개쓰 갖고 물로 막 길어 붓고. 
그거는 안타고 남았고. 여게 딸린 건물은 도저히 불을 끌 수가 없어 
거~는 막 헌집인께 다 타게 놔둬라 하고. 정말로 뒤에 간께 막 태우
고 없대요. 근데 우리 유치원만 온전히 서가 있었어. 유치원에는 네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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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명치, 대정, 소화, 평성 등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연호로 소화(히로히
토) 1년은 1926년에 해당된다. 따라서 소화 16년은 1941년이 된다. 명
치(메이지) 1년은 1868년, 대정(요시히토) 1년은 1912년, 평성(아키히
토) 1년은 1999년이다.
살부터 학교 갈 때까지 다녔어요. 그니께 일본말도 배웠고.
■ 초등학교 1학년 때 이와테현 이사
유치원 졸업하고는 학교로 올라갔지. 내 1학년 공부하다가 이와떼깽 
거게 ‘고야마따’라 하던데 거기 가가지고 우리 아버지 건축했지요. 
근데 우리 아버지는 할 줄 모르지만은 일꾼들 데리고 갔지요. 가가
지고 하는데 그 옆에 큰 강이 있었는데 큰 강이 터져가지고 큰 쓰나
미 만냈어. 소화(昭和) 16년13)에. 큰 쓰나미 만나가지고 우리 아버
지 실패당했지요. 홍수인지 모르지. 우리 집이 높은데 집까지 삭 다 
쓸었어요.
아버님은 본래부터 건축 일을 하셨네요?
아이요. 우리 아버지는 처음에는 건축 안하고. 고향에 있을 때는 한
문 선생 했어요. 남해에 있을 때요. 일본에서는 저 뭐라? 영사관 하
고 있다가 우리 아버지 일본 동경에서. 도쿄도 거게 가가오꾸 쇼자
크 쇼멘지반찌에서 우리가 살았고. 조선사람들이 이리 온께 우리 아
버지 때에 조선사람들 말도 모르니께 일본사람한테 서류도 하고 통
변도 하고. 이 사람들 맡아라꼬.
영사관에 계시면 통역도 해주고요. 그 사람들 일감도 찾아주고. 조선
에서 편지 연락도 우리 아버지가 그거 해주고 그래 했지요. 우리 조
선 사람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 거지. 공부를 해놓으시니까 그런 
제1장. 3국 4가지 다른 이름의 김옥저
 
25
일을 하셨겠지요.
우리 아버지가 고향에 있을 때는 한문 글자 배우고 그래 했지요. 근
데 처음 고향 갔을 때 아버지한테 글 배웠던 그 사람이 살아있대요. 
내 간께. 시방도 있는지 모르지. 요새는 내 고향 안가니께.
일본에서 아버지가 그런 일을 하셨으면 월급도 상당히 받으셨을 건
대요?
그래 월급도 받고. 우리 아버지가 서류방 있잖아요. 이렇게 컴퓨터로 
하지만은 서류방 하는 거 저게 공장 같은 데 그런 사람들까지 오면 
우리 아버지가 다 해가. 그거 가지고 돈 벌고. 한국에서는 ‘대서방’이
라고 하던가요? 서류방. 모르겠어요. 뭐라 하는지. 그렇게 해가… 근
데 밤에 자는데 ‘카탁! 카탁!’ 소리 나는데 그게 내 자장가요. 귀에. 
그러면 아버지 계시는가 하고 잠들고.
손으로 탁탁 치는 거. 컴퓨터는 이렇게 하지요. 그때는 컴퓨터라꼬 
없잖아요. 나무로 맨근 거 이렇게 있잖아요. 우에 있는 거는 ‘오(5)’
고 밑에 있는 거는 ‘일(1)’이고. 밑 있는 거를 모두 이렇게 해가 그 
하는 거. 글자 치는 게. 아이고~ 아~ 주판이다. 주판. 일꾼들 얼마 
벌고 얼마 벌고. 그거 공장에서 돈이 얼마나 벌고 하는 거 그거를 
우리 아버지가 했어. 주판으로 회계하는 건가 봐요. 서기라 하는가? 
우리 아버지는 사무실이 없지요. 그니께 우리 집에 서류를 가져오데
요. 그 사람들 가져오면 우리 아버지가 다 그거 하고. 낮에는 영사관 
보고 밤에는 그거 하고. 근께 돈 걱정은 안했어. 우리는.
경제적으로 생활에 큰 불편은 없었겠네요?
아이고, 잘 살았어요. 우리. 그거를 해가 인제 가지고 올 때는 우리 
아버지가 이만치 가져와도 밤에 안자고도 다 해드렸거든요. 그린께 
가지고 올 때는 맛있는 거 가지고 오고, 돈도 가지고 오고 그랬지요.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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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께 그 사람들 자전거 가 오는 거 보면, 하이고! 맛있는 거 가지고 
온다고. 내 쪼꼼할 때 좋아했는 거 알아요.
그러면 국민학교를 그때는 일본에서 몇 년 다니신 겁니까?
일본에서 1학년, 2학년 댕기고, 사할린 가서 4학년, 5학년, 6학년. 
그 전쟁 때 공부도 못했다고. 그니께 여기서 말하면 7학년이지. 그
니께 시방 이렇게 하는 것처럼 학교 내~(계속) 안 댕깄다고. 내 놓
고 글자를 쓰라 하면 못 쓰겠는데 뭐 어떻게.
■ 어머니에 대한 기억
우리 어머니가 조선식으로 만날 머리 이래가 댕깄어. 저고리 치마 
입고. 근데 전쟁 시작하고 나서는 발목이 잘록하고 허리에도 고무줄 
넣은 그거를 입고. 몸빼 입고. 우리 어머니 맨날 치마 입고 댕겼는데 
몸빼 입고 그래가 있었지. 그때 안 입으면 또 동네서 야단나고.
그 동네는 한국 사람만 살던 곳입니까?
아니요. 일본 사람만 살고 있었어. 근데 우리 어머니가… 우리 할머
니는 하얗게 아래 우에 옷도 해 입고. 우리 어머니 이쁘게 입고 한
께 우리 어머니 지나가면 우리 어머니 이뻤었어요. 정말로 이뻤었어. 
지나가면 다 봤어. 머리 새카마이 해가 여기 동그랗게 해가 비녀를 
딱 차고 공원에 한 번 놀러가는데 내 가고 우리 오빠 가고. 아버지
만 안가고. 할머니하고 가는데 다 돌아다 보대요. 이쁘다꼬. 치마 저
고리.
그때는 우리 어머니가 머리 조선사람 태(態) 낼라고 내보고 머리 질
루라꼬 만날 그래. 나는 싫어서 학교 가면 풀어놓고 그랬어. 그린께 
제1장. 3국 4가지 다른 이름의 김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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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막 이렇게 흐트러져 있잖아. (엄마의 사진을 꺼내보며) 여기 
이런 사진이… 70년 전의 사진이 있지요. 이거는 안 내삐리고 있네. 
그거 한 거는 다 태웠어.
아이 때 형제들은 조선 옷을 입었습니까?
아니요. 그때는 일본 옷 입고. 보통 일본 아이들이 입는 것처럼 입었
고. 어릴 때 식사는 엄마가 만들어주는 밥. 우리 어머니가 반찬 잘 
했어요. 집에서. 한국 식사하는 반찬하고 일본 것하고 다르지요. 우
리는 네 살까지 고향에서 김치, 된장 그런 거 먹고 있을 때 그대로 
묵었지. 일본에서도요.
시방 근께 우리 아이들이 시집가도 내가 어머니가 하던 대로 요리 
해준께 우리 아이들이 된장… “엄마! 된장 해줘” 하고 그러지. 근데 
내가 가서 해주면, “된장! 아이고! 된장이 그리웠었다” 하고 그래요.
김옥저 미술작품(대창양로원)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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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가정생활 중에 식구끼리는 한국말로 했습니까?
러시아(사할린) 올라와가지고 내가 그때는 집에서 일본말 했지요. 
시집가가지고 일본말 한께 대답 안하대요. 시집가가 ‘조또마따 구다
사이’ 하며 일본말 한께, 신랑이 “나는 쪽발이 아이다.” 하면서 말 안 
받아주데요. 근께 내가 쪼꼼할 때 조선말 하는 건 듣고 한께 말하는 
거는 알아듣는데 말이 자꾸 안 나오데요.
어릴 때는 조선말을 잘 못하셨네요?
알아듣는 거는 다 알아들었지요. 그리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집안
에서 조선말을 했어요. 그니께 우리는 알아들었지요. 알아들었는데 
대답은 말이 잘 안 나오지요. 그린께 우리 주인 보고 할 수 없이 
‘진.지.잡.수.세.요’ 이렇게 더듬거리면서 이래가 조금씩 그래 했지.
2. 9세 때 사할린 이주
■ 사할린 가는 길
아버지가 사할린에 가시려고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 아버지가 어떻게 왔는가 하면 돈 벌라고. 고향가면 땅도 있고 
뭐. 그 돈 차비만 있으면 나가면 되는데. 가서 사는데 부모한테 달란 
소리 안하고 그거 할라고 그래 돈 때문에 돈벌이 할라고. 사할린으
로 가족들도 데리고 들어갔지.
사할린이 돈벌이 좋았어. 어떻게 하는가 하면 러시아 땅으로 일본 
사람들이 러시아하고 일본 사람 싸웠잖아요? 1905년 러일전쟁. 그때 
근데 일본 사람들이 시내 맹글어야 되잖아요. 철도도 놔야 되고. 그
제1장. 3국 4가지 다른 이름의 김옥저
 
29
14)
 일본 본토.
15)
 사할린.
래서 일꾼들이 그거한께 돈벌이가 얼마나 좋았다고. 한 달에 벌으면 
일본에서 한 서너 달 벌만치 벌었어. 그때. 그린께 조선에서 모두 사
할린 올라고 했지. 돈 벌라고. 그때 인기가 있었지. 그래가 조선사람
들 철도 많이 놨고 중국 사람도 철도 놨어. 그런 분위기에서 아버지
가 식구들을 데리고 갔지. 조금 그거 들어가면 자기는 서류방 하는 
데 많잖아요. 조금 돈 벌고 나오자 한께 돈 벌고 나오자 하는데 돈 
벌었어.
몇 살 때 대동아전쟁이 일어난 겁니까?
그때 41년도에 일어났어. 그니께 우리가 내지(內地)14) 있을 때 전
쟁 나가지고 밤에 누가 비행기 오면 어떻게 피난 간다는 훈련 같은 
거 그래 한다고. 그거 하는 거 보고 우리가 화태(樺太)15) 나왔어. 
사할린 화태 나왔지요. 화태 나온께, 그때 화태는 조용하대요. 밤에 
자다가도 도망가고 오고하는 거는 안 배우고도(대피훈련 하지 않고
도) 가마이 있대요.
전쟁이 나던 1941년도에는 몇 살 때였습니까?
그때가 내 아홉 살, 열 살 때지. 3학년이나 그렇게 되겠네요. 전쟁이 
나자마자 온 가족들이 짐을 싸가지고 사할린으로 간 게 아니고. 우
리가 사할린 갈 그때는 조용했어요. 화태는 조용했어. 언제 그거 했
는가 하면 45년도 전쟁 끝나가지고 소카이(피난) 나가는데 “엄마! 
러시아 사람 올라온다” 한께. 아마 그때 사할린에 가인께 한 집에 
여게 한 집에… 차가 한 대씩 있는 것처럼 한 집에 배가 고기 배가 
한 집에 두 개, 세 개 있는 집도 있고 한께. 그 배 타고 도망가는 사
람 가고. 또 그 배 가지고 돈 벌고. 없는 사람들 싣고 나가고 돈 벌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30
 
었어요. 그 사람들. 그래 우리는 나갈라 한께 나갈라 하는데 돈을 안 
받았어. 그 사람들. 일본 돈 가지고 가봐야 쓰지도… 거기 가도 쓰지
도 못하고 여기 돈 바꾸는 것처럼 바꾼께 쓰지도 못하고 한께 돈은 
싫다. 금, 은 그런 거 있으면 태워준다 하고,
■ 폭설로 오도마리 3개월 체류 후 노다 정착
동경에서 화태 사할린까지 갈 때의 기억을 좀 더듬어 보십시오? 그
때 1941년도에 가셨으니까 몇 살 때였습니까?
사할린에 그런께 41년도인가, 2년도인가? 3월 달에 갔어. 41년도 그
때는 일본에서 전쟁 단도리하고 있었죠. 근데 기차타고 오면 아오모
리껭 해가 배타고 또 훗카이도 가고. 그래 고생했어요. 품빠이로 해
가지고. 사할린에 간께 오두마리라는 데 갔어요. 간께 눈이 그 해에 
얼마나 왔는지 질(길)이 다 막혔어. 그래가 석 달 동안 한집에… ‘야
도야’라 뭐라 하나? 이렇게 바쁘면 말도 안 나온다. 너무 집이 아니
요. 오고 가고 하는 사람 재워주고 하는 한 여관에 우리 다섯 식구 
석 달 살았어. 질이 없어가지고. 이렇게 전봇대 있지요? 전봇대에 줄
이 있는데 그 줄로 보고 질이 나갔어. 근데 아무 집에 들어간다고 
들어가니까 눈이 와서 이런 데에 들어가니까 안이 캄캄하데요.
눈이 너무 내려가지고 천장이 내려앉는다고 눈이 오면 거기만 치워
요. 지붕을 쓸어내리고요. 그것만 치우고. 그것도 내비릴 데가 없어
가 솔을 씻어가 내삐리러 가야 돼요. 내삐릴 데가 없어. 질에 내삐리
면 사람 못 댕기지. 그래 내삐릴 데가 없어. 얼마나 눈이 왔는지. 그
래가 여관에서 3개월을 살았지.
제1장. 3국 4가지 다른 이름의 김옥저
 
31
거기서 이제 ‘노다’라는 데 왔지. 일본말로 노다. 노다에서는 그런께 
내가 3학년, 4학년, 5학년, 6학년, 7학년. 5년 살았는 택이지. 7학년
까지. 7학년이면 졸업. 거기서 러시아 사람 올 때까지 5년. 49년도
까지 그래 살았어.
노다에서 5년 사시는 동안에 아버지는 거기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우리 아버지 일본에 있을 때도 서류방 가지고 살았지. 그니께 자기
네도 할 수 있는데, 아들이나 거 하면 일주일 그러는 거 우리 아버
지는 하룻밤에 다 해삐리요. 그니께 신용이 있어가지고. 자기 딸들이
라도 하모 돈 줘야 되잖아요. 암만 부모 자식끼리라도 “아이고! 그래 
가네야마상한테 하는 게 더 헐케 친다”고 하면서 우리 아버지한테 
가져오고. 일거리를 가지고 와서 집에서 하셨지요. 사무실이라고 없
었지.
■ 전쟁물자 생산 동원
그리고 우리가 러시아 학교나 조선학교나 댕겼으면 내가 거 학교서
는 어떻게 배우고… 일본시대 때는 조금 배웠다 하지만 그것도 전쟁
시대 때 우리가 배웠잖아요. 우리가 4학년, 5학년, 6학년, 7학년 때 
우리가 전쟁이 끝났거든요. 우리 공부라꼬 못했어요. 3분의 1도 공
부 못했어요.
그거 ‘가마부꾸’라고 시방 소세지라고 있잖아요? 둥글둥글한 그런 거
를 맹그는 공장에 우리가 댕겼어요. 내 사진도 있소. 5학년 시작해
가. 그래 해가지고 공부라꼬 못했지요. 또 봄에 되모 감자 심구러 댕
겼어. 우리 학생이. 감자 심구고. 파는 거 아이라. 감자 놓고 거름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32
 
놓고 그기는 학생들이 할 수 있잖아요. 그거 했지요. 그리고 어른들
 덮으고 하는 거는 우리보다 학년이 높은 학생들 다리로 갖다가 
이렇게 흙으로 덮으로 그래 하고.
또 조금 있으면 6월, 7월 달에 되모 여게 머구라 하나? 잎사귀 양상 
같이 생긴 거. 양상 같이 생기가 동그랗고 이렇게. (기억이 나지 않
는 듯) 아이구! 노인네 애먹이네. 양배추 아니고. 강가에 이렇게 이
렇게 동그랗게 이렇게 해가. 연꽃 아이고. 이래가 생기는 거 있잖아
요. 사할린은요. 이기 두 메타(m)나 커요. 요기는 요기밖에 안 크데. 
뜯어가 와가지고 쌈 싸묵고 하잖아요. 들에 나오는 거. 물속에 이래 
나는 거. 연잎도 그렇게 생깄나? 연잎은 이렇게 안 생겼잖아. 동그랗
잖아. 근데 이거는 물속이라꼬. 내려가는 물속에 있어요. 그걸 따가
지고 이렇게 끊어가지고 삶아요. 요만침 큰 거는 이렇고요. 안에는 
빗~어요(비었어요). 그거는 까가지고 말리요. 말리갖고 전쟁 때 보
냈어. 우리가. 사할린에서 그렇게 했어요. 5학년부터 이거를 사할린
에서. 학생 시절 때 우리가 비~가(베어) 가지고 가면 어른들이 삶
죠. 껍데기 벗기고 삶소.
사할린에는 몇 살 때 가셨는데요?
거~ 우리가 살았지. 내 아홉 살. 우리 아버지가 동경에서 영사관 하
고 있다가 동경에 조선 사람들 들어왔지요. 들어올 때 이렇게 말하
면 내 나라 사람은 그거 한다. 전부 조심이 없어. 아무 데나 거 하
고, 여자들은 고함… 일본 사람들 조곤조곤 이렇게 말하잖아. 여자들
이. 이거는 으어으어 저기 물에 거기서 빨래하고 그런 거 하잖아.
가장 젊을 때 찍었던 사진이 있습니까?
내 사진 그것도 다 태아버리고 없어. 이거 열두 살 때 4학년. 노다
서 찍은 거네. 요 주변 사람들은 일본 사람이고. 여기는 친구, 친구 
제1장. 3국 4가지 다른 이름의 김옥저
 
33
조카들이고. 이 사람은 조카들이고. 그때 국민학교 이름이 노다국민
학교. 이게 내 가장 오래된 사진이다. 이거는 우리가 내가 어디 있
노? 여기 있네. 이거는 그린께 열 살 때나 될 끼요. 근께 사할린 가
서 시집 아직 안가고. 일본서 사할린 들어오자마자 국민학교 3학년 
쯤 됐을 거요. 동경 아이고 노다. 그래 이래가지고 나이 묵고 이렇게 
됐잖아. 여기서 한 몇 년 지나가지고 이래 된 거지. 요 때가 한 아홉 
살 됐을 거요. 여기가 열두 살. 이게 내 가장 오래된 사진이다. 이게 
학교요. 졸업사진은 아니요. 이거 학생들 인자 그래 선생하고. 이게 
한 75년 됐어요.
(다른 사진을 가리키며) 이거는 뭐인가 하면 그때 군대들이 먹을 
거. 가마부꾸 소세지 맹글고 우리가 학생들 가서 맹글었지. 굽어 내
려오는 거를 우리가 괘짝에 여~가 보냈어요. 전쟁 때. 전쟁 때 소시
지 굽어갖고 전쟁하는 군인들 준다고.
그때는 이 어린 학생들도 그런 일을 시켰네요?
일 시켰죠. 왜 그냐면 남자들 다 군대 가버렸지. 여자들도 간호부 한
다고 가버릿고. 이거 학생들이요. 소세지 굽는 뭐. 공장은 이짝에 있
었어. 요게 바닷가에. 여기도 노다지요. 이거 7학년 때네. 고일죽(高
一竹). ‘고일죽’이라는 거는… 근께 6학년까지 보통학교. 7학년은 우
리 고일죽. 7학년은 고등과라. 고등과 1학년 죽(竹)반. 나무 이름을 
반 이름으로 한 거지. 죽반. 김산청자(金山淸子). 그래 일본 이름이 
가네야마 시즈코.
(다른 사진을 가리키며) 이거는 몇 학년 때 입니까?
이거는 6학년인가, 5학년인가 잊어버렸어. 안 적혀 있네요. 그냥 ‘5’
라고만 해놨네요. 5학년 때다. 이때는 비가 와가지고 기마부꾸 구우
로 못갔어요. 이거는 기념사진이요. 우리 선생이 새로 왔거든요. 담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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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선생님.
■ 오빠와 남동생
형제자매는 몇 분입니까?
우리 동생. 우리 오빠. 삼남매. 그럼 오빠 계시고. 그 밑에 나고. 밑
에 남동생. 2남 1녀지. 위에 오빠하고는 세 살 차이. 내 팔십 둘이니
까 우리 김성곤 오빠 살았으면 팔십 다섯 되네.
할머니 존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나는 김옥저(金玉姐). ‘옥제’도 되고. 옥저도 되고. 이거 한문으로 
‘옥조’라고 돼가 있는데. 일본말로 ‘김 다마조’. 우리 아버지, 어머니
는 ‘다마꼬!’, ‘다마짱!’이라 불렀어. 근데 한국에서 그거(주민등록증) 
내는데 ‘옥저’가 됐어. 옥저. 남동생은 김영곤. 우리 오빠는 성곤. ‘곤
(坤)’자 돌림이지요. 내  동생은 개띠요. 세 살 차이. 살아있으면 79
세요. 오빠하고 남동생은 벌써 다 돌아가셨어요. (안타까운 듯 한숨
을 쉬며) 오빠하고 동생은 러시아 사람 올라와가지고 너무 머리 좋
아가지고….
노다에서 5년을 사시다가 이후에는 어디로 가셨습니까?
나는 신랑 따라서 유즈노사할린스크 갔지요. 사할린스크. 사할린은 
화태고, 사할린스크는 도시 이름이고. 사할린에서 가장 큰 도시. 여
기서 그대로 살았지. 7학년 마치고 러시아 사람 들어오고부터는 공
부 못했지.
제1장. 3국 4가지 다른 이름의 김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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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해방 전후 5번의 귀국 시도와 좌절
■ 1차 귀국 시도, 눈 부상
사할린에서 사시다가 한국으로 귀국하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조금 돈 벌고 나오자 한께. 돈 벌고 나오자 하는데… 돈 벌었어. 벌
어가 나오자 하는데 내 눈 다쳤어. 내 눈을. 어떻게 했는고 하모 그
때가 내가 4학년 올라갈 땐가? 3학년 올라갈 땐가? 책을 사가지고 
2학기 들어가는 책 사가 이래 오는데, 아~ 밑에서 일본 아이가 저
기 뭐야? 호리가다 했어. 뭐를 할라고 호리가다 했는데, 내가 질로 
안가고 호리가다 위에로 갔어. 내가. 그린께 일본 아이가 이걸 탁 던
진다고 던진께 내 얼굴에 맞았잖아.
눈에 맞았는데 비빘잖아. 이짝은 비빘지만은 여기는 조금 들어가고, 
여기 많이 들어가. 그래 비비고, 비비고 한께 눈 그거 해삐맀지. 그
래 눈 감아가 있는데, 내가 이거 살라고 그랬는지 일본에서 의사가 
들어왔어. 그 시내에. 그 의사 때문에 내가 눈 요렇지. 그런께 이렇
게 보면 새카마이 조금씩 그거 있어. 눈동자에. 시방은 다 보고 괜찮
아요. 근데 이거 붙여가지고 1년 반 내가 이렇게 간타이 해가 댕깄
지. 눈 마개를. 이거 그런께 눈이 이렇게 해가.
그런 일 때문에 일본이나 한국으로 못나온 겁니까?
차비 다 썼잖아. 일본 사람 병원에 댕기니 돈 얼마나 들어요. 이거 
수술했는데. (눈을 보이며) 여기 아직도 흉터가 남았어요. 그때 나올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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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었는데, 눈을 다쳐가지고 못 나왔네요.
■ 2차 귀국 시도, 조선인 징용자 구호
강제모집으로 들어간 사람 무슨 죄로… 그건 사람 천 몇 명이라 하
데요. 한국에서 왜 그 사람들은 안 찾았나 이거라. 나 부모 따라와서 
그거 했는 건 그거 하지만… 그러잖아요? 못 묵고 뚜두리 맞고 죽은 
사람도 많고. 형제간끼리 들어왔는데 동생인지 형인지 도망갈라 했
는데 붙잡혔대. 붙잡히니까 까꿀로(거꾸로) 세워놓고 뚜두리 패가 
죽었대. 죽은 거 사흘 동안 걸어놨다요. 나갔다 들어갔다 하는 사람 
정신 차리라고. 도망가면 이렇게 된다고. 왜 그 사람 그렇게 그거 해
야 되는가 이 말이야.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몰라. 일본 사람이 했는지 그 밑에서 일하는 조선 사람이 그랬는지 
모르지 뭐. 일본시대 때 그랬어. 왜 그런가 하면 밥 먹는데 콩이 3
분의 2고 쌀은 3분의 1로 밥해가 벤또 이렇잖아요. 이렇게 하면 밥 
요고만치 구석으로 몰리는데, 그거 배고파서 묵어버리면 묵었다고 
뚜두리 맞고. 안 묵고 기다리가 하면 이거 묵어봐야 그거 안하고. 일 
갔다 오면 콩가지고 죽 끓이가 그렇게 묵고 무슨 탄광 일을 해요. 
그렇게 곤란했다 이 말이야. 그린께 참지 못해가 죽으면 죽고 살면 
살고 도망가가 나간 사람들. 그래 하나는 우리 집에서 발견돼가 들
어오고. 한 사람은 붙잡혔는지 죽었는지 내가 아나.
우리가 또 한 번 사할린에서 나올 수 있었는데. 또 어떻게 됐는가 
하면 강제 징집자들 탄광 같은 데서 일하다가 잘못해가 뚜두리 맞고 
제1장. 3국 4가지 다른 이름의 김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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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도망가다가 붙잡힌 탄광 노동자들을 수용하는 특별 시설로서 탈출을 
막기 위한 본보기로 구타와 구금, 감시 등 비인간적인 행위가 만연했다. 
다음 구술은 사할린 카와카미(川上)탄광으로 어머니를 따라 이주했던 
1934년생 우정구씨의 관련 증언이다. “~타코베야로 사람이 들어오면 첫
째로 뚜드려 팬데. 왜 그러냐 하면 그 사람이 몸이 튼튼하면 거기서 도
망갈 수 있고, 거기서 자기한테 해코지하는 사람한테 들이닥칠 수 있잖
아? 힘이 있으니까. 그래가지고 때려가지고 병신을 만들어야만 자기네들
이 마음대로 부려먹을 수 있다. ~ 노동하는 게 너무나 어려우니까 도망
치다가 붙들려서 타꼬베야로 들어갔는지 뭐. ~”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
해진상규명위원회(2006), 『검은 대륙으로 끌려간 조선인들 : 사할린 강
제동원의 기록』, pp. 112-113 참조.
이래 하는 데 있잖아. 일꾼 시킬라고 일 시킬라고. 타꼬베야.16) 사
람으로 사가가지고 그 사람 때리가미 일시키는 데 있잖아요. 거기 
들어간 사람이 도망 나왔어. 나왔는데 질에 가는데 사람이 죽고 있
드래. 근데 우리 동네 조선 사람 집 우리 집이 거 있잖아. 근데 우리 
집에 와서 문 뚜두리가 일본 사람 조선말 모른께 좀 봐달라고. 근데 
우리 아버지 나가보인께 그 사람 조선 사람이 아니요.
집에 계셨던 분도 그래가 도망을 나온 거네요?
응. 도망 왔다가… 질에서 보인께 사람이 자빠져가 있더래. 일본 사
람 밤에 오는데. 그래 그 사람 얼마나 좋아요. 좋은께 조선 사람이라
도 끌고 왔지. 그래 거~ 와서 말하는 거 ‘어이구야! 어이구야!’ 한께 
일본 사람은 그런 말 안하거든. 근께 “가네야마상!” 하면서 우리 집
에 우리 아버지 불러냈지. 그래 우리 아버지 마다 하겠어. 어쩌겠어. 
그래가 병원에 데려다 놨지.
근데 우리 아버지는 제지공장 옆에 병원이 있었거든요. 그 의사 병
원에서도 그거 해준께 우리 아버지 알잖아. 이거 일꾼 받아놓은 자
리인께 모르게 놔둘 수는 있지만은 이렇게 이래서는 못한다. 병원 
한 칸에 쪼꼼한 아이가 누버있는데, 그 방에 같이 누버있으라고 이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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렇게 됐지. 근데 그 아이 엄마가 일 하는데 아~ 때문에 일을 못나가
요. 근데 이 사람이 있은께 내도 가고 우리 어무이도 가고 한께 맡
겨놨단 말이요. 우리한테. 근데 우리 어머니 막~ 음식하고 만날(매
일) 미나리. 미나리 만날 미나리 김치하고, 미나리 무치고 한께. 미
나리가 약이요. 그래 그 사람 깨어났지. 사람 먹는 거 우리도 어떻게 
혼자 먹겠어. 가~(그 아이) 먹이고 이렇게 하니까 가~가 살아났어. 
가~도 죽는다 했는데, 뭐 이렇게 같이 또 어떻게 막 하나님이 도와
줬겠지.
아까 뭐 미나리로 먹였다는 사람이 그 분입니까?
그 분이요. 그래 어머니가 죽 끓이고 미나리 반찬. 미나리 김치하고 
미나리 먹여서 그런지 깨어났네. 의사도 말했어. 이 사람 죽는 사람
이라고. 못 산다고. 그런 사람을 우리 어머니 살리놨잖아. 우리 갔는
데 우리 아버지 들어와서 같이 가자고. 어머니하고 밤중에 나가데요. 
나가자마자 어머니 풀 뜯고 뭘 끓이고 그래 해삿태. 그래가 뭐 갖다 
주고. 뭐 하는지 뭐 내 학교 갔다 오면 갖다 주라 하고. 갖다 주고 
뭐 해가. 그 집에 쪼꼼한 아이가 내가 가면 ‘오네짱(언니)!’ 하고 놀
아도 주고. 그 아저씨 잡숫는 거 두어 숟가락 나눠주고. 한 되짜리 
그릇에다 국 끓이가지고 반찬하고 갖다 주고. 첨에는 못 먹고 하더
마는. 그래 뭐 그래 해서 살리놨지.
미나리 먹고요?
미나리하고 죽하고. 미나리 반찬해가 그래 해가. 일본 의사도 깜짝 
놀랬어. 뭐 먹였는데 이 사람이 깨어나는가? 미나리 맨날 그래 해가 
미나리 물 김치해가 물 대신 미나리 먹이고 나물도 해 먹이고. 그래
가 나사가 인자 걸어댕기니까. 인제 걸을만한께 델꼬 가라고. 델꼬 
나가야 된다고. 우리 병원에 못 놔둔다고. 이 사람 내보내야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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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알면 우리가 걸린다. 더군다나 조선 사람이면… 그래 해가 그 사람은 
인자. 그래가 야~도 나가게 됐지.
그래가 그 집에 할아버진지 누가 데려갈 사람이 왔어. 갈 때도 내 
봤어. 이 사람 좀 같이 일본까지 데려다줘라. 거기서는 자기 나라 가
겠지. 그리고 그 사람 내보내는데 약값하고 자는 거 다 우리 아버지
가 물어야 되잖아. 그 사람 돈 어디 있어? 우리 아버지가 돈 다 대
줬지. 병원비, 약값에다 또 차비. 일본까지 가는 차비까지. 거기서 
또 크게 돈 나갔지. 그래 우리 나오는데 필요한 차비도 거기 다 없
어졌지.
아버지가 좋은 일을 하셨네요?
좋은 일을 했지요. 소용 있어? 좋은 데에 안 갔겠습니까. (신을 원망
하는 듯) 하이고! 하느님 있으면 우리 동생들이나 우리 오빠나 좀 
살리주지. 부모가 그래 했다고. 하느님은 그렇게 사랑으로 봐줬는데, 
우리도 좀 봐줘야 되는데. 그 할아버지하고 하느님은 그거 안 봐줬
잖아.
■ 3차 귀국 시도, 탄로와 폭력
또 한 번은 우리 동생하고 내하고 누가 비행기 태워가지고 델꼬 갈
라 했어. 비행기 어떻게 하노? 일본시대 때에 군부에 있던 비행기 
일본 사람들 감춰 놓은 거 그거 태워가지고 우리를 델고 갈라 했어. 
근데 그것도 또 우리 동생이 자기 친구라고 말 하니께, 아이고! 그 
총각이 붙어가지고 나도 간다고… 영곤이 가는데 나도 간다고 달라 
붙어가 안 떨어지잖아. 그래 내 하는 말이 우리도 나무(남) 신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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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데. 갈까 안갈까 모르는데 그래 델꼬 오면 어떻게 할라고 델꼬 
오냐고. 그 사람 보내라. 안 보내면 나도 안 간다고. 근께 할 수 없
어서 어데 보낸다고 보냈는데, 어디 보냈는지 모르지.
어디가지 기차를 타고 가야 했는데. 그런께 그 기차 안에 그때 어떤 
조선사람 남자가 내 혼자 앉아 있는 거 보고 내 옆에 와서 막 그거 
하잖아요. 조선말로 무슨 말하는데 내 알 게 뭐야. 무슨 말 하는지. 
뭐 이렇게 안을라 하고 그러네. 그래 내가 도망 나와 버렸지. 그린께 
막 이렇게 하니께 머리도 풀어졌지. 이거 그때 코트 입고 있었는데 
코트도 막 떨어지고 그랬다. 단추도 떨어져 나가고. 그리고 나서는 
바깥에 나가버렸지. 그래 우리 거기 가는데, 엿 우리 어머님이 사주
대요. 가면서 뭐 먹을 거 없으면 엿이라도 먹으라고 주는 거. 그래 
나가가지고 우리 동생 기차 갈라 하니까 오네. 그래 내 나가 보이 
다 떨어져가 부끄럽잖아. 내 안 간다. 이래가 내 어디 가노? 안 간다
고. 아이고! 그때 세 번 그래 했어. 그래 그때 우리 동생이 그 사람 
안 데리고 왔더라면 일본 와가 있었어.
일본 오셨으면 한국에 올 수 있었겠는데요?
그런께 우리가 일본만 나가면 한국으로 나갈라 그랬지. 뭐. 우리 팔
자가 뭐… 
■ 4차 귀국 시도, 탄로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고 어르신이 가족을 데리고 한국으로 오
려고 안 했습니까?
올라고 했는데, 우리 어머니 비녀를 줘서 일본 사람 배에 타고 나갈
제1장. 3국 4가지 다른 이름의 김옥저
 
41
라 했어요. 근데 우리 아버지가 시내 나갔을 때 그래도 시내에 다섯 
집이 있었어. 조선사람 집이. 그래도 그 집이 친구지요. 그래 내 간
다. 근께 잘 있어라. 난중에 오라고. 그래 한 마디 한께 그게 퍼져나
갔어. 자기네들 ‘말하지 마라’ 이래 됐는데. ‘아이구야! 가네야마상 
간단다. 간단다.’ 이렇게 됐어. 그린께 우리 아버지가 간다고 하니께 
심술이… 조선 사람 심술이 얼마나 많아요.
참말로 뭐 그래 한께 우리 오빠가 그 집에 아들이 있었거든요. 우리 
오빠 친구들이 있는데, 붙잡아놓고 안 내놨잖아요. 내하고 우리 동생
은 벌써 하마까이 나가가 있었고. 배 옆에 있은께 배 주인이 하는 
말이 배 옆에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 이상하게 생각한께 안 보이는 
데에 숨어가 있으라고 이럴 때였어. 그래 우리 동생하고 둘이 그렇
게 있었지요. 있었는데 그 날은 어떻게 캄캄한지 그때 전기라고 안 
줬잖아요. 일본 사람들은 가삐맀지. 러시아 사람들은 그때 그거 해도 
시내에 러시아 사람은 데마리질이나 하는 그런 사람 다섯, 여섯 명
밖에 없었어. 러시아 사람. 군대가 없지. 해꼬지 하는 사람 없지. 한
께 러시아 사람도 마음 놓고 이렇게 우리를 갖다가 이렇게 의심을 
안했어. 그린께 그렇게 편하게 있었죠.
그렇지만 일본 사람들 다 나가고 그런께 시내가 텅 비었어. 시내 가
다가 하나씩 만낸다는 거 러시아 그런 데에 노란 머리 해가지고 모
자 이렇게 해가 키 커다란 사람이 지나가면 놀래요. 우리. 보지도 몬
한 사람. 그래 말 타고 지나가고 그래 하지. 그래가 있다가 우리가 
도망… 배타고 간다고. 근데 가는데 우리 어머니 비녀 큰 거 있었고. 
(한숨을 쉬며) 집에서 하는 거 이런 거 있었는데, 큰 비녀를 주고 
타고 가게 했어요.
배를 무사히 탔습니까?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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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탔어. 탈라 했는데 오빠가 와야 타잖아요. 오빠가. 오빠를 숨카놓
고 안 내놨잖아. 자기끼리 친구끼리 그래 했는지, 어른들이 그렇게 
했는지? 오빠를 누가 잡아놓고 하는 게 아이라. 모르지요. 친구들끼
리 저기 붙잡고 있은께 사흘을 집에 안 왔데요. 우리 오빠가. 그 바
람에 우리 못 갔잖아요. 그래 배가 나갈라 하니까 빨리 오라고. 배 
나갈라 한다고 오라오라 하는데, 우리 아버지하고 어머니는 집에 있
었죠. 오빠 오는가 싶어서 그래 못 갔잖아요.
그게 또 운명이 바뀐 거네요?
예. 그래 운명이 바뀐께 그래 해가지고. 하여간 저기 바다하고 하늘
하고 지평선 있잖아요. 지평선 있는데 웬만하면 하늘 그거 알겠는데, 
그 날은 바다인지 하늘인지 몰랐어. 얼마나 캄캄한지. 그래가지고 한 
사흘 있다가 오빠 들어오데요. 왜 못 들어왔는지. 우리는 형제간끼리
라도 오빠니께 내가 막 말을 못했지요. 얼마나 조심스럽게 오빠 했
기 땜에.
그날 바다에 캄캄하이 우리 동생 얼굴도 내 안보이던데. 캄캄해가 
근데 이래 본께 누가 담배피고 있더라꼬. 산에. 그 담배 불이 크게 
보이더라고. 하늘에 별 보면 반짝반짝 하잖아요. 그 별보다 크게 보
이더라고. 사람이 담배 피워. 그래 저 짝에 있던 게 조금 있다가 보
면 요기 와가 있지. 근데 나는 첨에는 혼이 날라 댕기는가 했어. 그
게 어떤 사람인가는 모르지요. 산에서 거~ 한데. 우리는 바닷가에 
있었지. 그 사람도 뱃가에로 왔는지 어디로 갔는지. 산길로 왔어. 그
때는 일본 군대도 도망 댕기던 군대도 있었고. 그래 담배피고 지나
가는데.
제1장. 3국 4가지 다른 이름의 김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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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차 가족 분리 귀국 시도, 탄로
이렇게 해방되고 바로 오실라 해도 못 오셨고, 그 이후에는 한국에 
올라고 안했습니까?
내가 그때 열일곱 살 때다. 우리 오빠가 잘해가지고. 그때 결혼 전이
죠. 잘해가지고 갈 수 있었어. 짐까지 나갔어. 정거장에. 한국에 올
라고. 근데 우리 오빠가… 일본 사람들이 일 할 사람 대신 놔둬야 일
본 나갔어. 근데 우리 오빠는 우리 아버지한테 해달라 했는데, 우리 
아버지는 ‘아니다. 나는 시방 여권을 보는 사람, 러시아 사람 그거 
하고 있은께 그런 일 나는 못한다’고. ‘우리 아들 시키라’꼬 했죠. 우
리 아버지 하라 하는 대로 우리 오빠가 했은께. 일 잘했지요. 일본 
사람 하나 안 남기고, 서이만 냉기놓고 다 보냈어. 노다 사람들. 서
이는 왜 못 보냈는가 하면 조선 남자하고 살아서 못 보냈지. 우리도 
갈 수 있지 했는데, 엿 장사들이 만날 댕깄거든요. 열차 칸에 나간 
사람들한테 팔아 먹을라고. 근께 우리 이름 다 있잖아. 아이구야! 가
네야마상들이 또 나간다. 이래가 스톱이 됐지. 소문이 나가 그런 거
요. 우리 아버지하고 어무이는 숨어가 있었어. 숨어가 있으면 우짜
요? 친구가 다 아는데. 그린께 못 갔잖아요. 두 번이나 그랬지.
그래 우리 어머니가 사할린 나올 때 점(占)을 하니께 아이 서이가 
북쪽에 나가면 큰 불속에 들어간다고 절대 가지마라고 했대요. 근데 
우리 어머니가 안 갈라 하는데 우리 아버지가 가서 조금만 돈 벌어
가 오면 된다고. 그럼 우리만 여기 있을테니 당신 혼자 가요. 식구들
하고 떨어져가 뭐 그거 하겠나? 그래 따라왔지. 뭐.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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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거처로 사용한 옛 안림초등학교 교사
4. 해방 직후의 상황, 일본인 송출과 러시아인 유입
■ 떠나는 사람들, 정신적 아노미
내가 사할린에 있을 때 45년도 해방 나고 나서 7년도, 6년도 내가 
그거 했어. 정신에 전부 그거 했는 모양이요. 내 친구… 아침에 일어
나면 옆에 일본 사람 집에 하나씩 뜯겨 나가요. 러시아 사람은 불 
때는 나무가 없잖아요. 그니께 일본 사람들이 빈 집을 다 뜯어 나가
제1장. 3국 4가지 다른 이름의 김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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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불 땔라고. 그래가 조금 큰다 하는 거는 집 지을라고 그거 하고. 
근데 아침에 일어나면 집이 하나씩 없어져. 사람이 이상하게 생각했
어. 깜짝 놀래요. 아침에 일어나면 집이 없지. 내 친구들 아무도 없
지. 일본 사람 친구라도 친구는 친구지요. 그래 인제 집에 이렇게. 
길가 하나씩 지나가. 쪼꼼한 개가 주인 찾아서 꼬랑대기 이렇게 냄
새만 맡고 가요. 개가. 그거 보고 이거 보고 난 이래가 못 살겠다 싶
은 기 정신이 이상하게 됐어.
왜 빈집이 많이 생기고 집이 뜯겨 나갔습니까?
일본 사람들이 일본 나가야죠. 자기 고향에. 해방되고 난 뒤에 일본 
사람들은 일본 본토로 다 갔지. 그런께 배타고 도망갔잖아요. 그래 
낮에는 있었는데 밤중으로 다 가삐리고.
사할린 살아오시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입니까?
가장 힘들었을 때는 해방 나고 나서 곡식이 들어올 세(기회) 없잖
아. 곡식 없어가 고생했지. 감자, 호박 같은 기야 있지만 쌀 같은 거 
없잖아. 좁쌀은 촌에서 조금씩 나오고 했어. 좁쌀 잔잔한 거. 보리도 
있었고. 있지만은 그것도 흐다불하게 없잖아. 농사짓는 사람이야 있
고. 촌에 있는 사람 있지만, 우리는 시내 있은께 사묵을라면 어렵지 
뭐. 그리고 가게에 러시아 사람만 사먹는 가게 있어. 거~ 가면 좁쌀
도 있고, 밀가루도 있고.
참 어려운 때도 있었지요. 어려웠지요. 그리고 곡식을 살라면 혼자 
사람들 곡식 못 사묵소. 우리가 곡식 판다는 소리 들으면 가서 아침
에 일찍이 아~ 안고 가요. 곡식은 주로 보리싸래기. 쌀은 없어. 사
할린 쌀이 안 생긴께. 그리고 좁쌀 같은 거 팔지요. 그런 거 사가 좁
쌀밥도 해먹고. 보리쌀밥도 우리는 해먹을 수 있어요. 여자들은. 홀
로 댕기는 사람 그거 못 사묵잖아요.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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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이 없으면 주로 뭘 먹었습니까?
그린께 좁쌀밥 해먹고. 보리쌀 그것도 있으면 부자야. 그러니까 중국
에서 인제 들어오지. 그래 보리싸래기나 들어오면 그거로 밥 해먹고. 
우리도 우리 어머니가 손님이 오면 꼭 밥 먹여가 보내요. 그때 밥이
래야 뭐 보리쌀밥이고 그렇고. 또 가재미 같은 거 가게에서 헐키 팔
았어. 이렇게 괘짝 하나 사면 12루블. 그래 그거로 반찬하고. 텃밭에 
나오는 김치하고. 또 조그만 텃밭에 나가 배차 캐고. 그래가지고 사
람들이 놀라왔다가 그기라도 밥이라꼬 얻어묵고.
■ 조선인의 수난사, 집단학살 모면 
조선인들은 모여 살지 않고 이렇게 흩어져서 살았습니까?
어떻게 흩어지는가 하면 이 사람들이 모집 왔잖아. 해방 났잖아. 근
데 이 사람들 차타고 왔는데, 어디가 어딘지 모르지. 일본 사람들이 
이 사람들 다 직이삘라 했어. 한국사람… 근께 그 소리가… 그 집에 
주인 딸, 암만 조선 사람이라도 이쁘고 거~ 하면 맘에 들 수 있잖
아. 그 사람이 귀띔해줬잖아. 빨리 도망가라. 직일라고 한다. 그래가
지고 그 소리 듣고 이 사람들은 밤에 자다가 산으로 도망갔어. 돌다
가 돌다가 환한 게 본께 집이 있더래. 아이고야! 집이 있다고 이렇
게 본께 간부 있잖아. 뚜두리 패고 일 시키는 그 사람이 거기 왔다 
갔다 하더래. 산에 올라간께 빙빙빙빙 돌았어. 한군데로. 그래 가다
가 이거 안 되겠다. 니는 이짝으로 강가에 가고. 니는 산 쪽으로 가
고. 니는 이짝으로 가고.
그때 갈리가지고. 일본 사람들 소카이 가고 빈 집이 있잖아. 그런 집
제1장. 3국 4가지 다른 이름의 김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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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들어가서 살게 됐죠. 그린께 다 흩어졌지. 어디서 만났는가 하면 
한 5, 6년 있다가 잔치집이라 하고 가보면, “하이고! 이(李) 아무개 
씨 아이가? 아무개 씨 아이가?” 그래가 만나지.
그런 일이 있기 전에는 같이 살았습니까?
그 전에는 모집 가는 데에 거기서 일했지요. 도망가고 나서는 흩어
졌지. 그때는 해방이 1945년 15일 날 났잖아요. 8월 29일까지 러시
아 사람 안 왔어. 사할린에. 그린께 그 사이에 다 퍼져나갔지. 그때
는 일하는 데에 탄광, 탄고. 거기서 이 사람들이 일하던 사람 우짜꼬 
한께, ‘그 잘난 거~ 일하러 가자’ 하고 보내놓고 문 닫아뿌면 된다. 
이렇게 됐어. 그렇게 할라 했어. 할라 했는데 여자 입으로 그래 해서 
도망갔지. 도망가고. ‘후따마다라’라는 데는 거기는 조선사람 델꼬 가
서 마이 죽였어. 산에 하나씩 올라오라 하고 모가지 막 찌르고. 또 
한 사람 오줌 눌라고 간께 사람 살리라. 하는 소리 듣고본께 사람을 
치드래. 그래 있다가 줄 서가 있는 거 너들 안 된다 캐가 도망가자 
하고 그래 도망가고.
일본 사람이 조선 사람을 그렇게 한 겁니까?
예. 왜 그랬냐면, 그래 조선 사람 밉다고. 조선 사람 때문에 전쟁 졌
다고. 어떻게 되는가 하면 사할린이 있잖아. 이래 돼가지고 모양이 
물고기처럼 생겼잖아요. 그래 반틈은 러시아 땅이요. 근데 전쟁 그거 
한께 일본 사람하고 러시아 사람하고 또 전쟁 붙었잖아. 근데 오는
데 러시아 사람들이 탱크 타고 오는데, 조선 사람이 먼저 오더래. 근
께 일본 사람들 본께 다 눈 새카맣고 눈 찌매한(작은) 사람들 이거 
조선 사람들이라고 이렇게… 근께 그때부터 조선 사람들 의심하기 
시작했지. 스파이다 하고. 이거 안 된다 하고.
근데 전쟁 끝나니께 조선사람 때문에 전쟁 졌다고 그래 막 직일라고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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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지. 우리 집에도 우리 아버지를 죽일라고 했어. 그래가 우리 집
으로 잘 아는 사람들은 숨길라 해주고. 나도 숨길라 하다가 어머니, 
아버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온다고 와가지고 온께 집에 아무도 
없대. 그래 내가 이렇게 하니까 막 하고 술취해가 왔대요. 그래 가마
이 있었지 뭐. 그래가 아침에 아버지가 나를 찾아왔대요. 근께 여기 
사람들 우리 식구하고 우리 집에 지사(제사) 같은 거 지내면 음식도 
갖다 주고 하는 친한 사람 있었거든요. 그래가 우리 아버지는 그 사
람들이 일본 사람들은 가네야마상 우리하고 같이 일본가자. 무서워
하지 마라. 그래 아무나 손대지 마라. 하고 조용히 됐어. 첨에는 죽
일라 했어.
가까운 주변 사람은 그런 화를 당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살던 노다에는 화를 당한 사람 아무도 없어. 그리고 노다는 조
선 사람은 다섯 집밖에 없었은께. 그 사람들도 다 일본 사람들한테 
밉게 안 살았으니께. 우리는 저쪽에 제지공장 옆에 살았고, 다른 사
람은 시내에 살았고. 다른 사람은 농사짓는 데에 살았고. 제지공장이 
있고 큰 질(길)이 있고. 여기 우리 살았고. 근께 아버지 제지공장 저
기 그런 데 가서 그거 하는 사람 없으면 우리 아버지 가서 다 해주
고.
아버지가 제지공장에서 일을 했습니까?
회계. 계산 했잖아요. 어떻게 하는가 하면 남자들 다 군대 잡혀갔잖
아요. 근께 여자만 남았잖아. 서류방 하는 것도 여자들 한께 늦게 하
고. 그리고 그 집에 공장 있던 데에 누가 장개가가 아~를 서이 놔두
고 여자가 죽었어. 죽었는데 처제가 와서 아를 키웠단 말이요. 근께 
이 처제가 나 시집 갈 나인데, 형부하고 막~ 아~들 때문에 장개갔
는지 시집갔는지 그래 했는데 이 처제가 나이 젊어가지고 이것도 사
제1장. 3국 4가지 다른 이름의 김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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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 이거 사달라… 사줄 돈 없잖아. 그리고 젊은 여자한테 신세 망
치놨다고 해주고 싶은 대로 다 해줄라고 공장 돈을 썼단 말이요. 그
래 공장이 망하게 됐네. 그때 우리 아버지가 일해가 있은께 이거 큰
일 났다. 우짜노? 일꾼들한테 돈 주고 나면 공장에 나무도 사야 되
고 약도 사야 되고 하는데 돈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노? 그러면 
공장 일꾼들 돈 주고 닫아버리자. 이렇게 됐어.
근께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할 수 없다. 일꾼들을 모다가지고 상의
하라고. 석 달 동안 돈 안 받고 일을 시키도라. 그러면 그 돈 가지고 
약도 사고 나무도 사야 되잖아. 종이 만들라 카면. 그래 사고 석 달
만 기다려 달라. 그런데 그때도 양식이 배급이거든요. 배급하는 양식
은 우리가 사가 너들 석 달 동안 먹여준다. 이렇게 됐어. 근께 이 사
람들 여자들이 그거 마다하고 나가면 일 할 데도 없잖아. 근께 “예! 
그렇게 합시다” 해가 양식만 석 달 동안 주면… 그 옆에 농사하는 
데에 많거든요. 조금만 일해주면 김칫거리라도 얻어올 수 있잖아. 그
렇게 하고. 배 들어오는 데 가면 고기도 얻어오고 그래 하면 살 수
는 있다고 그래 하자고. 그러면 그렇게 하자고 석 달 동안 해가지고 
빚 다 갚았어. 우리 아버지 말대로 그래 해가지고. 공장을 살맀어. 
우리 아버지가 살맀어. 그래 살리고 나서 2년 만에 해방 났어. 빚도 
다 갚고.
그 회사에서는 아버지한테 보답을 하지 않았습니까?
보답은… 그런께 돈 벌어가지고 고향 올라한께 그 돈도 뭐 그랬지요. 
그래 해놓고. 전에는 그 일 안 해도 다른 상점에 그거 하고. 그 돈 
나오고 보태 쓰고 한께 살았는데 이제는 가게가 다 문 닫았잖아. 물
건 들어오는 데가 없은께 거기도 없지. 아버지 일거리라고 그거밖에 
없어. 그래 그것도 어려운 시대 돼나서 크게 못하잖아. 석탄도 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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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뭐도 사야지. 뭐도 사야지. 그것도 다 돈이라. 근께 기계만 조금 
돌아갈 만치밖에 안했잖아. 그 전에는 마이 하는 거. 근께 돈 들어올 
데가 없잖아. 그때가 인자 차비만 있는데, 갈라 한께 뜩~ 아픈 사람
들이 닥쳤잖아. 돈을 또 물어주고. 그래도 어떻게든 가면 가지마는… 
그래가 이리저리 그렇게 됐지.
■ 떠도는 사람들, 동사(凍死)와 아사(餓死)
일본사람들은 전쟁 끝나서 다 거기서 나왔잖아. 조선사람들은 누버
있다가 일본사람들 도망가라 한께 간다고 갈 데 없잖아요. 근데 일
본 사람들 빈 집에 들어가서 그것도 자기 고향 사람이 자기 친구들 
서이서 나와가 들어갔어. 서로가 마음 맞은 사람은 끝까지 빈 집에 
살았고. 또 거기서 더 가보자 하고 시내 밟아서 멀리까지 가서 거 
또 서이가 손  잡고 간 사람은 성공했고.
자기네끼리 일본 여자한테 장개가거나 러시아 여자한테 장개가거나 
그래 장개가가 살고. 근께 어떤 사람은 일본여자한테 설움 받아가며 
일본 여자하고 살아. 그래 하지만은 그것도 그렇지 않단 말이요. 개
인끼리 웬수질 필요가 없다 말이요. 그렇잖아요. 국가끼리 그래 한 
일을. 그래가 일본 여자하고 사는 사람은 살고, 그래 여자한테 당신
도 외로운 사람, 나도 외로운 사람. 일본 여자는 왜 외로운가 하면 
부모들이 자기 오빠가 행여나 집에 찾아올란가 모른께 집 지키고 있
으라 하고 남겨놓고 간 여자들이란 말이요. 또 남자가 군대 갔는데, 
행여나 찾아올까 하고 남은 여자들이란 말이에요. 근데 그런 사라들
이 나중에 갈라 한께 배도 없지 뭐. 그래 갈 데가 없은께 농사 집에 
제1장. 3국 4가지 다른 이름의 김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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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농사 집에 가서 얻어먹고 그러지. 바쁘인께 조선 사람들 자기 
혼자 홀로 댕긴께 여자 혼자 사니까 그래 당신도 외롭고, 나도 외로
운께 서로 살자 하고. 살면 자식 놓고 살고.
살다가 또 일본에서 57년도인가? 58년돈가? 일본 여자 조선 남자하
고 결혼한 사람도 다 소카이 나와라 해서 그때 다 나간 사람도 있
고. 그래가 나간 사람이 있는데. 그 남자가 여자한테 악하게 안 살았
는 경우는 사우(사위)라 하고 받아주고. 그래도 그 중에 조선 사람
들 손이 빠르거든요. 뚜두리 맞고 또 거한 사람은 이웃에 사람 “니 
뚜두리 맞고 그 남자 델꼬 뭐 하노?” 하면서 배 속에서 거한 사람도 
있고. 안 델꼬 가고 자기네만 가는 사람도 있고.
그래가 또 어떤 사람은 살다가 러시아 여자하고도… 러시아 여자하
고 어떻게 살게 되는가 하면 집 가지고 있은께 러시아 여자들이 큰 
땅에서 모집으로 왔지요. 왔는데 들어갈 데가 없네. 근데 집 그거 하
는 거게서 “니 아무 데 가면 누가 혼자 큰 집에서 혼자 산다. 거기
서 한 칸 받아서 살아라.” 이렇게 해가지고 오는 여자 있잖아. 근데 
그 남자도 괄시 못한단 말이요. 근께 한 칸 여자 들어와서 보니 보
따리 하나 들어와서 보니 춥지. 근께 조선 사람이 불쌍하다고 불 때
라. 뭐 해줘라. 그래 정이 가갖고 살 수도 있고. 그래가 살아나온단 
말이요. 그래 나와 가지고 이적지 사는 사람도 있고. 갈린 사람도 있
고. 그래 나오고.
또 어떤 사람은 갈 데 올 데 없이 산판에 나무 베는 데에서 살아. 
일꾼 모집한단다. 또 일할 데도 없고 그래 간다. 가가지고 산사태 때 
맞아가 죽은 사람도 있고. 또 일본시대 온께 추버서도 얼어죽는 사
람도 있고. 또 거기서도 활발한 사람은 이래가 안 되겠다 싶어가 펄
펄 뛰어 댕기는 사람은 살아났고. ‘부끄럽다. 미안하다’ 하고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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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죽고 그래. 많이 죽었어.
얼어 죽은 사람도 있었습니까?
얼어 죽기도하고 배고파 죽기도하고. 그래 노천에 이렇게 가면 8월
달인께 도망가다가 어디 엎어져가 배고프다고 고단하다 하고 이렇게 
손 대~가 본께 감자가 나오더래. 그래 “야들아! 감자 나왔다. 삶아 
묵자” 하고 삶아 묵고 있은께 그 집에 여자가 찾아왔드래. 근데 아
무 소리 안하더래. 왜 여기 있나? 감자를 왜 파 묵나? 아무 소리 안
하더래. 그래 감자를 파더래. 그래 이 사람들 가서 감자 파는 거를 
도와주고 그거한께 그 사람도 ‘아~ 이 사람들이 나쁜 사람 아니다’ 
하고 그래 하는데. 송어 있잖아? 잡아가 소금치가 이것도 먹으라꼬 
뭐. 이 사람도 일본말 모르지. 이 사람은 조선말 모르지. 이거 먹으
라고 말해놓고 가고. 그러자마자 할아버지가 왔더래요. 그 집에 부모
겠지. 근데 그 사람도 그 사람들한테 해코지를 안 하고 한께 감자 
실어가는 거를 올려주고 내려주고 한께 나쁜 사람 아인께 그래 살아
라 하고. 그래 살아남은 사람도 있고 그래.
그래도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 가족이 같이 있어서 큰 어려움은 없었
지. 그것도 내가 보고 말하는 게 아이라 우리 집에 손님들이 와가지
고 그래 이야기하는 소리 듣고 알지. 술 먹으면 무슨 말 하겠어. 남
의 말 안하면 할 말이 없는데.
■ 사상범으로 몰린 오빠와 동생
(사진을 가리키며) 이거 우리 동생. 위에서 왼쪽 이 사람. 김영곤. 
이때가 학생이지. 그래. 학생들이 조선학교 댕기던… 유즈노 사할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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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가 우리 영곤이가 열여덟 살인가 열일곱 살인가 그래요. (다른 
사진을 가리키며) 이때는 전문학교 처음으로 열었어. 조선 사람, 러
시아 사람도 거~ 댕기고. 전문학교. ‘공업전문학교 동창생 기념’이라
고 적혀 있네. 1954년이므로 이때는 스무 살이 거의 넘었을 때다. 
그렇게 됐을 거요.
전문학교까지 나왔으면 남동생은 나중에 잘 살았겠네요?
잘살고 그림을 잘 그렸어. 근데 우리 그때 러시아 사람은 못 살아서 
학생들한테 기계로… 기계라꼬 뭐 그때는 차도 없었는데. 차 그거 하
는 거(자동차 설계도)로 우리 동생이 다 그림으로 이거는 뭐다고. 
이거는 뭐라고 우리 동생이 그렇게 그맀어. 근데 러시아 공민증을 
선생들이 내줬어. 이런 사람은 저게 데려가 쓴다고 그래 냈는데 근
데 잡힜지요. 학교서 누군가 우리 동생 그랬지요. 근데 [입대 영장] 
종이쪼가리 왔는데 우리 어머이는 숨카버렸네. 군대 가는 날 우리 
동생도 찾아 댕겼는데. 같이 공부하면서. 그렇게 해가지고 군대에 안 
갔는데, 사상가로 몰맀잖아.
어디서요?
사할린에서. 전문학교 들어가가지고 공부하면서 우리 그림 그렸잖아. 
기계 그림. 그 그림 가지고 학생들이 요기는 모터다. 이거는 뭣이라
꼬 이렇게 갈치주고 했잖아. 그때는 기계도 없었고 차도 없었잖아. 
러시아 사람들 들어왔을 때. 학교 지~봐야 아무 것도 없었지. 근께 
그림 그린 거 가지고 이렇게 가르치주고 하잖아. 우리 동생이 그림
을 그리느라고 몇 날 며칠 집에 왔다 갔다 할 새도 없었지요. 그때 
또 방학이고 그래했는데 군대 가라고 왔네.
러시아 군대입니까?
러시아 군대지요. 종이쪼가리 그거 왔는데 우리 어머니가 우리 동생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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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한테 보이고, 우리 영곤이 빨리 오라고. 그거 해라꼬. 어머니가 
감춰버렸네. 군대 안 보낼라고. 감춰가 되는 일이요? 안 되잖아. 그
니께 내일 모레 군대 간다 하니께 우리 영곤이를 친구들이 군대 잘 
갔다 오라고 인사하러 오는데 우리 영곤이도 없고 아무도 없네. 찾
아보라 한께 학교간께 일하고 있더래. “야! 니 군대 가라는데 니 뭐
하고 있노?” 하니까 깜짝 놀래가 학교 거기 있는 선생들이 “아이고! 
그러냐?”고 하면서 전별금도 이렇게 그것도 주고. 갔다 오라고 주지. 
근데 거기까지 갔어. 학생들 군대들 있는 데에 다 러시아 사람들 있
는 데 갔는데, 병원진단서가 있어야 되잖아. 군대 갈라모. 근데 진단
서 왜 안 가져 왔나? 몰랐다. 그런 수가 있나? 그때부터 미움 받았
잖아. 그래 머리가 모지란 사람 같으면 그래 이사람 머리 모지라 그
렇다 하지만, 그래도 그만침 공부하고 그만침 거 했다고. 그거 하는 
사람이 그래 그 미움 받았잖아.
그 미움 받은 거 하고 사상 그거하고 어떻게…?
근께 그 사람들은 무슨 말 한 마디 해도 사상가로 몰리고. 북조선도 
그랬잖아. 한 마디 잘 못하면 사상가 집어넣고 그래 하잖아. 그런 미
움을 받아가지고 일감도 잘 안주고 뭐. 그럼 살기가 좀 힘들지. 그러
고 집도 이상한 집에 산께 자기 마음대로 안 되지. 자기가 일하다가 
할란께 학교서는 왜 이런 사람을 학교 일 시키고 있는가 이기라. 말
하자면 러시아 정부에 비협조적이다… 이런 판단이지. 선생들은 이 
사람이 이런 사람 아니라는 거 알잖아. 인적지(지금까지) 우리하고 
같이 하고 있은께 알잖아. 그지만 이렇게 편들고 말하면 니는 왜 이
렇게 편드노? 사상자인데. 그 이후부터 살기가 힘들었지요. 우리 동
생과 가족들이 특무부에 맨날 불리가고. 우리 오빠도 불리가고.
오빠는 무슨 이유로 그렇게 됐습니까?
제1장. 3국 4가지 다른 이름의 김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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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니는 일본 사람들 다 소까이 보냈나?” 이기라. 일꾼들 다 보냈
나? 오빠를. 오빠가 일본들을 거~ 보내고 했잖아요. 일본 사람들을 
소카이 보내는 거는 일본 정부에서 그래 하라고 해가 한 건데. 소카
이 보내는 일을 하는 사람 자기가 일본에 가야하잖아. 근께 그 대신
에 우리 오빠를 세웠단 말이요. 그래가 자기는 일본에 가삐맀고. 오
빠는 일본에 안 갔어. 우리 오빠가 일하기 전에 일하던 일본 사람은 
갔지요. 식구대로. 근데 우리 오빠가 남아서 남은 일본 사람들도 소
카이 보냈죠. “몇 시에 기차가 오니께 여기 있어요” 하고 집집마다 
댕기고 보냈지요. 오빠가 근께 러시아 사람 와가지고 일을 시킬라 
한께 아무도 없네. 일본 사람이라고 하나도 없단 말이야. 근께 “이거 
누가 책임 짔노?” 한께, “김성곤이 그래 했다” 하이. 그래 김성곤이 
델꼬 오라 하고. 그래 김성곤은 사람 보내는 거는 자기 고향 간다는
데 그래 안 보낼 수도 없고 다 보냈지. 그렇게 될 줄 누가 알았어.
그래 오빠도 만날 불리가가 앉아가지고. 여기 앉아가지고 똑딱똑딱 
물로 이렇게 고문한다 아이요. 점두록(하루 종일) 그거 하면 얼마나 
그거 하요? 그렇게 추답(문책) 받았다 아이요.
그렇게 벌주는 거겠지. 그래 빨치산이라고 있어. 러시아 사람. 빨치
산은 산에 숨어 있다가 군대 들어오면 그거 하는 거 있잖아. 그걸 
빨치산이라 그러고. 그래 사할린에 무슨 빨치산이 있어. 어데 어데인
가 다리 해놨는데 다리가 뿌사짔다. 어디 어디가 불이 났다. 우리 오
빠는 집에 있는데 거기 불 난 거 누가 할 게 뭐야. 그렇 때마다 의
심받고.
그러면 거기에 니가 관여한 거 아닌가 이런 의심을 받았네요?
응. 그기라. 그래가 할 수 없이 그냥… 그래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그러다가 어떻게 돼가지고 우리 오빠는 만날 특무부에 불맀어.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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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무부는 어떤 곳입니까?
특무부라고 있잖아요. 죄인 잡아가는 거는 순사고, 그 우에 사상가를 
붙잡는 특무부 아니오. 우리 아버지도 불리고, 우리 오빠도 불리고 
그래 했어. 불려갔었지. 그거는 러시아 특무부지. 러시아지. 러시아 
특무부라도 큰땅(러시아 본토)서 온 조선사람이 있잖아요. 조선사람
은 종자가 서이 있었어. 일본 시대 때 있는 사람하고, 북에서 일꾼으
로 모집 온 사람 있고, 러시아에 살던 조선사람. 근데 러시아에서 온 
조선 사람은 러시아사람처럼 얼마나 우리를 갖다가 어떻게 그거 했
는지 알아요? 우리를 돗또지새끼. 돼지새끼. 그래 학교 선생 하는 사
람이 돗또지새끼들아. 그랬어. 나는 학교 안가니까 모르지만 우리 오
빠들이 “돗또지새끼 무슨 말이야?” 그래서 내 알았어.
조선사람 세 부류 중에서 러시아 조선 사람들이 득세를 했네요?
그럼. 큰 소리치고 지 마음대로 하고 그랬지. 그러면서 고춧가루는 
부쳐 와서 한국 보면 뭐야? 10원씩 뭐 그렇게 팔아먹고 부자가 됐잖
아요. 우리는 고춧가루라고 사할린에 없거든요. 고추가 안 돼가지고.
오빠는 몇 세까지 사셨습니까?
(한숨을 쉬며) 우리 오빠가 몇 살까지 살았나? 서른 살까지 못 살았
어. 몸이 편찮으셔가 일찍. 그렇게 추답을 받고 한께 몸이 약해지지. 
동생도 오래 못 살았어. 우리 동생은 사십? 오십? 아까워. 아까워. 
우리 동생 아까워. 너무 아까워. 내가 학교 댕기면서 숙제 같은 거 
하지요. 학교도 안 댕겨도 옆에서 가마이 보고 있다가 퍼뜩 말하지. 
이거 무슨 무슨 글이 아닌가요? 동생이 내한테 갈쳐주는데. 가가 그
때 몇 살인가? 네 살인가 될 때 내 공부하고 오빠가 그거 하면 꼭 
들여다봐요. 오빠가 중학교 댕길 때 그때 동생이 몇 살이야? 5학년? 
4학년인가 그래. 영어도 우리 오빠가 공부하는데 옆에서 영어도 배
제1장. 3국 4가지 다른 이름의 김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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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고 그래 했어. 일본글이지. 조선 글이지. 러시아 글이지. 독일 글
이지. 영어 등 외국어를 다섯 개를 다 알아. 우리 동생이. 그래가 조
선학교 가니께 독일 글 배워줘서 독일 글 배웠지. 또 러시아 전문학
교 가니까 또 미국 꺼 배웠지. 그런 사람이오. 인물도 얼마나 좋소. 
우리 동생.
사할린에서 우리 조선 사람들이 성공한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성공한 사람 많지요. 엔지니어라. 디렉터라. 뭐 근데 러시아 사람 안 
세울라고 애써도 디렉터(director)라 하고 앉혀놓고 말 시켜보면 이 
사람이 조선사람 말 잘한단 말이요. 그래 일하고. 이렇게 하면 안 된
다. 이렇게 하라. 이렇게 안하면 이렇게 하라. 그거 하잖아. 근데 그 
사람 하라 하는 대로 하면 손해가 없거든. 근께 자꾸 올라가지. 집 
짓는 데에도 집 짓는 대학교 나오고 하죠. 그 사람 하자 하는 대로 
지으면 삐딸하지도 않고 뜩 서가 가네. 러시아 사람 하라 하는 대로 
간께 안 됐단 말이요. 그런 사람도 다 한국에 나와가 있어. 인제 80
세 다 돼가지.
■ 아버지의 시베리아 수용소 생활 5년
일본에서 살다가 사할린 간 사람은 좀 좋지 않게 튀급했습니까?
그린께 우리 아버지 그래서 맨날 특무부 불맀잖아요. 그리고 우리 
아버지가 노동 일 안하고 맨날 그거 한께 자본가라꼬. 러시아사람은 
자본가를 싫어하거든요. 자본가를 싫어해가 러시아 사람끼리라도 자
본가 사람들이 다 시베리아 끌고 가가 일시키고 했잖아요. 그 집에 
재산도 다 가져가버리고 그래. 노다에서 결국 고향으로 귀국을 하려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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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 못하고 그렇게 어려움을 겪었어.
그래 우리 아버지도 5년 동안 집에 없었잖아. 우리 아버지만 집에 
있었으면 내 공부했어. 우리 아버지는 여자가 공부 더 해야 된다고. 
남자보다. 엄마하고 생각이 다르지. 엄마는 양반식이라. 여자는 집에 
가면 살림이나 살고 그기라. 우리 아버지는 여자도 시집가서 가문에 
자기 자손 낳아가지고 교육시킬만침 지식이 있어야 된다고. 공부해
야 된다고. 그래 내보고 말하잖아. 암만 못살아도 중학교까지 넣어준
다. 공부해라. 그래 하던 사람이요. 우리 아버지는.
아버지는 왜 5년 동안 집에 안 계셨습니까?
근께 자본가라 했잖아. 노동자도 아이고, 자본가라 하고 그래가. 사
할린이 러시아 땅이 되고 난 뒤부터 그렇죠. 일본시대에는 그런 게 
없었는데 러시아 사람 올라와가지고. 그때 아버지는 5년 동안 도망 
다닌 게 아닙니다. 우리 아버지는. 그래 우리 집에 큰땅(러시아 대
륙)에서 온 사람이 우리 아버지보고 말하데. “오늘 밤에는 찾아갈 
끼라. 몸 피하라”고. 그거 밤에 본께 누가 우리 집에 오는데, 집도 
다 뜯깄는데 온다면 우리 집밖에 없지. 서이 왔더래. 근데 우리 아버
지 우리 나가는 질이 있었어. 그래 집에서 나가버렸지. 그래도 어디 
가겠어. 어디 도망가겠어. 배타고 나가면 모르지만은 그래 붙잡혀 버
렸지.
그래가 어디 갔습니까?
그래가지고 언제 어디로 데리고 가는지. 우리는 찾지마라고. 큰땅서 
온 할매들이 “찾으러 댕기면 너들 고상한다. 찾으러 댕기지 마라. 올 
때 되면 온다”고 말해줬지. 그래 그 소리만 듣고 오늘 오나 내일 오
나. 우리 아버지 사진 봤지요? 그 우리 아버지 맨날 양복하고 넥타
이하고 댕겼어. 근데 그거 봐요. 남에 꺼 입고 사진 찍고. 퍼뜩 집에 
제1장. 3국 4가지 다른 이름의 김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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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 갔잖아. 우리 아버지. 나를 찾고 댕기지 말고 집에 있는 사진 
다 태워버리라고. 그때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식구들 사진 다 태
워버렸잖아. 그때 사진이 다 없어졌지. 옛날 사진. 일본시대 때 사진. 
그 중에는 옛날에 찍은 거 있었잖아요. 내 결혼사진 이런 것도 다 
태웠어요. 러시아 사람 올라와서 다 태웠어요.
아버지가 그때 러시아 특무대에 끌려가고 나서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러고 나서 우리는 텃밭에서 감자나 캐고, 호박이나 그거 하고. 엿 
있잖아요? 그거 해가지고 일본 사람 소카이 나갈 때 묵을 거 없으면 
입에 물고 있으면 양이 되잖아. 다 우리 집에 와서 해달라 해요. 근
데 어머니는 조선식으로 좁쌀. 그때 좁쌀도 자기네가 가져온께 우리
가 해줬지요. 그걸 만들어주면 공임을 받고 그래 살아나왔지.
아버지는 곧바로 풀려 나왔습니까?
그래가지고 5년 만에 나왔어. 5년 만에 나온 것도 우리 아버지가… 
우리 종씨라 하데. 큰땅에서 나온 사람이. 그 사람은 이래저래 해서 
죄 없는 사람이다. 이 사람도 노동자 한 가지다. 그래 해가 어떻게 
빠져나왔잖아. 그리고 그 안에서도 서류방 하는 거, 러시아 사람들 
하는 거 우리 아버지가 아마도 했는 모양이요. 그래 나가라 캐가 나
갔잖아. 5년이면 상당히 오랫동안이지요. 근께 시베리아 그거 갔다 
왔다는 말 아버지 입 밖에 안내요. 걱정한다고.
사할린에 있었던 게 아니고, 시베리아까지 갔다 오셨네요?
그렇겠죠. 그런께 오바 같은 거 지담한 거 입고 왔던데. 추분데 입는 
거 지담한 거 오바 같은 거 이렇게 하면 얼굴 그래 나오는 그런 거 
입고 왔데. 우리 아버지는 시베리아까지 갔다 왔다 소리도 안 하데
요. 그래 “아버지! 어디 가 있다가 왔느냐?” 카이, 산판에 갔다 왔데
요. 산판에. 거~는 산림, 나무 베는 곳이지. 그렇게 말한께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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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뭐 물어볼 게 있어. 못 물어보지.
5년 동안 아버지가 없는 상태에서 사는 게 상당히 힘들었겠습니다?
가족들이 힘들었죠. 그러니까 그때 나도 일했지요. 그때 일하는 데 
탄 들어오는 데 아요? 탄을 갖다가 트렁크에다가 실어주는 일을 했
어. 탄광이 아이고 제지공장에 불 때야 전기가 나오잖아. 거기 전기
하는 데에 불 때야 되잖아. 탄을 불 때는 데에 올리는 일이지. 거~ 
트렁크라꼬 있어. 요만한 거. 그런 거 오면 우리 학생들이 일곱 명이 
부어주고 부어주고 했어. 그래 하면 돈을 받지요. 쬐끔 줬지요.
일제시대는 학생 때도 일했어. 학교서 막 불리갔지. 일꾼이 없단 말
이요. 일본사람 다 나가고 없지. 조선사람 들어오는 사람 없지. 러시
아사람 들어오는 사람 없지. 일꾼이 없어. 그래 우리 끌리갔잖아. 우
리가 밤에 나갈 때 있고. 두 번째 나오는 거 있고. 세 번째까지 갈
리~가 나갔어.
삽을 들고 일하기에는 아직 어릴 때 아닙니까?
그래도 했어. 나는. 첨에는 못하겠던데 하니까 해지데요. 내 열다섯 
살 됐지. 열네 살까지 공부하고. 열다섯 살에. 우리 아버지 그때는 
집에 있었어. 우리 아버지도 종이공장 일했어. 노란 향내 나는 거 있
잖아요. 그거를 일 할 사람이 없은께 우리 아버지가 했잖아. 우리 아
버지는 스코프질이라꼬 못했는데, 그래가지고 어떻게 해가 다치가지
고. 여기 어떻게 다쳐가지고 고생했어. 그때는 약도 없었어. 약도 없
는데 어떻게 어떻게 고치가. 그래 아파서 병원이 없은께 아프인께 
일을 못하니까 안 나갔어. 그래서 잡아갔는지 어째서 잡아갔는지 잡
아가버렸어.
그럴 때 가장 힘들었지요. 그런데 묵고 그거 하는 거는 어머니가 밥 
해주고 한께. 쌀이 있어서 밥해주는지 없어서 해주는지 우리야 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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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요. 어머니가 해주인께 그래 먹고 그래. 그리고 엿 해달라고 좁쌀 
가져오잖아요. 그면 조금 냉겨놓고 엿 맹글어주고 그래 이래저래 먹
고 살았지요.
그래가지고 아버지 없는 5년 동안 버텨 나왔습니까?
예. 감자를 농사지~가 팔아먹을 줄 모르고, 가을에 그 이듬에 감자 
나올 때까지 먹었어. 얼마나 많이 심궜는데, 팔아먹을 줄도 모르고. 
그것도 팔으면 돈 될 낀데. 그래 오고 가고 하는 사람 감자 삶으면 
우리 집에 오면 감자라도 얻어먹는다고 오는 사람 얼마나 많소. 우
리 오빠 동무도 오고. 와서 얻어먹기도 하고 뭐. 그래 감자 껍데기는 
모다 놓은 거 또 얻으러 오는 사람도 있고.
5. 결혼생활과 자녀 양육
■ 18세 첫 결혼과 이혼
결혼을 몇 세에 하셨습니까?
나 49년도에 결혼했지. 49년이면 그때 열여덟 살. 그때 결혼하는 과
정? 어떻게 결혼했는지를? 그거는 우리 어머니가 나를 줬지요. 어떻
게 되는가 하면 그때 시대에 기술이 있는 사람 살기 좋다고. 그래서 
우리 주인이 기술은 있었어요. 근데 러시아말 모르고. 그 양반도 학
교 안 댕긴께 글도 모르고. 나이는 우리하고 내보고 열세 살 우에고. 
그때 서른 한 살이네. 나이 차이가 많네요. 근데 얼굴이가 예쁘인께
네 스물일곱이라 했어. 우리 어머니는. 그래 속히~(속아서) 간 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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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처녀 때 나는 미인인지 뭔지? 키 크다마이 해가지고 그러고.
엄마가 중매를 해가지고 만났네예?
그래. 우리 아버지는 그 사람을 안 볼라 했어. 우리 아버지는 사람 
그 한께 사람 볼 줄 알거든요. 그래 안 된다. 어머니가 그래 좋다고. 
근께 우리 아버지는 우리 어머니한테 말도 몬하고 막~ 우리 아버지 
조용하요. 술도 안 잡수고 양반이라. 그런께 할 수 없이 “자네! 그렇
게 잘 생각하게. 안 되겠네. 그 사람은 난 맘에 없다”고 그라데. 우
리 어머니는 “당신은 모르면 그래 시즈코는 내한테 맡기시오. 시즈
코는 내가 시집보내겠습니다”고 하지. 근데 큰 아들이 아니고. 돈은 
벌으면 있은께 돈은 없어도 된다. 그 사람은 단신으로 나와가 아무 
것도 없었어. 근데 우리 어머니 줬잖아. 돈은 벌면 있다고.
할아버지 존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그 양반은 박영훈. 밀양 박 가입니다. 할아버지는 고향은 경기도 광
주. 그때 기술자지. 그 양반은 쇠똥가리(쇠조각) 가지고 뭐든지 맨글
어요. 기술이 있었어. 철공 기술자. 철공소에 근무했어요. 그래 일본 
시대에 배웠은께 배우는 거 없이 다 배웠지. 그래 그기 우리 어머니 
좋다고 나를 줬잖아. 그래 중매하는 사람이 거짓말을 보태서 이리 
저리 보태서 그래 우리 어리석은께 넘어갔잖아요. 그 당시는 기술자
가 밥도 안 굶기고 그럴 끼다 그거였지. 말하자면 어디 가도 그거 
한 번 하면 밥 먹을 수 있다는 그거지요.
■ 결혼식과 친정살이
결혼식은 어떻게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제1장. 3국 4가지 다른 이름의 김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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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은 크게 했어요. 우리 어머니 손이 크고 양반 집에서 커 놓은
께 펑펑하게 큰 사람이 돼서 그 성질대로 했어. 조선식으로 했지. 조
선식이라꼬 저고리 입고. 너울 이라는 게 그때 기지(천) 없어가지고 
하얀 기지에다가 꽃 놓고 기다란 것 그리고… 나는 안 갈라 했는데 
그래 보내데. 우리 오빠도 싫어했고. 우리 너무 일찍다고 “뭐 열여덟 
살에 시집보내고 하는가?”고 반대했어요. 식구들이. 근데 왜 그래 하
는가 하모 모집으로 오는 총각들이 얼마나 많았어요. 그린께 중매가 
들어와요. 자꾸. 중매 들어온께 시끄럽다고 시집보내삐리야 된다고 
그래가 그래 했잖아요. 근께 내 사랑이라꼬 모르요. 뭐 사랑 때문에 
속 타고 이런 거 나 없었어. 그래 시집가서 그 사람하고… 또 술은 
얼마나 좋아해요.
결혼식 때 신랑은 어떤 옷차림을 했습니까?
옷차림은 우리 어머니, 오빠한테 양복 해 입히는 거… 우리 오빠한테 
해준다는 양복 기지 갖고 양복 해 입히고. 그때는 한복 안 했어요. 
내만 저고리 챙기 입었지. 신부만 한복이고. 신랑은 양복이지. 초례
상을 차리고, 닭을 날리게 그거 해놓고, 산에 가서 그거 대나무 같은 
거 솔나무 가져오고 그래 했어요. 이렇게 지게로 해가지고 이렇게 
신랑 쪽에서 지고 왔다 갔다 하고. 한국에서 하는 전통식으로 한 겁
니다. 그렇게 했어요.
폐물은 뭐 받았습니까?
그 사람 폐물 줄만침 잘 갖추지 못했어. 일본시대 온 사람 폐물 그
런 거 어디 있어. 그때 반지 파는 데도 없었고. 양복은 우리 어머니
가 해줬고. 내 한복은 신랑이 해줬는지 그거까지 내 모르겠어. 신랑
이 돈 줘서 했는지? 혼서지(婚書紙)라고 이런 거 써서 주고받고 하
는 거. 사성(四星)이라고 신랑 생일 써가지고 보내고 함을 보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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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거. 그 사람도 부모 있어야 그런 거 해 보내지. 그 사람 호불애
빈데. 그 사람도 모집 중에서 왔다 갔다 하는 중에서 고르고. 시집, 
장개가고. 근께 하늘 별 따기지 뭐. 할아버지는 운이 좋았죠. 인물하
고 자기 기술 그것 때문에 그랬죠. 인물은 이뻤어요.
결혼을 하셔갖고 신혼집은 어디서 차렸습니까?
신혼집이야 우리 집에 뭐. 신혼 칼 집이 어디 있어. 그 사람 나무 집
에 살림 사는 집이 있었는데. 우리 집에서 살았지. 근께 살다가 자기
가 홀로 댕기다가 거 하고 있은께 안돼서 자기 유즈노사할린스크 간
다고 그래 따라 갔잖아. 간께 집이 없어가지고 얼마나 고상했는지. 
유즈노사할린스크는 거기 바다가 없어. 그때는 우리 신랑 집이 없었
지요. 그린께 신랑 일거리도 없었고.
신혼생활을 친정댁에서 얼마나 하셨는지요?
몇 년까지랄 것도 없어. 그린께 그때 11월에 결혼해 살다가 다음 해 
6월 달엔가 자기 혼자 유주노사할린스크로 갈라 하데요. 자기 혼자 
간다 하니 우리 어머니 “아이고! 저 사람 저래 가뻐리면 안 올 끼다” 
하고. 니 따라갈려면 따라 가라고. 그래 나도 시집 가인께 처음에는 
싫다 싫다 해도 내외간이 산께 그때 또 애기 생깄잖아요. 그래 따라
나섰지. 뭐. 그래가 한 7년, 8년 살았지. 애기도 낳았어요. 그 사람한
테 애 둘이 났어요.
친정 식구들은 노다 거기 계속 사셨습니까?
그래가지고 내 시집가고 3년이나 더 그래 살았으이. 왜 거기서 안 
나왔나 하면 밭이 있었어요. 일본 사람 소까이 나가 집 뜯긴 자리 
비~가 있잖아요. 그거로 인자 감자 심구고, 호박 심구고 그거 때문
에 그 집으로 안 내삐릴라 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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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즈노사할린스크 이사
결혼해가 친정에서 7, 8개월 잘다가 유즈노사할린스크로 이사 갔어. 
갔는데 집이 없어가지고 이다(널판지)를 주워가지고. 나무. 할아버지 
혼자 사는데 보태가지고. 할아버지 집 들어가는 데에 거기다가 이래 
발라가 거기서 우리 둘이 살았어요. 아이는 그때 그 집에서 둘이 낳
았어. 우리 큰 딸 성월이하고 아들 택진이 하고. 친정집에서 근께 
야~들이 친정집에서 큰 아~가 친정집에서 뱄지요. 친정집에 시집가
가지고 여덟 달 살았어. 여덟 달 살다가 그냥 갔네요. 우리 주인이 
처갓집살이 싫어하데요. 그 양반도 술을 좋아했잖아요. 술을 잡수니
까 말이 많다고. 막~ 그니께 다 싫어하지 뭐. 자기도 눈치 있거든.
유즈노사할린스크로 이사 가서도 할아버지는 계속 기술자로 일을 하
셨습니까?
기술자로 들어갈라 하니께 철도 거기서 쓸라 하는데 우리 주인이 글
을 모르고 말을 모르니께 몇 시에 오라 하는 그걸 몰라가지고 늦게 
가니께 우리 주인 자리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버렸어. 기차 댕기는 
철도국 3호실. 그리고 우리 그 양반은 나무 앞에 싫은 소리 하기 싫
고. 암만 술은 좋아했지만은 나무한테 싫은 소리 하기 싫고. 이렇게 
뭐라 할까? 겁이 많다 하면 좋을까? 체면이 많다 하면 좋을까 그래
요. 누가 무슨 소리 하면 ‘예!’ 하고. 그래 하고. 그러면 어떻고 어떻
고 이렇게 파 들어가는 그거 없어. 그니께 자기가 고생하지.
철도국에서 몇 년이나 일을 하셨습니까?
아니요. 일 못했어. 오라하는데 안가가. 어떻게 돼서 이렇게 하면은 
건축부에서 조금 일하고. 그래 어디가 대빵 같은 거 가지고 가서 그
때는 모두 빼치카 아이고 이 난로 가지고 불 땠잖아. 그니께 연통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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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요구하잖아. 그래 연통 맹글고 그래 해가. 연통 만드는 것도 그 
전에 물건 만드는 그 기술 가지고 만들었지.
자기가 직접 연통을 만들어서 판매한 겁니까? 아니면 월급을 받고 
한 거예요?
그거 해가지고 러시아 사람 얼마쓱 돈 국가 돈으로 주는데. 국가 돈
으로 나와요. 그게? 그저 해주는 거 한가지지 뭐. 어디 연통 만드는 
공장에 취직도 못했어. 자기가 만들어도 팔지도 못했지요. 거기 가져
오면 그 사람들이 맡겨주고, 월급을 받았는가 어쨌는가 나도 확실하
게 모르겠네. 그래 묵고는 살았으니께. 그래 개인집에서도 뭐 해달라
고 해서 그 사람들 돈 주는 거 가지고 묵고 살았지. 술 좋아하지. 근
데 잘 못살지. 돈 대신 술 가져오는데. 연통에 연기 올라가는 동그란 
거 있잖아요. 난로에 연통해가. 여기는 그런 거 없더라. 이렇게 해가 
올라가모.
사할린에서는 가정마다 이 연통을 만들었습니까?
예. 그리고 나중에 벽돌 해가지고. ‘빼치카’라고 러시아식으로 난로 
맹글었지. 그때는 연통 안하고. 그때는 난로로 대빵 가지고 덮어 씌
워줬지요. 돌로 하면 어떻게 다 그거 한다고 대빵 가지고 괘짝처럼 
맹글어가지고 입히주고 했지요. 그것도 그 양반 다 해주고.
사할린에서는 추운 곳인데, 일반가정에는 나무를 뗐습니까?
석탄. 한국에는 동그랗게 구멍이 있는 그거 큰 차 세 개 사야 돼요. 
한 동(冬) 지나갈라면. 그때 나는 아이들 키운다꼬 일 안하고 살림
만 살다가. 그래가 홈스크에 그 양반하고 갈리가지고, 홈스크 와가지
고 건축부에서 7년 동안 일했어.
박 할아버지는 이혼을 한 겁니까?
그때는 내가 스물다섯 살 때 그거 했은께 부끄러운 말이요. 그 할아
제1장. 3국 4가지 다른 이름의 김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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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는 뒤에 또 재혼을 한 것도 아니고. 술 좋아해서 뭐. 뒤에 만난 
한 사람은 술 안 먹는다 해서 갔어. 내가. 그린께 그 대신에. 내가 
죄 많아서 그 술놈이라도 같이 살았으면 어디 가서 큰 소리나 칬지. 
그래도 그 양반하고 살면서 맘은 편했어. 술 먹고 애를 먹이도 맘은 
편했어. 부모가 그거 해주는 내 팔자라 하고 살았지만, 어지간하이 
내가 나왔지. 내 맘도 편한데. 근데 이 사람 만나가지고도 깜짝깜짝 
놀래면서 살았어. 첨에 박 할아버지와 갈릴 때 낳은 자녀를 데리고 
나왔죠. 놈팽이한테 어떻게 맡겨놔요.
■ 27세 재혼, 5자녀 양육
홈스크는 몇 살 때 들어갔습니까? 
내가 스물일곱 살 때 내가 들어갔나? 아니. 그 처음 할아버지하고 
헤어지고 홈스크에 들어간 거지. 근께 스물일곱에 들어간께 아이가 
낳았잖아. 마흔다섯에는 우리 뒤에 만난 한씨 할아버지가 돌아가셨
고. 내 마흔다섯 살에 돌아가가 일곱에 내가 여기 수술했고.
그 다음에 한 할아버지는 언제 만났습니까?
만난 거는 그런께 스물일곱인가 여섯인가 만나고. 그 양반 술을 안 
묵는다 해서 갔어. 내가. 그 사람 얼굴 얼마나 못됐게 생겼어. 내가 
스물일곱 살에 이 사람 만냈고. 그래 사십 일곱에 내가 수술을 했고. 
결혼을 열여덟 살에 해갔고. 박 할아버지를 결혼한 게. 갈린 거는 스
물다섯 살에 갈맀고. 너무 술 잡수고 잔소리하는 거… 다른 사람들은 
보면 내가 왜 이래 고생해야 싶은 게 갈맀지 뭐. 안 갈리고 그걸 참
고 참고 못 살겠대요. 술 떨어질 때까지 말합니다. 내가 잔다고 하면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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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지 마고 들으라고 그래요. 근데 아이한테 젓을 한손으로 물리고 
자는 체 하지요. 그러면 자기 말하는 소리 안 듣는다고 맏 뚜드러맞
아요. 머리 얼마나 뜯깄다고. 그래 자기가 술 깨고 보면 머리 그린께 
보라고. 머리 놔둬요. 보고 안 보는 체하고 가버리고. 그렇게 살았어. 
술을 안 드실 때는 괜찮은데. 내보고 부끄러버서 말도 못해. 그런께 
술이 웬수지.
노다에서는 얼마쯤 사셨습니까?
노다에 그린께 아홉 살에 들어가서 내가 열 여덟 살인께 10년 가까
이 살았는 택이지. 아홉 살에 왔고. 쪼꼼할 때 그때 1학년인가, 3학
년 때 와가지고 그래 내가 49년도에 시집가가 나왔은께 해봐요.
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는 어떻게 사셨습니까?
혼자가 되고 내가 일을 했잖아. 큰 아들도 일 했고. 그린께 그대로 
살았지요 뭐. 잘은 못살아도 그대로.
■ 남편 사별과 큰 수술
그 사람하고 20년 살다가 그 사람 돌아가셨지. 아~ 서이 놓고. 내가 
사십 다섯 살에 돌아가셨지. 그때 아이들도 아직 어리긴 했지요. 그
래가 내가 그 양반 돌아가시고 나서 근께 74년 돌아가시고 77년도 
내가 큰 수술 했잖아요. (신체 부위를 가리키며) 이거를 떼 내삐맀
잖아. 암(癌) 그거 해가. 가슴 한쪽에. 근께 아이들도 고생했어. 아
버지도 없고 뭐. 주인 양반 돌아가시고 3년 뒤에 암이 발견된 거지.
그땐 의술이 발달이 되지 않을 때인데 다행입니다?
아니오. 유즈노사할린 러시아사람들 그때는 암 그거를 해가 그 사람
제1장. 3국 4가지 다른 이름의 김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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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막 암으로 어떻게 한다는 시작할 땐가 아팠어. 내가. 암 치료기술
이 개발된 뒤랄까? 응. 그 사람들 개발을 해서 암으로 하는 게 있고. 
그 한다는 거. 내가 독일 의사한테. 그때 독일 의사 있었어. 유즈노
사할린. 그래 그 사람이 내한테. 그런께 내 이적즉(아직까지) 살았잖
아요. 그 독일 의사가 유명했어. 그린께 시방 30년도 넘었잖아. 40
년 다 들어가잖아. 그니께 내가 그러고 한쪽이 자꾸 예비(야위어) 
들어가요. 이렇게 뭐라 하면 좋을까? 살이 빠지요. 한 쪽이.
그래도 건강하시니 좋습니다?
이것만 아이면 뭐 내가 그거 하지만 나이 먹어 간께. 암은 한 5년, 
7년 지나도록 이상이 없으면 괜찮은 기라고 하던데 30년이나 지났
으이. 79년도에 수술했어. 3월 달에. 77년도 주인 돌아가시고. 근데 
옷을 입으면 뭐 본 떼가 안 나잖아. 이제 나이가 있은께. 젊으면 부
끄럽다 하는데 부끄러운 것도 없지만 그래도 어디 자식한테라도 갈
라면 조끔….
■ 가족사진
가족사진 같은데요?
이거는 우리 아이들이지. 우리 막내 장개 갈 때. 막내. 큰 딸. 큰 아
들. 셋째 한기수. 우리 선희. 막내. 다섯 명. 근께 큰 며느리, 둘째 
며느리, 셋째 며느리. 근께 내가 부모가 정해준 남자하고 낳은 큰 
딸, 큰 아들 둘이 다 있지요. 그래가 이제 아들은 한기수. 이거는 박
(朴) 가고. 한기수. 한선희. 한기태. 모두 다섯 명이지. 아들이 세 
명, 딸이 두 명. 막내아들 결혼하는 사진인데 이거 레스토랑서 했어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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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장소는 사할린 홈스크. 지금 자녀들 다 결혼했어요. 이거 막내아
들 식구.
이거는 최근에 찍은 거네요?
예. 이 사람이요. 이때는 결혼해가지고 요렇게 나이 들어갖고. 홈스
크에서 결혼해갖고. 지금 늦둥이 낳아가지고 8월 15일 날… 유즈노
사할린스크 살아요. 한복 입었지. 한국 사람이라고. 며느리도 한국사
람. 이 사람이 군대 가가지고 러시아 여자하고 내 허락 없이 장개갔
어. 장개가가 자기 누나가 시집간다 하니까 왔대요. 그때 형님이 앉
히가 말하는 바람에 또 공부하다 갔거든요. 그래 형님 말 듣고 와가 
공부하던 거 다 끝내고 조선 사람한테 장개갔지. 러시아 여성하고 
거기도 또 아들 하나 낳아놓고. 그래가지고 만날 한 달에 한 번씩 
생활비 보태주고 그래 했잖아. 부인은 저기 큰 땅에 있었고. 큰 땅에 
있었는지 어디에 있었는지 모르지요. 지금 어떻게 됐는지 모르지.
이거는 늦둥이고. 이거 한 칸짜리 집에서 야~ 돌 해준다고. 여~가 
늦둥이. 막내 늦둥이. 손님이 와가지고 집에 앉을 데 없고, 자기네끼
리 찍는다고. 큰 딸, 큰 아들. 또 야~ 아버지는 손님 땜에 못 들어
오고. 나는 여기 있었는데. 이거는 자식들 자기들 식구들끼리 한 거
지. 이 사람도 큰 집이 아이들이고. 이거는 우리 큰 딸, 막내딸이고.
큰 집에 아이들이라는 것은 할아버지의 형님입니까?
형님이라 하고. 한 고향에서 왔는 사람 일본 시대에 왔는데 나이 많
으면 형님이라. 친 형님은 아니요. 그저 이름만. 나이 많으면 형님이
라 하지. 정씨라고. 고향 사람도 아니고.
(다른 사진을 가리키며) 이 사진은요?
이거는 90살. 근께 형님이 처가 안 죽고, 저 작년인가 90살 했어. 
90살. 고희 잔치 때네요. 이런 사진들은 붙여온 게 아니고 내 놀러
제1장. 3국 4가지 다른 이름의 김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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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께 가져가라 해서. 우리 막내아들 어릴 때 아들 근께 내 손자. 이
거는 우리 영감 한(韓) 씨. 그래 내 두 번 시집갔어. 못된 여자라.
한씨 할아버지 고향은 어디입니까?
이 사람은 경상남도 창녕양군이라 하던가? 경상남도 어딘지 모르지
요. 그게 ‘하와이’라는 그게 있잖아요? 온천장. 아~ 창녕. 부곡 하와
이. 경상남도 창녕. 여기서 멀지 않다던데. 차 조금 타고 내려가면 
있다데요. 아이고! 내가 그래도 안 찾아가. 안 가봤어. 그래 우리 막
내아들 손자가 공부해가지고. 졸업한다고 그래 빨간 거 이래 해가지
고 깃발 들고 가는 거 있잖아예? 거~ 해가지고 기(旗)를 안 뽑고 
사진 찍었잖아. 근께 어떤 사람들은 빨간 거 한께 뭐 어쩌고 잔소리 
하드만. 나쁜 것도 아인데. 우리 막내아들하고 자기 아들하고 스키타
고. 스키 잘 타요.
놀러가니까 “할머니 보시오” 하고 주네. 이거 큰 아들 식구고. 이거
는 막내딸이요. 이거는 우리 큰딸 손자. 요게 직계 자녀사진이고. 요 
두 사람 빼고 이렇게 너이. 다 안 들어갔어. 손님이 많이 와가지고.
막내아들하고 찍은 사진이 가장 많네요?
그래. 가면 막내가 나를 찾소. 그래 이 집에 가서 내가 이 며느리한
테 맘이 편하고. 그래 자꾸 찾아가게 됐지. 이게 내 환갑 때 사진이
네. 환갑잔치는 홈스크에서 했지. 그때는 한국에 올 맘도 없었고. 말
도 없었고. 이 환갑잔치 상은 그때 아이들이 모이가지고 해줬지. 이
거는 야~가 일본에서 왔다 갔다 했지요. 왔다 갔다 했는데 집에 와
가 있었어. 그래 사진 찍자하고 찍은 거. 이거 큰 딸 사우 볼 때. 마
흔다섯 살에 신랑 가학중에(갑자기) 돌아가셔가 혼자서 키웠어. 딸 
둘이 다 대학 공부시키고. 이건 외손녀요. 그래 사우(사위) 본다고 
그래가. 이거는 우리 막내딸. 이거는 우리 둘째 아들 한기수. 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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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은 한국에서 태권도 해가 1등 했잖아. 여기는 막내아들. 이거는 
우리 큰 아들의 딸 시집보내는 거고.
대창양로원 생활의 이모저모
6. 30여 년의 노동생활
■ 여성노동과 육아 
바느질 공장에 30년 다녔으므로 일을 젊어서부터 꾸준히 하셨겠네요?
네. 했지요. 사할린에는 조선 여자들이 나처럼 다 그렇게 일을 합니
다. 일을 안 하면 병원에 가도 잘 안 봐줘요. 남자나 여자나. 그린께 
제1장. 3국 4가지 다른 이름의 김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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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지. 돈을 가지고 가도 안돼요. 국가서 봐줘야 돼요. 근께 일
을 해야 사무실에서 당신 사무실에 누구 아프다 한께 돈 내놓으라. 
그래 가져가잖아. 근께 일 안하면 받을 데 없잖아. 그런께 대부분의 
여성들이 다 일을 합니다. 다 일해요.
아이 키울 때는요?
아이 때는 유치원에. 아이가 집에서 엄마 젖을 모유를 먹고 자라는 
기간에는 1년 동안 휴가를 줘요. 근께 아이 1년 키우고 나면 자기 
자리에 들어가야지. 그 후 아이는 근께 보육원이라고 맡겨놓는 데 
있잖아요. 그런 데에 맡겨놓고. 또 유치원 있어. 유치원이나 보육원
은 국가에서 운영하지. 그러고 여기는 하루에 맨날 델꼬 오지만, 거
기는 일주일 만에 찾아오는 데도 있어. 그래 어떤 사람은 수요일 날 
델꼬 와서 목간(목욕)시키고 옷도 갈아입히고 그거 하는 사람, 어떤 
사람은 일주일 만에 가서 델꼬 오고. 일요일에 데리고 가서 하룻밤 
재우고 또 데려다 주고. 자고 또 데려다 주면 거기서 아~들 자고 묵
고. 그렇게라도 하지 못하는 경우는 가서 보기만 하고 오고 그렇게 
하고. 그 아이를 봐주면 돈은 국가에서 주지. 그기 사회주의국가 차
이지요. 여기서는 개인이 엄마가 돈을 줘야 되는데. 근께 일 안하는 
사람은 유치원 혜택도 없지.
신혼 초에는 일을 했습니까?
그때는 내가 언제 시작했는가? 큰아들 우리 기수 낳을 때까지 일 안
했어. (재혼 남편을 가리키며) 한(韓)씨한테 와가지고 일 시작했지. 
아~ 키았지. 그때 시대는 조선 여자들이 일 하는 사람도 없었고. 왜 
그런가 하면 말 모르지, 글 모르지, 일할 데도 없지. 러시아 여자들
도 일 할 데 없었는데. 그때는 공장이라고 그거 없지. 바느질공장 해
도 미싱 가지고 있어야 되고. 기지(원단) 같은 것도 가지고 있어야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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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고. 또 러시아 사람들이 사할린이라꼬 전쟁 이겨놨지만 단도리가 
안 돼가 있잖아. 일본 사람들 자기네끼리 삭 다 나가버렸지 뭐. 그래
서 언제부터 그거 했는가 하면 60년도 넘어서 차차차차차차 이렇게. 
공장도 만들고 일거리도 많아지고. 물건도 만들고.
또 그때는 큰 땅에도 조금씩 살기 좋았잖아요. 근께 큰 땅에서 가져
오고 그래 하지. 전쟁해서 근께 독일도 뺏들고, 어데도 뺏들고. 뺏들
어가 그 나라에서 나오는 거 삭 다 가져오면 그거를 농가가(나눠) 
쓰고 그랬지. 거기는 뭐 석유가 얼마나 나와요. 그래 그 석유 가지고 
기지 맹글고. 그래 조금씩 조금씩. 또 소(牛)랑 돼지 먹이가 껍데기 
가지고 실도 맹글고 뭐도 맹글고 조금씩 조금씩 좋아졌지.
일을 하고 싶은 사람한테는 어떤 방식으로 배당이 됩니까?
일하면 사무실 가서 내 일하겠다. 그러면 써라. 내 몇 학년 끝나고 
또 어디까지 무슨 일하고 써라 하면 쓰죠. 경력을 써라고. 써라 하지
요. 그래 무슨 일 하겠나? 하지만 내 지식 없지요. 말 모르지요. 한께 
무슨 사무실에 앉겠다 하겠소? 뭐라 하겠소? 그래 노동일밖에 못하
지. 바느질 회사는 첨에는 안 받았어. 우리를. 언제부터 받기 시작했
노? 60년도, 65년도 넘어서는 조금씩 받았어. 그런께 내가 들어갔지.
바느질 회사 들어갈 때도 바느질 기술이 있나 없나 이런 걸 물어봅
니까?
그래 들어가서 암만 알아도 첨에 한 석 달 동안은 제자로. 제자라는 
건 견습공 택이지. 당신은 일을 하는 기술자지요. 기술자 밑에 석 달 
일하란 말이요. 제자라 하지요. 암만 내가 잘 해도요. 기술을 배우게 
하는 거지. 그래 내가 알아도 러시아 사람은 신용을 못한단 말이요. 
내가 아나 모르나 시켜봐야 알잖아. 그래 제자로 붙여놓죠. 그러면 
그 사람이 이 사람은 제자 아니다. 기술자다 하면 기술자로 올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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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일거리 줘요.
처음 바느질 회사 들어갈 때도 그렇게 했습니까?
나는 그렇게 안했어. 나는 집에서 아이들 옷 해 입었어. 하지만 남의 
거를 안 해봤으니께 내가 말 못하지. 그리고 그 사람들 내한테 어떻
게 시키묵을란가 말은 들었지만, 내 할 줄 모르면 어떻게 해요. 그래
서 그냥 이렇게 막 이런 거 꼬매는 거 하고. 거기 들어가겠다고 할 
때 어디 가겠는가 물어보대요. 양복 가겠나? 여자들 옷 만드는 데 
가겠나? 그래 하데. 나는 이래가 뜯어가 고치는 데 가겠다 했지.
바느질 회사에도 부서가 여러 개 있지요?
아니요. 여기는 여기만 이렇게 한다 하는 데만 따로 있고, 여기는 여
자들 따로 있고 이랬어. 남자 양복 만드는 데 하고 여자 옷 만드는 
데 따로 있고. 아이 옷 만드는 데는 내 모르겠다. 모두 다 가게 사 
입히고 하지. 특별하게 하는 데는 어른들 옷 만드는 데 할 때 했어. 
내가 꼬매봤어. 거기 바느질 회사에 일하는 사람들은… 내 할 때는 
3호실에 한 500명이 됐어. 왜 그런가 하면 우리 회사 바로 여기 있
고. 촌에 쪽에도 있고 그래 한께 500명이 있었어. 2호실도 있고, 1
호실도 있고, 3호실도 있고. 집이 따로따로 있었잖아. 촌에 쪽에 3호
실에 붙은 그기 있잖아요. 파시부치니. 바느질 회사. 여기처럼 무슨 
그렇게 안 해요. 여기처럼 이쁘게 해가지고 그런 거 없지요.
(같은 방의 다른 여성 노인 2명에게) 여기 다른 분들도 러시아에서 
모두 일을 하셨습니까?
일 안하고 사는 데가 어디 있어요? 일을 해서 먹고 살았지. 우리들 
나이쯤 되면 한국에서는 여자들이 다 집에서 그냥 살림하고 그렇게 
했다던데. 근께 거게도 여자 50살 넘으면 연금이 나가요. 연금 줘요.
조선 땅에서는 80세 연세쯤 되면 젊을 때부터 일을 안 하셨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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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는 옛날식이지 뭐. 아이나 키우고, 시집살이나 하고. 그렇게 했
는데, 사할린에서는 다 일을 했지요. 일 안하고 어떻게 먹고 삽니까? 
그게 많이 달라요. 그래 일해야 또 병원에 가서 맘 놓고 병원에 가
고. 근께 러시아에 있는 여자들은 ‘내 일꾼이다’면서 특별히 주장하
고 이런 거 없어. 일 해먹고 살아야 된다 한께. 아버지도 뭐 그렇게 
하고 살았지. 여기는 여자가 바깥에 일하러 나가면 큰 소리치고 그
래 하지만, 러시아는 그거 없어. 조선 사람들은 남자들이 자기 아내
가 밖에서 일하는 걸 반대할 수도 있지만, 사할린에서는 싫어할 수
가 없는데. 병원 같은 데에 가면 일장(일터, 직업) 가지고 있어야 병
원에 가서 대우도 받고, 병원에 그거 하잖아. 남 혼자 일할 경우 월
급이 많이 안 되니까 묵고 사는데도 쫌 그거하고. 남자 혼자 벌면 
바쁘고. 우리는 사할린에서 일꾼들이라. (같은 방의 다른 여성 노인
들이 거들며) 우리는 사할린에서 상점에서 일했고 식당서 일했고. 
우리는 시방 팔십 둘이고, 나는 팔십 하나요.
■ 건축노동 7년 : 아르마또르, 시카또르
일을 처음 시작할 때가 언제였습니까?
그때가 내가 몇 살이고? 서른 몇 살인가 그래 해가 건축부 들어갔
어. 7년 일했어. 건축부에 들어가서는 무거운 거 가지고 댕겼지요. 
젤 처음에는 뭐하는가 하면 시멘트 안에 들어가는 쇠 뭉끼는(묶는) 
거 있잖아요. 알맞도록. 그걸 했어. 그 일을 한 5년 했어. 그거는 그 
사람들 하라 하는 대로 했지 뭐. 나중에는. 그거 했지만은 그때는 우
리가 뭉낐지. 가늘한 저기. 가늘은 쇠, 철사 그거 가지고 이렇게 해
제1장. 3국 4가지 다른 이름의 김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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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뭉끼고. 이렇게 해가 뭉끼고. 쇠 있잖아? 아르마또르. 이런 거 알
맞도록 이렇게 놓고. 이렇게 놓지요. 그러면 그거를 뭉끼잖아요. 밑
에 있는 거 하고 위에 거 하고 이렇게. 그러면 여기 집을 맹글 때 
그거를 펴야 되거든. 그래야 공구리가 붙어 있잖아요. 그렇게 만들
고. 또 집 세울 때 또 이렇게 들어가는 거 하고. 또 이렇게 그거 하
는 데 들어가는 거 하고. 기둥 안에 들어가는 거.
건축부 일이 여성으로서 힘들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젊어서 뭐 힘들은 거는 뭐… 그리고 나니께 내가 그때 우리 
딸 낳았지. 내가 좀 바쁘지도 않은데 그런 사정이 있었어. 우리 주인
이 내한테 돈 안 맡겼어. 돈 많은데 내한테 안 줬어. 달라 달라 하는 
게 추잡아서 내가 아~ 데리고 갔거든요. 아이들이 있으니까 미워서 
안 되잖아. (다소 말하길 내켜하지 않으면서) 그래 내가 추잡아서 
내 갈릴라니 난 아이 있으니께 할 수 없으마 내가 일해가 우리 아이
를 내 델꼬 온 아이를 먹이느라고 내가 일을 시작했지. 근께 일 한
다고 밉다고 내 돈 안주네. 그래 내가 일해가 먹으면서 살아. 그래 
일해가 먹어봐라. 그래가 돈 안주잖아.
자식이 있는데 왜 살림 살 돈을 안주던가요?
그래가 우리 기수가 두 살 때 쌀 떨어졌어. 근데 쌀 사다 남의 집에 
맡겨놓고 안 가져오고 그러는데. 엄마! 왜. 기수가 “우짜꼬? 쌀 없는
데…” 한께. 이기 머리 좋아요. 자기 아버지한테 “아빠! 쌀 없어지서 
우짜꼬?” 한께, 부끄러운 모양이라. 자기 맡겨놓은 집에 가서 가지고 
오는데, 그 집에서 그 쌀 포대 가마이 있겠어. 묵고 반틈만 남은 거 
가져오데. 그 전에 내보고 그 집에 사놨다 하데요. 사놨으면 가져오
지. 왜 그 집에 놔둬요. 내가 뭐 하러 무슨 힘으로 100킬로짜리 가
져와요. 그래 살다가 우리 아~들이 눈치 안 보일라고 내가 그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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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았어.
고생을 하셨네요?
아이고! 말도 마소. 건축부에서 처음에는 그 일을 하고. 그 다음에는 
집을 세우는 데 가서 그거 했지요. 페인트 칠 했지요. 시카토르. 이
렇게 그거 하는 거. 벽에 바르는 거 있잖아요? 시멘트 이래 해가. 그
것도 한 3년 하고. 그거를 한국에선 미장일 한다고 하데. 미장. 미장 
한 4년 했던가? 했어. 미장질도 내 잘해요. 안 해서 그렇지. 러시아 
여자들 힘 얼마나 쎄다고. 철사 묶는 거는 아르마또르. 또 건축부에
서 우리를 골라가 보냈데요. 아르마또르만 안 시키고. 그때는 이것저
것 여러 가지를 했거든. 아르마또르. 철사 뭉끼는 사람은 요고 안 되
거든. 근께 우리를 시카토르 하는 데에 보내는 기라. 미장을 시카토
르라 하지. 월급은 우리가 얼마 했다는 그대로 쳐지. 하루에 일을 많
이도 못했어요. 그거 시멘트로 가져와줘야 하는데 그것도 뭐 요맨치 
하루에 갖다주는데 뭐. 그거 어떻게 그거 해요.
그렇게 일을 하는 동안 자녀는 몇을 데리고 계셨습니까?
그때 다섯 명이지. 다섯 명하고 여섯 식구인데. 할아버지는 빼더라도 
먹고 사는 데 어려움은 있지. 그래도 우리 아버지 연금 나왔었어. 그
거를 우리 아버지가 나한테 줬어. 그거 보태가지고 먹고 살았지. (남
자 형제를 지칭하며) 아들 둘 있어도 아들은 그때 다 돌아가셨는데. 
자기는 인자 이런 데에 아니고 병원, 요양원에 들어가 있었어. 아버
지가. 아버지가 몸이 약해가지고.
이때 다섯 명 자녀를 데리고 일을 하면서 먹고 살았는데, 한 할아버
지는 무얼 했습니까?
한 할아버지는 그때 질(길)을 쓸었지. 그 양반도 몸이 약했어. 질 청
소하는 거. 아침 새복(새벽)에 나가가지고 큰 질로 인자 청소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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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그거 돈도 안 되는데, 일 안하모 나이 묵어가 연금을 못 
타잖아. 그거 채울라고 일 했어. 살기는 한 집에 살았지요. 이렇게 
살다가 할아버지가 20년 결혼생활 후에 사별을 했어. 그후 이제껏 
혼자서 아이들 장개, 시집 보내놓고 내가 이짝으로 왔지. 아르마또
르. 시카토르. 그때 내가 우리 막내 낳을 때가 67년도까지 했어. 아
니야. 68년까지.
■ 바느질공장 노동 24년
우리 막내아들이 67년도에 났으니까. 우리 아이 낳고 1년 있다가. 
우리 아이 낳아가지고 내가 바느질 공장 갔어. 시카토르 하는 데에 
안 들어가고. 그때부터는 바느질. 근께 68년부터 내가 바느질 공장 
들어갔어. 내가 바느질 할 줄 알면서도 그때는 안 받아줘서 못 들어
갔어.
바느질 공장 일은 그때 어땠습니까?
첨에는 이불 껍데기 같은 거 꼬맸지요. 포대기 같은 거. 브리가다로. 
그 다음에는 그게 없어질라고 해가 양복 하는 데에 가겠나? 저게 원
피스 하는 데 가겠나? 이러데요. 그래 내가 양복 내가 기술은 없잖
아요. 그래가 원피스 하는 데도 내 입는 거는 하지만은 나무(남의) 
꺼를 안 꼬매 봤어. 그러면 저게 큰 거를 작게 맨그는 데라고 있어. 
헌 거를 뜯어 가지고. 내 그러면 거게 들어가겠다. 그래가 기술 배우
겠다. 그래 거기서 내가 많이 일했어.
양복을 만드셨네요?
양복 큰 거를 여기 쪼라고(줄이고). 수리. 새 것도 맹글어 보고. 그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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렇게 눈치로 눈치로 배워가 그래. 바느질 공장에 일하는 사람들이 
그때 많았어요. 그때 내가 들어갈 머시는 조선 여자들이 험한 일 안
하고 다 바느질 공장 들어갔어. 전에는 조선사람들 이런 일 안 시켰
어. 그리고 러시아사람들이 가마이 본께 조선사람이 여자나 남자나 
모두 손기술이 눈치가 빨라서 일을 험한 데서 일 안했어. 조선사람
들. 바느질 공장에도 조선사람들 많이 있었어요.
바느질 공장 일하시니까 벌이는 어떻든가요?
벌이는 그대로 묵고 살만침 벌었어요. 벌었지만 내가 아~들이 많지. 
그대로 살았어. 우리 아버지 저게 연금은 우리 아버지 돌아가셔가 
떨어지고 난께 우리 큰아들이 일했지요. 큰아들이 돈 보태가 살고.
연금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안 나옵니까?
아이고! 돌아가신 연금은 안 나오지. 살아있을 때만 나오고. 우리 아
버지가 연금을 제일 높은 거 받았어. 어떻게 그런가 하면 우리 아버
지가 불 때는 데에 있잖아요. 불 때야 물 끓여가지고 사무실 같은 
데 가잖아요. 우리 아버지가 바느질 공장에 불 때는 데에 들어갔어. 
들어갔는데 거기서 인제 엘리베이터 있잖아요. 거 모스크바서 가지
고 왔어. 그때가 어느 해인지 모르겠다. 우리 막내 낳아가지고 그랬
은께 69년돈가 그래 해가지고 우리 아버지가 모스크바서 가지고 왔
는데. 그 사람이 몰라서 그런지 그래서 그런지 그 사람 가고 나서 
사흘도 안돼서 뿌사찌뿌맀어. 엘리베이트가.
어떻게 알았는가 하면 우리 아버지가 불 때는 데에 이렇게 해가 사
무실 간다고 온께 여자들이 다발을 짊어지고 3층까지 올라가고 하더
래요. 그래 우리 아버지가 “왜 엘리베이터 있는데 왜 그렇게 짊어지
고 댕기노?” 하니께, “아이고! 아저씨! 말도 말아요. 그 사람 가고 
난께 일도 못한다”고. 그린께 “그러면 보자” 그렇게 해서 보고.
제1장. 3국 4가지 다른 이름의 김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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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버지가 이렇게 보고 머리 있는 사람은 어떻게 어떻게 하면 
안다는 그거 알잖아요. 그린께 가져와봐라. 우리 아버지가 딱 고치놨
어. 고치 놓은께 ‘아~’ 했지요. 그 사람은 모스크바서 데리고 오면 
차비도 줘야 되고, 월급도 줘야 되고, 그거 해야 되는데 우리 아버지
가 고치 놓은께. ‘김 아저씨’라고 불렀어. 러시아말. “김 아저씨가 고
치놨단다. 우와!” 하고.
큰땅 사람들이 “아이고! 이런 사람 어디 있는가? 아이고!” 하면서 우
리 아버지니께 말 시켜본께 그렇지. 그러면 좋다. 그래가 거기 책임
자가 젊은 사람이라. 나이 한 40세밖에 안됐는데. “김자자! 이거 어
떻게 하면 좋은가?” 하면, “아이고! 이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합시
다” 하면, 우리 아버지 말만 들은께 공장이 잘 돌아갔잖아. 우리처럼 
불 때는 사람은 한 달고 80원밖에 못 탔는데, 우리 아버지는 120원 
받았지. 그리고 이렇게 연설한다 하면 꼭 우리 아버지 앉혀놓고, 우
리 아버지 생각도 물어보고. 우리 아버지 공부할만치 했은께 이렇게 
됐지요. 그래 해가지고 우리 아버지한테 따로 월급이 보태줬는지 모
르겠어. 모르는데 아버지 연금은  내보다 더 많이 타요.
바느질 공장에서 몇 년 일하셨습니까?
30년 가까이 일했을 게요. 좀 오랫동안 했지. 근께 68년도에 바느질 
공장 들어갔어. 나올 때는 그때 내가 82년돈가, 3년돈가 그래 했어
요. 여게 99년도 왔거든. 99년도 왔은께 92년도까지 일했다. 그러니
까 24, 5년을 일을 했다. 나는 연금이 많지 않아요. 아이고! 일하는 
그거 있잖아요. 그거를 해서 돈 주니께 바느질 공장서 일하는 사람
이 뭐 많겠어요? 바느질 공장, 학교 선생, 의사, 사무실 일하는 사람
은 러시아에서 월급이 적어요.
어떤 일을 해야 많습니까?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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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일을 해야지요. 검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더 받지. 스코프(삽)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 말이요. 검은 일이란 주로 육체노동. 그걸 검
은 일이라 하지. 그래. 검은 일꾼. 이런 사람이 월급이 많고, 연금이 
많네요. 그니께 조선 사람들이 검은 일을 쉽게 안 시킬라고 공부 시
킬라고 그거 하지. 근께 우리 아이들 시대는 조선 아이들 공부 안하
는 아이들 없어. 사할린에서 그렇지요. 그러고 또 이렇게 촌(村) 같
은 데서 나쁘게 풀린 아이들이 그런 아~들 러시아 사람하고 술 먹
는 거 배우고 한 사람은 그거 하지만 머리 있는 사람은 다 공부 했
어. 여기 다 와가 있는 사람 다 공부했어. 10학년 다 끝난 사람들이
요. 여기 많이 와가 있잖아요. 할아버지들도요. 할아버지, 할머니들
도 오십 몇 살, 육십 가까이 됐는 사람 다 식자(識者) 있어.
바느질 공장의 출퇴근 시간은 어떻게 됩니까?
출퇴근은 아침에 8시에 가고, 저녁에 5시에 오고. 하루 한 8시간쯤 
일을 하는 거요. 점심시간 1시간. 우리 12시에 해가 1시까지. 휴식시
간 없어. 점심시간밖에 없어. 20년 일해도 직위 올라가는 건 없어. 관
리자가 안 되지. 내 공부한 거 종이쪼가리 없는데. 그것도 그 사람들
이 공부하고 나왔다고 하면 머리가 없으나 있으나 그것만 보거든요.
92년에 일을 그만 두셨으면 일을 60세 넘게까지 하셨네요?
내가 우리 막내가 67년 나고. 68년도 시작해서 92년. 25년 정도. 그
거밖에 안돼요? 아니, 30년 됐는데. 아니다. 우리 막내이 일하다가 
낳았어. 내가 62년도 일 시작했어. 건축부 일까지 합치면 30년 되
지. 우리 딸 쪼끔한 거 놔두고 내가 일 시작했어. 일 하다가 우리 막
내이 낳았어.
바느질 기술이 아주 뛰어나겠는데요?
아니. 내 입을 거는 하지. 남 거는 못해. 미싱 가지고 꼬맸지. 짤라
제1장. 3국 4가지 다른 이름의 김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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졌는 거 꼬맸지 뭐. 짤라주는 사람 따로 있고. 난 꼬매기만 했지. 때
로는 손바느질도 하고. 미싱도 하고. 그런께 헌 거를 뜯어가 붙이고 
한께 여러 가지지 뭐. 바지도 꼬매 봤고. 기술자지. 우리 아이들이 
입는 거는 내가 다 했어.
공휴일은요?
공휴일. 일주일에 한 번. 그니께 집에 목간통 없은께 아침 일찍이 나
가서 목간통 가요. 홈스크 목간통은 한 개밖에 없어. 전부 문 앞에서 
그 사람들 다 씻고 나오는 거 보고 간께 아침에 가면 한 11시쯤에 
돼야 들어갔어. 그래 집에 오면 3시야. 근께 빨래는 언제든지 밤중
에 해요. 그때는 기계라고 없었잖아. 다 손으로. 그 식구 많은 거 다 
씻었어. 얼마 돼. 그래가 살아나왔어. 목간통이 한 개니께. 여름에는 
러시아 사람들이 어디 놀러가가 들에서 목간 시켜오고 그래 하지. 
집안에는 씻을 데가 없잖아. 그리고 5층 집이 이런 주택 집에는 언
제부터 시작했노? 70년도 조금씩 나와가 주택 집에 물이 나온께 뜨
신 물이 나오는 집에는 하고, 뜨신 물이 안 나오는 우리는 주택 집
에 언제 들어갔노? 우리 막내이 유치원에 댕길 때 주택 집에 들어갔
어. 근께 70년도.
직장에서 점심은 어떻게 해결하나요?
아니요. 내가 식당가서 묵고, 내가 점심 가지고 가서 묵고. 도시락을 
싸가 가기도 하고. 식당가서 먹는 거는 개인이 돈 내야 해. 여기처럼 
이렇게 주인이 안줘요. 없어. 공장에서 일을 하면 받는 돈은 월급이
죠. 그 전에는 월급으로 줬는데, 하도 선배들이 묵고 나면 묵을 거 
없다 해서 한 달에 15일이나 되면 조금 돈 주고. 또 닷새만 되면 또 
주고 그래 했어. 근께 돈 떨어질 새 없어. 근께 고기 먹고 그거는 못
하지만 그대로 안 굶어죽을만치 뭐. 병원을 가면 치료비는 무료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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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공짜. 아무리 중병을 앓더라도. 내 가슴 수술할 때도 내가 돈 안
줬지.
김옥저 미술작품(대창양로원)
7. 사할린의 일상생활
■ 의식주생활
사할린에서 음식은 어떻게 해 드십니까?
음식은 조선 음식이죠. 김치도 담아묵고. 깍두기도 담아묵고. 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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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아가지고 메주도 해가. 된장, 간장도 내가 맹글어 묵었지. 우리 어
머니 하는 거 봤거든. 근데 많이는 안 해요. 요만치 한 개 놔둘 데도 
없고, 그래 해묵고. 고추장도 직접 담그고. 고추장 내 해놓은 거 맛
있다고 모두 얻어먹으러 오고 뭐. 또 하면 큰 딸한테 줘야 되고 뭐. 
내가 된장, 간장, 고추장 만드는 방법을 딸들한테 가르쳐주지는 않았
어. 우리 아이들 하는지. 가~들도 벌써 시집가가 시어머이한테 배웠
겠지 뭐. 식구들은 다 한국식으로 음식을 해먹은 택이지. 요새도 우
리 아이들 집에 가면 된장 끓이묵고.
조선 사람들은 러시아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가정에서는 만들어 먹
지 않습니까?
우리 먹었어요. 밥 먹으면서도 밥 안 먹고 그거 할 때는 우리 아이
들이 빵하고 소세지 그거도 먹고. 보통으로 먹는 밥은 조선식으로 
먹고. 그래 묵고. 소세지도 반찬 해먹을 때도 있고. 또 밥 먹고 나서 
한두 시간 있다가 공부하고 나면 배고플 때 있잖아. 그때는 러시아
식으로 아이들 간식으로 먹고. 차로 해가 우유나 먹고 뭐. 근데 우리
도 여기 오면 고기 갈은 거 뭐 해가 묵고 싶고. 러시아 음식도 묵고 
싶고. 사할린에서 만날 안 먹었지만 묵었잖아. 근께 그것도 묵고 싶
고. 한국에 나와 사할린에서 먹던 러시아 음식을 먹기가 힘들지만, 
그래도 우리 돈 주고 우리가 끓이묵고 다 해요.
여기서 해 묵으라꼬 주대요. 감자도. 감자 좋아하거든요. 러시아 사
람들은 감자를 좋아하죠. 그래 그 감자도 사가 삶아먹고 그래 해요. 
그래가 먹고 싶은 거 먹어요. 또 물고기 소금 쳐놨다가 그것도 묵고. 
음식이라꼬 뭐 우리 먹던 음식인데 뭐.
우리는 사할린에서 묵도 해묵고, 국수도 해묵고. 묵도 해묵소. 사할
린에 도토리는 없어. 메밀묵이지. 메밀 그 하얗게 꽃피는 그거.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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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얗게 꽃이 피기 전에 풀 잘라가지고 끓는 물에 데쳐서 나물을 만
들어도 드셨습니까?
우리 묵 사면 큰 땅에 사와요. 러시아 땅에서 와요. 우리가 맹글어
서. 원료만 있으면. 우리가 갈아가지고 짜가지고 끓이가 식하가. 그
걸 어머니가 하시던 걸 배워서 하지. 두부도 해먹고. 두부도 집에서 
만들어서 해묵고. 잡채도 하지요. 내놓고 잡채 맨그는 그런 거는 없
어. 일본 사람 있을 때는 있었어. 우리는 그거 못했어. 시루떡도 해
묵지요. 조상님 제사 모실 때 콩 삶은 거 콩고물 해가지고 제사상에 
떡 놓지요. 해요. 그거 떡국 있잖아요. 떡국도 하고. 음식은 조선 땅
에서 먹던 그런 걸 그대로야. 한가지야. 사할린 음식이 더 맛있어. 
똑같은 그거라도 맹그는 그게 다르잖아. 우리 하는 거 더 맛있다. 러
시아 사람들이 사할린 오잖아요. 사할린 음식이 더 맛있다고 그래.
사할린에서는 고사리 등 산나물도 납니까?
고사리 얼마나 크다고. 고사리 이런 거 있어. 고사리 밭도 얼마나 많
은데. 여기 고사리는 고사리도 아니오. 사할린 꺼는…. 옛날에 거기 
살 때 고사리도 뜯어가 먹고 이래 했지. 나는 암만 바느질하고 해도 
아이들이 식구가 많으니까 생일이가 있잖아. 그래 생일 때마다 나물
을 해놔야 되잖아. 그것 때문에 내 뜯으로 댕깄어. 산으로. 산나물 
같은 거 아까 보있잖아. 그것도 소금 담가놔도 되고. 개인 집에서 통
에 막 담아놓고. 잔치 같은 거 할 때 내놓고. 산나물을 직접 뜯으러 
다녔지요. 큰 거 사람같이 큰 거. 여기는 이렇게 뾰쪽하지요? 러시아
에서 짊어지면 여기까지 나와요.
그거 할라 하면 먹는 거 못 먹는 거 알아야 되지. 그런께 뭐 미나리
하고 고사리하고 또 야쯔비끼하고 몇 가지. 근께 한국에서 누가 와
가 아이고! 이거 무슨 나물이다. 이거 무슨 나물이다. 하고 알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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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그러고 뭐 두릅이 거~도 많아요. 그거 들에 혼자서 나오는 거. 
작은 가시가 있는 거. 가시나무 그거 뜯어가지고 우리 어머니는 밥
할 때 그거 놓고 찌(쪄)가지고 그거 아버지 앞에 놓고. 초장 이래 
찍어가 먹고. 우리는 조그만 때부터 먹었어. 우리 아이들도 시방 그
거하면 묵었어. 나물 갖다가 내가 뜯어주는 거 다 먹었어. 며느리 그
거는 아는지 모르겠어.
바다에 나가가지고 반찬거리를 채취하기도 했습니까?
아니야. 거기는 일본에서 배가 들어오고 거 하는데, 조금 떨어진 데
에 가면 바다에 부두가 없는 데에 가면 내 하고 싶은 대로. 근데 여
기는 주인이 있잖아. 시방은 모르겠어. 그 전에는 주인이 없었어. 근
께 내 마음대로 뭐 욕할 사람도 없고. 와 가져가나 소리 하는 사람
도 없고.
바다에 가면 이런 거 가시 버덕버덕 나오는 거 있잖아. 그면 요만치 
들어가면 많소. 성게. 이렇게 노란 거 나오는 거. 미역 그런 것도 많
고. 굴, 다시마 이런 거 많아요. 해삼은 있는 데에 있지. 안에까지 
깊은 데에 ‘오도마리’라꼬. 그리고 사할린이 이렇게 돼가 있잖아. 고
기 그거 하는 데. 근데 여기 오면 해삼도 있고, 조개 이렇게 시커먼 
거 있잖아. 홍합. 그거 안에 들었는 거 그것도 여기 많고. 나는 못 
잡아봤지요. 내 사먹었지요. 이런 데에 큰 딸 여기 시집을 왔어. 산
나물은 뜯으려 내가 댕기고.
사할린에서 텃밭에 채소도 가꾸었습니까?
개인 집에서는 텃밭이 다 있어요. 그런께 땅에서는 직접 채소를 심
구지. 토마토 되고, 고추도 해가 따고. 양배추, 당근, 파, 배차… 배차
도 여기 김장 할라마 한 7월 달에 심어야 되고. 그러면 가을에 수확
하지. 무, 참깨는 아니고 저거 들깨. 그것도 하고. 그때 먹을 줄 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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랐어. 상추도 해요. 다 있어. 그런 걸 집 안에 텃밭에 심어. 텃밭에 
내 먹을만치 심구고. 많이 심구는 거는 토마토 심구죠. 그거 따가지
고 러시아 사람한테 팔아요. 돈 되지요. 돈 되는 거 우리가 다 해요. 
채소 심구는 땅도 러시아 거지만, 근께 개인 집에 붙은 땅 이용은 
할 수 있다 이 말이지. 쌀만 사면 반찬은 여기서 나오잖아. 밭에서. 
바닷물이 가까이 있은께 다시마도 뜯어오고, 미역도 뜯어오고. 내만 
부지런하면 뭐 반찬은 뭐. 7월 달까지 반찬은 뭐.
바다에서 먹을 거 가져오고, 땅에서 가져오고, 산에서 가져오고. 그
런께 살기 좋아. 그리고 뭐 석탄 그거 사면 큰 트럭으로 세 개 사면 
한 동(冬) 때고. 사할린에서 물건을 사고 싶을 때는 시장에 가고. 팔 
때도 시장가고. ‘바자르’라 해요. 시장. 가게도 있고. 가게도 시내에 
큰 시내에 가게가 세 개, 네 개밖에 없지. 그거는 개인이 돈을 줘야
지요.
감자가 많다든데, 한국 감자하고 비슷합니까?
똑 같지요. 맛도 좋아요. 근데 사할린 감자 더 맛있어. 감자 맛있는 
거 하면 감자 심구고. 감자 캘 딴에 그거 다 시들 때까지 놔둬요. 근
께 감자가 익을만치 익잖아. 그래 삶아 놓으면 퍽 퍼지고 맛있잖아
요. 여기는 새파랄 때 캐버리잖아. 근께 감자가 물기 있잖아. 근께 
맛이 없잖아. 잎이 시들 때까지 놔둔다는 거지. 가을에까지. 여기는 
왜 그런가 하면 농사지은 거 이거 파가지고 또 뭐 심굴라고 파잖아. 
거기는 뭐 심궈 놓고 가을에 아무 것도 안 심으니께 놔둘만침 놔두
지. 호박도 이런 거 맛있고
호박도 한국하고 비슷합니까?
한국 꺼는 삶아 놓으면 물이 나오잖아. 거기는 도끼 가지고 깨야 돼
요. 단단합니다. ‘마사카리가부제’라 해요. 그래 지나면 그것도 바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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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삭바삭하고. 그렇게 단단해. 그런께 숟가락으로 떠서 먹고. 쪄서 
묵지. 단단한 걸 찌면은 이게 좀 물렁물렁해지니. 물은 안 나오고. 
근데 요새는 거기도 땅이 나빠서 그런지 호박도 맛이 없더라. 땅대
로 가는가봐. 옛날에는 물고기를 삶아가 말리가지고 그거로 그거 했
거든요. 감자 같은 거 심굴 때 밭에 그래 했지. 시방 그런 거 없어서 
그런지 감자가 그거 하는 대로 가잖아.
옛날에 병원이 없고 약이 많이 없을 때 조약을 많이 쓰지 않았습니까? 
산에서 나는 약초라든가 이런 걸 뜯어다 말린 후 다려서 탕약으로 드
시곤 했는데, 사할린 동포들도 몸이 아플 때 그런 약을 썼습니까?
옛날 어머니, 아버지 하는 거 듣고 하지. 우리 아픈 적도 없었고. 
(가슴 부위를 가리키며) 내 이기나 아팠지. 그렇게 고생한 것도 없
었고. 쑥 있잖아요. 그거가지고 어떤 때는 배 아플 때도 그거 삶아가
지고 그거 물을 마시지요. 사할린에도 쑥 천지요. (손가락을 들어 보
이며 굵다는 표시로) 거기는 대가 이래요. 조선 땅에서는 옛날에 곡
식이 부족할 때 쑥을 캐다가 떡도 해먹고 밥에도 넣어먹고 했듯이, 
사할린에도 그래요. 밀가루 그거 해가 쑥떡 해먹고. 밀가루 반죽해가
지고 쪄서 먹는 거. 배가 아플 때 쑥을 달여 가지고 물을 먹고 그러
면 좀 낫고 이랬지요.
미나리도 해가 먹고. 미나리가 제일이요. 약. 거 우리가 아프다고 하
면 산에 가서 두릅 같은 거 그거 해가 내 몸이 이래가지고도 돈이 
없어가 고생했어. 그런께 이런 몸 가지고 니쿠사쿠 짊어지고 고사리 
뜯고. 또 두릅을 먹어서 그런지 고생스럽게 이렇게 아파도 그거 안 
했어. 젊어서 그랬는가. 내가 답답하인께 다 해냈어.
한국으로 영주 귀국하기 전에는 홈스크에 사셨습니까?
응. 홈스크시 커요. 거게는 배가 들어가기도 하고. 부두요. 주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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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스크시, 사할린 홈스크시 그 다음에 ‘우리스’라 하면 내가 살던 질
(길) 구역이요. 내 있던 집에는 저기 뭐야? 사할린스크 그것도 다 
내가 일본 집이 있던 데 사할린스크 아이요. 그것도 뜯어삐맀는데 
뭐. 근께 거기 부두요. 홈스크라는 시내가 부두요. 부두시내요. 근께 
부두가 없어지면 거게 일 할 데도 없어.
사할린에서 주택과 아파트는 어떻게 다릅니까?
주택 이런 5층 집. 그거는 어떻게 아다리 됐는가 하모 우리 집이 일
본 집이 있었어. 근데 일본 집을 뜯어야 건축한다고, 뜯으면 집 줘야 
되잖아. 근께 우리한테 아파트 주지. 그래서 들어갔어. 5층 집인데, 
1층을 받았어. 그거는 아파트고. 아파트로 안한다. 브라가스트로이도
마. 근께 아파트라는 의미지. 그런 집이라고. 아파트는 층이 높지요. 
5층. 이거는 5층. 내가 거기서 일했잖아. 5층 집 짓는 데에.
1층으로 된 집도 있습니까?
1층으로 된 집은 일본 사람들 살다가 나간 집으로 러시아식으로 고
친 집. 그거는 쿠알디르. 집. 단독주택. 아파트는 ‘브라가스트로이도
마’라 해요. 그거는 한 칸, 한 칸이 개인 소유입니다. 그니께 1층에 
들어가면 문이 이렇게 되지요. 요게 요게 요게 있고. 이거는 자기 개
인집이지. 땅은 집세 거~ 할 때 조금 되지요. 땅은 모두 국가 거지
요. 러시아에서는 땅은 러시아 국가 꺼고, 개인 집에 사는 사람은 집
이 요만치 있으면 방을 요만치 지어요. 근데 권리가 있지요. 집 주인 
권리가 있지요. 러시아 땅이지만 땅세를 물려요. 1년에 한 번씩 물지. 
땅세를요. 그거는 러시아 국가에 들어가는 거고. 근데 땅 권리는 집 
사람한테 있지. 집은 권리는 개인 것이고. 땅은 국가 것이고. 근께 집 
팔 때는 이 땅하고 같이 팔 수 있지. 집은 사고팔고 할 때 돈을 내가 
하고. 우리도 개인 집에 살았어요. 살 때는 돈은 조금 들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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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축과 연금제도
일해서 월급이 니오면 필요한 데 쓰고 남는 거는 저축도 했습니까?
아니요. 거게서 저기 뭐라 하노? 손님 오잖아요. 그래 “바지 꼬매주
세요. 가져와요” 하면서 그럼 꼬매줘요. 손님한테는 12루블 받는데, 
내한테 오는 거는 2루블도 안 와요. 나머지는 어디로 가는가 하면 
거게 국가로 들어가지. 근께 월급이 작아요. 그런께 저축할 돈은 별
로 없어. 남는 거는 없어. 저금이라꼬 없어. 저금은 어떻게 그거 하
는가 하면 1년에 한 번씩 한 달씩 노는 허가를 줘요. 그때 그 돈 나
와요. 한 달 꺼. 나오면 그걸 안 쓰고 저금하지. 저금하고 한 달 내
에 나물도 뜯어먹고, 뭐도 뜯어먹고 그래 하지. 반찬은 걱정 없어. 
내만 부지런하면.
저금통장도 없었습니까?
통장은 맹글었지. 저축은 어떤 때 하냐 하면 그런께 아~ 낳을라 카
면 돈 나와요. 석 달. 그래 나와요. 그거 큰돈이요. 그거 저금해뻐리
지. 이렇게 배부르면 일곱 달부터 놀게 하거든. 일곱, 여덟, 아홉까
지 한께 석 달 놀지요. 그럼 아~ 낳아가지고 한두 달 놀고. 다섯 달 
돈 받으면 그거 저금해뻐리지. 그게 큰돈이지. 또 1년에 한 번 노는 
거 휴가비 나오고. 또 내가 아프면 ‘베르찐’이라꼬. 그것밖에 없어.  
아프고 나면 돈 나오는 거 있어. 집에 있는 돈 있으면 그것도 저금
해버리고. 몫돈이니께.
학비는 없습니까?
학비는 그린께 러시아 땅 좋다 하잖아. 학비 못 받고 시킨께. 공짜
요. 근께 조선 사람들 검은 일 안 시킬라고 공부 시킬라고 애 쓰지
요. 결혼을 시킨다든가 사람이 죽어서 장례를 치르고 할 때 그거는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92
 
모두 개인 저금한 돈 가지고 해요. 그럴 때는 국가에서 나오는 게 
아니고요. 없어. 그런께 텃밭이 있는 사람들이 왜 돈 벌라 하는가 하
면 아이들 결혼시킬 때 쓰고 큰 일 할 때 쓴다고. 그래 저금하지. 그
래 아이들은 모스크바 같은 데에 공부하러 간다 하모 차비 주고 해
야 되잖아. 그래서 그렇지. 또 거기 가서 먹어야 되고. 그래서 고생
이지. 그게 좋다 하니까. 좋은 게 어디 있어. 뭐. 하도 러시아 사람
들도 검은 일 안 시킬라고 아~들 공부 시킬라 애 쓰는데. 졸업증 종
이쪼가리 하나만 있으면 뭐.
연금이 개인 혼자서 살아갈 만큼 나옵니까?
그런께 이래 돈벌이 한 사람은 마이 받아가고. 마이 나오고. 또 우리
는 그 돈 받아가지고 아파트 집 돈, 전기세 물고 한께 남는 것도 없
대요. 내만 그거 안하면 바빠요. 우리 아이들 집 채리가 다 나갔거든
요. 아이도 놓고 근께 내 혼자 남았어. 다 장개가고 시집가고. 그른
께 큰 집에 전기세 줘야지. 집세 줘야지. 혼자 살면서. 세 칸짜리요. 
그때 참 바빴어. 근께 우리 큰아들 쌀 한포씩 사다주고. 뭐 작은 거
는 일본 댕긴다꼬 좀 그거 해가 돈 조금 주고. 며느리 모르게 주고. 
근께 아들은 주는데 며느리가 좀 싫어하는 모양이라. 며느리도 자기 
부모 보태줄라 하지.
■ 의례생활
사할린 계실 때 조상 제사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제사도 여기보다 더 크게 해요. 기제(忌祭)를 딱 시간을 정해가 밤
중에 지내고. 돌아가신 날. 해마다. 그거는 식구대로 하는 거도 반찬 
제1장. 3국 4가지 다른 이름의 김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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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또 하고 식구끼리 밤에 지내죠. 시방 우리 아이들이 아빠 
돌아가신 날 제사지내고 하잖아. 그런께 내 전화로 “아빠 제사지냈
나?” 하면, “예!” 하고. 설에도 하고 돌아가신 날짜도 하고 추석에도 
하고. 명절에는 산소 가고. 친척이나 친한 이웃에 제사 있어서 참여
할 때 돈 가지고 가요. 돈 부주. 돈 놓고 절하고. 초상나면 제사, 3
년 제사까지 하잖아. 제사 집에 가는 거는 친구 집이지. 가까운 친
구. 친척집에도 가고. 근데 고향사람 집이지 뭐. 고향사람이고 뭐 한 
종씨(宗氏) 집이고. 친척집이지 뭐. 사할린에는 조선 사람만 같은 동
네에 혹은 같은 구역에 모여 사는 그런 데는 없어.
조상 산소에는 1년에 언제, 몇 번이나 갑니까?
돌아가신 날 가고. 추석에 말고 저게 양력으로 8월 15일 날 가요. 
그때는 일을 안 하고 공휴일이거든. 8월 15일 날 일하는 사람은 새
복(새벽)에 갔다 오고. 일 갔다 와서 또 가고. 명절이라고 러시아 사
람 알아줘요. 일하는 사람 못가면 식구들이 갔다 오고. 산소 갈 때는 
술. 맛있는 거 술하고 뭐 가지고 가고. 음식 차려놓고 절을 하고. 술 
퍼놓고. 설 때는 그때는 눈이 뭐 사할린 눈이 많은데, 가면 뭐 어떻
게 들어가요. 눈 없을 때 가서 절하는 사람은 하고.
사할린에서는 사람이 돌아가시면 어떻게 치룹니까?
무덤도 시방 태울 데 없어. 태울 수 없은께 산채로 묻고 돌로 이름 
써가 조선글로 쓰고. 공동묘지에. 근데 러시아 사람 하지마라 소리 
안 해요. 공동묘지가 있는데 커요. 분봉(墳峰)도 이렇게 맹글어요. 
비석을 만들고. 근데 러시아식으로 이렇게 하지. 한국 꺼는 이렇게 
산으로 하지요? 러시아 꺼는 반듯이 이렇게 지~요(지어요). 길게 네
모처럼. 그래가 울타리 쇠로 맹글고 이렇게 하는 거. 위에는 잔디를 
입히고.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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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제사’는 초상 치루고 합니까?
초상나고 3년. 우리는 ‘3년 기일’이라 해요. ‘3년 상(喪)’ 카지. 3년 
상 맞다. 어른 돌아가시고. 크게 해요. 1년 지사도 크게 하고. 3년까
지. 사람이 돌아가시고 나서 3년까지는 손님들이 오지. 1년 제사. 3
년 제사 하지. 3년까지. 3년 넘으면 인제 집에 식구끼리 하고. 근데 
시방은 모르겠어. 그대로 하는지. 그래도 제사 집에 갔다 왔다 하고 
하대요. 아들이.
옛날 조선 땅에는 먹을 게 적고 이럴 때 친척끼리라든가 동년배, 아
는 사람, 고향 사람끼리 계(契)라는 게 있었어. 옛날에 장례 치르면 
쌀이 많이 부족하니까 쌀계. 또 그릇이 많이 필요하니까 그릇계. 뭐 
이런 걸 해가지고 쌀계는 쌀을 한 되씩 장례 치르면 그 집에 갖다줘
가지고 치르게 하고. 또 상여 메고 가는 거. 사람 죽으면 관에 넣어
가지고. 그것도 계가 있어가지고 계원들이 나와 가지고 어깨에 상여
를 메고 초상을 치르고. 그런 게 있었는데, 사할린에서는 그런 건 없
고. 사할린에서는 차로 가지고 가. 모두 차로 모시고. 아버지가 만약 
건축부에 일하면 아버지하고 같이 일한 사람들이 와서 해주고. 또 
그 집에 어른이 돌아가시게 되면 그 아이들 봐서 다 해주고. 짊어지
고 가고 그런 건 없어.
그리고 뭐 차에서 내리면 끄나빨에 피지(皮紙) 하얀 거 있잖아. 너
이서 이렇게 요 짝에 둘이, 요 짝에 둘이 가지고 해가 가고 그렇지 
뭐. 관(棺)을 모시고 그랬지. 젤 첨에 해방 나고 나서 한국식으로 깃
발로 해가지고, ‘어야~ 어야~’ 한께.
처음에는 선소리도 하고 전통식으로 그렇게 했습니까?
러시아 사람 와서 한 2년 그렇게 했어. 그런데 러시아에서는 ‘이거 
뭐야? 사람 죽었는데 노래 부르미 간다. 아~ 깃발은 무슨 의미로 가
제1장. 3국 4가지 다른 이름의 김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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져가나? 저거 뭐인고?’ 그리고 나서 끝났고. 러시아 땅이 되고 한 2
년 정도는 했어. 러시아 정부에서 그거를 못하게 했지. 정부에서 안
보다가 본께 이상하잖아. 사람 죽고 가는데 노래 부르고 ‘어야~ 어
야~’ 하고 간께. 깃발을 들고 간께. 하얀 것도 있고, 빨간 것도 있
고. 이거 무슨 의미야? 이렇게 해가 그거 시끄럽잖아. 그래 못하게 
해가. 첨에는 이렇게 그거 했어. 자기 고향에서 하던 사람들이 있었
잖아. 그런 사람은 할 줄 알거든. 그 사람들 그렇게 한다고 한께 그
렇게 됐지만, 2년 만에 끝났어.
장례 치르고, 시집, 장가 혼사 치를 때 비용은 개인이 마련했습니까?
예. 근께 병원에서 죽으면 죽었다고 오면 강에다가 놓고 뭐. 혼자 있
는 사람은 민중국(民衆局)에서 지내주고. 혼자 홀애비들이 있잖아. 
그런 사람들은 민중국에서 초상 치러주고. 그런 분들도 공동묘지에 
모셔요.
사할린에서 결혼식은 어떻게 치뤘습니까?
처음에는 다 한국에서 하던 것처럼. 옛날 한국에서 하던… 조선시대 
때 하던 대로 해요. 그리고 잔치라 하모 글 쓰는 거라든가 무슨 실 
같은 거 그런 거 다 했어. 근데 몇 해 전에부터 없어졌어. 예단. 예
단이라 하지요? 결혼할 때 저기 뭐라? 사돈집에서 가고 여기서 오고
하잖아? 여기는 무슨 ‘뭐 사라’ 하고 하데요. ‘함 사라’ 하지요. 그런 
거는 없고 그저 가서 음식 해가 가고, 신부 옷감도 갖다 주고. 어떤 
때에는 저 집에 신부는 2만 원짜리란다. 4만 원짜리란다. 그런 말까
지 나왔어. 그래서 우리 여기 와서도 되게 작게 하던데. 우리 사할린
에 있을 때는 그렇게 크게 하는데 여기는 무슨 뭐 돌아가셔도 뭐 갔
다 와서는 손님이 와도 대접하는 것도 없고 뭐.
아이가 나서 100일 될 때 돌잔치는 어떻게 합니까?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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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일 돌 하잖아요. 봤잖아요. 동상에다가 실을 올리고 연필을 올리
고 공책도 올리고. 그래 돈 가져라. 돈 가져라 하고. 그거는 지금도 
합니다. 우리 막내아들이 40살밖에 안됐는데 이거 뭐 시방도 해요. 
우리 외손자도 돌잔치 한 거 사진 있는데 어디 갔노? 있어요. 시방
도 해요. 돌잔치 같은 거는. 그거는 안 없어지고 오랫동안 남아있는 
거라. 풍습으로.
(돌잔치 사진을 보며) 오늘 아침에 봤는데. 여기 있네. 돌잔치 했을 
때 사진. 돌잔치구나. 이거 완전 한국식이라. 색동옷 이거 입히고 큰 
상 차리고. 사과들도 마이 차리고. 이거 참외. 큰 땅에서 오는 참외. 
이거는 떡. 완전 이거는 한국식으로 합니다. 이거 봐요. 이게 남자아
이 돌잔치. 그른께 늦둥이 봐요. 큰 상 차리놨잖아요. 돌잔치. 이건 수
박이고. 파인애플이고. 사과, 복숭아, 포도 다 있어요. 이런 게 실제 
사할린에서 다 재배가 됩니다. 어른 환갑도 크게 해요. 그저 내 땅이 
아이고 내 고국이 아니라는 그기지. 묵고 사는 그거는 그대로라.
사할린에서 남의 가정 대소사 참여할 때 부조도 하십니까?
아이고! 부주 거 얼마나 한다고. 돈을 봉투에 넣어 줘요. 부주가 제
일 작은 거 3루블. 보통 5루블. 잘 했다 하면 10루블. 근데 우리 집
에는 나가는 거 다 10루불짜리요. 우리 주인 나오는 돈은 부주 돈이
요. 조선에서 하던 풍습 그대로요. 돈으로. 생일일 때는 술하고 가져
가지. 부주로 돈으로 가져가는 사람 있고, 또 술로 가져가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근데 잔치에 지사(제사) 집에는 술을 못 가져가지. 그
래 돈 가져가지. 러시아 사람들은 부주 그런 게 없어. 러시아 사람은 
간다 하면 술, 먹을 거 사가고. 우리는 돈으로 주지.
우리는 5층 집인께 나올 데도 없고 뭐. 내가 들에 가서 뜯어온 그거
밖에 없지 뭐. 그래도 우리 아버지 연금 나오는 거 쓰고, 우리 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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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일한 거 조금 쓰고 한께 그대로… 그러나 잔치 집에는 못 갔어. 
부주 싸가야 되네. 우리 집에는 얼굴이 넓었은께 다 갈만한 집이라. 
안 가면 뭐. 근께 부주 내놓으면 내 먹을 거 없어. 근께 내 아주 안 
갔지.
내 버는 돈은 먹고 그렇게 살았어. 근데 주인 돌아가시고 난께 부주 
돈 나올 데가 없어. 그린께 큰 집에 안주고 그한께 멀어지지. 근데 
“아이고! 다마라는 저기 뭐야? 아이들 다 장개보내고 그런께 잔치 
집에도 안 온다”고 이런다. 남의 속도 모르고. 근데 내 말했어. 내가 
“우리 주인 돌아가시고 나서는 돈 나올 데도 없다. 그린께 내 밭에 
농사라도 지으면 그거 하지만 농사도 안 짓지. 나올 데도 없은께 내
가 못 댕긴다. 미안하다”고. 근데 아주 가까운 집에는 빚이 들어도 
가고. 정말 가야 되는 집은.
■ 이웃관계와 여가생활, 상부상조 전통
우리 여게요 사할린에 있는 사람은 경상북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
남도 그런 사람이 많대요. 왜 어떻게 아는가 하면 우리 집에 놀러오
지요. 그럼 남자끼리 인사하잖아요. 나는 경상남도 어디고 말하면서 
인사하는 소리 들은께 경상북도, 남도 사람, 충청도 사람, 전라도 사
람 많대요. 사할린에서. 그래 인자 본(本)이 어디요? 아이고! 종씨네
요. 종씨라 하면 만날 온다. 또 혼자 있은께 밥도 그 하면 우리 집에 
와서 묵고. 한번은 거~ 박 씨라꼬 왔는데 우리 집에 와서 술에 취해
가지고 오줌 한그씩 싸가 가고 그런 일이 있었어. 참~ 이역만리 떨
어져 있는 곳이고. 우리 한국에서만 해도 같은 도 출신, 고향 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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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있어도 반갑다 하는데. 그래 떨어져 있는데 “아이고! 동생이요” 
하고. 어떤 사람은 사할린에 살던 고향사람이랑 “아이고야! 니 어디 
가지 말고 우리 집에 살아라.” 해가 델꼬 있다가 그 사람 장개도 보
내주고 그런 사람도 있어. 고향 출신이면 얼마나 참 반갑겠습니까. 
그니께 한 사람은 “아이고! 형님이요” 하고. 
그렇게 인심이 좋았다는 거네요?
왜 인심이 있는가 하면 자기는 자식이 있지. 자기 혼자 버는 돈이 
모지라단 말이야. 그 사람 같이 하면 같이 묵고 그래 조금 나아서 
그래가 붙잡고 있을 수도 있고, 그래가 자기 딴에 큰 께 가는 사람, 
사우도 되고 그런 집도 있어.
사할린에서 가장 친한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친한 친구라꼬 같이 유즈노 살다가 안산에도 있고 뭐. 그런 사람 있
었지만, 떨어지고 멀리 산께 또 뭐 자꾸 멀어지네요. 사할린에서 가
장 친한 사람은 누고? 손자 사우 된 집이 안산에 있어. 할머니. 또 
뭐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근께 그 손자끼리 우리 아들끼리 친구 이
웃에 살았은께 친구 돼가 그 친구끼리 사돈 됐지. 그 집에 내가 한 
번 가봐야 되는데. 가서 조선 이름, 일본 이름 그것도 한 번 받아와
야 되는데. 그 분이 안산에 살고 계시지. 연세가 비슷하지는 않는데. 
그 사람 주인이 그 사람이랑 여섯, 일곱 차이라 하든가? 그 아주머
니가 내보다 한 다섯 살 아래요. 팔십 가까이 되지. 사할린에 계실 
때 음식도 나누어 먹고. 이웃에 살았어. 그 집이 주인이 우리 나이 
또래 된께 그래 왔다갔다. 오래도 안 살았어. 그래가 그 집에서 나가
가 다른 데 이사 가고. 그래도 사돈끼리 됐으니께.
사할린에 사실 때 조선 사람 친구도 있었습니까?
아이고! 조선 사람은 잔치라 하면 모이고. 생일이라 하면 모이고.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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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요. 나는 러시아 사람하고 주택 살았거든요. 그래도 뭐 무슨 일
이 있다 하면 가고 뭐. 연락 되지요. 같이 일 하니께, 아무개씨 집에 
내일모레 생일이란다. 어~ 놀러가지. 그렇게 모이도 러시아 노래는 
절대 안 해요. 한국노래 하지. 이렇게 그거 이런 거 있잖아요. 일본
은 배타고 댕기면서 가지고 오면 이런 거 이렇게 놓으면 이미자의 
무슨 누가 노래하는 거 그거. 글자도 안 나오고 이만한 거 있잖아요. 
노래 나오는 거. 듣고 배우는 사람 배우고. 이미자 노래 부르고.
설이나 추석 명절 때 한국처럼 대보름 행사를 비롯하여  절기에 따
라서 놀이하는 게 있었습니까?
에이. 그거는 사할린 안 해요. 모이가지고요 놀이라 하면 냄비 따까
리 동딱동딱 얼씨고 절씨고 하고. 동그랗게 이렇게 하고. 그것도 70
년, 80년 된께 없어졌어. 이미자 노래 그런 거 들어온께 그거를 본
다꼬 그거 없어졌고. 또 그거 있잖아요. 영화 보는 거 그것도 가져오
면 그거를 보고 울고불고 그거 하고. 비디오. 드라마 연속극. 영화. 
그거 보고 그거 한께 옛날 그거 없어졌어. 한 80년쯤에는 잔치 집에 
가면 냄비 따까리 알루미늄 그거 있거든. 그거를 전기선 두꺼운 거 
그걸 끊어가지고 둥딱둥딱 뭐. 그게 악기 택이지. 뚜드리면서 춤을 
추고. ‘에~헤헤~이여~~~’ 카고.
그런 놀이를 회갑, 칠순잔치 할 때도 했습니까?
예. 그런께 그거 할라면 토요일 날, 공휴일 날 받아요. 일간에 안가
도 되니까. 아까 내 회갑잔치 사진 있었제? 회갑잔치 그때는 내 소
문 안냈어. 영감 없는 회갑 하는데 뭐 그거. 가족끼리만 간단히 했
지. 지금도 풍습이 옛날하고 많이 바뀌었어. 사할린 우리 조선 사회
에도.
여행을 하고 싶다 하면 어떻게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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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자기 돈으로 가야지. 그거는 뭐 국가 그거 아니지 뭐. 내 고
향이 있으면 고향에 찾아가지. 러시아 사람은. 또 우리는 모스크바나 
어디 간다 하면 아이들 공부한다 하면 그거 보러 간다 카고. 여기는 
또 어데 단체로 유람 가는 게 있어. 어디 어디 가라 하는 거 그때 
한 사람 안가고. 그래 관광단이지. 관광단처럼 가는 거 있고.
■ 언어생활
일본에서는 어릴 때 일본말을 가정에서 사용하셨다고 했는데, 사할
린에서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을 때는 가족들하고 조선말로 소통했습
니까?
가정에서 우리 주인이 살아있을 때는 집안에서 러시아말 못 썼어. 
나는 조선 사람이다. 니도 조선 사람이다. 절대로 자기 조선말 배워
야 된다고. 조선말을 그거 했어. 근데 우리 주인 돌아가시고 나서 내
가 아이 다니던 학교 가니께 집에서 일본어 쓰는 거 하고, 조선말 
쓰는 거 하고, 러시아말 쓰는 거 하고… 그래 아이들이 아버지가 조
선말 잊어버리면 안 된다고 해서 썼다 한께. 그러니께 집에 아이들
이 세(말투)가 러시아 세 아이라고. “당신들 아이들 공부 잘하는데 
대학교 만약 갈라면 그래 해가지고 대학 못 간다” 이러네.
학교에서는 정책상 러시아 말을 가능한 사용하도록 강조하네요?
그렇죠. 그 선생이 나한테 그렇게 말했어요. 내가 학부형으로 가가지
고 그랬다니까요. 그래가 안되겠다 생각되더라고. 집에 가서 조선말 
하지마라. 러시아말 써야 한다. 우리는 조선도 못 간다. [조선 땅에
서] 인적지 우리를 안 데불러 왔는데 못갈 끼라. 근께 러시아말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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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라고. 그래 그때부터 나도 일간에서 러시아말 썼거든요. 아이들도 
그래 한께 좋다고 하고. 러시아말 해가 공부는 뭐 공부는 우리 아이
들 다 잘했어.
그때부터 가정에서도 러시아말을 사용했습니까?
응. 우리 주인 돌아가시자 러시아말 쓰게 됐죠. 박 할아버지나 한 할
아버지 두 분 다 한국말만 썼지. 그 사람들 러시아말도 모르요. 사할
린에서 50년을 살아도 러시아말은 몰라. 자기네끼리 놀러 다니는 친
구들끼리도 조선 사람이고. 러시아 친구도 없고.
자제분들은 한국말도 어느 정도 합니까?
그른께 우리 큰 것들하고 우리 기수, 선희까지는 우리 쪼꼼할 때 한
국말을 다 알아들었어. 알아들었는데 이렇게 말을 못해. 전화를 조선
말로 하면 ‘응응!’ 하는데… 말을 못해. 근데 손자녀는 한국학교 열었
거든요. 그린께 말하잖아. 공부를 해야 된다 하니께, “할머니! 내 그
거 알고 말로 거 하는데 무슨 의미 모르겠다고. 말을 못해. 글은 쓰
는데. 학교서 거기서 뭐라 하고 거 하는데, 무슨 말인지 의미를 모르
겠다. 무슨 의미 모르겠다고. 대신 손자녀들은 러시아말은 능통하지. 
러시아말뿐이지. 조선학교에서는 아야 어여 우유… 그거는 배웠지만
은 집에 와서 러시아말 쓰지. 누구하고 그 의미로 말해야 사람이 말 
알잖아요. 그렇게 가~들이 조선학교는 우리 선희도 댕겼거든.
야간학교 거게 한국에서 선생이 나왔는데. 조선학교 연다고 오시오 
한께 우리 아이들 내가 말했어. 배우고 내삐리는 거 괜찮다. 배우러 
가라고. 며느리도 가고 다 가라. 막내이는 배타고 댕기니까 가도 못
하고. 우리 며느리는 알고. “할머니 여~ 뭐 좀…” 아이고! 내한테 물
어보지마는 내 혀가 그런께나 받침 잘못 들어가면 말이 안 된다고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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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세 명의 며느리는 다 한국사람입니까?
한국 사람이오. 러시아 사람 싫어. 근데 그 막내이가 러시아 사람이
랑 결혼해가 갈맀잖아. 그지만 생활비는 보태주지. 그니까 가~들이 
요새는 어쨌는지 모르지만은 한참 고생했어.
8. 3개국 4가지 이름, 아직도 ‘가네야마 시즈꼬’
■ 3가지 공민증 : 무국적공민증, 러시아공민증, 북조선공민증
사시면서 사할린 땅을 맨 먼저 벗어나본 것은 어디였습니까?
벗어나는 거 여기 와서 벗어났지. 어릴 때 일본에서 좀 살았고. 큰 
땅이라고 우리 딸내미 저게 대학 갔어요. 큰 땅 하바로프스크. 어떻
게 하고 있는가. 수술해가지고 며칠 안 됐는데, 내가 우리 딸 있는 
데 가봤어. 내 아픈데 내한테 와서 대학교 가고 싶다고 가고 싶다고. 
아이고! 내 뭐라 하겠어. “가라. 붙으면 거기 나와서 공부해라.” 그랬
어. 하도 시끄러버가. 근데 붙었네. 그린께 뭐 어짜겠어. 그래가 내
한테 조금 나오는 돈 주고. 지도 바쁘고, 나도 바쁘고. 근데 지는 인
자 그래도 다른 사람은 한 달에 50원씩 주는데, 나는 25원밖에 못 
줬어. 왜 근가 하면 25원은 방값주고, 또 25원은 묵으라고 주는데. 
25원 가지고 아~들 그거지. 거기도 부주가 있다네. 그래 고생했어. 
우리 딸도.
그때 처음 사할린을 벗어났습니까?
그 후에는 한 번도 못 가봤어. 일본 땅도 사할린으로 가고 난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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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안 가봤지. 하바로프스크 한 번 딱 가봤지. 그 다음에 한국.
그래 인자 그거 하는데 내가 몸이 그거 한께 그거 있잖아. 온천 같
은 데에 한 달 놀다오는 데 있어. 큰 땅 가라하대요. 큰 땅 가면 우
리 아들 빨래하는 사람 없잖아. 근데 우리 바로 옆에 한 한 시간만 
가면 거기도 있었어. 온천 같은 데에. 토요일 날 와서 고 날 하룻밤 
자고, 빨래 다 해놓고 그래 내 왔다 갔다. 내 그래가 한 네 번 갔어. 
거기도 사할린 땅이지 뭐. 집에서 나갔다는 게 그기지. 뭐.
자녀가 다섯 명인데 모두 대학 공부를 했습니까?
다 했어요. 우리 큰딸하고 큰아들은 러시아 공민증 안내어서 공부 
못했지요. 안전대학. 집에서 공부하고 시험만 가서 하는 거. 집에서 
공부하고 한 달에 한 번씩 보내요. 시험 받으러 오라 하면 가서 시
험하고. 그거 뭐라 하노? 통신으로 방송을 듣고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그거하지. 공부하고 싶다고. 그래 하면 거기서 하러 오라. 조선 
사람뿐이 아니고, 러시아 사람도 그렇게 해요. 그래 해가지고 러시아 
사람 두 번, 세 번 대학 끝날라 하는 사람들 하잖아. 그런 거. 큰딸
도 하고, 큰아들도 했고. 그것도 대학 졸업장을 주지요. (아들을 지
칭하며) 우리 기수도 안전대학 했어. 내가 러시아 공민증 가지고 있
으니까. 공민증 내자마자 군대에 오라네.
큰아들이 나이가 몇입니까?
우리 큰 아~가 작년에 환갑이요. 이름은 박성월. 모스크바 사할린 
대표자 돼가 갔어. 근께 젤 큰 아~가 딸. 갈사크에 살고 있고. 두 
번째는 아들. 박택진. 다 사할린에 있어. 세 번째는 아들이요. 한기
수. 92년도 와서 여기서 태권도 1등 해가 갔는데. 태권도 해가. 한기
수는 가~가 58년생이요. 네 번째 우리 딸. 한선희. 가~가 인제 60
년생이요. 막내는 기태. 가~는 67년생. 다 컸고 다 잘사니까 걱정은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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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어. 그래도 보고 싶잖아.
사할린 땅 안에서는 자기 시간 나고 돈이 있으면 마음대로 다닐 수 
있습니까?
그것도 65년도까지는 공민증 있어야 했는데, 공민증이 세 가지요. 
하나는 러시아 공민증, 하나는 나라 없는 공민증, 하나는 북조선 공
민증. 북조선 공민증 내는 사람… 아이고! 나는 북조선이라도 가가지
고 38선 넘어서 고향 찾으러 간다 하는 사람은 그거로 냈고. 58년도
에 가는 사람은 가고. 많이 갔어. 공민증이라도 나는 북조선도 싫다 
러시아 것도 싫다 하면 나라 없는 공민증 가지고 있어. 비에즈 그라
즈단스키. ‘비에즈’라 하는 건 ‘없는’ 뜻이지. ‘그라즈단스키’라 하면 
뭐라 하노? 사람으로 말해요. 니는 뭐시기라 하고 말하는 거 있잖아
요. 나라도 없고 뭐. 무국적자. 내가 그것도 주인 돌아가실 때까지 
가지고 있었어.
왜 그걸 가지고 있었습니까?
응. 우리 주인은 북조선 꺼 가지고 있고. 그것도 내야 38선 넘어 간
다고. 식구도 싫다고 자기 혼자 냈어. 우리 아버지는 러시아 공민증. 
불 떼는 데서 우리 아버지가 신용 받으니까 거기서 내줬어. 그것도 
신용자에 한해서 줬다니까. 우리 아버지는 엘리베이터도 고쳐주지. 
뭐도 하지. 이거는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고 한께 우리 아버지
가 조선 꺼 가지고 있으면 안 되잖아요. 근께 러시아 꺼 내줬어.
나는 77년도 냈어. 무슨 공민증? 우리 주인 돌아가시고 러시아 공민
증 냈어. 아이들 대학 보낼라고. 그 전에는 벨즈그라다스키. 무국적
자 공민증. 남편 한씨 할아버지는 북조선 꺼 가지고 있었어.
고향이 남한인데 어떻게 북조선 공민증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근께 38선 넘어서 자기 고향 간다고 냈잖아. 고향이 남한이지요.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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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남도. 근데 왜 북조선 공민증을 가지고 있었냐면. 근께 내 말 들어
봐요. 북조선에서 선전을 했어. 북조선 나오면 뭣이 어쩌고 어쩌고 
해놓은께 이 사람이 너무 말 듣고 냈다. 내보고 내자 하는 거, 나는 
안 내겠어. “북조선에 아는 사람 내 아무도 없는데 나 안 가겠다”고. 
“38선 넘어갈려면 이 아~들 델꼬 어디 내 가겠노? 그래서 당신만 
하라”고 했지.
왜 한 할아버지는 그렇게 했습니까?
한 할아버지는 본처가 있거든.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요 뭐. 북조선에 
있는 거는 아니고 남쪽에 있었지. 근데 왜 북조선 공민증을 받을라 
했냐면. 그런께 말하잖아요. 38선 넘어서 고향 간대요. 당시 북조선
에서 선전을 크게 했어. 북조선에서 와가지고. 내 만약에 가면 우리 
아이들은 내삐리고 가나? 그 잔잔한 것들. 그 당시 선전에 그 말을 
듣고 북조선 공민증을 갖고 북쪽으로 간 사람도 많이 있었어. 58년
도인가 마이 나갔다고. 큰 배 가지고 와서 델꼬 갔어. 근데 남쪽에서
는 그만한 배가 없어 우리를 데리러 안 왔는가?
당시는 이승만 정권인데 그런 점에 대해서 안 좋게도 생각했겠습니
다. 왜 우리를 버리는가 하고요?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 있다는 거… 우리 남조선이라 했어. 한국이라
는 말 몰랐어. 남조선에는 이승만 대통령이고, 북조선에는 김일성. 
근께 우리는 북쪽에는 안 간다. 왜 그냐면 친척도 고향도 없다. 내 
싫다. 그리고 같은 러시아 저것도 우리는 싫다. 그래 우리는 안냈지. 
근데 어떤 사람은 귀 얇은 사람은 ‘아~ 우리는 38선 넘어가 간다’고 
그래 갔잖아. 그래 가는데, 가자요. 나 안 간다고. 갈려면 당신 혼자
가라고. 그래 단도리 하데. 뭐 사고 뭐 사고. 실제 갈려고도 했어. 
가면 가고 오면 오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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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할아버지는 한국에서 결혼하고 사할린으로 나왔네요?
예. 근께 시집가면 아~ 낳는 거 싫어하대요. 남자들. 우리 집뿐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아~ 낳는 거 싫어하대요. 조선 갈라면 어떻게 
갈라고 이래요. 거 생기는 거 우짜노? 조금 늘그막에 된께 자슥들이 
‘아버지! 아버지!’ 한께 그때는 ‘어허!’ 하지. 좋다 하지. 아들이 있어
서 좋았다. 딸이 있어 좋았다 카지. 첨에는 싫어하다가.
아이 낳는 걸 싫어한 것은 결국 내 고향 한국으로 가겠다는 생각에
서 그런 거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저거도 고향 간다고 비에즈 그라즈단스키 가지고 있었
어. 한국 땅 올 때까지 가지고 있었는 사람도 있어. 여기 한국 땅도 
그 패스포르트로 오는 사람 많소. 내 뭐 한다고 안내고 뭐 한다고 
안내고. 러시아 뭐 한다고 근께 그 사람은 쓰고 그거요. 무식하다면 
무식하고. 그런 사람이 안내겠다고 안내고. 그래 우리는 자슥 공부시
킬라고 내고. 검은 일꾼 안 생기게 할라고요.
사할린에는 조선 사람, 일본 사람, 러시아 사람 또 이북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여러 출신 사람 중에 차별이라든가 건 없었습니까?
차별은 없어요. 왜 근가 하면 러시아 사람은 같이 살아야 되고. 일본 
사람도 일본 여자인께 뭐 같은 나라 사람 아인데. 그리고 러시아 사
람도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 많아요. 근데 나도 내 땅 아닌데, 근께 
서로서로 괜찮게 살았어요.
원래 러시아에서 태어나서 오래 전부터 러시아에서 살아온 그런 사
람들도 있었습니까?
그런 사람은요. 일본 사람하고 저기 조선시대 만주 땅에 갔던 게 러
시아 땅에 도망간 사람들이 있잖아. 그때 조선시대 무슨 왕이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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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람하고. 일본 사람들이 쳐들어왔잖아요. 옛날에. 그때 조금 
그거한 사람들이 도망갔잖아요. 그 자손들이 남은 사람들. 근데 그 
사람들 거기서 살다가 러시아가… 러시아 사람들은 우에 조금 앉아
있는 사람들만 왔어요. 근께 여기 사할린 들어와 가지고 사는 러시
아 뭐… 근데 그 사람들도 노동자 아이요. 그런 사람들도 생긴 거는 
똑같소. 한국 조선 사람하고. 일본 사람 얼굴처럼 비슷하게 생기고. 
러시아 사람은 완전히 다르고. 러시아 사람들은 묵는 거 다르듯이 
얼굴이 달라요. 묵는 거 다른께 얼굴도 좀 지름기 있다 하나? 뭐라 
하까? 거기 있는 사람들 만날 고기반찬이지. 바다 있잖아요. 위에서 
나오는 바타(버터)에는 빵 발라가 묵고. 뭐 카르바사 고기순대나 만
날 묵고 한께.
■ 3개국 4가지 이름, 디아스포라의 표상
키가 아주 크십니다?
나는 발도 커요. 하하하! 키가 크거든. 발 작으면 달리기 할 때 넘어
지지. 하하하! 255미리(mm)요. 신발 사 신는 거. 키가 나는 1미터 
70센티 됐어. 시방은 쪼바라들었어(쪼구려들었어). 지금 시대에서도 
키가 이 정도면 큰 편이지. 옛날에는 아주 큰 편이고. 키 큰 바람에 
공부도 못했고. 또 어디 가서 의심사지마라. 니는 키 크니께 다 보인
다. 댕기는 것도 조심스럽게 댕기라. 그래도 사할린에 있을 때는 러
시아 여자들이 키 큰께 키 큰 그걸로 부담 안줬어. 그냥 그런 갑다 
하고 지내고 그랬지. 여기 오니까 키 크다. 키 크다. 아이고 귀찮아 
죽겠어. 여기는 시방 크는 아이들이 있다. 내만치 큰께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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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만 크고, 조선 사람 중에서 내가 젤 키 커요. 여자 중에. 여기온께 
시방 젊은 사람들 잘 묵은께 키가 얼마나 잘 커요. 사할린에서는 키
가 아주 컸어요. 근께 키 크니께 우리 어머니 공부하러 안 보냈잖아
요. 우리 어머니가 학부형이라고 갔더니 총각 처녀들이 앉아 있더래. 
근데 간께 우리 오빠 그 사람들이지요. 연애학교라고. 그런데 우리 
딸 안 보내겠다고. 그래 난중에 우리 어머니 뭐라 하는가 아요. “아
이고! 우리 시즈꼬도 학교 보낼 꺼를 그랬다” 이런다. 다 지나가고 
나서. 학교 가면 연애한다고 그렇겠죠. 어리석은 사람 아니요? 그런
께 옛날식이죠. 걸어댕기는 것도 이래 댕기라 해요. 조신스럽게. 나
는 남자처럼 컸으인께 남자 한 가지 아니요. 쪼꼼할 때도 막대기 들
고 우리 오빠 따라댕기미 놀고 그래 했잖아.
성격이 아주 활달하셨네요?
응. 활발했어요. 우리 아버지 성격을 닮아도 얌전하고, 우리 어머니 
성격 닮아도 얌전하지 뭐. 다 양반들인데. 그래도 아이들 노는 중에 
가면 뭐 그래도 소리 지르고 그렇게는 안 해요. 그래도 젊을 때나 
늙을 때나 나는 할 말은 탁탁 해삐리요. 딱 하고 돌아서서 그런 거 
없어. 다른 사람 이런 거 없어. 할 말 딱 해삐리요. 선생님이 처음 
여기 와서 원장님하고 식당에서 인사할 때도 내가 그때 말했어요. 
그래도 내가 할 말 다해요. 다른 사람 할까 말까 해도.
(백발의 머리를 가리키며) 염색은 안하십니까?
아이고! 싫어. 나는 젊을 때는 병원에 들어갈 때도 했는데. 병원에 
들어가서 머리 새카맣게, 아픈 사람이 머리 새카마이 한다고 뭐라 
했어. 그리고 아픈데 칠해가 앉아있을 수도 없고, 나는 머리 이거 사
십 몇 살 때 돼가 허얘지대요.
일을 오랫동안 하셔놓으니까 연금이 나오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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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 나오는 거 아이들한테 놔두고 왔어. 쓸 데 있으면 쓰라고. 연금
은 그런께 다 돌아가서 장남한테 내가 줬죠. 그 막내는 아~ 델고 혼
자 사니께 그래가 내 쓰라 한께, 아~ 이거 한두 번 타묵더만은 뭐 
어떻게 돼서 안타데. 그래 큰 아들한테 줬어. 큰 아들 준께 자기 딸 
대학 가는데 돈 모지래서 2천원 탔다요. 러시아 돈으로. 그때 돈 2
천 원 큰돈인데.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시내서는 내 이름을 말을 하면 나 모르는 
사람 없어. 왜 그런가 하면 바느질 공장에 일 했으니께 나를 다 아
네. 아이고! 그래 엄마 돈으로 아들을 그래… 러시아 사람은 부모 돈 
안 쓰거든. 아이고! 엄마 돈으로 왜 저 사람이 연금 타노? 안 된다
고 고마 안 주네. 그래가 확인서 그거 썼어요. 이 사람한테 주라는 
거 내가 써놓고 가고. 그래 막내까지 돌아갔어. 막내는 야~는 부지
런해서 뭐 파고파고 하고.
그린께 올 겨울에 온께 뭐라 하는가? 작년에 가져온께 그게 일본 이
름 돼가 있어. 내가. 조선 이름으로 바까라요. 원장님한테 해 달라 
한께 일이 뭐 안 해주잖아. 일본 이름을 떼 내삐리고, 조선 이름으로 
해래. 내보고 러시아서. 근데 그거를 바꾸어서 오라는데, 원장님한테 
해 달라 한께 뭐 이래 이래 안 해주잖아. 그래 내가 안산까지 가야
돼. 내가 늙었은께 그 전엔 댕겼는데, 팔십 두 살 돼가 인제 길에 나
가는 것도 겁난다 아이요. 그러면 지금 일본이름 돼있는데, 조선이름
으로 안 바꾸면 돈 안주겠대. 사할린에서.
왜 그런가요?
왜 그런가 하면 일본 이름으로 하고 있은께 일본 국가에서 당신들 
나라 사람인께 이 사람은 그거를 내놓으라 하는 모양이라. 근데 내
가 조선 사람인께 일본에 줄라 해요? 암만 그래도 그래 조선 이름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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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하고 오라 하는데. 해가 가야 되는데 우리 아이들이 원장님보고 
한 번 어떻게… 그 조선 이름으로 어디서 나왔는가? 그거를 하고 오
래요. 근데 내한테 족보 있잖아. 있긴 있는데 러시아 사람은 그거 생
각 안한단 말이요. 조선 사람 이름으로 해서 맹글어오라꼬. 그거 이
렇게 쓰고 도장만 찍으면 되는데, 우리 원장님은 그거 안 해주잖아.
왜 안산까지 가야 서류를 만들 수 있습니까?
안산에 가면 거기서 일하던 사람이 거기 와가 있어. 여자. 내가 사할
린에서 한국에 오겠다 근께, “일본 이름인께 할 수 있습니까?” 한께. 
“그러면 조선 이름 말하소. 고향 하고.” 이래 가지고 그 사람이 그대
로 해가 나를 여게 보냈잖아요. 근께 그 사람한테 당신 보냈는데, 그
때 이래 이래 보냈다는 거 해달라. 왜 그런가는 일본시대 때 조선 
사람들 일본 이름으로 다 고치가 살았거든. 근데 그래 해서 그래 해
가 바깠다 하면 그 뿐이거든. 원장님이 나를 받았으니께 그렇게 내
가 오는 걸 받았다 하면 되잖아. 근데 안 해주잖아. 안산에서 가라고 
보내줬는데, 안산에 가면 됩니다. 좀 신경써주면 좋겠어요.
러시아 사람들은 부모 연금을 자식들이 받을 수 없습니까?
부모 걸 할라면 서이(세 사람) 증거 서야 돼요. 이 사람은 아버지 
그래 해가지고 근께 아버지가 꼼짝 못하잖아요. 어머니라든지. 그러
면 서이가 쓰면 이 사람은 그 집에 아들이다. 엄마를 델꼬 먹여 살
리고 있다. 엄마는 꼼짝 못하니까 이 사람 돈 줘라. 쓰면 돈 받아가
요. 근데 한국은 아무나 가도 돈 받아요. 원장님도 받을 수 있고, 일
꾼들이 가서 받을 수도 있고. 내가 못가니까 좀 받아주소 하면 받아
주고, 한국은 그래 하네. 근데 러시아는 절대 그런 거 없어.
연금을 사할린에서 현재 아들이 받고 있습니까?
예. 받고 있는데 올해부터 안주겠대. 조선 이름으로 바까야 주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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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 내 생각이요. 아마 연금 그거 하는데, 한국 땅에서 좀 보태주라 
해서 그렇게 할라고 그러는지 그거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라. 그린
께 일본 이름으로 있는 사람은 모르겠다 이렇게 되지요.
왜 사할린에서 아직까지 일본 이름을 갖고 있습니까?
러시아 이름도 있을 건데요?
러시아 이름을 뭐 아버지가 정한 이름인데 어떻게 돼요? 내 러시아 
이름도 있어요. ‘다마라’라고 있어요. 일간(일터)에서 다마라. 일본 
이름으로 증명이 돼가 있습니다. 서류상으로. 사할린에서는 일본 사
람으로 일본 이름으로 돼가 있어. 일본 이름으로 돼가 있으니까 일
본인으로 생각하겠지.
그게 어떻게 그렇게 되어 있는가 하면 66년도인지, 67년도인지 우리 
동생이 종이쪼가리 이런 거 가지고 왔어. 내 이름하고 자기 이름하
고 적어 넣는데. 러시아 글로 배워가지고 삭삭삭삭 그러면서 “큰 일 
났다. 어떻게 하나?”고 해. 일본 이름으로 쓰면 자기 안 된대. 남자
니께. 근께 김영곤이라고 써야 되는데 ‘가네야마’로 써놓은께 어떡하
나? 그러면 종이쪼가리 하나 얻어오면 되는데…. 안 된다. 이것도 돈 
주고 사가 왔다 하며 안준대. 그러면 내 꺼는 아직 안 썼거든요. 그
러면 내 꺼를 써라. 그러면 ‘시즈꼬’만 붙이고 내 종이로 해라. 내가 
그랬어. 그래서 바깠지. 우리 동생. 근께 우리 동생은 조선 고향이고, 
조선 이름 ‘영곤’으로 돼가 있고, 우리 영곤이는 일본 동경에서 낳았
은께 내가 일본 동경에 나고 가네야마 시즈꼬 이렇게 됐지.
종이가 모지란 거 아이라. 그거를 러시아 사람 올라와서 그 종이 안 
줬어. 돈 주고 팔고 그래.
그때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못 바꾸었다 이 말이네요?
그래 바꿀 기회가 있었지요. 있었는데. 그것도 가네야마 시즈꼬라고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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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동생한테 배워서 러시아 글로 그렇게 쓴다고. ‘김옥조’라는 거 내가 
안 배았거든요. 그러이 경찰서 간께 자기로 쓰래. 누구한테 써 받지 말
고. 그래 내가 가네야마 시즈꼬는 쓰지만, 김옥조라고 쓸 줄 몰랐어요. 
안 배았어. 근께 할 수 없이 가네야마 시즈꼬로 돼버렸지. 그러이 아직
까지 나는 사할린에서 일본사람으로 돼있어요. 그린께 러시아 사람이 
날 보면 일본 여잔가 하지. 말투도 일본투고. “내 얼굴을 봐라. 내 조
선 사람이다” 칸께, “아니다. 일본사람이다” 카더라. 하하하!
그것도 참 나라 잃은 시대에 거기 가서 살았던 설움입니다?
그래가 내가 그거 바꿀 때 러시아 아이들 대학 보낼라면 러시아 공
민증 가져야 아이들 대학 보내요. 그래서 내가 공민증 낼라 할 때 
조선 이름으로 할라 한께 그 여자가 그거 하면 일하던 그것도 다 고
치야 되고, 뭐도 고치야 되고… 안 해주잖아. 이름도 이뿐데 왜 싫어
하는가 하면서. 그래가 그 사람하고 싸우기도 싫고. ‘그러면 됐다’ 그
래 생각했지. 50년이나 돼가 남조선에서 우리를 안 찾아주는데 시방
사 찾겠나 싶어서 마~ 됐다. 됐다. 그래가지고 놔뒀지 뭐. 근데 조
금 있다가 그 여자가 혼났는 모양이라. 아무개씨 그래가 와가지고 
조선 이름으로 바꾸겠다 하겠다고 할 때 왜 안 바꿔주나? 니 뭣 땜
에 그 자리에 앉아있노? 그런 거 바꿔주라고 앉아 있는 거 아니가? 
그래 나를 찾고 그래 했는 모양이라. 그래서 그때 또 아프기 시작했
어. 내가. 그래 이제는 뭐 오늘날까지 가지고 있어.
자녀를 대학 보내기 위해서는 러시아 공민증이 필요했는데 그걸 만
들었습니까?
만들었죠. 내 가니께 한 달 만에 됐어. 그때 내 이름은 가네야마 시
즈꼬지. 뭐. 일본 이름으로. 그때 내가 조선이름으로 바깔라 하는데, 
그 여자가 안 바까주더라고. 그래서 영락없이 사할린에서는 아직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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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일본사람으로 돼가 있지.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 한국 땅에 왔고 
또 한국 사람인데 이것저것 생각할 필요가 있나? 그냥 이래 좋은 환
경에 살면 되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또 한편으로 참 그게 옳
게 바뀌어져야 한다. 이런 생각도 갖고 있습니다.
9. 한ㆍ소 수교와 영주 귀국
■ 한ㆍ소 수교, 비로소 트인 귀국길
한국에 처음 오신 게 1992년도라고 했는데, 그 전에는 전혀 못 왔습
니까?
전에는 어디에도 못 갔고 또 라디오도 못 들었는데. 92년 이전에도 
다른 사람들은 댕겼어. 근데 나는 그 사람들 왔다 갔다 하는 다섯 
번째쯤에 나는 한국에 왔어. 젤 첨에 러시아 대통령 고르바초프. 국
교가 89년도 열렸잖아. 그래 열리가지고 나서는 편지 왔다 갔다 하
고. 그리고 나서 관광단도 왔다 갔다 하고. 그래 맨날 여기는 한국이
라는 거 모르고. 남조선, 남조선 했지. 그 전에는 무슨 라디오도… 
연락도 없고 편지연락도 없고. 천지도 모르고 산 기지. 그래서 한국
이라는 것도 맨날 남조선, 남조선 캤지.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그런 
일 해가지고 큰 상까지 받았지요. 노벨상. 큰 상 받았는데 그 사람 
처가 죽었잖아. ‘이리나’라 하던가? 그 여자가 죽고난께 시방 살이 
찌가지고 이래요. 안죽 살아있어. 그래 그 사람을 대통령 하게 가만 
놔뒀으면 러시아도 어떻게 잘 되든가 나쁘든가 이렇게 고생 안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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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을 갖다가 그 사람 어데 쳐 박아놓고 그거 했잖아. 그래가 
자꾸 망하고, 망하고 이 나라까지 왔잖아.
고르바초프와 한국 노태우 대통령을 좋아하셨는 모양이네요?
우리는 좋았지. 왜 그런가 하면 우리 고향을 찾아줬잖아. 그 사람이. 
그린께 고맙지. 그때 노태우 대통령 그 손 붙잡고. 그래가 노태우가 
그거 해가 우리를 받아줬잖아. 노태우 없었으면 이적까지 오고 가지
도 안 해. 그분 고향이 대구라던데. 병원에서 한 번 봤어. 봤는데, 
내가 누구한테 말했노? 노태우 대통령 얼굴 닮았다고 했는데. 노태
우 대통령 암만 그거 했다 해도 이런 병원에까지 안 올 껀데. 영생
병원에서 봤거든, 그래 영생병원에까지 안 올 껀데 아무래도 닮은 
사람 같다. 우리끼리 말했어. 우리 한 달에 한 번씩 병원에 그거 하
러 댕겼거든요. 약 타러. 그때 인자 영생병원에서… 닮았데요. 윽시
(아주 많이) 닮았더라고. 바로 여게 고령. 거기까지 대통령이 암만 
그래도 옛날 대통령인데 여기까지 오겠나? 하고 아무래도 닮았는 모
양이다 그랬지. 그린께 그 양반도 우리한테는 은인이지. 우리를 여기
까지 보내줬으니. 그 양반 없었으면 우리 안죽까지 여기 못 왔어.
델꼬 왔어도 뭐 빨개이(빨갱이)라 하고, 뭣이라 하는데. 근께 이런 
이야기를 해야 되는 사람은 다 돌아가셨어. 우리는 지나가다가 이렇
게 우리 주인한테 손님으로 온 사람, 그 사람들이지요 뭐. 그래 오면 
이야기하는 거 듣고, 그렇게 하더란다. 그래 쫌 남아서 그렇지.
■ 하바로브스크의 해프닝, 성사되지 못한 귀국길
지금도 많이 늦지만 그래도 또 어르신들이 사할린에서 살아오신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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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이라도 남겨놔야…?
내가 한 가지 말할께. 이거는 또… 60년, 70년도 안 돼가지고 열일
곱 명이 환갑을 넘을라 말라 하는 사이 열 일곱명을 모다(모아)가지
고 한국에 보낼라 했어. 그래 보낼라고 하바로브스크까지 갔어. 하바
로브스크서 남조선에 오는 비행기 댕겼어. 그래 갔는데 한국에서 들
어오라는 종이쪼가리(비자) 안 줬어. 한국에 들어오라는 그게 있어
야 비행기 가잖아. 그 사람도 한 달 동안 하바로브스크에서 머물렀
어. 거게 또 내 어떻게 아는가 하면 내 동창생 문씨 그 집에 어머니
가 그때 그 전에 들어가가 있었고, 또 우리 주인의 뭐라 하나? 어머
니의 동생이 거게 있었어.
그런께 내한테는 시어머니지. 시어머니 남동생 거게 있었고. 홈스크
에 하나 백낙도라는 할아버지 거기 있었어. 그래서 내가 알아요. 근
데 그 사람도 갔는데, 하바로브스크 갔는데. 아이고! 인제 고향 간다
고 집에서 가져갔는 거 가지고 술을 먹고 한다고 다 써버렸네. 돈을. 
근께 언제 가는 것도 모른다. 종이쪼가리 줬는데 한 달이 넘어도 안 
오니께.
내 동창생 어머니의 사우가 따라갔어. 그 사람은 똑똑했단 말이요. 
그 사람이 내일모레 일 가야 된다. 데불러 안 오니까 이 사람이 한 
달을 있을 줄을 몰라가 일 가야 되는데, 기가 차잖아. 그린께 일본 
영사관에 찾아갔어. 이 사람을 후쿠다라 해요. 그 사람을 찾아가서 
“이렇게 이렇게 하는데 어떻게 하면 되는지 모르겠다.” 한께 “조토마
테구다사이.” 그래 일본 사람들이 전화 걸고 뭐하고 한께 사흘 동안 
좀 기다리래. 그러면 의논이 된께.
그 소리 듣고 있는데 외갓집에 삼촌이지. 그 사람하고 또 백난도하
고 우리 주인 도미야마상하고 서이는 비행기 타고 와삐맀네. 사할린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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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그린께 사흘 만에 아저씨 가지마라 했데. 사흘 동안 기다리다가 
타고 가요 한께 비행기는 만날 못 타요. 그때 시대에. 줄을 서고 타
고 가요. 그때 사람이 많고 비행기는 하나고. 그래서 내 오늘 안타면 
갈 수 없다. 돈도 다 떨어졌다. 가서 돈 받아가 오께. 이렇게 됐는 
모양이라. 말 들어보인께 그렇게 됐는데 가자마자 일본에서 그 사람
들 일본에 나오라 하더래. 열 일곱명. 그린께 서이가 떨어져 있은께 
열 네명이지. 열 네명만 갔어.
근데 빨리 오라고. 빨리 어떻게 가요. 비행이 안 태워주는데. 그린께 
아파졌어. 그래 인제 백난도 그 사람은 집에 온께 여자는 술이 취해
가지고 누버있고 토마토는 밭에 발갛게 익었지. 집 안에 있는 토마
토 빨갛게 익었지. 이 사람은 기가 차서 그 전에 하던 그게 있으니
까 다 따가지고 장에 바로 여~삐요. 거기 가서 한 바개쓰에 킬로에 
3원씩 파는 거, 한 바개쓰에 3원씩 막 팔았어. 그렇지 않으면 다 썩
여 내삐리는데. 토마토. 그래가 다 팔았어. 팔아도 거 할매가 안 일
어나더래. 그래 기가차서 그 이튿날 아침에 일어난께 할배가 누버있
은께 죽은 귀신이 와가 있다고 놀래더래. 가가 한 달이 됐는데, 시방 
온께 놀랬지 뭐. 그래가지고 뭐 할매가 내삐리고 갔는데 뭐하러 왔
는가 이기라. 토마토를 뭐하러 그래 헐캐 다 팔았는고.
할머니 데리고 간 게 아니고 할아버지 혼자 갔네요?
혼자 갔어요. 할매만 남겨놓고 갔지. 너무 술을 먹어 근께 정 떨어
졌겠지 뭐. 그래 가라고 그래 하다가 할배가 아파가 석 달 만에 죽
었어. 근께 도미야마상도 죽고. 또 같이 온 사람 다 화병 나가 다 
죽었어.
하바로브스크까지 가신 거는 한국으로 갈 거라고 생각하고 간 거 아
닙니까?
제1장. 3국 4가지 다른 이름의 김옥저
 
117
한국에 갈라고 그래 갔지요. 근데 한국에서 어떻게 됐는지 러시아 
사람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지. 그 나라에 들어오라는 종이 있어야 
들어가잖아. 그 종이가 없드래요. 그래 못 들어가고, 오라 가라 말도 
없고. 그래가 일본 사람한테 영사관에 말하러 간다고 간 거 아이라, 
그 사람도 일본 말 잘했거든요. 일본 중학교 나오고. 그런께 옆에 있
은께 들어갔는 모양이요. 들어가서 이 말, 저 말해서 이렇게 이래가 
있다. 그래가 그 사람 조토마테구다사이. 그래 우리나라에 들어가라. 
그래가 시방도 일본에 있어. 그 사람들.
사할린으로는 못 가고요?
예. 사할린 아니고. 모르겠어. 여기 들어왔는지 갔는지. 그때 하바로
브스크에서 열네 분이 일본에서 오라 해가지고 일본을 갔는데. 사할
린으로는 다시 안 갔어요. 일본에 그냥 살아요. 일본에 거기서 요양
소 같은 거.
그런데 그거를 또 어떻게 알았는가 하면 작년에 그 중에 할머니 하
나가 혼자 살다가 사할린 아들이 있는 집에 혼자 산께 일을 안한께 
먹고 살기 바쁘지요 뭐. 그 아이들을 키아주고 그 집에서 같이 살았
는데 그런 소식이 있다고 이 할매한테 소식이 들어갔는가 봐. 근데 
이 할머니가 식구들한테 말 안하고. 온다 간다 없이 일본으로 와 버
렸어. 그런데 그 집에 아들이 커가지고… 오히려 엄마 되는 사람한테 
편지가 왔다는 기라. 내보고 이야기하대요. 저쪽에 양로원에 있을 때 
누구한테 왔는지 내한테 얘기하데요. 근데 어떻게 돼서 일본가가 있
는지 모르겠다고 그러데. 그래서 내가 내 아는 대로 말했지. 이래가 
이래 해가지고 하바로브스크 가서 한국에서 오라 소리 안하고 있은
께 일본에 그래 갔다. 그래서 일본에 있다 내 이랬지. “와! 그렇게 
됐는가 봐.” 그러더래요.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118
 
자기 고 엄마가 그 아이를 갖다가 보고 싶다고. 그때는 아버지 돌아
가시고 없고, 자기네만 살아가 있었지. 아이들 꼭 보고 죽겠다고 그
러더래요. 그래서 내 일본 갔다 오겠다고 그러데. 근데 사실을 알고 
가야 되겠다고 그래 내한테 왔대. 내가 뭐 안다고 누가 가봐라 했는
지. 내사 알 끼라 하고 보냈는지 그래 내한테 왔어. 그래 내 사실 이
렇고 이렇다고 말 해줬지. 그런 일도 있어. 봐요. 그만침 내 나라 사
람으로 찾으라고 생각 안했잖아. 한국에서. 왜 그러는지? 러시아 사
람들하고 같이 사니까 빨개이라고 그랬지. 그렇지만 우리는 빨개이 
아니라고 그러거든. 근데 우리는 잔치 집에서도 러시아 노래도 안 
해봤어. 우리가 빨개이면 거 가면 러시아 노래도 하고 하겠지. 러시
아 노래도 우리는 모르요. 하라 해도 몰라. 아는 사람은 알란가 모르
지만은.
먹고 살기도 바빴을텐데요?
그런께 내가 여기 와가지고 노래하라 하데. 내 노래 정말 몰라. 우리 
주인이 ‘운다고 내 사랑에…’ 하고 또 뭐 ‘언제나 고향’ 그 노래하고 
그거는 두 가진가 세 가지밖에 몰라. 그래도 그것도 뭐 빨리 하고 
느리게 하고 거 하는 대로 하면 되는 거 뭐. 근께 노래도 모르요. 
내.
그때는 우리가 북한하고 분단돼가 있으니까 러시아, 소련이 북한하
고 가깝고… 그런 어려운 시대도 있었습니다. 한국한 정부에서 빨리 
좀 노략해서 일본과 소련하고 관계를 터 가지고 오고 가게 했어야 
되는데 그런 노력이 부족한 건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할린에 사시
던 분들은 우리 한국 정부를 때로는 원망을 많이 하다가 가셨을 겁
니다.
아이고! 얼마나 했어요. 우리가 무슨 죄 있어가지고 우리를 내삐리
제1장. 3국 4가지 다른 이름의 김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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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그냥 있는가? 그러고 우리를 그렇게 부모들 따라서 간 사람은 놔
두자 하자. 강제모집으로 델꼬 간 사람은 무슨 죄가 있노? 그런 사
람이라도 찾아가야지. 강제모집 한 사람은 자기네가 오고 싶어서 왔
는가? 일본에서는 델꼬 오라고 한께 델꼬 갔겠지. 근께 누구 대신으
로 가서 고생했노? 그면 해방 나고 나면 제일 먼저 그 사람들 델꼬 
와야 돼. 한 사람, 두 사람 아이라. 천 몇 명이라. 그런데 죽을 때까
지 놔둬도 모르는 체 하잖아. 그기 돼요? 그게.
그게 우리가 나라를 잃은 민족으로서 일본에게 1차 책임은 있죠. 나
라 잃은 민족이 돼 놓으니까 일본이 그냥 자기네는 다 빼가고, 조선
사람은 자기 민족 아니라면서 나 몰라라 한 거죠.
일본사람들은 젤 첨에는 어떻게 하는가 하면, 소카이 나가라 할 때
는 열여섯 살 아~들. 열여섯 살 이하는 안부모 따라서 나가라 하고. 
젤 첨에는 소카이 나갔어. 그런데 나중에는 그 사람들도 조센징이데. 
거~도. 그래 조센징 와 보내노? 일본 사람도 못 간다. 조센징. 그렇
게 시끄럽게 됐단 말이요. 근께 조센징은 못 가고, 젤 먼저 간 사람
은 머리 좋은 사람 먼저 갔지. 우리 조선 사람들요. 시방 박(朴) 뭐
라 하는 사람 있잖아. 안산에 우리 그거 한 사람. 그 사람도 그렇게 
어머니하고 같이 먼저 나왔잖아. 근께 그 사람은 사할린에 있는 사
람 불쌍하게 여겨가 자꾸 우리를 내보내라고, 그 사람 시방 돌아가
셨잖아. 그 사람은 얼마나 그거 했어. 그 사람은 해방 나고 나서 사
할린에서 나간 사람인데, 어머니하고 같이. 그래 남은 우리 아버지도 
낸주는 가고, 조선 사람 많이 있는 걸 보고 갔거든.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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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 이별, 만남의 애환
왜 한국에서 여생을 보내야 되겠다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고향. 거기 있는 사람들은 고향, 고향 간다 하니께 오다가다 
만난 사람들이 있잖아요? 장개 들어갔고 온 사람 있잖아요? 그 사람
도 50년 여자가 기다리고 있는데, 여자가 기다려도 다 늙어빠진 할
머니지 뭐. 관광단에 가보니까 할머니 뭐 허리 꼬브랑 그래가 있지. 
그니까 그거 보니께 암만 자기 부모로 봐줘도 뭐 정 떨어졌겠지. 근
데 여기서 사할린에서 살던 여자 조금 그래도 나이가 젊은께 거게 
정이 있지. 그래 인제 그 여자 델꼬 와서 안산 같은 데서 살고 그래
요. 근께 모집 온 사람들이 살림 살다가 온 사람도 있잖아. 자슥 서
이나 낳고, 근데 오십 몇 년 만에 관광단이라고 갔잖아요.
그 전에 일 말할게요. 갔는데 그 전에 그때 어느 해인지 모르지만 
한국에서 안 받았어. 사할린 우리를. 그니께 일본에서 불쌍하다 하
고. 사할린 사람 오고. 한국에서 아들이나 처가 오고. 거기서 대면
했어. 그게 어느 해인지 내 모르겠어. 80년도인지, 85년도인지 그래
가 그래 했어. 그래가 일본 정부서는 미안하다고 엔(円) 돈으로 크
게 그 사람들한테 주고 그래 했어. 사할린에서 나온 사람들한테. 그
래 내 이웃에 있던 사람들은 자기 처하고, 아이 밴 거 모르고, 가니
까 아들이라고 찾아왔더래요. 아이들이 아버지하고 똑 같애요. 아버
지 집이라고 찾아와서 아버지 돌아가신, 그래가 온 사람은 화병 나
가지고 석 달 못 살고 다 죽어요. 생각도 안하던 아들이 나오고 그
래 한께 화병이 나가 다들 죽었어. 살아나서 온 사람 없어. 다 돌아
가싰어.
그래가지고 한국 갔다 안 오던 사람이 관광단이라고 와가지고 고향 
제1장. 3국 4가지 다른 이름의 김옥저
 
121
17)
 중풍.
찾아간 사람도 있고. 그래서 고향이라고 간께. 그래 한 사람도 그 사
람 시계쟁이 했는데 살다가 자기 고향으로 찾아갔어. 자기 처가 왔
더래. 처가 자기 부모를 모시고 있다가 그래 하면 욕봤다고 말이라
도 한 마디 해주면 어떻노. 말도 안 해주고 이래가 있다가 여자가 
그래도 내한테 무슨 말이나 해줄까 하고 비행장까지 갔더래. 그래도 
잘 있으라는 소리도 안하고 왔대. 자기 입으로 말한께 알지. 우리가 
봤나 뭐.
그래 해가지고 갔는데, 그 사람이 오자 여자가 안 살겠다 했네. 그른
께 혼자서 고생했지. 여기 그 전에도 하나 살다가 그 여자는 죽고, 
그 여자한테 낳은 아이가 이 아버지를 모시고 있었지. 근께 이런 소
리 하면 나쁘지만은 한국에서 여자가 악담을 했는지 어쨌는지 풍
(風)17)이 들어버렸어. 그 남자가. 그 아저씨가. 그래가 그 풍 들었
는데, 돌아가신 여자 아들이가 욕 봤어. 7년 동안은 풍 들었는 아버
지를 모시느라고 그래 장개도 늦게까지 못가고. 그런 시아버지가 있
는데 누가 시집올라 하나.
그런데 그 집에 큰 아들이 한국에 왔어. 와가지고 아버지 고향이라
고 왔으면 그때 그 여자하고 좋은 말하고 했으면 여자한테는 아이 
없으니께 그래도 내 배에서 나온 아들이라고 할 수도 있잖아. 근데 
그러지도 못하고. 자기를 싫다하는 남자의 아이를 자기가 뭐 볼라 
하요. 싫다 하지. 근께 야~가 얼마나 고생했어. 아무도 안 볼라한께, 
근께 자기한테 그래도 내가 거~서 나는 살았다. 그랬은께 미안하다
고, 욕봤다. 한 마디 하면 그거 말 한 마디로 이 아들은 아이고 내 
아들 된다. 하고 안아주잖아. 그런 일도 있었어.
그래 어떤 사람은 자기 여자가 아~ 배이가 있는 거 모르고 온 사람,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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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그런께 암만 내외간에 살았다 해도 시방 젊은 사람들처럼 
‘여보! 내 뭐 아~ 밴다. 아버지가 돼요. 오빠가 돼요.’ 이렇게 안하잖
아요. 낳을 때 돼가 놓으면 ‘아이고! 아~ 낳았나?’ 이랬잖아요. 옛날
에는. 근께 아~ 임신했는 것도 모르고 온 사람이 많잖아요.
가보인께 그 아들이 나와가 있고. 근께 가인께 아들이 와가 있은께, 
“아빠! 아빠!” 근께 저거 어머니가 늦게 왔다고 “니는 이적지(아직까
지) 뭐하고 시방 왔냐?”고. 남의 형편도… 근데 뭐시기 할 수 없단 
말이야. 그런께 “아이고! 당신이 욕봤어” 하면서 화목하게 살면 되
지. 안 볼라 하고 뭐 할배를 보마 물어 뜯을라 그래 하고. 니 땜에 
놀러 못 간다. 뭐 했다. 그래도 그 아들 아버지가 사할린 갔다고, 아
들은 공부해서 있었잖아요. 그렇다 하데요. 근께 아버지 소리를 못한
다. 아버지 왔은께 좋다고. 그래도 어떻게 땅이 있었는 모양이요. 아
버지가 와서 밭에도 돌봐주고, 뭐 해주고 한께 좋지.
또 연금이라고 나오잖아. 사할린에서 나오는 그거를 받아가 며느리
한테 주고 한께 자슥들하고는 아버지하고 오순도순 이렇게 좋아. 근
데 할매 때문에 못살아. 할매가 그래한께 아들이 “엄마! 그렇게 아버
지를 졸라대면 내 죽을란다. 이 꼴은 내 못 보겠다. 죽을란다” 하니
까, 그때서야 조금 낫더래요. 그런 집도 있고.
그것도 우리가 가만 앉아 있어도 말소리 들으니께 우리가 알지. 그
런 소리도 들었고. 그래 한 집에는 또 부자로 여게 사는데, 그 사람
도 내가 김해 김씨고 하다가 나를 여동생처럼 봐준단 말야. 그래 나
는 오빠라 카고. 나도. 그래 하고 있다가 그 집에 그거 하러 가고. 
그 여자가 자기 집을 도서관처럼 해가. 그게 어디인지 모르겠어. 인
천인지, 어딘지 하여간 그래가 이적지 그 집이 탔는지 어쨌는지 크
게 돼가 크게 발전했는데, 그 양반하러 가셨는지 모르겠다.
제1장. 3국 4가지 다른 이름의 김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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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도 내가 그거한께 자기 집에 도서관처럼 우리 구경시키고. 
‘김명원’이라고 써가 있대. “봐라! 이거 그럼 오빠 집이네” 하고, 내 
혼자서 새 집에 들어가면 죽는다 소리 듣고, 사할린 나왔다 하드만
은 그 집인가 내가 보고 있었죠. 근께 그 여성이 그리고 이쁘대요. 
우리 구경갔잖아. 처는 참 이쁘다고, 이쁘다고 말이 나오는 게 이쁘
다 해사태. 그래 본께 이쁘더만.
그래 내가 아이고 거기서만, 그거 짜는 거,  베 짜는 거 그거 있대. 
아이고! 저래가 9시간이나 기다렸구나. 내 혼자서. 다른 사람은 산너
매 보러 하고 나는 혼자서 댕기미 아이고, 새 집에 들어가면 죽는다 
소리 듣고. 이 집에 뭐 그래 안 살라고 나왔구나. 내 혼자서 인제 그 
여자가 다 듣고. 그렇게 해가. 그래도 아이 있다 하던데. “뱃속에 아
이 있는 거 놔두고 왔다 하던데, 아이는 마이 컸지요?” 내가 한께. 
아이고! 난리 때문에 아~가 떨어졌다고 그래. 해방 나는 해에 그 사
람 들어왔어. 봄에.
한국으로 들어왔어요?
한국이 아이라. 그 집에서 사할린 나갔잖아. 나가가 라디오 첫 방송
하는 데에 자기 처가 방송 나왔더래. 나왔는데 그 소리 듣고 자기가 
막 심장 그거 해가 죽어버렸잖아. 너무 놀랬지. 시방 오십년 넘어. 
오십 몇 년까지 그 사람 “안죽도(아직도) 살아가 나를 기다렸구나” 
한께 그 소리 듣고 술 한 잔 묵고 돌아가셨지. 이미 자기는 사할린
에서 다 가족을 형성하고 살았는데. 가족 있고 아들 있고 잘 살았지. 
그래 촌에 집 사는데, 우리 주인한테 돈 채가서 집 사가 그래 농사
도 잘하고 잘 살았지. 우리 주인은 돌아가신께 우리는 자꾸 망해가
고. 아이들 자슥 델꼬 내 혼자. 그 집에는 밭이 있은께 밭에서 묵는 
거라도 나오지.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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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망한 망향가(望鄕歌)
평소 사시면서 윗대 모친 어르신들은 참 우리나라 조국에 대한 그런 
생각이 남달리 있었겠습니다. 오고 싶어도 못 오고…?
그런께 그래 돌아가신 걸 내가 안 들으면 그 소리, 이 소리 안 들으
면 그거 하지만… 안들은 사람들은 같은 조선 사람끼리라도 화태까
지 간 것도 모르는 사람이 있어. 거기까지 갔다가 그거 해가 온 사
람들을 모르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도 있었는가 하고. 그런 
사람들도 있는데, 그거를 밉다고 내 귀는 다 들어오거든. 들어온께 
원망스럽지 뭐. 다른 사람들은 그런 거 몰랐는데, 왜 그거 모르나? 
아무도 말 모른다. 나는 왜 듣고 아노? 그래요. 내가 뭐 똑똑해서 그
런지 뭐… 왜 그런께 우리는 부모 따라서 왔다. 사할린에. 왜 강제모
집 온 사람들은 왜 안 델꼬 갔나 이기라. 그 사람들 무슨 죄가 있
노? 그래서 불쌍하고 배 고르고(굶고) 추버서 돌아가시고. 안죽도 
장개도 못가고. 열일곱 살 공부하는데 형님 대신으로 오고, 아버지 
대신으로 온 사람들 얼마나 많소. 그 사람들 억울하게 죽었잖아.
할머니 댁에서 장례를 치러준 그 분도 그런 사람 아닙니까?
그 사람도 모집해가 왔지. 모집으로 돈 벌어오께 집에 있으라 하고 
왔잖아. 그리고 혼자 있어도 이렇게 친하게, 우리 집 옆에 있던 할아
버지는 밤 낮에 우리 집에 살았잖아. 김해 김씨라고 근께. 그거 괄시 
못한단 말이요. 근께 우리 주인이 초상 치르고, 1년 제사까지 크게 
했어. 사람 오거나 말거나 내가 손이 커서 20킬로 찰떡 찌고 뭐. 술
도 뭐하러 그래 많이 샀겠어.
그 분은 혼자 사셨습니까?
혼자 살았지요. 우리가 다 해줬지. 3년 상만 내 안 해줬어. 후손도 
제1장. 3국 4가지 다른 이름의 김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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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분이라요. 아무도 없지. 여기 오이 형님도 있고 처도 있다 하데
요. 장개 가서. 사할린에서는 결혼을 안 하셨지요. 한국에 처 때문에. 
처를 열일곱 살짜리 얻어가, 그래 그 사람 나이 한 네다섯 살 우에
인 모양이요. 이쁘고 이쁜데 뭐 사준께, “살림 사는 데 쓰지요. 뭐 
한다고 이런 거 샀어요?” 하더래. 그 소리가 얼마나 이쁜지 아이구
요! “가서 내 돈 많이 벌어오께” 하고 나왔지요. 그래가 평생 결혼은 
안하시고. 
그 분은 몇 세에 돌아가셨습니까?
그 사람은 환갑 가까이 돼서 돌아가셨어. 그때가 67년도 돌아가셨
어. 그 분은 조선 땅에 두고 온 부인 때문에 재혼을 못했겠지. 근께 
67년도인께 행여나 행여나 고향가까 하고 뭐. 그런 분은 계속 고향
으로 올 거다 하는 생각으로 기다리다가 결국은 육십 넘도록 결혼을 
안 하고 사신 거지. 그래가 술로 세월을 보냈지. 결국 고향 땅 밟지
도 못하고 생을 마감을 그냥… 67년도에 돌아가셨으니까. 68년도요. 
67년도에 내 막내 낳았잖아. 가~가 한 살 넘어서 죽었어.  우리가 
장사지내준 그 사람은 여기 고령 매천리 있는 사람이야. 우리 양로
원이 있는 그 동네 사람이야.
결국 그 분은 고향도 못 와보고 돌아가셨네요?
그래도 내가 그 사람들 찾을라고 생각 안하고, 내 그 사람들도 모르
지요. 내한테 그 양반이 같은 김해 김씨라고. 우리 집에 들락날락 한 
것도 모르는데 그렇다 이 말이요. 나는 누구한테 우리 집에서 찾아
줄라고 생각 안하고, 그것도 없고 부모끼리는 모르지만 나는 그거 
거래가 없는 사람이요. 그래 어떤 때는 참말로 너무하다. 그래 가가
지고 돈 붙여준다고 밭을 팔아가지고 돈 붙인다 하더만 그것도 없고 
이것도 없고.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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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은 결혼을 안 하셨는데 돈 벌은 걸 고향에 부쳐주곤 했습니까?
나 그거는 모르요. 어떤 사람은 저금으로 그 돈 다 간다고 그랬는데 
저금도 받는가 몰라요. 돌아가실 때까지 그런 영감이 여기 하나 있
었어. 저는 뭐야? 전쟁 그거 하면 저금을 내려서 써라꼬. 저금통장 
맨날 가지고 댕기고. 일본 사람만 오면 “내 이렇게 해가 돈 못 받았
다” 보이고 하는 영감 하나 있었어. 그런데 돌아가셨어. 작년에 돌아
가셨나? 재작년 돌아가셨나? 돌아가셨어. 내 할 말 했으니 속이 시
원하다.
■ 2차례 한국관광, 기독교 입문
종교는 뭘 믿는 게 있습니까?
예. 교회 댕깁니다. 사할린에서부터 다녔어요. 사할린 한국교회에. 
자본국가는 교회 하지만은 러시아 국가는 그런 거 못 믿게 해요. 미
신 못 믿게 해요. 사할린에서는 사람들이 신(神)이라 카면 뭐 있나? 
일본시대에는 ‘카미사마’라꼬 제지공장 거게 ‘진자’라꼬 쪼꼼한 거 있
는데 거기 가면 설에나 가서 우리도 뭐 공부도 잘 하고… 그거는 했
지. 그거는 일본식이지요. 러시아에는 신 그런 거 없어. 러시아 사람
이 신이 없어. 러시아 국가가 되고부터는 가미사마 이런 거 다 없어
졌어. 없어요. 가미사마 그런 것도 없고. 그 사람도 저거가 지사(제
사) 지낼 줄도 모르고, 어떤 집에는 하대요. 모른께 자기네끼리.
교회는 한국에 오셔갖고 다니신 겁니까?
아니요. 거기서 94년도 시작하면서 댕깄지. 한국에서 선교사들이 나
와가 있었어. 그것도 어떤 할머닌데, 여~ 목사님한테 옆에 사람은 
제1장. 3국 4가지 다른 이름의 김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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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놀러가자 하더라고 그래. 그때 한국 갔다 왔으이 마음이 싱숭
생숭. 92년도 내 고향 왔다갔거든요. 맘이 그거 해가 이렇게 하고 
있는데, 가자요. 내보고 어디 놀러가재요. 놀러 가면 어디 가겠노? 
마~ 내 따라가면 된다고. 가니께 교회라. 그런께 가서 나는 서양 하
느님 안 믿는다고, 싫다고 한께 책을 딱 맡기네. 내한테. 성경책. 아
이고! 큰 일 났네. 싫다고 하지도 못하고. 또 내가 이렇게 하면 안가
면 또 그거 내 죄 맞을까봐 겁이 나서 그래 댕기기 시작했지.
그래가 뭐 이리저리 댕깁니다. 하나님 믿고 뭐. 내가 답답하면 “예. 
하나님! 예. 예수님!” 하고. 그러면 내 마음이 편해지거든예. 그러면 
내 마음이 편해지고. ‘우리 자슥, 우리 손자들 좀 도와주세요.’ 하고. 
내 마음이 편치.
■ 영주 귀국과 한국생활
한국에는 1992년도에 처음 나오셨습니까?
92년도는 관광단이 왔어. 관광단이 와갖고 97년도에 또 한 번, 두 
번 왔다 갔어. 관광단이. 92년하고 97년. 97년도에 우리 큰아들 데
리고 왔어. 근데 99년도는 아주 왔고. 99년도 우리는 나는 집을 안
산에 집 준다고, 안산에 올라면 영감 델꼬 오래. 없는 영감 우째 하
노? 어떤 사람은 영감 아무나 데리고 오고 하고. 그래 와가 집 받아
놓고 싸우고 갈리는 사람 있고, 그대로 사는 사람 있고 그래요. 99
년도는 내가 그때 육십 일곱인데, 영감하나 82살짜리 내보고 같이 
가자하데. 농담으로 “예. 갑시다!” 해놓고는 가마이 생각하이 아이
고~ 이거 뭣이 이렇게… 그래도 여자끼리 같으면 말이라도 하지만,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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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만 그래도 나이 많아도 남자는 남자 아이요. 아이고 내 싫다. 그래
가 안산에는 못 갔어.
어디로 갔습니까?
그래 과부들이 오는 데에 홀애비들이 있는 데에 여기가 과부 오는 
데가 아니요. 그래 올라고 자꾸 그거 했지요. 방 얻을라고, 얻어가 
우리 아이들도 오고 가고 할라고 한께 그래 잘 안 돼. 한국에 온 것
도 15년이나 됐네. 잘 왔는지 어쨌는지 자슥들 내삐리고 온께 뭐.
남해도 고향에서 친척들이 여기 한 번 오신 적 있습니까?
친척이라고 누가 있겠어. 오는지, 가는지 만약에 있다하면 나는 모르
고 있어도 그 사람이 찾아주면 친척이지 뭐. 누가 찾아오는지 가는
지 내가. 사촌도 있을 게요. 아마. 내가 92년도 왔을 때 우리 할아버
지가, 작은 아버지가 둘이 있잖아요. 우리 아버지하고. 근데 그 양반
은 작은… 근께 큰 아버지한테 자슥은 없었어. 근데 우리 아버지가 
두 번째 집인데, 아버지 하나요. 여동생, 누님도 있었는데, 우리 아
버지가 큰 아버지 집에 양자로 갔어요. 양자로 갔는데 이 집에도 없
은께 실망을 한 기라. 그렇게 됐어. 근데 세 번째 작은 아버지 집에
는 아들이 서이라. 근데 그 사람들 그래 나오는데 일본에 있대.
그 사람들이 사촌 아닙니까?
사촌이지요. 일본에 사는지? 어데 갔는지 왔는지 내가 알아볼라고도 
안하고. 내가 만약에 돈이나 많고 이러면 찾아 나서고 이러겠지. 그
렇지 않은 바에야 찾아 댕기면 돈 얻으려고 왔는가 하지 뭐. 남해 
고향이라 해도 우리 거기 덕신마을 거기만 내가 왔다 갔다 했지. 다
른 데는 안 가봤어. 그리고 이순신 장군 그거 해놨잖아요. 우리 여기
서 버스 타고 한 3번 갔다 왔어요. 또 다른 데는 어덴가? 미국마을 
거기 올해 한 번 가보고. 독일마을. 내는 우리 아버지 절에 모신다고 
제1장. 3국 4가지 다른 이름의 김옥저
 
129
미국마을에 한두 번 지나가보고, 다른 데는 안 가봤어.
덕신리 태어난 마을에는 가보셨습니까?
예. 거기 가니까 날 알아보는 사람 있지. 우리 집이 밑에 있는데, 내 
여기 살았는 내 고향인데, 내 ‘옥조’라고 하는데, “아이고! 옥조 안
다!”고 해요. 내 얼굴을 본께 내 얼굴을 보고 안데. 알아보데요. 그
렇게 알아보는 분이 없지. 그 사람밖에. 그린께 내가 여기 와가지고 
6년 만에 내 고향 찾아갔어. 내 여기 와가지고 내 고향 가봐야 되는
데, 그래가 내가 교회 댕기면서 만날 이래 한께 목사님이 하는 말
이… 아~ 첨에 한 목사는 내가 고향 말만 했지 가보자고 안하고. 두 
번째 목사님은 “어이구! 가보지요!” 그말 하자 “오랜 만에 한번 갑시
다” 해가지고 갔지요. 그 양반하고 가서 내 고향 찾았어. 6년 만에. 
99년 와가지고. 근께 남해라꼬 내가 이렇게 구경도 못해봤어. 문어
도 내 그렇게 흔한 문어도 못 먹어봤고 그래요.
남해 고향에는 한국에 오고 나서 가보셨습니까?
해마다 추석이면 갑니다. 가서 우리 아버지 그거 내 살던 집이 터도 
있대요. 덕신마을에. 있는데 어떤 사람이 가새(가)에 집 짓고, 질
(길)을 이렇게 해가 마늘 밭을 맹글어놓고, 아이고~ 내 추접어서 내 
그거 찾을라 하다가 뭐. 아버지, 어머니 산소는 사할린에 그대로 있
고. 내 할아버지지요. 할아버지는 3형제 있었어요. 근데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가 제일 큰 아들이지요.
생전에 아버지, 어머니는 해방 후에도 고국 땅을 못 밟고 돌아가셨
지요?
나는 고향땅도 밟아보고 이렇게 나왔지만,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불
쌍한 사람들이요. 그 시대에 한국에 어떻게 옵니까? 살아생전에 고
생, 고생하고 돌아가셨어. 그래도 우리 아버지는 일간에서 좀 올라가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130
 
고 했은께 우리 아버지를 ‘영웅’이라고. 우리 아버지를 갖다가 그때
는 양로원이라고 없었거든요. 조금 편안한 데에 보냈잖아. 노후에. 
그래가 조금 거기서 살았어. 사우 집에 해봐야 그렇지 하면서.
시간은 주로 어떻게 보냅니까?
하루에 아침에 일어나면 가서 이거 청소하는 날은 청소하고, 밥 먹
으러 갔다 와서 연속극 시작하지요. 여덟시에 그래 연속극 두 가지, 
세 가지 보고. 또 남은 시간 어디 간다하면 가고, 그렇지 않으면 또 
한숨 자요. 한숨 자고 또 뭐하는 그거 있다 하면 가고 그래가 지내
지요. 우리 취미 뭐 있어. 연속극밖에 없지. 젊으면 나가서 이쁜 총
각하고 연애나 한다 하지만 나이 먹어서 그런 것도 없고. 이런 것도 
없고 또 어데 영화 보러 간다 해도 늙어서 고단해서 못가고. 어디 
뭐 사면 돈이 있어 가나. 뭐 어디를 가나 그렇지 뭐. 장날이라 하면 
가서 오뎅이나 하나 사먹고 오고.
장날 구경 한 번씩 가십니까?
한 달에 한 번, 두 번 가요. 가면 오뎅이나 하나 사먹고. 다른 거는 
다 여기서 준께 뭐. 여기 계신 분들은 여기 와서 다 만났지요. 사할
린에서 알았던 분이 아니고. 이 사람도 다른 데에 있었고. 한 분은 
사할린에서 왔지만, 나기는 일본서 났지요.
■ 제2의 디아스포라
우리 아이들이 불쌍하다 말이요. 그렇잖아. 안산 같은 데는 두 칸짜
리 얻은 사람들은 아이들이 손자들하고 한 달 놀다가고. 방학 때는 
할매 집에 와서 놀다가고 하는데, 나는 뭐 아이들 와도 앉아 놀데도 
제1장. 3국 4가지 다른 이름의 김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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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잖아. 그래 밥 해먹일라 해도 먹을 데도 없고. 그린께 불쌍하단 말
이야. 그린께 우리 손자가 “할매 집에 갈란다”고. “할매 집에 갈란다”
고 그런대. 막내아들 3학년 땐가 내 갈 때 “내 할머니하고 같이 간
다”고. “집이 없는데” 카니, “집이 없으면 어떻게 사는데…?” 근께 이
런 데서 산다는 소리 못하고. 그러니까 ‘바깥에 사는가? 어데 사는
가?’ 하며 울고불고 난리 나고.
안산은 시설이 넓고 좋은 모양이죠?
그때 안산밖에 없었잖아. 그래가 조금 한 5년 만에 이렇게 불쌍한 
사람들 집 지어놓고 주어서 그랬지. 그래도 내가 갈라 했는데, 시방 
나이 묵고 얻어 놓으면 또 뭐해. 그래 얻어 놓으면 좋지 뭐. 내가 
90살까지 살란가? 85살까지 살란가? 그 동안이라도 아들이 한 번씩 
놀다 가면 좋지. 또 여기도 말이 많네. 혼자서 살면 뭣이 어떻고, 뭣
이 어떻고. 그 소리 들은께 또 아파서 혼자 누버있고. 뭣이 또 이렇
게 생각하고, 이래 생각하고 그래요.
한국에 나온 뒤에 사할린의 자녀들은 1년에 한 번 정도는 나옵니까?
내가 가지요. 가면 한 달이요. 여기서 가자고 하면 가는 달에 가야 
돼. 같이 합동으로 갑니다. 5월 달에 가면 고사리도 뜯어오고. 나무 
거리라도 뜯어가 말리가 가져오지만, 8월 달에 가잖아.
제2장. 40년간 사진기술자로 살아온 권오석
- 부친의 징용으로 운명 지워진 사할린 이주 -
1933년생 권오석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134
 
권오석 연보
ㆍ1933년(1세) - 경상북도 선산군 출생
ㆍ1942년(10세) - 먼저 간 아버지를 따라 사할린 이주
ㆍ1946년(14세) - 중학교 2학년 마침
ㆍ1947년(15세) - 철공소 입사, 6년 근무
ㆍ1954년(22세) - 사진관 입사, 40년 근무
ㆍ1958년(26세) - 손명자와 결혼
ㆍ1990년(68세) - 처음으로 한국 방문
ㆍ2007년(75세) - 아내 사망
ㆍ2012년(80세) - 한국 영주 귀국, 대창양로원 거주
ㆍ2014년(82세) - 현재 고령 대창양로원 거주
1. 10세 때 아버지 찾아 사할린 이주
존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권오석. 다섯 오(五)자, 주석 석(碩)자. 내년에 팔십입니다. 올해 79
세. 생년은 33년 6월 21일생입니다. 내 고향은 선산이라. 경북 선산. 
옛날에는 선산군인데, 무슨 면인지 그거는 모르겠어요. 촌에서 났습
니다. 한번 갔다 왔어요. 마을 이름은 모르겠어요.
한국에 태어나셔가 가신 겁니까?
예. 10살 때 사할린 갔지요. 그때가 일제시대지요. 아버지가 오사카
에 있다가 사할린에 갔지요. 그래 우리 어무이하고 동생은 갔지. 아
버지가 사할린에 먼저 들어가셨지요. 그 당시에는 징용으로 끌리가
다시피 많이 갔지요. 아버지도 그래 갔지 뭐. 모집으로 가고 옛날에 
제2장. 40년간 사진기술자로 살아온 권오석
 
135
그래 안 했습니까. 모집으로. 아버지 형제 중에 아버지만 갔어요. 아
버지만. 아버지는 일본에서 오사카 거서 좀 살다가 사할린에 갔어요. 
아버지는 탄광 일을 사할린에서 한 30년 일했어요.
형제는 몇 분입니까?
우리 형제가 8남매입니다. 아버지가 한국에서 우리들을 모두 낳고 
간 게 아이고요. 내하고 동생 하나 놓고 갔지요. 사할린 가서 또 6
남매를 낳으셨지요. 내가 장남이고 밑에 동생이 남자. 그 밑에도 아
들. 네 번째가 아들. 그 다음에 여동생, 그 다음에 또 여동생…. 남자 
형제가 위에 네 명이 고 그 밑에 여동생이 두 명이 있고. 남자가 5
명. 내까지. 막내는 남동생이요. 5남 3녀
열 살 때 사할린 가실 때 아버지가 데리고 갔습니까?
우리가 찾아갔어요. 사할린까지. 그때 가던 기억이 조금 납니다. 거 
뭐 여게서 배타고 일본가가지고 기차타고 사할린까지 갔지. 배 탔지
요. 부산에서 저게 일본 땅으로. 나는 일본 땅에서 홋카이도에서 사
할린까지 갔지.
열 살 땐데 기억이 나네요?
그때 남동생하고 나하고 어머니하고. 세 사람. 갈 때 고생 마이 했어
요. 그때 춥고 뭐 겨울에 갔으니까요. 우리 아버지 찾아갈 때 가고 
사할린 도착할 때 전쟁 시작했어. 41년도 전쟁. 대동아전쟁. 가던 해
에. 사할린은 일본에서 저 위에 아닙니까. 소련 쪽. 저기 일본으로 
해가지고 기차타고 북해도로 해가이고. 날씨가 거기 춥습니다.
사할린에서 아버지는 어떻게 살고 계셨습니까?
그냥 탄광 일하고. 뭐 석탄 캐는 일이지요. 그 다음에 돌린스크. 오
래 살다가 부모들 돌아가시고, 아들이 유즈노사할린스크 사는데. 수
도. 그래 거 있다가 인제 여기 나왔지. 우리 일 안하시고 그냥 집에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136
 
있다가 그냥 돌아가셨어. 어머니는 그냥 살림만 사셨지.
2. 사할린의 학교생활
열 살 때 사할린 가셔서 학교는 안 들어갔습니까?
댕겼어요. 일반학교 드가가지고 중학 끝났어요. 학교 이름은 기억나
지 않습니다. 일본인 학교 그때 국민학교지요. 7학년 했어요. 중학교
는 한 2년 다닌께로 그 다음 전쟁 끝났지.
일본인학교 같으면 다 일본어로 했습니까?
예. 학교 다닐 때 배운 과목 같은 것도 기억나지요. 거 뭐 수신, 산
수, 어문, 역사 이런 거 다 배았습니다. 그때 나는 일본학교 있다가 
손을 들고 넘어 가이까네 러시아학교 또 드갔지요. 그때 나는 러시
아학교 7학년에. 일본학교 몇 년 할 때 러시아학교로 바뀌었지요. 
그때 8학년 댕기다가. 중학과정 때 러시아학교로 바뀌었다고 보면 
되겠지요.
러시아 세상이 되고부터는 러시아말을 배웠겠습니다?
예. 나는 노국말도 하고, 조선말도 하고. 소련말, 일본말도 하고. 3가
지. 지금도 모두 대화를 할 수 있어요. 그러면 8학년까지 중학과정
을 2년 마치니까 그때가 1946년도지요. 해방이 1945년도 아닙니까? 
일본사람들이 손을 항복을 든 게. 그 다음에 러시아 땅에서 러시아
말 배웠지.
그때 일본 땅에서 러시아 땅으로 넘어갈 때 상당히 혼란스러웠습니
다. 곤란했어요. 학생 입장에서도 그랬고 다 곤란했어. 그때는 살기
가 바빴어. 일본체제에서 러시아체제로 넘어갈 때 학교 같은 경우
제2장. 40년간 사진기술자로 살아온 권오석
 
137
는… 학교는 일본학교일 때가 우리 조선사람 다 뽑아가이고 조선학
교로 보내지. 그래 조선학교 만들었지. 일본사람하고 다 섞여가 공부
했지.
3. 철공소 6년 근무하다 사진관으로
학교를 마치고는 어떤 일을 했습니까?
학교 마치고 내가 센방. 센방은 기계가지고 그거 하는 거. 철 깎는 
거. 철공소지. 그거 한 5, 6년 하다가 그 다음에 사진을 했지. 사진
을 한 40년 했어요. 사진 촬영하고 현상하고 이런 일. 나의 주 직업
은 사진기술자라 보면 되겠다 그지요. 센방 일할 때 첨엔 말단 종업
원으로 하루 여덟 시간 일했어요.
센방은 공장입니까?
공장이었어요. 철 깎는 거. 기계 돌리가 철 깎는 거. 철을 깎으면 그
걸 어디다 쓰냐면 그 다음에는 공구 만들지요.  중학교 때 그 기술
을 익힌 게 아니라 그때는 일 안했지. 다 끝마치고. 월급은 그때 
150엔. 그걸로 당시 양식을 산다 하면 얼마나…? 모르겠습니다. 그
때는 먹고 살기는 살았어. 센방 공장 이름이 기억이 안나. 기계에서 
자동차 부속품 만들고 그런 거 하는 거지.
센방 일을 하다가 사진기술자로 직업을 바꾸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그거는 내가 그림을 잘 그맀단 말이야. 사할린사람 날 불렀어요. 나
한테 오라고, 그만큼 돈 더 주고 일하라꼬 그래 배아가지고 우리 일
하다가 그 사람 죽고 내가 일했지. 사진은 그냥 찍는 건데, 그림 그
리는 거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교? 왜 그르냐 하면 사진 찍고 하면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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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미술 기술이 있어야 돼요.
4. 아내 손명자와 결혼, 5남 생산
결혼은 몇 살 때 하셨습니까?
스물여섯 살. 이때는 센방 일이 아니고 사진사 할 때. 조선사람 하고 
한 거지. 손명자. 살다가 돌아갔어요. 5년 전에. 처가 집안도 그때 
우리 아버지처럼 한국에서 가신 분입니다. 그 사람들은 우리 처는 
‘유두모리’라꼬 거~서 살았어요. 여기도 사할린이지. 당시 장인도 그
냥 탄광 일했고.
그때 중매하셨습니까?
예. 동네 같이 사는 사람들이. 내 처하고 나는 한 50년 이상 살았어
요. 조금 전에 돌아갔지. 5년 전에. 아들만 다섯을 낳았어요. 5형제. 
인제 큰 아들은 러시아 큰 땅에 있고, 두 번째가 사할린에 있고, 세 
번째가 사할린에 있고, 두 번째가 집에서 아~를 키우미 삽니다. 딸 
없어
사진 일을 40년 하셨으면 돈을 좀 마이 벌었습니까?
예. 벌었어요. 마이 벌었어요. 아들들도 공부 하고 싶으마 대줘야지. 
저는 거~서 같이 사진 일하고, 처는 옷 같은 거 바지 만드는 거 재
봉사로 일했고. 같이 일을 했지. 처도 같이 불어있는 공장에서 재봉 
일을 했지요. 아들들을 키울 때는 일을 못하고, 다 키워놓은 후에. 
자식들은 한국말 가능합니까? 
학교는 모두 러시아학교 다녔고. 근데 한국말은 몰라요.  나하고 처
는 한국말로 소통을 하지요. 가~들 아들들은 노국말 써요. 러시아말
제2장. 40년간 사진기술자로 살아온 권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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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학교서 그러고 집에 들어와서도 한국말 안 써요. 노국말 써요. 
그러이 전혀 한국말 못합니다. 아들 다섯 명 모두.
아드님 분들 결혼은 한국 사람하고 했습니까?
제일 큰아들은 러시아인, 둘째 아들도 러시아인하고 결혼했어요. 세 
번째 아들은 아직 장가 안 갔어요. 넷째, 다섯째도 안 갔어요. 아들
들은 한국말도 할 줄 모르고, 러시아 며느리하고 결혼했고. 어찌 보
면 러시아사람 된 거나 마찬가지지.
일상생활에서 식사는 어떻게 해가 드셨습니까?
조선음식 보통 해묵지. 쌀 가지고 밥 하고. 며느리는 러시아인이지만, 
조선 음식 다 먹습니다. 시어머니한테 배아가 그러지요. 조선음식을 
해먹는 재료도 거기 다 있어요. 김치도 담궈 먹고. 떡은 없어요.
5. 제사의례와 놀이
장남이므로 아버지, 어머니 제사 등은 어떻게 지냅니까?
제사는 한국 지내던 식으로 지냅니다. 우리 할아버지 지사하고 아버
지, 어머니 지사는 두 번째 집에서 아들하고 나하고 지내지. 우리는 
집에서 지내고 또 산소에 가서 거~ 음식 채리 놓고 절하고 그렇게 
했어.
사할린에서 한인들은 산소는 어떻게 만듭니까?
공동묘지에. 봉분을 만들고 하지요. 크게 만들지는 않지만. 러시아 
사람들도 그렇게 하고. 매장을 하지요. 조상 산소는 매년 찾아보죠. 
정원 초에 가고 또 8월 보름날 가고. 근데 사할린 가면 사할린 식으
로 또 해야 되지요. 아부지, 어무이 지냈다 하고. 또 사할린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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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 지내고.
설 명절 제사 지냅니다. 아침에. 한국식이지요. 강신이니 참신이니 
뭐 초헌, 아헌, 종헌 이런 절차는 몰라요. 그냥 음식 채리 놓고 절하
고 그렇게 지사만 지내고.
그래가지고 내가 10년 전에 90년도에 첨으로 우리 여게 고향에 왔
습니다. 그래서 만내보고. 그때는 아직 내 처도 살아있었고. 90년도 
내 왔다 갔어요. 거게는 증조부모, 고조부모 산소 다 안 있겠습니까.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 공동묘지만 가보고, 다음에는 못 가봤습니다.
사할린에서 한국 사람들하고 만든 단체라든가 모임도 있습니까?
예. 노인회라든가 단체가 있지요. 사할린에는 8월 보름날에 씨름도 
하고, 그런 거 하고 놀고. 1년에 한번씩. 씨름만 하고, 그 다음에 놀
제. 놀고. 윷놀이도 하고. 쫓아 댕기는 거 하고. 달리기. 그런 거죠. 
여러 가지. 어린 아이들 거~는 연 날리기 안 해요. 팽이치기 그런 
거는 해요. 제기차기도 하고요. 이런 놀이가 우리들 세대 어릴 때 하
던 건데, 일부는 후대까지 계속 이어지기도 했지요.
6. 2012년 영주 귀국
처음으로 고향에 가시니까 어떻든가요?
아! 좋아요. 거 가인께로 90년도 가니께로 쪼맨할 때 같이 놀던 동
무 만났어요. 하이고! 나보고 이름 부르면서 “니 누구 아이가? 어째 
왔는가?” 하면서요. 거서 그 집에서 저녁 얻어먹고 그래 나왔습니다. 
그때 선산 고향 갔다가 다시 사할린으로 돌아갔었지요.
영주 귀국하신지는 몇 년쯤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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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죽 1년 안 됐어요. 2012년 16일 12월 달에 왔어요. 12월 달. 여
기오이 좋네요. 묵는 것도 아주 풍부하고 좋아요. 여기 사람 중에 사
할린에서 같이 사시던 분은 없어요. 사할린에서 오신 분들하고는 사
할린 생활 얘기하면 다 통해요. 어떤 일을 하시다 오신 분들인지는 
모르겠어. 그런 이야기는 안 나눴어.
사할린에는 살기가 어떻습니까?
아주 춥기는 해도 별 문제없이 지냅니다. 우리 조선사람들은 우째 
해가지고 러시아사람보다 더 잘 살아요. 모두 일도 잘하고 아주 직
업도 좋고. 나도 사진사로 40년 했으므로 사진 기술도 아주 좋습니
다. 허허허! 그 사람들은 우둔하고, 뭐 별일 없어요. 러시아 사람들
하고 다 섞여 살아야 되지요. 그래도 큰 어려움 같은 건 없어요. 민
족적인 차별이라든가 그런 거 없어요. 다 사할린에 다 와서 찍고, 그 
다음에 좋은 거 있으면 음식 먹으라 하고 좋았어요.
해방이 되고 부모님들이 한국으로 나오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했지요. 그러나 못 왔어요. 그때 조선사람들은 우리 가족만 못 나온 
게 아이고 다 못 나온 거 아닙니까. 여~ 길이 열린 기 90년도 열맀
지. 그런 거에 대해서 당시 상당히 낙담도 하고 그랬지. 부모 세대들
은 모두 한국으로 들어오지도 못했지요. 이제는 길 열리고 나서 거
기 있는 사람들 전부 여기 와 있지 않습니까.
영주 귀국하실 때 사할린에 있는 자식들은 어떤 반응이었습니까?
아들들이 가지마라꼬. 가가지고 나쁘게 대접하면 다부 오라꼬. 그래
도 나는 여~ 있겠다고 했지요. 자식들은 가지마라고 했지만, 거기 
있어봤자 동무도 다 죽고 없어요. 혼자 거~ 촌에서 있으마 살았으
마…. 여기 오니까 사람들 많네요. 와 보이께로 좋네요. 내 여기 온 
뒤로 아이들은 아직 한국에 다녀가지 않았어요. 서로 연락은 하고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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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
사할린 사실 때 일본 땅에도 다녀왔습니까?
예. 일본에 친척은 없어요. 여행 다녀왔었지요. 러시아 큰땅 쪽으로
도요. 큰아들이 큰 땅에 있어요. 큰땅에 유코스키 거기 살고. 두 번
째, 세 번째는 여기 사할린 살고. 하나는 둘째는 거~서 상점 보고 
있습니다. 장남은 대학교 나와가이고 유코스키 살고.
5남을 두셨는데 공부는 얼마나 시켰습니까?
다 대학교 나왔지. 공부시키기가 힘들었어요. 학비가 국가에서 마이 
나오긴 해요.
사할린 생활하시면서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이었습니까?
힘드는 거는 워낙 많은께. 그저 없는 거 구해오는 게. 그라고 살 길
이 없어요. 감자 숨궈 먹고. 사할린 감자 좋아요. 거~는 고구마는 
없어요. 채소는 배추, 무 그거는 있습니다.  고추도 있고. 과일들도 
있습니다. 그거는 포도는 없어요. 배도 없고. 호박은 있어요. 한국에 
나는 과일들이 거기는 잘 자라지 않지요. 인제 사할린 땅에서 나는 
그런 과일들이 있고요.
사할린에서 군대는 안 갔습니까?
안 갔습니다. 나는 몸이 약해서 군대훈련 안 받았어. 군에는 월급을 
받고 하는 게 아이요. 의무적으로. 신체검사도 하는데, 나는 몸이 안 
좋아서 안 갔지. 동생들은 군에 갔다 왔어요. 러시아 군대. 2년 동안.
7. 40년 사진관 근무, 최고액의 연금 수령
나는 사할린에서 연금 최고로 받습니다. 나는 일을 오랫동안 했습니
제2장. 40년간 사진기술자로 살아온 권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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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남 놀 때도 일했으니까. 그린께 최고로 받아요. 아마 러시아 돈
으로 1,600원. 다른 사람은 800원, 900원 받는데 나는 두 배 받아
요. 나는 일 마이 해서. 오래 일하는 것도 또 연금 마이 나옵니다. 
그래가이고 내가 일 안하고 그냥 돈만 타먹는 게 벌써 20년 됐어요. 
그게 연금이지요. 연금 20년 타먹었어.
한국도 연금제도가 있지요? 자기가 일을 많이 해서 오랫동안 돈을 
많이 해마다 다달이 넣으면 타먹을 때 마이 타먹고 그렇잖습니까? 
같은 원리지요.
한국에 영주 귀국해 계셔도 연금이 나옵니까?
예. 아들들이 타지요. 우리는 안 넣어요. 국가에서 나옵니다. 그냥. 
내가 왜 다른 사람보다 연금이 많으냐면, 일을 오래 했고 일을 마이 
해서지요. 내 여~ 그때 그거 월급 타고 일 할 수 있었어요. 88년도
부터 나는 연금 탔어요. 돈 국가에 나오는 거.
어르신이 사진관을 운영하신 거 아닙니까?
그냥 거기는 공장이 있어요. 벌인 돈을 정부 당국에 다 바치지. 바치
고 월급 타 묵지. 내가 개인사진관을 하는 게 아니고. 사진 공장에. 
거~ 여마 돈 나오지요. 거기 우리 일하는 데는 사진질이나 이발하는 
사람들 또 옷 같은 거 만드는 사람들 다 한군데에 있어요. 나는 사
진 일하마 내 밑에 일하는 사람 있단 말이야. 시키가지고 월급을 더 
마이 타지. 나는 관리자택이지.
40년 근무하셨으면 직위도 상당히 높이 올라갔겠네요?
예. 최고로 받았어요. 공장이름이 아이고 우리는 사진 찍는 사람과 
머리 깎는 사람 한 위치. 또 양복 짓는 사람, 시계 고치는 사람 다 
있어요. 한 건물 안에 칸칸이.
그런 게 마을마다 있습니까?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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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요. 나는 도시에서 일했어요. 돌린스크 거기. 도시입니다. 돌린
스크 커요. 인구가 한 몇 십만 됩니다. 많습니다. 사진 일하고 이발
하고 그런 공장이 같이 있는데 그 건물은 러시아 국가 거지요. 총 
지배인이 있고. 사장. 난 사진부서에 최고 관리자였고, 밑에 종업원
은 한 3명 있었어.
월급만 받고 나머지 이득은 전부 국가로 들어가는 겁니까?
다 바치마 국가에서 월급 나옵니다. 이게 사회주의 국가체제지요. 여
기는 자기 개인이지 않습니까. 거~는 공산주의. 다른 공장도 다 그
런 식으로 운영되지요. 개인재산은 없어요. 없어. 거~는 개인 거는 
없었어.
8. 사회주의 체제의 특성
땅, 토지는요?
토지는 국가토지지. 내가 여기 집을 지어 산다고 할 때 거기 집터에 
대해서는 세금을 물리지. 땅은 국가 꺼고. 그래 다 얼마만큼 물러라 
하면 국가에 나옵니다. 1년에 한 번씩 그거 물어야 돼요. 세금. 그 
집터 위에 있는 집은 내 꺼지. 그러나 텃밭하고 땅은 국가 거지. 내
가 여기 살다가 다른 데로 이사를 한다. 그럴 때 그 집은 팔고 가야
지. 그거는 개인적 재산이 되고. 땅은 일체 개인 것이 없다는 말이
지. 땅은 안 줘요.
집에서 먹는 그런 거는 어떻게 조달을 합니까?
월급 타 가이고 그거 가지고 사지. 시장에 가서 사다가. 감자 같은 
거는 자기가 밭에서 숨궈서(심어서) 묵고. 숨궈서 먹을 수 있는 개
제2장. 40년간 사진기술자로 살아온 권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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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땅들이 조금씩 있지. 땅 값만 물마 심궈 묵는 거 아이라. 개인이 
숨궈 먹으려는 땅도 한도가 있지. 대략 여기서 저까지 되지. 숨가 가
지고 남는 거는 팔아 묵고.
농촌 땅은 어찌 됩니까?
농민들도 한가지지. 농촌 땅도 국가 땅이지요. 그러나 농사지으마 얼
마만큼 주지. 땅을 좀 마이 줍니다. 사할린은 러시아 사회주의 국가
니까 큰 공장 건물이니 시설물, 땅 이런 거는 다 국가 꺼고, 그걸 이
용하는 경우에는 허락받아 세금 내고. 텃밭 정도 가꾸는 거야 그런 
거 없이 이용할 수 있지. 그거는 러시아 땅에는 크게 마이 못 가져
요. 크게 안 줍니다.
도시에도 개인 땅을 가질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많이 있어요. 개인 집에 딸린 텃밭 정도는 그래 합니다. 
시장에서 상인들이 물건을 팔고, 일반인들이 가정에서 생활하기 위
해서는 채소를 사 먹어야 하지요. 시장 상인들은 집체적으로 하는 
것 말고는 팔아 이문이 생길 경우 개인 돈으로 합니다. 그거는 자기 
땅 거~서 농사지은 거는 그 사람이 먹어요. 그런 거는 마음대로 팔
아가 돈을 만들고. 그러이 사할린은 부지런한 사람은 잘 삽니다. 우
리 한국 사람들 또 부지런하지 않습니까.
9. 민족 간 혼인, 한국어 문제
며느리들이 러시아 사람인데, 자식들에게 배우자 선택 시 조선 사람
과 결혼하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146
 
그런 말 안 들어요. 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마는. 자식들은 
한국말도 모르고 러시아 사람 된 기나 마찬가지라. 아들들은 한국에 
갔다 왔어요. 여~ 선산 고향 갈 때 같이 왔었습니다. 뭐 말도 안통
하고. 친척들하고. 인제는 좀 갈치지. 조선말 갈치지. 내가 갈치지. 
내가 이제 여기 있지만, 또 갔다가 여~ 오마 조금씩 갈치지.
어릴 때부터 집에서는 조선말을 쓰지 않았나 생각되는데요?
안 써요. 왜 어릴 때부터 자식들한테 조선말을 가르칠라고 안 했냐
면요. 사할린 그기는 조선말을 쓰는 사람이 없는데. 다 노국말 쓰지.
사할린에서 조선말을 할 때는 언제였습니까?
조선말을 할 때는 동무들이나 하고 또 처 있으면 처하고 하고. 늙은 
사람들이나 하고 하지. 젊은 사람들은 몰라요. 내가 어릴 때 아버지, 
어머니하고 같이 가족을 이루고 살 때는 집 안에서 조선말을 다 했
지. 나하고 동생은 조선말 했습니다. 사할린에서 내 동생이 6남매가 
더 났지 않습니까. 사할린에서 태어난 동생들은 한국말을 몰라요. 한
국에 태어나가지고. 사할린 같이 간 밑에 동생하고는 한국말이 되고. 
그 동생하고는 두 살 차이나요. 사할린에서 죽었어요. 조카들도 많습
니다.
어르신 아버지는 몇 세에 돌아가셨습니까?
칠십 다섯 살. 칠십 다섯 같으면 사할린에서 수명이 뭐 보통입니다. 
어머니는 칠십 아홉에 돌아가시고. 내가 장님이니까 어르신하고 같
이 살았어요. 모시고. 이분들, 윗대 아버지와 어머니는 생전에 고국 
땅을 못 밟아봤지. 못가 봤어요. 그때는 허가 안 해가지고 오질 못했
어요. 오고 싶어도 그러지 못했으니 한편으론 가슴에 많은 한이 있
었겠지요. 와보고 싶어도 못 와보고. 처음에 일본으로 해가 사할린 
가고 나서는 한국에 있는 형제자매나 이런 사람들 하나도 못 봤어. 
제2장. 40년간 사진기술자로 살아온 권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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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그런 말씀을 하면 뭐 합니까. 가슴 속에만 묻으시고 사셨지.
편지 왕래는 하셨습니까?
편지는 했어요. 우리 작은아버지는 아직 한국에 살고 있어요. 지금 
연세가 구십 세 살인데 [경북] 상주에 살고 있어요.
아버지는 노후에 어떻게 사셨습니까?
탄광 일 30년 하시고 밭에 일하고. 우리 밭 커요. 감자, 채소 같은 
거, 무시 같은 거 이런 거 숨궜지요. 배추도. 그런 걸 생산하면은 집
에서 먹고 남는 거 시장에 팔지요. 곡식은 없어요. 그거는 안 해요.
사할린에도 한국처럼 쌀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사할린 사람들이 주로 먹는 거는 감자 그런 거 주 묵지. 
쌀은 안돼요. 쌀은 큰 땅에서 가져와서 먹고. 사할린에서도 조선 사
람들은 전부 쌀을 먹지.
제3장. 정신대 피하려고 사할린으로 시집간 곽병수
- 결혼 하루 만에 사할린 이주 -
1924년생 곽병수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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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수 연보
ㆍ1924년(1세) - 대구 출생
ㆍ1924년(1세) - 달성군 현풍 이주
ㆍ1941년(18세) - 러시아 사할린 결혼 이주
ㆍ1942년(19세) - 장남 출생
ㆍ1945년(22세) - 장녀 출생 
ㆍ1986년(63세) - 한국 첫 방문
ㆍ2014(91세) - 한국 영주 귀국, 대창양로원 거주
1. 정신대 피하려고 사할린 결혼 이주
할머니는 현풍 곽(郭) 씨입니까?
현풍 곽씨입니다. [달성군] 현풍에 곽 씨가 많이 삽니다. 저는 소래 
곽씨데이. 나는. 그런데 파가 너무 많아 가지고 갈랐습니다. 현풍 곽 
씨, 소래 곽씨로 있습니다. 나는 현풍 곽씨입니다. 원래는 현풍 곽씨.
태어나신 곳은 어디십니까?
대구서 태어났는데 현풍으로 왔답니다. 나는 그것도 모릅니다. 대구
서 태어났답니다. 무슨 동에서 태어났는지 그것도 모르고, 7일 안 
지내서 현풍으로 왔답니다. 현풍에 와서는 구지면에 살았어요. 달성
군. 마을 이름은 오리. 거기서 그러면 커서 내가 열일곱에 여~(사할
린) 왔습니다. 열여덟에 사할린에 왔습니다.
왜 사할린에 가게 되셨습니까?
사할린에 거~ 일본 놈들이 처녀를 다 뽑아들였단 말이여. 우리 아버
제3장. 정신대 피하려고 사할린으로 시집간 곽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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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가 그 전에 민(면)에서 일했단 말이여. 그래 민에 사람들이 “너거 
딸은 와 안 보내고 남들만 이래 쳐 였노?” 이러더라네. 그러인께 우
리 아부지가 막 가학중에(갑자기) 해가 보냈어. 
우리 종조부(從祖父)가 일본에 있었어요. 일본에서 “빨리 해가 보내
소!” 그래놓으니 일본 왔습니다. 그래 화태(樺太)로 시집왔습니다.
아버지가 보냈네예?
예. 아버지가 일본 놈한테 안 뺏길라꼬. 열일곱, 열여덟 되면 막 잡
아 올렸거든. 일본 놈들이. 집집에 와가지고 써가지고 다 보내뿌지.
그러면 한 동네에 잡혀간 사람도 있었습니까?
있습니다. 서이가 있는데 서이가 내 13년 만에 한국에 가니께네 그 
사람들이 내 왔단 소리 듣고 왔습디다. 와가지고 그래 나한테 “어떻
더노?” “내 그때 간께 너건 날 더 그렇지만 나도 나이 그린께네 그
때 가니까 아무 것도 모른다.” 나는 아~가 서이라. 자기는 아이들 
수태도 못했답니다. 서러워하며 그렇게 울어샀습디다. 그래 내가 팔
자도 좋다 카미 그래 울어사티 “그래. 여~ 시방 어디가 있노?” 칸께, 
“동상들 집에 와 있다” 이 카데. 현풍에 동상들 집에 있다가 왔다 이
랍디다. 그래 만났어요.
사할린 가실 때 일본을 거쳐서 안 가고 사할린으로 바로 갔습니까?
사할린에 바로 갔지. 어떻게 갔는지 모릅니다. 배타고 갔지. 부산에 
가가지고 배타고 갔습니다. 아버지는 안 오고 신랑하고 여~ 왔지요.
그 사람들캉 우리캉 면이 가깝습니다. 구지면에 있고, 현풍면에 있고 
그랬는데 면이 가차우이 그 사람들 서로 알고 한께네 창녕 성(成)갑
니다. 우리는 남편은 창녕 성가고 하니까네 서로 댕기고, 댕기고 했
는데, 우리 할무이도 창녕 성가지요. 그랜께네 서로 댕기고 하다본께 
아니까네. 그래 있었는데 나는 그 질로 해서 그 와서 우리 집에 영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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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 총각이지요. 스물 둘에 와가지고 장개도 잔치도 무슨 하고 밤에 
하고 이틀 아침에 와뿌맀는데.
사할린 가실 때는 결혼하고 가셨습니까?
결혼하고, 열여덟에 한국에서 결혼하고 가가 열아홉에 아~ 낳았지. 
첫 아~를 열아홉에 낳고, 결혼도 하는둥마는둥 했지요. 오늘 왔으마 
내일 결혼하고 머 집에 어른들 모다가지고 앉아서 밥이나 해먹고, 
그 이튿날 나와뿟지. 자고 간다 카는 거 그 이튿날 나왔지.
사할린 가실 때는 누구하고 같이 갔습니까?
남편 될 사람하고 시아버지 될 사람하고 왔대. 시아버지가 아들 데
불고 왔습디다. 그래 와가지고 서이가 왔어. 배타고, 그때는 비행기
도 없었어. 한국에서 결혼을 열여덟에 하시고, 열아홉 살에 아이 낳
고 그렇게 했는데. 사할린은 남편하고 시아버지하고 다부 함께 들어
갔지. 남편은 사할린 오셔가지고 아들 다 놓고 난 뒤에 돌아가셨어
요. 첫 아이를 열아홉에 놓고, 둘째 아이는 스물두 살에 낳았네. 첫 
아이는 아들이고 둘째는 딸이요. 고 밑에로는 딸이 서입니다. 딸이 
다섯인데요. 아들 하나 딸 하나 낳았는데 죽어뿟서요. 모두 다 사할
린에 살았지. 내 거 가서 태생 했는데. 시방 다 여 있습니다. 결혼을 
해갖고 첫 아이는 사할린에 와서 낳았지요. ‘아니와’라 카는 데 거서 
낳았어요.
결혼식은 사할린에서도 했습니까?
거서 조금 해가 집안 식대로 달라 묵고, 사할린에 와서는 시동상도 
있고, 시아버지와 시숙도 있다 카이 그르이 여~ 와서 잔치했지요. 
할아버지 이름은 난 모릅니다. 남편은 창녕 성(成)씨지. 남편은 결혼 
할 전에는 안 갔습니다. 사할린에. 우리 종조부가 사할린에 있었지.
남편은 어떻게 만났습니까?
제3장. 정신대 피하려고 사할린으로 시집간 곽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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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여 서로 연락이 있었겠지. 전에부터 서로 친척 간에 지내고 하
인께네 연락을 해서 그래가 왔지. 남편이 사할린으로 왔지요. 스물둘
에 여~ 와서 육십 서이 내 갔다 왔습니다. 남편하고 나이 마이 차이
죠. 나는 열여덟 살 먹고, 스물 둘이고 그래 갔는데. 네 살 차이네.
2. 넷째 며느리로 평생 시부모 봉양
사할린에서 결혼을 하셔갖고 첫 살림을 아니와에서 시작했습니까?
아니와 살림도 안 살았습니다. 결혼은 아니와에서 하고, 사할린에 와
서 살았죠.
할아버지는 그때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면(面)에서 일했어요. 우리 아버지는 면에서 일하고, 영감님도 여 내 
오인께네 면에서 일한다 합디다. 그때 대학까지 마치고 일한다 합디
다. 스물 둘인데. 내 오고 나서도 한 3년 일했어요.
일본시대 거 뭐 조선사람 배급수 됐지. 우리가. 우리 영감 조선말도 
하니까네 배급수를 맡겨놓고 그걸 했었지. 배급하면 물건 나눠주고, 
서류 꾸미고 이런 거겠지. 그거는 일본시대지. 월급 받는지 얼매 받
는지 그건 모르지요. 3년 일하고 소련서 넘어오니께네 이리저리 하
다가 일 몬하고, 또 소련 사람 밑에서 점빵 하나 차리가 또 보다가 
그러고 그래사타 이리 와뿌리고 모르지.
할머니는 일을 하셨습니까?
나는 일 뭐 집에서 바느질이 그런 거, 일은 안하고 왔습니다. 아이 
키우고. 바느질도 안 하고, 집에서 그저 있는 기나 하고 그랬지. 나
가서 일은 안 해봤습니다. 여기 와서 생선공장에 조금 일하다가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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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일하다 손 한번 끊고 고마 다시는 일 안하고 말았어요. 난 사할
린에서는 일은 안했습니다. 남편 혼자 벌이갖고 가족들 다 먹여살리
고 그랬지.
나는 인자 내가 넷째아들인데, 우리 영감이. 어른들이 안 가실라 캐. 
딴 며느리한테. 며느리가 너이가 있는데도 안 가실라 카이 내가 데
리고 있었지요. 시부모를 데불고 있었지. 다른 데는 안 가실라고 내
한테 있을라고 카는데 우짜겠어요.
내가 넷째 며느린데 돌아가실 때 된께네 우리 시숙이가 오셔가지고 
“어머님! 만날 동상(동생)한테 이래 빚이 안 된다고, 우리 인데 좀 
가서 돌아가세요. 가자” 카이. 그래갖고 시아버지는 먼저 가시고, 우
리 시어머니는 난제 가셨어요. 얼라(어린아이)도 그래 놔두고 내 안 
간다. 아들 다 키아서 보내놓고 간다 카마 너그 따라 안 간다. 안 가
시고, 우리 시어머니 나제(나중에) 가시고, 시아버지는 가셔가지고 
며느리한테 가가지고 이틀 만에 돌아가시고, 시어머니는 1년 만에 
돌아가시고 그래 가셨지. 그래 가셔도 어떻게 거서 오라고 캐사서 
내 가고 이틀 만에 돌아가셨어.
예전에는 옷도 얼매나 귀했어요. 손자들이 많지. 손자들 많고 하마 
할머이한테 선물 받은 기라 카며 탁탁 쑤시 여~놓고는. 우리 동시가 
인자 장보러 갔지. 어머이가 돌아가시겠다 싶어가 천 좀 사고 한다
고 갔는데 내한테 “고리짝 저거 니라(내려)봐라. 뭐 있는가?” 그래 
니라본께 손자들한테 선물 받은 거 하나도 안 입고 그냥 있어요. 다 
수구리에 여~ 놓고, 그래 “이거 내 죽기 전에 니 주고 죽을라고 이
래 여~놨다. 누구도 주지마라. 니 가서 입어라” 캐. 그래 붙잡고 울
어사태. (다소 울먹이는 투로) 그래 시방도 뭐~ 거~ 잘난 거 뭐 볼 
기 있어요. 일본시대에 옷 같은 거 볼 것도 없는데. 내복도 뭐 시시
제3장. 정신대 피하려고 사할린으로 시집간 곽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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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그런 기지. 값나가는 폐물 같은 건 없어요. 그때 폐물이 어데 있
습니까. 시어머니가 장수하셨어요. 팔십 여덟까지. 장수하셨지. 시아
버지는 좀 일찍 돌아가시고.
3. 시아버지 강제 이주 후 가족들 초청
시가 댁에는 시숙이라든가 이런 사람들이 다 사할린에 사셨네요?
다 사할린. 시숙이 다 사할린에 있었어. 우리 시아버지가 먼저 돈 벌
어가지고 거서 전화해가지고 서로서로 편지를 해가지고 하나쓱 하나
쓱 다 들어와 가지고 고생도 마이 했어요. 모도.
시아버지는 처음에 사할린으로 혼자 들어가셨네요?
혼자 왔었지. 그래가 [고향에서는]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편지가 나
와가지고 이래 해가지고 우리 시어머이가 아들 데불고 여~ 왔었는 
모양이라. 그래 차차차 다 들왔어요. 4형제가 다 여기로.
[사할린 처음] 가니깐 시아버지는 기반을 닦아 좀 잘 살던가요?
뭐 잘 닦긴 뭘 잘 닦아. 그때 사는 것도 그렇지요. 뭐. 시아버지는 
그 전에 조요(징용) 가가지고 일도 하긴 했다면서 그런데 숭(흉)터 
큰 기 있어요. 조선에 ‘발치’라고 있지 않습니까? 그걸 앓아가지고 
그냥 일 안하면 안돼서 일했다면서 그래 하는데 숭터가 이래 있어
가. 목 뒤에. 그래 나한테 얘기하지만 “내가 돈 벌어 와가지고 죄가 
많아서 저거들 놔두고 죄가 많아서 내가 목에 병이 나서 이랬다”고. 
숭터가 크게 있습디다.
[사할린] 가니까 시아버지는 무슨 일을 하고 있던가요?
일을 댕겼어요. 괜찮아요. 짐승 믹이고. 소 믹이고, 촌에서 소 믹이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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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그랬었지. 텃밭에 쪼매치 뭐 콩 같은 거 숨가가, 약 담배 숨궈가
지고, 허가 맡아가지고. 허가 맡으면 한 해 한번쓱 맡아야 돼요. 한 
해 가마 2년치를 해줘요. 그래 난중에 그 이듬해에 가니까네 2년치 
안 해주고, 1년 채워주고. 그래 마 몬하구로 하디 그래 치아뿟지. 짐
승은 소 믹이지. 송아지 쪼맨한 거 사가지고 와서 그거 믹이지.
시숙들은 어떤 일을 하던가요?
시숙들은 모두 촌에 가서 농사짓는데, 그 전에 감자농사 짓는 사람, 
일본사람 선장으로 있는 사람 있어요. 거~ 가서 농사짓고. 우리 영
감은 그때 오인까네 공부하는 학생으로 1학년 들어가 있어요. 우리 
영감 될 사람은. 학생. 보통 학교지요. 그래 시동상도 댕기미 장개가
가지고 대학생 공부해가지고 신문사에서 원장으로 있었어요. 원장으
로 있다가 안죽 살아계시오. [한국 경기도] 안산에 와서 있지. 대학 
댕깄지. 그때는 대학해도 얼매나 돈이 듭니까. 고생도 마이 했어요. 
우리 시동생.
우리 시동생이 입이 좀 삐뚜룸합니다. 그래가 대추나무를 꺾어가지
고 여게 걸어가지고 댕기고. 여~다 만날 걸어갖고도 큰땅 댕기미 공
부했어요. 왔다 갔다 했지요. 욕 봤어. 우리 시동생은.
그러면 할머니 남편 되시는 분은요?
우리 남편도 공부해가지고 면에서 일합디다. 그때 월급은 잘 모르겠
습니다. 어른들한테 매끼면 뭐 돈이사 들고 합니까? 어데 벌어노마 
돈 찾으마 부모들 갖다주지 처(妻)라고 줍니까.
돈을 벌면 살림 사는 부인한테 맡기지 않습니까?
안 그럽니다. 예전에 우리 클 적에는 안 그랬습니다. 시방은 뭐 그렇
지만도. 시방 우리도 아들 키아봤지만 월급 타오면 처를 갖다 주지 
않습니까? 그기 옳은 짓이지요. 그렇지만 전에는 타가지고도 어머이 
제3장. 정신대 피하려고 사할린으로 시집간 곽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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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리야 안 됩니까. 살림 살라 카면 뭐 살 거 타가 쓰고 이랬지. 어무
이가 뭐 사라. 뭐 사라. 돈을 주마 그거 사가지고 그래 먹었지.
처음 결혼하셔갖고부터 시부모하고 같이 살았습니까?
그렇지요. 시집와가지고 같이 살았지. 결혼하니까 식구들이  아무도 
없어요. 시동상 하나 데불고. 우리 시어머이, 시아바이 있고. 다 모
두 한국서 들어와가지고 금방 들어왔어. 곤란하기 말할 수 없어요. 
배급타가지고 이래 묵는데. 그래가 인제 우리 큰동시가 아들 서이 
데불고 오시고. 둘째 동시는 모두 안죽까지 촌에 있고. 여~ 와서 내 
오고 나서 들어오셨지.
처음 결혼할 무렵은 식구가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동생 하나, 그 다
음에 인제 남편, 나까지 다섯 명이네. 그러고 아~를 낳으니까 차츰 
식구가 불어났지. 그래갖고 그때는 뭐 띠~주는 법도 없지. 한께 
아~를 놓은 게 다섯, 여섯 낳았습니다. 놓기는. 하나는 가뿌서(죽어
서) 그렇지.
4. 먹고 살 길을 찾아 여러 곳으로 이사
사할린에 시집가서 시부모하고 살던 데는 아니와입니까? 아니와 살
았지. ‘아니와 후지코’라 합디다. 촌이라요. 거기서 딴 데 이사 마이 
갔지요. 아니와 거~서 시내로 갔다가 저 시업 농장에 거기 또 사람 
쓴다 캐서 거기 갔다. 또 삼판에 갔다가 오만 데 다 댕겼습니다. 이
사를 여러 번 했지요. 시내를 갔다가 또 저 ‘사미와’라 카는 데 갔어
요. ‘오두’라 카는 데. 그 다음에 ‘니수르다’라 카는 데 그리 가고.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갔는가 모르겠어요. 또 갔습니다. ‘후지코’라 가는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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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한번 갔어요. 한국에 오기 전에는 유즈노사할린스크에 살았어요. 
거기 도요하라. 도요하라는 마을 이름입니다.
이사를 이렇게 여러 번 한 거는 자꾸 이짜(이 쪽에) 벌이가 낫다. 
저짜 벌이가 낫다. 자꾸 캐사으이 인자 자기 일하는 면(面)에는 “끝
나뿌고 없다” 카면서 안주고 하인까네, 여러 번 갔다가 그때 답 없
고 해서.
남편은 면에서 일을 몇 년 했습니까?
모르겠습니다. 몇 년이나 했는가? 오래 했어요. 한 6년 동안 했을 
겁니다. 그 다음에는 농사짓는 데로 갔다가 이리 갔다가 그래도 면
에서 일했어요. 면에서 모두 배급 주는 데 배급수 일하다가.
처음 사할린에 가시니까 말이 안 통하잖아요?
안 통하지. 사할린에서는 말이 통하지요. 처음에 사할린에서 여 유즈
노 온께 말이 안 통하지. 사할린에서 저 조선에는 조선말이 있지요. 
사할린에는 말 못 통하지. 그래도 어른들이 조선말을 하신까네 괜찮
아요. 가정 내에서는 다 조선말을 하니까 괜찮은데. 조선말 하지. 물
건 사러 동네에 간다든가 할 때는 종이에다 써가지고 가지. 일본글
로 써가지고 거 갖다 비~면(보여주면) 통하지. 그때 우리 온께네 딴 
데는 어떤가 모르지만도 거~는 자기 가서 묵는 데까지 따로 있습디
다. 거~ 가서 써줍디다. 배급 받는 것만 해도 그래 종이 가가면 써
줘요. 말은 모하지.
사할린에 사실 때 한국 사람하고 이웃해가지고 살았습니까?
이웃해 살았어요. 일본사람하고는 안돼요. 말이 거석하거든. 일본사
람들 이웃에 살긴 살지만도 “왔나? 갔나?” 이래 하지만, 말이 틀려서 
잘 안돼요. 조선 사람하고는 잔치도 하마 같이 하고. 결혼시키고, 장
례 치르고 이러면 한국에서처럼 오고가고 하지요. 모두 데불고 오기
제3장. 정신대 피하려고 사할린으로 시집간 곽병수
 
159
18)
 물건을 이고 지고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판매하는 일종의 보부상.
19)
 전통기옥에서 마루와 마당 사이의 공간 통로.
도 하고.
설이나 추석 명절 지냈죠. 명절 지사(제사)도 지내고 일반 제사도 
지내고. 조상 제사 지내요. 뭐 점빵에 있는 거 사다놓고 그래 지내지
요. 지금 한국에 하는 것처럼 그렇게요. 한가지지요. 우리는 지사가 
없지만 지사 있는 사람 다 그렇지요 뭐. 사할린에서 음식은 여~나 
거~나 조선음식 해먹고 그렇죠.
5. 일본에 먼저 간 종조부
처음 사할린 가실 때는 당시 일본세상이었네요?
예. 일본인들하고 같이 살고. 일본이 종조부가 하나 있었어요. 전에 
간 사람. 종조부가 전에 와 갔노 카마, 그 종조부가 할아버지가 그린
께네 할머니가 도부장사18) 댕깄는 모양이라. 우리 증조부가 그 할머
니를 건드렸던 모양이라. 거~ 아들이 하나 났어요. 아들이 하나 났
는데,
그 아들이 인자 가마 본께네 조선은 그렇지 않습니까? 이거 죽담19)
에 밑에서 지사 지내고, 우에서 지사 지내는 게 있습니다. 집안사람
은 우에서 지내고, 밑에서 이래 줘가 온 아들이나 그러마 밑에서 지
냅니다. 명절 지사 지내마 밑에서 지냅니다. 그래 그 사람이 아홉 살 
무~서(먹어서) 명절 지사를 맨날 지내고 한께네 아홉 살 먹드만은 
지사 지내러 밑에 안 갈라 카드랍니다. 우리 부모들이 얘길 해요. 그
래 아재 그 카더라고. 안 갈라 칸께네 할아버지가 뭐라산께네 내리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160
 
가 지내디 열 살 무서 고마 도망해뿌고 없어요.
그래가 없다고 어마이가 그렇게 울어사타가 죽었답니다. 죽고 난 뒤
에 그 할아버지 일본에 가서 돈은 마이 벌어가 오셨어요. 그 아들이 
어때가~(어떻게 해가지고) 일본을 갔는지? 그래 일본을 가 돈 마이 
벌어가 와서 조선에 왔대요. 서른두 살에 오시가 장개갔어요. 우리 
클 적에 그때는 그래 와가지고 이름이 ‘시바고’라 카대예. 그래 온께 
뭐 늙은 총각이 서른 돼~가 뭐 그래 거~서 어머이, 아버지 다 비석 
시우고. 그래가 장개갔어요. 장개갔는데 열 몇 살 덜 묵은 사람한테 
장개를 보냈어요. 처녀도 없고 그때는 뭐 다 일본 드가뿌고 없고 한
께. 그래 장개가가지고 아들 마이 낳았어요. 아들, 딸 일곱 나아가지
고 내가 여게 부산에 거~ 가인께네 그래 사진이 거~ 있습디다. 편
지도 거 있고. “이거 너그 할아버지가 그 전에 보낸 편지라. 그 아재
가 낳은 아들이 보낸 편지라” 카면서 그러대요. 종조부가 결혼해가 
일본에 사셨는데, 그래가지고 그 끈으로 간 거지.
종조부 자식들도 일본에 살지요. 편지가 없습니다. 시방. 전에는 편
지도 있고 했는데. 내 한번 23년 만에 가가지고 한번 가봤어요. 종
조부 집에 가본께네 사진도 내비~고(꺼내 보여주고) 합디다. 다 돌
아가셨지. 거기 낳은 자녀들이 있지.
일본시대에는 일본말이 안 통해 그랬는데, 거기 사시면서 러시아 땅
이 된 적이 있었지요?
예. 그때도 매~나(항시) 러시아 여기서 살았지. ‘아니와’라  카는데. 
그때 뭐 마이 바뀌었지요. 일본시대에 있다가 러시아시대로 바뀌니
까 말도 그렇고, 먹는 기고 다 바뀌지. 배급시대 뭐 얼매나 곤란합니
까. 일본시대는 참 곤란했어요. 일본시대는 배급시대인데, 러시아시
대로 바뀌니깐 좀 낫지. 낫긴.
제3장. 정신대 피하려고 사할린으로 시집간 곽병수
 
161
인제 해방이 되고 일본사람들은 다 자기 본국으로 갔지요. 그때 우
리는 한국 올라고 안하고 그냥 있었지. 그래가 화태까지 여~까징 왔
어요. 한국까지 왔잖아.
6. 생선공장 일하다가 손가락 절단
젊어서 일을 하진 않았습니까?
나는 사할린에서 일은 안했습니다. 젊을 적에 일 좀 하다가 이 손 
끊어가지고 그러고는 다시 말았어요. 젊어서 공장에 가서 고기 잡아
가 절구는 일했는데. 생선. 생선 잡아 절가 놔. 이 기계가 돌아가는
데 거 잘못해서 그렇지. 안 해보다 하이 운전을 잘 몬시기가 그렇다
는 기지. 기계 이래 돌아가면 고기를 자르는 기계지. 고기 이래야 되
는데 내 손을 갖다가 같이 쑤시 여~뿌릿지.
그때가 열아홉에. 결혼한 이듬해네. 척 아이 낳아가 어른들한테 맡겨
놓고. 그래 일도 몬했어요. 손 다쳐가. 손가락 안 다쳤으면 일을 좀 
했을란가? 모르겠어요. 할란지 안 할란지 모르지만. 안 다쳤으마 하
지. 뭐. 근데 돈 벌이도 괜찮다 캤는데. 그러고는 일 안했습니다. 고
마. 영감 혼자 벌이가지고 묵고 살고 그랬지.
살림하고 아이만 키웠습니까?
예. 사할린에서 난 일 안했습니다. 사할린에서 자슥 놓고 키우고 뭐 
약 담배 그거 숨궈가지고 그거 하는 데 거~ 거들었지. 
약 담배는 키워가지고 베어 와가지고 어떻게 합니까?
안 비지. 키워놓고 인자 첨에 이만치 올라가지 않습니까. 조금 더 크
마 인자 칼도 줍니다. 칼도 주고 다 줍니다. 칼 주마 요만치 도로 비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162
 
고, 또 비고, 또 비고 그래가 난제 마지막에 가서 끈티까지 가마 그
거 다 비~뿌리(베어버리지). 비가지고 인자 큰 가마니에다 넣고 [무
게를] 달이지. 달이가지고 인제 그거 써가지고 그거는 우짜는지 모
르겠어.
그거 찌지. 삶지. 대가리만 삶지. 잎은 안 까고. 그래도 약 담배 일
본시대에 얼마나 많았어요. 그걸로 담배처럼 피는지는 모르지. 피우
는지 먹는지? 먹는다 카데요. 피우는 사람도 있긴 있는가 모르겠습
니다.
할머니 댁에서 제배해갖고 그걸 파는 겁니까?
그래. 면에서 허가 맡아야 됩니다. 허가 맡아가 오마 이거 얼마 바치
라 카마 고만치 바치야 됩니다. 조사 옵니다. 약 담배 쫌 컸다 싶으
마 얼매 요고 딱 바치가 저거 써가지고 가죠. 일본 놈들 와서 써가
지고 가마 고거 바치라 캐요. 그거 어디다 쓰는지는 모르지. 약 담배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아주 더러븐 이야긴데. 그거.
7. 영주 귀국한 자녀들, 서툰 한국어
3녀 1남을 잘 키우셨는데, 공부는 어떻게 시켰습니까?
공부는 대학 하나도 못 나왔습니다. 러시아에는 대학 공부 하면 할 
수 있지요. 안 곤란하면 하지요. 곤란하고 하마 몬하지. 자식들은 다 
여~ [한국에] 왔습니다. 영주 귀국했어요. 내 올 때 같이는 몬오고. 
저거는 난제 가서 모두 내가 이래 살고 하이 영주귀국 해가지고 다 
들어왔어요. 지금 부산에 있고 사천에 있고 창원에 있고. 모두 영주
귀국 했어. 가~들 다 손자들하고 다 왔어요. 
제3장. 정신대 피하려고 사할린으로 시집간 곽병수
 
163
손자녀하고 아들, 딸들은 다 한국말 잘 했습니까?
손자들은 모릅니다. 하는 거는 하지만. 내 밑에 큰 거는 하지만. 왜 
손자들이 한국말 못하느냐면, 저거 부모들이 다 소련말 하니까네 할 
수가 있어야지. 조선말 안하면. 저그가 아~들 키운께네 학교도 그런 
학교 댕기지. 유치원에서 그런 데 크지 하인께네 조선말 몬합니다.
아들, 딸 가정에서는 그냥 러시아말로 했네요?
그렇지. 러시아말. 그럼 손자 눈만 이래 쳐다보고 있다. 말을 못하니
께네. 나는 러시아말 그 전에는 썼지만 이제는 다 잊어먹고 없습니
다.  쓰다 안 쓰지. 그 전에는 썼지만도 러시아 사람 매~로(처럼) 
그래는 몬쓰지요. 다 잊어먹고 없어요. 조금 대화만 할 수만 있지만
도 없어요. 다 잊어무뿟어.
첨에는 참 불편하지요. 근께네 시동생도 있고, 시어머니도 있고 한께
네 괜찮아요. 우리 시동생 그 전에 공부 끝마쳐가지고 대학에 해가
지고 신문사서 원장을 했어. 시방은 인자 연금 돈 타 묵고, [경기도] 
안산에 와있어. 영주 귀국해가지고. 몇 년도에 한국에 왔는지 여게
(여기) 몇 살에 왔는동 모르겠습니다.
제4장. ‘모집’ 남편 따라 식구들이 이주한 최숙이
- 강제 모집 남편 따라 사할린으로 -
1924년생 최숙이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166
 
최숙이 연보
ㆍ1924년(1세) - 경남 울산시 농소면 달천리 출생
ㆍ1942년(19세) - 결혼, 울산 하상면 쌍방 거주
ㆍ1943년(20세) - 남편 사할린으로 먼저 이주
ㆍ1944년(21세) - 남편 따라 사할린 이주
ㆍ1944년(21세) - 탄광 2년 동안 노동
ㆍ1945년(22세) - 장남 출산
ㆍ1966년(43세) - 탄광 노동 중이던 남편 사망
ㆍ1990년(65세) - 처음으로 한국 방문
ㆍ2005년(82세) - 한국 영주 귀국, 대창양로원 거주 
ㆍ2014년(91세) - 현재 대창양로원 거주
1. 19세 결혼 이듬해에 남편은 사할린 행
이름과 나이를 말씀해주세요?
이름이 최숙이. 올해 나이는 90세요. 내 고향은 울산이요. 울산군 하
상면, 우리는 농소면에 살았고. 마을 이름은 달천리라 하데예. 시집 
동네는 쌍방이고. 동네 이름이 쌍방이더라고요. 농소면은 친정이고, 
하상면은 시집이고. 하상면 바로 지내면(지나면) 농소면.
여기 사시다가 사할린은 몇 살 때 가셨습니까?
사할린은 21살에 갔어요. 결혼은 여~서 하고 갔지요. 결혼은 내가 
19살에 했고. 그때 할아버지, 영감은 나이가 22살이오. 3살 차이지
요. 그 때 결혼하시던 모습이 생각나지요. 결혼만 했지 그냥 가삐맀
제4장.‘모집’남편 따라 식구들이 이주한 최숙이
 
167
는데. 가뿌리가 우리가 찾아왔지. 모집으로. 모집을 하는데 우리는 
따라왔지. 남편 찾아가 따라왔지.
남편 할아버지는 결혼하고 바로 일본으로 왔는 겁니까?
바로 일본으로 와뿌리고. 바로 이리 여~ 화태(樺太)로 와뿌리고. 우
리는 그 다음해에 찾아왔지요. 남편은 결혼하고 동짓달에, 9월에 결
혼하고 그 이듬해 9월 달에 화태로 와뿌렀어. 그거 이 사람들이 강
제 모집으로 뽑아가이까네. 안가면 안 되지. 누가 가도 가야 되여. 
한집에 누가 가도 가야 되니까 아버지를 보내겠능교? 그래가 여기로 
자기가 왔지.
그 때 시형제들이 없었습니까?
있었어요. 결혼할 때 남편 형제들이 3형제가 있었어. 딸 둘이하고 
아들 서이 다섯 있었지. 그 중에 영감은 두 번째예. 우리 시아버님도 
다 화태 여기 오셨는데. 남편이 화태 갈 때 모집을 갈 때는 시숙 한
명, 시동생 한명이 있었는데. 시숙어른은 한국에서 돌아가시고. 남편
은 여~ 와서 좀 살다가, 40년쯤 살다가 돌아가시고.
2. 21세에 남편 찾아 사할린으로 
남편은 사할린에서 돌아가시고. 그 때 결혼하고 21살에 내가 사할린으
로 갔지. 남편 찾아서. 아이는 여~ 와가 22살에 낳았어. 22살에 낳았
는 게 이제 69세여. 큰아들. 아이는 모두 5남매여. 딸 둘 아들 서이.
어떻게 사할린까지 남편 찾으러 갔습니까?
그때 모집을 뭐 지도자들이 했어. 뭐 불러가지고 억지로 데려오잖아
요. 남편 찾아갈 사람 와라 이렇게 해가 모집해가 간 거지. ‘남편 찾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168
 
아 돈 벌러 가자’ 이래 해가 데리고 왔잖아.
처음에 사할린 가실 때 어디를 거쳐 갔습니까?
배 타고 갔지요. 부산서 배 타고 아오모리 와가 배타고 홋카이도 가
가 배타고 그래 왔지. 부산에서 아오모리까지 타고 왔지. 더러는 부
산에서 배타고 일본에 내려가지고 기차로 동경까지 타고 가고. 동경 
지나가지고 또 기차로 홋카이도까지 가고. 홋카이도는 바로 사할린 
잩에(곁에) 아인교? 바로 사할린 건너가 홋카이도 아인교? 배타고 
가지. 지금은 뭐 비행기도 타고 가고 다 타고 가지.
가실 때 기억이 납니까?
올 때는 기억나지만은 안 가봤는 데는 모르지. 그때 울산 집을 떠나
서 사할린까지 가려면 며칠 걸렸나? (생각에 잠기며) 우리 그날 한 
일주일 갔을 끼요. 그것도 뭐 완행 타면 일주일 가고. 또 뭐 빨리 가
는 거 타면 한 닷새쯤 되나?
사할린 가실 때 여자들만 갔습니까?
여자도 가고 남자도 가고 아~도 가고 다 같이 갔지. 싹 모집을 해가
지고 가이까네 다 갔지. 가족들이까네 가고. 한티~(한테) 모디가까
네 가고. 남자 찾아가 여자 혼자 가는 사람도 있고. 그 땐 가족들 찾
아가 가족들이 많아요. 한국에 공출시대 하도 못 살다 보이까네. 일
본이 좋다 카이까네. 일본이 엉가이(많이) 좋은가 싶어 모두 갔어.
사할린에서 남편은 어떻게 만났습니까?
오이까네 사할린에 탄광에서 일하고 있데요. 탄광에 일하고 있으니 
만났지. 여기서름(여기처럼) 일하면 집을 주잖아요. 모집으로 온 사
람은 집을 따로 주잖아요. 거기 살고 있데요. 거기서 만났지. 사할린
에는 처음에 우리가 찾아갔지요. 아유! 그래 가이까네 그 이튿날 되
니 모두 방 한칸쓱 나눠주데요. 많기나 작기나 한 가족에 방 두 칸
제4장.‘모집’남편 따라 식구들이 이주한 최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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쓱. 두 칸쓱 갈라주는데 거~서 살았어.
사할린에서 처음 사신 곳이 어딥니까?
거기가 지금은 노국말로는 ‘브이코프’라 하는 데고. 그 전에 일본시
대에는 사할린을 ‘화태’라고 하고. 같은 곳이지. 거기서 신혼생활을 
한 거지. 거기서 보낸 거지. 그 때 할아버지는 탄광, 탄광서 일했어.
3. 온 가족들이 사할린으로 이주 
시아버님도 따라 오싰지. 뭐 또 어머이도. 시동생 둘이 따라왔지, 시
동생은 시누 하나 따라왔지. 많이 따라왔어요. 또 남편 없는 동서도 
따라오고. 조카도 따라오고. 많이 따라왔어요. 내가 갈 때 같이 갔지. 
한꺼번에 다 왔지. 같이 가이… 인자는 가다가 죽었는가 살았는가 모
르고. 가뿌리고. 거~ 와가 시아버님 돌아가시고, 시동생들도 거기 
살다가 다 죽고.
시아버님과 시동생들은 화태에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우리 시아버지는 구미 일 했어요. 구미가 뭐냐 하면 지금 말로 하면 
뭐라고 말할꼬? 벌(벌판, 야지) 간에 댕기며 뭐 다리도 놓고 이래 
뭐 하는 그런 일이지. 다리 놓는 일. 시동생들은 전기부에 전기 고치
는 전기부에 일하고. 나이가 젊으니까 전부 전기부에 일시키대. 처음
에는 한 집에 다 같이 살았지. 장개가고 시집가고 다 따로 나갔지. 
그 전에는 같이 살았어.
방 한 칸은 신랑 신부가 살고요?
신랑 신부가 어딨어요? 한 방에 다 사는데. 신랑 신부가 어딨었어? 
그럼 아~는 어떻게 낳았냐고? (크게 웃으면서) 그라이 희한하지요?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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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이 우리 외고종 한 사람이 살았는데, 맨날 이래가 “아~는 우예 
낳았노?” 이란다. 한 방에 주~욱 살았지요. 방은 두 갠데, 복판에 미
닫이 문 하나 있단 말이요. 그럼 그거 문 하나 때문에 이불 하나 더 
못 빼잖아요. 그럼 문 빼뻐리고 이불 죽~ 펴서 잤지. 다다미방이까
네 그냥 이불만 피고 잤지. 거~서 아들을 5명 낳았어요. 허허허! 참 
불편하기만 했겠어예? 참 불편 많이 했지.
4. 남편은 탄광 일하다가 46세 사망
난 그래도 오래 사이까네 좋은 일도 보고 나쁜 일도 보지만은, 남편
은 일찍이 죽었다 보이까네 이런 일도 못보고 저런 일도 못보고. 46
살에 죽었단 말이요. 아파서. 수술하다가. 수술하고 죽었어. 위장이 
아팠어. 술을 많이 들었어.
남편은 이제 돌아가실 때까지 탄광에 일했어. 시동생 시누~(시누이) 
장개, 시집갈 때까지 살았지요. 다 가고 난 다음에는 우리들만 살았
지. 시아버지 이만한 방 만들어서 따로 살고. 남편은 계속 탄광일 했
어. 결혼하고도 탄광일. 내~ 탄광일 했다. 석탄 캐는 일 하고.
석탄 캐는 일 하면 옷이 온통 새카맣게 돼. 새카맣지요. 얼굴도 새카
맣고. 나와가 벗어야 사람 같지. 그럼 사람 같지도 않아요. 월급은 
그런데 많이 주요? 월급 마이 줘봤자 당시 돈으로 70원, 80원 밖에 
안주는데. 그러니까 그때 시아버지가 벌어오고 시동생이 벌어오고 
이래가 같이 모아가 살고.
하나당 번다는 게 나이 어려서 인자 드가이까네 마이 못 벌지.  30
원도 벌고, 40원도 벌고. 시아버님은 인자 수리하는 이런 일이니까
제4장.‘모집’남편 따라 식구들이 이주한 최숙이
 
171
네 그 좀 벌어오는가 해도 거 뭐 돈을 안주요. 쌀도 주고, 신짝 같은 
거 옷 같은 거 주고 그러지. 직접 돈을 안준다. 그때 일본사람들 밑
에 일했다. 그래 뭐 오래 못 살았어요. 어른 돌아가시고 아~들 시동
생 데리고 살고.
시숙은 결혼해가 자식들도 낳고 돌아가셨습니까?
예. 아들 서이. 아니 아들 둘, 딸 하나 놓고 돌아가싯다. 시숙은 육
십 몇 살 때 돌아가싰다. 정확히는 언제 돌아가싯는지 모르겠어. 내 
시집오고 나이 돌아가셨는데. 결혼하고 쪼만한 아~ 하나 있는데. 남
편보다 두 살인가 세 살인가 더 많아요.
5. 센탄파 탄(炭) 선별 노동
사할린에서 일은 안했습니까?
여~ 와가 일했어. 사할린 가서 일했어. 탄(炭) 파는 데 탄 가리는 
데도 일하고. 탄 파가 내놓으면 탄은 탄대로 돌은 돌대로 갈리잖아
요. 그런 데서 일했어. 돌 가리고 탄 가리는 일을 했지. 메리또 양 
가에 서가 메리또 돌 갈리내잖아요. 돌 내놓으면 돌 갈리내고. 그 때 
일본말로 ‘센탄파’라 하데.
이 일을 한 2년 했어요. 마이 모했어. 일본이 인제 전쟁에서 손 들
었는데요. 아! 손 들기 전까지 했네요. 손 안 들었으면 오래 했을 낀
데요.
그 일도 온통 검은 거 묻히는 일이지요. 뭐 검은 거 묻히는 일. 옷은 
머 깨끗하게 입었어. 탄이 더러워가 거멓지. 거멓지만은 몸에 붙고 
이렇지는 않아요. 탄광에서 일할 때는 딴 옷 입고, 나올 적엔 또 딴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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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입고. 나올 적에는 다른 사람 같소. 일하러 가면 일꾼 같고. 센탄
파에서 일을 하면 그 때 월급은 70원쓱 받았지. 많이 받은 거지요.
몇 시부터 일을 합니까?
아침 먹고 하죠. 아침 집에서 먹고 가지요. 저녁 6시까지 하지요. 하
루 열두 시간 일해요. 집에 오면 저녁 해무야지. 저녁 해묵지 뭐. 저
녁 해묵고 빨래하고 뭐 그렇지. 일요일은 있었지. 일요일이 일주일이 
아이고, 그 땐 열흘쓱. 그 땐 열 날마다 한번쓱 휴일을 줬어요.
일본사람들이 전쟁에 패하고 모두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는 러시아 
사람들이 들어온 겁니까?
뭐 러시아 사람들이 자기 권리대로 하지. 조선 사람들은 자기 하던 
그 일 시키고. 탄광일 하던 사람은 탄광일 하고. 또 뭐 다른 노동 일
하는 사람은 노동 일시키고. 자기 하던 일 그냥 시키고. 시간이 좀 
많아 그렇지. 일하는 시간이.
6. 한인들의 상호관계
사할린에서 조선사람끼리 어울려 살았습니까?
아~ 우린 다 어울려 살았어요. 조선사람들은 어불려 살았어. 이웃에 
같이. 조선 사람 택은 조선사람끼리 어불려 살고. 노국사람도 그 사
이에 있기야 있지. 집이 없으면 아무 데라도 가 살고. 조선사람은 근
데 많이 섞이 살았지. 처음에 집이 없으면 아무 집이라도 빈 집에 
들어가서 살잖아요. 마이 섞이 살았어.
빈 집은 사람 안사는 빈 집이지. 일본사람이 가고 난 빈 집. 그 땐 
아무나 드가 살면 되지. 동네 구장 있잖아요. 동네 구장이 허락하면 
제4장.‘모집’남편 따라 식구들이 이주한 최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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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드가 살고.
사할린에서 사실 때 가장 가깝게 친하게 지내던 사람 기억납니까?
친한 사람도 있지요. 그 중에도 안 친한 사람이 있고. 사람 사는 거 
다 한가지요. 가장 친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겠어. 같이 왔다 갔다 하
고. 영~ 안 친한 사람은 갔다 왔다가도 안하고 그라데.
뭐 인자 그 사람들 아는 것도 갈치주고. 또 내 아는 것도 갈치주고. 
서로 그라고 살고. 근데 러시아 사람들은 못 배운 사람들은 못하고. 
뭐 러시아 사람들은 이제 배워서 잘 아요.
조선사람들이야 일 다 알지요. 채소 같은 거 숨가 먹고 그런 거 이
런 거 할 줄 알지. 감자 같은 거 숨구고 그런 거 다 숨가 먹었지. 땅
은 얼마든지 아무 데나 가가 파가 숨구면 돼요. 감자 숨구면 감자가 
이만큼쓱 나오고. 감자가 마이 속이 잘 돼요. 그렇게 잘 돼. 이제 매
년 해먹고 나이까네 땅 진이 다 빨아먹고 안돼요.
첨에는 감자를 숨가노이 감자가 이만한 게 열 개쓱 열 한 개쓱 이래 
들었소. 한 뿌리에. 그래 감자 많이 캤소. 그라이 그때만 해도 차도 
없이 말파리도 없지. 하이까 실어다 날라야지. 저다 날라야지 머리에 
여~다 날라야지. 등더리에 지고 저다 나르고 그랬는데. 그래가 묵고 
살았잖아요. 그락저락 하다가 인자 노국사람 넘어오이까네 노국사람 
식으로 해서 살고.
7. 일본-러시아 시대의 과도기 생활
노국사람 식으로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노국사람 식이면 인자 군부(軍府)에서 많이 남으면 조선사람한테…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174
 
그 사람들 처음 넘어오면 의상(의복) 같은 거 없잖아요. 일본사람들 
일본 옷 같은 거 의상 같은 거 싸다가 갖다 주면 거 인자 곡식 같은 
거 옷 같은 거 바꿔주고. 이들은 옷은 없지. 이 사람들 처음에 와노
이 순전히 곡식을 마이 가져와가 곡식을 마이 바꿔가 먹고 살았지.
그땐 참 먹고 살기 힘들었죠?
그 때는 그래도 처음에 전장시대로 하면 부자로 잘 살았어요. 전장
시대 뭐 배급시대 뭐 한번 밥숟갈도 뭐 먹을 것도 없이 살았지. 식
구도 얼라(어린아이) 많으면 먹고 살만한데, 어른 많으면 벌이도 없
는데 아침에 다 먹어뿌고 나면 낮에 먹을 것도 없지 뭐. 그때 배도 
많이 곯았어. 아침 밥해가 벤또 싸고 묵고 보내고 나면 집에 있는 
사람 물 게 있어야지. 아무 거도 없고. 비지 파는 집 가가 비지나 사
다 묵고 뭐 그라고 말았지. 비지 마이 사다 묵었어요.
비지는 어떻게 요리를 해가 먹습니까?
아~ 그땐 소금도 모지래는데 뭐. 소금도 안 여~코 그냥도 묵고 뭐. 
새로 삶아가이고. 그것 가지고 그래 먹지. 뭐 전부 다 배급타노이 장
(醬)도 모지래지요. 소금도 모지래지요. 다 모지래는데. 오래 안살아
가 그렇지. 마~ 내 오래 살았으면 못 살았어요. 우리 가고 뭐 1년인
가 좀 됐을까 끝났소.
그러고 난 뒤에 러시아 사람들이 많이 밀려 내려왔네요?
예. 우리가 그래도 러시아 사람들 때문에 살았어요. 일본놈들 천지 
조선사람들 다 죽일라고 사프라니(회의) 다 해놨는데, 새벽에 노국
사람 다 쳤으이까네 아무도 못 죽있잖아. 그래가 살았소. 사프라니. 
회의해가지고 인자 조선사람들 다 몰아가지고 한테 여~가 폭탄 터
주자 했지. 그런데 그걸 어떻게… 그 때만 해도 거기 과장이 조선사
람이라 말이오. 그래가 어떻게 해가 살았소. 그거 아이었으면 다 죽
제4장.‘모집’남편 따라 식구들이 이주한 최숙이
 
175
었어. 그래 뭐 노국사람들 때문에 다 살았어. 그거 아이었음 다 죽었
어. 처음에 노국사람 보이 무서워서 뭐… 저 짜 맹~ 했지만, 인제는 
무섭진 안하네. 같이 묵고 같이 하고 뭐 일도 같이 하고.
8. 3개국 언어의 혼용
노국사람이 덩치가 크요. 크고 힘도 씨니까 일도 잘하고. 말이야 안 
통했어. 뭐 말도 안 되는 말도 하고 되는 말도 하고. 섞어가 했지.
노국말 잘 하셨습니까?
잘은 뭘 잘해야. 조선 사람들은 노국말도 모르고 뭐 노국인들은 조
선말도 모르고. 노국말도 모르고 다 섞이가 얄궂게 됐지. 인제 화태 
여기 와놓이까네 조선말 다 잊아뿌리지. 또 러시아 가놓으면 러시아 
말 다 잊아뿌리지. 아무 것도 안 돼여. 러시아말 이태(2년) 배와놓
은 거 여~와가 안 써뿌이 인제 다 잊아뿌맀다.
거기서는 잘 썼습니까?
뭐 그대로 뭐 사고팔고 주고받는 건 알지. 그래 노국 아~들은 공부
한 아들한테는 못 따라가요. 아~도 공부만 하고 하이까네 노국 공부
하다 보이까네 잘 배워왔어. 잘 했어.
일본시대에는 가정에서 조선말 썼습니까?
일본말 쓰죠. 일본말도 쓰고 조선말 쓰고 노국말 쓰고. 3국 말 다 
썼지요. (웃으면서) 양로원 여기도 3국말 다 나오는데. 여기 할머니 
사이에서요. 3국말 다 써. 말하다 보면 노국말도 나오고 일본말도 
나오고 다 나오는데.
자식들은 조선말 잘 합니까?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176
 
자식들은 잘 하요. 인제 손자들이 못하지. 우리 큰 사람은 저 학교 
저 노국학교 선생인데요. 우리 큰 아들이. 선생일 하다 보이까네 노
국말을 잘하지요. 노국 공부를 했으이까. 우리 아들은 또 한국말도 
잘 하는데 손자들이 못하지요. 손자들은 한국말 한마디도 모르요.
손주들도 가정에서 조선말 쓰면 배울 건데요?
내 있을 적엔 배우지만 내 여~ 나온 지 10년이요. 봐라. 내 나온 뒤
엔 아무도 안 가르치서 몰라. 자기 부모들은 거기 다 있지요. 자기 
자식들한테 조선말 안 가르칩니까? 아무 데도 안가고 거~ 있지요. 
조선말을 부모들도 모르는데요. 안 가르치주는데요. 낮에로는 학교 
가가 노국말을 하지요. 저녁에 오면 뭐 뭐 할 거 있어요? 그래 조선
말 모리요. 뭐 밥 주고 국 주고 하는 거나 알까. 다른 거 아무 것도 
모리요.
그러면 손자들은 우리 조선말을 잊어버리겠습니다?
잊어뿌리요. 모리요. 원래 배울 생각도 안하고. 좀만 커가 말 배울라 
그라면 사지크(유치원) 보냈뿌죠. 그라이끼네. 뭐 모리잖아요. 유치
원에 보내노이… 유치원에 가면 또 “니 할매 있냐? 할매 없냐?” 물어 
보요. 말하는 투가 다르거든요. 할매 있는 아~들은 말투가 좀 노국
사람하고 좀 다르다고요. “할매 있냐? 없냐?” 물어보잖아요. 우리는 
그래 살아나온 거는 고생 말할 것도 없어요. 이제 편할 만하이까네 
여~ 왔지. 뭐. 여~ 오이 뭐 이제 늙어서 아무 것도 못 하지.
9. 자녀 공부와 직업생활, 동포결혼
딸 둘, 아들 셋 자녀들 공부는 얼마나 시켰습니까?
제4장.‘모집’남편 따라 식구들이 이주한 최숙이
 
177
공부도 마이 못시켰지요. 그 때 뭐 돈이 있어야 시키지. 그때 뭐 아
부지도 없지. 혼자 농사지어가지고 큰 아~ 하나만 대학시킸지. 딴 
아~는 못했어. 딴 아~는 다 중학빠이(중학교밖에) 못했어. 
노국 땅에서는 대학 공부를 국가에 다 시켜주는 거 아닙니까?
아~ 그때는 다 시키줬지요. 시키줘도 그 뭐 오고가는 차비나 뭐랑 
마이 들잖아요. 옷이라도 뭐 잘 입히야 되지요. 또 연연이(매년) 
기야지요. 그라이 마이 들지. 그라이 없는 사람은 못 시키~. 그래도 
정책이 좋아가지고 자기가 잘하는 일 해가면 공부하는 아~들은 할 
수 있고.
장남만 대학공부를 하셨네요? 큰땅 가서 하셨습니까?
아이~ 뭐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큰땅에 공부 갈라고 뭐시 봉투 보
내노이까 조선사람이라고 안 받아요. 카이 도로 받아가이고 러시아
학교 도로 댕깄어. 거~서 도로 리코멘드(추천) 받아가지고 그 담에 
인자 대학 갔잖아예. 그래 인자 늦었어요.
자식들은 어디서 어떤 일들을 하고 있습니까?
큰아들은 선생질해가 연금이 나오고 있고. 아들 둘이는 뭐 살기 싫
다고 가뿌리고. 하늘나라로 갔지. 대학 갈라고 모집을 수태(여러 번) 
보냈는데도 쉽게 잘 안 돼가지고 탄광에서 일하다 사고났뿟어. 잘못 
돼가. 하나는 아파서. 그래가 지금 아들 하나 있어. 딸들도 일하요. 
판매원이요. 판매원을 거 뭐라 하요? 돈을 시다(게산)하는 거. 돈 시
다하는 걸 뭐라 하는고?
며느리나 사위 이런 사람들은 다 조선 사람들입니까?
아~ 내 밑에는 다 조선사람이요. 내 대(代)에는 딴 사람 없어요. 다
른 집들에는 노국 사람들하고 결혼한 게 많아요. 근데 우리는 아직 
딴에는 없어요. 그건 내가 반대해서가 아니라… 반대고 뭐 다른 민족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178
 
한테는 갈라고도 안하고. 정 갈라 카면 우야겠어요. 할 수 없지. 반대 
모하지. 인자 하나 작년에 대학 맡아 온 거 하나, 손자 하나 있는데. 
그래도 뭣이 조선사람 색시를 데리고 오이 반갑대요. 그래 댕기면 조
선사람 데리고 오는 사람 별로 없어요. 다 외국사람 데리고 와요.
손부(孫婦)를 보셨네요?
손부 다 봤어요. 손부 뭐 증손자가 이제 대학 3학년이다. 그러이 조
선 아가씨를 데리고 오이 기분이 좋지요.
10. 농사지어 생계유지
남편께서 46세에 돌아가셨으면 그때 아이도 그때 어렸을 텐데 무슨 
일을 해가지고 자식들을 키웠습니까?
일은 뭐 밭에 일해가이고. 토마도 숨구고 배추 숨구고 해가 팔아먹
고 살았지. 그래가 양식 사고. 요새 같았으면 그때 재혼이라도 했으
면 편안하게 살았는가 모르지. 그 때는 재혼하면 뭐 죽는가 싶어서 
누가 재혼할 생각이나 하요.
그때 재혼하는 사람들은 없었습니까?
아~ 쌔(많이) 있지요. 마이 있지요. 재혼한 사람 마이 있지. 그때 
43세에 혼자되었을 때 큰아들은 20살이고 막내는 10살인가? 8살인
가? 줄줄이 다 학교 댕깄어. 그때 다섯이 다 학교 댕깄어.
그때 힘들었겠는데, 시아버지나 시동생들이 좀 안 도와줬습니까?
시아버지는 뭐 먼저 돌아가셨고, 시동생들은 저그 살기도 바쁜데 도
와줄 게 어딨어요. 저그도 저그 식구들 먹고 살아야지. 그때는 한국
도 못 오는데요. 연락도 없었는데 뭐. 편지도 한 장 없었는데.
제4장.‘모집’남편 따라 식구들이 이주한 최숙이
 
179
남편 돌아가시고 자식 키우느라고 오랫동안 농사를 지었네요?
예. 오랫동안. 여 올 때까지 농사 지았어요. 다른 일은 안하고요. 다
른 일 하라고 회사서는 하라고 하는데, 회사서 일해 봤자 돈 60원 
그거 받아가지고 식구 여섯, 일곱 묵고 살 수 있소? 못 묵고 살지. 
아~ 공부시키야지. 암만해도 안돼요, 그래가 안하고. 그냥 농사 지
어묵고 살았지. 농사 지어묵고 살고 나이 지금은 손해요. 그 때 거~ 
일 했으면 지금 연금 그거 나오잖아요. 그라이 일 못한 게 후회라. 
고생을 해도 했으면 그래도… 하지만 당시로서는 일을 해서는 못 묵
고 사는데 뭐. 식구가 많으니까.
그래서 지금 연금이 안 나옵니까?
안 나옵니다. 쪼만큼씩 나오던 거 여~ 온다 하이까 안 주요. [한국] 
영주 귀국하면 끊어버리네요. 그 당시 남편이 돌아가시고 농사지어
서 자식들 먹여 살릴 때 공장에서 일하는 것보다 농사짓는 게 더 수
입이 나았지. 나았으니까 묵고 살았지.
농사는 몇 평이나 지었습니까?
그건 몇 평도 없소. 아무 데나 숨가놓으면 되는데. 힘있으마 마이 숨
구면 되고. 힘없으면 쬐매 숨구고. 텃밭에는 여기만한 한 일곱 평이
나 여섯 평 밖에 안주요. 이제 딴 데 나가가 해야지. 텃밭에 붙은 건 
고거밖에 안 돼. 고것밖에 안주요.
더 농사를 많이 지을라면 집밖을 나가가지고 들밭에 저런 데 내비린 
데 가가 숨군다. 그런 데 지으면 야~ 도둑놈이 절반 다 가가뿐다. 
도둑놈이 반은 가~가(가져가). 감자도 캐 가뿌고 배추도 비~(베어) 
가뿌리고. 다 가~가고 없어. 허허허!
그때 회사를 다니면 60원 씩 줬는데, 농사를 지으면 얼마를 벌었습
니까?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180
 
농사로 벌긴 뭘 얼마나 벌어? 들어오는 대로 쓰고 나이 얼만지 아
나? 농사를 지으면 아무래도 100원 이상은 되지. 거~ 일하는 대로 
할라 카면 한 달에 60원 받고 뭐. 집에서 믹이면 돼지도 믹이고 닭
도 믹이고 먹고 살고 그랬지. 그 시절 살기가 참 어려웠지.
농사짓고 돼지 먹이고 그러면 그걸 어디다 팔았습니까?
시장 가 팔지요. 잘 파는 날은 좀 잘 팔아 오고, 못파는 날은 못 팔
아 오고. 그럼 농사지은 걸 가지고는 매일 장에 댕기야지. 매일 댕기
다 보면… 매일 장에 댕기미(다니면서) 팔아야지. 매일 집에 오면 일
해야지. 집에를 뭐 깜깜할 때, 손가락 안보일 때까지 일해야 된다. 
아이들도 일도 마이 시키고.
종일 공부하고 온 사람도 저녁에 일하면, 저 어머이가 들어갈 때까
지는 일해야지. 일도 마이 했어. 고상도 마이하고 아~들이. 그러끼 
모두 건강하게 오래 살았으면 좋은데.
남편 돌아가시고 공장에서 일을 하라고 할 때 안 해도 됩니까?
안 해도 되지요. 안하면 자기들 돈 안주는데. 안 해도 뭐 자기 맘 대
로지. 자기 땅을 사가 오래 해먹던지 말든지.
이제 공장에서 일을 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나이 들어서 연금이 적게 
나오는 거 외에 안 좋은 점이 또 있습니까? 병원에 간다거나 할 때
는 어떻게 됩니까?
병원 같은 데 가면 일하다가 아파가 가면 공장에서 치료비를 다 주
지요. 공장에서 일 안하더라도 아파서 병원가면 치료비는 공빼이다 
보이끼네 치료는 그냥 해줘요. 공장에서 일 안 해도.
농사짓는 데 세금 같은 거는 없습니까?
세금도 아무 것도 없었어. 땅 세도 없고. 땅 아무 데나 파가 숨가 
무~면 되고. 땅세 없었어요. 집에 사는 세금 있는가 없는가? 없는 
제4장.‘모집’남편 따라 식구들이 이주한 최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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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 같애요. 안내고 사는 것 같애요.
그렇게 고생을 하시다가 조금 생활이 나아질 땐 언제였습니까?
조금 나아지는 거는 우리 큰 아들이 17살인가 18살 때까지는 고생
했어요. 그때는 밑에 아들이 좀 커가지고 조금 거더니까. 밑에 아들
이 일하이까네. 일해가지고 번 걸 가정에 보태고 뭐… 반찬 같은 거 
사먹고. 쌀 같은 것도 사먹고. 다 사먹어야 되이끼네. 그래도 채소 
같은 거 안 사묵어도 되이 좀 낫데요.
곡식은 외국에서 오는 거 다 사묵잖아. 거기는 배추나 감자나 숨굴
까, 다른 곡식은 안 되예. 밀도 안 되고 아무 것도 안돼요. 땅이 안 
맞는지. 거기는 싹을 이마이 키워가지고 숨궈야 또 되는데. 여기는 
커 가지고 이마이 크고 그런데 그게 되는교? 안 되지. 고구마 같은 
거 숨굴라면 싹을 이마이 키워야 숨구잖아. 거기 인자 키울라면 인
자 올라오는데, 여~ 뭐 감자가 이래 여~는데 그게 돼요? 안 되지. 
늦어서. 곡식 농사는 안돼요.
11. 브이꼬프 20년, 유즈노사할린스크 30년 살이
사할린에서 이사는 안했습니까?
한군데서 매~(매여) 살았어. 한군데서 살다가 저 마지막에 유즈노사
할린스키라는 데 도시로 내려왔지. 도시로 내려와 살다가 인자 여~ 
왔지. 여기 왔지. 유즈노에 한 30년 살았어요.
유즈노는 도시이기 때문에 농사는 못 짓지 않습니까?
농사 지아요. 살기는 더 좋아요. 안 보내줘. 못 오지. 보내주면 다 
오지. 촌에 있는 사람은 유즈노를 안 받아준단 말이요. 집도 없는지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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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야는지 안 받아주요.
그러면 어떻게 유즈노를 갈 수 있었습니까?
그 때는 일본 사람들 일본 와뿌고 나면 집이 비지요. 그래가 왔지. 
처음 왔던 브이꼬프 거기도 한 20년 살았어. 다른 곳에는 산 적이 
없고 두 곳에서만 살았네요. 유즈노 온 후에도 계속 농사짓고 살았
지. 농사 안 지으면 할 일이 있어야지. 할 일 없는데. 거기서 살아나
온 생각하면 기가 차지.
우리 조선사람 중에서 잘 사는 사람도 있었습니까?
있었지요. 일본시대 때부터 자리 잡아서 유즈노 이런 데 자리 잡아
서 사는 사람은 그냥 부자로 잘 살았고. 또 어느 촌에라도 저 산중 
골짜기라도 자리 잡아서 잘 사는 사람은 잘 살았고. 자리 못 잡은 
사람은 떠돌아다니면서 못 살았고. 
사할린 사시면서 가장 어렵고 힘든 때는 언젭니까?
뭐 힘들 때야 많지요. 남편이 벌어주다가 이제 돈 나올 때 없지. 그
러니까 고생 많이 했지. 그때는 아버지 없으면 제일 작은 아이한테
로 아바이 돈 조금 나오잖아요. 국가에서. 막내이 앞으로. 큰아들은 
안 나오고. 18세 아래로는 쪼매씩 나오요. 18세 넘으면 자기 벌어가 
먹고 살라고. 달달이.
남편이 돌아가실 때 병수발을 했습니까?
그때 내가 43세가 되가 아무 것도 안했어. 일만 했어. 농사만 지었
지, 아무 것도 안했어. 밭에 숨가 놓고 풀이나 매고 그것밖에 안했
지. 남편이 돌아가시기 전에도 댕기야지. 뭐 안 숨거 먹고는 안 되는
데. 시장에도 팔고. 아~들 농사 지아가 다 키왔는데요.
제4장.‘모집’남편 따라 식구들이 이주한 최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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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한인들과의 놀이와 관광
사할린 사시면서 조선 노래는 좀 불렀습니까?
조선 노래 잘하는 사람 잘 하요. 거기도 조선사람끼리 노는 경우도 
있지요. 사할린에서는 어떨 때 노는가 어디가 노는가 알 턱이 있어
요? 우리는 모르지. 조선사람들끼리 모여서 춤도 추고 노래도 하고 
그런 거는 아무 때나 명절 때, 8월 명절, 설 명절. 명절 때 되면 놀
지. 모디가(모여가지고).
여름에 또 시간 있으면 어불려가지고 서로 돈 내가 뭐. 사람 사는 
건 다 한가지요. 맛있는 것도 해가고. 술도 싸가고. 거기는 막걸리 
잘 안 먹어요. 정종 사 먹고. 막걸리는 노국사람 첨 넘어오고 했을 
때 먹었지만은, 지금은 다 막걸리 먹는 사람 없어요. 안 독하다고 안 
먹습니다.
같이 모여가 떡도 만들고 국시도 맨들고 별 거 다 맨들어 묵지. 부
침도 맨들어 묵고.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저런 것도 틀어놓고. 다 
똑 같애요. 사는 짓은, 방식은 한가지요. 한국 노래 다 하요. 소련사
람은 소련 노래하고.
관광 같은 건 안 다녔습니까?
댕기요. 여름 되면 휴가 맡아가지고 다 댕깄어. 온 데 다 댕기지. 저 
큰땅 가는 사람도 가고. 한국도 가고. 모스크바 가는 사람도 가고. 
한국 오는 그거는 인제 뭐 이 중년에 그렇지 옛날엔 그래 못했지요. 
거기 땅 안에서야 옛날도 다 그래 했어요. 옛날도 뭐 영~ 못사는 사
람도 없고 하이까네 거~ 댕기는 사람도 많이 있었어요. 영~ 못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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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못 댕기고.
13. 한국으로 열린 문
사할린에 사시다가 한국 가야되겠다고 준비한 적은 없습니까?
준비하지만 한국에서 안 받는데요. 그래 가고 싶어가 가는 사람도 
있지요. 있지만은 그것도 그건 다 살림이 넉넉하고 뭐 여기서 아는 
사람이 미리 있어서 집이나 사고 한 사람이 가지. 바로 그래는 못가.
사할린에 사시다가 일본 땅으로 가서 사신 사람도 있습니까?
예. 일본 땅에 일본 여자나 일본 남자 데불고 사는 사람들은 일본 
땅 다 왔잖아요. 결국 거긴 조선 사람만 남았지.
이북에서 온 사람도 있던가요?
있어요. 이북에서 온 사람 많아요. 옛날 제국시대부터 와 있잖아요. 
그런 사람하고 남한에서 간 사람하고는 그냥 뭐 가고 싶으면 가고 
살고 싶으면 거 살고. 
한국으로 편지가 된다든가 소통이 처음 됐을 때는 언제였습니까?
90년도지요. 89년도? 88올림픽 하고 난 그 다음해. 올림픽하고 그 
해부터 열리게 됐잖아. 나는 한국에 가장 처음 나온 게 90년도 왔
어. 그냥 인자 친척 찾았다고. 친척 찾았다고 좋다고 인자 친척 방문
하러 왔지. 그래 인자 친정 오이까 친척은 다 있네요. 고향에 그양 
살더라고요. 고향 울산에요.
고향 가니까 아는 사람이 많이 있던가요?
아는 사람 없어요. 아는 사람과 친구들은 다 죽고 뭐. 아는 사람 어
야다가(어쩌다가) 부모들 친구들이나 있을까 없어. 딴 데 다 갔뿌고. 
제4장.‘모집’남편 따라 식구들이 이주한 최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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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자기 고향에 있는 사람 없어요. 다 딴 데로 나갔뿌고. 서울로 
부산으로 다 가뿌고 아무도 없어요. 촌에 농사짓는 사람이나 있을까. 
아는 사람 있긴 있어. 아무개 딸인가 아무개 친군가 있어.
그때 기분이 어땠습니까?
그때 느낌, 그때 느낌이 참 좋았지요. 이래 만나는 걸 평생을 못 만
나가지고 걱정하다가 만나가. 그래 한 달 놀다가 갔지. 젊을 때 화태 
가기 전에 마을 모습이라든가 그런 게 좀 있어요. 동생들은, 밑에 동
생들은 잘 모르겠고. 두 번째 동생까지는 알겠더라. 나머지는 모르겠
고. 조카들은 하나도 모르고. 동생들은 울산에 살고 있어요.
영주 귀국한지는 몇 년이나 되었습니까?
나는 요양원 온지 올해 10년째라. 칠십 몇 살 때 왔어. 칠십 다섯 
살인가? 그 때 왔어. 15년은 안됐어. 딱 십년 됐어. 그때는 농사를 
안 짓고 유즈노 좀 살다 왔응께. 농사를 못 지어 물~만하이 오지. 
안 그라만 오도 않하요. 농사를 지아 물~만 하면 농사 지어 묵지 안
와요. 인자 힘도 없고 인자 농사지을 자리가 없으이까 오지.
이제 평생 여그 살아야지. 인자 죽을 때가 다 됐는데. 건강하지도 않
아요. 아픈 데가 많아요. 인자 죽을 때 다 됐는데 아픈 데가 있어서
요.
영주 귀국하신 후로 자식들이 보고 싶을 때도 있지요?
1년에 한 번씩 가가 만나지요. 1년에 한 번씩 가요. 그래 안가는 사
람도 있고 가는 사람도 있고. 몇 번이라도 돈이 있으면 갈 수 있고. 
그건 개인 돈을 내야죠. 한 번씩은 그냥 갔다 올 수 있어요. 가면 한 
달 정도씩.
제5장. 낳은 자식, 데려온 자식 6남매 키운 장계분
- 평생 농사꾼 조선 여성의 모성애 -
1930년생 장계분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188
 
20)
 구술자는 언니를 ‘형’으로 표현한다. 
장계분 연보
ㆍ1930년(1세) - 경상북도 군위군 출생
ㆍ1939년(10세) - 먼저 도일(渡日)한 남편 따라 일본 시즈
오까현 이주
ㆍ1943년(14세) - 사할린 이주
ㆍ1947년(18세) - 함경도 출신 남편과 결혼
ㆍ1956년(27세) - 남편 사망, 농사로 생계유지
ㆍ1961년(32세) - 경남 창녕 출신 남편과 재혼
ㆍ1981년(52세) - 재혼 남편 사망
ㆍ1998년(69세) - 한국 영주 귀국, 고령 대창양로원 거주
ㆍ2014년(85) - 현재 고령 대창양로원 거주
1. 10세에 일본 시즈오가현 이주
사할린에는 몇 살 때 갔습니까?
나는 절강 장(張)가. 경상북도 군위 거기서 태어나가지고 사할린에 
열네 살. 여~ 고향에 떠날 때는 열 살에 떠났어. 열 살에 떠나가 일
본에 가가지고 4년 있다가. 전쟁시대 때는 너무 먹는 기 바빠가 돈 
가지고 사질 못했어. 먹질 모했어요. 그래가지고 사할린에 드갔어요.
일본은 그때 가족들하고 같이 갔습니까?
우리 형들20)이 오빠랑 다 일본에 있었어요. 그 당시에. 거죽 따라갔
지. 오빠나 형들이 먼저 일본에 가 계신 거지요. 오빠도 뭐 영~ 젊
제5장. 낳은 자식, 데려온 자식 6남매 키운 장계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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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때 드갔지. 아버지도 내~(계속) 일본 생활하고. 열 살 될 때까지
는 고향에서 지가 있었지요.
형제가 몇 남매입니까?
오빠 하나, 여자가 5형제. 모두 6남매. 오빠 하나에 딸 다섯. 그 중
에 난 네 번째. 딸로 네 번째. 밑에 여동생 하나 있어요. 다 내 우
(위)로고, 내 밑에 여동생 하나 있었지. 날 막내이라 하다가 여동생 
하나 낳았어요. 여동생은 한국에서 안 낳았지. 일본에서 낳았어요. 
나하고 나이 차이가 마이 나요. 저를 막내이라 하다가 낳았어요.
일본으로는 열 살 때 가셨는데 그때 누구하고 갔습니까?
오빠, 아버지 다 일본에 계시고. 우리 언니도 시집가가지고 다 남편 
따라 일본 거주하는데. 우리도 가긴 같이 가려했는데 우리 할머니가 
중풍이 들리가지고. 그래가지고 중풍 걸리가지고 돌아가시고 난 뒤
에 3년 지사(제사) 모시고 그 다음에 할머이 없으니까 우리가 인제 
엄마하고 갔지요. 아버지가 나와가지고 우릴 데리고 갔지.
일본에 첨에 어디 살았습니까?
시스오까껭(현)이라 하는 데. 거기 가서 학교 드갈라한께 여기서 열 
살 묵었다 카거든. 그래 가니깐 일본서는 여덟 살에 입학 다 하잖아
요. 그래가지고 말도 모르지요. 내 또 크기도 크지. 딴 사람은 여덟 
살인데, 난 열 살이나 됐는데. 그래가지고 공부하라는 거 내가 안가
겠다고 막 울고불고 해가지고 그래 집에서 좀 배았어요. 집에서 배
우고 그래가 있다가 전쟁시대니까 공부고 뭣이고 뭐 살아나가기 형
편없지 뭐. 밤마다 막 때리지. 뭐 밤에도 잠 못 자요. 그냥. 거~는 
도시니께 더하지요. 사할린 드가니깐 밤중이요.
그때 아버지는 일본에서 무슨 일 하고 사셨습니까?
아버지는 공장에 다녔지. 공장은 무슨 공장인지 모르겠어. 어머니는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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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가건물을 기어놓고 공사장이나 공장, 탄광 등의 인부들에게 식사를 제
공해주는 일.
아무 것도 안 했지. 일본 시스오까껭에 4년 살다가 사할린 드갔지.
일본에 있다가 사할린은 왜 들어갔습니까?
전쟁시대 때 너무 먹기가 바빠서. 돈 가지고 촌에 나가도 쌀을 못 
팔았어요. 먹는 게 너무 바빠가. 근데 사할린에 우리 형이 내 바로 
우에 형이 ‘함바’21)라고 그걸 했어요. 일꾼들 데리고. 밥집. 그래하
인께 아무래도 그때는 다 그거 가지고 했지. 그냥 가서 못 사먹어요. 
요래 종이에다 썼는 거 가지고 가야 인제 배급을 타고 그렇게 했지.
사할린은 사정이 좋다 이래가 간 거지. 그래 아무래도 먹는 기 사할
린이 어둡지. 촌이니께. 그때만 해도 거~는 영~ 촌이고. 거~는 밤
중이고, 여기는 낮이란 말이야. 돈 가지고도 사물 때도 없고. 먹는 
거 때문에 일본에서 살다가 그래 드가가.
일본에서 사할린에 갈 때는 식구들이 많았겠는데요?
식구들은 많지요. 처음에는 오빠하고 언니들 3명, 여동생 하나. 엄
마. 아빠. 할머니 아홉 명이었지만, 그때는 형들은 다 시집가고 오빠
도 장개 가고 다 흩치고 우리 꼬매디만 남았지.
2. 사할린 마까로브 정착, 조선학교 4년 수학
처음에 사할린에서는 어디서 살았습니까?
사할린 마카로브. 마카로브 거게도 그렇기 촌이라고도 할 수 없지요. 
그렇게 큰 도시라고도 할 수 없고. 보통 정도. 사람들도 꽤 살았어
요. 거~ 공장이 있고, 종이공장이 있고, 탄도 나오고 그렇게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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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공장은 제지공장.
아버지가 사할린에 가서는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제지공장에 일했어요. 사할린에서 엄마는 계속 그냥 가사만 하고요. 
그때 사할린 갈 때 내가 열네 살인데, 사할린 가서는 곧 해방나가지
고 학교 열었단 말이야. 한글학교 열었지. 그때 학교 드갔지. 사할린 
가자마자 바로 해방이 됐습니다. 조선학교 들어갔습니다.
나이가 열 넷이면 몇 학년으로 들어간 겁니까?
우리 아버지가 아주 학자요. 거~ 사할린에서는 우리 아버지 따라갈 
사람 없었다고 했어요. 우리 시방 고향에 가면 그때 옛날에 거기 비
석 해놓은 거~ 아버지가 썼는 거 있어요. (사진을 가리키며) 저 작
년에 고향 가서 찍은 거. 저기가 고향 마을. 아버지가 쓴 글씨 비석
이 아죽도 있어요. 아버지는 공장에 일을 하셔도 서기 이런 걸 봤어
요.
사할린에서 조선학교 이름이 기억나십니까?
뭐 기억도 인자 안나요. 내가 아프니까 금방 들은 것도 잊어뿌리고. 
그 전에 한 것도 잊어뿌리고. 사할린 학교에서 뭐 배웠던 것도 기억
이 잘 안나요. 오래 돼가. 배웠던 거 그거 물어보면 뭐 그거. 그때 조
선학교 드가가 4학년을 다녔는데, 졸업을 하다 말았어요. 학교가 없
어져버렸어. 노국사람들 넘어와 가지고. 4년 댕깄다. 졸업은 못했지.
3. 18세에 함경도 출신 남성과 결혼
학교 4년 다니면 열여덟, 일곱 되는데 그 뒤에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때 열여덟 살 시집갔지. 해방 나고 노국사람 넘어와 가지고 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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덮어놓고 뭐 무서워가지고. 우리 때는 전부 클 때 어린 거 다 시집
보냈어요. 영감은 일찍이 돌아가셨어요. 결혼 할 때는 할아버지 스물 
둘에. 네 살 차이. 조선사람이었지요. 남편 고향 북한이요. 이북 함
경도.
시댁은 한 번도 못 가보셨겠네요?
북한이지만은 아버지 어릴 때 사할린 와가지고 거~서 살다보이 남
편도 거~서 났고 한께네 말만 거저 함경도. 그 웃대에 함경도라 뿐
이지 사할린 사람이라.
남편은 어떤 일을 하고 계셨습니까?
고기 잡는 배 선원. 무슨 고기를 잡았는지는 모르지. 무슨 배인가. 
한번 바다 나가면 며칠 있다가 들어오고 하는 그런 게 아니고. 매일
매일 출항하고 입항하고. 월급을 받았지. (영주 귀국하던 해에 중풍
을 앓아 몸 놀리기를 불편해 하며) 지가 반이 중풍 났잖아. 중풍와
가 반을 못 써요. 왼쪽이.
당시 할아버지가 월급을 받아오면 생활하기는 어땠습니까?
생활하기 여유롭지 못하지. 그리고 텃밭을 가꾸지. 집 안에다. 뭐 되
는 건 다 숨구지. 한국에서는 오이도 심고 토마토도 심고 배추도 심
는데, 사할린에서도 그런 거 다 심지요. 사할린에도 쌀만 안 되지 딴 
건 다 돼요. 그거 심어서 집에도 먹고. 또 남으마 시장에 가 팔기도 
하고 또 상점에 갖다 바치기도 하고. 돈을 받고.
그런 수입이 할아버지 벌어오는 것만큼 됩니까?
할아버지 벌어오는 거보다 많지요. 할아버지 벌었는 거 뭐 지(자기) 
벌었다고 지 맘대로 다 썼뿌는데 뭐. 집에는 쪼금 주고. 술도 그렇게
는 안 좋아했어요. 바람둥이야. 할아버지가 생기긴 잘 생깄지. 잘 생
겼으이 바람둥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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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바느질 공장 4년 노동, 연금 계산법
바느질 공장도 젊어서 들어가셨네요?
젊어서 드갔지. 남편 돌아가시고 [바느질 공장 월급] 그거 받아가지
고는 아~ 서이 몬 키아요. 먹고 못 살아. 4년을 다녔는데 도저히 월
급 가지고는 살아나기 바빠요. 네 식구가 먹기 힘들지요. 그 뒤로 계
속 농사를 지었지.
뭐 월급은 하기 달맀지. 그때 아이들은 그렇게 어리진 안했지. 큰 거 
학교에 댕기고. 저거 아버지 돌아가실 때 큰 기 아홉 살 먹었지. 그 
밑에는 일곱 살. 그 밑에는 다섯 살 묵었고. 그래도 지~들이 약발라
서(영리해서) 음식도 찾아먹고 해요. 바느질 공장은 아침에 가가지
고 오후 여섯시나 이래 일해야 되지만, 지(자기) 형이 학교 갔다 오
잖아. 
바느질 공장에서는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쁠라찌. 쁠라찌란 한국말로 뭐라 하노? 도래스(dress)는 일본말이고. 
쁠라찌는 소련말이고. 한국말로는 모르겠어. 쁠라찌는 여자들 옷 입
는 거. 여기에. 옷 이름이지. 조끼가 아니고. (다소 답답한 듯) 아
이~ 이래 덮어씌우는 거. 손에 끼고. 머리부터 덮어쓰는 것도 있고, 
앞에 열리가지고 또 거 단추 잠구는 것도 있고.
바느질이면 손바느질입니까?
미싱으로 하지. 기술자라기보다는 바느질 공장에 드가면 다 그기죠. 
또 우리 집에 틀이 있었고. 집에도 가져오는 거 있으면 받아가 했어
요. 개인으로 온 거 공장에 안 가지고 가고. 개인으로 가져오면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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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도 받아가지고 해주고. 옷을 해가 주면 그 삯 값을 내한테 주지.
옷을 다 재단을 해가지고 기워서 만드시네요? 그럼 옷 만드는 기술
자네요? 쁠라찌 말고는 주로 어떤 옷을 만들었습니까?
그거 하는 데는 그거 하고, 양복 짓는 데는 양복 짓고. 와이셔츠 짓
는 데는 와이셔츠 짓고. 부리가다. 부서 부서가 다 있지요. 막 섞이
가지고 안 하고. 러시아말로 ‘부리가다’라 합니다. 부서.
공장 이름이 기억납니까?
너무 오래 돼서. 거기 일하는 사람이 많았지요. 쁠라찌 부리가다는 
몇 명이나 일했냐면, 한 5, 6명. 또 와이셔츠 짓는 부리가다 몇이 있
고, 양복은 양복대로 거 따로 있고. 이 사람이 내가 바느질한다고 이
거 했다 저거 했다 그렇게 안 해요. 딱 자기 맡은 것만 하지. 부리가
다가 한 집에 열 개나 됐지.
또 옆에 다른 집이 있는 게 아니고. 한 방에서도 방이 크잖아요. 방
이 크니께 이거 하는 사람 여기서 모디가(모여서) 하고. 여기서 또 
모디가 그렇게 한단 말이야.
거기 책임자도 있겠네요?
책임자 있죠. 한 부리가다에 책임자가 있지. 그걸 뭐라고 부르냐면 
부리가제로. 부리가다는 부서. 부리가제로 요거는 책임자. 책임자 우
에 또 있고. 여긴 사장이라 하는데, 우리는 마스제르. 공장 총 책임
자. 공장장. 그거 우에 또 높은 사람 있어. 그건 나찰리꾸. 이게  사
장님이라. 나찰리꾸 사장이고, 마스제르는 또 중간급이고.
일을 4년 하다가 나는 못하겠다고 하면 허락해줍니까?
하지요. 그럼 공장 일을 안 하면 나이 들어가 연금이 적게 나오는 
기 아이라, 일을 안 하면 안 나와요. 그 연금이라 하는 거는 어째나 
하마 내가 월급 찾을 때 내가 번 월급을 다 국가에서 띠요. 다 띠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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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 내가 필요하마 내 죽을 딴에… 내가 일을 마이 해가지고 월급
이 마이 받고 좋으마 연금도 많고. 내 월급이 적고 일도 약하게 해
가지고 하마 연금도 조금이라. 그 연금이라 하는 거는 내 일할 적에 
내 벌었는 돈을 띠놨다 저축해놨다 내 죽을 때까지 주는 거라.
자기 노력의 결과네요?
그렇죠. 그렇다보니께 내가 일 안하마 연금이 없어요. 난 4년 일했
는 거 연금이 없어요. 적어도 25년 해야 돼요. (같은 방에 거주하는 
네 분 할머니 중에 연금 받는 할머니가 있는지를 묻자, 한 분을 가
리키며) 저 양반은 받아.
저 할머니는 무슨 일을 하셨는데요?
모르지요. 우리 사할린에 여~ 와서 알았지, 사할린에 있을 때는 모
르고 지냈어요. 난 연금 없어요. 나이 들어서가지고 내가 벌어가 먹
다 내가 70살에 여~ 왔단 게요. 연금 없이 내 벌이가 먹다보이.
연금은 내가 필요할 때 달라 하면 그냥 줍니까? 아니면 나이가 몇 
살 이상 돼야 됩니까?
예. 거 여자는 50살인가? 남자는 55살인가 그렇고. 연금을 많이 받
는 사람은 나이 들어가지고 생활이 넉넉하지.
5. 농사지어 자녀 치송
사할린에서 자식들 어릴 때 키우면서 농사를 지은 거네요?
땅이 넓었어요. 한마지기 넘었어요. 그게 집 안에 있지 않고 집 옆
에. 한마지기 거게 다 채소를 숨구지요. 여러 가지 숨구다 보이 거기 
숨굴 꺼 얼마 안돼요. 감자는 들밭에 숨구고, 채소만 집안에. 배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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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도 있고 무도 잘 됩니다. 일본 가서 무씨 갖다 숨갔는 기 이
렇게 굵고 포대 안에 옆으로 못 였고 세워요. 좋아요. 땅에는 돌이라
고 없는데. 땅이 포실 포실한 기 좋아요. 근데 여기 한국에는 보마 
발~간(붉은) 기 황토 흙이다. 땅이 여물고.
농사를 몇 년간이나 지었습니까?
젊을 때부터 했지 뭐. 여~ 올 딴에 했지. 오기까지 딴 거 할 거 없
고 흙을 주무러야 뭐 하지. 남편 일찍이 돌아가셨어. 서른하나에 돌
아가셨어. 그때 내가 스물일곱인데 아~ 서이만 남겨두고. 다 어리지
요. 열 살도 안됐는데 내 손으로 다 주무리 키았지.
농사 지어갖고요?
농사도 짓다가 또 사회 나가 바느질 공장에 드가가지고 바느질을 해
보인께 아~들은 자꾸 커가고 살아나가기 더 바빠요. 그래가지고 이
거 때리치우고, 내가 농사질을 드가. 그래 일하다가 때려치우고 농사
질로 드갔지.
농사짓는 것은 품종마다 철이 있지요?
그렇죠. 추울 때는 뭐 농사가 안 되지 않습니까. 겨울에는 아무 것도 
안 되고. 1년을 치면 사할린에도 일찍이 하마 4월 달에는 뻘건 무시 
그거는 밭에 씨가 드가요. 무 씨앗을 뿌립니다. 무가 제일 빨리 드가
요. 그 다음에 양배추. 그거는 온초(溫草) 해야 돼. 하우스 모종을 
맨들어야 돼. 하우스에서 모종을 맨들어가이고 밭에 나가지. 그거는 
하마 3월 달부터 해야지. 날씨 좀 쌀쌀하니까 따뜻한 데서 모종을 
해야 된단 말이지. 불 때가지고.
그리 하면 생산은 캐내는 거는 7월 달에 나가요. 여름이죠. 따시죠. 
모든 게 그렇다는 게 아니라, 뻘건 무시 같은 그거는 일찍이 나가요. 
5월 달이면 나가요. 채소는 인제 잇달아 나가지. 무하고 채소 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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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거도 했지. 여러 가지를 해야 여러 가지 먹고. 무, 배추, 파 또 
잔잔한 거 있고 뭐. 토마토도 하고 오이도 하고. 호박. 상추 같은 거. 
사할린은 상추 같은 거 농사로 치도 안해요. 자기 먹을 것만 쪼금 
하지.
이런 채소 중에 가장 수입이 많은 거는 무엇입니까?
수입이 많은 거는 오이하고 토마토지. 한마지기 여기서 200평이라던
데, 이 정도 할라 카면 거의 뭐 밭에서 농군처럼 살다시피 해야 되
지. 살다시피 해야지. 비료도 줘야 하는 등 거름도 하고.
6. 재혼, 낳은 아이와 기른 아이
서른한 살에 남편하고 사별하셨으면 아직 젊은데 재혼할 생각은 없
었습니까?
재혼했지요. 아~들이 크고 내가 농사짓는 것도 내 혼자 팔아야지 갖
다 바치야지. 그래 내 혼자 다 몬하잖아. 아~들은 학교 댕기고 공부
해야지. 그래 영감 얻었어요. 내가 서른둘엔가? 한 5년 뒤에 했지요.
재혼한 남편은 어떤 분입니까?
한국사람. 그 양반 고향이 여기 있어요. 경남 창녕. 창녕이 근처라 
하던데. 가까이에 있다 하데요. 창녕. 형제간도 있고, 누이도 있고 
다 있어. 가봤어요. 재혼한 남편 사이에는 아이 안 낳았어요. 거~ 
말 다할라마 말이 많애.
소련 여자하고 살았단 말이야. 거기서 아들 하나, 딸 둘. 딸 둘은 쌍
둥이라 가지고 놓기는 둘 낳았는데 아~는 서이 됐어. 그래가 키우다 
인제 사할린보다 자기는 살다 온 고향, 여자가 고향이 인제 큰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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께 거게 부모들 있고 형제간들 있고. 거~ 갈라 한께 그 짝에서 하는 
말이 “올라만 니 혼자 오지 조선 종자라는 거는 딜고 못 온다.” 그래 
됐어요. 반대를 한 거지.
그래가지고 남편한테 그것도 없이 모르게 살살 일하러 댕기미 다 팔
아가 조지가지고. 그래 돈을 만들어 거머쥐고 아들 서이를 재아놓고 
남편은 밤일 간 사이에 가뿌맀대. 혼자 챙겨가지고 갔뻐렸어. 조선 
종자는 데리고 못 오구로 한께네 남편도 못 데리고 가고, 아~도 못 
데리고 가지. 그래 지 혼자 갔잖아.
큰땅 살았네요?
고향이 큰땅이지. 살기는 사할린에 살고. 그래가 가 가지고 남편이 
아~ 서이 데리고 한 1년 넘어 살았어. 남편이 사람이 점잖하고. 노
국 여자하고 살아도 그 마을에서 대우받고 점잖했었어. 그래 내도 
혼자 아~ 서이 델고 사이 그래가 인자 아~ 데리고 두어 달 살아보
이 도저히… 아~ 서인께 자기 일 댕기야지. 그래 힘들어서 안 돼.
그래 아버지가 아~들을 국가로 줬단 말이야. 탁아소에다 맡기고 자
기 혼자서 살고 있는 판이지. 그래 마을에서 모두 나한테 그 양반한
테 권하고. 내가 싫다 했었어. 내 아~ 서이 데리고 남편 얻어가 뭐
하겠노? 여태까정 살아나왔는데 안 간다고 그래 해도 사람 놓치기 
아깝다고 아깝다고 그래가지고 참말로 남 말 듣고. 또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자꾸 그래 보대꾸인께(부대끼니까). 그 오
빠라는 뭐 형님들이 얼매나 권해사코 그래가 결혼을 했어요. 그래 
해가지고 그 아~를 내가 찾아왔어요.
국가에 맡긴 재혼 남편 아이를요?
예. 맡긴 아~를. 우리가 인제 아~를 놓아가지고 키우기보다 ‘니는 
니 아~ 서이를 앞에 놓고 키우는데…’. 자기도 사람인데 말은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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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왜? 자기 눈으로 보고 그 ‘가슴이 얼마나 찢기겠는가?’ 이런 생
각이 들지요. 말도 못하고. 그래인께 놓을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 아
이를 데리고 오자고 그래가지고 그 아~ 데리고 올 적에 몇 살 묵었
노? 조 쌍디~(쌍둥이) 고거는 안즉 입학 안하고, 여섯 살 먹어가지
고 데리고 오고. 고 오래비는 아홉 살 먹었어. 그래가 아~ 서이 내
가 쎄아가(주장해가지고) 딜고 오잖아.
그래가 인자 아바이가 또 아~ 딜로(데리러) 간께네 헛걸음하고 왔
어요. 거 아~를 안준다고. 키울 사람이 좋다 해야 주지 아버지 말만 
듣고는 이 아이를 몬 준다고. 거~서 책임자들이 아~를 안 줘요. 그
래 헛걸음하고 혼자 왔어요. 그래가 내 하고 둘이 갔잖아. 둘이 가 
가지고 다 찾아가가지고 와가지고.
7. 기른 정, 자녀 교육과 혼사
여섯 명을 키웠네요?
여섯 명을 키웠어요. 식구가 여덟입니다. 그래 공부하러 하나하나 뛰 
나가인께 그래 여섯 명 키아가지고 그 아~ 서이도 내가 출가 다 시
킸고, 공부 다 시킸고. 거~ 여섯 명 키우는데 딸이 다섯이라. 아들
은 하내이요. 비행사 대학 마쳤어. 직업을 그걸로 합니다. 그래 사할
린 비행장에는 다 우리 아들 책임이다. 사할린 비행장에. 관절이 나
빠가지고 비행기는 몬타고 관리를 하지요.
나이도 많겠습니다?
나이 많지요. 인제. 환갑 다 지냈어. 아직 일을 합니다. 그리고 키웠
는 딸이 올해 내가 몸이 이래 사할린에 못 가니까 딸이 날 보러 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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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요. 사우하고 딸하고 왔다 갔어요. 키운 정은 다 인정을 해주지요. 
근데 인제 어마이가 안죽 살아있어요. 큰 딸 어마이가 살아가 있는
데 “내한테 돈도 있다. 집도 있다. 너거 서이가 와가지고 날 죽을 딴
에는 날 거다~주고(부양해주고), 내 돈이나 집 판 거 가지고 너거한
테 다 줄테니까 날 데리고 가달라”고 그래 편지오고 그렇게 한다요. 
근데 돈 줄라 하는 어마이한테는 안가고 한 푼 없는 내 빈털터리 내
한테….
그래도 키워준 정 때문에 그런 모양이네요?
“우리 클 적에는 엄마가 없었는데, 엄마 하나밖에 없었는데 우리가 
다 크고 나니까 어떻게 엄마가 둘이 되느냐?”고 하면서 아들도 안가
고 딸도 안가고. “돈 주께. 집 팔아가 주께. 오라”고 해도 안가고 삐
쩍 마른 내한테 와서 댕기갔어요. 본래 엄마는 큰땅에 살아요. 안주 
안 죽고 살아요.
여섯 명 자녀를 키우는데 고생을 마이 하셨겠습니다. 남편은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남편은 창고에 ‘웬또르그’라고 군대 들어갔어. 군대들 사할린에 사는 
양반들이 다 온단 말이야. 그 군부에 그 군부 간또라 큰 창고가… 외
국 큰땅에서 물건이 막 오고. 또 여기 군부에서 동네서 물품 타러 
오고 하마 그 물건 받아들이고 그 물건 내주고 그래 하는 일 했어. 
창고쟁이지. 월급 받는 거지.
재혼한 후에도 계속 농사는 지었습니까?
그래. 영감 또 죽었뿌고. 영감이 오십 일곱에 죽었나? 더 오래 사셨
으면 좋았을 껀데. 그래 말이라. 재혼 남편하고는 다섯 살 차이. 만
날 때 내가 서른둘이니까 거기는 서른일곱 살이겠다. 그지요? 남편
이 죽고 난 뒤에도 계속 농사는 지었지. 그래 하다 여기 왔지요. 57
제5장. 낳은 자식, 데려온 자식 6남매 키운 장계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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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에 죽었으니까 그때는 자식들이 마이 컸지. 다 출가시켰어.
6남매 자식이 세 사람은 러시아 핏줄을 이어받았는데, 조선 사람하
고만 결혼한 게 아니지요?
우리 딸 서이는 다 한국 사람한테 시집가고. 거 아~ 서이는 하나는 
한국 사람한테 가고, 둘이는 소련 사람한테 가고. 그래 내가 키아서 
내가 잔치도 다 해주고 다 했어. 혼사까지 다 시켰지. 거 저거가 그
래 말해. 시방 아~ 하나 둘이 가지고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엄마는 
여섯 명이나 어떻게 키아냈는가?
여섯 명 자녀를 공부도 마이 시켰습니까?
공부는 저거가 할라 하는 대로 12년 끝마치고. 아들 하나는 사할린 
비행사 대학까지 했지. 딸 다섯 명은 12년. 12년 끝나면 대학간단 
말이야. 바로 대학 가요. 여기 같으면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한 거지
요. 고등학교까지 다 한 거지. 거~는 고등학교 안가고 12년만 끝마
치면 대학 가요. 한 학교에서 12학년 하면 대학을 바로 가요. 그래 
하고 자기 기술학교 갈라마 가고. 그래 딸 둘이는 쌍둥이 미용사 공
부 갔어요. 내 놓은 딸은 그거 창고 일하는 공부 갔지. 여섯 명 자녀
들은 다 일을 해요. 자기 직업 따라 공부 다 했으니까. 12년 공부하
고 미용사 학교가고. 또 뭐 창고지기 드가고. 또 판매원 공부하고.
남편이 살아서 벌어줄 때는 생활이 나았을 건데 돌아가시고 나서 생
활은 어떻게 했습니까?
월급 넣어주고. 텃밭을 해도 거들어주고 하이 내가 좀 수월했지. 농
사지을 때 남편 월급하고 비교해 볼 때 농사지어서 시장에 판 돈이 
아무래도 많지요.
사할린에는 월급이 많지가 않은 모양입니다?
하는 일에 따라서. 사할린에서는 뭐 건축부 같은 데에나 큰 어장 같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202
 
은 데나 큰 벌목하는 데는 그런 데 하마 돈 많지. 교사라든가 의사
라든가 그런 사람도 돈 많지요.
8. 영주 귀국 14년째
자식들은 몇 남 몇 녀입니까?
딸만 서이. 한국에 다 따라온 게 아니고 딸 하나만 여~ 부산에 왔어
요. 그 딸은 온지 올해 10년째네.
한국에 영주 귀국하신지는 몇 년이나 됩니까?
내는 온지 14년 됐지. 내가 먼저 왔지. 내가 여기 올라하이 아~들이 
영~ 못가그러 말리는 거 내 고집에 내가 쎄아가지고 왔단 말이야. 
여~ 와가지고 있다가 이렇게 중풍이 왔잖아. 내가 여~ 올 때 70세
에 왔어요.
부산에 있는 딸이 여~ 안 올 낀데 내 몸이 이래가지고 지가 나왔다. 
그렇게 못 가그러 하는 거 내가 쎄아가지고 왔다고. “그래 엄마가 
우리 내삐리고 가서 얼매나 잘 사는가 보자.” 하고 그렇게 하고 왔
어. 그래 와가지고 또 얼마 안 있다가 내가 중풍 왔뿌고. 그래가 저
거가 이사나왔대. 한국으로 영~ 나왔지. 나와가지고 “엄마가 우리 
내삐리고 가면 어디로 도망가겠노? 미국까정 가도 내 따라 간다”고. 
“뭐 도망와도 한국밖에 못 왔네?” 그래. 사우가 그런께네 내 한국 왔
다가 저거 이사 오기 전에 말만 사할린이지 여~ 와서 사는 거 한가
지라. 그래가지고 부산에 자리 잡아가지고 온지가 10년째네.
왜 자식들은 한국에 못 가게 하던가요?
저거가 있으인께 우리를 놔두고 누구를 믿고 엄마가 혼자 갈라는가 
제5장. 낳은 자식, 데려온 자식 6남매 키운 장계분
 
203
하고 못 가그러 했지.
그런데 왜 한국으로 영주 귀국하려고 했습니까?
고향도 그립고. 내가 고향 땅에 열 살에 나갔다 보이 고향 땅도 밟
아보고 싶고. 또 내가 내 손으로 주무르고 돈 벌 적에는 내가 아무 
맘도 없지만은 내가 앞으로 저거 신세만 지지. 내가 돈 벌 힘은 없
잖아요. 그린께 가다보이 저거 짐 들어준다고 올라고 했었지 뭐. 저
거는 절대로 안 된다. 그래 와가지고 얼마 안 있다가 이렇게 됐어요. 
너무 고집피우고 와가지고. 우리 내삐리고 왔다보이 여~ 와서 아프
다고. 그런 말을 하지. 거~ 있었으면 괜찮을 낀데 그 칸다. 다 지 
팔자지 뭐.
제6장. 작은 체구로 큰땅을 주유하며 살아온 유유원
- 큰땅 거주 18년 만에 영주 귀국 -
1916년생 유유원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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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원 연보
ㆍ1916년(1세) - 경상북도 봉화군 대흥동 출생
ㆍ1937년(22세) - 고향에서 결혼
ㆍ1943년(29세) - 경북 왜관 주둔 일본 군부 근무
ㆍ1945년(31세) - 사할린 일본 군부 전출 이주, 해방 후 
탄광 근무
ㆍ1947년(33세) - 구소련에서 수년간 벌목 노동
ㆍ1985년(70세) - 소련 이주, 라스돈과 바따이스키 등 18
년간 거주
ㆍ2004년(89세) - 한국 영구 이주, 대창양로원 거주
ㆍ2014(99세)- 현재 대창양로원 거주
1. 봉화 대흥동 출생과 서당 공부
고향은 어디십니까?
고향 경상북도 봉화군 명현면 대흥동이라 그러는데. 그 전에 봉화 
‘명호’라 그는 데는 아주 촌이라는데요. 안동을 갈라면 40리고, 춘양
을 갈라먼 30리라. 그런데 구 한문을 배우다가 부모한테 배우고. 3
년을 부모한테 배우다가 서당에 가서 1년을 배우고 나이 안동 경찰
서서 와가지골랑 선생을 잡아 갔거든요. 선생을 잡아 가지고 갔는데. 
그 날도 가는 날도 안 오고 그 이튿날도 안 오고. 사흘 만에 왔는데. 
와가지고 낼 모레는 내일에는 저 우등생, 차우등생 저 안동 경찰서 
가야 된다고 그러더라고. 가거들랑 글을 꼭 배워야 된다고…. 선생이 
제6장. 작은 체구로 큰땅을 주유하며 살아온 유유원
 
207
시키기를 글을 안 배우면 나라도 못 돌보고 가정문호도 못 돌보고. 
거 노동밖에 못 하다보이 백성이 되거든. 나라를 돌봐야 그게 백성
인데, 나라도 못 돌보고. 글은 꼭 배워야 된다고.
왜 서당 선생을 잡아갔습니까? 
그때에 구 한문 배우면 일본사람이 잡아갔다 아이오. 잡아다가 묻고. 
여러 가지 이래고 말 잘 모하모 이틀 밤 사흘 밤 구릿간(감옥)에 자
고 오고 그랬는데. 그래 대답을 하인께네. 글은 꼭 배워야 된다고 하
이 거~ 경찰서 대장이 가만히 생각해 보골랑 나중에 써가지골랑 서
당보 딱 찍어가지고 이거 갖다가 서당에 붙여놓고 배워야 되지. 이
거 이래뿌면 순사가 잡아가인께네 꼭 잊어버리지 말고 붙여 놓고 배
우라고.
공부는 어디까지 했습니까?
주역(周易) 배우고 명심보감(明心寶鑑) 배우고, 사서(四書)를 조금 
배우다가 떨어졌다. 서당에. 서당에 22년이라. 집에서 3년 배우고 
25년이다. 집에서는 아버지가 갈쳤지. 아버지도 보통 선생은 된다. 
뭐 큰 선생은 못돼도 보통 선생은 된다.
2. 22세 결혼 후의 생활
형제는 몇 분이나 됩니까?
형제는 서인데, 3형제인데 죽었어요. 동상도 죽고, 뭐시기도 죽고. 3
형제 중에 내가 둘째요. 다른 형제는 일본으로 안 갔어요. 일본에는 
내 혼자 가고.
결혼은 몇 살에 하셨습니까?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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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22살. 사할린 가기 전에 자식 하나 있었어. 하나 자식 있었는
데, 그것도 죽었다. 전쟁시대에 죽었다. 6.25전쟁 때.
결혼 후 무슨 일을 하고 살았습니까?
그때 뭐 사방 댕기면설랑 북선(北鮮)에 가서 탄도 파다가, 우거재 
가서 금도 파다가 온갖 짓 다 하고. 또 그래 댕기고. 이래 해보이 우
거재 가가 금광에 가가 일 해봐도 그것도 뭐 그렇고. 북선에 가가 
탄광에 일 해봐도 그것도 그렇고. 저저 거두(톱) 뭣이 챙기가지골랑 
촌에 댕기면설랑 저 솥통 없는 사람 솥통 값 받아가지고 쓰는 거 맨
들어주마 그거 대통령 월급보다 낫다.
벌이가 좋았는 모양입니다?
벌이 좋았지. 거 잘 먹고, 잘 살껜데 일본 그 군부에서 불러가지고 
군대에 가라 그래가지고 그래 갔더만. 저 북선에 아우재 탄광에 한
국에 있을 때 탄도 파봤어. 북선에 가면 탄산(炭山) 있어. 거기서 하
고. 여기 산에 솔도 비~가지고 거죽 가지고 써가주골랑 널 맨들어가
지고 팔아먹고 그랬다이. 그게 돈이 대통령 월급보다 더 나온다이.
우리 아버지 시대는 참 어렵게 못살았어. 뭐 콩잎사구, 팥잎사구 그
거 가지고 양석을 하고. 농사진 거는 일본사람이 공출로 다 뺏어가
고. 참 못살았어. 그랬는데 거 뭐 촌에 댕기면설랑 솥통 없는 사람. 
솥통 없는 사람 매~달라꼬 청원서 써가지고 말야.
면에 가 가지고 저 이사람 솥통이 없다보이 솥통 주라고. 거 인제 
면에 청원서에 도장 받고. 그 주라는 허가 뭣이를 받아 가지고 저 
명인소(?) 가 가지골랑 우리 이 아무 것이가 촌에는 솥통이 없으이 
솥통 값 달라고. 명인소 갖다 주면 말이야. 주인이 산에 데리고 가 
가지골랑 이런 소나무 강대 죽은 거 그거 인제 비가지고 솥통 파라
고 주거든. 그거 비가지골랑 끝다리 좀 공이 되고 이런 거 공이 조
제6장. 작은 체구로 큰땅을 주유하며 살아온 유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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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있고 나쁜 거는 끊어가지고 솥통 파가지고 그 사람 주고. 밑에 
좋은 거는 말이야. 끊어가지골랑 온 판으로 널 60원 하고. 널 솥 60
원 하고. 어중지(질이 낮은 것) 말야. 온 판도 아이고 삼다구도 아이
고 어중지는 30원. 나쁜 거는 25원. 뭐 이래 받고. 삼다구 그거는 
말이야 .좋은 거는 20원 받고. 나쁜 거는 15원 받고.
이래 팔아가지골랑 밤에 전하는 것도 도장도 안 찍고 사람 안 볼 때 
전해야 되거든. 안 볼 때 전해가지고. 그 전해는 것도 밝을 때 전해
는 건 돈 쪼맨침 쭈비가도(훔쳐가도) 말야. 밤에 가마이 지고 나오
는 짐은 말야. 시(세)목 준다. 낮에 주는 거 시목 준다. 팔아가지골
랑 주머니에 돈을 여~가지고 장에 가 가지골랑 정종 한두 병이나 
시(세) 병이나 사고, 문어 달구리 한 개나 사가지고는 명인소 주임
한테 그 놈한테 짊어지고 가 가지골랑 우리 솥통을 값을 좋은 거 저
거 하다보이 그냥 있을 수 없어서 좋은 거 술 한잔 사가지고 왔다. 
보이 말야. 우리 한 잔 먹자 말이야. 거 술 진땅 먹고 돈 내가지골랑 
이거 우에는 나쁜 거는 솥통 파주고. 밑에 좋은 거는 남기(나무) 아
까바서 널 만들어 팔아가지고 돈을 가져왔으니. 내 혼자 먹으면 안 
되이 우리 둘이 노니자고(나누자고) 반을 딱 갈라놓는단 말이야. 
거~ 갈라서 이거를 당신 하라고.
일본 사람이 좀 배운 사람 틀린다. 한데 합해가지고 시모가치(세 사
람 몫)를 딱 놓는 웤서에 시모가치를 딱 놔가지고 두 모가치는 나를 
주고, 한 모가치는 자기가 한단다. 서에 너무 적게 저거하냐고 내가 
말하모, 당신이 욕봤으니 두 몫은 당신이 갖고, 나는 가마이 있다보
이 말야. 한 몫은 또 고맙고. “참 내년에도 솥통 값 요구되거들랑 오
라”고. 내 봐서 가마 좋은 거 골라주거든.
그 뒤에는 갈 거 같으면 뭐 고마 남은 눈이 무서워서 어두껌껌한 때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210
 
나오지 뭐. 그 사람 봐야 뭐 못 본 척하고 치워뿌고 뭐. 그래 팔아가
지고 그래 한 1년 하인께네 한 철에 1만원이나 생긴다이.
우리 부치는 전지가 논이 열 몇 마지기고. 열 서 마지긴가 열 두 마
지긴가 되고, 밭이 한 이십 마지기 되고. 700원 주고 샀어. 그 당시
에 700원 주고 샀다. 700원 주고 그거 사가지고 고마 공출하러 온 
사람들 와도 뭐 그 대주면 되고. 조금 해도 고마 이렇게 먹고 산다.
3. 일제 강점기 왜관 군부 호출
일제 강점기에 고향 문경까지 일본사람들이 들어왔습니까? 
22년을 배우고 나니 1943년도라. 1943년도에 왜관 군부에서 오라 
그러거든요. 가인께네 그때 1943년도에… 그 전에 소련하고 일본이 
싸우고 중국하고도 싸우고 미국하고도 싸우고 이런다고 하이 지금 
디기 바쁘다 보인께네 말이지.
22년을 공부를 했다 보인께네 전쟁할 때엔 글을 쓰라 하더라고. 그 
구 한문만 배웠다 보이 일본말 모르지요. 모르다 보인께네 글을 써
가지고랑 그렇게 화답을 한단 말이라. 아~ 지금 일본나라는 적은 나
라가 말이지 큰 대국을 3국과 전쟁을 하고 이랬다 보이 군인도 없을 
거고 무기도 없을 거라. 그르이 인제는 아무 것도 없다 보인께네.
만약에 적군이 한 부대에 들어올 거 같더라마 뭘로 막겠는가? 이제
는 군인이 없다 보이 무기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다 보인께네 소왕시
대매~로 저 산태골 너른 산태골에 가서 물 마이 내려오는 너른 산
태골에 가 가지고 군부를 채리고, 그 군부 밑에는 저 물을 막아가지
골랑 바다같이 해가지골랑 크게 물을 막아서 3년을 막던지 4년을 
제6장. 작은 체구로 큰땅을 주유하며 살아온 유유원
 
211
막던지 몇 해를 막아서 물을 막아가지고 적군이 들어올 거 같으면 
그 물을 터자가지골랑 막 거 군도(軍道)를 걸게같이 이래 군도를 닦
아놓고. 물을 터자가지고 머슥하고.
산에다가 숨은 군도를 닦아놨어. 닦아서 놓고 거기다가 총 잘 놓고 
하는 아주 이런 군인을 뽑아 가지고 거게 복병은 50명이나 30명이
나 복병을 시키고. 만약에 적군이 1만 명이 들어올 거 같으면 그 물
을 터자가지고 그러고. 그래 할 거 같으면 많은 군부 다이도(다가와
도) 뭐 40명, 50명이 대적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을 거 같으라면 가
마이 고마 국가 항복을 하지. 인제는 그 수밖에 없다고 했지. 그만큼 
일본으로서는 절박한 시기라.
참 서른한 살에 군부 들어가 가지고 낮으로는 일하고 밤으로는 공부
하고 내 참 고생 마이 했소. 그게 원통하다이. 그거 공부해가지고 저 
일본 사람 군부에 일 하다가 그거 떨어지고 탄광에 탄 파고 이래 하
는 거 참 원통하고 억울하다이. 대동아전쟁 시기에는 뭐 공부하고 
글 배우니라고 가지를 모하고. 나~도 어리고. 대동아전쟁 때 한국에 
있었지. 대정(大正) 6년생이라.
4. 일제 군부 명령으로 사할린 이주
문경에서 태어나서 사할린에는 몇 살 때 가셨습니까?
화태에 갈 때에 서른한 살에 갔다. 그때가 일본시대지. 이러인께네 
거 내가 그때 서른한 살 먹었어. 그 대장이 말이야. 나를 오른쪽으로
는 끌어안고 왼손으로는 글 쓴 걸 이래 드~다(들여다) 보걸랑. “너 
이렇게 쓸 줄은 몰랬다.” 그러지. 화태 가 가지골랑 이렇게 하라.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212
 
한국에서 화태로 가실 때에 어떻게 어디로 갔습니까?
오당이 군부로 갔어요. 그때는 비행기가 있기는 있지만은 일본 땅에 
비행기가 세대 밖에 없어. 쪼매꼼한 거 사람 둘이서 타고, 하나이서 
타고 하는 그 전쟁하는 데 쓰는 '셍또끼'라고 고마 그 세대밖에 없
어. 화태는 있어야 남그로(나무로) 맨들어 가지고 이제 적군들이 보
고 비행기 있다고. 비행기 장소 전통적으로 맨들어서 거지불(거짓) 
비행기라. 그런 게 있고 했지. 그때는 비행기도 없고. 저 육지에는 
기차로 가고. 바다에는 배로 가고. 그래 가 가지고 여~서 저 부산 
3.8선서 화태 3.8선은 2만 1천리라.
조선에서 군부 명령으로 사할린 어디로 갔습니까?
화태 군부에 젤 높은 사람 밑에 인제 거~ 가서 인제 가보이. 군부에 
가보이 춥기도 얼매나 추워. 벽돌을 가지골랑 집을지~가지고 해놨는
데, 한 데(건물 바깥)가 영하 40도 갈 거 같으마 방안에는 영하 42
도, 41도 그래가 나가거든. 그래 추바서 뭐 일본 처녀들이 와가지골
랑 거 뭐 밤새도록 스토브에 불을 때주고 탄을 여~서 불을 때주고 
그래도 추바서 뭐 “아이! 내 여~ 추바서 얼어 죽겠다. 못 있겠다”고.
그르이 한국서 의복도 뭐 전시다 보이 뜨시게 못 입고 이러다보이 
못 있어서 나이브찌로 가 가지골랑. 나이브찌 그 밑에 마~ 큰 사람
이 200명이나 100명이나 뭐 큰 경우는 한 250명 밑에 있는 데, 2
층에 거긴 뜨시다 아이오. 거~ 가서 있고. 공일날, 반공일날 내리가
마 반공일날 저녁 자고 공일날 저녁 자고. 이틀 저녁 자고 이틀 일
하고.
그래 나이브찌 올라가가지고 탄광 안에 그래 있다가 한 이태가 조금 
덜 돼가지고 일본이 손 들어가지고… 그 군부 대장이 뭐라 그런지 
아나? “너거 조선사람이 전부 뭣이를 하든 저 조선보(조선국적 ?)를 
제6장. 작은 체구로 큰땅을 주유하며 살아온 유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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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내더라도 너는 내지 말고, 일본보(일본국적 ?)도 그냥 가지고 
있다가 일본으로 우리와 같이 갈 거 같으마 니 평생에 마음대로 잘 
하고, 하는 대로 다 요구대로 되고 잘 먹고 잘 사니 일본으로 가자.”
아~ 내가 이태(2년) 벌어논 돈이 2만 6천원이다 보이… 2만 6천원
이면 그때도 참 커요. 지금 2억 6만원보다 더 많다요. 그래 조선 갈 
거 같으마 부모, 동지, 처자한테 가 가지고 조선 갑부질하고 잘 살 
건데, “내 안가겠다”고 그런께네. “니 내말 잊어버리지 말고 꼭 기억
해놨다가 보라”고 해.
소련 사람이 그때에 소련에 스탈린이 대통령 했거든. 스탈린이 저 
막~ 사방 여러 나라 돌아댕기면서 백성들을 군대를 머슥해가지골랑 
돌아댕기며 선전해가지고. 소련 머지땅으로 식민지국으로 돼가지고 
있는 게 열 두 나라라. 열 두 나라 사람들 제일 나쁜 사람 아주 말
도 안 듣고 뭐 높은 자리에 일해도 아주 나쁜 사람 그런 사람 화태
에 전부 보내놔. 도적질도 디기(매우) 잘 하고 이런 걸 고마 화태에 
보내놨거든. 있어보이 그 돈 썩어가지고 머슥한 뒤에 소련 사람 넘
어와서 딴 사람들은 전부 다 목 메달아 죽고, 칼로 가지고 자기 목 
자기 찔러 가지고 엎어져 죽고. 소련 초가 100도거든요. 사람 먹는 
초가 100돈데 그걸 대나무 끊어보걸랑. 가는 대나무 끊어보고, 먹고 
죽어불고(죽어버리고).
조선사람이 그렇게 했습니까?
조선사람 높은 데 일하던 사람은, 높은 자리 일하던 사람은 다 그래 
죽었거든. 그래 내 하는 말은 사람이 살아야 끝을 보고 뭣을 알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아이~인제 살 수가 없다는 게지. 일할 줄을 
모르지. 이 뭣이 일 안하고 글 써가지고 왔는데, 사무원 낮은 사무원
에 앉아봤자 뭐 돈 몇 푼 안주고 이러인께네 같이 죽는 게 낫다고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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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죽었뿌고. 나는 어려서부턴도 어려븐 가정사서 일도 모하는 일 
없이 다 잘하고. 그래가지고 막 소련서도 내 젊을 때는 제일 첫째가
는 일하고 댕겼다.
서른한 살에 화태로 가실 때에 가족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가족들 따로 부모 없이 가면 옆에서 봐주고 이래. 나는 혼자 갔지. 
우리 집안은 혼자라. 가족들은 문경이 놔두고. 화태에는 가족들 데리
고 가서 살림 할 자리가 못 된다. 추바서 뭐 못 살아요.
5. 사할린에서의 일제 군부의 일
사할린에서 거주했던 마을이나 도시는 어떤 곳입니까?
돌린스크는 안 살았어요. 부이꼬에서 오단이 살고. 뭐 모르는 데는 
없어요. 내 저 사할린과 저 가와카미, 돌린스크, 소베스키, 우수모레, 
지하, 부가초브, 워스도치니, 자소르네, 우드로이우드로이네, 마카로
브, 그리빈스키. 이 뭐 화태에도 서쪽에도 다 알지만은 뭐 [한국] 
여~ 와서도 한 10년 되다보이 거게 이름도 잊어뿐 거 마이 있다.
사할린에 사셨던 동네는 어느 어느 곳인지 헤아려 보십시오?
자식들은 사할린에 놔두고, 나는 소골(小谷)에 살림을 놔두고 일은 
마카로브 가서 하고. 소골은 저 사할린과 돌린스크 근처. 거기가 군
부요. 비행기 날아댕기고. 나는 비행장 일 안하고 저 산에 가서 그 
물 먹는 데 그거 시키고. 산에 군부 저 산 속에 댕기며 숨은 군도 
그거 시키고. 길 닦는 거.
그때 천 원씩 월급을 받으면 큰돈이었던 모양이죠?
그 정도면 사할린에서 마~ 노동자도 1등. 사할린에 노동자도 그 박
제6장. 작은 체구로 큰땅을 주유하며 살아온 유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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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 군부에 박공리 내고 이런 사람 하루 30원쓱 버는 사람이. 일 
잘하는 사람 하루 30원 버는데. 군부에 일할 때도 내 혼자 일했으니 
돈 마이 벌었어요.
화태 처음 가가지고 해방 전에 탄광 일을 어떻게 했는지 말씀해주십
시오?
탄광 일은 해방 한 뒤에 탄광 일 했지. 해방 전은 군부 일 했고. 군
부는 물 막고, 물 막는 거 지키고. 저 산에 숨은 군도 쌓는 거 그거 
인제 어디로 해서 어떻게 하라 카고. 사람인데 그 밑에 뭣이 안 비~
는(이는) 데 숨은 군도 그거 닦는 거 시키고. 그런 일시키면서 한 
달에 일본시대 돈으로 1천 1백 3원. 그때 돈이 많죠. 엄청나죠. 그 
당시에는. 그럼 그 돈을 2만원을 벌었다 했는데.
2만 6천원 벌어가 저금했다가 그거 다 썩어불고. 노국사람이 좋은 
사람 왔으면 말이야 몇 빠센또 저 히꾸하고, 몇 빠센또 재쳐놓고 적
기라도 돈을 주는데 나쁜 사람만 소련 땅에 왔다보이 그거 나쁘다 
그면 언제 떨어질 끼고 하는 거 보고 있다가 해방한 뒤에는 탄(炭) 
팠지 뭐. 
6. 해방 직후 귀국하려고 12개국 주유 
남부 사할린까지 소련군이 오고 난 뒤에는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
산에서 소를 믹이가지골랑 봄에 눈 썩은 물에 물 막아가지골랑 거~ 
터자가지골랑 오징가이사 거~까지 떠내라 보내고 그런 일을 하다가. 
또 사방 열 두 나라에 댕기면설랑 저 일 모르고 이런 사람들 거~ 
갈켜주고 이래 돌아댕기고.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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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도 저 독일도 가보이 독일 국경 안 지킨다. 서부 독일사람 동
부 와서 농사짓고, 동부 독일사람이 서부가가 농사짓고. 우리 동부는 
저 사회주의 국가고, 서부는 자본국가란 말이야. 그런데 동부 독일 
사회주의 국가 우리 일하고 갔는데, 주일만 되면 자동차 타고 서부 
독일 베를린 거기 가서 막 사방 돌아댕기며 주일마다 구경하고. 그
래도 뭐 독일은 고마 몇 해 안돼서 합방해버렸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한국에 올라고 안 했습니까?
왜 올라고 그 캐(그렇게) 아까 말 안 하든교? 저 북선에 가서 도망
해가 넘어올라고 북선 가서 보인께네 국경을 어떻게는 그렇게 시게 
지켜서 소련으로 들어갔다고 안 그래든교?
배를 통해 일본으로 가서 한국으로 못 왔습니까?
그 때는 올라면 말이야. 오지만은 일본서 그래 해가지고 올라면 말
야. 그 국경 문을 안 열어준다. 딱 잠궈 놓는데. 저 북조선에는 말이
야. 도망해서 여게 넘어올라고 말야. 가서 1947년도 가서 거리를 뜩 
보인께네 어떻게 국경을 시기(세게) 지키는지 뭐 올라 그~다가는
(그러다가는) 목숨만 떨어지지 못 오게 했어요. 그래가지고 소련으
로 다부 드가버렸지.
7. 해방 후의 노동생활 
해방되고 난 뒤에는 어떻게 사셨습니까?
10년 동안 탄광 팠지. 나이부찌. 부이코(브이코프). 소련 말로 부이
코. 저 일본 말로는 나이부찌. 탄 파고, 도네스키(?)하고. 뭐 이러는 
나무 갖다골랑 산 안 무너지그러 동발 세우고. 그때 월급을 받았지. 
제6장. 작은 체구로 큰땅을 주유하며 살아온 유유원
 
217
월급 그때에 뭐 한 달에 2백 40원, 2백 50원. 러시아 돈으로. 그때 
돈 2백 40원, 50원 받으마 아주 잘 먹고 뭐. 큰돈이지. 아주 뭐시기 
해서 지금 여게 한국에 말이야. 한 12만원. 13만원 보다 조금 더 많
을 끼요. 그 돈만 받으면 뭐 배가 이렇도록 뭐. 저금도 했지. 한 15
만원 했다.
10년 탄광 노동 후에는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그 다음에는 산에 가서 솔 비고 운송하고. 나무 떠내라가지고 하고. 
그거 하다가 사방 말로만 그거 했지. 사방 딴 나라 댕기먼설랑 뭐 
소련 땅 댕기마 시키고 어떻거러 하고. 잘 못하고 이런 뭐시기는 장
소는 가서 어떻게 하라 하며 어떻게 하라 하고. 잘 된다고 그래 시
키고. 이래 댕기다가 여기 올 때에는 나이 많아서 인제 못 가겠다고 
반대를 하고 이러인께네 안 가지.
그 전에는 뭐 소련 땅에 안 가본 데가 없어. 다 댕겨봤다이. 일 좀 
버겁고 한 데는 다 돌아댕기고, 저 마루도아 나라 거게 가면 말야. 
나는 거 나무 비~가지골랑 몇 만 구를 비놓고 운반을 못해가지골랑. 
그런 데 거 물 막는 걸 어떻게 막아가지고 어떻게를 하면 마이 내려
가고 퍼뜩 할 수 있다는 그런 거 갈쳐주러 사방 돌아댕겼지.
러시아에서 일하러 다니실 때 조선사람하고 같이 했습니까?
조선사람 동무 없어요. 일하는 데는 조선사람 동무 없어요. 우리 동
무들이 다 나이 많고 이런데 있는가 말이야. 그러고 젊은 사람은 안
죽 글 배우고 뭐 소련 땅에서도. 여기 한국서는 우리 자슥들이 일을 
하고 마이 했지만은 소련에는 뭐 30살까지 일하는 사람이 가끔 있
다이. 공부만 하고. 어리대고 놀고 이러지만 소련 땅에는 하루 종일
도 차 타고 가도 산이 비지 않으니 그런 들판이 있고. 또 바다에 갈
라 그래도 열흘 천리 되고. 이러이 거 인제 소련 땅이 원캉(원체)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218
 
너르다 보인께네 고기 잡아야 뭐 비행기로 운반하고 기차로 운반하
고 그래 하지.
소련에는 고기 잡아가지고 한국매~로 여~ 말라서 이래 안한다. 잡
으면 고마 통에다가 여~가지고 들고와가지골랑 다시 씨쳐가지고 또 
통에다 여~서 소금 쳐가지고 고마 바람 안 드가고로. 소련 사람들 
고기는 뭐 안 익히고. 청어 같은 거나 땅 고기 같은 거나 통에서 
내~가지고 상점에 사가지골랑 집에 와가지고 생 거 먹는다. 이 소련 
사람들 고기는 젓 한가지라. 그러이 맛이 좋고. 한국은 안죽 통조림 
안하는 거 보마 안죽 그런 거 고기 같은 거 해먹는 거 안죽 모른다
이. 마이 몰라.
회사에 소속이 되었습니까?
회사 일하는 거 갈라 그래도 산에서 안 놔준다. 저 오징가이사 일하
는 데 갈래도. 나무를 베어오면은 강으로 물을 막아가지골랑 강으로 
너른 데는 남글(나무) 비가지골랑 그리 퍼지지 않도록 계속 솔이(쉽
게) 떠내려가도록 그래 하고. 마르주아 그 나라는 참 남글 굵고 마
이 있었다. 이 소련에 가사스키 나라는 말야. 중국매로 마~ 찌배이
가 지려가지골랑 저 북쪽에는 말이지. 코가 크고 눈이 깊으고 이런 
사람이고. 저 남쪽에 나가면 조선사람 한가지다. 나라가 커놓은께네.
베어온 나무는 어디에 쓰는 겁니까?
오징가이사 쓰지. 종이 맨드는 데. 제지공장. 오지나 제지나 한가지라.
해방이 되고 난 뒤에 일본사람 떠나고 러시아사람이 내려왔을 때 많
이 혼란스러웠지요?
그 때는 혼란스러웠지. 혼란스러웠지만 뭐 우째 그 시대 되면 산에 
감자도 마이 숨궈가. 화태에 감자 잘 되고, 온갖 거 다 잘 돼요. 나
락만 안 되지. 밀도 잘 되고 보리도 잘 되고. 이 국가가 뭣이 하고 
제6장. 작은 체구로 큰땅을 주유하며 살아온 유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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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쁘고. 전쟁이 나면 나이 어리고 뭣이 할 때는 그거를 몰래가지고 
그 안에서 그러지만 말야. 내 화태에 있을 때는 그런 거 하마 나이 
먹어가지고 다 알고는 감자를 저 100포 이상 캐서 나르고.
감자는 돈을 받고 파는 겁니까?
돈도 받고 팔고, 내 먹기도 하고. 감자를 묻어놨다가 저 볕에 땅 깨
끗한 데 쭉 피서 말라가지고, 비를 보드라운 걸 가지고 싹 쓴다 말
이야. 쓸어 가지골랑 푸대도 깨끗이 해가지고 푸대에 막 여~가지골
랑 딱 묻는단 말야. 묻을 때 뭐 깊이 안 묻고 어지간히 묻어놓으면 
반은 얼면 반은 바루면 이래 가지골랑 그래 해가지고 봄에 가서 해
동하면 그 감자를 패가지고 내놓으면 우에서는 얼어가지고 붙었뿌
고. 중간에 가서는 조금 썩고. 큰 통에다가 남그면… 이 한국은 나라
가 쪼만하고 이러다 보인께네 통은 적은 게 안 맨들지만은 소련에는 
통을 막 이 한 아름이 넘는 이런 통을 말이야. 맨들어 가지고도 팔
고. 자기 가정에서도 맨들어가지골랑 고기 잡는 데서 맨들어가지고 
막 소매를 해가지고 이래하고. 그 통에다가 여~가지고 말이지. 막 
삭혀가지골랑 감자 가루를 내~가지고. 그거 쌀보다도 모하지 않다. 
나으면 낫지 모하지 않다. 그래 해먹으면 나라서 조금 백성에 먹이
는 거 나빠도 자기는 배부르게 먹고 뭐.
감자가루는 어떻게 해서 먹습니까?
그렇게 해가지골랑 물에 부가지고 봄에 삭혀가지골랑 그 감자 가루
를 내지. 감자 가루 가지고는 떡도 해먹고. 그냥 말아가지골랑 말이
지. 덴뿌라 지름 넣고 꾸버도 먹고. 한국은 땅이 나빠서 그렇게 안 
되지만, 화태 땅에는 참 감자 잘 돼요.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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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결혼과 6남매 자녀 생산
사할린에서 결혼은 하셨습니까?
해방 후에 노국 여자 얻어 봐도 맞지 안하고 일본 여자 얻어 봐도 
맞지 안하고. 그래 우찌 해가지고 조선 여자 얻어가지고 자식 나고 
이래 해가지고 살아왔지.
몇 남매나 낳았습니까?
한 다섯이, 여섯이. 다 조선 할머니한테서 낳았어. 일본 사람하고 노
국 사람 사이에는 자식을 안 낳았어. 자식 놓으면 못 관리하지. 가만 
내 보걸랑 퍼뜩 해야 되지 어리어리 하잖아. 안 된다. 어리어리 하다 
보면 자식이 나면 그 자식 때문에도 못 관리하지 않는가?
자식들은 지금 어디어디 살고 계십니까?
러시아 바따이시키. 여섯 명이었는데 하나 죽고 다섯 명. 러시아도 
살고 일본 간 자식도 있고. 일본 간 자식 작년에 왔다 갔다. 며느리 
하고 아들하고. 소련 땅에 있는 아들도 며느리 하고 아들하고 작년
에 왔다 가고.
돌아가시면 소련서 아들이 옵니까?
못와. ‘××복식’ 시대에 내가 났다 아이오. 그래가 ‘××복식’ 시대 난 
사람은 자식을 못 키우는 법이라. 그래가 자식을 전부 다 팔아먹었
잖아. 내 자식이 최(崔)가가 돼가지고 있다.
왜 그렇게 돼 있습니까?
그냥 내 앞으로 놔두마 다 죽어. 못 살아. ‘××복식’ 시간에 난 사람
은 ‘연정유최’라는 거는 한 때 먹은 게 1년을 독기가 나간다. 그러이 
제6장. 작은 체구로 큰땅을 주유하며 살아온 유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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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놈 살 택이 있어? 그러이 그런 뭐시기는 팔아먹어야 된다. 최가
한테 팔아먹었다. 아~들 호적을 다른 사람 밑으로 여~ 놓은 거지. 
피는 내 기라도. 여 뭐시기 사무실에 가보면 내 자식이 최가로 돼가
지고 있는 거 다 써놨다이.
최가라는 분은 러시아에 살았습니까?
소련에. 잘 아는 사람이지. 여자가 남자 얻으면 죽고 남자 얻으면 죽
고 하는 여자도 그것도 저 방법을 하고 살면 남자 안 죽는다. 열 얻
으면 열 다 죽어. 여자가 남자 얻어가지고 죽고, 얻으면 죽고 하는 
거는 열 얻으면 열 다 죽는다.
그걸 뭐라 일컫습니까?
그거는 남자 얻으면 죽고 죽고 하는 거는 남자가 1년에 한 번씩 머
슴살이 돈을 주고 언약을 해야 된다. 1년 넘어가면 또 당신 1년 넘
어갔다 보이 내년에는 우리 집에 머슴살이 갈라고… 그래 뭣을 하면 
안 죽어. 남편을 하면 안 죽어. 내 그 책에 다 배웠어.
잘 아시면서 두 번 결혼해서 왜 다 헤어졌습니까?
맞질 안하이 그러지. 거 맞지 안하면 그래야 된다. 그래야 고생을 안 
하지. 뭐 일본 갔다 보인께네 뭐 고마 편지도 서로 안하고 이러다 
보이 모르지. 뭐. 죽었을 끼라. 그렇게 나이 많은데 죽었어. 나는 어
렸을 때부텀 어떻게 하면 오래 살고 늙어서도 큰 병 안드는가 그거 
다 배웠다 보이 고대로 책에 있는 대로 하다보이 안죽도 몇 해 더 
산다.
사위는요?
사위 죽었어. 딸은 둘이라. 딸 둘, 아들 셋. 그럼 사위나 며느리는 
전부 조선 사람. 노국 사람하고 결혼할라 하고 그런 건 없었어. 노국 
여자들 뭐 하지마라고 그러지.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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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들은 무슨 일을 하고 삽니까?
뭐 건축부에 일도 하고. 조선말도 다 잊어버렸다. 건축부에 일시키고 
그런 일꾼들 처리하고.
자식들이 조선말을 다 잘합니까?
자식들은 다 하지만, 손자들은 조선말 하기는 하지만은 옳게 모한다. 
마이 모른다.
한국은 말이다. 해방 후에 중국 군인이 군성을 와서 지키가지고 그
기 겁나가지고 합방을 못시킨다. 남북 합방을 못시킨다. 저 미국 공
군 군대에 전화해가지고. 미국 아이라. 왜관 미국 군부 가서 중국 군
인이 군성 지키니 그거 내 쫓으라고 그러면 대번 내쫓고 통일 될 껜
데, 그걸 일러주지 않아서 못된다. 소왕시대에 군인이 군성을 지키
지. 이 대왕시대 와서 군인이 군성 지키는 법이 없어. 법에 없는 짓
을 안 나가면 폭탄 던진다고 방송 해놓고 어느 날 몇 시에 안 나가
면 폭탄 던진다고 방송하면 대번 다 물러갈 건데. 또 안 나가면 막 
던져도 된다. 법에 없는 짓을 하다보이. 몰래가지고 남북통일을 모했
다. 소왕시대에 이거를 대왕시대에 지금 시대란 말이야.
지금 시대는 나라 국경이 없다. 뭐 자기 가고 싶으면 돈만 있으면 
어느 나라도 다 댕기는 거. 사람은 법으로 살고, 짐승은 힘으로 사는
데. 여~ 사람이라 그러는 거는 배워야 된다. 짐승도 배워도 되고 사
람도 배워야 된다. 한국도 다 잘하지만은 사람이 다 배울라면 한정 
없어.
제6장. 작은 체구로 큰땅을 주유하며 살아온 유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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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민족과 다문화 관계 : 차별, 혼인
러시아에서 사시면서 조선사람이어서 불편한 건 없었습니까?
없지요. 사람이 살아나가는 거는 못 배우고 아주 좀 모지래는 사람은 
저 말을 해도 아주 차이 있게 하고, 저 하는 행동도 차이 있게 하고. 
조금 그래도 자기 골(주관) 가진 사람은 차등 안 둔다. 안 둬요.
러시아 말은 잘 하셨습니까?
그냥 보통은 할 수 있어요. 그러지만은 글이나 말이나 백만 가지가 
어려서 배우고 해야 안 잊어뿌지. 하마 다 커가지골랑 뭐 늦게서 배
운 거는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한 5년, 10년만 가면 고마 영~ 잊어
버린다. 우째다 조금 써가 알지 뭐 영 잊어버린 거 많다.
러시아에 사시다가 한국에 처음 온 거는 언제 입니까?
2004년도 6월 달에. 금년 6월 달이 만 10년이다. 그 전에도 오고 
싶었지. 한국에 오기 전에 소련 땅에 있을 때, 소련 국적 안 내고 한
국 국적 가지고 그냥 있는 사람들은 질로 가다도 차타고 가다도 막 
끄내라뿌고. 돈 10원. 벌금 10원 하고. 고마 끄내라뿌고. 집이 100
리나 200리나 되나 고마 끄내라뿐다.
그거 한국서 뭐 자기 못 배운 사람들은 말야. 우리들 일찍이 하마 
본마음으로는 안 그랬지. 술이나 먹고 얼굴 이래 해서 술주정 하는 
거는 저 노무새끼 저거 소련하고 전쟁만 붙으면 우리보고 총 놓을 
새끼다. 그래 술주정 하는 거 그거 관리도 모하고 미친 개매이로 지
랄하는 거 관리도 모하고. 참 그기 인제 고생이라. 그러고 소련 땅 
들어가 가지고는 안 그랬지만은 화태에 있을 때는 조금 배우고 조금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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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자리에 있는 것도 무국민은 때려죽여도 살인도 없다. 그렇게 
말하는 좀 배운 것들이 그렇게 말한다. 그러이 인간 같지 않은 것만 
화태에 전부 끌어 모다 놨어.
노국사람들이 그렇게 대합니까?
예. 일본사람들도 화태에 있는 것들 온전한 것들 없어.
조선사람들이 고충을 당한 적은 없습니까?
곤란이야. 뭐 여게 올 때까정 곤란 받았지. 뭐. 자기 처리 몬하는 사
람은 큰 곤란 받았지. 좀 거기서도 무식한 사람들은 늘상스리 나가
고. 내야 뭐 곤란 별로 안 했지. 하기는 했지만은 별로 안 했다.
화태에 사시면서 가장 큰 어려움은 뭐였습니까?
뭐 힘들 것도 없고. 그냥 소련 땅에 가 있으면 뭐 없어요. 화태에 있
을 때는 속 마이 태웠다. 소련 사람들 좋은 사람은 안 그러지만 말
야. 화태에 온 것들은 인간 같지 않은 것만 와놓은께네 차별을 들게 
하고. 안 할 말도 하고 할 말도 하고. 뭐 여게 아주 무식꾼 한가지
라. 학교 문 앞에도 안가보고 학교 이름도 모르고 그런 인간 한가지
라. 이 화태에 있는 것들은 저 집도 모르는 게 아이라. 알면서도 그
래 그 지랄하는 기라. 배웠다 보이 안다. 알면서 그 지랄하고 그러이 
화태 땅은 소련에서 집어 내던져버렸잖아. 그래 중국서 줘가지고 중
국서 지금 처리한다.
화태에 계실 때 일본이 패전하고 러시아로 도망을 가셨다고 했습
니까?
도망가는 게 아이고. 도망가면 지금 시대에 그 짜서 받아주는가? 안 
받아주지. 옛날에 말야. 한국서 한국사람이 화태에 도망가는 거는 말
이야. 이 일본사람들이 한국에 있는 사람을 중국 저 하루빈, 길림성 
그 안량미 농사짓는 데 거게로 뭐 여러 수천 명 그리로 보냈다.
제6장. 작은 체구로 큰땅을 주유하며 살아온 유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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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한국에 우리 시대에 소화(昭和) 18년, 16년 그때에 얻어먹는 
사람이 한정 없었어. 없었는데 당신네는 안죽 그런 거 몰라. 나도 안
했는데 모르지. 거~ 중국 하루빈 간 사람들이 거~ 얻어먹고 한정 
없는 사람들. 일본 사람이 실어서 전부 거게 갖다놓고. 저 화태에도 
일본 전국에 돈벌이가 제일 낫거든. 한국에는 일등 노동자 아주 힘
든 일 해야 하루 1원 20전 더 안줬는데 화태에는 일 마이 하고 무
식한 사람은 20원, 30원 벌인다. 큰돈이지.
그러이 돈을 말이지. 모아가지고 우째 근근이 모아가지고 말이지. 어
업조합에 가 가지골랑 하찌도끼를 한단 말이야. 하지도끼 하나 고마 
몇 시간 동안을 몇 천원 주고 산단 말이라. 백 명이나 이백 명이나 
모아가지고 산단 말이라. 그 하지도끼 타골랑. 사람들이 하나 타면 
한 30명이나 20명이나 타고 간 뒤에는 또 그거 돌아오기 전에 딴 
하지도끼 타고 도망가고.
그래 도망가가 거기 가서도 좀 똑똑한 사람들은 일본서 오면 대번 
내지. 내지만은 배우지 모하고 일자 무식꾼들은 저 농촌에 가 가지
골랑 숨어가지골랑 해방을 해도 숨어가지고 이래가지고 있는 사람
들. 화태에 해방할 때에 1만 2천 5백 명이라. 1만 2천 5백 명이지만
은 3만 명도 넘어. 숨어 있는 사람이 많다 말이야. 그때도 농촌에 
가가지고 일본서면도 안내고 숨어가지고 있었어.
조선 사람이요?
응. 그 사람들이 그 많은 사람을 저 국민으로 안 돌보고 그러는 거 
이제 와서 뭐 대통령이라고. 1학년생, 2학년생들 그거밖에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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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연금으로 소련 생활 17년
소련 큰땅에는 살지 않았습니까?
사할린에 살다가 85년도 소련 땅에 가가 살았어. 소련 땅 라스돈이
라 그러는데. 라스돈군(郡) 밧다이스키 거~ 가 살다가 89살에 내가 
여~ 왔다 아이오. 2004년도 6월 달에 여기 왔어.
화태에서 소련으로는 어떤 연유로 어떻게 가셨습니까?
화태에서 뭐 노국국민 내다보인께네 내 가고 싶은 대로 갔지. 뭐. 그
때에 내가 한 74살, 70살 그 정도 됐어. 소련 가서는 일 안 하지. 
나이도 많고. 70살이 되면 말이야. 어느 나라 가서 일해도 아주 돈 
마이 찾는다이. 한국은 아무래도 몇 백만 원 찾는다이. 한 달 일하
마. 화태에서 이사 갔는데, 뭐 이사 가서 노는 데 만나 놀지 뭐. 그 
뒤로는 화태로는 안 간다이. 그 뭐 화태 가야 속만 썩이고 뭐 안 간
다. 거 아주 나쁜 사람들만 있다 보이. 내가 해방되고 한 삼십 몇 년 
넘게 있다가 갔지. 화태에서 오랫동안 살았지. 화태에도 삼십 몇 년
도 넘는다. 근 40년이지.
소련에서는 몇 년 살았습니까?
소련에서 뭐 한 십 몇 년을… 17년인가? 18년인가? (권오석 할아버
지가 알은 채를 하며, “이 양반이 있을 때 한 동네에 있었어. 부이
꼬. 나도 거기 있었어. 대충 알다가 이 양반이 가뿌맀어.) (권씨를 
바라보며) 나는 모르지만은 나이 젊다 보이 알았는지 날 모르지. 우
리 한참 일할 때 저 사람은 안죽 어린 사람들이라. (권씨는 ”난 길
가에서 이래 보고, 한 동네에 오단이 군부거든요. 나는 거기 돌린스
제6장. 작은 체구로 큰땅을 주유하며 살아온 유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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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 살았어요. 오단이하고 돌린스크하고 옆 동네요”라고 말한다)
해방 됐지만은 그거 그 해방 전에 거 모도 조선 사람들도 알고, 군
부에 자꾸 내방을 자주 하다보이. 군부에 있으므로 군인은 아니요. 
군인 아이고 딴 뭐시기 촌이 있거든. 
사할린에 가 가지고 한 사십 몇 년 살았는데. 사할린에는 아주 나쁜 
사람만 마이 있고. 거~ 사람 살 곳이 못 된다. 소련에 라스돈. 라스
돈도 가 살다가 바따이스키도 가 살다가. 저 노후에 아르산베르. 노
후에 아르시스키 거~ 가서도 살다가. 저 아저우도 가서도 살다가. 
소련 땅도 좋다. 그런 데는 좋은 구경하고 몇 해슥 살아봤다 아이요.
소련에서는 어떤 일을 하고 먹고 살았습니까?
소련에 가서는 그때는 나라서 저 일을 화태에 일하는 사람은 남자가 
전부 오십 다섯만 되면 저 연금 줬거든요. 일 안하고 맹 젊을 때 일
하는 돈 금액 주는 거 그거 타가지고 저 소련 땅에 가가지고 소련 
가서도 뭐 내 뭐 손으로 맨들어 가지고 뭐 팔아먹고 뭐.
뭘 만들어 팔았습니까?
배도 맨들어 가지고 팔고. 손으로 말고 기계로 가 가지고 밭 매는 
것도 맨들어 가지고 팔고. 호미 아이지. 모다(motor) 집어가지고 호
미를 맨들어 가지골랑 거 빈 짚 였~고 불 해가지골랑 고마 밀고 댕
기면 밭 다 매뿌는데. 그것도 직접 만들었지. 뭐 기술자라 그럴 것도 
없지 뭐. 그까짓 거 누가 못 맨들까봐. 지금 시대에 할애비가 손자한
테 배우는 시대라.
이거 저 소왕시대, 대왕시대 이게 삼지시대란 말이야. 삼지시대는 막 
이게 만성천자 삼지시대라. 거 삼지시대만 되만 조끔 젊었을 때 조
끔 배운 사람들은 뭐 공장에 가서 돌아보고 뭐슥 하고 뭐. 그거 보
고 와가지골랑 맨들어가지고 마~ 모다만 끼우면 되는 긴데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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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가지고 먹고 사는 게 되던가요?
먹고 사는 거야 연금만 가지고도 먹고 사는데 뭐. 그거 안하고 나라
서 주는 연금만 해도 먹고 산다. 젊을 때 일하던 돈 그거 몇 빠센또 
그걸 주다보인께네 소련 땅에서 1백 20원만 할 것 같더라마. 영감, 
할마이 내외간에 모가지가 꽉 차도록 먹어. 배가 막 이렇고 그렇도
록 먹고 살 수 있대.
소련 음식이 입에 잘 맞았습니까?
음식이 맞지 않아. 소련에 음식을… 소련에는 이 요양소가 시(세)층
이라. 1등 요양소. 2등 요양소. 3등 요양소 있다. 1등 노양소는 군인
에 갔던 사람. 또 일을 해도 데낄라 받는 일꾼. 소련 사람들은 법이 
사회주의 국가다 보이 500원 이상은 넘기 쓰면 말이야. 나탈리꼬가 
주인이 히꾸하든지 얼매만치 주라고 몇 빠센또만 주라고 거 내루고. 
검사국에서 와서 내루고 이래 하지만 데낄라로 임금 받고 들어온 거
는 검사국에도 못 내루고, 주인도 못 내루고. 누구도 못 내룬다이. 
고대로 쓰는 대로 해주지. 법이 그러이 노동을 해도 데낄라 받는 노
동은 고기를 잡든지 딴 일을 하든지 뭐 데낄라로 받는다. 그런 사람
은 1등 요양소로 간다. 2등은 그저 평균에 일하는 일꾼들. 3등은 말
이지. 젊을 때도 자기 노력을 모한 사람. 또 나이 많애서 그 연금 나
오는 것도 젊을 때 돈 못 벌어서 연금도 뭐 반절도 안 되지. 그런 
사람. 그 사람들은 농사를 지~가지고 반은 요양소 사람이 뭐시 하
고, 국가서 반 물고. 그러이 3등이라.
할아버지는 몇 등입니까?
난 1등에 가서 있다가 음식이 맞질 안해. 소련에 물이 안 좋아. 한
국도 물이 좋지만은 우찌 가만히 나쁜 사람, 물 나빠서 병든 거 말
야. 사하르병. 그거 병든 사람은 저 물 좋은 데 가서 몇 해 있으면 
제6장. 작은 체구로 큰땅을 주유하며 살아온 유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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낫어.
사하르병이 어떤 병입니까?
사하르 병이 말이지. 그 목도 마르고 물은 자꾸 땡기고 피가 옳게 
안돌다 보이 고마 자꾸 눕고 싶고. 아주 늙은 사람. 나이 젊어도 늙
은 사람 한가지라. 그런 사람이라.
11.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영주 귀국
러시아에서 한국으로는 어떤 경로로 오셨습니까?
아이~ 한국에 몇 해를 어느 시대에 와가지고 소련 땅에 와가지골랑 
못 가고. 일본 시대에 와가지고 못 가고. 국경문도 닫아서 못 가고 
이러다 보이 그래 지금은 갔다보이 갈만하다 보인께네 좀 넘겨달라
고 그래 왔지 뭐. 소련 땅에 있는 사람들도 안죽도 마이 있다. 그렇
지만은 그 사람은 인제 안 온다. 소련 민족 됐뿌고 안 온다.
그래도 고국에 오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오고 싶지 않고. 한 평생을 한국 어떻게 됐는가 한 번 보기를 원하
고. 한 평생 62년 동안을 그래 했다 보이. 그리고 소련 땅에는 물이 
나빠. 물이 아주 나쁘다이. 소련 땅만 아이라 중국이나 미국이나 어
느 땅이라도 대륙은 다 평균 물이 나쁘다. 좋은 데 있긴 있지. 있지
만은 평균은 다 나쁘다이.
한국물이 그 중에 좋습니까?
한국물이 다 좋지만은 한국에도 그 전에는 평균 다 좋았지만, 지금
은 나쁜 데가 마이 있지. 지금은 한국은 저 산 가까운 데 그런 데 
말고는.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230
 
한국에 오실 때 소련에서 같이 오신 분이 있습니까?
서이 왔는데. 두 사람은 인천 있는 사람도 있고. 인천 밑에 수원. 
거~ 수원 하나. 저 안동 김씨 하나. 나는 강릉 유갑니다. 그래 서이 
왔는데, 다 죽고 인제 내 하나만 남았다. 나이 마이 틀리지. 그 사람
들은 나보다 15년, 16년 그래 차이 있고. 그 사람들은 하마 죽은 지
가…? 먼저 죽은 사람은 죽은지가 5, 6년 된다. 한국에 와서 돌아가
셨지. 그리고 둘째도 저 수원 백가 그 사람도 여자라요. 거기도 뭐 
나보다 16년 떨어지는가 그런데 하마 5년 됐다. 죽은지가.
한국에서 혼인했던 할머니는 오시니까 그때까지 살아계시던가요?
그 자식이 다 죽었는데 뭐 살아있을 택이 있소? 자식이 다 죽었는
데. 그때 화태에 갈 때. 일본 갈 때는 살았지만은 갔다 오인께네 뭐 
62년 만에 오이 싹 다 죽었다.
고향에 가보셨습니까?
가보이 그 캐. 동네는 뭐 솔밭이 돼가지고 있고. 일본시대에 가가지
고 62년 만에 한국을 돌아왔는데 고향 가보이께네 고향 동네 고마 
전부 폐동이 되고 수목 밭이 돼가 있고. 뭐 친척은 다 죽고. 내가 화
태 간, 일본 간 뒤에 조카들 인제 살아있고. 여~ 조카 하나이 살아
가지고 있다이. 얼굴 아는 여~ 조카 하나 살아가지고 있다. 다 죽고.
내 화태 갈 때에 아홉 집이 우리 동네에 그 큰 산 밑에 아홉 집이 
살았는데, 갔다 오이 하나 있다. 그 사람은 안다. 그 사람도 인제 
여~ 요양소 와가 내 여~ 오고 죽었다. 인젠 다 죽었어. 고향 가니
까 아는 사람 한사람밖에 없어. 나는 죽으면 화장해야지. 화장해가지
고 저 산에 높은 산에 가서 뿌려야지.
러시아 사실 때 한국 사람하고도 친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있지. 우리 자식들 집에 뭐 여럿이 와서 놀고 이러드만. 인제 내 동
제6장. 작은 체구로 큰땅을 주유하며 살아온 유유원
 
231
무는 다 죽었어. 다 죽어불고. 하마 15년 전에 다 죽었다. 다 죽고 
내 할마이 죽으인께네 여기 왔지. 할마이 살았으마 뭐 동무하고 안 
온다.
할머니는 고향이 어디였습니까?
여~ 김천. 화태에서 자기 남자 죽고 그래 인제… 자식을 일곱인가, 
여섯이 낳았지. 나이는 내하고 12년 차이. 죽은지가 15년 조금 덜 
돼요.
12. 건강관리
여태까지 혹시 몸이 안 좋으신 적은 없습니까?
없어. 여~ 뭐 동무들이 잘 모해가지고. 이 사회가 말이지. 온갖 동
물이 똥을 눠가지고 가스가 올라가고. 또 죽어가 썩어가지고 가스가 
올라오고. 온갖 가스가 이 사회가 육지에만 돌아댕기지. 바다 못 들
어간다. 바다 들어가면 그 가스가 죽어뿐다. 지 안 죽을라고 바다 안 
간다이.
이 시회가 말이지. 뺑 돌아가면 해가 언캉 멀어가지고 사회에 해 껌
껌하기 이래 도는데, 거기 갈 거 같으라면 말이지. 소금산이 2천 미
터나 3천 미터나 소금 산이 구름과 같이 이래 높이 있다. 그 산을 
넘어가면 딱 하고 동산도 언제든지 동산이라. 언제든지 얼음이 가뜩 
있고 이 해가 온갖 동물을 살리고 맥이고 해가 그러지. 이 하늘은 
고양이 껍떼기라 해가 알맹이라.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 어떻게 생활해 오셨습니까?
어떻게 살어. 뭐 주는대로 밥 먹고 뭐 움적거리고 좀 힘 있는 때에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232
 
는 움적거리고. 내 지금 저 산에 실과나무 숨궈놓은 게 50주 넘게 
된다. 안즉도 더 숨군다이. 내가 93살에 산에 가서 산지기한테 물어
보도 안하고 산에 가서 내 마음에 개직한 데(가까운데) 비~가지고 
매실 한 거(많이) 숨구고.  3월 달만 되면 내 간다. 여도 지금 실어
달라 하고. 산 타고 아침에 가고 저녁에 실어오고. 내가 지금 금년부
터 조금 따먹는다. 금년에 제일 일찍 숨군 게 한 서너 나무 열었는
데 조금 따먹고. 앞으로 한 3년만 있으마 막 크기 따먹고 뭐. 9월 
말, 10월 초순 그때 오마. 이게 다 운동이고 건강에 도움이 돼.
이 가스가 천둥할 때 그때 마이 타뿔고 그러지. 그거는 바다도 못가
고 소금산에도 한 몇 천리를 소금산을 두고 몇 천리 밖에 그 가스가 
돌아댕긴다. 그 가스가 육지에만 돌아댕기지 바다도 안 간다. 그런데 
사람뿐 아이라 온갖 동물이 말이지. 1년 열두 달인데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여섯 달은 청명정 시간이라. 그 가스가 동산 됐는 데
로 가고. 이 지구가 누버뿌면 해가 동삼(겨울) 됐는 데로 가뿌고. 우
리는 고마 동삼이 되고, 다시 누브면 동삼 됐는 데가 여름이 되고. 
그래 되는데 그 여섯 달 상간에 사람이 마이 죽지.
청명시간에는 사람이 별로 안 죽는다. 죽기는 죽지만은 뭐 10분의 3
부나 4부나 그래 죽지. 마이 안 죽는다. 그런데 동산으로 문 열어놓
는 게 어렸을 때부텀 아주 위생에 마이 나쁘다. 여~ 예안(안동) 짐
승이 사는데, 옛날에 그 임진사 사명당 옛날에 거게 임씨들이 마이 
살았는데 거 임진사가 목척 한자가 넘도록 주판 집을 짔~어. 여름에 
갈 거 같으면 방 안에 들어가면 시원한 게… 그러고 동산으로 문을 
닫고 여름에도 오뉴월에도 밤에 문을 닫고. 밤에 동산으로 문 열어
놓는 게 늙어서 폐가 마이 난다.
젊을 때 어렸을 때부터 부모가 그거를 알아야 된다. 부모가 그런 걸 
제6장. 작은 체구로 큰땅을 주유하며 살아온 유유원
 
233
알고 어린 애가 젖 먹을 때에 밤으로 문을 열어놓지만은 지금 이 말
년 세상은 그것도 모르고 저것도 모르고 이 집 곁에 솔을 갖다 숨구
고. 솔 나무하고 대나무하고는 아주 비상이라. 망한다이. 망해.
지금도 내 저 산에서 한국은 와서 보인께네 한옥에 온 데 마당 안에 
인장지 들이고. 목장지패라. 저저 사람 사는 곁에 솔하고 대나무 하
고는 숨구면 그 집 망한다이. 그런데 이 말년 세상 거~ 구 한문을 
안 배우고 그런 법을 모르다 보인께네 사방 솔을 숨구고. 저저 우리 
양로원 저 안에 거게도 해놓은 거 보이 그거 20년만 되면 그 집 망
한다이.
제7장. 부부가 함께 제지공장에서 일했던 권순애
- 제지공장 평생 노동자 -
1931년생 권순애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236
 
권순애 연보
ㆍ1932년(1세) - 경북 선산군 고아면 기평동 출생
ㆍ1943년(11세) - 일본 오사카를 경유하여 사할린 이주 
ㆍ1947년(15세) - 2년간 이발소 근무
ㆍ1949년(17세) - 결혼
ㆍ1951년(19세) - 장남 출산
ㆍ1961년(29세) - 막내 출산 후 제지공장 근무
ㆍ1977년(45세) - 남편 사망
ㆍ1982년(50세) - 제지공장 21년 근속 후 퇴사
ㆍ1984년(52세) - 병원 청소 노동 2년 후 노동생활 마감
ㆍ1994년(62세) - 마카루에서 유즈노살린스크 이주
ㆍ2004년(72세) - 한국 영주 귀국, 고령 대창양로원 거주
ㆍ2014년(82세) - 현재 고령 대창양로원 거주
1. 아버지가 먼저 일본 오사카 이주
아버지 고향은 어디십니까?
아버지 고향은 여~ 경북. 경북 선산군 고아면 기평동 뭐. 어렸을 적
에 그 부모들 말하는 거 그거는 기억이 온전히 있단 말이야. 경북 선
산이면 여~ 가까이에 있다던데? 여게 경북 어데. (한 시간 내에 도착
할 수 있다고 하자) 그렇게 가까운 데에요? 고향에 가보지도 못했지.
아직 한 번도 못 가봤습니까?
그렌께네 우리 아버지가 3대 외동이라. 3대 외동인까네 거~ 친척도 
제7장. 부부가 함께 제지공장에서 일했던 권순애
 
237
22)
 사할린은 해방 전 남북으로 나뉘어져 북쪽(북화태)은 소련이 그리고 
남쪽(남화태)는 일본이 각각 점령해 있었다.
없고. 아버지 그린까네 누님도 그 전에 일본시대 때 오사카. 그때 오
사카로 시집가가 남편 얻었다니께 그래 인제 우리 고모 데리고 오사
카 거~ 가 살았지.
그래 우리 남[부]화태22) 들어올 적에 그때는 인제 한창 전쟁시대 
때지. 그래가지고 여~서 우리 고모 집에 있다가 왔지. 그래 우리 고
모부도 그렇고. 고모도 그렇고. 남화태 그 추운 데 거~ 뭐하는데 그
래 가겠느냐고. 가지 말고 우리들하고 같이 살자고 그렇게 했대요. 
그니깐 나는 내주(나중에) 들었지. 부모들한테. 좀 큰 다음에 들었
지. 고모가 그렇게 말했다는 거.
그래가지고 우리 아버지가 뭐라 하는지 아나? 아이고! 저기서 빌어
먹을지도 모르지만, 먼 데 가서 살지 형제간 거석하기 싫다고요. 우
리는 뭐 남화태로 가겠다고. 그리고 우리 식구 데리고 그래 인제 
소련으로 갔지. 그래 살다가 45년 만에 해방 거~서 해가지고 그래 
인제.
2. 1943년 오사카 경유 사할린 이주
할머니는 연세가 몇이세요?
81살. 이름은 권순애. 1932년에 태어났어요. 올해 팔십 둘 들어가지. 
설 쉬면 이제 들어가지. 사할린에서 살아온 모습 기억이 남은 것은 
남고 지나가서 잊어버린 것도 있고. 뭐.
사할린 가실 때가 몇 살이었습니까?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238
 
어렸을 적에 부모 따라서 사할린으로 갔기 때문에 그때 아홉 살인가 
여덟 살인가 그때 그쯤에. 옛날에 촌구석에 살아놓이 아무 본 것도 
없이 그린께. 지금 아이들은 뭐 다섯 살, 몇 살이면 깨이가지고 뭐 
거석하지만도. 1학년 되면 모르는 것도 없이 다 그렇지만. 우리 촌
에 우리 클 때야 뭐 촌구석에 살아놓으면 아무 것도 모르고. 기차도 
보지 못하고 뭣도 못하고 그런 시대잖아요.
그러이 그 시대 때 우리 부모들이 남화태… 소련이지. 사할린이지. 
그래 따라갔지. 거~ 가서 우리가 그때 언제 갔는가 하면은 43년도 
가 가지고 해방 났는 거는 45년도 거~석했잖아. 그래 거~ 가서 그
린께네 2년 만에 손 들었단 말이야. 2년 만에 손 들어놓으이 뭐 여
기도 어려서 아무 것도 모르고. 공부도 못하고 학교도 못 들어가고. 
그래가지고 거~ 가서도 조금 거~잖아. 일본말도 모르지. 조선말도 
하기야 하지만도, 지금 아이들은 얼마나 똑똑하고 거석한데. 그때만 
해도 모조리 한가지지 뭐. 그래 있다가 노국사람 와가지고, 해방 후
에 러시아사람 넘어 와가지고 그래 같이 살았지 뭐.
할머니는 형제가 몇 분이었습니까?
형제가 그때 7남매 돼. 7남매 중에 내가 보자~. (생각에 잠기며) 우
리 언니 둘 있고 오빠 있고 네 번째다. 언니가 인제 여자 형제가 둘 
있었고, 그 다음에 오빠 있었고, 그 다음에 내지. 그러이 네 번째지. 
그 밑에는 인제 남동생 있었지. 남동생 서이. 줄줄이 서이. 
사할린 갈 때 여기서 형제들 다 나가지고 갔습니까?
그때 다 나가지고 갔지. 막내 남자 동생은 아주 어렸지. 남동생 아
직도 거~ 살고 있지. 거~ 살고 있는데 동생들 오빠 우에도 돌아가
시고 우리 언니도 둘 다 돌아가시고. 벌써 돌아가셨어. 지금 남아 
있는 거는 내하고 둘이 세 명 남아있어도 하나도 어떻게 됐는지 모
제7장. 부부가 함께 제지공장에서 일했던 권순애
 
239
23)
 자매 등 중 언니를 지칭.
르겠어.
여덟, 아홉 살 때 어디로 해서 뭘 타고 사할린으로 갔는지 기억나십
니까?
기차타고 간다고 따라갔지. 부모들 따라. 그때 갈 때 아버지가 어머
니하고 같이 자식들 다 데리고 갔지. 형제 일곱 명하고. 그거 말하자
면 뭐 끝이 없지만도.
아홉 명이 같이 갔네요?
아홉 명은 아이지. 아홉 명 아이고. (당시를 회상하며) 보자~ 아이
다. 내 정신이 없다. 형제가 일곱 명인데, 우리 맏형23)은 그때 나이
로 열아홉 살 먹었단 말이야. 그때 여자 열아홉 먹으마 그래 인제 
거~ 가면 인제 못 치아 먹는다고(결혼 못시킨다고) 한 사람이라도 
덜어놓고 간다고 그래 인제 우리 맏형 시집 보내놓고 가가지고. 우
리 막내이 동상 거~ 가서 하나 낳았다나? 그린께 갈 때 두 명 빼니
깐 다섯 명하고 엄마, 아빠 일곱 명인가?
43년도 [화태] 갔단 말이라. 그러고 [일본이] 2년 만에 손 들었단 
말이라. 그때 한창 전쟁하고 했단 말이라. 자유로 가도 우리 아버지
가 먼저 갔다가 와가지고 인제 우리 다 데리고 해가지고 갔는 기라.
처음에 그러면 고모가 사시던 오사카로 갔습니까? 아니면 사할린으
로 곧바로 갔습니까?
고모들은 오사카 거~ 살고 있지. 거~ 살고 있는데 우리가 아버지가 
여~ 화태로 오면서 인제 그리 둘렀지. 동상 집에. 우리 고모들은 
거~ 살지. 오사카 거기서. 거기서 사는데 오빠 가지마라꼬. “거~ 먼 
데 가면 춥고 거석한데 뭐 하러 거~까지 가겠는가고. 고마 여기서 
우리들하고 같이 살자고 했는데, 우리 아버지가 말 안 들었지. 동생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240
 
말 안 듣고 간다 간다 떠나간다. 그래 가겠다고 그래가지고 갔지.
그러이 고모가 계시는 오사카에서는 살진 안했지. 우리가 거~서 살
진 안하고 화태로 바로 갔지. 그래 고모들은 오사카 살고 있고.
아버지는 43년도에 식구들 데리고 갔는데, 그 전에 이미 먼저 [사할
린] 가셨네요?
그 전에 한 번 가 가지고 거~ 가서 자리도 크게 잡지도 안하고 아
는 사람 거~ 있은께네 거기서 거석 하다가 그래 한국에 살기 바쁘
고 하니까네. 그래 해가지고 오다가 우리 고모가 오사카 거~ 살고 
있단 말이라. 그래 오사카 사는데 거~서 인제 한 달을 머물렀는가? 
며칠을 머물었는가? 그래 가 가지고… 우리 그때만 해도 기억이 난
단 말이라. 동물관에 가서 구경하고 그런 것도 생각이 나고.
그래가지고 [고모가] 오빠보고 남아 있으라 하는 거는 그때는 우리 
듣지도 못했고. 소련에 가 가지고 화태에 가가지고 우리 컸지. 그때
는 그린께네 고모가 어떻게 어떻게 하고 있으라 하는 거 안 잊고 남
화태로 그래 인제 와서 살게 됐지.
아버지는 식구들 데리고 사할린 가기 전에 몇 년이나 일본 생활 하
셨습니까?
몇 년 안했지. 그냥 조선에서 그래 하다가 뭐 한 해 갔다 왔는지. 그
래가지고 뭐 우리 아버지도 거~ 뭐 한두 달 갔다 왔는지 그래가지
고 보고서리 인제 그래 해가 갔지. 사할린이 춥지. 춥지.
3. 사할린의 해방 전후 생활상과 이발소 근무
화태 가니까 어땠습니까?
제7장. 부부가 함께 제지공장에서 일했던 권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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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해방 직후 남부 사할린까지 소련이 점령하게 되자, 한인들에 대한 통
치정책의 일환으로 카자흐스탄 등 남부 소련에 많이 거주하던 사회주의 
사상이 투철했던 한인, 이른바 고려인들을 사할린으로 다수 이주시켰다.
첨에 어릴 때 가니까네. 그래가지고 그럭저럭 소련사람 넘어 와가지
고 거~서 같이 살게 됐지.
처음 가셔서 집을 어떤 데에 마련해서 살았습니까?
처음 가인까네 뭐 집도 없지 뭐. 집도 없고 거~ 뭐 아는 사람 통해 
우리 아버지 자유로 갔지. 강제로 안가고 자유로 갔으인까네. 그래가
지고 우리 아버지 아는 사람이 거~ 있으니까 그 사람이 인제 거~ 
소개해가지고 그래가지고 어떤 집 하나 쪼만한 거 하나 얻어 가지고 
거~ 살았지. 그때는 한 방에 온 식구가 다 같이 있었지. 어데 갈 데 
있어?
학교는 공부는 어떻게 했습니까?
공부는 하지도 못했는데 뭐. 가가지고 집도 없이 뭐 거석에 저기 한 
달 가고 두 달 가고 하다가 일본학교 뭐 들어가 가지고 조금… 2학
년도 안됐지 뭐. 한 1년 반 쯤 댕깄나? 그래가 [일본이] 손 들어뻐
리.
일본이 손들고 나서는 공부를 못했습니까?
일본이 손들고 나서는 인제 또 한 해 두 해 거~삿타가(그렇게 하다
가) 큰 땅서 거 뭐고? [예전에] 함경남도 그런 사람들이 소련을 마
이 갔단 말이라. 거~ 소련에 마이 가는데, 해방 후에 그런 사람들이 
거기서 공부도 마이하고 했으니깐 인제 화태로 인제 그런 사람들이 
또 우리인데(우리한테로) 왔는 기라. 와가지고 인제 학교 선생질이
나 하고 뭐 거석한다고 그런 사람들 배운 사람들인께 그래 그 사람
들이 마이 넘어왔단 말이라.24)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242
 
조선사람입니까?
조선사람이 마이 넘어왔지. 그래 넘어왔으이까네. 그래 우리들은 그
래가지고 학교 댕기게 됐지. 조선학교 열어가지고. 그래 거~ 좀 댕
기다가 먹고 살기 바빠가지고 뭐 공부도 올키 하지도 못하고. 그래 
이래저래 하다보니까 배운 것도 없고.
그때 조선학교는 몇 년 했습니까?
조선학교 매나 3년 댕겼는가 몰라. 뭐 7학년이니 12학년 이런 게 있
지. 그래 있어도 뭐 그래 안 댕기고. 나이도 차고 하니까 그때 내 열
일곱 살 시집갔나? 학교도… 시집가기 전에는 먹고 살기 바쁘지. 먹
고 살기 바쁘고 하인까네 뭐 어데 가서 좀 일이나 하고.
학교서 노국말은 안 배웠습니까?
노국말도 온전히 못하지 뭐. 그래 인제 차츰차츰 있으니까 조금씩 
조금씩 그래 인제 노국말도 조금 배우고. 그 다음에 인제 조선학교 
나는 그래 하다가 나왔지만도. 다른 아이들은 그래 하고 하다가 그 
다음에는 노국학교 가게 돼. 조선학교 없애고, 노국 사람하고 같이 
공부하게 돼. 나는 졸업을 다 못하고, 아무 것도 못했어.
그때 식구도 많았는데 아버지가 어떤 일 해가지고 먹여 살렸는지 궁
금합니다?
아버지가 거~ 옛날에 뭐하겠어. 그 삼판에 목재 비고. 뭐 그런 데 
가서 삼판에 가서 일해가지고 그래 돈 벌어먹고. 그래 어머니하고 
그랬지. 그때는 삼판에 우리 조선사람이 일을 많이 했지. 목재소 그
런 데도 하고. 징집으로 온 사람은 탄광에 거~ 가서 또 거석하고. 
그래 우리들은 단지 우리 부모들은 삼판에 목재 비는 데 그런 데 일
하고 했지. 그때 어머니는 가정 지키고 아무 것도 모르고 뭐. 아버지 
혼자서 벌어가 식구가 먹고사는 거였으니 힘들지. 그래. 먹는 거, 입
제7장. 부부가 함께 제지공장에서 일했던 권순애
 
243
는 거 이런 거 힘들었지.
학교 다니다 그냥 그만두고 결혼 전까지는 어떻게 지냈습니까?
커가면서 어데 조금 일도 했지. 그때는 뭐 머리 깎는 데 가서 청소
도 해주고. 이발소 있지 않은가. 그래 청소도 하고 그래가지고 이럭
저럭 하다가 그래 인제. 결혼하기 전에. 그 외 다른 일은 안 했지. 
청소하면 보수, 돈이야 주지. 월급으로. 월급 그때 얼마나 받았는가 
그것도 잊어버렸어. 뭐 그래 마이 주겠어?
이발소는 한국사람이 운영하는 이발소 입니까?
응. 한국사람. 한국사람인데 거~서 인제 했어. 그때 여러 군데 한 
네 명쓱 했는데, 다섯 명쓱 했는데. 손님도 꽤 많았지. 손님 많고 바
쁘고.
거~ 하게 되마 그래 나도 인제 저기서 고 때 아이들 머리 일본시대
는 요래 단발한단 말이라. 그래가지고 날 또 시킨단 말이여. 그래 시
키놓으면 내 또 고런 거는 눈썰미 있어가지고. 공부하고 그런 것은 
우리 일하고 하니깐 공부는 둘째 문제라. 그래 먹고 살고. 집에 인제 
돈 좀 거~서 하는 그게 귀에 들어가가지고.
머리 깎는 일도 했습니까?
했지. 그래 조금 했지. 아이들 단발 깎아주고, 머스마들은 싹 깎기도 
하고. 또 요렇게 거석하기도 하고. 정말 그대로 그냥 했으마 이발사 
될 낀데. 여자들 단발은 가시게(가위)로 다 하지. 기계 바리깡. 그때 
그기지. 가시게 가지고 요래 하고.
이발사는 조선사람이었습니까?
조선사람. 그때 노국사람들 없었지. 노국사람도 명절 때 되고 하마 
노국사람도 막 사람들이 마이 온단 말이지. 노국사람도 머리 깎으러. 
그때 노국사람들 같이 살지. 그때는 노국사람 다 넘어와가지고. 그래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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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국사람 그때는 좋은 사람이 이발사 많이 있어.
이발소에는 몇 년 근무하셨습니까?
그때 뭐 2년 했는가 몰라. 시집 갈 돈? 벌기는 뭐. 그날 까먹고, 그
날 벌고. 
4. 17세 결혼과 4남매 자녀 생산
결혼은 몇 살 때 했습니까?
열일곱 살 먹어서 갔지. 그때는 다 일찍이 보냈는데 뭐. 그때는 다 
이 나이 돼가 결혼 했지. 그때는 다. 지금 같으면 뭐 내 나이 또래 
손녀들은 고등학생 1학년인데. 허허허!
우리 큰 아들이 거 인제 육십 하나. 이제 육십 두 살 되고 있는데, 
내가 열아홉 살에 낳았나 그랬는데. 환갑 지냈지. 육십 두 살이라.
그때 사할린에서 결혼을 어떻게 했는지 궁금합니다?
한국사람 많지. 총각들도 많고. 강제로 오는 사람. 또 그냥 오는 사
람. 그때는 혼자 사는 젊은 사람 가뜩 있지 뭐. 그린까네 여자들은 
적고 남자들은 많았단 말이야. 그니까 조금 나이 먹도록 놔 둘려 해
도 막 보내라꼬 해사서 못 산단 말이라.
그때 남편은 어떤 분이었으며, 어떻게 만났습니까?
어떻게 만나긴. 부모들이 중신애비 해가지고 갔지. 뭐. 알지도 모르
고 뭐. 그래 가라 하니까 갔지. 가기 싫어도 억지로 갔지 뭐. 부모들 
아는 사람으로 연결해가 만낸 거지.
남편이랑 몇 살 차이입니까?
일곱 살 차이다. 스물네 살이라. 그때는 인제 소련 사람 넘어오고, 
제7장. 부부가 함께 제지공장에서 일했던 권순애
 
245
일본시대에 그 종이공장에 있었잖은가. 종이공장. 술 공장. 무슨 공
장 그래 많단 말이여. 그린까네 거기서 일했지. 산에서 삼판에서 나
무 비~가 오면은 그걸 가지고 제지공장에서 종이 만들고. 큰 공장이
지. 그 공장 만들 적에 독일 사람들이 와서 만들었다 하데.
남편의 고향이 어디십니까?
이름은 이인석이. 시댁은 한국에서 그 뭐라더라? 경상도인데, 경북 
뭐 여게 어데라더라? 상주도 아이고. 여게 어데라. 고추 잘 드는 데 
어디라더라. 영양. 응. 고추 잘 드는 데. 우리 남편이 그래 고추 잘 
드는 데 거~ 사람이라. 그래 고추가 그래 잘 된다 하잖아. 시댁에는 
아직 한 번도 못 갔어요.
당시 남편 되시는 분도 어릴 때 어르신들 따라서 오신 분입니까?
아니. 거~는 총각들이니까 훈련 삼아 훈련 보냈는 기라. 거~ 모집
으로 훈련… 총각들을 델다가 훈련시켜가지고 거~ 마지막에 전쟁하
게 되면 총칼 미고 나갈 판이라. 거~ 훈련 받았단 말이라. [탄광이
나 공장에] 모집으로 온 기 아이고. 그런 훈련까지 일본시대에 다 
받았지. 전쟁 끝나기 전에 손들기 전에는 훈련 받았지. 손을 늦게 들
었으면 전쟁을 갈 수도 있었겠지. 그렇지. 그때 한창 바쁘인까네 뭐.
결혼식은 어떻게 했습니까?
결혼식은 거기서. 그때 신부는 족두리 쓰고 연지곤지 하고 다 그래 
하고요. 그때는 조금 인지 크게 거석 안 하고. 그때는 바빴단 말이
라. 그때는 그때대로. (흉내를 내며) 그래 인제 여게 만들지. 기다라
이 해가지고 그렇지. 신랑은 여기처럼 사모관대(紗帽冠帶) 이런 거 
없지. 한국에서는 그렇지만도 거~서는 어데….
초례상(醮禮床) 차리겠네요?
아~ 그거는. 닭도 얹어놓고 청솔가지도 꽂고 그런 건 하지. 함(函)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246
 
지고가고 하는 그런 것도 뭐 잘 살아야 거~서 하지 뭐. 그렇지 뭐. 
신랑한테 뭐 받겠어? 결혼할 때 모이는 사람, 오고가는 사람은 있지. 
많지. 조선 사람들이. 천막도 치고 음식은 국시 하고. 밥은 거~서 
하고. 고때 내 시집 갈 머리는(무렵은) 인제 조금조금 나샀지.
그린까네 내가 우리 큰 아들을 51년에 낳았거든. 51년도 낳았으니까
네. 49년도 내 잔치했는 모양이다. 49년도 그때가 10월 달이다. 그
때 한창 바쁠 때다. 먹을 것도 막~ 거석했어. 그래도 잔치라꼬 조금 
해가지고 뭐 했는 기 그 모양이라.
결혼하시고, 신혼방은 어떻게 차렸습니까?
별도로 신방을 채리지. 따로 분가를 내주고 그런 거는 없고. 아무 것
도 안 놔. 그냥 방에 들어가가 자라고 하지. 신랑도 무서워가지고, 
그때 열일곱 살이니까. 결혼해가지고 열일곱 살에 가가지고 열아홉
에 우리 큰 아들 낳았고. 아이들 키우니라꼬 뭐 일도 못했지.
일도 못하고 거석하다가 아이들 이제 너이 낳았지. 아들 둘, 딸 둘 
네 명 낳았지. 그래 네 명 낳고. 우리 막내이가 그거 인제 거 유치원
에… 그때는 아이들이 있으면 러시아사람은 유치원에 넣고. 조선사람
도 인제 거~ 유치원에 아~들 넣기가 그렇게 힘들었단 말이야. 그때
는 애들 마이 낳았단 말이야. 유치원도 마이 없었지. 그래가지고 유
치원에 못 넣고 해가지고. 그래 인제 하나도 유치원에 못 였~지. 뭐.
5. 종이공장 21년 노동생활
그래가지고 우리 막내이 그거 인제 돌 지내고 석 달 만엔가 몇 달 
만에 그래 내 이리 들어왔잖아. 그래 묵고 살아야지. 남편 일하는 거 
제7장. 부부가 함께 제지공장에서 일했던 권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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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고 모지래잖은가. 그래 인제 밤 일 있고. 이찌반(1반), 니반(2
반), 산반(3반) 있단 말이야. 아침 여덟시에 가마 네 시에 오고. 네 
시에 가면 열두시에 오고. 그래 인제 거~서 하마 인제 내 거기서 일
하러 들어갈 때 되만 우리 남편이 일 갔다 오지. 그래 일 갔다 오만 
아이들 또 거들고. 조금 몬제(먼저) 난 것들은 좀 크니까네 그것도 
보고.
어떤 일을 했습니까?
내는 돌 지난 다음에 일 드가가지고. 종이공장에 거~ 들어갔지. 우
리 남편도 맹 거~ 일하는 데가 따로 있단 말이라. 큰 거석이니까. 
그래가지고 일하러 가 가지고 거~ 일은 거기서 뭐고? 전기발전소. 
인제 탄(炭). 탄 그거 인제 분가루 막 있단 말이야. 그거 막 거석하
면 올라가는 데 있단 말이라. 그라마 전기발전소 거~ 막 불로 가이 
보일러 불 때면 물이 끓어가지고 그 김으로 해가지고 전기 돌리는 
거. 발전소 거게 거~ 인제 탄 거석하는 기계 부리고.
탄을 밑에서 이래 있단 말이라. 이렇게 있으마 밑에 막 그 줄이 이
래 뚝 구사마 이짝에도 탄 부르고(하역시키고) 이짝에도 탄 부르고. 
탄 오게 되마 인제 큰 차 갖다가 붓는단 말이라. 부르마 이짝에서 
해가지고 올리가지고 거따 부~놓으마. 그래 인제 그거 들어올 적에
는 똑 바로 거 전기발전소 있는 데로 불 때는 데로 그래 드갈 수 있
고. 그거 없을 적에는 우리가 인제 기계가지고 그래 했는데. 기계부
리고 했지.
기계를 어떻게 부렸습니까?
그거 있잖은가요? 이렇게 하마 다 피 올라가는 거 있잖은가요? 뜨이
가지고 탄 이렇게 이렇게 밑에는 탄 하마 이렇게 올라가지. 그래 올
라가마 줄 인제 발전소 올라가는데 거 글로 들어가지.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248
 
그니께 그때는 일하는 사람이 여덟 명이면 여덟 명쓱 있단 말이야. 
그래 여덟 명 있으마 그것도 오데 어디로 보내는 거 어디로 보내고 
되마 인제 전기를 가지고 어떻게 인제 불 주마 인제 다 됐다고 거삿
는 사람도 있고 보는 사람 있고. 딴 데 거삿는 사람 있고. 여덟 명쓱 
일한단 말이야. 여덟 명쓱 일하마 기계부리는 거 내 혼자. 스메나는 
혼자지.
스메나가 무엇입니까?
거 인제 거 뭐야? 같이 인제 아침에 여덟시에 나가마 일하는 사람이 
같이 하는 사람이 여덟 있고. 또 이제 아침 여덟시에 가가지고 네 
시까지 끝나마 또 딴 부리가드가 들어온단 말이야. 그 다음에 그 사
람들 오마 열두시까지. 열두시까지 하고나마 밤 일 들어오는 사람이 
있단 말이야. 밤 일 들어오마 또 아침 여덟시까지.
3교대네요?
3교대지. 그렇지. 스메나이지. 조선말을 할 줄 몰라요. 그래가지고 
하는데. 기계부리는 사람은 인제 한 스메나에 둘이서 놔둔다. 양쪽에 
있단 말이야. 기계 부리는 기. 양쪽으로 막 올라간단 말이야. 탄이. 
그래가 한 스메나에 두 명. 기계 부리는 사람이 두 명쓱. 그래가지고 
뭐 그 일도 하고 뭐.
제지공장 이름이 기억납니까?
제지공장에 거 뭐야? 공장이 많지. 여러 군데 술 공장 따로 있고 우
유 만들고 별 거 다 있지. 뭐. 근데 우리 공장 거~는 크다 말이야. 
참 좋았어. 별 거 다 나온단 말이야. 내가 근무했던 공장은 오징아이
시아. 종이만 만드는 거 아이라. 별 거 다 만들지. 여러 가지지. 아
주 큰 거.
갈바사는 무엇입니까?
제7장. 부부가 함께 제지공장에서 일했던 권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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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바사는 소세지. 소세지 만드는 거는 딴 데에 다 있고. 소세지 그거
는 그 공장은 오징아이시아서 안 나고. 그거는 딴 데 있지. 뭐 여러 
가지 다 있지.
하루 여덟 시간씩 일했어. 출근해서 오전 내도록 일하면 점심 묵지. 
점심 묵고 그 다음에 네 시까지 스메나 들어온단 말이에요. 그 사람
들이 들어오마 우리는 가지. 그 다음에는 자유지. 쉬는 날도 있지. 
그니까 스메나 있잖아. 이쯔반, 니반, 산반 간다 했잖아. 기계는 계
속 돌아가지. 스메나 이래 있으니까.
제지공장에서 남편은 어떤 일을 했습니까?
거~서 종이 나오는데 있지 않은가요. 만들어 나오는 데는 만들어 나
오고, 또 말라가지고 뭐 그것도 다 지가 일하는 자리가 있지. 그러면 
인제 종이가 막 나오잖아. 종이 막 말리가지고 나오마 그걸 인제 채
워야지. 그거 채우마 큰 이런 거석이 있단 말이야. 종이 재놓는 데가 
얼마나 크고 막 그거 인제 밀어가지고 탁 닫는 기라. 재~고.
그거 인제 외국으로 나갈 때에는 큰 기차가 받으러 온단 말이라. 사
러. 그래가지고 인제 막 오면 싣지. 그것도 인제 이찌반, 니반, 산반 
갔다가. 스메너 일이지. 그렌께네 아이들이 있은까네 내 인제 아침에 
가가 네 시 나오마 우리 남편 또 일 들어가고. 이렇게 스메너 했지. 
그래 키웠지. 유치원에 못 였~고. 아이들. 그래 살아나왔다.
벌이는 얼마나 됐습니까?
벌이야 그저 가까스로 그저 먹고 살만하지. 두 사람이 벌었는데도 
그렇지. 그 공장이 크기만 해. 얼매나 유명한 공장인데. 직공이 수백 
명도 더 되지. 그렇지. 얼매나 거게 술 아주 독한 불이 풀풀 나는 
거, 그거 아주 진짜 그것도 만드는데 거 공장도 있지. 종이공장 있
지. 거~ 또 하여간에 뭐 뭐 철(鐵) 가지고 그거 깎는 데도 있지. 아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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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커. 공장이.
탄광도 있습니까?
탄광은 딴 데서 나와가지고. 우리 탄 있는 데 또 주마 그거 거~서 
해가 우리 다른 데로 또 올라갈 수 있고. 나무를 베어 오면 널빤지
로 만드는 제재소도 있지. 별 거 다 있지 뭐. 조선 사람들이 그런 데 
일을 마이 했지. 그것도 기술 있는 사람이 들어가지. 기술 없는 사람
은 못 드가지.
유치원에 조선사람의 아이들은 안 받아줬습니까?
그때만 해도 아이들이 많단 말이야. 자리가 없단 말이야. 자리가 없
어서 그래가 내주는 인제 뭐 아이들도 몇 살슥 커가고 하인까네. 그
때는 자리 있지만도 뭐 학교 들어가야 되고 뭐. 유치원에 열~(넣을) 
필요도 없고. 난주에는 자리 마이 남았지만. 자녀가 4남매인데 전부 
다 세 살 터울이라.
6. 52세 은퇴 후 연금 수령, 연금제도
일을 처음 시작한 것도 결혼하고 10년 지나서네요?
10년 그 정도 됐는가? 내가 열일곱에 시집가가지고 열아홉에 낳았
지. 그니께 우리 막내이 놓고 내가 스물아홉 살에 일 들어갔어. 첫 
일 시작했어. 그래가 제지공장에서 일을 연금 받을 때까지 했지. 50
살까지. 그면 일을 딱 21년 한 거죠. 
21년 동안 이 종이공장에서만 했습니까?
거기서만 했지. 거기 하고, 내 연금 받아가지고. 아직도 뭐 나이도 
젊었고 하니까 다른 데 병원에 또 인제 청소하는 거 그거 조금 2년 
제7장. 부부가 함께 제지공장에서 일했던 권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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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그만 뒀어. 그거까지 합치면 52살까지 했어. 그래 뭐 연금타고 
뭐.
제지공장 일을 한 20년 넘게 했는데, 제지공장 안에서 기계 보는 일
만 계속 했습니까?
안에서 기계도 부리고. 이런 와궁에 올 적에는 똑 바로 이런 줄이 
있단 말이야. 이 줄이 있으마 여~ 탄이 이짜서 또 나오마 그 줄을 
보내지. 발전소로 막 불 때는 데 글로 들어간단 말이야. 그거 없을 
적에는 인제 탄 안 들어올 적에는 그 밑에 이렇게 많단 말이야. 크
고 목욕탕 같이 칸이 있단 말이야. 그 밑에 아주 높으다 말이야. 거 
기계를 들라~가지고 올리지. 탄 안 들어올 적에는 차로 안 들어올 
적에는 탄을 우리가 기계로 자아서 올리지.
와궁이 무엇입니까?
차. 짐 석탄 싣는 거 있어. 탄 막 싣고 여~도 있잖아. 그런 기 들어
오마 우리 기계 안 부리고 똑바로 인제 그래 올라가고.
기차 짐 싣는 칸을 ‘와궁’이라 부릅니까?
와궁. 응. 기차 가마 사람 싣는 데 있고 뒤에 줄달아 가는 그거. 탄
도 싣고 나무도 싣고 하는 그거 와궁이라. 20년 동안 하면은 그 일
이 눈에 익고 손에 익어가지고 환해지지. 그래 하면 계급 올라가는 
것보다 그때는 월급이라. 첨에 드갔을 적에는 월급도 크기 많지 않
았어. 그런데 점점 하니까 점점 조금쓱 올라가가지고. 내 연금 탈 때
는 많았지.
연금은 50세까지 일해야 나옵니까?
여자는 20년. 남자는 25년. 그것도 이유가 있단 말이야. 아이 다섯
이마 마흔 다섯 살까지 일하고 연금 탈 수 있고. 아이들 다섯 놓으
마 다섯까지는… 내가 만일 다섯 낳았지요. 그람 50살에 나가야 되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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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데, 5년 동안을 감해준단 말이야. 먼저 빨리 나가게. 그런 연금도 
있고.
아이 여섯 명 낳으면요?
그거는 상관없지. 다섯 명 다음에는 그거는 상관없어. 더 있든지 말
든지. 노동 감해주는 기준이 다섯 명까지지요. 그렇지. 그니까네 네 
명 낳았으니까 내는 20년 꼭 채워야 된단 말이라. 그럼 다섯 명 놓
으면은 15년만 해도 되고. 15년만 일하고 연금 탈 수 있단 말이라. 
여자는. 남자는 그거 없고. 남자는 25년이란 딱 그거 있고.
20년 일하시고 나면 혼자 먹고살 만큼 연금이 나옵니까?
아~ 혼자 먹고 살 만하지. 그것도 한 공장안에서도 힘든 일을 하면 
연금이 더 많지. 그래 힘든 일이 돼가지고. 큰 공장이니까 별 거 하
는 데 다 있지 뭐. 내 하는 일은 힘들 때는 들고.
제지공장에서 가장 수월한 일은 무엇입니까?
(웃으면서) 수월한 기 노는 기 수월하지 뭐. 수월한 게 어디 있어? 
그래도 일을 해야 돈을 주지. 수월한 데도 있지. 있고. 크다 보인까
네 수월한 데도 있고 힘든 데도 있고.
남편은 제지공장에서 몇 년 일을 하셨습니까?
그린께노 우리 남편은 일찍이 돌아가셨어. 52살에 돌아갔어. 오십 
다섯 돼야 연금 주는데 연금 못 탔어. 오십 둘에 거석했는데 3년만 
더 하마 인제 연금 탄다고 좋다고 했는데 그래 아파가지고. 22년을 
일했는데도 3년이 모자자면 연금이 없어요. 안줘. 25년 되면 주는데. 
연금을.
연금을 받다가 돌아가시면 어떻게 됩니까?
연금을 받다가 돌아가마 없지 뭐. 자식한테도 없지. 그게 인제 딱 법
에 정해져 있는 거지. 어마이가 일 안하지. 애비 죽지. 그라마 막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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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 3살인가 4살 되마 가~(그 아이가) 여권 낼 딴에까지 또 주지. 
애비가 만약 60원 탔으마 30원 얼라한테 주지. 그래 엄마 일하마 그
것도 없어. 
아이도 그럴 때 연금을 탈 수 있는 나이가 있겠네요?
연금 타다가 그 아이가 또 어른 되면 안 주지. 열여섯 살. 열여섯 살
이마 지~가 먹고 노력할 수 있다는 그거. 여권은 뭐 다 나오는 쪼만
한 거 그거 말고. 주민등록증 말고 또 있잖은가요? 여권. 여~는 주
민등록 그기네. 고거 몇 살 때 줘요? 주민등록증이 스무 살 돼야 나
오는 거는 너무 늦게 나오는 거거든. 거기는 열여섯 살에 나와요. 열
여섯 되마 지~ 혼자 살 수 있다 그거지.
일도 하고 먹고 살 수 있다는 그기라. 그게 여권이지. 공민증이란 게 
맹 그기지. 한국에는 여권이 외국에 나갈 때만 쓰인다. 그게 주민등
록은 쪼만한 그기라. 고거는 어른이 됐다는 거. 거 봐라. 다르지 않
은가. 그게 있어야 그걸 가지고 대통령 선거도 하고. 맞아. 이거는 
인제 여권 그거는 딴 외국으로 나간다는 그기라. 응. 그 여권. 열여
섯 살 되마 그걸 내준단 말이야. 각 나라마다 다 틀리지. 조금 비슷
비슷하지만도 틀리지.
7. 남편의 사망과 장례 및 제사의례
남편은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아파서 돌아가셨지. 속이.
사할린에서 장례는 어떻게 치릅니까?
사람이 돌아가면 뭐… 옛날 한국처럼 상여를 메고 그런 거 없어.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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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싣고 가. 여게도 지금 그러잖은가. 차에 싣고 가고. 여기도 그거
는 옛날이 그렇지만 지금은 그런 거 없잖아. 사할린은 처음부터 그
런 거 없고 차에 다 딱 이거 관 곱게 해가지고 차에 싣고 가지.
어디다 묻습니까?
산에 갖다 묻지. 공동묘지가 있지. 다 있지. 산에 미고 가가지고 묻
을 적에 친척간들 가 가지고 마지막 인사하고. 그 다음에는 인제 딱 
덮고서는 못질해가 그래 묻어뿌지.
수의(壽衣)는 안 입힙니까?
옷은 그거 병원에 거~서 다 해가지고 나오지. 양복 입히고. 한국은 
수의라 해가지고 삼베 짠 그걸로 하는데. 사할린에서는 짜고 그런 거 
없지. 양복 입히고. 여자는 옛날 거석으로 저고리 해가 입는 사람 있
고. 서양식으로 도렌스(dress) 치마 그거 기단하이 그래 입고 가지.
3일장이나 5일장 이런 것도 있습니까?
아~ 거~도 그래 해. 거~는 3일장. 사람이 돌아가시면 시신은 3일 
동안 어떤 사람은 가정집에 데리고 오고 어떤 사람은 병원에 놔두는 
데 있어. 영안실. 그렇지. 거~ 가서 싣고 가는 사람도 있고. 조선사
람이 3일이나 5일 동안 안치해놓고 있으면 조문도 오곤 하지요. 오
지. 그래. 5일 그런 거는 없어. 그저 3일. 그렇게 되마 집에 손님들 
오마 술상 차리가 오는 사람은 빈 입으로 안 보내지 않은가. 그래 
술 한 잔이라도 대접하고. 그래 봉투(부의금) 가져와서 봉투 딱 가
져 온단 말이야. 돈. 얼매면 얼마. 적게 넣는 사람은 적게 넣고. 그
래가지고 딱 이래 채리놓고. 사진 놓고. 그래 그 앞에서 절하고. 술 
한 잔 부~ 놓고 그래 하지. 부의금도 하고 조문 방법이 비슷합니다. 
다 그렇게 풍습이 있지. 곳곳마다 다 그 나라마다 다 있지.
러시아사람도 부의금 봉투를 가져와서 조문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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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니께네 노국사람은 같이 일하다 보니까네 거석으로 생각해
가지고 그래 와서 드다보고. 그래. 봉투는 안 가져오고. 노국사람들
은 그런 거 없어. 꽃 같은 거 그런 거 가져오고. 그거는 한국 풍습하
고 다르지. 조선사람들은 꼭 적게나 많이나 봉투를 가져오지. 러시아
사람은 그런 거 없어. 우리는 옛날 부모 세대들이 했던 거 그대로 
하는 거지. 남편은 공동묘지에 묻었어.
기제나 명절 등에 제사는 어떻게 모십니까?
거~ 맹 여게 추석 쉬고. 제사 때다 하면 제사 지내고. 그런 거는 한
가지지. 8월 되마 산에 가서 풀치고, 거~ 인자 술하고 사와가 채리
놓고 인사드리고 그래 하지.
그런 날이 정해져 있습니까?
정해져 있지. 8월 추석. 8월에는 해방 전으로 쳤거든. 여~는 몰랐고. 
음력은. 해방 날로 쳐서 거~는 추석을 한다 카이. 그거 양력으로 추
석이지. 한국 여~는 음력으로 다 음력으로 치잖아. 인제 조상 산소
에 가면은 음식을 차려놓고 절하고. 사할린에서는 양력으로 추석날 
그러고 나면 끝이지. 설도 양력. 서양 사람들 그 풍습대로 양력으로 
다 친다.
8. 사할린 한인의 북한 행, 공민증 발급
사할린에서 해방되고 일본사람들은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조선 사람
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일본사람들은 그렇지. 일본사람도 남은 사람 마이 있지. 마지막에는 
점점점 삭 다 가버렸지. 우리 조선사람은 그때 조선으로 돌아올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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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1958년을 기점으로 상당수 사할린 한인들이 북한으로 이주했다.
이 다 길이 막혔는데. 간다 해봐야 북조선밖에.
북조선 간 사람 있습니까?
북조선이야 소련하고 한가진데 그래 가지. 북조선으로 마이 나갔지. 
여기서 혼자 있는 사람들, 젊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 또 장개들러도 
가고. 그때 이수옥이 그 사람이 거~ 마이 했단 말이여. 김일성대학. 
무슨 대학 무슨 대학 그 총각들 싹 마이 갔어. 북조선으로.25) 남한
에서 간 총각들도 많이 갔지.
주변에서는 간 사람도 있습니까?
주변에 사는 사람도 가지. 그래. 총각들이 가지. 그래. 여~서 간 사
람 아이고. 우리가 거~서 살았지 않은가. (90대의 동료 할머니를 가
리키며) 그니까 만일에 할머니 아들 나이 쯤 되마 그런 아들 다 가
지. 우리 아이들은 아직 좀 적었단 말이지. 그니까 안 갔지만 저 할
머니 아들들은 그때 마이 갔었지. 총각들 아이들 마이 갔어. 공부하
러. 김일성대학. 무슨 대학 무슨… 이수억이라 하는 사람이 그렇게 
선전을 마이 하고 돌아댕겼단 말이야. 이수억.
이 사람은 이북사람입니까?
북조선 사람이지. 북조선 사람이 선전했단 말이야. 선전. 선전자란 
말이야. 그래가지고 다 땡길라꼬. 거~ 인제 저 북조선으로 싹 다 땡
길라고 그랬잖은가. 그래가지고 공부하러 마이 갔단 말이야. 마이 가
고. 그 중에서 돈 많고 조금 잘 사는 사람은 또 북조선이라도 우리 
한 가지 조국, 조선인까네 거~ 가면 또 빨리 또 북으로 가 가지고 
남으로 빠르게 돌아온다. 그래가지고 가는 사람 있고 그렇게 됐어.
많이 데리고 갈라고 했네요?
그럼 마이 데리고 갈라고 선전을 막 하는 기라. 그래가지고 또 그래 
제7장. 부부가 함께 제지공장에서 일했던 권순애
 
257
있으면서 우리들은 인제 남조선 사람은 그저 인제 한국에 올라고 주
민등록 막 내라고 한단 말이야. 북조선 꺼. 북조선 꺼 내라고. 막 내
라고 사람 못 살게 굴어. 내라꼬 그라면 인제 북조선 다 끌고 갈라
고 인제. 그래가지고 안 낸 사람은 안 내지 뭐. 이거 내마 북에 가마 
한국에 못 온다고 안 낸 사람 많지. 그래 내주로(나중에) 막 하도 
너무 그래 사서 너무 그렇게 해가지고. 우리 말 안 들은 사람 안 듣
고. 너무 그렇게 해가지고 할 수 없이 또 뭐 뭐 냈는 기라. 북조선 
꺼 냈는 기라. 그래 내는 사람은 북조선에 왔다 갔다 하고 그렇고.
또 자슥들이 북조선에 가 가지고 공부하러 나간다. 뭐 나간다. 부모
들은 아들 보러 간다고 그래 또 북조선에 댕기고 그렇게 했단 말이
야. 뭐 거~ 없이 살고 하니까네 옷이라니 뭐 그런 거 마이 가지고 
막 아들 집에 갖다 준다고 갖다 줘도 거 있어? 거기 가져가면 다 뺏
기고. 저거들이 그런 짓 했단 말이야. 거~ 북에서.
북조선에는 화태 사는 조선 사람들이 왔다 갔다 그렇게 했네요?
응. 그렇지. 그래가지고 인제 그것도 그거 있어야 돼. 주민등록 북조
선 꺼 있어야 돼. 그거 낸 사람은 왔다 갔다 할 수 있고. 그거 안 낸 
사람은 북조선에 못 가. 못 가지. 그거 북조선 국민 아인데.
할머니도 북조선 공민증(公民證)을 냈습니까?
냈지. 그래 내~ 가지고 내주는 인제 그래 있다가 그 다음에는 북조
선 국민 싫다고 보냈뿟지. 보내니까 다부 온다. 다부 오는 거. 그 다
음에는 째 내삐리는 사람도 있고. 또 보냈어. 그 담에는 안 오데. 두 
번 보내고 나니까. 그래 그 다음에는 어떡 하노? 그 다음에는 인제 
또 무슨 비공민(非公民)까지 있었지. 여기도 아이고 저기도 아이고. 
무국적이지.
소련 공민증은 내지 않았습니까?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258
 
그래 그거 가지고 있다가 인제 어디 기차타고 가든지 뭐 하고 가든
지 하마 그거 경찰관에 가서 허락 받아야 어데 갔다 올 수 있단 말
이야. 조금도 꼼짝 못해. 어데 가마 벌금 시키고 한단 말이야. 그니
까네 안 되겠다. 할 수 없어서 아이들도 커가고 하니까 어디 댕기지
도 못한단 말이야. 여~ 뭐 지옥서 감옥살이 하는 것처럼 어데 조금
만 가도 딱 기차가 막 보고서리 거 딱 붙든단 말이야. 그래 붙들어 
가지고 벌금 시킨단 말이야. 그니까네 내주는 너무 하니까 그것도 
싫지 않은가. 어데 댕기지를 못하고 그니까네 이제 소련 공민증 내
기 시작했지. 그니께로 소련 공민 다 냈는 기라. 그래 내주는 마지막
에는 소련 공민 다 냈는 기라. 그때는 맘대로 자유로 댕길 수 있지.
해방되기 전에는 일본 공민증을 갖고 있습니까?
일본 있을 때는 일본 공민이고 그런 거 몰랐지. 해방되고 첨에는 북
조선 공민증을 만들었고 그 다음에는 무국적 공민증. 그 다음에 소
련 공민증 받았지. 차례로 받았지. 세 가지를. 해가지고 한 번 받으
마 먼저 받았는 거 내삐리뿌고.
무국적 공민증 갖고 있으면 거주지에서만 있어야지 이동은 못 합니
까?
그렇지. 마지막에는 이동했지만도 사람을 쳐주지 안했지. 그니까네 
임자 없는 사람이 됐지. 그니까 좋아 안하지. 그니까네 내주는 그걸 
알고서리 인제 소련 공민증을 내기 시작했단 말이야. 그때는 소련 
공민증 내주고. 지금은 사할린에 살고 있는 조선사람들은 노국 공민
증을 다 갖고 있지. 다 노국 공민증이지. 무공민(無公民) 없지.
9. 한국말과 혼인관계, 4남매 자녀들
제7장. 부부가 함께 제지공장에서 일했던 권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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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한 한국말을 거론하며) 한국에 오랫동안 살아온 것처럼 한국말
을 잊어버리지 않고 그렇게 잘 하십니까?
경상도 말 무뚝둑하니 그렇다.
사할린 계실 때 가정 내에서는 다 조선말을 썼습니까?
조선말도 쓰고. 러시아 사람 오고 난 다음에는 아이들 커가지고 러
시아 유치원에 댕기고 학교 댕기고 그렇게 한께노 이놈의 아이들이 
조선말을 모른단 말이야. 그러고 야~들 또 유치원에 가든지 학교 가
든지 하마 부모 자꾸 조선말 하마 또 노국말도 잘 못하게 된단 말이
야. 그것도 안 된단 말이여. 그니까노 아이들하고 말하게 되만 소련
말을 같이 쓰게 된다. 가정에서도 쓰게 된단 말이야.
그러면 아이들은 조선말을 더 잘 모르겠는데요?
우리 거~ 우리 아이들 조선말도 똑똑이 모르는데. 무슨 말하는 가 
대충 알아듣기나 조금 거석하지만도 할 줄 모르는데.
일본시대 해방되기 전에는 가정에서 어떤 말을 썼습니까?
그때는 조선말 쓰고. 그때는 일본말 써야지. 또 일본말 안 하면 또 
전에 일본말 다 까뭇네. 조선신민 뭐 이런 거 하고. 일제시대 한 때
는 가정에서도 조선말 쓰지 마라. 일본말 써라. 그래 했지만도 공부
를 못했는데 우째 일본말 할 수 있나? 조선말 썼지.
노국시대가 된 뒤에는 가정에서 조선말을 썼습니까? 
가정에서 쓰기도 쓰고. 우리 어데 또래 가마 조선말 마이 쓰지. 애들
은 유치원에 댕기고 학교 댕기고 하인께네 조선말 못한단 말이야. 
그니께 학교 가마 또 방해란 말이여. 노국말 잘 모른다고 학교서 
거~서 캐삿는데. 그니께노 집에 와서는 또 아이들은 모르니까네. 또 
부모가 또 노국말 하게 된단 말이야. 그니까 점점점점 못하게 되지.
2남 2녀 4남매 자녀 지금 조선말 다 합니까?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260
 
그니께 해도 잘 못한단 말이야. 요즘에는. 손자는 더 못하지. 자녀하
고 손자녀는 독립가정을 갖고 있는데. 그것들은 영~ 노국말 쓰는 기
라. 자녀들 집에서는 주로 노국말을 쓰잖아. 그러이 손자녀들은 조선
말을 거의 몰라. 몰라. 인제 할머니, 할아버지 수준에서는 조선말을 
능통이 하고, 자식 수준에서는 반반이고, 손자녀는 아예 모하고. 이
렇게 생각하면 되겠지. 나중에 손자녀들이 크면 할아버지, 할머니 나
라를 잊어버릴 수도 있지 뭐. 말도 못하니까. 그러고 결혼하는 것도 
봐요. 여~서도 그렇잖예. 미국사람 어데 사람한테도 안가요. 거~도 
맹 한가지라. 그러면 뭐 잊어버리지. 뭐.
2남 2녀 자식들 사위하고 며느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거는 다 조선사람이라. 노국사람 첨에 싫어했지. 이제는 싫어하고 
뭐 저거 좋다하면 고마인데 뭐. 조선인 가족 중에서도 노인분들 자
녀세대가 노국사람하고 결혼한 경우도 더러 있지. 많지. 첨엔 그렇지
만도 마지막에는 뭐 점점점점 퍼져나가잖아.
선대 세대에서 노국 남자하고 결혼한 경우도 있습니까?
없지. 할매 세대는 영~ 없고. 내 세대는 조금씩 있기 시작했고. 내 
아래 세대부터는 더 많아지고. 조선 것이 세대가 내려갈수록 엷어진
다고 보면 되겠지.
지금 한국이 그렇잖아요. 그렇고 또 애도 안 놓을라 하고. 결혼도 안 
갈라 하고. 늦게 장개 가고 시집도 늦게 가고 하니까 애가 1학년 학
교 들어가마 어마이가 40살 다 돼가고 언제 공부시키고 언제 거석
하겠어요. 지금 한국에는 특별히 더 야단이네. 거~는 그래도 그렇게
까지는 거석한데, 지금도 그렇지만도 한국에는 특별히 더 많네.
지금 우리가 그냥 텔레비전 보인까네 우리가 알지. 텔레비전만 보마 
아무 것도 모르지. 텔레비전 그냥 뭐 먹고 할 일 없지. 텔레비전 심
제7장. 부부가 함께 제지공장에서 일했던 권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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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하니까 켜놓으마 뭐도 안 보겠어. 다 본단 말이야.
2남 2녀 자식들은 공부를 다 마이 시켰습니까?
다 했지요. 대학 가고. 12학년 마치면 대학을 가지. 다 대학 공부했
어요. 자식들은 건축부 뭐고? 사장도 있고. 며느리나 딸들도 일을 다 
하지.
아이가 어릴 때는 엄마가 일을 하기 위해 어떻게 합니까?
가~들 시대는 유치원에 인제 유치원에 마이 있지. 보통 엄마 젖을 
몇 살까지 묵고 유치원에 보낼 수 있냐면. 그것도 있어. 쪼만할 때 
야스리 있고 또 사직크 있고. 야스리는 쪼매난 어린애들. 누~서 젖 
믹이고 하는 고거 보고 야스리. 그거 구르빠(group)고. 또래 그거보
고 ‘구르빠’라 한단 말이야. 그러고 사직크는 조금 크는 아이들 보고 
사직크라 하고. 걸어댕기고 이런 애들. 그거 보고 사직크라. 사직크 
구르빠. 그럼 야스리, 사직크 구루빠에 속하는 아이들을 따로 따로 
이렇게 보살펴 주는 유치원이 있지. 따로 있지. 그러이 애 놓고 얼마 
안 있다가 바로 또 일을 할 수 있지.
일을 마치고 데리고 오고 또 데려다 주는 일을 매일매일 합니까?
그렇지. 그래 할려면 힘들지만도 아이 키울라 카면 학교 갈 땅(때)
까지는 그렇게 좀 힘들어. 그린께로 남편들이 마이 거~는 남편들이 
한국 남자들이나 소련 사람들은 특별히 여자들한테 잘 해준단 말이
야. 밥도 하고. 그린까네 우리 조선 사람들은 그거 본  보고, 또 
여~서 그렇게 썩 잘하지는 못하지만도 같이 일 해먹자마 그렇게 서
로서로 도와야 된단 말이야. 밥도 하고. 아내 일하러 가마 없으마 또 
밥도 끓이가 아이들하고 맥이고. 서로서로 그렇게 해가지고 키우지.
할머니 세대에서도 그렇게 했습니까?
우리 시대 때는 덜 했지. 그거는 늙은 시대 본 보고 덜 했지. 그니까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262
 
우리 자식들 시대에는 그렇단 말이야. 그거도 좀 달라진 모습이지. 
10. 퇴직 후 텃밭 농사, 산나물 채취
52세에 퇴식하시고 난 뒤에는 어떻게 살아 왔습니까?
그 뒤에는 뭐 집에 밭이 있으면 밭에 채소도 숨가 먹고, 남으면 갖
다 팔기도 하고 뭐. 농사라 할 거 없지. 뭐. 텃밭 조금 있는 거 뭐. 
산에 열매도 따다가 먹고 잼에도 끓여 먹고 뭐.
텃밭도 개인 집에 살아야 있지. 땅집. 땅에 사는 사람. 땅집이 개인 
집이라. 개인 집이 있는 사람은 밭이 있지 않은가. 텃밭이. 아파트 
집에는 텃밭 어디 있어요? 없잖아요. 그니께 개인 집에 사는 사람.
사할린에는 개인 집이 있고, 그 다음에 아파트가 있고요?
여기도 그렇잖은가. 그것뿐이지. 여게도 그렇잖아요. 낮은 집에 사는 
사람. 그거보다 아파트는 높은 집이고. 사할린에는 개인 집 경우에는 
텃밭이 다 있지. 땅 많다고 마이 차지하는 거 아이란 말이야. 그린께
로 집에 먹는 거 채소 같은 거 조금 숨가 먹지.
텃밭에 주로 어떤 채소를 심습니까?
여~ 한가지지 뭐. 감자도 숨구고. 양파. 별 거 다 숨구지. 딸기 같은 
것도 숨구고. 배추, 무도 숨구고. 이걸 하면 가정에서 먹고, 남는 거
는 시장에 가서 팔고 싶으면 팔고. 농가(나눠) 물~라면 농가 묵고.
52세 은퇴하시고 그런 식으로 계속 생활해 오셨네요?
그렇지. 산에 고사리도 뜯어다 묵고 뭐. 산에 고사리는 꽉 찼는데 
뭐. 지금은 무서워서 못가. 미나리도 있고 별 거 다 있어. 여~보다 
더 많아. 미나리는 물가에서 자라지. 산나물 그것도 별 거 다 있어.
제7장. 부부가 함께 제지공장에서 일했던 권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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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에도 산나물이 많이 납니까?
하이고! 별 거 다 나요. 거~는 또 얼마나 좋다고. 무도 얼마나 좋고. 
두릅 가시 있는 거 그것도 얼마나 마이 있어. 두릅. 그걸 노국 사람
들이 첨에는 물~ 줄 몰랐지. 근데 와가지고 인제 장사하는 사람이 
있단 말이야. 요 맨크로 시장에 음식 같은 거 해가 팔고. 돈 벌라고. 
그래 조선사람들이 하고 하고 하니까 먹어보고 맛있다고 저거들도 
이제 사먹고. 단도리하고. 노국사람이 더 잘해. 산에도 가고 이래 하
지. 인제 저거들이 더 잘해. 뭐 첨에는 노국사람들 할 줄 몰랐기 때
문에 그거는 전부 조선사람 차지였지. 임자가 어디 있어. 가마 뭐 마
구잡이.
그런데 45년도, 46년도, 47년도는 명태 이것도 물~ 줄 모르고. 잡
아오면 문어도 무섭다고 던지고 도망가고. 사할린은 뭐 물고기고 뭐
고 얼마나 많아. 조선에는 문어가 귀한 거 아닙니까? 제사 음식에 
올리고. 그러면 그것도 배워줘 가지고 노국사람들이 이제는 다 먹어. 
이제는 얼마나 비싸게 팔아먹고. 우리는 거~서 얻어먹지를 못하지. 
연어. 그것도 빡빡하게 올리가 마음대로 잡아먹고. 이런 통에다가 막 
절이고 말루고. 무슨 짓을 못해. 꽉 찼어. 먹을 거. 노국사람이 연어
도 먹을 줄 몰랐어 첨에는 조금 거석 했지. 내주는 뭐 별 거 다 먹
어. 그냥.
11. 사할린 사람들, 음식문화, 거주지
사할린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았습니까?
사할린에서 조선사람도 있고, 노국사람도 있고, 일본사람도 접하고.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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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북에서 온 사람도 있고 그랬지. 그런 사람들 하고 접해서 살고 
이러면서 어려운 거야. 뭐 그 사람들도 어렵게 살고 우리도 어렵게 
살고 하지만도 그래도 북한사람은 성질이 달라. 좀 악한 기가 있단 
말이야. 우리 남쪽 사람은 무르단 말이야.
일본사람은요?
일본사람은 아무래도 전쟁에 져가지고 잽히가지고 거~ 붙어 살라마 
좋은 기 없지. 뭐 잘해주겠어요. 그렇지만도 일본사람은 못됐지만도 
경우가 바르단 말이야. 경우가 바르단 말이야. 일본사람은 무슨 배급 
주든지 뭐 주든지 하마 차별 없이 똑똑 딱딱 그래 해줬단 말이라. 
얼마 안 살았지만도. 거~서.
노국사람은요?
노국사람도 거~ 맘이 나쁘고 아주 악한 사람들도 아인데, 이 사람들
은 좀 엉큼한 기가 있고. 그렇게 뭐 여자들한테 잘해주고 애들한테 
잘해주고. 체구가 커. 서양사람 크잖아. 아이고! 첨에 겁이 나가지
고… 코가 이렇게 크지. 키도 크지.
사할린에서 음식은 어떻게 해가 드셨는지요?
사할린에서 옛날 어머니들 하는 거석도 뭐 그거 뭐. 김치 같은 거. 
된장, 간장 다 해먹고. 뭐 먹는 거는 그래 다 해먹지. 된장, 간장 만
들라 카면 재료가 콩인데 그런 콩은 거기서 재배를 하는 게 아이라 
어데서 싣고 오는지 가져오잖아. 우리나라 옛날 된장 담는 콩하고 
한가지지. 그린까네 그 콩도 그거 뭐고? 금방 했는 거 하고 오래 묵
은 거 하고 다르지. 오래 됐는 거는 조금 안 그래도 안 하지만도. 그
래도 뭐 된장 해먹고 뭐.
된장국 끓여먹고 시루떡도 해먹고 다 했어. 마지막에는 조금 그러다 
보이 살기 나아졌지. 잔치도 잘하고. 거~서도 잘하고. 시루떡도 해
제7장. 부부가 함께 제지공장에서 일했던 권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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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다 했지. 여~ 하는 대로 다 하지. 잔치국수나 이런 것도 해먹
었지.
노국음식 요리를 가정에서 해 드십니까?
해먹지 않고요. 노국사람들하고 같이 일하고 또 뭐 여기로 하면 뭐 
식당 같은 데 점심시간 때 일하다가 또 뭐 집에서 뭐 먹을 거 싸가
지고 갈 때는 싸가지고 가고. 바빠서 못 싸갈 때는 거~ 일하는 식당
이 있단 말이야. 오징아이샤 거~ 옆에 큰 식당이 있단 말이야. 서양 
사람들 요새 잘 먹잖아요. 그런 데에 가서 줄 서가지고 다 먹지. 노
국사람 먹는 걸 그대로 그거 먹지. 그래. 내는 노국음식 더 좋아하는
데.
가정에 오면 또 한국음식으로 해 드시고요?
그래. 노국음식 내가 좋아한다고 집에 와서도 만날 안 끓이지. 우짜
다 끓일 때는 끓이고. 또 조선음식 뭐 좀 먹고. 공장에 일을 할 때 
아침은 집에서 먹고 가고 점심은 공장에서 먹고. 거~ 가서 인제 돈 
주고 사먹지. 저녁은 인제 네 시 되면 집에 오면 집에서 끓이먹고.
출퇴근은 거~ 멀지 않은데 뭐. 크게 안 머는데 뭐. 먼 사람은 버스 
타고. 아이고! 그래도 젊을 때 그래도 일하고 할 때가 재미있었어. 
이제는 뭐 그거 가마이 생각하이 참 일하고 젊을 때가 그때 참 좋은 
시대 때구나 이래 생각이 난단 말이야.
사할린에서 어디 사셨습니까?
리는 마카루. 거기는 촌도 아이고 도시도 아이고. 중간적으로 큰 택
이지. 거~도 남화태지. 그게는 잔잔한(자잘한) 여게 촌에 산골처럼 
집 조금씩 있고 그렇지. 마카루에도 사람이 많이 살아. 큰 도시여. 
그린께노 오징가이샤(제지공장) 그래 있고, 별 거 다 있었단 말이야.
다른 데는 안 가시고 수십 년 동안 마카루에서만 계속 사셨습니까?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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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루에 살다가 이렇게 인제 싹 공산주의로 확 디비져가, 공산주의
도 거석했다가… 해방 나고 난 다음에 거~서 그냥 그냥 살다가. 그 
다음에는 인제 내주 아이들 유즈노사할린스크 가고 하니까 그래 하
나 가고 둘 가고. 그니까 마지막에 내 혼자 있게 됐단 말이야. 그니
까 엄마 혼자 거~ 뭐 하러 있겠느냐고 우리들 하고 같이 살아야지. 
그래 인자 유즈노 쪽으로 이사를 왔지.
유즈노로 간 거는 몇 살 때입니까?
내도 그때 마이 묵었지. 그때 내 환갑 지내고 갔는데. 환갑 몇 년 뒤
에 유즈노로 갔지. 그냥 거~서 살았지. 그래 내가 거서 환갑 지내고, 
연금 타고 살다가 환갑 지내고 그래 인제 유즈노로 이사 왔지.
유즈노가 마카루보다 큽니까?
하이고! 크지요. 유즈노가 수도잖아요. 서울 한가지지. 잘 해놨어. 지
금. 아버지 따라서 일제시대부터 마카루 살았어. 여~서 가가지고 마
카루 거~ 살았지. 계속 거~ 살다가 내주 이제 느끄막에 아이들 따
라서…. 한국에 오기 전에도 마카루 살다가 그 담에 아이들 먼저 유
즈노로 이사 왔지. 그래 살민서 그래 인제 내 혼자 거 있은께네 혼
자 거~ 있으면 안 된다고 우리들 하고 같이 가야 된다. 그래 인제 
유즈노로 와가지고 그래 여기 왔지. 유즈노에서 여기로. 난 여러 군
데 왔다갔다 크게 안했어.
12. 사할린 한인의 애환, 영주 귀국
고향에 많이 오고 싶어 했었지요?
그때는 길 막히고 하니깐 그런 생각 없지 뭐. 그래 길 거기사고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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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는 인제 우리 아무 것도 모르지. 뭐. 그산께노 그런 생각 저런 
생각 없지만도 이 한국이라는 조국이라는 게 있다는 거석으로 그래 
만날 머릿속에는 담겨 있었지.
윗대에 어르신들은 고국에 발도 못 디디고 돌아가셨지요?
하이고! 쌨지. 뭐. 그런 분들 결국 원(願)을 못 풀고 돌아가셨지.
살아계실 때 많이 오고 싶어 하는 그런 말씀 안 하시던가요?
살아서 왜 안해. 우리 남편은 전쟁 거삿고 편지오고 했잖은가. 해방 
됐지. 편지오기 시작했단 말이야. 조선 땅하고 편지오기 시작했단 말
이야. 그래가 나는 뭐 어머니도 거삿고. 집에 어머니, 아버지 있었으
니까 그런 생각 저런 생각 아무 생각 안했지. 그때 뭐 시집가고 아
이 놓고 했지만도. 그래가 편지를 보고서리 울고 뭐 하다가 아파서 
죽어뿟지 뭐.
해방되고 그때는 인제 조선 땅에 간다는 꿈에 부풀어서 희망을 갖고 
있지 있었겠습니까?
그렇지. 그래도 뭐 뭐 길이 확 터져가지고 왕래 못하게 거석했으니
까네. 그때는 그런 생각 없었지만도 길 터지고 그 살(그렇게 할) 때
야 뭐 하루같이 오고 싶어서 화가 나가지고 어떤 사람도 죽은 사람
도 많애요. 나~ 많은 사람은 [한국] 여게 가정들 뭐 놔두고. 장개 
오고 아이 하나쓱 둘쓱 놓고 그래 일하러도 오고. 모집원으로도 오
고. 그런 사람이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어. 그래 인제 마이 죽었어요.
그런 사람들은 일 끝나면 고향 집에 돌아올 끼다. 이런 생각하고 가
신 분들이지요. 거기서 결혼도 안하고 그냥 사신 분도 많이 있었지. 
돈 없어 결혼도 못가고 뭐.
돌아올 길이 끊기니까 홧김에 그렇게 한 겁니까?
홧김에도 아이고. 그렇게 될라 한께 그래 또 그런지 그래가지고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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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있는 데도 그래 죽었어. 스스로 그냥 목숨을 끊은 사람도 있었지.
할머니 7남매인데 그때 형제분들은 어떻게 사셨습니까?
형제분들 뭐 다 저것들 가족대로 사는 사람 살고 뭐. 맹 거~ 공장에 
일했지. 크고 하니까 일자리가 천지지.
한국에는 언제 오셨습니까?
2004년 왔어요. 영주 귀국으로 여게 요양소로 왔지. 대창양로원. 그 
전에 먼저 거~서 왔다 갔지. 한 번 보러. 관광단으로. 그때 몇 년돈
가 모르겠다. 여기 오기 몇 년 전에. 그때 관광은 서울도 다 가보고. 
관광단으로 가가 그때 어데 어데 해주면 다 잊어버리고 뭐.
자식들은 다 사할린에 있는데, 여기 혼자 오실 때 어떤 반응이던가
요?
못 가게 했지. 첨에야. 못 가게 하고. 뭐 그때는 뭐 가는 사람 많고. 
여게 또 인천에도 안산에 맨 첨에 충청도 뭐 내우(내외)간에 오는 
사람 내우간에 오고. 내우간에. 아이고! 동무끼리 같이 오마 집 준단 
말이야. 혼자 오마 집 안주지. 그래 같이 인제 짜가지고. 부부가 아
인데 짜가지고. 다 알 낀데?
그래 같이 있어야 집을 한 칸 준단 말이여. 집은 얼마나 좋으나. 그
니께 오고 싶어서. 올라면 혼자는 안 주지. 남편은 죽고. 만일에 남
편은 죽고 없지. 또 남편은 여자 죽고 없으마 그래가지고 혼자 있는 
사람들끼리 짝을 받아가지고 집 얻어 가지고 그래 여~ 다 오잖아.
그런 집은 아무 데나 줍니까?
둘이 오마 줘여. 자기 가고 싶은 곳에 모두 그런 게 아니고. 첨에는 
안산에. 맨 첨에는 안산에 시작했지. 안산마을 있지. 그래. 아실 낀
데 괜히 모르는 척 하지 싶은데? 허허허! 아이~ 내는 우리 사돈 안
산에 올 적에 맨 첨에 있었단 말이야. 그래 사돈도 남편 없었거든. 
제7장. 부부가 함께 제지공장에서 일했던 권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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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돈 갑시다. 사돈 갑시다. 사돈끼리 가면 재미가 없단 말이여. 그러
고 또 우리 사돈이 조금 깍쟁이란 말이야. 그래노이 거~ 가서 괜히 
사돈끼리 같이 살다가 싸움이나 하던지 하면 자슥들끼리 거석해진단 
말이야. 그랑께 내 안 간다고. 내 쫌 더 있다 내 그런 데에 가지. 요
양소(양로원) 가지. 내 안 간다고. 그래 내 안 왔어. 안 그랬으면 그 
사돈하고 안산에 첨에 왔지.
안사돈끼리 두 사람 오는 경우도 집을 주었습니까?
왜 안 해줘. 해주지. 누구라도 같이 있어야 집을 준단 말이야. 부부
관계 아이라도 다른 사람하고 오자만 같이 인제 우리 동무 같으마 
어데 거~ 가자. 조선 가서 같이 살자. 그라마 집도 주고 같이 살자. 
그래 인제 서로 의논이 맞으마 그라마 인제 여~ 와가지고 수습해가
지고 그래 집 얻어가지고. 모두 인천에 어데 어데 그래 모두 집 얻
어가 왔는 사람 많잖아. 그래 다 오잖아. 거~ 없는 사람은 우리 이
래 요양소 오지.
나는 그때부터 점점 나이는 먹어가고. 내 안 가겠다. 식사하러 나오
시오. 카마 요양소 가지. 사돈 가겠으면 다른 사람하고 가던지 가라
고. 내는 안 간다고. 그래가지고 안 가고 있다가 그러이 요양소 
2004년도 왔지. 잘했지. 그러지  않고 같이 가가지고 괜히 사돈끼리 
싸워놓으만 아이들도 삐꺽거리 놓을 기고
사할린에서 일 해놓은 연금은 어떻게 됩니까?
내 앞으로 나오지만도 내는 그 아이들한테… 아이들이 그거 타가지
고. 내 여~ 1년 있다 가면 그거 가지고 거~ 가면 잘해주고 뭐 사주
고. 먹는 것도 잘 먹여주고. 그래 아이들한테 그거 타는 거 돈 조금 
용돈도 주고. 1년에 한 번쓱 그래 갔다 오잖아.
러시아와 한국이 법이 다른데, 영주 귀국 후 어떻게 부쳐줍니까?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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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내가 직접 가서 거석하지. 거 뭐라노? 그거 뭐꼬? 딸한테 주겠
다고 하마 그걸 청원서를 써야 된단 말이야. 그래 인제 그라만 아이
들이 여럿이라도 인제 누구한테 주겠다는 지정해가지고 그래 내가 
쓰지. 그래 하마 인제 그거 가 있는 데로 돈이 가지. 그러면 인제 가
가 타지.
자식이 있어도 자식한테 지정하지 않고 한국에 영주 귀국한 본인에
게로도 연금을 줍니까?
그렇게 해가지고 오는 사람 있어. 그렇지만도 그 아이들 사는데 뭐. 
만일에 오늘 죽었다 하면 연금 없어지고. 오래 살아도 안 아프고 오
래 살아야 되는데 찡찡 아프고 카니까. 건강이… 아이! 이거 봐요. 
눈도 거석하지. 다리 뼈다구도 쑤시고 아프지.
태어나신 고향에는 한 번이라도 가보셨습니까?
못 갔어요. 근데 뭐 누구도 아무도 모르는데 어떻게 가겠어. 그때 남
편이라도 있었더라면. 뭐 또 남편 쪽으로는 누가 또 남편도 막내이
라 하더라. 막내니까네 우에 다 죽었지. 없지 뭐. [경북] 선산이 가
까이 있어도 내가 봐도 아무 것도 모르고. 기억이 아는 사람이 없어. 
없어. 아무 기억도 없어. 그때는 아무도 깨이지도 못하고. 산골짜기
에서 살다가 거석하니께 몰라. 아무 것도. 나이 그래 먹어도. 길이 
어떻고 집이 어떻고 이런 것도. 지금은 얼마나 똑똑하고. 아이들이 
똑똑하나. 고향에 대한 기억이 아무 것도 없어요. 거기 산골이지. 뭐.
제8장. 23년간 5가지 일을 전전한 권영출
- 모집 노동 간 남편 찾아 사할린으로 - 
1921년생 권영출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272
 
권영출 연보
ㆍ1921년(1세) -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우양마을 출생
ㆍ1938년(18세) - 7세 연상의 남편과 결혼
ㆍ1940년(20세) - 모집으로 남편 사할린 이주, 탄광 노동
ㆍ1942년(21세) - 남편 찾아 사할린 이주, 고르노자오스
키 거주
ㆍ1943년(22세) - 네벨스크 이주
ㆍ1956년(35세) - 미역 건조, 통조림 공장, 집 청소, 목재
소, 보일러실 등 23년간 노동
ㆍ1971년(51세) - 남편 사망
ㆍ1977년(57세) - 노동생활 마감
ㆍ1990년(70세) - 친척 방문차 한국 첫 방문
ㆍ2003년(83세) - 한국 영주 귀국, 고령 대창양로원 거주
ㆍ2014년(84세) - 현재 고령 대창양로원 거주
1. 결혼 4년 후 남편 찾아 사할린 행 
사할린에서는 어디 사셨는데요?
우리는 유즈노사할린스크. 뭐 거~ 아이고 네벨스크. 내 이름은 권. 
영 자. 출 자. 내 나이 올해 설 쉬면 아흔 서이 드간다. 93세.
고향은 어디십니까?
밀양 아이가. 밀양 그때는 군이지. 밀양군. 밀양군 부북면 우양 마을. 
거~ 권(權)가가 마이 삽니다. 본(本)이 안동이지. 권가들이 한 동네
제8장. 23년간 5가지 일을 전전한 권영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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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같이 그냥 다 어울려 사는 그런 동네지.
당시 연세가 좀 드셨기 때문에 고향 기억이 있겠습니다?
그때 열여덟에 시집을 갔지. 그 마을에서. 밀양서. 할아버지 고향은 
어딘고 하면…? 시댁은 고~가 한 20리 나가는가? ‘처훈리’라 카는 
데. 거기도 부북면. 그래. 우리는 저 산골에 산 있는데 붙었고. 그 
우양이라 카는 데는 산골매~로 붙었고. 조금 나가면 야지처럼 나오
마 조금 산골은 아이고. 조금 나와. 촌동네도 큽니다.
할아버지는 결혼할 때 몇 살이었습니까?
스물다섯인가? 나이 차이 꽤 나지. 나는 열여덟. 그니께 일곱 살 차
이 나지. 할아버지는 성이 유(柳)가. 문화 유가라 하던가? 유가라.
어떻게 해가 몇 살 때 사할린에 갔는지 궁금합니다?
결혼해가지고 4년인가 살았는데, 40년도에 그 모집으로 갔지. 영감
이. 그래 한참 그때는 경상남북 사람이 마이 갔어. 그래 가고 나서 
안 나오지 뭐. 술을 좋아하이 술에 빠져버렸어.
혼자 가셨네요?
그때 혼자지. 일본사람이 데리고 가잖아. 그거 저 모두 탄광에 삼판
에 몰려가. 전쟁이 시작하니까네 일꾼들 데리고 일을 해야 도와주지. 
거~ 데려가고 안 나오니까 내 혼자 있었지.
돈은 붙여주던가요?
돈은 붙여주기는 뭐 붙여줘. 어마이한테 보이 거~서 술빚을 가득 채
워놓고 갔더구만. 주막집엔가 나는 모르지. 모자간에 의논해가 형도 
있고, 동상 있고. 자기 있고. 3형제고, 막내이 여자 하나 있고 그렇
대.
번 돈을 다달이 시어머니한테 붙여 준겁니까?
술빚을 하라고 붙여줬는 모양이라. 내한테 말 안하이 모른다. 그래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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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때 뭐 30원(엔)이라 하든가? 술빚이. 그때는 일본돈 크지요. 
나는 그때도 몰랐지. 뭐.
한국에서 결혼 후 수년 동안은 같이 사셨네요?
살았지. 그때 자식은 아무 것도 없었어. 그때 분가를 해나갔지. 차남
이니까. 시방 그 집 있다. 아직까지. 새 집을 지어가지고, 그렇게 갖
추지는 몬하고. 방도 정지 한 칸, 삼 칸 집을 크게 짓~지. 분가 했
지. 집이 인자 시숙이 집, 할머이 집, 얼~나(어린아이) 동서 아이들 
있고 하니까네 여덟 식군가? 아홉 식구 있지. 그래 그 분가를 했지. 
시누~(시누이)가 하나 없는 거는 시집을 보냈고. 나는 새댁이지. 스
물 살까지도 할매하고 있었지. 시어마이.
2. 1942년 사할린 가는 길
할아버지가 사할린 간 후 몇 년 있다가 갔습니까?
42년도 갔지 나는. 그때가 스물한 살. 그때 혼자 갔지. 남편이 데리
러 안 왔어. 영감 술에 빠져가 데릴러도 안 오고. 여자 생각도 안 하
는데 부모들이 끌어 보냈지. 그때 부양가족에 일본사람하고, 조선사
람하고 그거 한 사람 있지. 일본사람은 뭐 교장 선생매로 그렇고, 그
래 그 사람하고, 조선사람하고, 밀양사람 남자. 일본말도 하고 그기
지. 그래 와가지고 부양가족을 모집을 하지. 갈 사람은 인자 와라 이
렇게 해서. 어떤 사람은 얼라 둘이고, 어떤 사람은 얼라 너이고. 제
일 나이 많은 사람. 그럼 우리가 네 명이 얼라 없이 가.
다 여자들이라. 남편 다 사할린에 가 계시는 분들. 아홉 집이 갔지. 
그래 가니까네 첨에 오사카로 가 가지고. 부산에서 갔지. 오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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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제일 좋은 사람 마이 산다.
부산에서 오사카를 가 가지고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갔습니까?
부산에 가가지고 하룻밤 자고. 부산에 여관이라 카는 기 방이 똑 침
대 만해. 일본시대에. 몬 살아요. 그때 첨 가봤어. 일본 사람 ‘미라카
이’라고 있었다. 줄 타고 올라가고 니리오면서 보고. (크게 웃으며) 
2층, 3층에 올라가 가이고 이걸 들~다 보이 내가 오그라져가 요마
이… 웃다가 웃다가 오줌을 싸뻐리.
우리 아재가 밀양에 보니까네 한 동네는 아이라도 정말 참 영리하
더만은 그때만 해도 그래 인자 그 사람은 2년 갔다가 돈 벌어가 와
가지고 각시캉 간단 말이야. 근데 이거는 술에 빠지가 못나온다. 
“니는 가라” 뭐 그래. “너거 각시 안 데리고 올래?” 카이. “아이! 지
랄한다.” 그래가지고 안 온단 말이야. 술만 보마 환장이 돼가지고 
안 나오거든.
그래 부모들이 거석 보낼라고. 나는 죽어도 가기 싫다. 그래 온다. 
“갈래? 안 갈래?” 물어보러. 그래 오면 시어마이가 가라 캤다가 못 
간다. “니 안 가마 자슥 못 본다”면서. 애를 묵었어. 한두 달 동안에 
애를… 나는 또 할매 말 듣고. 그 사람이 “아즈매! 가겠어? 안 가겠
어?” (웃으면서) 그 카면, “딴 사람 가면 갈 끼고 안 가면 난 안가겠
어” 캤지. ‘가면 가고 안가면 안가지 왜 왔노?’ 만날 그 놈의 소리 
내 귀에 앉았어. 간절히 보고 싶은 생각이 없어.
부산에서 하룻밤 주무시고 배를 타고 갔습니까?
부산에 가 자고. 그때는 완행타고 다니거든. 기차를. 거~ 타고 인자 
배타고. 또 완행타고. 멀미를 해가지고 또 엎어지고 자빠지고 아무 
것도 안 먹었다. 누가 내한테 찐쌀을 여~줬는가 아직 확인을 못했
다. 찐살을 모두 가~가지. 썩을까봐. 일주일? 한 열흘을 갔지. 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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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 니리고 오르고.
배를 한 번 타면 부산에서 바로 안 갔습니까?
못 가지. 세 번 타야지. 훗카이도 니리가지고 훗카이도서 사할린 타
고. 세 번 탄다고. 세 번 타. 그래 거 인자 타고 오사카 내리가 또 
잔다. 기차타고 가다가 하룻밤 자고 또 간다. 그래 또 가 가지고 하
코다테 말만 들었는데. 아오모린지 하코다테인지 거 탔어. 거 타고 
여덟 시간 동안 오사카 거~ 가는 데도 한 일곱 시간 될 거요. 그래 
또 여덟 시간 간다. 그래 북해도에 가서 내린다. 북해도 내리가지고 
또 배타고. 가라호도. 일본말로 가라호도요. 사할린 거 카마 모두 말
해주지. 가자 일나마 거 타고 가는데.
우리는 그래도 진영(陣營) 한가지거든. 군대 밑에니까네 군대로 싣
고 가는데 우리가 모두한테 앞에는 일본군 앉아 있고. 그래 그것들 
1원을 돈을 가지고 황새를 맨들어 가지고 우리한테 던지. 우리가 젊
었고 해놓으이 말도 못하고 하이. 저기 뭣이고 싶었든가 우쨌는가 
거~ 주어보마 1원짜리 돈이라. 뭐라고 물어봐도 말을 알아야지 몰
라요. 그렇기 갔지. 
멀미를 해가 죽어. 절대로 안 먹거든. 물도 안 먹어 그래 되마. 그래
가 가만히 거 땅바닥에 배 이래가 그래 안 무이 낫더라고. 그라마 
자는데 그거를 아무래도 북선(北鮮)에 간 그 언니일 끼라. 그걸 안 
물어본 한이 돼 죽겠네. 찐쌀을 그래 내 입에다 여~준다. 그래 물 
여~주고, 그래 눈도 감고 아무도 안보고 그냥 씹는 기라. 그러고 그
래 갔어.
사할린까지 가는데 며칠 걸렸습니까?
열흘. 고생만 하시다 갔지. 죽었어. 죽었어. 꼬쟁이같이 해가. 그래 
그 북해도 가서 타가지고 그 사할린 거~ 네벨스크라 카는 거~ 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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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맀지.
3. 사할린 도착 첫 날의 풍경
사할린에서 처음에 할아버지 어떻게 봤습니까?
가 가지고 딴 사람은 모두 각시 온다고 뭐 정신이 부쩍부쩍 해. 보
니께 이 양반은 술이 취해가지고. 그것도 비밀이 많다. 그저 가마부
꾸 구녕(구멍) 있는 거 있다. 
가마부꾸 그게 무엇입니까 ?
소세지 그거. 고기 가 맨들은 거. 시장에 가면 오뎅이라 했나? 그거 
꼬쟁이 끼가 무싸코 그래. 그 사람들은 순대매로 맨들어 뭇다. 그걸 
샀는 모양이라. 이만하더라. 그래서 4월 달에 얼매나 춥노. 바람이 
쎄 죽겠는데 거~ 내리니까 딴 사람은 각시를 데리고 우동 집에 간
다. 어디로 간다. 이거는 마대같이 서가지고. 그래 “니 남편 왜 없는
데?” 이 카고 서있응께, 뭐 꺼득꺼득 하고 서 있다가 자빠지뿐다. 
“아이고! 얼어서 못 먹겠다” 카면서 집어던지. 그래놓이 우리 친구 
아줌마 하는 말이 “아이고! 인정머리가 없어가 문디~ 니도 못 먹고 
나도 못 먹고.” 나는 내삐리고 모르고 몰라가지고.
그래가 우리 고향에 아줌마 거~ 얼라 하나 데리고 홀랑 가져가가지
고 떡볶이 해가 무~뿌는데. 오는데 욕봤냐고 말로 하나 뭐. 똑 마대 
매~로 그렇대. 그래지고. 그래 이웃이 먼저 와서 고성 사람이 마이 
있대. 거~ 아줌마 딸 하나 놓고 그 집에 남자가 밀양사람이고, 그 
여자는 고성이라. 거~서 결혼했다 카데. 그 집에 딜라놨다. 딜라 놓
고는 그 집 남자하고 둘이서 어디로 갔는지 알 길도 없다. 우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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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찾아 데려갈 생각도 안하고, 오데 가서 술이 떡이 돼가지고 오
데. 오더만은 그 아주마이도 처음에 내가 며칠을 굶었는데. 그 집에
도 몰라가지고 대구 국을 끓이는데 냄새가 나 좋아죽겠어. 시원하이 
김칫국 한 그릇 묵었으면 싶어 죽겠는데. 그 놈 신랑은 영감 오도록 
기다리이 이놈의 소들은 오나. 안와가지고 10시나 돼가지고 술이 떡
이 돼가 와. 그래 인자 저거는 어데 가가 묵고 왔지. 술 묵고, 안주 
묵었겠지.
그래 묵고 가자 하데. 그래 어디로 가는고. 어디로 가겠노? 따라와 
보면 됐지. 그 모양이라. 그래 또 따라갔다. 할 수 없이 그 사람 밖
에 따라갈기 없단 말이야. 따라가인까네 요 침대만한 방 한 칸 요고 
두 개 댄 것 같은 고런 방 한 칸 붙은 거. 일본 사람이 사할린에 온
다 카마. 가족이 온다 카마 딱딱 그걸 해놔. 그래 해놓고 이불 한 채 
아래 불 쓰고. 또 석탄 그거 한차슥 갖다 여~놓고 거~ 불 때라고. 
그래 갖다 놓고.
이불 한 채 하고 사기 냄비 그런 냄비로 두 개 하고 바개스 하나 하
고 주는 기라. 나무 물통 하나 하고. 그럼 물 뜨러 가면 하나쓱 들고 
온다. 두 개가 안 돌아가서. 양철 같은 거는 낫지. 그것도 그래 밥을 
해무이깐에 한 몇 달 해무이 구멍이 뽀직 나뿌리. 단번에 그래. 우리
야 뭐 밥을 할 수가 있나. 그래 거 저 밀양 사람이 또 혼자니까 땜
재이가 또 하나 나와.
4. 남편은 탄광 노동, 고단한 생활
그래 인자 42년도에 내가 갔는데, 43년도 8월 달에 첫 아~를 낳았
제8장. 23년간 5가지 일을 전전한 권영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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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갔다 오마 아~를 땅에 니피가(눕혀가지고) 아무 것도 없으니까
네 니피노으마. 그 아~를 하마 나이 서른 살에 낳아도 그걸 안 드다 
보대. 술에 빠져놓으니까네 그래 [아기 위를] 벌컥벌컥 넘어간다. 그
래 아즈매가 “아~ 밟겠소.” 뭐 이라면, 그럼 이 앞으로 지나가고. 그
렇기 자슥이 인정 없대.
그래 술이 떡이 돼가 와가지고 그래 방 한 칸 주는 데 거~ 살았지. 
쌀 그걸 주나. 어데 배급을 주는 데 그 탄광에 아주 사이탄이라 카
는 데 깊은 데 하거든. 우리 영감은 힘이 쎄가지고 아무 것도 몰라
도 그런 데는 드가라 카면 드가거든. 너무 미련해가지고 어데 꽤도 
없어. 그래 잘 파냈어.
월급도 좀 받았겠네요?
받았는가 봐. 그래 내한테 말도 안 하지. 그래 그 냄비로 땜재이가 
나와서 갖다주니까네 헌 양철로 주워가지고. 뭐 있나. 어데. 그래 해
주대. 그래 밥이 줄줄 흐르네. 막고 막고 그래가 밥을 하마 밥이 퍼
지마 조금 하지. 이야! 냄비 때문에 정말 고상 마이 했어. 어데 살 
데가 있나. 살 데도 없지. 일본 때 전장 한창 하는데. 그래가지고 그
래 뭐 돈을 한 달에 그때 100원 벌었대. 일본돈으로.
마이 벌었지. 큰돈이지. 사이탄을 드갔거든. 아주 깊은 데. 그래 드
가도 안줘. 나를 절대로 안 주고. 그거 배급타마 열 다섯 키로. 한국 
쌀 일등 쌀 15킬로 주고. 그 다음에는 납닥보~쌀 3킬로. 콩 3킬로. 
‘메마이’라고 구식동가리 3킬로. 나는 고거 뿌이라. 그래 아무리 애
끼 무~도 일주일은 모자래. 그래가 고비 뜯고 미나리 뜯고 그래가 
나물 무치가 나물로 살았지.
여~는 질경이라 하든가? 그거 국 끓이가 묵고 살았다. 그럼 소금도 
없네. 또 소금도 조금 배급 주면 어데 물 수도 없고. 된장도 조금 주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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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간장도 조금 주지.
그래가 인자 배급 타러 가면 일본말을 모르니까네 내가… 영감은 그
래도 먼저 갔잖아. 그래 일본말을 좀 한다. “된장은 뭐라 카요? 오늘 
배급 타러 가야 되는데…” 카면, “된장은 된장이지” 그 카고 그래. 
“간장은 뭐라 카요?” 카이, “간장은 간장이지 뭐라 캐.”
안 가르쳐주고. 그래 우둔한 짓을. 그래가지고 고향집에 가가지고 그
거 물으이까네 간장은 간장이라 카고. 일본말로 ‘오소야’라고 카고. 
‘오미소’라 카고 그래. 인자 배급을 타가 묵고, 생전에 갈차주는 법을 
몰라. 여자라 하고 여자니까 산다. 부모가 마차주이 살지. 우리 영감
은 그래 안 하마 여자 안봐. 그래가 저녁에 되마 인자 숨카놓고 가
거든. 돈.
거~ 서너 달 됐나? 나도 꽤가 조금 생기니까 딱 그 가져와요. 배급 
탈 돈 20원 준다. 일본돈으로 20원. 그거 주마 그거 가지고 간장 타
고. 쌀 헐커든. 배급하는데 얼마 안주니까네 그거 타고나마 어데 옷 
살라 카이 옷이 있나. 천 사러가이 없지. 그래 하마 일본사람이 쪽배 
타고 다니미. 그거 문애(문어)야 가부리(가오리), 또 명태, 대구 그
런 거는 팔아요. 거 팔마 대구 사가지고 참 지지도 묵고 삶아 먹고. 
그래 먹고. 또 인자 문애 사가지고 먹었고. 헐태(싸데). 그때는. 일
본사람은 전장에 다 가뻐리고 거 고기 건질 사람도 없지. 그래 내 
인자 할마이나 영감 노친들이 조금쓱 그래 사가 묵고.
5. 독신 징집자들의 배고픔
그 뒤에 인자 총각 아~들 젊은 아~들은 그때는 강제로 왔지.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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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배고파 죽었어. 그거 인자 한바리 삶아가 한 그릇 주면 그래도 
거 밥을 굴 안에 밥을 가~ 가마 한쪽에는 머구 였~고, 무 섞은 쌀
밥 쪼깨 였~고 그걸 주이 드가다가 무~뿐다. 너무 배고파가. 묵고
나마 감독이 와가 검사를 하거든. 밥을 가왔나 우쨌나? 까무뿌거든. 
거~ 가서 묵고 일하미 묵으라꼬 그래 하는데 참을 수가 있어? 배 
고파가.
탄광 일을 하는 데서 밥을 주지 않습니까?
거기선 안 주지. 도시락 싸가 가지. 식당서. 식당이 있지. 하도 적기 
주고 배가 고프니까 드가미 무~뿐단 말이야. 그래 거~다가 돌을 
여~가 간다. 할 수 없어가. 빈 도시락 안에다가. 밥을 먹고. 감독 온
단 말이야. 검사하러. 오마 이래 들어보고 조금 무거우마 밥이 있는 
갑다 싶으고. 없다 카마 막 뚜두리 패는 기라. 다 뭇~다고. 점심 먹
는 고 시(時)에 안 먹고. 그거야 옳은 말이지만은 너무 배고프이 
아~들이 참을 수가 있나.
조선서 금방 온께 벌벌 떨고. 옷이 있나? 그거 정말 불쌍한 인간들. 
해방 후에 한차 실어다가 어데 갔다 내삐맀는지 몰라. 이래 될 줄 
알았으면 그 주소라도 좀 적어놓을 긴데. 그래 우리는 그래 인제 여
자 가족 있는 사람은 풀 뜯어다 묵고. 저래라도 묵고 그래가지고 3
년인가 살았는가. 그래가 해방됐지.
머구로도 밥을 해 드셨습니까?
밥해 먹었지요. 탄광에 가는 청년 아~들도 그거로 밥을 해가 주이 
그걸 묵고 사나요? 죽지. 배가 고파서. 그거라도 마이 주면 좋지. 미
역 그런 거 주워다가 성글어가 밥해주고 국 끓이주고 그거 뿌이라. 
그 아~들 배가 고파 고생하고 죽었는데. 고향이나 알았으면 주소나 
써놨으면 됐지. 이래 질 열릴 줄 누가 알았노.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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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없는 젊은 사람들은 어디서 살았습니까?
그기 있지. 합숙소. 숙소. 같이 공동으로 사는 데. 숙사 있지. 식구 
있는 사람들은 방 한칸슥 따로 주고. 나는 네벨스크 거기서 살았지. 
촌 택이지. 촌 택이라도 커요. 탄광이지. 큰 탄광이지.
가족이 있는 사람들은 어디서 지냈습니까?
그래 그 우리는 네벨스크고. ‘나이호로’라 카는 데. 일본말로. 러시아
말로 ‘고르노자오스키’라 칸다. 일본말은 나이호로. 네벨스키, 나이호
로 거기 살았어.
계속 네벨스크 여기서 살았습니까?
예. 한 곳에서. 그래. 나이호로 카는 데 탄광인데, 해방 후에 우리 
영감이 탄광이 싫다고 일본 해방되고 나이… 그래 네벨스크라 카는 
데는 고 30리 떨어지요. 그리 이사를 왔지. 그래 네벨스크서 한평생 
살았지.
할아버지가 탄광에 다닐 때 처음 살던 데는 어디입니까?
나이호로. 고르노자오스키라 카는 데. 거 4년인가 5년 일했지. 나도 
거게 한 2년 살았지. 결혼하고.
6. 5남 생산, 35세부터 미역 닦기 노동
자녀는 몇이나 생산했습니까?
자녀는 해방 후에 서인가? 해방 전에 인자 큰 아들 낳고, 그 다음에 
해방 후에 서너이 낳았죠. 장남 밑에는 아들. 그 밑에는 너이나 낳았
으이. 뭐. 장남 놓고 차남 놓고 그 다음에 셋째도 아들. 또 넷째 아
들. 다섯째. 딸이 없었어.
제8장. 23년간 5가지 일을 전전한 권영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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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형제 낳았는데 그래 고마 70년도 돼서 그래 못 살아서… 내가 처
음 일하러 나갈 때는 얼라가 요래 막내이가 어려서 일도 옳기 못했
어. 이것들이 내가 애미가 머스마들이 돼 놓으이 장난만 쓰고 아무 
그거 없어. 학교 갔다가 오마 그래 갔다오마 버스 뒤에 달리~가지고
(매달려가지고) 다치고. 우리 막내이가. 또 자동차 어데 뒤에 가마 
막 달리~고 쭈룩 따라가고. 이걸 좋아해가 자꾸 다치고 해사서 그래 
첨에 일 못하고 또 들어왔지. 그러이 일은 삼십 다섯부터 했다.
그라이까네 얼라가 하도 다쳐사이 또 내삐리고 또 하고. 첨에 갈 때
는 미역 닦았지. 중국 사람이 미역 해돌라 해가 그 미역을 건지놓으
면 그거 인자 끊어가이고 내 놓으면 그거 우리는 솔로 가 닦지. 닦
아가 일본 그 감독이 혼자 떨어져가 있는 기 이래 모다가지고 묶아
가 기계에 대고 딱 누질라서 그래가 몇 차를 중국으로 보냈지. 생미
역을 말라~서. 아~ 때문에 큰일도 몬하고 거기라도 간다. 그거 하
는데 2원쓱. 그래도 빵값은 되거든.
하루에 몇 시간씩 일을 했습니까?
아침에 가마 다섯 시에 나오는가? 한 날에 2원? 한 날에. 아침 여덟
시에 가마 다섯 시에 나오는 그런 거. 시간은 마이 안가지. 그래 그
래가 하다가 또 얼라 땜에 몬해가 또 집에 있다가. 그래 아~ 1학년 
보내놓고.
그럴 적에는 영감이 돈 벌이 없어가 맨날 술, 담배 빠져가 그래 집
구석 형편이 우예 됐겠노? 그린까네 사는지 마는지 그래 살았지. 빵 
사다 먹고. 찬물하고 먹고 그래 했는데. 그래 인자 1학년 보내놓고
는 다시 일하러 나갔지. 나가가 하니까네 첫째 공산주의 사람은 아~
들 공짜로 공부를 시킸어. 그 10년제까지 시키주고. 먼 데 대학을 
가마 집값, 비행기값 그건 내가 하지. 식비, 숙사비 그런 거는 내가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284
 
해야지.
학비는 국가에서 내놓지. 그린까네 우리가 학비를 안 주니까네 아~ 
너이씩 거 공부를 10년제까지 시키지. 그래 시키니까네 우리가 그라
면 공부를 몬해요. 대학 공부를 보냈지. 둘째는 3학년 대학공부 하
다가 실습 하다가 실패를 봤어. 사고를 냈지. 둘째가. 큰아들은 전공 
그거 했지. 전기. 그걸 했는데 그거 하다 그런가 귀가 어두버가 연금
을 타고 있지. 타고 있는데 김해 나와서 내 따라 나왔어. 지금 나이
가 칠십 하내인가 그래. 43년생인가 그런데. 여~ 와가이고 일하다가 
우째 돼가 신경을 썼다나. 귀가 먹었대.
7. 통조림 공장, 집 청소, 목재소, 보일러실 노동 
그때는 또 간수메(통조림) 공장을 또 했지. 통조림. 공장 일 하는데 
꽁치 동가리 내가 거 쪼갠한 통에 집어 였지. 그거를 마이 여~면 돈
이 많고. 뭐 우리가 아주 마이 손에 쥐가 마이 못였~지. 그라고 거 
인자 껍데기 거 인제 빈껍데기도 씻어가 갖다 주고 일꾼들한테. 선
배들한테 갖다 주고.
이거는 월급을 받은 겁니까?
월급이지. 월급이 얼마나 나왔는지는 모르겠어. 이때도 영감은 돈 버
는 걸 계속 집에 안 들이줘. 들이주기는 해도 뭐 조금 월급 받아. 해
방 후에는 일본 때는 그렇게 돈을 받아도 안 내놓는단 말이야. 그래 
석 달, 넉 달 내가 꽤가 생겨가지고 일하러 갔는데 그 자리를 본다. 
어디 숨카놓고 간다고. 가마이 보니까네 이불 밑에 숨쿠더라고. 그래 
내 뭉팅이 요래놓고 있단 말이야. 그거 손댈까봐. 국가서 몽탱이로 
제8장. 23년간 5가지 일을 전전한 권영출
 
285
그냥 준단 말이야. 그래가지고 내가 훔쳐냈어.
영감은 술 채가 모른다. 거~ 세 개도 빼고 네 개도 빼가 시가에도 
보내고. 내 친정에도 쪼깨쓱… 엄마가 3남매 형제간 데리고, 내 동생 
데리고 아버지 없이 살지. 그런 데 보내고 이래 했는데. 그 지네가 
오마 인제 그기 붙었거든. 붙어 놓으이 그게 그냥 이런가 싶어가. 술
이 떡이 돼가 삭 빼가 요게 여~ 간다.
한 번 나간 거 빼 쓸라고 달라드이 어림도 없어. 확 뿌리뿌이 내 쓰
러졌다. 그래가 지는 숙사 가뻐리고. 가 가지고 도박도 못 놀아요. 
술이 채가 거~ 가면 젊은 사람한테 뺏기고 올 적에는 니(네) 발로 
기~온다.
통조림 공장을 2년 하이 그것도 파이 되네. 그래가 저거 홈스크라 
카는 데 거기 떨어지고. 나는 또 집 소지(청소) 하는 데 드갔네. 할 
수 없어서. 청소하는 데 그래 하다가 내주 아~가 좀 크인까네 목재
소로 드갔지.
목재소는 어떤 일을 했습니까?
그거 저 톱 이래 도는데 그거 저 화목(火木) 그런 이래 끊어내고, 
유리창 밖으로 던져내고. 요만한 거 요런 거 꺾어내지. 톱밥 퍼내고. 
공부를 몬하고 글도 모르이까네 그런 잡일을 했지.
힘이 안 들던가요?
하이고! 힘이 들어요. 큰 나무는 쪼개 내지. 인자 그 기술자가 쪼개
내면 그 널쭉(널판자) 그거를 받아서 바깥에 가가 재지. 그런 일 하
고. 아이 힘이 들어요. 몬하겠어요. 그거는 아침에 가서 오후에 5시
까지. 이것도 월급을 받았지.
건물청소 일은 몇 년 하셨습니까?
청소를 내가 한 5, 6년 했지. 목재 일을 마이 했지. 10년은 몬했어.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286
 
너무 힘이 들어가 집안일이 많고 하니까네. 저 간주메 공장 거 했고. 
2년 하고.
또 보일러가 어디고 불 때는 데 또 3년 하고. 불 때는 데 석탄 여~
가 불 떼는 데. 보일러. 그거는 어데 사무 보는 데 모두 사무원들이 
앉아가 하는 데에 빠이프(pipe)가 거~ 인자 뜨신 물이 드가지. 불 
때는 데도 크지요.
인부가 여러 명씩 되겠네요?
거~도 3교대로 드가고. 거 몇 년 했는지 잊어버렸다. 불 떼는 일은 
통조림 공장에서 나와서 그 뒤에 한 거지. 그래가 그 23년을 채았
지. 목재소 10년 했는지 8년 했는지 모르겠어. 잊어뿌고. 그 뒤에는 
또 소지 보러 드갔지. 청소.
일은 몇 년이나 하셨습니까?
23년 했지. 오십 여섯, 일곱까지. 연금이 나오지. 연금이 월급이지. 
많지 않아. 내가 신체 약해서 높은 일을 못했기 때문에. 나오이 아들
이 타고 있지. 지금.
그래가 23년 해가지고 월급이 작지. 연금은. 그래 한 달에 달라가 
100달라가 일곱, 여덟 개 나오지. 그래 나오는데 아들이 타고 있지. 
둘째가. 둘째는 잘못돼가 죽었고 요거 셋째지.
오십 여섯, 일곱 살 때 일을 그만 두신 뒤에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그 뒤에는 텃밭이 있거든. 거~ 감자, 파 그런 거 숨가가 자기 묵는 
기지. 수입 날 것도 없고. 그래 연금을 주니까네 그것 가 살았지. 살
다가 그래 여~ 왔지. 나는 시장에서 잘 못 갔어.
제8장. 23년간 5가지 일을 전전한 권영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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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한국과의 소통, 영주 귀국
한국에는 언제 오셨습니까?
2003년도 영주 귀국했어. 그 전에는 한국에 90년도에 친척 방문 한 
번 왔었지. 그때도 참 고향 생각 그리다가 남쪽 하늘 바라보고 울다
가 불다가 타향살이 노래나 하고. 그거 여~서 배아가 갔거든. 고복
수 선생 만날 유성기 트는 데 거~서 그걸 알고 갔거든. 거~ 가면 
그거 고향 생각나면 그거 불렀지. 거~ 생각이 나. 그거는 잘하지. 
그것도 오래돼가 잊어버리가지고.
그래 살다가 거~ 일도 하다가 산에 풀 뜯으러 댕기다가 미나리 뜯
고 거 머구가 이래요. 머구 굵기가 이렇다. 이파리도 넓적한 거. 양
산매~로 그렇다.
여~ 머구는 또 요만하고. 거~ 머구는 이래요. 북해도서도 그렇고 
사할린도 그렇고. 그거 뜯어다가 절구고 삶고. 거~ 쌀 조금 섞어가 
그래 묵고.
그래 50년 살고 나이 이거 신문이 나와. 한국에 참 그기 있어. 그래 
나오는데 무슨 우리야 뭐 북선 신문을 내가 받아보거든. 그래 거~는 
북선. 그기 조선신문이거든. 한글. 거 내가 받아보거든.
남조선 신문은 못 보고시요?
어데 못보지. 말도 못했는데. 그래 거~서 우리 공화국에 어떻다. 김
일성 어떻게 하는 거 어떻게 사는 거 거~서 그거 통해서만 듣지. 
[한국 사정] 여~는 깜깜하지.
한글을 깨치고 가셨네요?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288
 
여~서 우리가 친척 문중에 있는 어른들, 학문 한 사람이 많거든. 우
리 부친도 참 학자는 아이라도 한글 그런 거는 잘 알고 하니까네. 
그래 나는 뭐 일찍 언문을 배울 세도 없고. 넘어다보고 그래 배아놓
으이. 그래 그 조선소식 들을라고 북선신문을 받아봤지. 거~서 사회
주의 국가. 무슨 국가 그래.
첫째로 학생 아들 10년 전까정 대학에 가 가지고 먼 데 가도 한 달
에 얼매쓱 나오거든. 학비가. 국가서 그래 나오이 그래 그 덕에 아들
을 조금 시킸지. 그래 아이면 우리 같으면 못시키죠. 그라고 내가 일
하다가 한 달에 막 천원을 받는다. 만원을 받는다. 그것도 만원, 천
원이면 큰돈이거든. 그래 그거를 받는다. 내가 월급을.
받다가 병이 들어 병원에 드가지요. 한 달이나 이래 있다가 나오마~ 
거게다가 100원 받는 월급에다가 조금 더 보태가 날 주거든. 그러이 
우리가 무슨 공부를 시키겠어. 학교 공부 시키주지. 일하던 사람 병
원에 가면 병원증(치료비용)을 안 받고 병원증을 대비 내주지. 그린
끼네 살아나가지. 그래 아이면 몬살아요. 우리 같은 거는 아~들은 
여럿이지. 영감은 그렇지. 그런까네 내가 살살살 그래 살았지.
고생을 많이 하셨네요?
국가서 무슨 나를 해코지를 했으면 그거는 내가… 그 아줌마는 그거 
뭐 쓸 필요도 없지. 그러고 여~ 친척들이 있으마 그거 알마 날보고 
눈치 본단 말이야.
그래 여게 통해가 왔는데 그래 갈 수 있다 카거든. 신문을 보니까네. 
노국사람 신문이거든. 노국 꺼를 우리 아들 보고 그래 보니까 한국
에 길이 트이고 뭐 그런 말이 나와. 그래 차차 알아보니까네 신문에 
나왔어. 편지가 요렇게 씨마 어떻고. 어떻게 쓰야….
그래 그거로 틈을 타서 내 친척은 친정에 많지만은 이 집에는 이렇
제8장. 23년간 5가지 일을 전전한 권영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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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많지 않거든. 그래 우리 거 먼저 한 사람이 나가갈래 그래 영감 
고향에 거~ 가서 물어봐 달라 했지. 그 동네 가서 물어보라 했지. 
갔다 오디 아무도 없다 하는 기라. 그레 내가 “야! 조카들이라도 하
나 살았을 낀데? 그렇게 다 가야?” 했지.
그래 북선신문을 보면 이 한국 땅은 미국놈이 다 팔어먹고 사람 다 
직이고 없다 하이. 나는 땅은 팔아도 사람이야 남았겠지. 그래 생각
했지요. 그래하다가 편지를 해보인까네. 시가집을 알아보게 하이 아
무도 없어가. 동네 이사를 다 갔어. 시숙사람은 다 죽고 조카들은 먼 
데 이사를 나갔데요. 그래 몬 찾아가지고 그래 할 수 없이 내 친정
으로 해봐야 되겠다.
그래 해보이까네 참 내 동생이 받아가지고. 친동생. 그래 여~ 3년 
전부터 몸이 아파여. 그것도 아버지도 없이 콩나물, 콩 이파리 죽 그
런 것도 믹이고나마 얻은 그거로. 내 사할린에 떠난 뒤에 그래 거~
로 엄마 젤 영(令) 없고 참 불쌍해서 그런데 와보인까네. 그래 그 
사람이 우리 동생이 내 편지를 받아가지고 초청했어. 저녁에 되인까
네 차가 하나 왔더라요. 우리 동상 집으로. 들어왔는데 “그래 어디서 
왔노?” 카이….
이파리 떠난 뒤에는 우리 시집에 하고 알 길이 뭐 있노? 내 소식 없
지. 영감 소식 없으이까네 시가하고는 이래 됐뿟지. 시어른들 집에 
살았을 때는 살던 집에 왕래를 했는데 시어른 집에 고 우리 집에 조
카들이 뭐 있겠어.
그랬는데 차가 하나 왔더라요. 우리 동생 문전 앞에. 그래 “왜 왔는
고?” 물으니까네, 청에서 왔다 하더란다. 청에서 어쩌고 왔는가 물으
이까네 사할린 소식이 왔다. 그 편지 내놓으라 카더라요. 우리 조카
가. 내 가고 난 기지. 조카 나 몰라요. 그린께 날 찾아서 왔더라요.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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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거~ 사진하고 다 빼가 가지고 초청을 했더라고, 그래 와가지고 
내가 70살에 90년도 친척 방문와가 스물 이틀 있다가 갔어. 그때 혼
자.
지금은 아드님도 영주 귀국한 거 아닙니까?
왔지. 그래가지고 와서 참 동상 집에도 가보이 뭐 이 전에는 요만한 
땅도 없었어. 내 갈 때. 그래 내가 돈도 쪼깨슥 붙이주고. 어떻게 사
는고? 아버지도 없지. 우야노? 친동생은 한국에 살았지. 한국에 가 
낳은 거 내가 10살 묵는 거 보고 갔지. 내가 스물한 살에 갔으니까. 
그래 거 내 시집가서 그래 가 고래 놔두고 갔지. 큰 아~는 사망되고 
없더라고. 그래 엄마 혼자서 우리 서이 키아가지고 그 고생하다가.
할아버지는 몇 살에 몇 년도에 돌아가셨습니까?
해방 후에 1971년도. 오십 여덟에. 그때 난 오십 한 살쯤 됐고. 자
식들도 좀 컸어. 커서 둘이 다 대학 갔지. 영감은 그 양주 술이 참 
독합니다. 그거 묵고 타 죽어. 술에 타 죽어. 술병에 죽었지. 죽어나 
사나 술이나 생각하지, 가정 생각도 모르고.
그거 안 내삐리고 내가 살아놓으이 자슥들한테도 방해가 되고 만다
고. 내삐린 사람은 좋은데 나는 못 내삐릿단 말이야. 노국사람들은 
대번에 그래 할 건데. 그래. 노국여자들은 그런 남자하고 어떻게 살
라 하노. 단번에 내삐리라 카지. [하지만] 거 어떻게 내삐리겠노? 부
모들부터 그렇게 교육을 받은 거 때문이지. 내가 술 때문에 친정으
로 도망갔거든. 그래 가이 엄마가 하는 말은 “니는 그 집 거석이다”
고. 귀신.
제8장. 23년간 5가지 일을 전전한 권영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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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미술작품(대창양로원)
제9장. 누나와 함께 평생 바느질하며 살아온 이병인
- 징용자의 아들로 사할린에서 태어나 -
대창양로원 간판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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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인 연보
ㆍ1930년대 후반 - 아버지, 어머니 결혼 후 사할린 이주
ㆍ1939년(0세) - 사할린에서 누나 출생
ㆍ1943년(1세) - 사할린 예스고르스크 출생
ㆍ1956년(13세) - 아버지 사망
ㆍ1960년(17세) - 9학년 졸업 후 바느질공장 입사
ㆍ1998년(55세) - 25년 노동생활 마감
ㆍ1998년(55세) - 관광단 일원으로 한국 첫 방문
ㆍ2005년(62세 - 누나와 함께 한국 영주 귀국, 고령 대창
양로원 거주
ㆍ2014년(72세) - 현재 고령 대창양로원 거주
1. 징용 간 아버지, 사할린 예스고르스크 출생 
아버지는 어떻게 일본으로 갔습니까?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일본사람이 사할린으로 데리고 갔어. 아버님 
고향은 경상북도 영천군 임고면. 아버지는 거기 일본에 가셔갖고 화
태로 갔지요. 화태 가서 아버지는 탄광에서 일했어요. 여기서 간 사
람들 탄광에서 일 했지요. 일본사람들이 개발해서 자꾸 넣었잖아요. 
새로 자꾸 열고 열고 열고. 월급을 받고 일했는지 모르겠어. 월급은 
좀 줬겠지요.
아버지가 일했던 탄광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크라스모고스토. 거긴 난 안 가봤어요. 탄광에서 일한다면 석탄 캐는 
제9장. 누나와 함께 평생 바느질하며 살아온 이병인
 
295
거 아닙니까. 힘들지요.
어머니하고는 사할린에서 결혼을 하셨습니까?
아니라. [한국] 여기서. 결혼 벌써부터 해가지고 간 거지. 결혼하고 
처음에는 어머니가 같이는 안 갔죠. 처음에 아버지 갔죠. 그 담에 어
머니 갔죠. 오래 있다가. 결혼하시고 자식은 안 낳고 아버님만 바로 
가신 거지요.
형제는 몇 남 몇 녀입니까?
하나 더 있어. 누나 있어. 이선자. 단 둘이. 다 사할린에서 났어. 난 
1943년생. 한국나이로는 71세. 누나는 39년생이라. 4살 위. 내하고 
누나가 태어나던 1939년, 1943년 그때만 해도 대동아전쟁 일어나서 
한창 전쟁을 치르던 때니까 어려운 시기요. 그때 고단했죠. 누님이 
39년생이니까, 어머니가 최소한 38년도에 사할린으로 가신 거 아닙
니까. 아버님은 더 일찍 가셨겠죠.
화태 가서 태어나서 자란 동네가 생각납니까?
화태서는 일본말로 나이요시. 러시아어로 예스고르스크. 도시입니다. 
도시라 해도 농촌 같아요. 인구도 얼마 안돼요. 거기서 태어나셔서 
학교도 거기서 다녔어요. 사할린은 초등학교를 7, 8살에 들어가요. 
사할린은 7년 고정되지. 그 다음엔 중학을 가지. 12학년 학제는 나
중에 했어. 나중에 만들었어요. 11학년. 그거 마치고 대학을 가고. 
내가 학교 다닐 때는 그런 게 없었어요.
초등학교 마치면 중학교는 몇 년이었습니까?
3년. 중학교 3년 마치면 대학교 가고. 고등학교는 없었어요. 내가 
43년생이니까, 일본이 손을 들었을 때는 2, 3살 됐고. 그러이 당시 
상황은 잘 모르지요. 초등학교 들어간 것도 러시아로 넘어간 뒤고요. 
그럼 완전히 러시아 방식으로 따라갔죠. 일본사람은 그런 거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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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람은 다 나가고.
무슨 과목으로 공부했는지 기억납니까?
우리 학교는 거기 뭐. 조선말로 뭐 잘 모르겠다. 처음에 러시아 말도 
좀 배우고. 또 뭐고? 산수 하는 거. 또 모국어. 그때도 좀 한국어 있
었어요. 배우는 과목이. 북조선 과목이라. 그게. 그러니까 한국말이 
요게(여기) 말하고 좀 다르잖아요. 거기 한국말 가르치는 교사도 북
조선에서 왔었지요. 학교는 러시아 방식인데, 과목은 다 러시아 과목
이라.
초등학교 다닐 때 조선인 학생들도 있었습니까?
조선사람들도 많고. 학생들. 다른 나라 뭐고? 다 따로 있고 뭐. 민족
이 있잖아요. 그 사람들이 공부하죠. 일본사람은 없고. 다 나갔죠.
사할린에 태어나셨는데 어떻게 한국말을 잘하십니까?
여기서 배웠지. 가정에서는 조선말을 했으니까.
2. 아버지 별세, 1950년대 후반의 삶
아버지는 해방 후 어떤 일을 했습니까?
아버지는 탄광일 계속하다 얼마 안 살다 죽었어요. 내 13살 때인가? 
그때 내가 아직 초등학교 마치지 않았어. 왜 그리 일찍 돌아가셨냐 
하면 아파가지고. 장기에 암이 생기가지고. 그 어려운 세대를 고생고
생 하고 사셨는데, 그런 영향이 있지 않았습니까. 어려웠지요. 많이 
어려웠어요. 어머니도 오래 못살았어요.
아버지 돌아가신 후엔 어떻게 사셨습니까?
당시 내 13살이고 누나가 17살. 어머니하고 식구가 세 사람이지요. 
제9장. 누나와 함께 평생 바느질하며 살아온 이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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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가 더 어려웠어요. 그 때 다 나이 어리고 뭐 아무 것도 없었었
어요. 어머니도 그때 국가에서 일할 건 없었죠.
어떻게 먹고 살았습니까?
어떻게 살긴… 뭐 팔아가지고. 땅 같은 거 파가지고 팔아가지고. 뭐 
이렇게 빙빙 돌았지요. 살기 위해 가지고. 뭐 만들어가지고 팔고 뭐. 
과자 같은 거 만들고. 이런 먹는 거 만들어가지고 팔고 그랬잖아요. 
어머니가 가정에서. 그 때는 그거 팔아봤자 먹고살기가 어렵잖아요. 
러시아에도 어려운데 그때에. 전쟁 후인데 많이 어려웠어요.
어머니는 공장에는 다니지 않았습니까?
공장 같은 거 없는데. 거기에. 아무 것도 없어요. 일본사람은 뭐 하
던 거 다 내삐리버리고 뭐. 일할 데는 없고 뭐. 그러니까 고생했죠. 
그러니까 손 가지고 조금씩 만들어가지고 팔고. 그렇게. 또 땅에서도 
만들어가지고 팔고. 그러이 나나 누님은 공부도 많이 못했어. 난 9
학년까지밖에 못했어요.
사할린 사시면서 조선인하고 같이 어울려 살면서 상호 부조하는 일
도 있었습니까?
집안일 생기면 도와주고, 결혼식이나 장례치를 때 축의금, 부의금 하
는 그런 거 없어요. 이웃에 조선사람들끼리 모여서 같이 지내고 모
임하고 이런 거 없었어요. 아버지, 어머니가 사셨을 때는 그런 게 좀 
있었어요. 큰 일 나면은 집에 위로해주로 다니고 그런 게 있었죠.
사할린에서 개인이 사는 집은 어떻게 마련합니까?
다 나라 꺼요. 집도 나라 꺼. 건물도 나라 꺼고. 개개인이 사는 집은 
나라에서 다 받아야죠. 받아가지고. 살면서 집값을 물어야지요. 해마
다.
개인 소유의 집은 없습니까?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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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개인 집 사는 사람 있잖아. 자본주의 국가 넘어가서 사고팔
고 하지. 그 당시에는 파는 거 그런 건 없었어. 국가 꺼요. 다. 지금 
집도 안 만들어. 건축해야 되는데 건축도 안하고 다 내삐리 버리고.
3. 10대부터 바느질공장 노동
학교 9학년 졸업 이후에는 어떤 일이라도 했습니까? 
9학년을 마치면 나이가 17, 18세 되잖아요. 그때부터 일은 조금 했
지요. 어디 할 데도 없고. 그 때는 러시아도 형편없었지요. 뭐 일을 
할 데도 없고. 일 해도 조그만 일 하고. 바느질공장에서 박음질 했
죠. 바느질. 재봉. 거기도 재봉이 있었잖아요. [공장] 조그만 거. 바
느질은 옛날 방식으로 손바느질이고. 미싱. 거기는 뭐 의복 같은 거 
만들고.
사회주의 국가 아닙니까?
사회주의 국가니까, 사회주의 국가 만드니라고 얼마나 애썼어요. 그
러니까 발달이 안됐잖아요. 그러니까 일감 부족하고. 다 복장일하고 
그랬잖아요. 내가 하는 재봉일 그것도 나라에서 한 한 거지요.
재봉일 하셨던 공장 이름 생각나세요?
이름 없어요. 간판 그런 거 없어요. 사장은 있지요. 책임자. 거기서
는 무슨 부서나 작업하는 구역이 없어요. 조그만 공장인데 구역은 
무슨… 모스크바 같은 데는 500명 그런 규모가 있지만, 그런 덴 없
어요. 한 열 몇 명 했지.
그럼 옷을 만들려면 천을 자르는 사람이 있고 바느질하는 사람이 있
어야 하는데 무슨 일을 했습니까?
제9장. 누나와 함께 평생 바느질하며 살아온 이병인
 
299
바느질만 했지요. 학교 졸업한 17, 18부터 거기서 그런 일했지. 월
급은 돈 쪼매 밖에 못 받았어요. 한 650원이나. 그러니까 작지요.
러시아에서도 일을 하면 해마다 월급이 올라갑니까?
러시아는 그런 거 없어요. 일 얼마 했으면 얼마 했는 거 주죠. 얼마
만큼 했는 거 주지. 그래도 물가라는 게 있잖습니까. 배추가 비싸지
면 월급도 올라야 되잖아요. 그런데 여긴 그런 거 없어요. 월급 올라
가는 그런 거 없어요.
처음 일한 월급하고 20년 일한 후의 월급하고 똑 같습니까?
거기는 돈 올라가고 그런 거 없어요. 일 얼마 하면 돈 주고. 많이 하
면 많이 주고. 조금 하면 조금 주고.
25년이라는 시간 동안에 바느질 미싱기계도 변화가 상당히 있었겠
죠?
처음에는 이쪽 손으로 하는 거 좀 다르게 생겼잖아요. 마감에 좋은 
건 아니고. 러시아 미싱은 말 할 거 없어. 상당히 좋지가 못합니다. 
외국 껀 안 들어오고 다 러시아 미싱이니까 좋지 못해요. 마감 만들
어주면 뭐 별로 좋은 건 없어요.
누님은 무슨 일 했습니까?
누나도 바느질했지요. 같은 공장에서. 둘이 같이 일해도 그 일 가지
고는 먹고 살기 바쁩니다. 누님이 좀 더 벌었죠. 더 벌어도 러시아에
서는 그게 작은 돈이라. 공장도 작고 일거리도 그래 없고. 거기는 뭐 
도시라 해도 농촌 같아요. 그러니까 일거리도 그렇게 없습니다.
하루에 몇 시간 일했습니까?
8시간. 아침에 9시부터 오후에 6시까지. 아침밥은 집에서 먹고 가고 
점심도 집에서 묵었지요. 거기서 25년 일했어요. 한군데서만 25년을 
죽 일했지. 물론 연금도 나오지요.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300
 
바느질 공장에서 일하시면서 결혼도 하신 겁니까?
난 아무 것도 안했어. 난 가족도 아무도 없어요.
러시아가 발전하면서 큰 공장도 생겼습니까?
큰 공장은 요즘 공장이 크고 그렇죠. 이런 작은 도시는 작고. 조그만 
도시에서는 뭐 발전이 안돼요. 자꾸 낙후돼가꼬.
어릴 때 본 한국 미싱은 발 동력을 이용하던데요?
그렇게는 하지만 좋진 못해요. 다른 나라 미싱 같지가 않애. 일본 거 
좋은데 그런 건 안 들어와요. 그런 건 큰 데 공장에 좀 들어오고 이
런 작은 덴 안 들어와요.
25년 일 마칠 때 연세가 몇이었습니까?
55세에 나왔습니다. 1998년 무렵쯤 되는데요.
4. 민족 차별, 이동 제한
큰 곳으로 가서 돈을 많이 벌어볼 생각은 없었습니까?
그때 우리는 어디 가야 하면 바빠요. 러시아에서는 잘 안 보내줬어. 
잘 가지도 못해. 자유가 없습니다. 자꾸 이렇게 붙들어가지고. 요기 
가지마. 저기 가지마 이래.
한국의 경우 성인이 되면 지도자 뽑는 투표할 수 있는 주민등록증이 
나오는데, 러시아에서도 그런 거 만듭니까?
그때 우린 여권. 파스포트(passport)라고 하는데 그거 가지곤 어디
도 못가. 그건 징역살이라. 그거 가지고 살았잖아. 다른 데는 가지 
못해. 징역살이 한가지라. 일본식이나 러시아식이나 한 가지라. 그러
이 큰 데 가서 일해서 돈 벌겠다는 이런 개인 욕심이 있어도 허락 
제9장. 누나와 함께 평생 바느질하며 살아온 이병인
 
301
안 해주죠. 그때 조선사람들은 일본사람들한테도 학대받고. 러시아사
람들한테도 학대받고 그랬잖아요. 러시아사람들도 조센징이라 조선
놈이라 놀리고 그랬잖아요. 암 것도 못하고 뭐. 아무 것도 못하게 
뭐.
공장에서 러시아사람도 같이 일을 했겠네요?
러시아 공장인데. 조선사람들은 아무리 능력 있고 머리가 좋아도 소
용없어. 어려워요. 지금은 조금 올라갈 수 있지만 대학을 꼭 나와야 
돼요. 대학을 꼭 나와야 좀 올라가죠.
그땐 대학도 못가구로 했잖아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북조선으
로 나간 사람도 많아요. 공부할라고. 북조선에 가서 대학교 공부하겠
다고 나간 사람 많아요. 나가면 사할린 나가면 못 와요. 북조선에 나
가면 그만이라. 거기도 징역살이라. 거~ 가면 어디도 가지도 못해요 
붙들어가지고. 거기 가면은 대학 나와 가지고 거기서 일하잖아요.
어릴 때 북조선 가면 좋다고 선전 들었습니까?
그렇게 했죠. 선전 많이 했지. 지~(자기) 사람도 안됐는데 뭘 데려
가. 북조선 사람은 북조선 사람 데려가야지. 남조선 사람들 어떻게 
데려가.
사할린에 평생 사시면서 어려운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아무 데도 댕기질 못하고 했는데 어렵지요. 얼마나 힘들었어요. 전쟁 
후에는 먹을 거 없잖아요. 러시아에는 발달도 안 되어 있잖아. 먹을 
것도 없지. 고단했죠. 그런데다가 어디 가지마라고 다 붙들어 놓고. 
경찰이 가도 안주요. 이래가지고. 저기 가지 마라. 여기 가지 마라. 
그러니까 조선사람들이 젊은 사람들이 북조선으로 나가뿟잖아. 얼마
나 나갔다고. 그렇지 않으면 안 나가는 건데.
조선사람도 ‘큰땅’이라 일컫는 러시아 땅으로 가기도 했습니까?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302
 
26)
 소련이 러시아 등 16개 국으로 독립국가연합(CIS)을 형성한 것을 말한
다.
간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러시아 [빠스포트] 요거 받아가지
고 러시아 땅에. 그거 있어야 러시아 땅 가지. 그거 없으면 못가요. 
그러니까 일본사람이나 러시아사람이나 한가지라고. 누르는 거는. 여
기 가지 마 저기 가지마라 하고. 가지 못해요. 가겠다고 해도 소용없
어요. 딱 붙들어가지고.
그래서 다른 데 못가고 한군데서만 살았습니까?
거기만 살았지. ‘오하’라는 곳에서 좀 살았죠. 태어난 곳은 나이요시. 
유즈노사할린스크랑은 멀어요. 멉니다. 거기서 태어나가지고 오하에
서는 재봉일을 하면서 산 거죠. 태어난 곳보다 오하 여기서 더 오래 
살았지.
거기 사시면서 조선인이라는 것 때문에 가장 차별당한 건 어떤 것입
니까?
그건 차별 한 가지 아닙니까? 여기 가지마라. 저기 가지마라. 대학도 
가지마라. 차별 아닙니까? 이렇게 누르잖아. 일본사람이나 러시아사
람이나 한가지라. 대학교도 마감에 갈 수 있었지. 이거 자본주의국
가. 사회주의국가 없어지고. 그 다음에 대학에 공부하러 갔잖아요. 
사회주의 국가 있을 때는 공부하러 못 갔잖아.
소련 지도자 중에 노벨상 받은 사람 있잖습니까? 우리나라 노태우 
정권 시절에 우리나라랑 국교를 맺은 러시아 대통령. 고르바초프. 그 
사람이 나간 다음에 자유 있었지. 옐친 대통령 앉아가지고. 독립하고 
공화국 나가 가지고.26) 그 다음에 열친이 들어오고. 그 다음에 자유
가 있었지. 대학에 공부할 수 있고. 이동도 자유롭고. 러시아 파스포
트 있는 사람 그 사람들만 갔지. 대학은.
제9장. 누나와 함께 평생 바느질하며 살아온 이병인
 
303
러시아 파스포트는 조선사람 중에 어떤 사람만 허용했습니까?
그땐 파스포트 다는 안줬지. 그 무렵부터 큰땅에 가서 대학공부를 
하고자 하면 파스포트 허락을 받아서 가고. 직업 갖기 위해서도 그
걸 받아가지고 큰땅에 간 사람도 일부 있었지요. 러시아 파스포트를 
언제 받을 수 있었는가 하면은 1994년. 그 때는 좀 받았지요. 그 앞
에는 받을 수 없었어요. 애 먹이고. 1994년도면 열친대통령 때지요. 
그 사람 앉아가지고 대학교도 공부하러 가고 다 했잖아요. 1994년 
같으면 러시아하고 국교가 맺어지고 편지도 하던 그 시기입니다. 그 
앞에는 말 할 것도 없었고. 그러니까 북조선으로 공부하러 다 나갔
잖아요. 대학교 공부하자고. 큰땅에는 안 보내주끼네.
5. 자본주의 이행기 불만, 저축 손실
일하고 받은 월급 중 일부를 저축하진 못합니까?
조금 할 거 있죠. 조금 해봤자 소용없어요. 조금 다 뺏어버리고. 이
거 문제가 어떻게 되냐면, 이거 자본주의국가 넘어가잖아요. 넘어가
니까 저금도 다 없어져뻐려. 그렇게 되어버려. 조금도 줄 생각을 안 
해요. 자본주의국가 넘어가니까 그것도 싹 나가뻐리. 자본주의국가 
만들자고 그거 뭐 사람 압박하는 건 한가지라. 돈 없애뻐리고. 사람
들 그 때 얼마나 울었다고. 돈 가치가 떨어져가지고. 그때가 1994년 
그 무렵이라.
주민들이 불만이 있었겠네요?
불만이라. 좋지 못했지. 자본주의국가 만들어도 아직 자본주의국가 
썩 안됐잖아요. 공장 같은 것도 다 일 안하고. 아직 뭐 조그만 공장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304
 
같은 거 다 뿌서지고 잠가뻐리고 그렇게 하잖아요.
일할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아니면 물건이 잘 안 팔려서 그럴까요?
모르겠어요. 잘 안 팔려서 그런 건지. 러시아 이제 만들려면 아직 멀
어. 오래 있어야 돼요. 공장 새로 만들어가지고 제품 만들어가지고 
팔려면 아직 멀어. 자동차 공장도 제자리에 서있는데 뭐. 자동차 1
년에 한 대 나올까 말까 그런 공장인데요.
큰땅에는 가 보셨겠네요?
하모. 두 번 갔다. 1994년 이후에 다녀왔지. 그땐 모스크바 여행 다
녀왔지요.
6. 한국 방문 및 영주 귀국
한국에는 몇 년도에 들어왔습니까?
7년 동안 살았어요. 2005년도에 영주 귀국했지요. 그 전에 한국 관
광을 왔죠. 98년도에. 한 일주일 있다 갔죠. 1995년도니까 바느질공
장 일 마치고 나서.
그때 첨 한국에 오시니까 기분이 어떻던가요?
러시아에 비해서 발달이 더 됐잖아요. 러시아는 그저 한 자리에 서
있었잖아요. 꿈쩍도 모하고 이렇게 한자리에 서 있었잖아요. 한국 들
어오니까 한국은 발달이 됐잖아요. 러시아는 발달을 못하고 한자리
에 서 있었어. 그러니까 차이가 많았잖아요. 그러니까 러시아 어떻다
는 걸 알아요. 발달도 안 되고 아무 것도 안되고 지 자리에 서있었
잖아요. 지금 조금 발달되고 가잖아. 자본주의 만들어가지고.
어머니는 몇 살에 돌아가셨습니까?
제9장. 누나와 함께 평생 바느질하며 살아온 이병인
 
305
69세. 69세면 장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찍 돌아가신 것도 아니
고. 아버지보다는 오래 사셨지요. 아버지는 54세에 돌아가셨죠. 두 
분 두 살인가 차이가 났습니다. 아버지 죽고 어머니 혼자 20년을 사
셨지요.
아버지나 어머니가 생전에 조선땅 많이 밟아보고 싶어 하셨죠?
다부 가자해도 못 가잖에. 러시아 땅도 댕기지 못하는데 조선이라는 
게 뭐요. 러시아사람은 댕깄지만. 러시아사람들 못됐어.
아버지 형제분들도 계셨죠?
없어요. 그럼 영천에 고향에 삼촌이 있고 고모가 있고 그런 말은 했
어요. 고향이나 어딘가에 지금 살고 계실지도 몰라요. 살지만 다 몰
라요. 다 죽고. 나이가 얼마요. 소식은 들었죠. 고향 소식을. 요즘에
는 자손들이 있어도 다 도시로 나가 살고 흩어지잖아요. 아마 아버
지가 태어난 그 고향에는 아버지 알고 계신 분들은 다 돌아가셨을 
거고. 먼 촌(寸)만 살고 있죠. 18대, 18촌이라. 나 먼 촌이라. 빨리 
왔으면 만났죠. 빨리 못왔으니까.
아버지 고향에는 가봤습니까?
가봤죠. 먼 촌만 살고 있어. 제일 가까운 게 6촌. 4촌은 아무도 못찾
았습니다. 아버지 형제 자식인데. 아버지 형제들도 있겠지만, 못 만
나고 먼 촌은 찾았어. 4촌은 없대요. 6촌만 있습디다. 왕래는 합니
다. 내한테 동생 되죠. 명절 때 추석에 한 번씩 갑니다.
사할린에서 가장 가까운 친척은 있었습니까?
없었지. 아버지 혼자서 왔는데, 친척이란 건 안 왔어요.
외가는 어디입니까?
사기. 영천 사기. 임고면은 아니지. 그 이웃인가? 외가댁은 안 갔어. 
아무도 없어요. 어머니 외삼촌은 어머니의 남자형제이므로 그 자식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306
 
은 나하고 외사촌이 되잖아요. 어머니 형제분이 계시면 그 자손들이 
있을 테지만 못 찾았어요. 이래 되이까 누가 누군지 모르지.
어머니 생전에 고향이 어디이며, 형제가 누구누구고 그런 걸 기록만 
남겨놔도 찾아갈 수 있을 텐데요?
어머니 형제간은 제자리에서 안 살잖아요. 나가가지고 살고. 그렇게
만 해놔도 그 마을에 가서 생존해계신 어른들한테 이름 내밀고 하
면… 살긴 누가 살지만 몰라요. 처음 한국 오면서 고령 여기로 왔어
요.
여기 오신 후 사할린에는 가보셨습니까?
한 번 가봤어. 해마다는 못가고. 사할린에 가족이 없으니까 특별히 
만날 사람도 없네요. 자식도 없고. 가면 거기 아는 사람 찾아가 만나
고 오죠.
 
307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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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3-05LH04022013김옥저001
ㆍ3-05LH04022013김옥저002
ㆍ3-05LH24012013곽병수001
ㆍ3-05LH24012013최숙이001
ㆍ3-05LH24012013장계분001
ㆍ3-05LH26012013유유원001
ㆍ3-05LH28012013권순애001
ㆍ3-05LH28012013권영출001
ㆍ3-05LH31012013이병인001
 
309
[찾아보기]
가라호도(가라후토) / 276
가마부꾸 / 31, 33, 276, 277
갈바사 / 248, 249
건축부 / 65, 76, 77, 78, 201, 
222, 261
검은일 / 82, 92, 106
검은일꾼 / 82
고르바초프 / 113, 114, 301, 
302
고사리 / 86, 89, 131, 139, 
253, 262
고일죽(高一竹) / 33
공동묘지 / 93, 95
공민증(公民證) / 53, 102, 
104, 112, 253, 255, 257, 
258
곽병수 / 149
구르빠(group) / 260
군도(軍道) / 211, 215
군부(軍府) / 39, 173, 200, 
208, 212, 214, 215, 226, 
227, 237
권순애 / 237
권영출 / 271
권오석 / 133
기제(忌祭) / 92, 255
김옥저 / 91
나이부찌 / 216
나이요시(市) / 295, 302
나찰리꾸 / 195 
남화태(南樺太) / 237, 238, 
240, 265
내지(內地) / 29
네벨스크 / 272, 276, 282
노국(露國) / 136, 172, 288, 
290
노국공민증 / 258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310
 
노국말 / 139, 146
노국사람 / 172, 264
노국학교 / 176, 242
노다 / 30, 31, 33, 43, 48, 57, 
64, 68
노다초등학교 / 34, 302
노태우 / 113
니수르다 / 157
 
땅집 / 262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 / 29, 
135, 295
대창양로원 / 27, 84, 268, 295
도요하라 / 158
도쿄 / 23
돌잔치 / 95, 96
동경(東京) / 22, 30, 32, 111, 
168
돌린스크 / 144, 214, 226, 
227
두릅 / 87, 89, 263
라스돈 / 226, 227
러시아 / 229, 238, 254, 259, 
269, 295, 296, 299~301
러시아공민증 / 53, 103, 104, 
112
루불(RUB) / 96
마카루 / 265, 266
마까로브 / 190
마스제르 / 194
망향가(望鄕歌) / 123
머구(머위) / 32, 281, 287
모스크바 / 80, 81, 92, 100, 
103, 183, 304
모집 / 36, 46, 47, 51, 56, 64, 
119, 124, 134, 165, 167, 
168, 177, 245, 267, 271, 
273
무국적(無國籍) / 102, 104, 
257, 258
무국적공민증(無國籍公民證) / 
101, 102
찾아보기
 
311
미나리 / 38, 89, 262, 279
민중국(民衆局) / 95
바느질공장 / 73, 193, 298, 
304
바자르 / 88
바따이스키 / 227
비에즈그라즈단스키 / 104, 
106
부산(釜山) / 135, 151, 160
북선(北鮮) / 208, 216, 287, 
289
북조선 / 216, 256, 257, 296, 
301
북조선공민증 / 102
북한 / 118, 192, 252, 256, 
264
북해도(北海島) / 135, 276, 
287
북화태(北樺太) / 237
브리가다 / 79
브이꼬프 / 181, 182
비공민(非公民) / 257
사성(四星) / 63
사지크 / 176
사하라병 / 229
사프라니 / 174
사할린(Sakhalin) / 26, 28~30, 
34, 37, 43, 47, 52~57, 64, 
66, 74, 136, 150, 166, 
169, 190, 211, 214, 237, 
240, 255, 266, 272, 274, 
277, 294
산나물 / 86, 87, 262, 263
산판 / 51, 59
삼판 / 157, 242, 245
서류방 / 25, 29, 31, 48, 59
센방 / 137, 138
센탄파 / 171, 172
소련 / 183, 193, 200, 210, 
213~219, 227~229, 240, 
258
소련공민증 / 258
스메나 / 248, 249
시루떡 / 86, 264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312
 
시베리아 / 57, 59
시베리아수용소 / 57
시즈오까 / 188
시카또르 / 76, 78, 79
아니와 / 152, 153
아르마또르 / 76~79
아르산베르 / 227
아르시스키 / 227
아오모리 / 30, 168
아저우 / 227
안산 / 268, 269
약담배 / 156, 161, 162
연금 / 177, 179, 180, 193, 
195, 226~228, 250~253, 
270, 284, 286
영주귀국 / 162, 163, 185, 
192, 202, 205, 229, 266, 
268~270, 287, 304
오도마리 / 29, 87
오사카 / 134, 135, 236, 237, 
239, 274, 275, 276
오하 / 302
오징가이샤 / 265
요양소 / 117, 228, 268, 269
유즈노 / 52, 182, 266
유즈노사할린스크 / 34, 64, 
65, 69, 70, 135, 158, 181, 
266, 302
유유원 / 205
이병인 / 294
이수억 / 256
이승만 / 105
이와테현 / 24
일본 / 21~27, 34, 36~40, 51, 
56, 57, 159, 173, 185
일본말 / 100, 171, 175, 193, 
238, 259, 274
일본군 / 276
일본학교 / 136, 137, 241
일제시대 / 60, 134, 259, 266
장계분 / 187
정신대 / 149, 150
제지공장 / 191, 218, 235, 
찾아보기
 
313
245, 248, 250
조선말 / 28, 37, 40, 100, 
101, 146, 259, 260
조선사람 / 254, 255, 258, 
263
조선인 / 296, 302
조선학교 / 52, 57, 101, 137, 
190, 191, 242
조요 / 155
진영(陣營) / 276
집체(集體) / 145
징용 / 133, 134, 155, 293, 
294
최숙이 / 165, 166
갈바사 / 248, 249
큰땅 / 56, 58, 59, 81, 142, 
197, 198, 20, 205, 226, 
301, 303, 304
타코베야 / 37
탄광 / 134, 138, 147, 
168~172, 190, 208
텃밭 / 262, 286
특무부 / 54~57
하바로브스크 / 114~176
하코다테 / 276
한국말 / 101, 138, 139, 146, 
168, 176, 258, 259, 296
한인 / 20, 66, 67, 70, 83, 89, 
172, 183, 255, 266, 285
혼서지(婚書紙) / 63
홈스크 / 20, 66, 67, 83, 89, 
90, 115
홋카이도 / 135, 168
화태(樺太) / 124, 151, 161, 
167, 169, 175, 185, 
211~219, 223~226, 230, 
231, 237~241
An Oral Life History of the Korean Diaspora in Sakhalin, Russia
by Gyeong Yong Bak
Copyright ⓒ SSK(Social Sciences Korea) Multiculture and Diaspora 
Project,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Published by BookandWorld. Daegu, Korea
재외한인 구술생애사 총서
12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구술생애사
2014년 6월 30일 초판 발행
지은이 박경용
펴낸이 김영모, 
펴낸곳 책과 세계  등록 | 2007년 2월 2일, 제2010-000004호
주소 | 702-832 대구광역시 북구 복현동 6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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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8-89-94255-45-3   94330   ₩1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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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저서는 2011년도 정부재원(교육과학기술부 사회과학연구지원사업비)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습니다(NRF-2011-330-B00118).